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대표수필 - 김동리 외 9명 "조연현편" (1920~1981) 평론가. 경남 함안 출생. 혜화 전문 수료. 한양대 문리대학장, 문인 협회 이사장 역임. 초기에는 시를 쓰기도 하였으나 광복 후에는 평론과 수필을 주로 썼다. 청년 문학가 협회를 결성하여 좌익을 분쇄하는 데 앞장선 바 있으며 순수 문학의 옹호에 공적을 세웠다. 후기에는 현대 문학사의 정립에 힘썼으며 엄청난 양의 평론을 통하여 정력적인 평론가로 정평을 얻었다. 친절한 사람들 1971년 여름, 나는 더블린에서 개최된 세계 팬 대회에 참석하게 된 기회에, 약 40일 동안 세계 몇몇 나라를 여행한 일이 있었다. 다 알다시피 더블린은 아일랜드의 신생 공화국인 에이레의 수도다. 갈 때에는 자유 중국의 타이베이로 해서 홍콩, 이탈리아의 로마, 프랑스의 파리에 들렀고, 올 때에는 미국에 들러 뉴욕, 워싱턴, 볼티모어, 시카고를 돌아 보고, 일본의 도쿄를 거쳤다. 그 중, 자유 중국과 일본은 우리 나라에서 퍽 가까운 거리에 있고, 또 같은 아시아 국가들일 뿐만 아니라, 전에도 가 본 일이 있기 때문에, 해외 여행이라는 데서 오는 흥분이나 불안은 느끼지 않았으나, 그 밖의 나라들에 대해선 적잖은 흥분과 불안을 함께 느꼈다. 아니, 흥분보다 불안이 앞섰다고 하는 거시 옳을 것이다. 내가 이렇게 불안을 느낀 데엔 몇 가지 까닭이 있었다. 첫째는 언어 때문이었다. 외국을 여행할 때에는 그 나라의 말을 잘 할 수 있거나 혹은 비교적 널리 쓰이는 외국어를 한둘쯤 알아야 의사 소통이 이루어질 텐데, 나는 외국어에 익숙하지 못하다. 따라서, 자연히 벙어리 여행이 될 수밖에 없었다. 둘째는 건강 때문이었다. 기후와 음식이 다른 여러 나라를 한 달 이상이나 여행한다는 것은 웬만큼 건강한 사람에게 있어서도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런데, 평소에도 잘 앓는 병약한 내가 어떻게 감당할까 싶었다. 다음은 경제적인 이유에서였다. 안락한 호텔에 들고, 영양 많은 음식을 사 먹으며 여행할 만큼 충분한 여비가 준비되지 않았던 것이다. 그래서, 나는 항상 헐한 호텔과 값싼 식당을 찾아다니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40일 동안이나 낯선 여러 나라와 도시를 큰 불편 없이 여행할 수 있었던 까닭은 대체 어디에 있었을까? 그것은 한 마디로, 나를 대해 준 여러 나라 사람들의 친절 때문이었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로마에 도착했을 때의 일이다. 나는 비행기에서 내려 입국 절차를 마치고 통관 구역에 들어가, 짐이 나오기를 기다리며 호텔 걱정을 하고 있었다. 홍콩에서 비행기 회사측에 로마의 호텔 예약을 부탁했었는데, 내가 홍콩을 떠날 때, 아직 로마에서 연락이 없으니 호텔 예약은 안 된 것으로 알고 떠나라는 전화를 받았었기 때문에, 나의 호텔 걱정은 퍽 큰 것이었다. 그 때, 내 앞에 와서 '미스터 조'냐고 묻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로마의 세관원이었다. 그렇다고 하니까, 편지 한 통을 내주었다. 우표가 없는 것으로 보아 그것은 아마 로마에 사는 사람이 인편으로 보낸 것인 듯한데, 생전 처음 와 보는 낯선 이국 땅, 아무도 아는 사람 없는 로마에서 나에게 편지를 보낼 사람이 대체 누구란 말인가? 필시 잘못 전달되었으리라 생각하면서 뜯어 보았다. 그러나, 누가 생각이나 했으랴. 그것은 내가 탄 비행기 회사의 로마 지사로부터 나에게 온 것으로, 호텔이 예약되었으니 그리 가 달라는 것이었다. 나는 비로소 안도의 숨을 쉬고 고맙다는 인사를 했다. 그러니까, 내가 홍콩을 떠난 후에 호텔이 예약되었기 때문에, 내가 로마에 내려 비행장 밖으로 나가기 전에 이것을 알리려고 비행기 회사측에서 온갖 비상수단을 다 썼을 것으로 추축되었다. 비행장의 출입국 수속이 진행되는 장소는 출입금지 구역이므로, 허가된 사람이 아니고는 출입할 수가 없다. 그러니까, 자기 나라를 찾아온 한 외국인에게 편지 한 통을 전하기 위하여 회사측과 세관측이 합동 작전을 벌인 셈이다. 다음은 그 호텔까지 가는 것이 문제였다. 나는 할 수 없이 아까 그 세관원에게 떠듬떠듬 그 방법을 물었다. 그는 어디서 로마 시내의 지도를 한 장 가지고 오더니, 내가 가야 할 호텔의 위치에다 볼펜으로 동그라미를 쳤다. 그리고는 1. 비행장에서는 택시를 타지 말아라, 2. 테르미니 역으로 가는 버스를 타라, 3. 