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대표수필 - 김동리 외 9명 "김태길편" 김태길(1920~2009) 철학자. 수필가. 충북 중원 출생. 서울대 철학과 및 대학원 졸업. 미국 존스홉킨스 대학원 졸업. 철학 박사. 연세대. 서울대 교수 역임. 학자 특유의 논리적인 필치로 수필을 쓴 인물. 수필집으로 "웃는 갈대" "빛이 그리운 생각들" "흐르지 않는 세월" 등이 있고 "윤리와 정치" "한국 대학생의 가치관" "새 인간상의 정초" 등 저서가 있다. 인간의 존엄성과 성실(3/3) 3 '성실'이란, 첫째로 참됨에 대한 사랑이요, 둘째로는 인간에 대한 사랑이며, 셋째로는 참됨과 인간에 대한 사랑을 실천에 옮기는 강한 용기라고도 해석할 수가 있다. 이와 같이 해석할 때, '성실'을 인생의 길에 있어서 근본적인 원리라고 숭상해 온 것은 비단 유교 내지 우리 동양만의 전통이 아님을 알 수 있다. 동서 고금의 여러 나라와 여러 시대는 가기 고유하고 특색 있는 윤리 내지 가치의 체계를 발전시켜 왔으나 어느 나라, 어느 시대의 체계에 있어서나 성실은 도덕적 행위의 가장 기본적인 요청으로서 숭상되어 왔던 것이다. 서양의 윤리 사상에 있어서도 '성실'은 올바른 인간 생활의 기본 원리로서, 예나 지금이나 한결같이 숭상되어 왔다. 소크라테스를 위시한 그리스의 철학자들은 '지는 곧 덕'이라 하여 참된 인식을 매우 중요시했거니와, 그들이 말하는 '지', 즉 참된 인식은, 단순한 사실에 대한 지식을 일컫는 데 그친 것이 아니라, 올바른 삶을 위한 실천의 지침으로서의 지혜를 포함했던 것이다. 따라서, 그것은 우리가 말하고 있는 '성실'과도 근본에 있어서 상통하는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 중세기에 들어와서 서양의 사상계를 장악한 것은 기독교였으며, 기독교에 있어서 가장 주요한 덕으로서 숭상을 받은 것이 '사랑'과 '믿음' 이라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그리고, '사랑'과 '믿음'이 성실한 마음을 떠나서 진실한 것이 될 수 없다는 것도 조금만 생각하면 누구나 다 알 수 있는 상식이다. 그러므로, 서양의 중세 사상 또는 기독교 사상에 있어서도 역시 '성실'은 가장 기본적인 덕목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르네상스를 거쳐 근세로 시대가 바뀐 뒤에도, 철학 사상과 사회 사상에 놀랄 만한 변화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성실'의 덕을 숭상하는 정신만은 그대로 이어 내려 왔다. '르네상스'라는 정신 혁명을 일으킨 사상의 흐름을 '휴머니즘'이라고 부르거니와, 그 휴머니즘의 핵심은 인간이 인간 자신에게 충실하고자 하는 굳센 정신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제도나 권위 또는 화석화한 고정 관념의 굴레를 벗어나서, 인간 자신이 진실로 믿는 바를 따라서 생각하고 말하며 행동하기를 결심한 용기가, 르네상스라는 크나큰 변화를 가져왔던 것이다. 그리고, 인간이 인간 자신의 신념에 충실하고자 하는 마음, 이것은 곧 '성실'의 정신에 통하는 것이다. 자기 스스로를 속이고 배반하는 것보다 더 크게 '성실'의 정신에 어긋나는 태도를 생각할 수 없는 것이 아닐까. 인간이 자신의 신념에 충실하고자 한 르네상스 이래의 시대 정신은 여러 가지 방면에 여러 가지 형태로 나타난다. 