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대표수필 - 김동리 외 9명 "김태길편" 김태길(1920~2009) 철학자. 수필가. 충북 중원 출생. 서울대 철학과 및 대학원 졸업. 미국 존스홉킨스 대학원 졸업. 철학 박사. 연세대. 서울대 교수 역임. 학자 특유의 논리적인 필치로 수필을 쓴 인물. 수필집으로 "웃는 갈대" "빛이 그리운 생각들" "흐르지 않는 세월" 등이 있고 "윤리와 정치" "한국 대학생의 가치관" "새 인간상의 정초" 등 저서가 있다. 인간의 존엄성과 성실(2/3) 2 '성실'이란, 쉽게 말하자면 '정성스럽고 참되어 거짓이 없음'을 말한다. '성, 실' 두 글자 가운데서 보다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성이며, '성'이 유교의 도덕 사상 가운데 있어서 매우 중요한 개념이라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성'의 개념을 깊이 다룬 유교의 고전으로서 '중용'이 널리 알려져 있거니와, '중용'에서는 '성'을 단순한 윤리적 개념으로 이해함에 그치지 않고, 하나의 형이상학적 개념으로 정립함으로써, 윤리의 절대적인 바탕으로 삼을 것을 꾀하고 있다. '중용'에, '성실한 것은 하늘의 도다. 성실하고자 힘쓰는 것은 사람의 도다.'라는 구절이 있다. 이 구절의 본뜻을 알기 쉽게 풀이하기는 쉬운 일이 아니지만, 대체로 두 가지의 해석이 가능할 것으로 본다. 그 첫째는, 성실을 '천리의 본연'이라고 이해한 주자학의 전통을 따라서, '성실은 천지 자연의 이법으로서, 만물의 실재와 생성을 좌우하는 기본 원리이며, 이 성실의 원리를 본받아서 진실하고 거짓이 없어 조금도 망령됨이 없도록 살기에 힘쓰는 일은 인간의 도리다.'라는 뜻으로 이해하는 길이다. 둘째는, 정현의 해석을 따르는 것으로서, '본래부터 성실의 경지에 도달해 있는 것은 하늘이 낳은 성인의 도요, 수양과 노력으로써 성실의 덕을 닦고자 힘쓰는 것은 범용한 일반인의 도다.'라는 뜻으로 이해하는 길이다. 위에 인용한 '중용'의 구절 바로 다음에 나오는 말을 보면, 둘째 번 해석이 보다 합리적인 것 같은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러나 '중용'의 다른 여러 구절들을 종합해 볼 때, 역시 첫째 번 해석을 따르는 것이 무난할 것으로 보인다. 성 또는 성실을 천지 자연의 근본 원리로 보든 혹은 인간적 행위의 세계에 국한된 원리로 보든 그것이 우리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 가장 기본적인 원리라고 믿는 것이 유교 사상의 전통이라는 점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공자는 지, 인, 용을 덕의 가장 주요한 것으로 가르쳐 왔거니와, 그 지, 인, 용의 공통된 바탕을 이루는 것이 바로 성인 것이다. 유교에 있어서 성은 실로 인격을 완성하고 통일하는 기본 원리다. 성을 천지의 도니 자연의 이법이니 하여, 형이상학적인 관념을 끌어들인다면, 이야기는 어려워질 것이다. 그러나 형이상학의 문제를 떠나서 일상 생활에 있어서의 행위의 원리로서 볼 때, 성이 뜻하는 바가 무엇인지 우리들의 상식으로도 그 윤곽은 알 수 있음직하다. 쉽게 말해서, 성실이란 무엇보다도 진실하고 거짓이 없음을 가리키는 개념이다. 다만 여기서 진실하고 거짓이 없다 함은 단순히 남을 속이는 일이 없다는 뜻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남을 대할 때나 자기 자신에 대해서나 정성을 다한다는 뜻도 포함되어 있다. 거기에는 인간에 대한 깊은 사랑이 깔려 있으며, 처지를 바꾸어 남의 사정을 깊이 고려하는 너그러움이 있다. 성실의 도는 결코 멀리 있는 어려운 것이 아니다. 사람이면 누구나 가지고 있는 '자연의 정'을 따라서 삼가 생각하고 삼가 행동하는 가운데에 바로 성실이 있다. 그러기에 '중용'에도, '도는 사람으로부터 멀지 않다. 사람이 도라고 하면서 사람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다면 그것은 도라고 말 할 수 없다.'고 한 공자의 말씀을 인용하여, 도덕의 근본 원리가 우리들의 마음 속에 있음을 강조하고 있다. 