테르미니 역에서 호텔까지는 택시를 타라 하고 적어 주었다. 그런데 내가 보기에 그는 영어를 퍽 잘 하는 것 같은데도, '택시를 타지 말아라' 같은 말은 '노 택시'와 같은 식으로 적었다. 이는 자기를 표준으로 하지 않고, 오로지 내가 잘 짐작할 수 있도록만 적은 것으로 생각되었다. 나는 그가 준 지도와 쪽지를 가지고 호텔까지 잘 갈 수 있었다. 비행장에서 택시를 타면 호텔까지 더 수월하게 갈 수 있을 텐데, 왜 그 세관원은 택시를 못 타게 했을까? 나는 그 까닭을 곧 알 수 있었다. 비행장에서 시내까지는 거리가 퍽 멀고, 택시 요금도 매우 비싸기 때문이었다. 그 세관원은 나에게, 호텔까지 가는 방법만이 아니라, 경비를 절약하는 방법까지도 가르쳐 준 것이다. 나는 이 일로 해서 기분이 매우 좋았다. 지금도 내 머릿속에는 '친절한 사람들이 사는 아름다운 이탈리아'의 영상이 선명하다. 이러한 친절은 물론 이탈리아에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더블린에서 회의를 할 때였다. 회의장에서는 통역해 주는 분도 있고, 우리 대표 중에 외국어를 썩 잘하는 분도 있고 해서 별 불편이 없었으나, 혼자 거리에 나가거나 또는 개인적인 용무를 보거나 할 땐 여간 불편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런 땐 어디선가 학생들이 몰려와 친절하게 도와 주었다. 어떤 때는 내가 가려는 목적지까지 동행해 주기도 하고, 어떤 때는 물건 사는 일까지도 도와 주었다. 나는 이 글을 쓰는 지금도 더블린의 그 친절한 학생들을 생각한다. 나의 눈앞에 떠오르는 더블린은 언제나, 명랑한 얼굴과 따뜻한 마음으로 나를 대해 주던 그 어린 학생들의 모습으로 꾸며질 것이다. 시카고에서는 이런 일이 있었다. 혼자 비행장에 내렸는데, 아무리 찾아 보아도 마중 나오기로 된 사람을 만날 수가 없었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그것은 전보 연락이 잘못된 까닭이었다. 나는 낯선 비행장 한구석에서 무거운 짐을 들고 안타까워하고 있었다. 그 때었다. 은발의 한 노신사가 다가와 쉬운 말로 사정을 묻고, 그 무거운 짐을 함께 들자고 하면서 목적지까지 친절히 안내해 주었다. 노인에게 폐를 끼치는 것이 죄스러웠으나 어찌할 수 없는 처지었다. 나는 아마도 시카고란 말을 들으면 그 은발의 노신사를 생각하게 될 것이다. 혹은 미국의 어느 은발의 노신사를 만나면 시카고를 생각하게 될 것이다. 파리에서는 언어가 더욱 통하지 않아 버스나 지하철을 잘못 탄 일이 여러 번 있었다. 그러나 그럴 때마다 파리의 시민들은 친절히 보살펴 주었다. 그래서, 나는 시간을 좀 허비하는 일은 있었지만, 목적지를 못 찾아 크게 낭패를 본 일은 없었다. 파리는 예술의 도시라고 한다. 그러나 나에게는 그것보다도, 친절한 사람들이 살고 있는 곳이란 생각이 늘 앞선다. 이 밖에도 뜻하지 않은 곳에서 뜻하지 않은 사람들의 도움으로 즐거운 여행을 한 경험은 수없이 많다. 그런데, 이렇게 나에게 친절을 베풀어 준 사람들은 반드시 그 나라의 관리나 지도적인 위치에 있는 인사들만은 아니었다. 평범한, 그리고 이름 없는 시민 한 사람 한 사람이 다 그러했고, 특히 어린 학생들이 그렇게 친절했다. 그들의 조그만 호의나 친절은 나에게 인간에 대한 신뢰를 두텁게 해 주었고, 그들이 사는 나라나 도시에 대한 좋은 인상을 깊게 심어 주었다. 우리 나라를 찾아오는 외국 사람들이 근래에 부쩍 늘어나고 있다. 그 중에는 물론 우리말을 잘하고 우리 나라의 지리에 밝은 사람들도 있겠지만, 아마 대개는 우리말을 못 하고 우리 나라 지리에 어두운 사람들일 것이다. 어쩌면 나와 같은 불리한 조건으로 우리 나라에 오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나는 우리 나라의 모든 사람들도 다른 나라 사람들과 다름없이 외국인에게 친절히 하리라고 생각한다. 그러면서도 외국인을 친절히 대하자는 말을 더욱 강조하고 싶은 것은, 그것이 단순히 인정의 아름다움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나아가서는 국민 외교의 한 구실까지도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외국 사람에 대한 친절은 경우에 따라선 나라를 사랑하는 한 방법이라고까지도 말할 수 있다. 특히, 어린 학생들의 친절은 외국 사람들에게 깊은 감명을 주게 된다. 우리 모두 우리 나라를 찾는 외국 사람들에게 한국의 아름다운 인정을 베풀어 줌으로써 세계에 우리 나라의 인상을 감명 깊은 것으로 심어 주어야겠다.