문학과 미술에 있어서는, 종교에 예속되어 있던 종정의 지위를 탈피하여 예술을 위해서 예술에 몰두하는 자주적 예술가들의 탄생을 보았으며, 작가의 눈에 비친 인간과 자연을 있는 모습 그대로 표현하는 세속주의적이며 인간주의적인 새로운 기풍의 대두를 보았다. 새로운 시대 정신이 종교와 교회 내부에서 발휘되었을 때 이른바 '종교 개혁'이라는 큰 운동이 전개되었거니와, 루터를 비롯한 종교 개혁 지도자들이 한결같이 역설한 것은 외면적 형식의 종교를 물리치고 내면적 양심의 종교를 세워야 한다는 것이었으며, 그들이 공통적으로 강조한 것은, 물질로써 행하는 선업보다도 정신으로써 행하는 신앙이 본질적으로 소중하다는 가르침이었다. 이 새로운 움직임의 원동력이 된 것은 역시 인간이 자기 자신의 내면적 요구에 충실하고자 하는 마음, 즉 '성실'의 정신이었음이 분명하다. 17세기 이후 새로운 방향으로 활발하게 전개된 대륙 및 영국의 철학 사상에서도, 우리는 역시 '성실'의 정신이 바탕에 깔려 있음을 찾아볼 수 있다. 조금이라도 의심스러운 것은 모두 배제하고 오직 확실하고 명백한 것만을 근거로 삼아야 한다고 역설한 데카르트의 '방법론'에서, 그리고 생명을 위태롭게 하는 박해의 위협과 많은 돈이나 높은 지위를 약속하는 크나큰 유혹 앞에서도 흔들림이 없이 오로지 자기의 신념이 가리키는 길을 따라서 살다가 죽은 스피노자의 생애에서, 우리는 '성실한' 마음의 극치를 발견한다. 버클리, 로크, 흄 등이 대표하는 '경험론'은 데카르트나 스피노자의 '합리론'과는 근본적으로 맞서는 철학의 체계로 알려져 있으나, 여기에서도 역시 인간이 자신에 대하여 충실하고자 하는 정신이 유감없이 발휘되고 있음을 간과할 수 없다. 대륙의 합리론자들이 그랬듯이 영국의 경험론자들도 역시 확실하고 명백한 것만을 철학적 탐구의 발판으로 삼을 것을 꾀하였다. 다만, '확실하고 명백한 것이 무엇이냐?'는 물음에 관해서 합리론자들과 경험론자들이 스스로에게 준 대답이 서로 달랐던 까닭에 결과에 있어서 그들은 크게 대립되는 두 가지의 철학 진영으로 갈라지게 되었던 것이다. 즉, 선천적으로 이성에 주어져 있는 관념이 가장 믿을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 대륙의 학자들은 합리론에 이끌려 갔고, 감관에 비친 경험적 심상이 가장 틀림없는 사실이라고 믿은 영국의 학자들은 경험론으로 이끌려 갔던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모두 인간 자신의 능력을 믿었고, 자신이 믿는 능력을 따라서 충실하게 사유하고 행동하려고 애쓴 점에 있어서, 모두 성실한 마음의 주인공들이었다. 대륙의 합리론과 영국의 경험론을 한층 높은 단계에서 종합하여 근세 철학을 크게 체계화한 칸트에게서, 우리는 '성실한'마음의 가장 뚜렷한 구현을 본다. 칸트의 철학에는 그 모든 방면에 성실의 정신이 깃들여 있다고 보아야 가겠지만, 특히 그의 윤리 사상에서, 그리고 그의 실천 생활에서, 우리는 '성실한'마음의 모범적인 구현을 보고도 남는다. 칸트가 실천 이서의 근본 법칙으로서 정립한 '네 의지의 준칙이 항상 동시에 보편적 입법의 원리로서 타당하도록 행위하라.'는 가르침은, '네가 원하지 않는 것을 남에게 하지 말라.'고 한 공자의 가르침과 같은 정신의 표현이요, '저 자신을 포함한 모든 인격에 있어서의 인간성을 항상 동시에 목적으로서 대우하고, 결코 단순한 수단으로 사용하지 말라.'