웃음이 묻어나는 편지 - MBC 예술단 엮음 하나 추억이라는 이름의 웃음여행 총각은 개를 무척 좋아하나봐 이종환 형님, 그리고 최유라씨 혹시 개를 좋아하십니까? 저는 무척 개를 싫어합니다. 그래서 그 개하고 얽힌,정말 싫었던,다시 생각하기도 끔찍한 그런 일을 청취자 여러분들께서는 절대로 겪지 말라는 의도에서 이렇게 서두를 풀어볼까 합니다. 그러니까 이야기는 94년1월 제가 여러가지 이유로 인하여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세상에서 가장 힘든 작업인 백수시절을 보내고 있을때 이야기입니다. 집에서 계속 밤만 축내는 것도 눈치 보이고 또한 한겨울이라 마땅히 다닐 곳도 없던 터라 할 일 없이 이친구 저친구 집을 전전하며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을 때 누군가가 아침에 신문배달을 해보지 않겠느냐며 아침에 운동도 되고 살도 빼고 돈도 벌고 좋지 않겠느냐는 제의를 했습니다. 썩 내키지는 않았지만 그래 집에서 놀면 뭐하냐 한푼이라도 벌러서 눈치밥 좀 면해보자는 심정으로 배달을 시작하게 되었지요. 주택 외곽지역과 아파트 중 배달하고 싶은 곳을 고르라는 국장님의 말을 듣고 전 당연히 주택지역을 원했지요.애냐구요? 아파트는 거의가 4-5층짜리 건물이라 계단을 오르내리는 일이 보통일이 아니고 무엇보다고 주택지역은 오토바이가 지급된다는 말에 무조건 솔깃해서 하겠다고 했지요. 1월 그 매서운 눈보라 속에서도 저는 끗끗이 하루도 빼놓지 않고 한달 정도를 돌렸을까... 이젠 웬만한 코스는 눈 감고도 다닐 정도로 익숙해져 있었지요. 그런데 제가 배달하는 지역은 시골동네라 집집마다 개를 키우는 집이 많았지요. 바로 거기서부터 문제가 시작된 겁니다. 어릴 적부터 '견 공포증'이 있는 저는 아침마다 저를 마중해주는 개들이 정말 싫었지요. 시골에선 다 그렇듯이 개를 묶어 놓고 기르는것이 아니기 때문에 아침만 되면 골목골목에서 저를 반겨주는 개들이 어쩜 그리도 많았는지 하루하루를 긴장과 공포 속에서 지내게 되었지요. 오토바이를 타고 지나가면 따라와 물고, 짖고, 왜 나만 그리 미워하는지 개들이 있는 골목마다 가슴을 졸이며 지나가게 되었지요. 정말 더는 못 참겠더군요. 그래서 신문배달이 3년 정도된 친구녀석에게 구원을 요청했습니다. 맨입으로 안된다는 녀석을 라면 한 그릇과 소주 한병으로 요리하고 그 비결을 듣게 되었지요. “개는 말이다. 무조건 기선을 제압해야한다. 처음에 딱 마주치면 절대로 눈싸움에서 지면 안된다. 개한테 시선을 빼앗기면 엄청 피곤해 지는기다. 처음부터 무조건 인상를 쓰고는 한참동안 노려보는 기다. 그러다가 갑자기 땅바닦에서 돌을 줍는 시늉을 하며 아무소리나 큰소리를 지르는 기다. 욕을 하면 더 좋지. 보통 개들은 욕에 익숙해 있거든. 달려가는 거야. 대개 이쯤이면 거의 95%정도는 개들이 도망갈기다. 만약 그래도 도망가지 않는 녀석이 있거든 분명 지능이 모자라거나 겁이 없는 녀석일기다. 그럴땐 가지고 있던 돌을 사정없이 던지는 기다” 하면서 주머니를 뒤적거리며 보여주는데 까만 윤기가 나는 돌맹이를 다섯 개나 가지고 있지 뭡니까? 자기는 전시를 대비해 늘 소지하고 다닌다나요. 이쯤되면 동네의 모든 개들을 평정하고 그 위에 군림하게 될거라고 하더군요. 그러면서 자기를 따라 오라고 하더니만 자기가 배달하는 동네로 데려가더군요. 그 동네 개들은 그 친구만 나타나면 꼬리를 감추고 도망가는 게 여간 부럽지가 않았습니다. 전 그 다음날 바로 실행에 옮겼지요. 개들이 꽁무니를 빼고 도망가는 모습을 상상하면서 말입니다. 혹시나 싶어 주머니에 넣어둔 돌멩이를 몇 번씩이나 확인하고는 만일을 대비해 좀 크다 싶은 것으로 열개씩이나 주머니에 넣었더니 다니기에 불편했지만 승리의 그날을 위해 참을 수 있었습니다. 마음이 든든하더군요. 그날 전 참으로 약육강식이라는 말을 실감했습니다. 처음 만난 녀석은 누런빛이 나는‘코삐’라는 놈이었습니다.오늘도 역시 으르렁거리며 나타나더군요. 조금 긴장은 했지만 전 주머니의 돌맹이를 믿고 녀석을 똑바로 쳐다보곤 눈에 힘을 주었지요. 녀석은 의외라는 듯이 조금 더 크게 으르렁거렸지요. 여기에 질세라 저는 오토바이에서 뛰어내리면서 입으로 궁시렁궁시렁거리며 눈에 더욱 힘을 주고는 녀석 앞으로 한발 한발 다가갔지요. 녀석의 눈빛이 조금 흔들리더군요. 이때다 싶었죠. “이놈 !” 하면서 바닦에서 돌을 줍는 시늉을 하니까 꽁지가 빠지게 도망가는 겁니다. 통쾌했습니다. 이렇게 쉽게 이기는게 어이없었고 그 동안 당한 것을 생각하니 더욱화가 나더군요. 전 그날 만나는 녀석들마다 초전박살, 임전무퇴, 백전백승이었지요. 그러기를 4일 만에 이제는 녀석들이 내 오토바이 소리만 나도 도망가더군요. 전 무척이나 고무되어 있었습니다. 정말 오장이 시원하고 육부가 날아가는 듯했습니다. 아침마다 고민거리가 없어졌고 배달일은 무엇보다도 즐거웠습니다. 개들한테만은 절대적인 군림자였지요. 그러던 어느날 아침에 한창 배달을 하고 있는데 저 멀리서 누가 부르는 것이었습니다. 평상시에 다니면서 저런집에는 누가 살까? 하고 늘 부러워하던 언덕위의 하얀 집, 아주 정원이 넓은 집에서 내일부터 신문을 넣어 달라는 겁니다. 이게 웬 떡이냐! (신문구독 요청을 받으면 수당도 받고 칭찬도 받고 아주 좋은 일이었지요) 그런데 아주머니께서 자기 집에는 개를 3마리 키우는데 저녁에는 개를 풀어 놓는다는 겁니다. 그래도 대문은 잠가 놓으니까 걱정하지 말라며 대문사이에 꼭 신문을 끼워 달라는 겁니다. 뭐가 문제가 되겠습니까. 저는 걱정하지 말라며 잘 넣어드린다고 인사까지 하고는 속으로 웃었습니다. ‘개가 뭐가 무섭나!’ 자신이 있었지요. 저는 그집의 개들을 쭉 째려 보았습니다. 그리고 눈에 힘을 주었지요. 외국산 개라서 그런지 만만치 않게 쳐다보더군요. 전 씩- 웃으면서 속으로 말했죠. ‘며칠만 기다려라. 귀여운 자식들...’ 그리고 배달하기를 며칠. 저는 새로운 습관이 생겼습니다. 그 집은 언덕위에 있어서 아래에 오토바이를 세워두고 50미터 정도를 올라가서 신문을 대문에 끼워두고는 그 집 개들을 노려보고 주머니의 돌멩이를 한번 보여주고 주먹질도 한번하고 돌아서서 집 나무 밑에서 시원하게 볼 일도(꼭 거기가면 소변이 마렵데요)보고 담배하나를 물고는 유유히 하늘을 보고 다시 개들한테 인상을 쓰고는 내려오는 습관이 생겼습니다. 그 날도 신문을 대문에 끼워놓고 개들을 찾으니 개들이 안 보이는 겁니다, 이 녀석들이 다들 자나? 하고 돌아서서 시원하게 볼일을 보고있는데 느낌이 이상했습니다. 갑자기 뒤꼭지가 근질근질한 것이 아닙니까? 얼른 뒤 돌아 보니, 아 글쎄 그집 개들이 어느샌가 제 뒤로 다가와 제가 볼일을 보고 있는 걸 빤히 보고 있지 뭡니까. 순간 뇌리를 스치는 생각-. 아! 기선을 제압해야 하는데... 그러나 기선을 제압하기엔 보던 볼일도 남아있고 자세도 엉거주춤하고 걱정이 앞서더군요. 누가 대문을 열어논 모양입니다. 그러나 전 저를 달래며 ‘침착’,‘침착’을 중얼거리고는 천천히 아주 천천히 볼일을 마치고 뒤돌아섰지요. 