웃음이 묻어나는 편지 - MBC 예술단 엮음 하나 추억이라는 이름의 웃음여행 춘발이를 구하라! 지난 어린 한 시절의 추억을 고백함에 있어 이 방송으로 자칫 개인의 명예가 훼손되는 일이 있다 하여도, 어디까지나 시효가 지난 사건으로 이해를 바랍니다. 아울러 이 방송으로 오래 전부터 연락이 두절된 친구들을 다시 만날 수 있는 기회가 되었으면 합니다. 때는 지금으로부터 20년 전, 초등학교 3학년 시절로 기억됩니다. 그 시절엔 어느 곳이나 비슷했습니다만, 제 고향인 안동에서는 특히 가정이나 학교에서의 예절교육이 대단했습니다. 학교에서의 선생님은 곧 염라대왕이요, 저승사자였습니다. 물론 모든 선생님이 다 그렇다는 것은 아닙니다. 기억 속의 수많은 선생님들 중 그 시절부터 유행했던 '슈퍼맨' '베트맨' 보다도 더 대단하셨던 선생님이 계셨습니다. 별명이 임꺽정이었는데 처음엔 이름이 비슷해서 붙였지만, 서서히 그 명성이 이름을 능가하고 있었습니다. 제가 3학년 2학기가 되던 때 별안간 우리반의 담임이셨던 우영방(우리의 영원한 우방- 실제 이름임) 선생님이 개인사정으로 학교를 떠나게 되었고, 임꺽정 선생님이 저희반의 담임으로 오시게 되었습니다. 하늘이 우리반을 버린 것입니다. 대책회의는 반장을 중심으로 무수한 의견이 제시되어 반 전체가 참가하는 투표에 부치게 되었습니다. 결과는 '수업거부!' 제가 다닌 초등학교는 대학부속 초등학교로 사립의 교육분위기가 매우 강했으며, 당시에 이미 선거와 교내 서클 등이 장려되어 일반화 되어 있었고, 학교 일정및 행사는 학생들의 의견과 투표에 의해 결정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임꺽정 선생님은 별명 그대로 임꺽정 그 자체였습니다. 이런 우리의 사정을 아셨는지 2학기가 시작되던 첫날이었습니다. "만나서 반갑다. 내일 임시시험을 보겠다. 이제까지 너희들의 영원한 우방이었던 우선생님의 노고에 흠이 생기지 않도록 최선을 다히기 바란다. 만약 80점 이하인 경우는 '개별면담'을 하겠다." 우린 순식간 분열되고 있었습니다. 완전한 공중분해였습니다. 우리가 그토록 우려했던 '개별면담.' 결코 들어서도 보아서도 안될, 그 전설적인 '개별면담'을 그것도 2학기가 시작되는 첫날에 듣고 말았습니다. 수많은 선배들이 이슬 같은 눈물로 대신했다는 전설. 교내에 구전되어 온 '영남선'의 전설 주에 가장 비인간적인 무시무시한 전설이 바로 임꺽정의 '개별면담'이었습니다. 우리에게 남은 선택은 없엇습니다. 집에 가서 열심히 공부하는 방법 이외에는 도리가 없었습니다. 결과는 물론 저는 80점 이상으로 '개별면담'을 피했습니다. 그러나 저의 가장 친한 친구인 박충신(별명 춘발)이는 50점으로 '특별면담' 코스까지 가야 하는 수준이었습니다. 춘발이는 거의 삶을 포기하는 것 같았습니다. 방법을 찾아야 했스빈다. 교통사고로 위장하여 장기 입원하는 방법, 할아버지 또는 할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이유로 장기 결석하는 방법, 전학가는 방법 등 많은 의견이 있었지만 실행가능한 방법은 없었습니다. 그런데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지난해 임꺽정 선생님의 '개별면담'에서 면죄를 받은 친구가 있었는데, 그 친구는 나쁜 시험성적으로 아버지로부터 이미 종아리를 맞은 후 '개별면담'을 하게 되었고, 종아리의 멍자국을 본 임꺽정 선생님은 너그러이 대화로 면담을 했다는 것이었습니다. 친구 3, 4 명이 더 모여 '춘구위(춘발이 구제 위원회)'가 발족되었습니다. 방법을 찾아보니 간단했습니다. 싸리비를 꺽고, 적당한 몽둥이를 구해 우리집으로 모였습니다. 그리고 춘발이를 패기 시작했습니다. 어린 마음에 아무리 때려도 멍이 들지 않았습니다. 춘발이는 어금니를 물고 참았습니다만, 조금 빨간색으로 상기될 뿐 자국이 남지 않았습니다. 춘발이는 가끔 비명을 지르기도 했습니다. 참아야 했습니다. 1시간이 지나고 2시간이 지나도 멍자국은 남지 않기에, 우리는 좀 비위생적인 방법이지만 멍자국이 남아야 할 춘발이의 종아리를 빨기 시작했습니다. '쪽쪽' 소리가 날 정도로 빨고 또 빨았습니다. 때리고 빨고, 또 때리고 빨고, 하지만 결국 멍자국은 생기지 않았고, 포기하게 되었습니다. 춘발이는 우리의 의리에 울었고, 아파서 울었습니다. 다음날 결전의 면담이 춘발이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결국 춘발이는 복날 끌려가는 뭐 마냥 그렇게 끌려갔는데, 이게 웬일입니까? 임꺽정 선생님의 눈이 커지면서 부들부들 떨고 이었습니다. 이유인 즉, 춘발이의 종아리가 온통 피멍으로 얼룩져 있는 것입니다. 전날 '춘구위'가 춘발이를 위해 실시했던 공작이 하루가 지난 당일날 표면화되면서 서서히 그 결과를 보이기 시작하였던 것인데, 우린 그것도 모르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사건은 심상치 않았습니다. 춘발이의 종아리는 단순히 멍자국을 넘어서 무슨 전쟁에서 입은 상처같았습니다. 임꺽정 선생님의 첫말씀이 "춘발이, 니네 부모가 친 부모 맞나? 혹시 웬수지간 아이가?" 학교가 온통 난리가 났습니다. 양호실로... 교무실로... 한동안 떠들썩하더니, 결국 일은 더욱 커졌습니다. "공범자 나와! 아니, 주범자 나와!" 의리없는 놈. 집으로 전화해서 부모와 면담을 하겠다는 임꺽정 선생님의 말에 춘발이는 자수를 하고 말았습니다. 저는 그날 냉장고에서 열이 나도록, 장마에 먼지 나도록 특별면담 코스를 거쳐야 했습니다. 20년이 지난 지금도 가끔 동창들과 함께 자리를 하는 자리에서 앞의 사건으로 혼절이 되도록 웃어 봅니다만, 춘발이라는 친구는 4학년 그때 서울로 전학을 간 뒤 소식을 알 수 없답니다. 그리고 임꺽정 선생님은 현재 저희 고향인 모초등학교에서 교장 선생님으로 계십니다.