고 한 칸트의 가르침은, 인간의 존엄성을 믿는 근대 인권 사상의 근본 정신을 철학적 언어로써 집약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저 공자의 가르침이나 인권 사상은 모두 성실한 인간 정신의 산물이며, 성실한 마음 없이 그 참뜻을 이해하기 어려운 철학이다. 현대는 물량 문명의 거센 물결 속에서 인간이 자기 자신을 상실할 정도로 어지럽기 짝이 없는 시대다. 인간이 그 본연의 모습을 상실한다 함은,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 것, 즉 성실성을 잃는다는 뜻도 포함한다. 금전과 권력 또는 헛된 이름의 노예가 되는 가운데, 인간 본연의 성실한 마음을 찾아보기 어려운 것이 현대의 가장 큰 불행이라고 식들은 말한다. 그러나, 성실한 마음을 찾아보기 어려움을 걱정하는 바로 그 심정 가운데 역시 성실을 희구하고 성실을 열망하는 마음은 살아 있는 것이다. 어지러운 현실 속에서 비틀거리면서도 현대인 역시 마음의 깊은 곳에서는 성실을 갈망하고 있는 것이다. 현대의 철학자들이 각각 자기들 나름의 관점에서 성실의 회복을 꾀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겠거니와, '성실'의 문제를 가장 직접적으로, 그리고 심각한 각도에서 다룬 사람들은 실존주의 사상가들이라 하겠다. 실존주의 철학자들이 강조한 '성실'의 개념은 서양 윤리학에서 보통 말하는 '성실'과 같은 것이 아니며 더욱이 유교에서 가르친 '성'과는 거리가 먼 것임에는 틀림없으나, '진실되고 속임이 없이 나 자신의 본연의 모습으로 되돌아가기를' 역설한 점에 있어서는 우리가 말하고 있는 '성실'과 연결되는 것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실존주의 사상에도 여러 갈래가 있었으니, 모든 실존주의자들이 같은 뜻의 '성실'을 문제삼은 것이 아니며, 그들이 강조한 역점에도 개인에 따르는 차이는 있었다. 니체와 같이 저속한 물질 문명 속에서 대중화하고 평균화하여 옹졸하게 된 인간의 현재를 초월하고, 인간 자체의 본성을 성실하게 추구하면서 병들고 오염된 인생을 안이와 자기 기만으로 받아들여 어물어물 살아 갈 것이 아니라, 솔직하고 용감하게 극도의 회의와 허무를 직시함으로써, 다시 절망을 극복하고 참된 창조적 인생을 되찾으라고 가르친 사람도 있었다. 또한, 하이데거와 같이, 퇴폐적인 일상 생활 속에서 평범한 세상 사람으로 타락 해 있는 현재의 나를 단호한 결단으로써 박차고 나와 죽음을 앞에 둔 유한자 인간으로서 무를 용감하게 받아들이는 본래적인 자기 자신에게로 되돌아와, 상식과 호기심, 그리고 모호한 생각 등으로 인하여 가려진 비진리의 상태로부터 나 자신을 탈환함으로써 인간 내지 실존의 참모습을 그 본래성과 전체성에 있어서 드러내도록 하라고 역설한 철학자도 있었다. 그리고, 사르트르와 같이, '인간의 실존은 본질보다 앞선다'는 전제 위에서, 창조자로서의 자유로운 판단으로 가치의 척도를 설정하고, 이 척도를 따라서, 추악하고 타락해 있는 현실을 적극적인 참여로써 성실하게 개조하라고 호소한 사상가도 있었다. 뿐만 아니라, 마르셀과 같이, 나와 나 자신, 나와 너, 나와 신이 서로 교제 하는 공동적 참여 속에서 내가 바치는 '성실'의 정도를 따라서 '존재'의 정도가 좌우된다고 전제하고, 우리가 모든 것을 기울여 헌신해야 할 절대자인 신에게 성심과 성의를 다하여 대할 때 신이 내 앞에 존재하게 될 것이라고 선언하여, 성실한 신앙으로써 참되고 영원한 희망을 찾으라고 설교한 스승도 있었다. 