그때까지 녀석들은 외국산 개라서 그런지, 아니면 비겁하게 볼일을 보고있는 사람을 공격하지 않으려고 했는지 아무 행동이 없더군요. 그런데 뒤돌아 서자마자 으르렁거리며 하얀 이빨을 드러내는 것이 아닙니까? 하얀 달빛아래 까만 개들의 코에서 뿜어나오는 하얀 콧김에 아찔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이건 장난이 아니다’ 저녀석들 한테 한 번씩만 물려도 최소한 상이용사 내지는 사망신고서 작성하러 동사무소에 사람보내야 할 것 같은 생각에 빠르게 머리를 굴렸지요. ‘이미 기선을 못 잡았으니 어쩌지?’ 그때 주머니의 돌멩이를 생각하게 되었지요. 그런데 아뿔사! 그 동안 동네 개들 위에 주름답고 다니느라 돌멩이가 필요없어서 모두 버려버린 것이 아닙니까? 후회해도 소용없고 유비무한의 정신을 늘 새기지 못한 제 자신을 원망햇지만 지금은 전시상태라 그것만 생각할 순 없었지요. 설령 있다고 해도 송아지만한 개 세마리를 동시에 이길 수는 없을 거라고 생각하고 다리를 조심스럽게 옮겨 봤습니다, 옮기자마자 으르렁거리며 이빨을 드러내는 것이 아닙니까? 등에서 소름이 쫙 끼치더군요. 많은 생각이 머리속을 지나쳐 갔습니다. 그래서 작전을 바꿨지요. 아주 다정한 목소리로 개들을 향해 말했지요. ‘너희들 나와 있었구나. 잘 잤니? 무척춥지?’ 전 평소에 안 하던 애교를 부리면서 살살 내려갔지요. 아, 그런데 이것들이 내가 발만 옮기면 으르렁 거리는 겁니다. 이거 참 보통 큰일이 아니데요. 이럴 줄 알았으면 평상시에 잘 보일 걸 괜히 인상을 쓰고 겁을 준 걸 후회도 해보았지만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설상가상으로 이 녀석들이 내 주위를 돌며 곧 물어버릴 듯이 으르렁 거리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하지만 가만히 있을 수많은 없는 일 아니겠습니까. 저는 가만히 조심스럽게 바닥에 쭈그리고 앉았지요. 그리고 그중 제일 순하게 생긴 녀석의 머리를 천천히 쓰다듬으면서 ‘착하다. 이쁘다.’를 연발했습니다. 역시 개들은 단순하데요. 그러기를 한 10분 지나니까 이녀석이 이제는 경계심을 풀고 눈을 지그시 감고는 내 무릎 위에 머리를 올려놓고 기어오르려고 하는 겁니다. 다른 녀석들도 서로 쓰다듬어 달라고 머리를 들이미는 것이 아닙니까. 말릴 수가 있어야지요. 한 녀석은 연신 저의 얼굴을 그 징그러운 혀로 문지르고 한 녀석은 무릎위에 머리를 기대고 눈을 감고 있고 또 한 녀석은 자기도 해 달라고 자꾸 파고드는 겁니다. 참아야 한다. 어쨌든 살아나가야 한다는 일념으로 그 수모를 참으며 아줌마를 불렀지요. 그것도 큰 소리로 부르면 녀석들 비위를 거스를까봐 작은 소리로 불렀습니다. “아줌마! 아줌마(아주작은 목소리로)” 들릴리가 있겠습니까? 때는 동지섣달 추운 겨울이라 다들 문을 꼭꼭 닫고 잘 테고 더군다나 새벽3시니... 게다가 주위에 집도 없는 언덕이라 난감하더군요. 여기서 오토바이까지는 50미터. 뛰어가면 될까? 안 되겠지. 이녀석들과 싸워볼까? 안돼! 1대3이면 불리하지. 더군다나 무기도 없고 ... 할 수없다. 끈기로 버티자. 그런데 이때! 갑지기 무릅이 시원해지는 겁니다. 꼭 곰같이 생긴 녀석이 제 무릎위에 걸터앉아서는 볼일을 보는 겁니다. 피할 수도 없었습니다. 많이 참았는지 한참 동안이나 볼일을 보더군요. 그리고는 시원한지 제 얼굴을 혀로 문지르더군요. ‘참아야 한다.’ 시간이 흐르고 30분, 1시간, 2시간... 저는 그 언덕에서 2시간 30분 동안이나 개들의 머리를 쓰다듬고 있어야 했습니다. 한쪽 다리는 젖어서 추위에 얼어있고 이놈 쓰다듬으면 저놈이 으르렁거리고 저놈 쓰다듬으면 저놈이 으르렁거리고 저놈 쓰다듬으면 이놈이 으르렁거리고... 정말 죽고 싶었습니다. 못난 제 자신이 얼마나 한심했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어쩝니까. 그때 그 순간에는 개 소변보다도 추위보다도 흉측스럽게 드러난 그놈들의 이빨이 더 무서웠으니까요. 개머리를 두 시간이상 쓰다듬어 보신 적 있습니까? 그것도 세 마리를 번갈아 가며... 전 해냈습니다. 그 추위와 싸우면서도 그 수모를 견디면서도 오직 살아야 겠다는 일념으로 이겨낸 겁니다. 그리고 2시간 30분 정도가 흐른후 나오신 아줌마! 제게 충격적인 말씀을 하시던군요. “총각은 개를 무지 좋아하나 봐요.” 저 머리에서는 오토바이 시동이 꺼지던군요. 기름이 다 떨어졌던 겁니다. 전 그날 주유소를 찾아서 오토바이를 끌고 추위에 얼은 다리 절룩거리며 다시는 개를 쳐다보지도 않겠노라고 맹세를 하고 또 했습니다. ps. 개들을 사랑합시다. 그리고 자주 쓰다듬어 줍시다. 그렇지 않으면 저처럼 평생 쓰다듬을 일을 하루만에 다 하는 수가 생깁니다. 그리고 전국의 신문 배달사원 여러분!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늘 주머니에 돌멩이를 잊지맙시다.
Board 삶 속 글 2023.01.01 風文 R 528
한국대표수필 - 김동리 외 9명 "김태길편" 김태길(1920~2009) 철학자. 수필가. 충북 중원 출생. 서울대 철학과 및 대학원 졸업. 미국 존스홉킨스 대학원 졸업. 철학 박사. 연세대. 서울대 교수 역임. 학자 특유의 논리적인 필치로 수필을 쓴 인물. 수필집으로 "웃는 갈대" "빛이 그리운 생각들" "흐르지 않는 세월" 등이 있고 "윤리와 정치" "한국 대학생의 가치관" "새 인간상의 정초" 등 저서가 있다. 인간의 존엄성과 성실(1/3) 우리는 인간의 존엄성을 믿는다. 그 사람의 사회적 지위나 문화적 업적에 관계없이. 사람은 누구나 그가 인간이라는 사실로 말미암아 존엄하다고 믿는다. 그러나 과연 인간은 누구나 예외없이 존엄하다고 단언할 수 있는 것일까? 세상에는 의리나 염치 따위는 전혀 찾아볼 수 없는 사람도 있으며, 극악무도한 인간도 있지 않은가? 인간의 형태만 갖추었으면 누구나 무조건 존엄하다고 주장하는 것은 한갓 환상적인 낭만주의적 견해가 아닐까? 우리가 추상적인 사고를 일삼는 동안, 우리는 모든 인간이 예외없이 존엄하다는 것을 말하고 싶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파렴치하기 짝이 없는 인간이나 극악무도한 인간에게서 엄청난 피해를 입었을 때, 과연 그 나쁜 인간에게서 '존엄하다'는 것을 실감할 수가 있을 것인가? 어떤 극악무도한 사람을 상상하고 그 사람에게도 존엄한 일면이 있다는 것을 생각할 수는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내가 몸소 겪은 극악무도한 인간에 대해서, 예컨대 나에게 파렴치하고 잔인한 행위를 거듭하여 나를 크게 괴롭히고 있는 사람에게서 존엄성을 실감하기란 매우 어려울 것이다. 