Board 삶 속 글 2023.01.07 風文 R 537
미봉(彌縫) 彌:더할/많을 미. 縫:꿰맬 봉. [유사어] 고식(姑息). 임시변통(臨時變通). [출전]《春秋左氏傳》〈桓公五年條〉 빈 구석이나 잘못된 것을 그때 그때 임시 변통으로 이리저리 주선해서 꾸며 댐. 춘추 시대인 주(周)나라 환왕(桓王) 13년(B.C. 707)의 일이다. 환왕은 명목상의 천자국(天子國)으로 전락한 주나라의 세력을 만회하기 위해 정(鄭)나라를 치기로 했다. 당시 정나라 장공(莊公)은 날로 강성해지는 국력을 배경으로 천자인 환왕을 무시하는 경향이 있었기 때문이다. 환왕은 우선 장공으로부터 왕실 경사(卿士)로서의 정치상 실권을 박탈했다. 이 조치에 분개한 장공이 조현(朝見:신하가 임금을 뵙는 일)을 중단하자 환왕은 이를 구실로 징벌군을 일으키고 제후(諸侯)들에게 참전을 명했다. 왕명을 받고 괵/채(蔡)/위(衛)/진(陳)나라 군사가 모이자 환왕은 자신이 총사령관이 되어 정나라를 징벌하러 나섰다. 이런 일이 곧 천자(天子)의 자장 격지(自將擊之)는 춘추 시대 240여년 동안 전무후무한 일이었다. 이윽고 정나라의 수갈(繡葛:하남성 내)에 도착한 왕군(王軍)은 장공의 군사와 대치했다. 공자(公子)인 원(元)은 장공에게 진언했다. “지금 좌군(左軍)에 속해 있는 진나라 군사는 국내 정세가 어지럽기 때문에 전의(戰意)를 잃고 있습니다. 하오니 먼저 진나라 군사부터 공격하면 반드시 패주할 것입니다. 그러면 환왕이 지휘하는 중군(中軍)을 혼란에 빠질 것이며 경사(卿士)인 괵공이 이끄는 채/위나라의 우군(右軍)도 지탱하지 못하고 퇴각할 것입니다. 이 때 중군을 치면 승리는 틀림없습니다.” 장공의 원의 진언에 따라 원형(圓形)의 진(陣)을 쳤는데 이는 병거(兵車:군사를 실은 수레)를 앞세우고 보병(步兵)을 뒤따르게 하는 군진(軍陣)으로서 병거와 병거 사이에는 보병으로 ‘미봉’했다. 원이 진언한 전략은 적중하여 왕군은 대패하고 환왕은 어깨에 화살을 맞은 채 물러가고 말았다. [주] 자장격지(自將擊之) : 남을 시키지 않고 몸소 군사를 거느리고 나가 싸움.