이와 같이,'성실성'을 힘주어 주장한 실존주의자들이 마음 속에 형성했던 '성실'의 개념은, 그들의 철학 내지 인생의 문제를 바라본 각도의 차이에 따라서 개인적인 차이를 가졌으나, 그들의 사상의 바탕에는 뚜렷이 일치하는 공통의 흐름이 있었다. 돈과 기계와 헛된 이름으로 병든 불량 문명 속에서 타락하고 속물화하여 그 본래의 모습을 상실한 우리 인간이, 솔직한 마음으로 우리 자신을 반성하고 용감한 결심으로 바른 길을 선택하여, 인간다운 인간 본연의 모습으로 되돌아가, 성실하게 생각하고 성실하게 행동할 것을 역설한 점에 있어서는, 그들의 가르침은 하나의 공통된 흐름을 이루었던 것이다.
웃음이 묻어나는 편지 - MBC 예술단 엮음 하나 추억이라는 이름의 웃음여행 바지로 닦아버릴 거야 저는 환갑이 된 젊은 늙은이인데 우리집은 3대가 함께 삽니다. 손자, 손녀, 며느리, 아들, 그리고 우리 내외가 아담한 아파트에서 생활을 하는데 항상 엄청 바쁘게 살아가는 고등학교 선생님인 며느리와 같이 살다 보니 6살된 손자놈이 어찌나 저를 따르는지 심지어 병원에 가서 주사를 맞을 때 아픔을 못이겨 울음을 터트릴 때도 ‘엄마’하며 우는게 아니라 우리집 상준(손자 이름)이는 이런 경우에도 ‘할아버지’를 불러 담당의사가 ‘이 애는 엄마가 없느냐?’고 물을 정도로 저를 지독히 따르는 놈이이지요. 웃움보가 터질 얘기는 지금부터입니다. 제가 출근 준비를 하느라 큰방 화장실에서 칫솔에 가득 치약을 묻혀 양치질을 하고 있는데 상준이가 거실 쪽 화장실에서 큰 일을 보고 뒤처리를 하려고 엉덩이를 하늘로 쳐들고 허리는 잔뜩 구부린 자세로 저를 부르는 거예요. 제딴에는 무척 다급하고 힘겨운 동작이겠지요. 하지만 그건 제 사정이지요. 그 동작을 보지 않는 저는 다급할 게 하나도 없지요. 처음에는 ‘할아버지, 할아버지, 할아버지, 할아버지-.’하며 부르더군요. 하지만 전 압안 가득 칫솔거품이 넘칠 지경인데 대답할 수가 없지요. 그래서 좀 뜸을 들였더니 이젠 좀 다급해진 소리로 부르더군요. ‘이재춘씨, 이재춘씨, 이재춘씨!’ 상황이 이렇게 되고보니 이젠 제편에서 대답할 상황이 됐다 해도 괘씸한 생각이 들어 대답을 못한 게 아니라 안했지요. 얼씨구! 다음에 들리는 손자녀석의 더 큰 목소리는 절 매우 당황스럽게 하더군요. ‘재춘아, 재춘아, 재춘아, 빨리와서 닦아주지 않으면 아래 바지로 모두 닦아 버릴거야.’ 그제야 제가 물로 입안을 정리하고 녀석있는 데로 쫓아가 때릴 듯 노려보고 한마디 했죠. ‘할아버지 이름을 네 친구 이름 부르듯 부르는 막된놈이 누가 있느냐.’ 그런데 이녀석은 겁도 없이 이렇게 대답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할아버지라고 부를 때 바로 왔으면 이름 안 불렀을것 아니야. 다음에도 급할 때 불러서 안 오면 할아버지 이름을 부를 테니 내 기분 건드리지 말어 응?’ 할말을 잊은 저는 누가 잘못한 것인지 결론을 못 내렸답니다. 거시기가 뭐시기여 저는 고향이 전남 나주 고흥반도의 섬중 하나인 나로동에서 태어나 14년을 그곳에서 살았습니다. 고향의 같은 동네에서 자란 친구들이 저를 포함해서 모두 여섯 명이 있었는데 그중에 오늘 소개할 주인공인 ‘김거식’, 클거자에 심을식자, 뭘 크게 심으라고 지은 이름인지 모르겠습니다만 하여간 오늘 이 친구의 얘기를 좀 하겠습니다. 그때가 아마 초등학교 6학년 봄이었던 것 같습니다. 학교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데 눈에 띄는 자그마한 딸기밭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더라구요. 