그리고, 이 경우에 있어서 '실감'이라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왜냐 하면, '인간은 존엄하다'는 명제는 하나의 사실 판단이 아니라 가치 판단이며, 어떤 가치 판단이 타당성을 가지기 위해서는 '실감'이 하나의 기본적인 조건으로서 요청되기 때문이다. 우리가 '인간은 존엄하다'고 말할 때, 그 '인간'은 '인간다운 인간'이라는 가정을 전제하고 있다 다시 말하면, 인간의 존엄성을 긍정하는 명제는, '인간이 인간다움을 잃지 않는 한, 인간은 존엄하다'는 뜻으로 해석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다움을 잃지 않는다'는 말을 높은 도덕성을 발휘한다는 뜻으로 해석한다면, '인간다움을 잃지 않았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의 수효는 비교적 적을 것이며, 따라서 '존엄하다'는 평가를 받을 수 있는 사람의 수도 크게 제한될 것이다. 실은 우리가 '인간은 존엄하다'고 말할 때, 그것은 '도덕적으로 높은 경지에 달한 소수의 인격자들은 존엄한 존재이다'라는 뜻이 아니라, 적어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존엄한 존재라는 뜻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인간다움을 잃지 않는다'는 말의 뜻을 '도덕적인 인간으로서 성장 할 수 있는 가능성을 지녔다'는 의미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즉, 인간은 인간다운 인간으로서 성장할 가능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존엄한 존재로서 인정을 받는 것이다. 만약, 도덕적으로 높은 경지에 도달한 사람들만이 존엄한다면, 그들은 인간인 까닭에 존엄한 것이 되며, 사실상'존엄하다'는 평가를 받을 수 있는 사람은 극소수의 인물들에게만 국한될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인간은 존엄하다'고 말할 때, 특수한 소수의 사람들만이 존엄하다는 뜻으로 말한 것이 아님은 명백하다. 그러나, '사람의 탈만 썼으면 그가 아무리 교활하고 파렴치하며 잔인하다 하더라도 존엄하다'는 뜻이라면, 그것은 극히 위선적이거나 자기도취적인 발언이 되고 말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인간의 존엄성의 근거를 인간이 간직한 어떤 가능성에서 찾을 수밖에 없으며, 그러한 가능성 간직하고 있는 한, 사람은 누구나 존엄하다고 보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만약 이 세상의 모든 사람에게 그런 가능성을 인정할 수 있다면 사람은 누구나 예외 없이 존엄하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될 것이다. 위에서 우리는 '도덕적인 인간으로서 성장할 수 있는 가능성'이라는 막연한 표현을 사용하였다. 이제 우리는, 이 막연한 표현이 의미하는 바에 대하여 좀더 분명한 설명을 해야 할 것으로 보인다. 다시 말하면, '도덕적인 인간'이라는 구절의 뜻을 보다 정확하게 밝혀야 할 것이다. '도덕적'이라는 말이 너무나 모호하고 다의적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말하는 '도덕적 인간'이란, 성현 또는 군자와 같은 뜻은 아니다. 세상 사람의 대부분이 성현 또는 군자가 될 수 있다고 믿기 어려우며, 또 그렇게 많은 성현과 군자가 반드시 필요하다고 생각되지 않는다. '도덕적 인간'은 평화스러운 사회 생활을 위해서 요청되는 보통 수준의 덕성을 갖춘 사람을 가리킬 따름이다. '도덕적 인간'이라는 말과 가장 뜻이 가까운 말은 '성실한 인간'일 것이다. 절대적으로 성실한 인간이 된다는 것은 성인 또는 군자에게서나 기대할 수 있는 일이라 하겠다. 그러나 어느 정도의 성실성을 가진다는 것은 정상적 환경 속에 사는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대개 누구에게나 가능한 일이며, 그것이 가능하기 때문에 인간은 존엄하다는 평가를 받을 자격이 있다고 보는 것이다. 성실성을 가진다는 것은 인간이 인간답게 되기 위해서 갖추어야 할 가장 기본적인 조건이다. 인간의 가장 근본적 특색의 하나는 그가 높은 차원의 사회 생활을 할 수 있다는 사실에서 발견되거니와, 높은 차원의 사회생활이 가능한 것은 어느 정도 상대편을 신뢰할 수 있기 때문이며, 인간이 서로 남을 신뢰할 수 있는 것은 인간에게 성실성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도대체 성실이란 무엇이냐?'는 물음을 제기할 때, 우리들의 상식만으로는 대답하기 어려운 여러 가지 문제가 남아 있음을 본다.
웃음이 묻어나는 편지 - MBC 예술단 엮음 하나 추억이라는 이름의 웃음여행 사위, 자는가? 제목이 좀 야하지요? 맞습니다. 좀 야합니다. 그렇지만 엄청나게 많은 '지금은 라디오 시대' 애청자를 위해 그날 밤 일들을 몽땅 적나라하게 밝히겠습니다. 저는 선을 삼십 번도 넘게 본 끝에 30세 되던 해에 24세의 미모의 여성과 결혼을 했습니다. 지금으로부터 10년 전의 일입니다. 대부분의 경우 결혼식이 끝나면 신혼여행을 떠나고 신혼여행 갔다 온 뒤에 처가에 다녀오는 게 순서 아닙니까? 그런데 우리는 여러가지 사정상 결혼식 끝난 후 처가에서 1박하고 신혼여행지로 가기로 일정을 잡게 되었습니다. 결혼식이 끝나고 우리는 일정표대로 전북 김제의 처가로 갔습니다. 새 신랑 왔다고 모여든 마을 어른들 모시고 막걸리 대접을 끝내고 나서 잠자리에 들 궁리를 하는데 하나 둘씩 모여드는 건장한 동네 남자들... 저는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왜 촌에서 신랑을 매단다고 하지 않습니까? 겁이 나더라구요. 그러나 신체 건강한 대한민구 남성으로 그 힘든 군사훈련 다 거친 사나이가 무엇이 두려우랴! 걱정하지 말자. 마음을 다스리며 점잖게 술대접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잠시 시간이 흐르자 저는 안도의 미소를 지을 수 있었습니다. 이유는 간단했습니다. 장모님께서 어찌나 성화를 대시는지 마을 남자들과 술상을 마주하고 대접하는 방으로 3분마다 한 번씩 들어오셔서 빨리 가라고 성화를 대니 한 잔씩 하시더니 모두 일어서더군요. '불감천이언정 고소원이라' 저는 너무 기뻤습니다. '우리 장모님 최고, 부라보, 따봉, 빅토리, 원더풀'을 속으로 외치며 겉으로는 아쉬운 척 배웅을 했습니다. 모든 손님들이 다 가시고 이제 드디어 기다리고 기다리던 순간이 시나브로 다가오고 이었습니다. 30세의 신체 건강한 총각이 결혼 첫날밤을 얼마나 애타게 기다렸겠습니까? 서둘러 장모님께 인사를 드리고 어서가서 푹 쉬라는 말씀을 뒤로 한 채 원앙금침이 깔려 있는 건너방으로 들어갔습니다. 