Board 고사성어 2023.01.07 風文 R 1094
한국대표수필 - 김동리 외 9명 "조연현편" (1920~1981) 평론가. 경남 함안 출생. 혜화 전문 수료. 한양대 문리대학장, 문인 협회 이사장 역임. 초기에는 시를 쓰기도 하였으나 광복 후에는 평론과 수필을 주로 썼다. 청년 문학가 협회를 결성하여 좌익을 분쇄하는 데 앞장선 바 있으며 순수 문학의 옹호에 공적을 세웠다. 후기에는 현대 문학사의 정립에 힘썼으며 엄청난 양의 평론을 통하여 정력적인 평론가로 정평을 얻었다. 손수건의 사상 남녀를 가리지 않고 손수건을 지니고 다니지 않는 사람은 없다. 어쩌다가 손수건을 빠뜨리고 나오는 날이면, 육체의 어느 한 부분을 떼어 놓고 나온 것처럼 어색하거나 꼭 입어야 될 의류의 하나를 빠뜨리고 나온 것처럼 허전해진다. 그만치 손수건은 인간에게 있어 없지 못할 일상적인 생활용품의 하나이다. 한글 학회 발행의 우리말 사전을 보면, 손수건은 '몸에 지니고 다니는 작은 수건'으로 되어 있고, 문세영 씨 사전을 보면, '땀을 씻는 작은 수건, 손을 씻는 작은 헝겊'으로 되어 있다. 전자는 주로 손수건의 형태와 위치에 대한 설명이고, 후자는 주로 그 용도에 대한 설명으로 볼 것이다. 이 두 개의 설명에서 우리는 손수건이란, 첫째 작은 헝겊으로 된 수건이며, 둘째 몸에 지니고 다니는 것이며, 셋째 손이나 땀을 씻는 데 사용되는 물건임을 알 수 있다. 손수건은 작은 것이며, 항상 몸에 지니고 다니는 물건이라는 것은 손수건의 어떤 희생을 이미 암시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작다는 것과 항상 몸에 지니고 다녀야 한다는 이 두 가지 조건은, 물론 손수건의 용도에서 원인된 것이다. 땀이나 손을 씻는 데 반드시 커다란 수건이 필요한 것은 아니다. 그런 성질의 용도에는 작은 수건으로서 충분하다. 그리고 항상 몸에 지니기에도 작은 것이 더욱 타당한 것은 물론이다. 그러나 손수건은 무엇 때문에 항상 몸에 지니고 다녀야 할까? 그것은 손수건의 용도는 언제 어디서나 발생될 수 있기 때문이다. 손수건의 용도는 반드시 손이나 땀을 씻는 것이 그 전부는 아니다. 길에 가다가 흙이나 먼지가 묻는다든지, 음식을 먹은 다음, 혹은 화장을 고칠 때, 또는 작은 상처가 났을 때, 손수건은 가장 편리하게 이용될 수 있다. 이 때문에 손수건은 항상 몸에 지니는 작은 소지품이 되는 동안에, 손수건은 스스로 다른 특성을 가지게 된 것은 아닐까? 사람의 소지품 가운데는 자기를 표현하는 물건이 있다. 인장과 지환 같은 것은 그 대표적인 것이다. 전자는 각자의 권리를 표시하는 표현이요, 후자는 각자의 약속을 표시하는 표현이다. 재산의 소유권이 인장으로써 변동되고, 약혼이나 결혼이 지환으로써 표시되는 것은 그러한 일례이다. 이를테면 전자가 인간의 법적 표현이라면 후자는 인간의 정신적 표현으로서 다 같이 자기 표현의 성질을 가진 것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이와 같은 자기 표현으로서의 소지품은 대개 작은 물체로서 항상 몸에 지니고 다니는 게 그 일반적인 습관이다. 자기를 표현해 주고 있는 물체는 이미 단순한 물질이거나 편리한 도구가 아니라, 바로 자기 자신과 마찬가지다. 이러한 소지품은 항상 자기를 아끼는 마음처럼 귀중히 취급되고 언제나 자기와 함께 있어야만 안심이 된다. 그러는 데에는 늘 몸에 지니는 것이 상책이며, 늘 몸에 지니는 데에는 작은 것이라야만 편리하다. 손수건은 이와 같은 자기 표현의 물체와 같은 조건을 갖추고 나타남으로써 그 최초의 용도와는 다른 자기 표현의 직능을 갖게 된 것은 아니었을까? 티끌 하나 없는 깨끗한 몸차림을 한 여성이 조심성스럽게 손수건을 만지거나 그것을 사용하는 모습을 보면 나는 항상 엉뚱한 생각을 갖게 된다. 그것은 그 손수건이 그 여인의 손이나 땀을 씻는 물건으로서가 아니라 그 여인의 감정의 역사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손수건은 손이나 땀을 씻는 수건으로서가 아니라 그와는 다른 용도를 위해서 만들어진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그것이다. 이러한 때 나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손수건의 용도에 대한 영상은 슬픈 소식을 듣고 남몰래 돌아앉아 흘리는 눈물을 씻는 것, 기차나 배를 타고 멀리 떠나는 안타까운 사람을 보낼 때, 또는 그와 같이 멀리서 오는 그리운 사람을 맞이할 때 안타깝고 그리운 마음으로 손수건을 흔드는 모습... 손수건은 손이나 땀을 씻는 것보다는 이러한 때 더욱 절실히 사용되어 온 것은 아니었던가? 