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대표수필 - 김동리 외 9명 "김동리편" 김동리(1913~1995) 소설가. 본명은 시종, 경북 경주 출생. 경신 고보 중퇴, 서라벌 예술대학장. 한양대 예술대학장 역임. 일찍이 민족 진영의 문학을 대표하여 좌익을 분쇄한 바 있고 순수 문학의 옹호자로서 전후 문단을 실질적으로 주도해 왔다. "황토기" "등신불" "까치 소리" 등 문제 소설의 작가이다. 흰나비 어느 날 대낮에 흰나비 한 쌍이 난데없이 뜰로 날아 들어왔다. 그리하여 하얀 박꽃이 번져 나가듯 뜰 안을 펄펄펄 날아다녔다. 그 때 집 안은 절간 같은 고요에 잠겨 있었다. 내가 이 집으로 이사를 온 것은 금년 여름이 시작될 무렵이었다. 뜰에는 이미 녹음이 가득 차 있었다. 나는 본래 수풀을 좋아하여 내가 집을 가진다면, 한 백 평 가량은 울창한 수풀이 우거지게 하려고 생각하여 왔다. 위는 나뭇잎이 어우러져 하늘을 가리고, 아래는 찔레와 칡덩굴이 엉켜서, 그 속이 천고의 비밀을 감춘 듯한 그러한 수풀을 집 안에다 가지고자 했던 것이다. 그러나, 나는 본래부터 그렇게 유여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러한 뜰을 장만하고 집을 이룩할 수는 없었다. 뿐만 아니라, 그러한 수풀을 가진 집이라고는 여지껏 본 적도 없었다. 아무리 돈이 있대도 그러한 수풀을 집 안에 가지기란 수십 년의 적공을 요할 터인데, 50이 가깝도록 이 모양인 나에게 그러한 꿈이 실현되기란, 참으로 너무나 꿈 같은 이야기였다. 그렇건만, 나는 아직도 그러한 나의 꿈을 포기한 적은 없다(나에게는 이밖에도 이러한 꿈이 몇 가지 있다.). 이것은 엉뚱하고 데퉁스럽게 낙천적인 나의 성격에 기인하는 바 크겠지만, 나에게는 정말 남이 상상할 수도 없는 희망과 자신과 자부가 넘치고 있다. 나 자신이 생각해도 이상한 일이다. 그러한 막연한 희망과 자신들이 도대체 어디서 솟아나고 있는지 알 수 없는 것이다. 그런데, 금년 들어 나는 우연히 그러한 나의 꿈의 한 조각이 이루어진 듯한 집을 하나 얻어들게 되었다. 앞뜰이 넓은데다 나무가 꽤 많다. 가위 거목이라고도 일컬을 만한 은행나무가 네 그루요, 거의 그만한 크기의 잣나무와 그보다는 좀 작으나 정원목으로서는 보기 드물 만큼 큰 편인 단풍나무가 네댓, 그리고 역시 그러한 라일락이 몇 그루, 이 밖에 소나무. 향나무. 밤나무. 매화나무, 등나무, 포도, 찔레, 개나리들도 의외로 어우러져 있었다. 이 나무들이 모두 그렇게 화려한 꽃을 달지는 못하지만, 잎들은 심히 무성하여 그 푸르름이 바야흐로 성하 염천을 물리치리만큼 뜰에 가득하다. 그리하여, 진실로 오랫동안 수풀에 주려 온 나의 두 눈에 싱그러운 기쁨과 위안을 던져 주었다. 나는 온종일 대청에 나와 앉아 뜰을 내다보고 있다. 대낮은 고요하다. 복중이 돼서 그런지 숨이 막힐 듯한 고요다. 햇빛이 강렬할수록 나무 그늘은 더욱 짙다. 뜰에 가득 찬 푸르름이 햇빛을 전부 강물로 만든다. 나는 끄덕끄덕 졸면서도 그냥 뜰에 가득 찬 푸르름을 안고 있었다. 바로 그러한 어느 순간이었던 것이다. 갑자기 흰나비 한 쌍이 난데없이 날아든 것은... 뜰에 가득 찬 녹음이요, 숨막힐 듯한 고요 속이었기 때문에 흰나비의 흰 빛깔은 더욱 눈에 띄었고, 그것은 마치 어떤 '의미'에 도전하는 상징과도 같은 아름다움이었던 것이다. 흰 햇빛은 독수리 날개를 꺾고 이것은 내가 20여 년 전에 쓴 "표박 행로음"이란 시의 한 구절이다. 지금까지의 나의 가장 순수한(혹은 내적인) 경험으로써, 내가 가장 희다고 느낀 것은, 이 시구의 그 '독수리 날개를 꺾은' 햇빛이 아니었을까고 생각한다. 나는 그 때부터 '도의 광휘'는 이렇게 눈이 부시도록 흰빛이거니 생각하여 왔던 것이다. 우리 민족은 태고로부터 흰 빛깔을 숭상하여 왔다고 한다. 이것은 우리의 옷 빛깔을 보아도 곧 알 수 있는 일이다. 