성실의 길은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에게 가까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그것을 헛되이 먼 곳에서 구할 것이 아니라, 가까운 일상생활 속에서 찾아야 한다. 자기가 현재 처해 있는 그 자리에서 자기 앞에 닥친 일에 관하여 비록 그것이 사소한 일같이 보이더라도, 일거일동을 참되게 함으로써 말과 행동 사이에 어긋남이 없도록 하는 것이 곧 성실을 실천하는 길이다. '중용'에,'일상 행해야 할 중용의 덕을 실천하고, 일상 생활에서의 말을 삼감으로써, 행동에 부족함이 있으면 힘을 다하여 애쓰고, 말에 지나침이 없도록 힘써 조심한다. 말은 행동을 돌이켜보고 행동은 말을 돌이켜본다.'라고 한 것은 바로 이 점을 말한 것으로 이해된다. '말 한 마디 할 때마다 조심을 하고, 행동 하나 할 때마다 앞뒤를 생각하라.'는 유교의 가르침은 현대인에게는 지나치게 근엄한 것으로 여겨질 것이다. 그러나 성실의 근본 정신이 지나치게 근엄하고 쉴사이없는 긴장 속에 조심만을 거듭하는 데 있는 것은 아니다. 현대적인 감각으로 말한다면, '성실'이란 무엇보다도 자기 자신에게 충실한 동시에 남에게도 충실한 마음의 자세를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유교적 해석을 따른다 하더라도, '성실'의 근본은 '진실되고 거짓이 없음'에 있는 것이요, 도학자적인 근엄성이나 실수할 것을 두려워하는 위축된 소심성에 있는 것은 아니다. 마음의 깊은 곳이 옳다고 믿는 바를 따라서 말하고 행동하는 것은 다름아닌 성실의 덕이라고 보아야 한다면, 성실은 참된 용기를 포함하는 것이며, 적극적인 행위의 원리이기도 하다. 그러기에, 유교의 지도적 사상가들은 성을 지와 인과 용이 그 가운데 포함되는 큰 원리로 보고, 인격의 완성을 위한 가장 근본적인 덕목으로서 이해했던 것이다.
웃음이 묻어나는 편지 - MBC 예술단 엮음 하나 추억이라는 이름의 웃음여행 총각은 개를 무척 좋아하나봐 이종환 형님, 그리고 최유라씨 혹시 개를 좋아하십니까? 저는 무척 개를 싫어합니다. 그래서 그 개하고 얽힌,정말 싫었던,다시 생각하기도 끔찍한 그런 일을 청취자 여러분들께서는 절대로 겪지 말라는 의도에서 이렇게 서두를 풀어볼까 합니다. 그러니까 이야기는 94년1월 제가 여러가지 이유로 인하여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세상에서 가장 힘든 작업인 백수시절을 보내고 있을때 이야기입니다. 집에서 계속 밤만 축내는 것도 눈치 보이고 또한 한겨울이라 마땅히 다닐 곳도 없던 터라 할 일 없이 이친구 저친구 집을 전전하며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을 때 누군가가 아침에 신문배달을 해보지 않겠느냐며 아침에 운동도 되고 살도 빼고 돈도 벌고 좋지 않겠느냐는 제의를 했습니다. 썩 내키지는 않았지만 그래 집에서 놀면 뭐하냐 한푼이라도 벌러서 눈치밥 좀 면해보자는 심정으로 배달을 시작하게 되었지요. 주택 외곽지역과 아파트 중 배달하고 싶은 곳을 고르라는 국장님의 말을 듣고 전 당연히 주택지역을 원했지요.애냐구요? 아파트는 거의가 4-5층짜리 건물이라 계단을 오르내리는 일이 보통일이 아니고 무엇보다고 주택지역은 오토바이가 지급된다는 말에 무조건 솔깃해서 하겠다고 했지요. 1월 그 매서운 눈보라 속에서도 저는 끗끗이 하루도 빼놓지 않고 한달 정도를 돌렸을까... 이젠 웬만한 코스는 눈 감고도 다닐 정도로 익숙해져 있었지요. 그런데 제가 배달하는 지역은 시골동네라 집집마다 개를 키우는 집이 많았지요. 바로 거기서부터 문제가 시작된 겁니다. 어릴 적부터 '견 공포증'이 있는 저는 아침마다 저를 마중해주는 개들이 정말 싫었지요. 시골에선 다 그렇듯이 개를 묶어 놓고 기르는것이 아니기 때문에 아침만 되면 골목골목에서 저를 반겨주는 개들이 어쩜 그리도 많았는지 하루하루를 긴장과 공포 속에서 지내게 되었지요. 오토바이를 타고 지나가면 따라와 물고, 짖고, 왜 나만 그리 미워하는지 개들이 있는 골목마다 가슴을 졸이며 지나가게 되었지요. 정말 더는 못 참겠더군요. 그래서 신문배달이 3년 정도된 친구녀석에게 구원을 요청했습니다. 맨입으로 안된다는 녀석을 라면 한 그릇과 소주 한병으로 요리하고 그 비결을 듣게 되었지요. “개는 말이다. 무조건 기선을 제압해야한다. 처음에 딱 마주치면 절대로 눈싸움에서 지면 안된다. 개한테 시선을 빼앗기면 엄청 피곤해 지는기다. 처음부터 무조건 인상를 쓰고는 한참동안 노려보는 기다. 그러다가 갑자기 땅바닦에서 돌을 줍는 시늉을 하며 아무소리나 큰소리를 지르는 기다. 