손이나 땀을 씻는 것이 손수건에 대한 인간의 생리적 육체적 외부적 용도라면 이러한 것은 그에 대해 인간의 심리적 내부적 용도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손수건의 용도는 손수건이 인장이나 지환과 같이 자기 표현의 한 직능을 가진 것임을 말하는 것이 된다. 항상 몸에 지니고 다니는 그 작은 헝겊이. 손수건에 대한 인간의 심리적 정신적 내부적 용도에서 바라본다면 손수건과 가장 깊은 관련을 가진 것은 눈물과 이별, 또는 눈물과 상봉이다.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손수건은 눈물을 씻기 위한 것이거나, 그렇기 않으면 이별할 때의 안타까운 심정을, 또는 상봉의 즐거움을 알리는 신호의 표지이다. 그리고, 어느 편이냐 하면, 손수건은 즐거운 눈물보다는 슬픈 눈물을 닦는 경우가 더 많고, 상봉의 즐거운 신호로서보다는 이별의 슬픈 신호로서 사용되는 경우가 더 많다. 이것은 손수건 자체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 인생의 문제이다. 그러므로 손수건은 슬픈 눈물을 상징해 준다고 볼 수도 있다. 손수건을 눈물 또는 이별의 상징으로 보아 온 것은 한국 사람들의 오랜 풍습은 아니었던가? 손수건을 눈물 또는 이별의 상징으로 보는 동안, 그러한 손수건은 항상 여성적인 속성이지 남성적인 것은 아니다. 우리는 흔히 '사내 대장부' 라는 말을 쓴다. 이 말은 여성처럼 함부로 눈물을 흘리지 않는 것이 남성이라는 의미도 된다. 그러므로 '여인과 눈물'은 자연스럽게 관련이 되지마는, '남자와 눈물'은 아무래도 긍정적인 자연적 상태는 아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이별 역시 그렇다. 이별이란 말이 헤어진다는 사실의 설명으로서보다는 헤어지는 슬픈 감정을 강조하는 의미가 더 중요한 것이라면, 눈물과 직결되는 이별은 여성적 속성이다. 돌아앉아 눈물을 씻는 남성의 모습이 보기 흉하고, 역두나 부두에서 손수건을 흔드는 남성이 주책머리 없게 보이는 반면에, 돌아앉아 눈물을 씻는 여인의 모습이나, 손수건을 흔드는 여인의 모양이 제 격에 맞게 보이는 것은 결코 우연한 것이 아니다. 손수건은 아무래도 남성에게보다는 여성에게 더 어울리는 소지품인가? 남녀를 불문하고, 손수건은 필요불가결의 일상적인 소지품의 하나이다. 누구나 그가 가진 손수건으로써 자기의 손이나 땀을 씻는다. 그러나 그럴 때마다 그 손수건에 숨겨진 자기의 감정적 이력을 생각하게 되는 사람은 과연 얼마나 까? 남성은 아예 그런 것을 생각하지 않는 것이 오히려 남성적인 것이 될지 모른다. 그러나 손수건을 꺼낼 때마다 그 손수건에 아로새겨진 자기의 눈물과 이별을 계산해 보는 여인은 과연 얼마나 될까? 매일같이 빨아서 깨끗한 수건을 갖기를 원하는 모든 사람들의 손수건에 대한 위생은 그 속에 새겨진 자기의 슬픈 눈물과 이별을 깨끗한 손수건처럼 잊어버리고 싶은 데서일까? 수건은 나에게는 항상 여인의 마음의 비밀처럼 느껴진다.
웃음이 묻어나는 편지 - MBC 예술단 엮음 하나 추억이라는 이름의 웃음여행 취사병이 뭐길래 - 송현탁(남.광주 광산구 지정동) 지금으로부터 14년 전 일입니다. 국가이 부름을 받고 빡빡머리로 신병훈련소에 처음 입대했을 때부터 단체생활이란 얼마나 중요하며 개인 한 사람만의 잘못으로도 많은 전우들이 피해를 입는다는 것을 누구보다도 잘 아는 제가 한사람 편해보겠다고 생사고락을 함께하는 우리 소대원들에게 얼마나 많은 고생과 아픔을 안겨다 주었던지 이 자리를 빌려 진심으로 사과를 드리며 용서를 받고 싶습니다. 지난날 함께 근무했던 우리 중대원들이 이 방송을 듣고 게신다면 굳이 부대를 밝히지 않아도 금방 기억하시고 배꼽을 잡으며 웃고 계시겠지요. 그러나 훈련소에서는 우수한 병사 그리고 또한 특등사수로 인정받는 모범훈련병이었다는 사실을 알아주십시요. 그렇다면 왜 많은 중대원들의 웃음거리가 되었고 놀림감이 되었는지 그 원인을 밝히겠습니다. 훈련소 교육기간중 취사장 사역병으로 두세 번 나가 일한 적이 있었습니다. 일반적으로 우리가 취사병을 볼 때면 취사장 군기가 너무나 엄했고 짠밥을 만지는 취사병들이 항상 지저분하게 느껴졌지만 막상 취사장에서 일을 해 보니 정말 가족적이고 마음 또한 편안했습니다. 먹고 싶은 것 마음대로 먹고 자유시간 넉넉하고 물사정 또한 얼마나 좋은지.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취사장에서 근무하고 싶은 욕심이 서서히 들기 시작하여 함께 일하던 취사병에게 살며시 물어봤습니다. "취사장에서 근무하려면 어떠한 자격과 기술이 필요합니까?" 이에 취사병 왈, 논산훈련소에서 조리사 주특기(752)를 받으면 어느 부대를 가든 취사병으로 일할 수 있지만, 여기처럼 예하부대 출신은 주특기 무조건 1로 시작되기 때문에 취사장 근무가능성은 희박하고 사회에서 요리사로 근무한 경력이 있거나 아니면 부대에서 고문관으로 찍히면 취사장에서 일할 수 있는 확률이 크다고 하더군요. 