그곳에는 용의 주도하신 장모님께서 작은 주안상에 간단한 안주와 술병을 준비해 놓으셨더라구요. 대부분 관광지 고급 호텔에서 첫날밤을 보내는데 시골의 낡은 처가에서 첫날밤을 보낸다는 게 썩 유쾌한 기분은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제 마음이 확 바뀌더라구요. 싫다는 신부에게 술 한잔 먹여 놓고는 영화나 드라마에서 보던 대로 불을 껐습니다. 예날 우리의 부모님께서 왜 자식을 적게는 대여섯 명, 많게는 십여명씩 낳았는지 말입니다. 불을 끄자창호지 문을 통해 들어오는 은은한 달빛 조명은 옆에 있는 신부를 황홀한 미모의 선녀로 보여지게 하더군요. 이런 상황에서 이찌 자녀가 많이 안 생기겠습니까? 저는 급해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급하다 한들 신혼여행 첫날밤을 임전무퇴의 정신으로 무장하고 초전박살 구호를 외치며 파죽지세로 몰아붙일 수는 없는 법. 저는 정공법을 택하기로 하고 급한 마음을 억누르며 탐색전을 펼쳤습니다. 요리조리 살펴보고 요모조모 따져보는 철저한 탐색전을 마무리하고 드디어 공격개시하려는 찰나 느닷없이 문을 벌컥 열고 들어오시는 장모님. '아! 이를 어쩌나, 어찌한단 말인가? OH MY GOD! 불쌍한 우리 한쌍을 투명인간으로 만들어 주시든지,펑 하고 사라지게 해주실 수는 없는지요? 정말 눈앞이 캄캄하고,컴컴한 밤하늘이 노랗게 변하는 걸 똑똑히 보았습니다. 그러나 어쩌겠습니까? 이미 엎지러진 물이요, 깨진 쪽박인 것을... 선천성 두뇌 명성증을 앓고 있는 저는 생각했습니다. '호랑이에게 물려가도 정신만 차리면 살고,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는데...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제 두뇌에서는 현역군 시절 각개전투 훈련때 받은 교육내용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습니다. 즉, 각개전투시 신속한 동작으로 최대한 지형지물을 이용하여 은폐와 엄폐를 하라! 저는 즉시 행동개시,잽싼 동작으로 베개 뒤에 숨고 이불을 뒤집어썼습니다. 그런데 뒤이어 들려오는 장모님의 말씀인즉, 출출할 것 같아 고구마를 삶아 왔는데 먹고 자라는 겁니다. 세상에! 신혼 첫날밤, 이 귀중하고 엄숙하고 중차대한 시간에 고구마 먹을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런데 고구마 들여 놓고 문 닫고 나가실 줄 알았는데,새 사위 자느냐고 부르시는 겁니다. 전 참으로 난감했습니다. 대답을 하자니 원초적 상태라서 일어날 수도 없고,그렇다고 어른 앞에서 발딱 누운 채로 목만 내놓고 있을 수고 없고,그래서 그냥 자는 척하고 대답을 안했습니다. 그런데 장모님 눈도 밝으시지 이불을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덮어 쓴 우리를 보시고는 군불을 충분히 땠는데 추운 모양이라며 문을 열어 놓고 나가시는 겁니다. 방이 추웠냐구요? 천만의 말씀이에요. 냉방이라 할지라도 우리 두사람 열을 바짝 받아서 더울 판인데 방바닥이 완전히 고기 굽는 프라이팬같이 뜨거웠거든요. 그러나 장모님 나가시는 게 반가워 아무 대꾸를 안했습니다. 저희는 장모님이 나간신 후 이불을 걷어내고 한참을 심호흡을 해야 했습니다. 뜨거운 한증막에 갔다온 것 같았거든요. 하여튼 잠시후 우리는 또 다시 인플레이 상태로 돌입했습니다. 밀 밀리며,빼았고 빼앗기는 대접전 끝에 또 한번의 노마크 찬스를 맞게 되었습니다. 건국이래 최초로 월드컵 우승이 눈앞에 다가온 환희와 기쁨의 순간이었습니다. 그런데 또다시 벌컥 열려지는 문. '오호! 통제라.분하고 원통함이여.어찌 하오리까!' 혼비백산 이불속으로 또 다시 숨었습니다. 삶은 고구마 머자면 목메일까봐 식혜 한 대접을 갖고 오신 겁니다. 시원하니 먹고 자라며 이불 뒤집어쓴 우리를 향해 한마디 하시고는 나가시면서 난방 잘된 서울 아파트에 살아 추위를 되게 탄다며 혀를 끌끌 차시는 겁니다. 저는 허탈한 심정으로 문을 바라보다가 순간 아! 하고 무릎을 탁쳤습니다. 낡은 문틀에 녹슨 대못이 한 개 박혀 있었습니다. 저는 얼른 일어나서 벽장안에 있던 나일론 끈을 가지고 문에 박혀 있는 무쇠고리에 묶고서 문틀에 박힌 커다란 대못에 칭칭 감았습니다. 문을 잠그고 나니 안심이 되더군요, 그래서 우리는 다시 한 번 고지를 향해 전진에 전진을 거듭했습니다. 세계에서 가장 높다는 에베레스트 정상을 정복한 등반대원들이 고지 정상에 깃발을 꽂지 않습니까? 저도 정상에 깃발을 꽂겠다는 일념으로 목숨걸고 최악의 조건과 싸우며 정상에 도착,깃발을 꽂는 순간 그 감격과 감동이 얼마나 크겠습니까? 드디어 그 감격과 감동을 맛보려는데 또 다시 왈칵 열려진 문,이번엔 군불때면서 옥수수를 구웠는데 먹으라는 겁니다. 정말 맥빠지더군요.그런데 나가시면서 하시는 말씀이 군불도 땠고 했으니 가서 주무신다니, 이보다 더 반가운 소식이 어디있겠습니까? 잠시후 장모님 방에 불이 꺼지더군요. 분명히 노끈으로 문고리를 동여맸는데 어찌된 건지 일어나 자세히 보니 끈을 감아 놓은 대못이 빠져 있더군요. 못이 박혀 있던 자리를 보니 구멍이 헐렁해져서 손으로 끼워놓은 건데 거기다 묶었으니 저항도 없이 열릴 수밖에... 이래서 신혼여행은 아는 사람 하나 없는 먼곳으로 가는가 봅니다. 이제 입안은 말라 비틀어지고 혓바늘이 돋고 눈은 쑥 들어가고 정신은 몽롱했지만 첫날밤인데 어찌 그냥 보낼 수 있겠습니까? 들여 놓으신 식혜를 벌컥벌컥 다 들이켜고 잠시 휴식을 취한 뒤 무단 침입으로 여러번 중단되었던 일을 다시 시작했습니다. 참 끈질긴 성격이지요? 그런데 제가 막 열받기 시작했는데 신부가 자꾸 뜨겁다고 하는 겁니다. 저는 이야기했죠! '원래 첫날밤은 다 그런 거다. 조금만 참아라.어른된다는게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다. 참는 자에게 복이 있나니 천국이 우리 것이다.' 저는 성경말씀까지 갖다대며 노력하고 있는데,신부의 태도가 이상했습니다. 벌떡 일어나는데 이상한 냄새가 나는 겁니다. 냄새뿐이 아니고 눈이 따갑고 목이 메케해지는 겁니다. 얼른 불을 켜고 이불을 들춰보니 방이 너무 뜨거워 이불이 누렇게 그을렸습니다. 새로 깐 노란색 비닐장판이 새까맣게 오그라들면서 타들어가고 새 이불도 연기가 풀풀 날 정도였으니까요. 얼른 밖으로 내놓고 문을 열고 환기를 시켰는데 동쪽하늘에 서서히 먼동이 트기 시작하는 겁니다. 아직 아무일도 없었는데 말입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신랑이 술에 곤드레만드레 되어 그냥 넘기는 부부도 있다지만 저는 맨정신이었거든요.아쉬운 대로 그을린 요는 버려두고 방으로 가서 보니 아랬목은 금방 폭발한 활화산처럼 뜨거워 접근이 불가능하여 윗목에 아불을 깔았습니다. 