요즘의 양복은 외래복이니까 별도지만, 우리의 재래복은 신통하리만큼 일색으로 희다. 무색옷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것은 어린애들이나 그 밖에 특수한 경우에만 착용되는 것이고, 정상 상태는 언제나 흰 빛깔이다. 여기에 이런 문제가 생긴다. 최초에 흰 빛깔을 택한 사람은 누구인가? 어째서 흰 빛깔이 택해졌는가? 흰 빛깔엔 어떠한 뜻이 있는가? 흰 빛깔이 우연히 택해졌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설령, 우연히 택해진 것이라고 가정하더라도, 그것이 모든 사람에 의하여 오랫동안 지지되고 계승된 데는 우연 이상의 필연성을 인정해야 한다. 최남선 씨의 "고사통" 첫머리에는 이런 말이 나온다. - '백'민. 아득한 옛날에 대륙의 극오부를 출발하여 동으로 이동하는 인간의 일 집단이 있으니, 그의 향하는 바는 일출처의 진이라는 곳이었다. 그네는 스스로 '붉은'이라 하니 신명의 자손이란 의미요, 후에 한자로 '붉'을 '백'이라 쓰고 백을 다시 '맥', 또 '맥'으로 고쳤다. 백민은 천을 신계로 하고, 태양을 천주로 숭배하고, 대산을 인간과 천상과의 교통로로 생각하고, 천주는 하계를 감시하다가 필요할 때에는 그 아드님을 강림시키는 것을 믿는 백성이었다. 동으로 전진하는 동안에 여러 곳에 천산 또 신산을 정하고 한참씩 머무르다가 마지막 새벽에 태양을 맞이하는 곳에 있는 거룩한 대산에 이르러 천주의 신도가 여기 있다 하고서 그 주변에 안주할 땅을 이룩하고, 여기저기'불'이란 것을 만들고 있었다. '불'은 한편 '부유' 또 '부여'라고도 하여 인민이 많이 모여서 질서 있게 사는 바닥을 일컫는 말이었다. '불'의 큰 것에는 '나라'라는 이름을 쓰기도 하였다. 이로써 본다면 최초의 흰 빛깔을 택한 것은 어느 개인이기보다 '집단'이었던 것을 알 수 있다. 이 집단은 '태양을 천주로 숭배했다'고 하니 광명을 신명시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흰 빛깔은 신명의 빛깔이요, 도의 빛깔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 유지하기 어려운 흰 빛깔이 그 어려운 환경 속에서 그렇게 오랫동안 유지되며 계승되어 온 소이인 것이다. 흰 빛깔이 밝음을 뜻한다면 검정 빛깔은 어둠을 뜻한다. 어둠과 밝음이 상극적인 것처럼 흰빛과 검은빛도 빛깔의 양극이다. 흰 빛깔이 모든 빛깔의 바탕이라면 검정은 모든 빛깔의 말살을 뜻한다. 흰빛이 모든 빛깔의 모체라면 검정은 모든 빛깔의 죽음을 가리킨다. 흰 빛깔이 삶이라면 검정빛은 죽음이요, 흰 빛깔이 희망이라면 검정빛은 절망이요, 흰 빛깔이 순결이라면 검정빛은 오탁의 극이다. 우리 조상은 왜 '붉은'에서 신을 발견하고'도'를 느꼈을까? 이것은 그 성격이요 생리요 운명이었으리라. '붉은'은 '도'의 이름이요, '백'은 그 빛깔이다. 따라서 흰 빛깔을 숭상하는 한민족은, 그 성격과 그 생리와 그 운명에 있어, 광명의 민족이요, 순결의 민족이요, 희망의 민족이요, 명랑의 민족임을 알 수 있다. 나는 위에서 '나 자신이 생각해도 이상할' 정도로, 나는 막연한 희망과 자신에 차 있다고 말했지만, 그러고 보면 이것은 내 핏줄 속에 조상의 '붉은'이 흐르고 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지금 저 뜰에 박꽃이 번져 나가듯 펄펄펄 날고 있는 흰나비야말로 내 젊은 날의 시구 '흰 햇빛은 독수리 날개를 꺾고'의 '흰 햇빛'의 한 조각 또는 그 '독수리 날개'의 한 부스러기인지도 모르겠다. 아니, 그보다 바도 아득한 옛날 우리의 조상이 처음으로 외치던 '붉은'의 한 조각인지도 모르겠다. 아직도 내 뜰에는 강물을 퍼붓듯한 눈부신 햇빛과 푸른 나무 그늘이 대낮의 고요를 겨루고 있다. 흰나비, 나의 손님이여! 너를 맞이하는 나의 미소 속에 너는 마음껏 나의 뜰에서 날아다오.