그러나 저의 주특기는 일빵빵(100)소총수. 드디어 6주간의 훈련과정을 마치고 자대배치 받아 중대장님께 신고식하던 날, 중대장님께서 "하고 싶은 얘기는 없나?" 하시기에 저는 서슴지 않고 "중대원들의 건강을 책임질 수 있는 취사장에서 열심히 근무하고 싶습니다." 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랬더니 사회경력이 있냐고 묻길래 대답했죠. "예, 있습니다." "어디에서?" "중국집에서 철가방 생활 2년 했습니다." 중대장님은 저의 대답에 웃으셨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취사장 T.O가 없으니 3소대로 가서 근무하라며 3소대장님께 인계해 버리고 말았습니다. 저의 취사장 근무에 대한 꿈이 사라지는 순간이었지요. 그러나 제가 여기에서 포기할 수 있습니까? 한 가지 희망이 있었습니다. 훈련소에서 취사병에게 들었던 말대로 고문관이 되어 보는 것이었습니다. 오늘부터 무슨 일이든 어떠한 역경과 고난이 몰아쳐도 이를 악물고 취사장에서 일할 수 있는 꿈이 실현될 때까지 충실한 고문관의 길을 걷기로 결심하고 실천에 들어갔습니다. 제식훈련 때의 일입니다. 우향우 하면 좌향좌로, 좌향좌 하면 우향우로, 뒤로 돌아 하면 거꾸로 돌고... 등등 시키는 것은 무조건 반대로 했습니다. 이종환씨! 이건 정말 어렵데요. 한번 몸에 배어 익숙해진 것이어서 생각대로 잘 되지 않더라구요. 그때마다 저는 빳다를 맞고 기합을 받지만 기합을 받을 적마다 머릿속 깊이 한 번 더 새겨둡니다. '취사병으로 가는 그날까지 누가 이기나 한 번 해보자.' 육체는 고달파도 '조금만 참아다오'를 스스로 다지며, 마음을 독하게 먹었습니다. 어쩌다 잘못하여 저도 모르게 같은 방향으로 따라서 움직일 때면 소대장님께서 칭찬을 하시며 이렇게 말씀을 하시는 겁니다. "바로 그거야. 그렇게 하면 되는 거야." 하지만 그것은 순식간에 일어난 저의 실수였다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저는 소대장님의 칭찬이 끝나기가 무섭게 제 뜻한바 계획대로 고문관의 자세로 돌아갔지요. 이렇듯 남모르는 저의 실수 아닌 실수로 우리 중대에서 유별나게 우리 소대원들만이 제식훈련, 총검술, 태권도 등 반복되는 연습을 엄청나게 많이 했지만 군 정신이 강한 저의 끈질긴 노력으로 결과는 항상 똑같았습니다. 그래서 도저히 안되겠는지 하루일과 후에는 매일 꼭 한 사람씩 저에게 붙여주면서 모든 기본동작을 책임지고 가르치라는 명령이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일과 후에 하는 훈련은 제가 어느 정도 하는 척합니다. 왜냐? 소대장님이나 중대장님 안 계실 때 얻어맞고 얼차례 받는 건 순전히 다 공짜이기 때문에 보편적으로 잘해요. 이 고참들이 때리는 것은 정말로 무식합니다. 그리고 국방부 등록된 기합이란 기합은 한 가지도 빠뜨리지 않고 저에게 다 실험을 하거든요. 그렇지만 다음날 교육시간에는 마찬가지로 반대로만 합니다. 그뿐인 줄 아세요. 총검술, 태권도시범 등 순서와는 관계없이 뒤죽박죽으로 열심히 하면 저를 지켜보는 중대원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웃음바다가 되고 너무나 좋아들하지만 저는 그 뒤에 있을 육체적인 고통과 완전군장으로 연병장 돌 생각을 하면 등에서 땀도 나질 않습니다. 그리고 사격장에서는 어쩐 줄 아세요. 내 표지판에는 한 발도 쏘지않고 옆사람 표진판에 다 쏴버리고, 그렇잖으면 허공을 향해 무작정 발사를 해버립니다. 그래서 사격장에서도 정신통일이란 구호와 함께 사격 끝날 때까지 체력단련을 없이 합니다. 그리고 그 이후부터는 아예 저에게 실탄을 지급해 주지도 않는 겁니다. 왜냐? 저같은 꼴통에게는 실탄이 아깝다는 것이지요. 하루는 중대장님께서 저를 행정반으로 부르시길래 저는 생각했지요. '와! 이제 드디어 취사장으로 가는 모양이구나.' 그러나 착각의 기쁨은 잠시 중대장님은 이렇게 말하는 겁니다. "무슨 애가 그 모양이냐? 나 9년째 군대생활하지만 너같은 저능아는 처음 본다. 너 학교 어디까지 나왔나?" "네, 고등학교까지밖에 못 나왔습니다." "그럼, 그 머리로 대학갈 생각도 했나?" "아닙니다." "그럼, 고등학교는 앞문으로 나왔나? 뒷문으로 나왔나?" "네, 우리 학교는 정문 하나밖에 없어서 정문으로 나왔습니다." "그럼 학년 전체에서 석차는 어느 정도였나?" "네, 아마 제 뒤로 두 명이나 더 있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사실은 10위권에서 놀았거든요.) "임마, 그게 무슨 자랑이냐?" 그러시며 지휘봉으로 제 머리통을 때리지만 평상시 얼마나 원산폭격을 많이 했던지 아프다는 느낌이 전혀 들지 않더군요. 