그런데 희한하게도 아랬목은 불덩어리인데 윗목은 그야말로 시베리아 얼음장보다 더 차더라구요. 여하튼 중단되었던 작업을 계속하려고 하는데 이번에 신부가 춥다고 오들오들 떠는 겁니다. 사실 찬방에서 올라오는 냉기는 견디기 어렵더라구요. 뼈마디 깊속한 속까지 파고드는데 장난이 아니더라구요. 우리는 너무 추워 옷을 주워입고, 추우면 아랫목에 더우면 위목에 옮겨다니기를 여러번,아랫목이 고비를 넘기고 알맞게 식을 무렵 닭우는 소리가 새벽을 알렸습니다. 밖에 내놓았던 그을렸던 요를 갖다 아랫목에 깔고 중단되었던 일을 재개하려눈데 신부가 병든 닭처럼 폭 고꾸라지더니 코까지 골면서 곯아떨어져 자는 겁니다. '이런 세상에... 이제 어쩔 수 없구나.' 포기를 하고 한숨 자려고 했지만 몸은 피곤해도 머리는 점점 맑아지고 어떤 엄청난 에너지가 끓어올라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신부가 야속했습니다. 지금 이 시간까지 파란만장한 상황을 거쳐 천신만고 끝에 장모님 주무시고 방바닥고 식었는데 잠을 자다니,이런 상황에서 잠을 잘 수 있는 여자의 신체구조와 정신상태를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도저히 참을 수 없다는 결론을 내리고 신부를 깨워 중단했던 작업을 계속하려는데,문이 살짝 열리며 장모님이 들어오시는 겁니다. '밤새 즐겁게 잘 잤는가? 사위 눈이 벌겋게 충혈된걸 보니 내 기분이 좋구만, 암닭이 금방 낳은 알이라 따뜻께로 어서 먹소.' 참말로 끈질긴 장모님이셨습니다. 그리고 장모님은 제게 계란을 주시고는 신랑보다 늦잠자는 색시가 어디 있냐며 부득부득 깨워 밖으로 데려가시는 면밀함까지 보이셨죠.물론 전 그 첫날밤을 아무일도 없이 잠만 설쳤습니다. 지금 생각해도 약이 오르는 첫날밤 사연. 재미있었는지 모르겠네요.
Board 삶 속 글 2022.12.31 風文 R 471
무엇을 어떻게 쓸까 - 이오덕 3부 국어공부, 무엇이 문제인가 논술시험, 무엇이 문제인가 어떤 말로 써야 하나? 논술, 곧 주장하는 글은 어떤 말로 써야 하나 하는 것은 앞에서 충분히 말해 놓았다. 여기서는 신문에 잘 쓴 작품으로 뽑힌 학생들의 글을 가지고 좀 생각하고 싶다. 내가 만약 시장이 된다면 이란 논제가 있었는데, 이 논제에서 한문글자로 시장 이라 쓴 것 말고는 누구나 잘 알 수 있는 말이다. (왜 한글로 시장이라 쓰면 될 것을 한문글자를 고집해서 썼는지 알 수 없지만) 이런 제목은 초등학생도 쓸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같은 제목이라도 초등학생이 쓰는 것과 고등학생이 쓰는 것은 많이 다르다. 초등학생이 내가 대통령이 된다면 내가 시장이 된다면 .. 하고 쓸때에는 현실보다도 재미있는 상상의 세계에서 마치 동화속의 살미이 된 기분으로 쓰는 것이다. 그런데 고등학생은 그럴 수가 없다. 어디까지나 현실이라고 생각해서 시장이 할 일을 말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런 제목으로 쓰게 되면 초등학생보다 고등학생이 더 어렵다고 보지 않을 수 없다. 다음은 최우수작에 뽑힌 글이다. 내가 만일 시장이 된다면 - 전주 전일고 최강 예로부터 전주는 맛과 멋의 도시로 이름이 높았다. 한때 후백제의 수도로 호남에서 제일가는 도시였지만 지금은 과거의 영화가 잊혀진 지 오래이다. 해방 전에는 전국 6대 도시에 들었지만 산업화 이후 정부의 불평등한 정책으로 이제 전국 14대 도시 안팎 수준이다. 이러한 때에 내가 전주시장이 될 경우 전주의 발전을 위한 공약에 대해 언급하고자 한다. 먼저 시의 경제 능력이 시민의 삶과 직결되는 만큼 전주지역의 경제적 향상에 노력을 기울이겠다. 이제까지 산업 시설의 미비나 정부 정책에서의 소외로 전주는 경제력이 매우 약하다. 따라서 정부 예산의 확대 편성과 각종 기업과 공장 유치를 적극 추진하겠다. 또한 오염되지 않은 수려한 자연 환경과 유서 깊은 문화 유적을 활용해 관광 산업을 활성화시켜 관광 수입을 증진시키겠다. 다음으로 전주는 지방이기에 다른 대도시에 비해 문화적으로 낙후되어 삶의 질이 낮다. 따라서 전주를 멋과 예술과 문화의 도시로 만들 필요가 있는데, 이를 위해 전주 대사습 놀이나 풍남제 등의 문화행사를 활성화시키겠다. 또한 시립예술단을 구성하여 예술 관련 행사를 적극 유치하겠다. 즉 시민들의 삶의 질 향상에 문화 정책의 역점을 두겠다. 마지막으로 서해안 시대를 맞아 전주를 중추적 기능을 수행하는 도시로 만들겠다. 즉 전주를 국제 도시의 위상을 지니도록 각종 부대 시설 및 휴식지, 편익 시설의 건설을 추진하겠다. 또한 계획중인 호남 고속 전철의 전주 통과를 관철시킬 것이며 사회 간접 자본에 대한 투자를 늘려 도시의 교통 상황을 개선하여 국제 도시로서 손색이 없도록 노력하겠다. 전주는 지금 발전과 퇴보의 기로에 서 있다. 이러한 때에 내가 전주 시장이 된다면 경제력 향상, 문화 도시 조성, 서해안 시대 대비라는 공약을 실천해 과거의 번영을 되찾을 뿐 아니라 국제 도시로 발전할 수 있도록 노력을 경주하겠다. ---------------------------------------------------------------------- 이 논제의 유의사항에서 자기가 살고 있는 지역의 특성을 최대한 반영할 것이라 했고, 때마침 지방자치단체장과 지방의회의원을 선거하는 날을 앞둔 터라, 후보로 나선 사람들이 저마다 선거 공약을 광고하고 있었기에 이런 논술 제목을 내어준 것은 아주 알맞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이 글을 보면 글쓴이가 있는 전주시의 행정을 앞으로 어떻게 하겠다는 주장을 학생으로서는 아주 놀랄 만큼 잘 해 놓았다. 그런데 문장에서 쓴 말을 살피면 그다지 바람직스럽게 되어 있지 않다. 역시 이것은 학생의 몸에서 우러난 말이 아니고 어른들의 글말이구나 하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이 글은 모두 여섯 문단으로 짜여 있는데, 서론이라 할 첫째 문단에서는 말이 그다지 문제될 것이 없다. 그런데 실제로 행정을 어떻게 하겠다고 한 둘째 문단부터는 어른들이 사회문제나 행정 문제를 글로 쓸 때 늘 쓰고 있는 한자말체의 말로만 되어 있다. 이것은 앞에서 말해 놓은 자기 자신의 말이 아니다. 이렇게 된 것은 결국 이런 행정 공약이란 것이 진정 자기 몸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시장 후보자들이 다투어 발표해 놓은 것들을 보고 그것을 가려내어 썼기 때문이다. 물론 고등학생으로서는 이 이상으로 할 수 없다. 이래서 논술고사의 근본 문제를 여기서도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면 이 글에서 좀 어수선하게 되어 있는 말이나, 어른들의 글말이 되어 있는 말들을 대강 들어 보겠다. 