사랑할 땐 별이 되고 - 이해인 - 기도 시 슬픈 기도 - `삼풍` 사고의 희생자들을 기억하며 우리가 사랑하는 많은 사람들이 우리가 잘못 지어 무너진 건물에 깔려 처참히 목숨을 잃었습니다 매일 새로운 시신을 찾아냈다는 차디찬 죽음의 뉴스를 들어야 하는 이 우울한 여름의 슬픈 기도는 빗물처럼 흐르는 눈물일 뿐 그 누구도 그 무엇도 위로가 될 수 없는 절망의 한숨일 뿐 다시는 기억하고 싶지 않지만 잊어서도 아니 될 이 엄청난 희생과 슬픔은 멈추지 않는 원망과 분노의 파도로 밤에도 우리를 덮쳐 와 휴식을 잃습니다 앞으로의 교훈으로 삼기엔 너무 깊고 큰 이 아픔은 흉하게 무너져 내린 콘크리트 더미보다 더 괴롭고 무겁게 우리를 내리누릅니다 어둠에서 빠져나온 기적의 사람들을 반기느라 우리는 잠시 슬픔을 잊기도 했지만 아직도 따뜻한 웃음이 눈에 선한 우리의 수많은 그리운 얼굴 사랑스런 아들, 딸, 언니, 오빠 해와 달처럼 집 안을 비춰 주던 소중한 엄마, 아빠, 다정한 연인들 본래의 모습대로 다시 돌려 받을 기적은 없는 것입니까? 꿈에라도 보고 싶은 그리운 이들 흔적이라도 만지고 싶어 찾아 헤매는 가족들의 애타는 기다림 목쉰 통곡소리를 들으십니까? 정말 잘못했다고 이젠 잘해 보겠다고 항상 늦게야 가슴을 치는 우리의 어리석음을 불쌍히 여기소서 돌덩이처럼 무디어진 우리의 양심 오만한 이기심과 눈먼 욕심 서두르지 못한 게으름과 깨어 있지 못한 안일함으로 가까운 이들을 죽음으로 몰아부친 우리의 잘못을 용서해 달라기엔 너무 염치가 없으니 용서하지 마소서 차라리 두려운 침묵으로 벌하여 주소서 괴롭게 신음하다 죽어 갔을 영혼들 부디 밝은 곳에 편히 눕게 해주시고 상처 받은 이들 낫게 하시며 평생 뽑히지 않을 슬픔의 못이 박힌 유족들의 마음에 함께하소서 힘든 중에서 생업을 포기하고 구조와 봉사로 땀 흘렸던 사랑의 이웃들을 어여삐 보시고 우리가 서로의 지친 손 마주잡으며 슬픔을 이겨낼 힘과 용기를 주소서 무고한 이들의 희생이 헛되지 않도록 살아 남은 이들은 이제 다시 사랑하는 법을 배우며 다시 책임지는 법을 배우며 이 아픔을 조금씩 견뎌내게 하소서 (1995)
Board 삶 속 글 2022.12.02 風文 R 613
내 마음이 강해야 내 소원도 이루어진다 - 잭 캔필드, 마크 빅터 한센 하루에 한 가지 선행을 하라 - 로버트 뮬러 박사 전 UN 사무총장 최소한 하루에 한 가지 선행을 하겠노라고 결심하라. 여러 개가 아니라 딱 한가지만. 매일 아침 주님께 말하고 요청하라. "제가 오늘 어떤 일을 할 수 있을까요?" 그분은 당신에게 대답하고, 당신을 이끌어 주실 것이다. 왜냐하면 그분은 당신 안에 있으니까. 그리고 당신의 요청은 그분에게 생명을 드릴 것이다. 주님은 요청받지 않고 주님의 존재를 드러낼 수 없다. 주님은 당신 생명의 진정한 인도자인 당신이 영혼을 통하여 당신에게 말씀하신다. 주님에게 요청하라, 주님에게 말하라, 주님과 대화하라. 그러면 당신은 수많은 기적의 원동력이 될 것이다. 당신은 주변에서 기적을 만들리라. 당신의 삶이 끝나는 날까지 최소한 하루에 한 가지 선행을 하라. 그리고 얼마나 많은 선행이 쌓일지 생각하라! 지구상의 수억만이 하루에 한 가지씩 한다면, 우리의 지구는 어떻게 될까?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 삶에 연연하는 자는 그것을 잃은 것이다. 하지만 적절한 명분으로 그것을 내버리는 자는 삶을 얻을 것이다. - 셀리아 그레함 어느 선량하고 신심이 강한 남자가 재정적인 위기를 여러 번 겪게 되었다. 