그래도 고향이 같은 선임하사께서는 제가 불쌍하고 안쓰러웠던지 등을 토닥거리며 이렇게 말하는 겁니다. "못난 것도 죄냐? 너무 걱정말고 내무생활 착실히 하고 사고만 내지 않으면 걱정할 것이 없으니 내무반에 돌아가 푹 쉬어라." 고 따뜻한 위로의 말씀을 해 주시기에 저는 더욱더 힘을 얻어 고문관의 길로 한 단계 더 나아가 분발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취사장으로 가는 길은 좀처럼 열리지 않아 포기할까도 생각했지만 그 동안 받은 설움과 얻어맞고 기합받았던 것이 너무나 아까워 포기할 수가 없었습니다. 이렇게 지긋지긋하게 반복되는 시간이 4개월쯤 지났을까, 중대장님께서 소대장과 고참들에게 하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저 송이병은 구제불능인 것 같으니 더 이상 애써 가르치려고 노력하지 말고 내무생활이나 잘하게끔 다독거리며 잘못한다고 해서 구타나 체벌 같은 짓은 절대 삼가라구." 아니! 맑은 대낮에 무슨 대포 날아가는 소리입니까? 언제나 쪼인타로 다리 다 망가뜨려놓고 이제 와서 포기하시다니, 좀 늦은감은 있으나 정말 고마웠습니다. 그 이후로는 누구 하나 저에게 관여하는 사람 없고, 꼴통과 고문관이라는 별을 갖고 다닌 채 쓰레기 소각장이나 화장실 청소, 하수구 정비, 울타리 보수 등 자고로 부대의 궂은일은 도맡아 하는 환경파수꾼으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저에게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았던 가시밭 같은 4개월의 고문관 생활로 생각지도 않았던 환경미화원으로 발탁이 되다니 기대에는 어긋났지만 나름대로 괜찮았습니다. 그런 와중에도 국방부 시계는 돌고돌아 저에게 일계급 진급이란 소식이 전해습니다. 군생활 열심히 한 동료전우나 군생활이 전혀 도움이 안된 저에게도 똑같은 날 중대장님 앞에 일병으로 진급했다는 신고식을 떳떳이 할 수 있게끔 공정한 심사를 해 주신 대한민국 국방부 인사과에 다시 한 번 감사를 드립니다. 하지만 일병으로 진급은 됐어도 환경파수꾼에 대한 변화는 없던 차에 행정반 마이크에서 위대한 송일병을 찾는 안내방송을 듣고 뛰어갔는데 선임하사이신 인사계님께서 대희보를 제게 주셨습니다. "송일병, 취사장 허병장이 제대특명을 받아 며칠 후면 전역을 하게 됐으니 취사장에서 일해보지 않겠나?" 아니! 이게 무슨 주택복권 당첨된 소리입니까. 이 고지를 탈환하기 위해 8개월 동안 얼마나 많은 눈물을 흘렸으며 산전수전을 다 겪어야 했느데.... 저는 겸손한 자세로 대답했죠. "최선을 다해보겠습니다." 내무반으로 돌아가 따블백을 챙겨 취사반으로 가는 저의 발걸음는 마치 자유를 찾은 한 마리의 새였습니다. 그리고 취사장 근무 첫날부터 특혜가 주어졌습니다. 첫째, 취침점호와는 관계없이 일찍 잠을 잘 수 있다. 둘째, 불침번이나 외곽 근무는 일체사절이다. 셋째, 아침점호나 구호, 아울러 교육훈련까지 전부 열외다. 이종환 최유라씨, 취사장 끗발이 얼마나 대단한지 아십니까? 취사장 쫄따구라고 해서 소대 고참들이 함부로 하지 못합니다. 터치했다간 배식시간에 그 결과는 그대로 불을 보듯 뻔하게 나타나게 되니까 말입니다. 특히 고깃국 배식시간엔 두말할 것도 없지요. 그 동안 저에게 못할 짓 많이 한 고참들 고깃국 나오면 항상 위에 둥둥 떠있는 기름덩어리만 한국자 떠주고,저를 불쌍히 여겨 인간답게 위로와 격려를 아끼지 않았던 고참들에게는 국자를 깊이 넣어 바닥에 가라앉아 있는 왕건더기를 듬뿍 담아 주는 편파적인 배식을 계속했었습니다. 하루는 중대장님께서 취사장에 들어와 열심히 일하고 있는 모습을 지켜보시며 이렇게 말하는 겁니다. "송일병 할 만하나?" "예." "너의 예전 모습은 이게 아니었잖아?" "뭐가요?" "그놈, 참 기특하게도 사람 많이 변했네." 이러시며 만족한 웃음을 흘리시며 나가시더군요. 한 번 고문관은 영원한 고문관이 아닙니다. 일단 세웠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피나는 인내와 끈질긴 노력을 했을 뿐이고 대한민국 군인이었기에 후퇴를 안했을 따름입니다. 함께 생사고락을 나누었던 전우들이여! 지금쯤은 일반 예비군들로서 사회에서 각자 맡은 임무에 충실하고 있겠지만 이 사람 또한 농촌의 일꾼으로서 열심히 살아가고 있습니다. 저를 알고 있는 예비군 여러분! 요즈음 부정부패로 사회에 크나큰 사건들을 접하고 볼 때면 마음이 답답하고 울화통이 터질 때가한두 번이 아닙니다. 그럴 때마다 군대시절 한심스러웠던 저의 모습을 다시금 상상하며 스트레스를 확확 풀어 보십시오.
Board 삶 속 글 2023.01.06 風文 R 5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