장난기 많고 용감무쌍했던 저의 주동하에 일제히 저희들은 최대한 낮은 포복으로 딸기밭을 이리저리 기어다니며 크고 잘 익은 딸기만 골라 먹어댔습니다. 한마디로 딸기밭은 엉망이 돼버린 거죠. 그런데 딸기를 따먹느라 정신이 팔렸던 터라, 아까부터 이상한 냄새가 나는 것도 전혀 몰랐습니다. 어쩐지 밭이 질퍽하다 했더니 아 글쎄 딸기밭에 거름준다고 뭐시냐 그걸 뿌려놨더라구요. 겨우 그 사실을 알앗을 때는 이미 때가 늦었죠. 옷은 흙에다 그거에다 완전히 ‘냄새나는 거지’ 그 자체였습니다. 결국 그 냄새 때문에 우린 잡혔습니다. 두 놈은 그 와중에도 도망을 갔고, 제일 많이 묻었던 우리 네 놈만 주인아저씨한테 끌려갔습니다. 어린 저희들이었기에 고개를 푹 숙이고 무조건 잘못을 빌었는데 아저씨는 학교에 알려 혼내야한다, 부모님께 찾아가 보상을 받아야 한다며 어디 사는 누구냐를 물었습니다. 하나 둘씩 대답을 했죠, 우선 제가 먼저, “예 저는 아랫동네네 사는 희탭니다.” 또 한 녀석도 “예, 저도 같은 동네 장환입니다” “또 세 번째 녀석도”예 같은 동네 순돌입니다“ 그런데 마지막으로 김거식이란 놈 차레였는데, 이 녀석이 겁이 많이 났는지 막 더듬더라구요. “예, 저... 저... 저는 거...거...거식긴데요” 아저씨왈 “뭐 거시기, 애 임마, 이름대라니까 거시기는 무슨놈의 거시기야? 이름이 뭐야?” 그러자 얘는 더 놀라서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대답했습니다. “예, 저는 거시기 맞는데요? 진짜 거시기라니까요” “이 짜식이, 거시기가 니 이름이냐? 마빡에 피도 안 마른게 거시기는 알아가지구. 야 임마, 너도 거시기 달고 다니냐? 아저씨는 자길 놀리는 줄 알고 마구 화를 내는 겁니다. 우리는 쪼그라들어서 더 이상 아무 밀도 못하고 마주보며 서로의 뺨을 때리는 벌을 받고 풀려났습니다. 이렇게 일차 거시기 사건을 마치고 다음해에 중학교에 입학을 했습니다. 하나밖에 없는 중학교라 근처 다섯개의 초등학생들이 모두 그 중학교로 몰려오눈데 처음 만나는 남자, 여자들이 대부분이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김거식군의 이름이 또 문제였습니다. 남자애들은 괜찮은데 여자애들은 거식이의 이름을 부르는게 쿤 애로사항 중의 하나였습니다. “야, 거식아? 그게 이름이여, 물건이여?” 정말 학기초엔 매일 그 이름 때문에 부르는 사람이나 듣는 사람이나 큰 곤욕을 치러야 했습니다, 학생들이 선생님께 질문을 하면 이런 저런 대답을 하면서 “거시기 뭐냐?” 이럴 때마다 김거식은 “예”하고 대답하기 일쑤였습니다. 그래도 몇 개월 지나니까 좀 덜해지더러구요. 이제는 얼굴 붉힐 일 없으려니 하고 방심한 채 같이들 집에 가던 길이었습니다. 왠 50대 중반의 아줌마가 걸어오시더니 우리들 앞에 멈춰서시는 게 아닙니까? “ 왜 그러세요 아줌마?” 그 아줌마는 우리들 얼굴을 번갈아 쳐다보시며 말하셨습니다. “음 요놈은 어디에 누구 새끼고? (웃어른의 표현이 그렇더러구요, 자식을 새끼라고 하시더만요.) 요놈은 누구네 새끼고?" 그러더니 김거식이를 보시면서는 이렇게 말하는 겁니다. "그런데 가만 있자, 또 저놈은? 아, 저놈은 거시기 새낀데." 뭔가 헷갈리시면서 그대로 욕이 돼버리는 순간이었죠. 거식이가 대답했습니다. "아줌마 제 이름이 거식입니다. 김씨네 둘째 아들 김거식입니다." "맞다, 맞어. 거시기, 거시기지." 아주머니는 거식이의 말을 듣고서야 생각이 났다시며 가던 길을 가셨습니다. 이 친구는 이렇듯 사건도 사연도 많았지만 6개월 전에 결혼을 해서 잘살고 있습니다. 이제 아들, 딸을 낳으신 사람들이 그러겠죠? '거시기 새끼네'라고요. 늘 기억나는 친구를 팔아봤습니다. 표현이 좀 이상했어도 제게는 너무도 소중한 옛날의 추억거리들입니다.