그때마다 그는 주변에 도움을 청했지만, 자신이 너무 가난하기 때문에 다른 이의 관심을 끌 수 없는 것처럼 보였다. 어느날 밤, 절망에 빠진 그는 무릎을 꿇고 앉아 하늘을 올려다보며 기도를 올렸다. "주님, 저는 파산했습니다. 제발 복권이 당첨되게 해주십시오, 빠른 시일 내로요!" 다음 주가 되자, 그는 상황이 호전되리라는 기대로 낙천적으로 되었다. 하지만 3개월이 지나도록 단 한푼도 생기지 않았고 그에 비례하여 그는 믿음이 약해졌다. 연말에는 화가 머리끝까지 났다. "주님, 정말 그곳에 계십니까? 저는 당신이 도와주리라 믿었습니다. 그런데, 일년이 지나도록 당신께서는 제 기도에 대한 답을 하지 않으셨어요." 그러자, 갑자기 하늘에서 어두운 구름이 사라지고 한 줄기 밝은 햇살이 비추며 주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네 말을 듣고 있다.... 듣고 있다. 사실, 나는 네 기도를 모두 들었노라. 하지만 나에게 힘을 발휘할 기도를 주어라. 최소한 너는 복권을 사야잖느냐."
Board 추천글 2022.12.02 風文 R 1630
Board 고사성어 2022.12.02 風文 R 931
“자식들, 꽃들아, 미안하다, 보고 싶다, 사랑한다, 부디 잘 가라” ‘삼가 고인들게 명복을 빕니다. 지금 가는 길 부디 행복하세요. 죄송합니다.’ 노파는 포스트잇을 벽에 붙였다. “할머니, 그렇게 뭐라도 적어 붙이면 마음이 어떠세요?” “잉, 편안혀. 잘 가라는 말이라도 하니 맴이 편안혀, 에휴.” 이태원 10·29 참사 현장, 사람들은 말없이 서성인다. 말을 하는 건 벽에 붙은 포스트잇. 사람들은 포스트잇이 하는 말을 듣는다. ‘친구들아, 언니야, 오빠야, 동생아, 자식들아, 꽃들아’ 이름을 부르며, ‘미안하다, 죄송하다, 괴롭다, 사랑한다, 보고 싶다, 부디 잘 가라’고 말을 걸고 있었다. 죄책감, 무력감, 우울감, 분노가 뒤엉킨 말들을 조용히 듣고 있었다. 사람들은 말을 쌓고 있었다. 기어코 이어붙이고 있었다. 옆으로 앞뒤로 위아래로, 같은 말을 겹겹이 쌓아나가고 있었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라는 상투적인 말일지라도 꾸역꾸역 적었다. 명령과 지침과 해명과 그럴듯한 논리로 무장한 권력자들에 비하면, 헛되고 부질없는 말들. 이 무력한 말들로 뭘 하려고. 얕은 바람에도 떨어져 나뒹구는 이 말들로 뭘 하려고. 어리석은 우리는 매번 사회적 참사(죽음들)를 맞닥뜨리고 나서야 권력자들이 구사하는 ‘통치’의 민낯을 본다. 치밀하되 졸렬하고, 뻣뻣하되 두려움에 싸인. 사람을 타락시키는 건 두려움이다. 권력을 상실할지 모른다는 두려움은 권력을 행사하는 사람을 타락시킨다(아웅산 수치). 두려움에 싸여 타락하고 있는 권력 앞에 사람들은 ‘통치되지 않는 말’을 쌓고 있었다. 무심히 흩날리는 포스트잇에서 ‘통치될 수 없는 것들’이 삐져나오고 있었다. 한겨레말글연구소 연구위원·경희대 교수
무엇을 어떻게 쓸까 - 이오덕 2부 - 시를 어떻게 쓸까 꾸며 쓰는 버릇 어떻게 고칠까(2/2) 다음은 역시 같은 문집에 있는 같은 학년 학생의 작품이다. 기쁨과 슬픔 꽃의 모습이 아름다워 손에 쥐었다. 언제나 창가에 두고 싶어서. 햇살이 비추면 그 빛에 빛나고 달빛이 비치면 내 작은 별이 되었다. 어느 날 아침 내 창가엔 빛이 보이지 않았다. 어둔 그림자만 보일 뿐. 내겐 기쁨을 주었지만 꽃에겐 아픔이었을 뿐이다. 여기에는 다듬어야 할 한자말이 없다. 