전주의 발전을 위한 공약에 대해 언급하고자 한다. (공약을 말하고자) 직결되는 (바로 이어지는) 산업 시설의 미비나 정부 정책에서의 소외로 (시설이 모자라거나 정부 정책에서 따돌려져) 기업과 공장 유치를 적극 추진하겠다. (공장을 적극 끌어 오겠다.) 수려한 (아름다운,빼어나게 아름다운) 문화 유적을 활용해 (살려) 관광 산업을 활성화시켜 관광 수입을 증진시키겠다. (활발하게 해서 - 올리겠다) 대도시에 비해 문화적으로 낙후되어 (대도시에 대면 문화가 뒤떨어져) 풍남제 등의 문화 행사를 활성화시키겠다. (풍남제와 같은 문화 행사를 활발하게 하도록 하겠다. 더욱 풍성한 시민의 잔치가 되도록 하겠다.) 적극 유치하겠다. (끌어들이겠다.) 삶의 질 향상에 (질을 높이는 일에) 역점을 두겠다. (힘을 모으겠다) 전주를 중추적 기능을 수행하는 (전주가 중심이 되는 일을 하는) 위상을 지니도록 (모습을 지니도록) 각종 부대 시설 및 휴식처, 편익 시설의 건설을 추진하겠다. (여러 가지 딸린 설비와 쉼터, 편리하고 유익한 시설) 교통상황을 개선하여 (사정을 고쳐) 기로에 서 있다. (갈림길에 서 있다) 조성 (만들기) 노력을 경주하겠다.(힘쓰겠다) 행정을 맡은 사람들이 시민들 앞에서 하는 말은 쉬울수록 좋다. 더구나 고등학생이 행정가가 되었다고 생각해서 하는 말이라면 지금까지 어른들이 해 온 말을 따라갈 것이 아니라 바로 학생들이 하는 말로, 책에 나오는 말이 아니라 입으로 하는 일상의 말로 하고 글도 그렇게 써야 한다. 어른이고 아이고 무슨 말 무슨 글이든지 어려운 말로 쓰고 있는 것은 모조리 가짜고 속임수라고 보면 틀림 없다. 아이들이 어려운 말을 하는 것은 어른들이 그런 말을 억지로 쓰도록 가르쳤기 때문이다. 학생들이 어려운 글을 쓰는 것을 어른들의 글이 그렇게 되어 있기 때문이고, 또 바로 문제를 낸 글에서 어려운 말로 지시하기 때문이다. 신문에 나온 논술 연습 문제가 거의 모두 어려운 말로 되어 있다는 사실은 앞에서 들어 놓은 많은 보기로도 알 수 있지만, 여기서는 지난번 대학입시에서 실제로 나왔던 문제를 두어 두어 가지 들어 보기로 한다. 예시문 소비와 경쟁은 흔히 현대사회의 주요한 특징으로 일컬어진다. 소비는 개인의 물질적, 정신적 욕구를 만족시켜 줄 뿐만 아니라 시장경제 체제를 지탱해 주는 삶의 중요한 양식이다. 국가간, 계층간의 심한 소득격차에 의해서 삶의 질과 기본적인 권리를 보장받지 못하는 경우가 있는 반면에, 구매력이 있는 사람들은 과거에는 상상할 수도 없었던 소비의 다양성을 경험하고 있다. 현세인들은 거의 어떤 세대보다 풍요로운 소비 위주의 삶을 향유하고 있다. 한편 경쟁의 원칙은 오늘날 삶의 모든 영역에 걸쳐서 확산되는 양상을 보인다. 경쟁의 대열에서 낙오되지 않기 위해 사람들은 새로운 지식과 정보를 습득하거나 기존의 사회조직을 바꾸려는 엄청난 노력을 기울인다. 하지만 급변하는 세계 속에서우리가 습득한 경험이나 지식의 수명은 계속 짧아질 수밖에 없다. 이제 과거의 험이나 지식에 의해서 설명하기 곤란한 불확실하고 낯선 세계가 펼쳐지는 것이다. 작성요령 1. 위의 예시문을 참조하고, 다음을 논제로 삼아 논술문을 작성하시오. 논제 : 급격한 변화의 시대에 건강한 삶은 어떻게 가능한가? 2. 아래의 두 논점을 균형있게 관련지어 논술하시오. 논점1 : 소비사회의 문제 논점2 : 경제사회의 문제 유의사항 논제의 성명을 쓰지 말 것 글의 길이는 빈 칸을 포함하여 1,200자 안팎이 되게 할 것. 예시문 속의 문장을 그대로 사용하지 말 것. (고려대학교) ----------------------------------------------------------------- 이 논제를 설명한 글에서 고등학생들이 그 뜻을 모르는 낱말은 별로 없어 보인다. 하지만 학생들이 알고 있는 말로 적어 놓았다고 해서 잘 되었다고 볼 수 없다. 글을 쓰도록 지시하는 글은, 글을 쓰게 되는 학생들이 보통 입으로 하는 말로, 그런 말이 없으면 할 수 없지만 될 수 있는대로 늘상 입으로 지껄이는 쉬운 말로 쓰는 것이 좋다. 그래야 학생들이 쉽게 받아들여 글을 쓰고 싶어하는 마음이 되는 것이다. 또 낱말 하나하나는 그 뜻을 알지만, 글말이 많이 들어 있으면 글 전체의 뜻을 제대로 잡기가 힘든다. 설혹 애써서 전체의 듯을 잡았다고 해도 이제부터 써야 할 글을 또 그 모양의 글말로 써야 된다고 생각하는 것이 당연하니, 이래서도 못 쓰게 되고, 쓴다고 해도 남의 글 흉내내는 꼴이 되는 것이다. 위의 문제에서 밑줄을 친 말들이, 좀더 쉽거나 깨끗한 우리말로 바꾸어 써야 할 글말이다. 예시문 과 논제 만을 쉬운 우리말로 바꾸어서 다음에 다시 써 본다. 밑줄 친 말만 다듬지 않고 다른 말도 더러 고쳤다. 예시문 소비와 경쟁은 흔히 현대사회의 큰 특징이라고 한다. 소비는 사람마다 가진 물질과 정신의 욕구를 채워줄 뿐 아니라, 시장경제의 틀을 지탱해 주는 삶의 중요한 방식(모습)이다. 나라 사이, 계급층 사이에 소득의 차이가 아주 심해서 삶의 바탕과 기본되는 권리조차 제대로 갖지 못하는 경우가 있는 반면에, 돈이 있는 사람들은 지난날에는 상상할 수도 없었던 온갖 물건들을 사 쓰고 있다. 오늘날 사람들은 지난날의 어떤 세대보다 넉넉하게 써 없애면서 살아가고 있다. 한편 경쟁은 오늘날 살아가는 모든 자리에서 퍼져가는 모습을 보인다. 경쟁의 대열에서 뒤떨어지지 않기 위해 사람들은 새로운 지식과 정보를 배워 얻거나 이미 있는 사회조직을 바꾸려는 엄청난 노력을 기울인다. 하지만 갑자기 달라져 가는 세계 속에서 우리가 배워 얻은 경험이나 지식의 수명은 자꾸 짧아질 수밖에 없다. 이제 지난날의 경험이나 지식으로는 설명하기 어려운, 확실하지 않은 낯선 세계가 펼쳐지는 것이다. 논제 : 매우 급하게 바뀌어져 가는 시대에 우리는 어떻게 하면 건강하게 살아갈 수 있는가? ---------------------------------------------------------------------- 이 정도면 조금 나아진 글이 되지 않았나 싶다. 다음 또 하나. 사회적 존재로서의 인간의 삶은 공간적으로는 물론 시간적으로도 고립되어 형성될 수 없다. 우리는 과거로부터 물려받은 유산을 평가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다음 세대에게 물려줄 보다 나은 미래를 구상하면서 현재를 살아 간다. 과거 - 현재 - 미래의 이러한 유기적 연결성을 논의의 축으로 하여 오늘날 여러분이 야 할 일을 제시하라. (서울대학교) ------------------------------------------------------------------ 이 논제는 무슨 말인지 얼른 머리에 들어오지 않아서 몇 번이나 읽게 되는데, 결국 알고 보면 아무것도 아닌 말이다. 왜 이렇게 요란한 말을 늘어놓았는가. 밑줄을 친 것이 일본말법이거나 쉽게 써야 할 말들이지만 그것만 고쳐서는 안되고 글 전체를 새로 써 보았다. 다음에 고쳐 쓴 글과 견주오 보고 글이 얼마나 달이 느껴지는지, 그런데 글뜻이 달라진데가 있는지 살펴보라. 사람은 언제 어디서든지 혼자 살 수 없다. 우리는 지난날의 유산을 물려받아 그것을 바탕으로 다음 세대에 불려줄 더 나은 앞날의 이러한 긴밀한 연결을 생각하여 오늘날 여러분이 해야 할 일을 말해 보라. 앞에 적어 놓은 원문에 대면 많이 짧아졌고, 아주 쉽게 읽히는 글이 되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잘 살펴보면 이것도 대부분 아무 쓸데도 없는 말이다. 꼭 해야 할 말은 마지막에 나오는 말 오늘날 여러분이 해야 할 일을 적어 보라 하는 것 뿐이다. 다른 말들은 그것을 그렇게 이상한 말로 늘어놓은 것이다. 만약 이 논제를 내가 쓰다면 이렇게 쓸 것이다. 좀 더 나은 사회를 만들기 위해 오늘날 여러분이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적어 보시오.