욕을 하면 더 좋지. 보통 개들은 욕에 익숙해 있거든. 달려가는 거야. 대개 이쯤이면 거의 95%정도는 개들이 도망갈기다. 만약 그래도 도망가지 않는 녀석이 있거든 분명 지능이 모자라거나 겁이 없는 녀석일기다. 그럴땐 가지고 있던 돌을 사정없이 던지는 기다” 하면서 주머니를 뒤적거리며 보여주는데 까만 윤기가 나는 돌맹이를 다섯 개나 가지고 있지 뭡니까? 자기는 전시를 대비해 늘 소지하고 다닌다나요. 이쯤되면 동네의 모든 개들을 평정하고 그 위에 군림하게 될거라고 하더군요. 그러면서 자기를 따라 오라고 하더니만 자기가 배달하는 동네로 데려가더군요. 그 동네 개들은 그 친구만 나타나면 꼬리를 감추고 도망가는 게 여간 부럽지가 않았습니다. 전 그 다음날 바로 실행에 옮겼지요. 개들이 꽁무니를 빼고 도망가는 모습을 상상하면서 말입니다. 혹시나 싶어 주머니에 넣어둔 돌멩이를 몇 번씩이나 확인하고는 만일을 대비해 좀 크다 싶은 것으로 열개씩이나 주머니에 넣었더니 다니기에 불편했지만 승리의 그날을 위해 참을 수 있었습니다. 마음이 든든하더군요. 그날 전 참으로 약육강식이라는 말을 실감했습니다. 처음 만난 녀석은 누런빛이 나는‘코삐’라는 놈이었습니다.오늘도 역시 으르렁거리며 나타나더군요. 조금 긴장은 했지만 전 주머니의 돌맹이를 믿고 녀석을 똑바로 쳐다보곤 눈에 힘을 주었지요. 녀석은 의외라는 듯이 조금 더 크게 으르렁거렸지요. 여기에 질세라 저는 오토바이에서 뛰어내리면서 입으로 궁시렁궁시렁거리며 눈에 더욱 힘을 주고는 녀석 앞으로 한발 한발 다가갔지요. 녀석의 눈빛이 조금 흔들리더군요. 이때다 싶었죠. “이놈 !” 하면서 바닦에서 돌을 줍는 시늉을 하니까 꽁지가 빠지게 도망가는 겁니다. 통쾌했습니다. 이렇게 쉽게 이기는게 어이없었고 그 동안 당한 것을 생각하니 더욱화가 나더군요. 전 그날 만나는 녀석들마다 초전박살, 임전무퇴, 백전백승이었지요. 그러기를 4일 만에 이제는 녀석들이 내 오토바이 소리만 나도 도망가더군요. 전 무척이나 고무되어 있었습니다. 정말 오장이 시원하고 육부가 날아가는 듯했습니다. 아침마다 고민거리가 없어졌고 배달일은 무엇보다도 즐거웠습니다. 개들한테만은 절대적인 군림자였지요. 그러던 어느날 아침에 한창 배달을 하고 있는데 저 멀리서 누가 부르는 것이었습니다. 평상시에 다니면서 저런집에는 누가 살까? 하고 늘 부러워하던 언덕위의 하얀 집, 아주 정원이 넓은 집에서 내일부터 신문을 넣어 달라는 겁니다. 이게 웬 떡이냐! (신문구독 요청을 받으면 수당도 받고 칭찬도 받고 아주 좋은 일이었지요) 그런데 아주머니께서 자기 집에는 개를 3마리 키우는데 저녁에는 개를 풀어 놓는다는 겁니다. 그래도 대문은 잠가 놓으니까 걱정하지 말라며 대문사이에 꼭 신문을 끼워 달라는 겁니다. 뭐가 문제가 되겠습니까. 저는 걱정하지 말라며 잘 넣어드린다고 인사까지 하고는 속으로 웃었습니다. ‘개가 뭐가 무섭나!’ 자신이 있었지요. 저는 그집의 개들을 쭉 째려 보았습니다. 그리고 눈에 힘을 주었지요. 외국산 개라서 그런지 만만치 않게 쳐다보더군요. 전 씩- 웃으면서 속으로 말했죠. ‘며칠만 기다려라. 귀여운 자식들...’ 그리고 배달하기를 며칠. 저는 새로운 습관이 생겼습니다. 그 집은 언덕위에 있어서 아래에 오토바이를 세워두고 50미터 정도를 올라가서 신문을 대문에 끼워두고는 그 집 개들을 노려보고 주머니의 돌멩이를 한번 보여주고 주먹질도 한번하고 돌아서서 집 나무 밑에서 시원하게 볼 일도(꼭 거기가면 소변이 마렵데요)보고 담배하나를 물고는 유유히 하늘을 보고 다시 개들한테 인상을 쓰고는 내려오는 습관이 생겼습니다. 그 날도 신문을 대문에 끼워놓고 개들을 찾으니 개들이 안 보이는 겁니다, 이 녀석들이 다들 자나? 하고 돌아서서 시원하게 볼일을 보고있는데 느낌이 이상했습니다. 갑자기 뒤꼭지가 근질근질한 것이 아닙니까? 얼른 뒤 돌아 보니, 아 글쎄 그집 개들이 어느샌가 제 뒤로 다가와 제가 볼일을 보고 있는 걸 빤히 보고 있지 뭡니까. 순간 뇌리를 스치는 생각-. 아! 기선을 제압해야 하는데... 그러나 기선을 제압하기엔 보던 볼일도 남아있고 자세도 엉거주춤하고 걱정이 앞서더군요. 누가 대문을 열어논 모양입니다. 그러나 전 저를 달래며 ‘침착’,‘침착’을 중얼거리고는 천천히 아주 천천히 볼일을 마치고 뒤돌아섰지요. 그때까지 녀석들은 외국산 개라서 그런지, 아니면 비겁하게 볼일을 보고있는 사람을 공격하지 않으려고 했는지 아무 행동이 없더군요. 그런데 뒤돌아 서자마자 으르렁거리며 하얀 이빨을 드러내는 것이 아닙니까? 