쉬운 말로만 쓴 점은 잘 되었다. 그런데 말의 문제는 여전히 있다. 꽃의 모습이 아름다워 손에 쥐었다. 첫머리에 나온 이 말인데, 여기 씌어 있는 낱말들이 모두 깨끗한 우리말이기는 하지만 우리가 입으로 하는 말과는 다른 질서를 가진 말고 되어 있다. 우리가 말을 한다고 할 때 꽃의 모습이.. 라고는 하지 않는다. 꽃 모습이.. 라고도 안하고 꽃이 아름다워.. 하는 것이다. 시가 꼭 입으로 하는 말을 그대로 써야 되는 것은 아니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우리의 경우 입으로 하는 말을 떠나면 그것이 거의 모두 일본말법이나 서양말법을 따라가는 글말로 되어버린다는 것을 알아두지 않으면 안 된다. 시에서 쓰는 말이란 다른 게 아니다. 살아 있는 말, 우리가 살아가면서 입으로 하는 말이 가장 좋은 시의 말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다음 줄에 적힌 손에 쥐었다 는 매우 간결하고 요령있는 말 같지만 잘된 말이 아니다. 시는 어떤 모습이든지 행동이든지 될 수 있는 대로 뚜렷하게 보여주는 말로 되어야 하는데, 이 말은 그저 최소한도의 뜻만 전하는 말로 되어 있다. 대체 그 꽃은 어느 꽃밭에서 꺾었다는 것인가? 가계에서 샀다는 것인가? 누가 가지고 있는 것을 달라고 해서 얻었다는 것인가? 꽃이 아름다워 한 송이 샀다. 가령 이렇게 쓴다고 해서 말이 길어지지도 않는다. 그리고 이왕이면 그게 무슨 꽃이었는지도 쓸 것이지 왜 꽃 이라고만 했는가? 시는 될 수 있는 대로 사물을 뚜렷하게 나타내지 않고 추상으로 된 말로만 쓰는 것이라면 이렇게 써야 할 것이다. 그런데 시를 추상으로 된 말로만 쓰다니! 이것은 시에서 가장 거리가 먼 글이요, 시가 될 수 없는 글이다. 이래서 둘째 연도 최소한의 뜻만 전하면서 곱게 그려 보이려고 한 말이 되었고, 셋째 연은 쉽게 전달이 안 되는 말이 되어 버렸다. 이러고 보니까 이 시는 이 학생이 겪은 사실도 없는 일을 말로만 이렇게 만들어 쓴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그만큼 사물의 모습이 나타나지 않는다. 그런데 마지막 연에 와서, 지금까지 대강 설명만 하듯이 한 말들이 조금은 살아나는 것 같다. 하지만 여기서 가장 중요한, 꽃이란 생명을 두고 생각하는 태도가 고등학생이 마땅히 가져야 할 정도에 이르지 못했다. 그 꽃에게 어찌 아픔 정도이겠는가? 바로 죽음 인 것을! 다시 같은 문집에서 한 편만 더 들어 본다. 이번에는 3학년생의 작품이다. 아부지 난 거리를 헤매다 누군가를 보고 도망친다. 밑을 두세 번 걷어올린 헐렁한 군복 바지에 작업복 상의 검정 장화 목장갑을 끼고 두 바퀴 삐그덕 자전거를 타고 구슬땀을 흘리며 분주한 누군가를 보고 도망친다. 난 친구들과 거리를 나돌다 누군가를 외면한다. 외면하고 돌아선 나를 그 누군가의 시야에서 멀어질 때가지 한없이 바라보았다. 난 그 누군가의 시선조차도 외면한다. 뒤란에 뒷짐지고 홀로 서서 감나무를 눈물로 쳐다보는 아부지를 외면한다. 마치 잎이 떨어진 감나무처럼 서 있는 아부지를... 이 시에서도 어려운 낱말은 별로 없지만 상의 시야 시선 같은 말은 잎으로 하는 말로 바꾸는 것이 좋겠다. 상의 는 웃옷 이나 저고리 로 쓰면 좋고 시야 는 눈 하면 되고, 시선 은 눈길 이면 된다. 이 시는 모두 다섯 연으로 되어 있는데, 그 연의 마지막마다 도망친다 와 외면한다 는 말이 되풀이 되어 있다. (다만 끝연에서는 외면한다 다음에 다른 말이 더 붙어 있다.) 1,2연은 도망친다 이고 3,4,5연은 외면한다 이다. 