한국대표수필 - 김동리 외 9명 "조지훈편" 조지훈(1920~1968) 시인, 본명은 동탁. 경북 영양 출생. 혜화 전문 졸업. 고려대 교수, 민족 문화 연구소장 역임. 박두진. 박목월과 함께 '청록파' 시인으로 불림. 지사풍의 시인으로 알려졌던 조지훈의 시는 회고적 취미, 자연적 친화성, 불교적 선의 감각 등을 그 주요한 바탕으로 삼았다. 엄한 유교적 가정에서 자라난 장자의 기풍이 있었으며 후기에는 시보다 민족 문화의 개발에 주력하였다. 돌의 미학 돌의 맛-그것도 낙목한천의 이끼 마른 수석의 묘경을 모르고서는 동양의 진수를 얻었달 수가 없다. 옛 사람들의 마당 귀에 작은 바위를 옮겨다 놓고 물을 주어 이끼를 앉히는 거라든가, 흰 화선지 위에 붓을 들어 아주 생략되고 추상된 기골이 늠연한 한 덩어리의 물체를 그려 놓고 이름하여 석수도라고 바라보고 좋아하던 일을 생각하면 가슴이 흐뭇해진다. 무미한 속에서 최상의 미를 맛보고, 적연부동한 가운데서 뇌성벽력을 듣기도 하고, 눈 감고 줄 없는 거문고를 타는 마음이 모두 이 돌의 미학에 통해 있기 때문이다. 동양화, 더구나 수묵화의 정신은 애초에 사실이 아니었다. 파초 잎새 위에 백설을 듬뿍 실어 놓기도 하고, 10리 둘레의 산수풍경을 작은 화폭에다 거두기도 하고, 소쇄한 산봉우리 밑, 물을 따라 감도는 오솔길에다 나무꾼이나 산승이나 은자를 그리되, 개미 한 마리만큼 작게 그려 놓고 미소하는 그 화경은 사실이기보다는 꿈을 그린 것이었다. 이 정신이 사군자, 석수도, 서예로 추상의 길이 달린 것이 아니던가? 괴석이나 마른 나무 뿌리는 요즘의 추상파 화가들의 훌륭한 오브제가 되는 모양이다. 추상의 길을 통하여 동양화와 서양화가 융합의 손길을 잡은 것은 본질적으로 당연한 추세라 할 수 있다. '살아 있다'는 한 마디는 동양미의 가치 기준이거니와, 생명감의 무한한 파동이 바위보다 더한 것이 없다면 웃을는지 모른다. 그러나, 돌의 미는 영원한 생명의 미이다. 바로 그것의 추상이다. 내가 돌의 미를 처음 맛본 것은 차를 마시다가 우연히 바라본 그 바위에서부터였다. 선사의 다실에 앉아 내다본 정원의 돌이었다. 나의 20대의 일이다. 나는 한때 일본 경도의 묘심사에서 선에 든 적이 있었다. 1천7백 측 공안을 차례로 깨쳐 간다는 지극히 형식화된 일본선은 가소로웠지만, 선의 현대화를 위해선 새로운 묘미가 아주 없는 것도 아니었다. 특히 흥미로웠던 것은 사뭇 유도처럼 메다꽂기도 하고, 공부가 모자라 벌을 설 때는 한겨울이라도 마당에 앉혀 놓고 밤을 새워 좌선을 강행시키는 그 수련에서 준열한 임제종풍의 살활검의 고조를 볼 수 있던 일이다. 그러나, 얼마 가지 않아 나는 이 선의 수행에서 싫증이 났었다. 그래서 틈만 있으면 다실에 가서 다도를 즐기며 정원을 내다보는 것이 낙이 되었다. 일본의 정원 미술은 다실과 떠나서 생각할 수 없고, 다도는 선과 떼어서 생각할 수가 없는 것도 다 아는 사실이다. 묘심사에는 다도의 종장 한 분이 있었다. 나는 가끔 이 노화상과 대좌하여 다도를 즐기며 화경청적의 맛을 배우곤 하였다. 녹차를 찻종에 넣는 작은 나무 국자를 찻종 전에다 땅땅땅 두드리는 것은 벌목정정의 운치요, 찻주전자를 높이 들고 소리 높여 물을 따르는 것은 바로 산골의 폭포 소리를 가져오는 것이라 한다. 일본 예술의 인공성-그 자연을 비틀어 먹는 천박한 상징의 바탕이 여기 있구나 싶어서, 나는 미소를 머금기도 했다. 어쨌든, 나는 빈객으로서 다완을 받아 좌우의 사람에게 인사하는 법에서부터 잔을 들고 마시는 법, 나중에 골동으로서의 다완을 감상하며 주인을 추어 주는 법을 배웠다--다완이 고려 자기인 경우에는 주인의 어깨가 으쓱해진다. 이 사장이 시키는 대로 차를 권하는 주인으로서의 예의 작법을 시험해 보기도 하였다. 그것뿐이다. 나는 그 다도에도 흥미가 없었고, 그 뒤에 이 다도를 스스로 행해 본 적도 없다. 그러면서도 내가 이 다실에 자주 놀러 간 것은 사장과 더불어 파한으로 농담의 선문답을 하는 재미에서였다. 실상은 그것보다도 다실의 정적미에 매료되었다는 것이 더 적절한 것이다. 아담한 정원을 앞에 놓은 지극히 소박하고 단순한 이 다실은 무척 맑고 따뜻하였다. 미닫이는 젊은 중들이 길거리에서 주워온 종이를 표백하여 곱게 바른 것이어서 더욱 운치가 있었다. 나중에는 이 다실에 사장과 대좌해도 피차 무언의 행을 하는 사이가 었다. 이럴 때 항상 내 눈을 빼앗아 가는 것은 정원 가장귀에 놓인 작은 바위기가 일쑤였다. 나의 선은 이 이끼 앉은 바위를 바라보며 시를, 민족을, 죽음을 화두로 삼고 있었다. 바위는 그 어떠한 문제에도 계시를 주는 성싶었다. 잔디 속에 묻혀 있는 불규칙한 징검돌은 사념의 촉수를 어느 방향으로든 끌고 비약하였다. 이리하여, 나는 서도 다도도 아닌 돌의 미학을 자득하여 가지고 이 이방의 절을 떠났던 것이다. 떠나던 전날 사장은 7, 8명의 귀족 영양을 불러 다회를 열고 젊은 방랑객을 전별하였다. 그것도 이른바 인연인지 모른다. 그 1년 뒤 나는 오대산 월정사에 있는 불교 전문 강원에서 교편을 잡게 되었고, 거기서 나는 우리의 선과 우리의 돌의 진미를 맛보게 되었다. 내가 머물고 있던 월정사의 동향한 1실은 창만 열면 산이요 숲이 있고, 밤이면 물 소리 바람 소리가 사철 가을이었다. 여기서 보는 바위는 인공으로 다스리지 않은 자연 그대로의 암석이었다. 기골과 풍치가 사뭇 대륙적이요, 검푸르고 마른 이끼가 드문드문 앉은 거창한 것이어서 묘심사의 인공적이요 온아적정하던 돌과는 그 맛이 판이하였다. 일진의 바람을 몰고 홀연한 자세로 부동하던 그 바위의 모습은 나의 심안의 발상을 다르게 하였다. 나는 여기서 1년 동안 차보다도 술을 마셨고, 나물만 먹는 창자에 애주무량해서 뼈만 남은 몸이 되어 내가 스스로 바위가 되어 가고 있었다. 나의 선도 상심낙사하는 화경청적의 다선에서 방우이목우하는 불기분방의 주선이 되고 말았다. 오대산은 동서남북 중대에 절이 있다. 서대절은 초옥수간 잡풀이 우거진 마당에, 누우면 부처도 없는 곳에 향을 사르고 정에 들어 있는 선승은 사람이 온 줄도 몰랐다. 그를 구태여 깨울 것이 없었다. 