하얀 달빛아래 까만 개들의 코에서 뿜어나오는 하얀 콧김에 아찔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이건 장난이 아니다’ 저녀석들 한테 한 번씩만 물려도 최소한 상이용사 내지는 사망신고서 작성하러 동사무소에 사람보내야 할 것 같은 생각에 빠르게 머리를 굴렸지요. ‘이미 기선을 못 잡았으니 어쩌지?’ 그때 주머니의 돌멩이를 생각하게 되었지요. 그런데 아뿔사! 그 동안 동네 개들 위에 주름답고 다니느라 돌멩이가 필요없어서 모두 버려버린 것이 아닙니까? 후회해도 소용없고 유비무한의 정신을 늘 새기지 못한 제 자신을 원망햇지만 지금은 전시상태라 그것만 생각할 순 없었지요. 설령 있다고 해도 송아지만한 개 세마리를 동시에 이길 수는 없을 거라고 생각하고 다리를 조심스럽게 옮겨 봤습니다, 옮기자마자 으르렁거리며 이빨을 드러내는 것이 아닙니까? 등에서 소름이 쫙 끼치더군요. 많은 생각이 머리속을 지나쳐 갔습니다. 그래서 작전을 바꿨지요. 아주 다정한 목소리로 개들을 향해 말했지요. ‘너희들 나와 있었구나. 잘 잤니? 무척춥지?’ 전 평소에 안 하던 애교를 부리면서 살살 내려갔지요. 아, 그런데 이것들이 내가 발만 옮기면 으르렁 거리는 겁니다. 이거 참 보통 큰일이 아니데요. 이럴 줄 알았으면 평상시에 잘 보일 걸 괜히 인상을 쓰고 겁을 준 걸 후회도 해보았지만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설상가상으로 이 녀석들이 내 주위를 돌며 곧 물어버릴 듯이 으르렁 거리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하지만 가만히 있을 수많은 없는 일 아니겠습니까. 저는 가만히 조심스럽게 바닥에 쭈그리고 앉았지요. 그리고 그중 제일 순하게 생긴 녀석의 머리를 천천히 쓰다듬으면서 ‘착하다. 이쁘다.’를 연발했습니다. 역시 개들은 단순하데요. 그러기를 한 10분 지나니까 이녀석이 이제는 경계심을 풀고 눈을 지그시 감고는 내 무릎 위에 머리를 올려놓고 기어오르려고 하는 겁니다. 다른 녀석들도 서로 쓰다듬어 달라고 머리를 들이미는 것이 아닙니까. 말릴 수가 있어야지요. 한 녀석은 연신 저의 얼굴을 그 징그러운 혀로 문지르고 한 녀석은 무릎위에 머리를 기대고 눈을 감고 있고 또 한 녀석은 자기도 해 달라고 자꾸 파고드는 겁니다. 참아야 한다. 어쨌든 살아나가야 한다는 일념으로 그 수모를 참으며 아줌마를 불렀지요. 그것도 큰 소리로 부르면 녀석들 비위를 거스를까봐 작은 소리로 불렀습니다. “아줌마! 아줌마(아주작은 목소리로)” 들릴리가 있겠습니까? 때는 동지섣달 추운 겨울이라 다들 문을 꼭꼭 닫고 잘 테고 더군다나 새벽3시니... 게다가 주위에 집도 없는 언덕이라 난감하더군요. 여기서 오토바이까지는 50미터. 뛰어가면 될까? 안 되겠지. 이녀석들과 싸워볼까? 안돼! 1대3이면 불리하지. 더군다나 무기도 없고 ... 할 수없다. 끈기로 버티자. 그런데 이때! 갑지기 무릅이 시원해지는 겁니다. 꼭 곰같이 생긴 녀석이 제 무릎위에 걸터앉아서는 볼일을 보는 겁니다. 피할 수도 없었습니다. 많이 참았는지 한참 동안이나 볼일을 보더군요. 그리고는 시원한지 제 얼굴을 혀로 문지르더군요. ‘참아야 한다.’ 시간이 흐르고 30분, 1시간, 2시간... 저는 그 언덕에서 2시간 30분 동안이나 개들의 머리를 쓰다듬고 있어야 했습니다. 한쪽 다리는 젖어서 추위에 얼어있고 이놈 쓰다듬으면 저놈이 으르렁거리고 저놈 쓰다듬으면 저놈이 으르렁거리고 저놈 쓰다듬으면 이놈이 으르렁거리고... 정말 죽고 싶었습니다. 못난 제 자신이 얼마나 한심했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어쩝니까. 그때 그 순간에는 개 소변보다도 추위보다도 흉측스럽게 드러난 그놈들의 이빨이 더 무서웠으니까요. 개머리를 두 시간이상 쓰다듬어 보신 적 있습니까? 그것도 세 마리를 번갈아 가며... 전 해냈습니다. 그 추위와 싸우면서도 그 수모를 견디면서도 오직 살아야 겠다는 일념으로 이겨낸 겁니다. 그리고 2시간 30분 정도가 흐른후 나오신 아줌마! 제게 충격적인 말씀을 하시던군요. “총각은 개를 무지 좋아하나 봐요.” 저 머리에서는 오토바이 시동이 꺼지던군요. 기름이 다 떨어졌던 겁니다. 전 그날 주유소를 찾아서 오토바이를 끌고 추위에 얼은 다리 절룩거리며 다시는 개를 쳐다보지도 않겠노라고 맹세를 하고 또 했습니다. ps. 개들을 사랑합시다. 그리고 자주 쓰다듬어 줍시다. 그렇지 않으면 저처럼 평생 쓰다듬을 일을 하루만에 다 하는 수가 생깁니다. 그리고 전국의 신문 배달사원 여러분!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늘 주머니에 돌멩이를 잊지맙시다.