이 도망친다 와 외면한다 는 비슷한 마음의 상태를 나타낸 말이다. 바로 이 시의 주제가 되는 말이겠는데, 그렇다면 지은이는 무엇에서 왜 도망치고 외면하려고 하는가? 이 물음에 대한 답은 벌써 제목에서 나타나 있다. 나를 낳아주고 길러주고 내 모든 앞날을 결정하는 아부지 로부터 도망하는 것이고, 그 아부지를 외면하는 것이다. 그 까닭을 이 시에서 뚜렷하게 말하지는 않았지만, 제목과 2연과 마지막 연에서 적어 놓은 말들로 느껴 알 수 있다. 사투리를 쓰는 무식한 아부지 가 싫고, 밑을 두세번 걷어 올린 헐렁한 군복 바지에 작업복 웃옷 이 싫고, 검정장화 와 목장갑 과 두 바퀴 삐그덕 거리는 자전거를 타고 구슬땀을 흘리며 분주하게 일만 하는 사람이 싫고 뒤란에 뒷짐지고 홀로 서서 감나무를 눈물로 쳐다보는 가난한 아부지 가 싫은 것이다.이렇게 되고 보면 이 작품을 쓴 사람의 정신 상태가 문제된다. 자기를 낳아 준 부모가 싫고 일하는 사람이 싫고, 가난한 사람들이 싫고, 그래서 이 땅과 조국이 싫고 부끄러워 남의 나라만 쳐다보고 서양나라만 부러워하는 이런 정신 상태는 비단 이 작품을 쓴 학생만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닐 것이다. 나는 이미 이런 정신 상태를 우리 겨레가 가지고 있는 무더기 정신병이라 하여, 우리말을 버리고 한자말, 일본말, 서양말을 쓰고 싶어하는 고약한 버릇으로 지적한 바가 있다. 시란 사람의 마음을 깨끗하게 해부고 높여주는 것인데, 이런 병든 마음을 보여주고 있으니 이 글을 어찌 시라 하겠는가? 난 거리를 헤매다 누군가를 보고 도망친다. 아버지를 아버지라 하지 않고 첫 연부터 이렇게 낯선 사람을 말하듯 누군가라 해서 되풀이해 놓은 것도 문제지만, 대관절 고등학생이 무슨 할 일이 없어서 거리를 헤매는가? 이래서 이 작품은 지은이의 마음가짐뿐 아니라 표현이 또 문제가 된다. 말하자면 시 같은 것을 흉내내고, 시인인 척하는 글 버릇 말이다. 이 작품은 지은이의 참마음을 쓴 것이 아니라, 전체가 어떤 틀의 시를 흉내내어 만든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든다. 앞에서 지은이가 아부지 를 외면하고 도망치고 싶어하는 까닭이 2연과 5연에 나타나 있다고 했지만, 사실은 2연도 5연도 제대로 쓴 것이 아니다. 2연에 그려 놓은 사람은 대관절 무슨 일을 하는 사람인가? 헐렁한 군복 바지에 작업복 웃옷 검정장화 .. 와 같은 말들을 늘어 놓고 구슬땀을 흘리며 분주 하다는 따위 틀에 박힌 말만 적었지, 조금도 그 사람의 뚜렷한 모습이 안 보인다. 5연은 더 엉터리로 되어 있다. 뒤란에 뒷짐지고 홀로 서서 감나무를 눈물로 쳐다보는 아부지 라 했는데, 이 아부지는 뭘 하는 사람인가? 왜 감나무를 눈물로 쳐다보는가? 잎이 떨어진 감나무처럼 아부지 가 서 있다니 무슨 뜻을 나타내려 했는가? 엉터리요, 흉내요, 무슨 척하는 말일 뿐이다. 4연을 보면 외면하고 돌아선 나를 그 누군가의 시야에서 멀어질 때까지 한없이 바라보 다가, 그만 그 누군가의 눈길조차도 외면한다 고 했다. 도망치고 외면하는 나를 바로 보려고 하는 또 하나의 나를 외면했으니, 이것은 부정의 부정이요, 따라서 도망치고 외면하는 나로 돌아간 것이다. 그러나 아무래도 장난스런 말이다. 시의 제목 아부지 란 말부터 문제다. 아부지 라고 아직도 말하는 고등학생이 있을 것이다. 