Board 삶 속 글 2023.01.03 風文 R 513
묵적지수(墨翟之守) 墨:먹 묵. 翟:꿩 적. 之:갈 지(…의). 守:지킬 수. [준말] 묵수(墨守) [출전]《墨子》〈公輸盤篇〉 ‘묵적의 지킴’이란 뜻. 곧 ① 자기 의견이나 주장을 굽히지 않고 끝까지 지킴. ② 융통성이 없음의 비유. 춘추 시대의 사상가로서 ‘자타 차별 없이 서로 똑같이 사랑하고 이롭게 하자’는 겸애교리설(兼愛交利說:兼愛說)과 비전론(非戰論)을 주창한 묵자[墨子:이름은 적(翟), B.C. 480~390]의 이야기이다. 초(楚)나라의 도읍 영[호북성(湖北省) 내]에 도착한 묵자는 공수반(公輸盤)을 찾아갔다. 그가 초왕을 위해 운제계(雲梯械)라는 새로운 공성기(攻城機:성을 공격하는 기계)를 만들어 송(宋)나라를 치려 한다는 말을 들었기 때문이다. “북방에 나를 모욕하는 사람이 있는데 그대가 나를 위해 죽여 줄 수 없겠소?” 그러자 공수반은 불쾌한 얼굴로 대답했다. “나는 의(義)를 중히 여기는 만큼 살인은 안하오.” “사람 하나 죽이지 않는 게 ‘의’라면 왜 죄 없는 송나라 백성을 죽이려 하시오?” 답변에 궁한 공수반은 묵지를 초왕 앞으로 안내했다. “전하, 새 수레를 소유한 사람이 이웃집 헌 수레를 훔치려 하고 비단옷을 입은 사람이 이웃집 누더기를 훔치려 한다면 전하께서는 이를 어떻게 생각하시겠나이까?” “그건 도벽이 있어서 그럴 것이오.” “하오면, 사방 5000리 넓은 국토에다 온갖 짐승과 초목까지 풍성한 초나라가 사방 500리밖에 안되는 가난한 송나라를 치려 하는 것과 무엇이 다르옵니까?” “과인은 단지 공수반의 운제계를 한번 실험해 보려 했을 뿐이오?” “하오면, 외신(外臣)이 여기서 그 운제계에 의한 공격을 막아 보이겠나이다.” 이리하여 초왕 앞에서 기묘한 공방전이 벌어지게 되었다. 묵자는 허리띠를 풀어 성 모양으로 사려 놓고 나뭇조각으로 방패를 만들었다. 공수반은 모형 운제계로 아홉 번 공격했다. 그러나 묵자는 아홉 번 다 굳게 지켜냈다. 이것을 본 초왕은 묵자에게 송나라를 치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Board 고사성어 2023.01.03 風文 R 1256
말하는 입 입이 하는 일이 적지 않다. 먹기, 말하기, 노래하기, 숨쉬기, 사랑하기, 토하기. 물어뜯기도! 혼자서는 할 수 없고 순간순간 다른 신체 기관과 연결되어야 한다. 입의 이런 역할은 단어를 만들 때도 발자국처럼 따라다닌다. ‘입요기’ ‘입가심’ ‘입걱정’ ‘입덧’ 같은 말은 ‘먹는 입’과 관련이 있다. ‘입바람’ ‘입방귀’는 ‘숨 쉬는 입’과 연결된다. ‘입맞춤’은 당연히 ‘사랑하는 입’이겠고. 인간은 말하는 기계인지라, ‘입’이 들어간 단어에는 ‘말하기’와 관련된 게 많다. 입단속이야말로 평화의 지름길이란 마음으로 ‘말하는 입’ 얘기를 중얼거린다. 아침 댓바람부터 입담 센 몽룡과 입놀림 가벼운 춘향이 입방아를 찧는다. 서로 꿍짝이 맞아 입씨름 한번 없이 하나가 떠들면 하나는 “오호! 그래?” 하며 입장단을 맞춘다. 두 사람의 입길에 오르면 멀쩡한 사람도 순식간에 몹쓸 사람이 되어 입소문이 퍼진다. 이번엔 길동이가 입초시에 올랐다. 