Board 삶 속 글 2023.01.01 風文 R 539
한국대표수필 - 김동리 외 9명 "김태길편" 김태길(1920~2009) 철학자. 수필가. 충북 중원 출생. 서울대 철학과 및 대학원 졸업. 미국 존스홉킨스 대학원 졸업. 철학 박사. 연세대. 서울대 교수 역임. 학자 특유의 논리적인 필치로 수필을 쓴 인물. 수필집으로 "웃는 갈대" "빛이 그리운 생각들" "흐르지 않는 세월" 등이 있고 "윤리와 정치" "한국 대학생의 가치관" "새 인간상의 정초" 등 저서가 있다. 인간의 존엄성과 성실(1/3) 우리는 인간의 존엄성을 믿는다. 그 사람의 사회적 지위나 문화적 업적에 관계없이. 사람은 누구나 그가 인간이라는 사실로 말미암아 존엄하다고 믿는다. 그러나 과연 인간은 누구나 예외없이 존엄하다고 단언할 수 있는 것일까? 세상에는 의리나 염치 따위는 전혀 찾아볼 수 없는 사람도 있으며, 극악무도한 인간도 있지 않은가? 인간의 형태만 갖추었으면 누구나 무조건 존엄하다고 주장하는 것은 한갓 환상적인 낭만주의적 견해가 아닐까? 우리가 추상적인 사고를 일삼는 동안, 우리는 모든 인간이 예외없이 존엄하다는 것을 말하고 싶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파렴치하기 짝이 없는 인간이나 극악무도한 인간에게서 엄청난 피해를 입었을 때, 과연 그 나쁜 인간에게서 '존엄하다'는 것을 실감할 수가 있을 것인가? 어떤 극악무도한 사람을 상상하고 그 사람에게도 존엄한 일면이 있다는 것을 생각할 수는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내가 몸소 겪은 극악무도한 인간에 대해서, 예컨대 나에게 파렴치하고 잔인한 행위를 거듭하여 나를 크게 괴롭히고 있는 사람에게서 존엄성을 실감하기란 매우 어려울 것이다. 그리고, 이 경우에 있어서 '실감'이라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왜냐 하면, '인간은 존엄하다'는 명제는 하나의 사실 판단이 아니라 가치 판단이며, 어떤 가치 판단이 타당성을 가지기 위해서는 '실감'이 하나의 기본적인 조건으로서 요청되기 때문이다. 우리가 '인간은 존엄하다'고 말할 때, 그 '인간'은 '인간다운 인간'이라는 가정을 전제하고 있다 다시 말하면, 인간의 존엄성을 긍정하는 명제는, '인간이 인간다움을 잃지 않는 한, 인간은 존엄하다'는 뜻으로 해석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다움을 잃지 않는다'는 말을 높은 도덕성을 발휘한다는 뜻으로 해석한다면, '인간다움을 잃지 않았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의 수효는 비교적 적을 것이며, 따라서 '존엄하다'는 평가를 받을 수 있는 사람의 수도 크게 제한될 것이다. 실은 우리가 '인간은 존엄하다'고 말할 때, 그것은 '도덕적으로 높은 경지에 달한 소수의 인격자들은 존엄한 존재이다'라는 뜻이 아니라, 적어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존엄한 존재라는 뜻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인간다움을 잃지 않는다'는 말의 뜻을 '도덕적인 인간으로서 성장 할 수 있는 가능성을 지녔다'는 의미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즉, 인간은 인간다운 인간으로서 성장할 가능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존엄한 존재로서 인정을 받는 것이다. 만약, 도덕적으로 높은 경지에 도달한 사람들만이 존엄한다면, 그들은 인간인 까닭에 존엄한 것이 되며, 사실상'존엄하다'는 평가를 받을 수 있는 사람은 극소수의 인물들에게만 국한될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인간은 존엄하다'고 말할 때, 특수한 소수의 사람들만이 존엄하다는 뜻으로 말한 것이 아님은 명백하다. 