그러니 아부지만 말을 얼마든지 글로 쓸 수 있다. 그런데 이 시에서는 아무래도 어색해 보인다. 그것은, 다른 말들은 모두 표준말이고 유식한 말인데, 이런 말을 쓴 사람이 하필 아버지란 말을 안 쓰고 아부지 라 했으니 말이다. 이것은 아부지 란 사투리를 쓰는데서 그런 사투리로 살아가는, 일만 하는 아버지, 가난하고 무식하고 그래서 부끄럽기만 한 살붙이의 모습을 일부러 보여주려고 한 속셈으로 쓴 것일까? 그래서 실제는 아빠 라고 말하면서 글에서는 일부러 아부지 라 쓴 것일까? 아마도 그럴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바로 계산이요 흉내다. 계산과 흉내가 시를 결딴낸다. 거짓되게 한다. 사투리나 써서 무식한 그 아버지가 싫고 부끄럽다고 도망치고 싶어하는 사람이 스스로 그 사투리를 자랑스럽게 쓴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니까! 지금까지 시 세편을 들어 말했는데, 오늘날 고등학생들이 쓰는 시의 특징 - 결점을 이 시들이 잘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한다. 고등학생들의 시에 공통되는 결점은 1.삶이 없고,삶을 떠나 있고, 2.시인들의 시를 흉내내고, 3.실감이 따르지 않는 허황한 말을 늘어놓은 것, 이 세 가지다.
한국대표수필 - 김동리 외 9명 "김동리편" 김동리(1913~1995) 소설가. 본명은 시종, 경북 경주 출생. 경신 고보 중퇴, 서라벌 예술대학장. 한양대 예술대학장 역임. 일찍이 민족 진영의 문학을 대표하여 좌익을 분쇄한 바 있고 순수 문학의 옹호자로서 전후 문단을 실질적으로 주도해 왔다. "황토기" "등신불" "까치 소리" 등 문제 소설의 작가이다. 수목송 돌과 흙과 쇠 같은 따위들은 그 깸 없는 깊은 잠에 주검처럼 굳어진 자들이라, 일깨워 우리와 사귈 수 없고, 조수와 충류들은 생로병사에 사람의 아픈 바를 지니되, 그 신령한 바를 갖추지 못하니, 또한 더불어 살기에 나를 기를 것이 없다. 수목은 이와 달라, 돌, 흙, 쇠같이 깸 없는 잠으로 굳어진 자도 아니요, 꽃으로 잎으로 또는 열매로 그 생명의 다양한 변화가 사람의 얼굴에서처럼 발랄하되, 그 생로병사에 신음없이 의젓함은 조수, 충류에서 멀다. 깨어 있으되 소란하지 않고, 삶을 누리되 구차하지 않음이 사람에서는 지인달사의 풍모라고나 할까? 우리가 수목에서 가장 경탄을 금할 수 없는 것은 그 장수라 할지니, 느티나무, 은행나무, 밤나무, 녹나무, 회화나무, 편백나무 따위들은 그 수명이 천 년에 이르는 자 많고, 떡갈나무, 이깔나무, 벚나무, 감탕나무 따위들은 그 연연하게 물들어 화사하기 꽃과 같은 잎을 달고도 견디기를 오히려 5백 년에서 지난다. 동양의 역사 소설인 "삼국지"에 보면, 주인공 유비의 고향은 탁현인데, 그의 집 앞에 천 년 묵은 뽕나무가 누각처럼 펼쳐 서 있기 때문에 동네 이름을 누상촌이라 불렀다 하며, 또 다른 주인공의 하나인 조조의 죽음을 재촉한 이야기에도 천 년 넘은 배나무 이야기가 나온다. 그러면, 뽕나무, 배나무도 다 각각 천 년의 장수를 누릴 수 있다고 하겠다. 그뿐 아니라, 경주 불국사의 대웅전과 구례 화엄사의 각황전의 어느 기둥들은 각각 천 년 된 싸리나무와 박달나무라고 전해지고, 이 밖에도 고사 거찰에 대개 천 년 넘은 잡목 기둥이 한 두 개씩 들어 있다고, 그 절의 승려들로부터 자랑하는 말을 듣는다. 이로써 볼진대, 천 년을 사는 나무의 이름들은 따로 들먹일 필요조차 없을 것 같다. 