입바른 소리만 하지 제대로 할 줄 아는 게 없어 미움을 사고 있다는 것. 입심 좋기로 둘째가라면 서러울 길동은 두 사람을 살살 구슬리는 입발림 소리도 해봤지만 입막음이 되지 않았다. 급기야 그렇게 입방정을 떨다가는 큰코다칠 거라고 겁박을 했더니 그제야 수그러들었다.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오직 자기 발밑을 살피는 길뿐이다(조고각하, 照顧脚下). 발밑만큼이나 입도 잘 살피시길. 입에 담지 못할 말은 입에 담지 않으며, ‘입만 살았다’는 비아냥을 안 듣기 위해서라도 몸과 마음이 함께 살아 있는 새해가 되길 비나이다. 김진해 | 한겨레말글연구소 연구위원·경희대 교수
Board 말글 2023.01.03 風文 R 2942
한국대표수필 - 김동리 외 9명 "김태길편" 김태길(1920~2009) 철학자. 수필가. 충북 중원 출생. 서울대 철학과 및 대학원 졸업. 미국 존스홉킨스 대학원 졸업. 철학 박사. 연세대. 서울대 교수 역임. 학자 특유의 논리적인 필치로 수필을 쓴 인물. 수필집으로 "웃는 갈대" "빛이 그리운 생각들" "흐르지 않는 세월" 등이 있고 "윤리와 정치" "한국 대학생의 가치관" "새 인간상의 정초" 등 저서가 있다. 인간의 존엄성과 성실(2/3) 2 '성실'이란, 쉽게 말하자면 '정성스럽고 참되어 거짓이 없음'을 말한다. '성, 실' 두 글자 가운데서 보다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성이며, '성'이 유교의 도덕 사상 가운데 있어서 매우 중요한 개념이라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성'의 개념을 깊이 다룬 유교의 고전으로서 '중용'이 널리 알려져 있거니와, '중용'에서는 '성'을 단순한 윤리적 개념으로 이해함에 그치지 않고, 하나의 형이상학적 개념으로 정립함으로써, 윤리의 절대적인 바탕으로 삼을 것을 꾀하고 있다. '중용'에, '성실한 것은 하늘의 도다. 성실하고자 힘쓰는 것은 사람의 도다.'라는 구절이 있다. 이 구절의 본뜻을 알기 쉽게 풀이하기는 쉬운 일이 아니지만, 대체로 두 가지의 해석이 가능할 것으로 본다. 그 첫째는, 성실을 '천리의 본연'이라고 이해한 주자학의 전통을 따라서, '성실은 천지 자연의 이법으로서, 만물의 실재와 생성을 좌우하는 기본 원리이며, 이 성실의 원리를 본받아서 진실하고 거짓이 없어 조금도 망령됨이 없도록 살기에 힘쓰는 일은 인간의 도리다.'라는 뜻으로 이해하는 길이다. 둘째는, 정현의 해석을 따르는 것으로서, '본래부터 성실의 경지에 도달해 있는 것은 하늘이 낳은 성인의 도요, 수양과 노력으로써 성실의 덕을 닦고자 힘쓰는 것은 범용한 일반인의 도다.'라는 뜻으로 이해하는 길이다. 위에 인용한 '중용'의 구절 바로 다음에 나오는 말을 보면, 둘째 번 해석이 보다 합리적인 것 같은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러나 '중용'의 다른 여러 구절들을 종합해 볼 때, 역시 첫째 번 해석을 따르는 것이 무난할 것으로 보인다. 성 또는 성실을 천지 자연의 근본 원리로 보든 혹은 인간적 행위의 세계에 국한된 원리로 보든 그것이 우리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 가장 기본적인 원리라고 믿는 것이 유교 사상의 전통이라는 점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공자는 지, 인, 용을 덕의 가장 주요한 것으로 가르쳐 왔거니와, 그 지, 인, 용의 공통된 바탕을 이루는 것이 바로 성인 것이다. 