그러나, '사람의 탈만 썼으면 그가 아무리 교활하고 파렴치하며 잔인하다 하더라도 존엄하다'는 뜻이라면, 그것은 극히 위선적이거나 자기도취적인 발언이 되고 말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인간의 존엄성의 근거를 인간이 간직한 어떤 가능성에서 찾을 수밖에 없으며, 그러한 가능성 간직하고 있는 한, 사람은 누구나 존엄하다고 보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만약 이 세상의 모든 사람에게 그런 가능성을 인정할 수 있다면 사람은 누구나 예외 없이 존엄하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될 것이다. 위에서 우리는 '도덕적인 인간으로서 성장할 수 있는 가능성'이라는 막연한 표현을 사용하였다. 이제 우리는, 이 막연한 표현이 의미하는 바에 대하여 좀더 분명한 설명을 해야 할 것으로 보인다. 다시 말하면, '도덕적인 인간'이라는 구절의 뜻을 보다 정확하게 밝혀야 할 것이다. '도덕적'이라는 말이 너무나 모호하고 다의적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말하는 '도덕적 인간'이란, 성현 또는 군자와 같은 뜻은 아니다. 세상 사람의 대부분이 성현 또는 군자가 될 수 있다고 믿기 어려우며, 또 그렇게 많은 성현과 군자가 반드시 필요하다고 생각되지 않는다. '도덕적 인간'은 평화스러운 사회 생활을 위해서 요청되는 보통 수준의 덕성을 갖춘 사람을 가리킬 따름이다. '도덕적 인간'이라는 말과 가장 뜻이 가까운 말은 '성실한 인간'일 것이다. 절대적으로 성실한 인간이 된다는 것은 성인 또는 군자에게서나 기대할 수 있는 일이라 하겠다. 그러나 어느 정도의 성실성을 가진다는 것은 정상적 환경 속에 사는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대개 누구에게나 가능한 일이며, 그것이 가능하기 때문에 인간은 존엄하다는 평가를 받을 자격이 있다고 보는 것이다. 성실성을 가진다는 것은 인간이 인간답게 되기 위해서 갖추어야 할 가장 기본적인 조건이다. 인간의 가장 근본적 특색의 하나는 그가 높은 차원의 사회 생활을 할 수 있다는 사실에서 발견되거니와, 높은 차원의 사회생활이 가능한 것은 어느 정도 상대편을 신뢰할 수 있기 때문이며, 인간이 서로 남을 신뢰할 수 있는 것은 인간에게 성실성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도대체 성실이란 무엇이냐?'는 물음을 제기할 때, 우리들의 상식만으로는 대답하기 어려운 여러 가지 문제가 남아 있음을 본다.
웃음이 묻어나는 편지 - MBC 예술단 엮음 하나 추억이라는 이름의 웃음여행 사위, 자는가? 제목이 좀 야하지요? 맞습니다. 좀 야합니다. 그렇지만 엄청나게 많은 '지금은 라디오 시대' 애청자를 위해 그날 밤 일들을 몽땅 적나라하게 밝히겠습니다. 저는 선을 삼십 번도 넘게 본 끝에 30세 되던 해에 24세의 미모의 여성과 결혼을 했습니다. 지금으로부터 10년 전의 일입니다. 대부분의 경우 결혼식이 끝나면 신혼여행을 떠나고 신혼여행 갔다 온 뒤에 처가에 다녀오는 게 순서 아닙니까? 그런데 우리는 여러가지 사정상 결혼식 끝난 후 처가에서 1박하고 신혼여행지로 가기로 일정을 잡게 되었습니다. 결혼식이 끝나고 우리는 일정표대로 전북 김제의 처가로 갔습니다. 새 신랑 왔다고 모여든 마을 어른들 모시고 막걸리 대접을 끝내고 나서 잠자리에 들 궁리를 하는데 하나 둘씩 모여드는 건장한 동네 남자들... 저는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왜 촌에서 신랑을 매단다고 하지 않습니까? 겁이 나더라구요. 그러나 신체 건강한 대한민구 남성으로 그 힘든 군사훈련 다 거친 사나이가 무엇이 두려우랴! 걱정하지 말자. 마음을 다스리며 점잖게 술대접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잠시 시간이 흐르자 저는 안도의 미소를 지을 수 있었습니다. 이유는 간단했습니다. 장모님께서 어찌나 성화를 대시는지 마을 남자들과 술상을 마주하고 대접하는 방으로 3분마다 한 번씩 들어오셔서 빨리 가라고 성화를 대니 한 잔씩 하시더니 모두 일어서더군요. '불감천이언정 고소원이라' 저는 너무 기뻤습니다. '우리 장모님 최고, 부라보, 따봉, 빅토리, 원더풀'을 속으로 외치며 겉으로는 아쉬운 척 배웅을 했습니다. 모든 손님들이 다 가시고 이제 드디어 기다리고 기다리던 순간이 시나브로 다가오고 이었습니다. 30세의 신체 건강한 총각이 결혼 첫날밤을 얼마나 애타게 기다렸겠습니까? 