그름을 바라보고 새 소리를 들으면, 1천7백 측 공안이 아랑곳없이 나도 그대로 현묘지경에 들어가는 것이었다. 오대산 상원사에는 방한암 종정이 선연을 열고 있었다. 이따금 마음이 내키면 나는 그 말석에 참하였다. 구름 노을 깊은 골에 샘물이 흐르느니 우짖는 산새 소리 길이 다시 아득해라. 일 없는 늙은 중은 바위 아래 잠든 것을 청천백일에 꽃잎이 흩날린다. 좌선을 쉴 때면 역시 바위를 내다보며 시를 생각하는 것이 좋았다. 바위를 내다보는 것은 내 마음을 들여다보는 것이었다. 우리 선방에도 차를 마신다. 오가피차나 맥차, 그것도 아무런 형식이 없이 아주 자유롭고 흐뭇하게 둘러앉아 농담을 나누면서 마시는 폼이 까다롭지 않아서 별취였다. 창을 열면 산이 그대로 정원이요, 소동파의 '계성편제황장활산색기비청정신'이라는 시구 그대로 화엄의 세계였다. '차는 찬데 왜, 뜨거울까'-차와 차다의 동음을 이용하며 농담선문을 나에게 던지는 노승이 있었다. 나는 웃으면서 '예, 보라찹니다'라고 대답한다. 역시'보리와 보리'의 동음을 이용한 것--이쯤 되면 농담도 선미가 있어서 파안대소였다. '풍려열뇌증삼계 법우주오대'의 귀로 연구에 끼이기도 하던 월정사의 생활도 미일 전쟁이 터지고 싱가포르가 함락되고 하면서부터는 숨어서 살 수 있는 암혈은 아니고 말았다. 과음의 나머지 나는 구멍 뚫린 괴석과 같은 추상의 육체를 이끌고 오대산을 떠나고 말았다. 뿐만 아니라 월정사는 6.25동란에 회신했다 한다. 내가 거처하던 동향일실--방우산장도 물론 오유로 돌아갔던 것이다. 그러나 나의 젊은 꿈이 깃든 숲 속의 그 바위는 아직도 남아 있을 것이다. 인세의 풍상에 아랑곳없는 것이 아니라, 그 풍상을 사람으로 더불어 같이 열력하면서 변하지 않는 데에 바위의 엄위와 정다움이 함께 있는 것은 아닐까? 돌에도 피가 돈다. 나는 그것을 토함산 석굴암에서 분명히 보았다. 양공의 솜씨로 다듬어 낸 그 우람한 석상의 위용은 살아 있는 법열의 모습 바로 그것이었다. 인공이 아니라 숨결과 핏줄이 통하는 신라의 이상적 인간의 전형이었다. 그러나, 이 신라인의 꿈 속에 살아 있던 밝고 고요하고 위엄 있고 그러운 모습에 숨결과 핏줄이 통하게 한 것은, 이 불상을 조성한 희대의 예술가의 드높은 호흡과 경주된 심혈이었다. 그의 마음 위에 빛이 되어 떠오른 이상인의 모습을 모델로 삼아 거대한 화강석괴를 붙안고 밤낮을 헤아림 없이 쪼아 내고 깎아 낸 끝에 탄생된 이 불상은 벌써 인도인의 사상도 모습도 아닌 신라의 꿈과 솜씨였다. 석굴암의 중앙에 진좌한 석가상은 내가 발견한 두 번째의 돌이다. 선사의 돌에서 나는 동양적 예지를 발견하였다. 그것은 지혜의 돌이었다. 그러나, 석굴암의 돌은 나에게 한국적 정감의 계시를 주었다. 그것은 예술의 돌이었다. 선사의 돌은 자연 그대로의 돌이었으나, 석굴암의 돌은 인공이 자연을 정련하여 깎고 다듬어서 오히려 자연을 연장 확대한 돌이었다. 나는 거기서 예술미와 자연미의 혼융의 극치를 보았고, 인공으로 정련된 자연, 자연에 환원된 인공이 아니면 위대한 예술이 될 수 없다는 것을 배웠다. 예술은 기술을 기초로 한다. 바탕에 있어서는 예술이나 기술이 다 art다. 그러나 기술이 예술로 승화하려면 자연을 얻어야 한다. 다시 말하면 인공을 디디고서 인공을 뛰어넘어야 한다. 몸에 밴 기술을 망각하고 일거수 일투족이 무비법이 될 때 예도가 성립되고, 조화와 신공이 체득된다는 말이다. 나는 석굴암에서 그것을 보았던 것이다. 돌에도 피가 돈다는 것을 말이다. 나는 그 앞에서 찬탄과 황홀이 아니라 감읍하였다. 그것이 불상이었기 때문이 아니었다. 한국 예술의 한 고전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몇 번이고 그 자비로운 입 모습과 수렷이 내민 젖가슴을 우러러보았고, 풍만한 볼기살과 넓적다리께를 얼마나 어루만졌는지 모른다. 내가 석굴암을 처음 가던 날은 양력 4월 8일, 이미 복사꽃이 피고 버들이 푸른 철에 봄눈이 흩뿌리는 희한한 날씨였다. 눈 내리는 도화불국-그 길을 걸어가며, 나는 '벽장운외사 홍로설변춘'의 즉흥 1구를 얻었다. 이 무렵은 내가 오대산에서 나와서 조선어 학회의 "큰 사전" 편찬을 돕고 있을 때라 슬프고 외로울 뿐 아니라, 그저 가슴 속에서 불길이 치솟고 있을 때였다. 이 때에 나는 신앙인의 성지 순례와도 같은 심정으로 경주를 찾았던 것이다. 우리 안에 살아 있는 신라는 서구의 희랍 바로 그것이었다. 그리하여, 나는 피가 돌고 있는 석상에서 영원한 신라의 꿈과 힘을 보고 돌아왔다. 돌에는 맹렬한 의욕, 사나운 의지가 있다. 나는 그것을 피난 때 대구에서 보았다. 왕모래 사토길 언덕에 서 있는 집채보다 큰 바위였다. 그 옆에는 삐쩍 마른 소나무가 하나--송충이가 솔잎을 다 갉아먹어서 하늘을 가리울 한 점의 그늘도 지니지 못한 이 소나무는 용의 비늘을 지닌 채로 이미 상당히 늙어 있었다. 또, 그 옆에는 이 바위보다도 작은 판잣집이 하나 있을 뿐이었다. 이 살풍경한 언덕길을 가끔 나는 석양배에 취하여 찾아오곤 하였다. 그 무렵은 부산에서 백골단 땃벌 떼가 나돌고 경찰이 국회를 포위하여 발췌 개헌안을 강제 통과시키던 소위 정치 파동이 있던 임진년 여름이다. 드물게 보는 가뭄에 균열된 논 이랑에서 농부가 앙천 자실한 사진이 신문에 실릴 무렵이었다. 그저 목이 타서 자꾸 막걸리를 마셨지만, 술이란 원래 물이긴 해도 불기운이라서 가슴은 더욱 답답하기만 하였다. 막걸리집에 앉아 기우문을 쓴 것도 무슨 풍류만이 아니었다. 이 무렵에 나는 이 사나운 의지의 돌을 발견하였다. 이 세 번째 돌은 혁명의 돌이었다. 그 바위에는 큰 나방이가 한 마리 붙어 있었다. 나는 그것이 자꾸만 열리지 않는 돌문 앞에 매어달려 울고 있는 것으로 느껴졌다. 주먹으로 꽝꽝 두드려 보면, 그 바위는 무슨 북처럼 울리는 것도 같았다. 이 석문을 열고 들어가면 맷방석만한 해바라기 꽃송이가 우거지고 시원한 바다가 열려지는 딴 세상이 있을 것도 같았다. 나는 이 바위 앞에서 바위의 내력을 상상해 본다. '태초에 꿈틀거리던 지심의 불길에서 맹렬한 폭음과 함께 퉁겨져 나온 이 바위는 비록 겉은 식고 굳었지만, 그 속은 아직도 사나운 의욕이 꿈틀대고 있을 것이다'라고--. 그보다도 처음 놓여진 그 자리 그대로 앉아 풍우상설에 낡아 가는 그 자체가 그지없이 높이 보였다. 바위도 놓여진 자리에 따라 사상이 한결같지 않다. 이 각박한 불모의 미가 또한 나에게 인상적이었다. 성북동은 어느 방향으로나 5분만 가면 바위와 숲이 있어서 좋다. 요즘 낙목한천의 암석미를 맘껏 완상할 수 있는 나의 산보로는 번화의 가태를 벗고 미지의 진면목을 드러낸 풍성한 상념의 길이다. 나는 이 길에서 지나간 세월을 살피며, 돌의 미학, 바위의 사상사에 침잠한다. 내가 성북동 사람이 된 지 스물세 해, 그것도 같은 자리 같은 집에서고 보니, 나도 암석의 생리를 닮은 모양이다. 전석불생태라고 구르는 돌에 이끼가 앉지 않는다는 것이 암석미의 제1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