유교에 있어서 성은 실로 인격을 완성하고 통일하는 기본 원리다. 성을 천지의 도니 자연의 이법이니 하여, 형이상학적인 관념을 끌어들인다면, 이야기는 어려워질 것이다. 그러나 형이상학의 문제를 떠나서 일상 생활에 있어서의 행위의 원리로서 볼 때, 성이 뜻하는 바가 무엇인지 우리들의 상식으로도 그 윤곽은 알 수 있음직하다. 쉽게 말해서, 성실이란 무엇보다도 진실하고 거짓이 없음을 가리키는 개념이다. 다만 여기서 진실하고 거짓이 없다 함은 단순히 남을 속이는 일이 없다는 뜻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남을 대할 때나 자기 자신에 대해서나 정성을 다한다는 뜻도 포함되어 있다. 거기에는 인간에 대한 깊은 사랑이 깔려 있으며, 처지를 바꾸어 남의 사정을 깊이 고려하는 너그러움이 있다. 성실의 도는 결코 멀리 있는 어려운 것이 아니다. 사람이면 누구나 가지고 있는 '자연의 정'을 따라서 삼가 생각하고 삼가 행동하는 가운데에 바로 성실이 있다. 그러기에 '중용'에도, '도는 사람으로부터 멀지 않다. 사람이 도라고 하면서 사람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다면 그것은 도라고 말 할 수 없다.'고 한 공자의 말씀을 인용하여, 도덕의 근본 원리가 우리들의 마음 속에 있음을 강조하고 있다. 성실의 길은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에게 가까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그것을 헛되이 먼 곳에서 구할 것이 아니라, 가까운 일상생활 속에서 찾아야 한다. 자기가 현재 처해 있는 그 자리에서 자기 앞에 닥친 일에 관하여 비록 그것이 사소한 일같이 보이더라도, 일거일동을 참되게 함으로써 말과 행동 사이에 어긋남이 없도록 하는 것이 곧 성실을 실천하는 길이다. '중용'에,'일상 행해야 할 중용의 덕을 실천하고, 일상 생활에서의 말을 삼감으로써, 행동에 부족함이 있으면 힘을 다하여 애쓰고, 말에 지나침이 없도록 힘써 조심한다. 말은 행동을 돌이켜보고 행동은 말을 돌이켜본다.'라고 한 것은 바로 이 점을 말한 것으로 이해된다. '말 한 마디 할 때마다 조심을 하고, 행동 하나 할 때마다 앞뒤를 생각하라.'는 유교의 가르침은 현대인에게는 지나치게 근엄한 것으로 여겨질 것이다. 그러나 성실의 근본 정신이 지나치게 근엄하고 쉴사이없는 긴장 속에 조심만을 거듭하는 데 있는 것은 아니다. 현대적인 감각으로 말한다면, '성실'이란 무엇보다도 자기 자신에게 충실한 동시에 남에게도 충실한 마음의 자세를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유교적 해석을 따른다 하더라도, '성실'의 근본은 '진실되고 거짓이 없음'에 있는 것이요, 도학자적인 근엄성이나 실수할 것을 두려워하는 위축된 소심성에 있는 것은 아니다. 마음의 깊은 곳이 옳다고 믿는 바를 따라서 말하고 행동하는 것은 다름아닌 성실의 덕이라고 보아야 한다면, 성실은 참된 용기를 포함하는 것이며, 적극적인 행위의 원리이기도 하다. 그러기에, 유교의 지도적 사상가들은 성을 지와 인과 용이 그 가운데 포함되는 큰 원리로 보고, 인격의 완성을 위한 가장 근본적인 덕목으로서 이해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