서둘러 장모님께 인사를 드리고 어서가서 푹 쉬라는 말씀을 뒤로 한 채 원앙금침이 깔려 있는 건너방으로 들어갔습니다. 그곳에는 용의 주도하신 장모님께서 작은 주안상에 간단한 안주와 술병을 준비해 놓으셨더라구요. 대부분 관광지 고급 호텔에서 첫날밤을 보내는데 시골의 낡은 처가에서 첫날밤을 보낸다는 게 썩 유쾌한 기분은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제 마음이 확 바뀌더라구요. 싫다는 신부에게 술 한잔 먹여 놓고는 영화나 드라마에서 보던 대로 불을 껐습니다. 예날 우리의 부모님께서 왜 자식을 적게는 대여섯 명, 많게는 십여명씩 낳았는지 말입니다. 불을 끄자창호지 문을 통해 들어오는 은은한 달빛 조명은 옆에 있는 신부를 황홀한 미모의 선녀로 보여지게 하더군요. 이런 상황에서 이찌 자녀가 많이 안 생기겠습니까? 저는 급해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급하다 한들 신혼여행 첫날밤을 임전무퇴의 정신으로 무장하고 초전박살 구호를 외치며 파죽지세로 몰아붙일 수는 없는 법. 저는 정공법을 택하기로 하고 급한 마음을 억누르며 탐색전을 펼쳤습니다. 요리조리 살펴보고 요모조모 따져보는 철저한 탐색전을 마무리하고 드디어 공격개시하려는 찰나 느닷없이 문을 벌컥 열고 들어오시는 장모님. '아! 이를 어쩌나, 어찌한단 말인가? OH MY GOD! 불쌍한 우리 한쌍을 투명인간으로 만들어 주시든지,펑 하고 사라지게 해주실 수는 없는지요? 정말 눈앞이 캄캄하고,컴컴한 밤하늘이 노랗게 변하는 걸 똑똑히 보았습니다. 그러나 어쩌겠습니까? 이미 엎지러진 물이요, 깨진 쪽박인 것을... 선천성 두뇌 명성증을 앓고 있는 저는 생각했습니다. '호랑이에게 물려가도 정신만 차리면 살고,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는데...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제 두뇌에서는 현역군 시절 각개전투 훈련때 받은 교육내용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습니다. 즉, 각개전투시 신속한 동작으로 최대한 지형지물을 이용하여 은폐와 엄폐를 하라! 저는 즉시 행동개시,잽싼 동작으로 베개 뒤에 숨고 이불을 뒤집어썼습니다. 그런데 뒤이어 들려오는 장모님의 말씀인즉, 출출할 것 같아 고구마를 삶아 왔는데 먹고 자라는 겁니다. 세상에! 신혼 첫날밤, 이 귀중하고 엄숙하고 중차대한 시간에 고구마 먹을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런데 고구마 들여 놓고 문 닫고 나가실 줄 알았는데,새 사위 자느냐고 부르시는 겁니다. 전 참으로 난감했습니다. 대답을 하자니 원초적 상태라서 일어날 수도 없고,그렇다고 어른 앞에서 발딱 누운 채로 목만 내놓고 있을 수고 없고,그래서 그냥 자는 척하고 대답을 안했습니다. 그런데 장모님 눈도 밝으시지 이불을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덮어 쓴 우리를 보시고는 군불을 충분히 땠는데 추운 모양이라며 문을 열어 놓고 나가시는 겁니다. 방이 추웠냐구요? 천만의 말씀이에요. 냉방이라 할지라도 우리 두사람 열을 바짝 받아서 더울 판인데 방바닥이 완전히 고기 굽는 프라이팬같이 뜨거웠거든요. 그러나 장모님 나가시는 게 반가워 아무 대꾸를 안했습니다. 저희는 장모님이 나간신 후 이불을 걷어내고 한참을 심호흡을 해야 했습니다. 뜨거운 한증막에 갔다온 것 같았거든요. 하여튼 잠시후 우리는 또 다시 인플레이 상태로 돌입했습니다. 밀 밀리며,빼았고 빼앗기는 대접전 끝에 또 한번의 노마크 찬스를 맞게 되었습니다. 건국이래 최초로 월드컵 우승이 눈앞에 다가온 환희와 기쁨의 순간이었습니다. 그런데 또다시 벌컥 열려지는 문. '오호! 통제라.분하고 원통함이여.어찌 하오리까!' 혼비백산 이불속으로 또 다시 숨었습니다. 삶은 고구마 머자면 목메일까봐 식혜 한 대접을 갖고 오신 겁니다. 시원하니 먹고 자라며 이불 뒤집어쓴 우리를 향해 한마디 하시고는 나가시면서 난방 잘된 서울 아파트에 살아 추위를 되게 탄다며 혀를 끌끌 차시는 겁니다. 저는 허탈한 심정으로 문을 바라보다가 순간 아! 하고 무릎을 탁쳤습니다. 낡은 문틀에 녹슨 대못이 한 개 박혀 있었습니다. 저는 얼른 일어나서 벽장안에 있던 나일론 끈을 가지고 문에 박혀 있는 무쇠고리에 묶고서 문틀에 박힌 커다란 대못에 칭칭 감았습니다. 문을 잠그고 나니 안심이 되더군요, 그래서 우리는 다시 한 번 고지를 향해 전진에 전진을 거듭했습니다. 세계에서 가장 높다는 에베레스트 정상을 정복한 등반대원들이 고지 정상에 깃발을 꽂지 않습니까? 저도 정상에 깃발을 꽂겠다는 일념으로 목숨걸고 최악의 조건과 싸우며 정상에 도착,깃발을 꽂는 순간 그 감격과 감동이 얼마나 크겠습니까? 드디어 그 감격과 감동을 맛보려는데 또 다시 왈칵 열려진 문,이번엔 군불때면서 옥수수를 구웠는데 먹으라는 겁니다. 정말 맥빠지더군요.그런데 나가시면서 하시는 말씀이 군불도 땠고 했으니 가서 주무신다니, 이보다 더 반가운 소식이 어디있겠습니까? 잠시후 장모님 방에 불이 꺼지더군요. 분명히 노끈으로 문고리를 동여맸는데 어찌된 건지 일어나 자세히 보니 끈을 감아 놓은 대못이 빠져 있더군요. 못이 박혀 있던 자리를 보니 구멍이 헐렁해져서 손으로 끼워놓은 건데 거기다 묶었으니 저항도 없이 열릴 수밖에... 이래서 신혼여행은 아는 사람 하나 없는 먼곳으로 가는가 봅니다. 이제 입안은 말라 비틀어지고 혓바늘이 돋고 눈은 쑥 들어가고 정신은 몽롱했지만 첫날밤인데 어찌 그냥 보낼 수 있겠습니까? 들여 놓으신 식혜를 벌컥벌컥 다 들이켜고 잠시 휴식을 취한 뒤 무단 침입으로 여러번 중단되었던 일을 다시 시작했습니다. 참 끈질긴 성격이지요? 그런데 제가 막 열받기 시작했는데 신부가 자꾸 뜨겁다고 하는 겁니다. 저는 이야기했죠! '원래 첫날밤은 다 그런 거다. 조금만 참아라.어른된다는게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다. 참는 자에게 복이 있나니 천국이 우리 것이다.' 저는 성경말씀까지 갖다대며 노력하고 있는데,신부의 태도가 이상했습니다. 벌떡 일어나는데 이상한 냄새가 나는 겁니다. 냄새뿐이 아니고 눈이 따갑고 목이 메케해지는 겁니다. 얼른 불을 켜고 이불을 들춰보니 방이 너무 뜨거워 이불이 누렇게 그을렸습니다. 새로 깐 노란색 비닐장판이 새까맣게 오그라들면서 타들어가고 새 이불도 연기가 풀풀 날 정도였으니까요. 얼른 밖으로 내놓고 문을 열고 환기를 시켰는데 동쪽하늘에 서서히 먼동이 트기 시작하는 겁니다. 아직 아무일도 없었는데 말입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신랑이 술에 곤드레만드레 되어 그냥 넘기는 부부도 있다지만 저는 맨정신이었거든요.아쉬운 대로 그을린 요는 버려두고 방으로 가서 보니 아랬목은 금방 폭발한 활화산처럼 뜨거워 접근이 불가능하여 윗목에 아불을 깔았습니다. 그런데 희한하게도 아랬목은 불덩어리인데 윗목은 그야말로 시베리아 얼음장보다 더 차더라구요. 여하튼 중단되었던 작업을 계속하려고 하는데 이번에 신부가 춥다고 오들오들 떠는 겁니다. 사실 찬방에서 올라오는 냉기는 견디기 어렵더라구요. 뼈마디 깊속한 속까지 파고드는데 장난이 아니더라구요. 우리는 너무 추워 옷을 주워입고, 추우면 아랫목에 더우면 위목에 옮겨다니기를 여러번,아랫목이 고비를 넘기고 알맞게 식을 무렵 닭우는 소리가 새벽을 알렸습니다. 밖에 내놓았던 그을렸던 요를 갖다 아랫목에 깔고 중단되었던 일을 재개하려눈데 신부가 병든 닭처럼 폭 고꾸라지더니 코까지 골면서 곯아떨어져 자는 겁니다. '이런 세상에... 이제 어쩔 수 없구나.' 포기를 하고 한숨 자려고 했지만 몸은 피곤해도 머리는 점점 맑아지고 어떤 엄청난 에너지가 끓어올라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신부가 야속했습니다. 지금 이 시간까지 파란만장한 상황을 거쳐 천신만고 끝에 장모님 주무시고 방바닥고 식었는데 잠을 자다니,이런 상황에서 잠을 잘 수 있는 여자의 신체구조와 정신상태를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도저히 참을 수 없다는 결론을 내리고 신부를 깨워 중단했던 작업을 계속하려는데,문이 살짝 열리며 장모님이 들어오시는 겁니다. '밤새 즐겁게 잘 잤는가? 사위 눈이 벌겋게 충혈된걸 보니 내 기분이 좋구만, 암닭이 금방 낳은 알이라 따뜻께로 어서 먹소.' 참말로 끈질긴 장모님이셨습니다. 그리고 장모님은 제게 계란을 주시고는 신랑보다 늦잠자는 색시가 어디 있냐며 부득부득 깨워 밖으로 데려가시는 면밀함까지 보이셨죠.물론 전 그 첫날밤을 아무일도 없이 잠만 설쳤습니다. 지금 생각해도 약이 오르는 첫날밤 사연. 재미있었는지 모르겠네요.
Board 삶 속 글 2022.12.31 風文 R 48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