수목이 이와 같이 사람이나 조수, 충류에 비겨 그 유장한 세월을 누림은, 그 뿌리를 깊이 땅속에 묻고 그 잎으로 직접 태양을 흡수하게 때문이리라. 따라서, 수목은 대지와 태양을 직접 먹이로 삼고 살아가는 유기체라 할 것이다. 우리가 자연이라고 할 때 맨 먼저 수목을 머릿속에 그리게 되는 것도 이 때문인지 모른다. 우리가 또한 수목에서 그 장수와 더불어 찬양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은 그 청춘이라 하겠다. 수목은 어린 나무나 늙은 나무나 잎을 달고 꽃을 피우는 이상 언제나 청춘이다. 그 잎은 푸르고 그 꽃은 붉은 것이 보통이다. 붉지 않으면 희거나 누르거나 푸르거나 하더라도, 꽃이란 꽃은 다 잎보다도 더 젊고 아름다운 얼굴이다. 이렇게 청청한 잎과, 잎보다도 더 젊고 아름다운 꽃을 가진 모든 수목은 우리에게 언제나 희망과 용기와 위안을 준다. 우리가 고향을 생각할 때 제일 먼저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은 어머니의 얼굴이라든지 가까운 육친의 모습이라 하겠지만, 그것은 때에 따라 바뀌게 마련이다. 어머니나 아버지가 연로해서 세상을 떠나셨거나 했을 땐 어버이 대신 형제나 또는 다른 친척, 친지의 얼굴이 떠오를 수도 있을 것이다. 이렇게, 어머니를 대신할 형제나 친척마저 타처로 떠나 버렸을 때, 아아, 그 때 고향을 지키는 얼굴은 마을 앞에 서 있는 늙은 팽나무나, 마을 뒤에 서 있는 묵은 느티나무보다 더한 것이 있을까? 예로부터 고향산천이란 말이 있고, 또 사실 산과 내야 나무보다도 더 오래고 더 믿을 만한 고향이기도 하지만, 마을 앞뒤의 늙은 팽나무나 묵은 느티나무처럼 고향을 느끼게 하는 것이 있을까? 우리는 기차나 자동차를 타고 여행을 하다가도, 어느 낯선 마을 앞에 늙은 회나무와 느티나무가 몇 그루 멋지게 가지를 벌리고 서 있으면 덮어놓고 그 동네가 평화스럽고 행복스러워 보이며, 무언지 깊은 유서나 전설이라도 깃들인 것같이 느껴진다. 만약, 그 나무 곁에 주막이라도 있다면 곧 뛰어내려 막걸리라도 한 잔 하고 싶은 야릇한 충동을 느끼기도 한다. 수목은 산야나 벽지에만 흔한 것이 아니라, 도회와 읍, 시의 거리 거리, 공청과 여사와 민가의 뜰마다 번성하지 않는 데가 없다. 이렇게 현대 같은 문명의 폭위에도 배척받지 않고, 도시의 시가와 청사, 여염집 마당에 번영, 무생하여 사람과 더불어 공존, 교환함은, 수목이 우리에게 정신적인 위안과 그윽한 즐거움과 기쁨과 희망과 이익을 줄지언정, 우리의 짐이 되고 걱정이 되는 일은 없기 때문일 것이다. 생각해 보라. 수목이 없는 세상에 아름다움이 있겠는가? 수목이 없는 세상에 기쁨과 위안과 희망이 있겠는가? 수목이 없는 세상에서 행복을 생각할 수 있겠는가? 우리가 수목에서 받는 이 형언 할 수 없는 그윽한 기쁨과 즐거움과 위안과, 그리고 마음의 안정은 어디서 연유하여 오는 것일까? 그것은 흡사 기독교를 신봉하는 이들이 신에게서 받는 그것과도 같다. 수목은, 아니 자연은, 동양인에게 있어, 성격이 다른 신의 이름일지도 모른다.
사랑할 땐 별이 되고 - 이해인 - 기도 시 우리를 흔들어 깨우소서 어디서나 산이 보이고 강이 보이는 작지만 사랑스런 나라 우리가 태어나 언젠가 다시 묻혀야 할 이 아름다운 모국의 땅에서 우린 늘 아름다운 것을 기억하며 아름답게 살고 싶습니다 이 소박한 꿈이 헛되지 않도록 우리를 긴 잠에서 흔들어 깨우소서. 주님 또 한 해가 저물기 전에 두 손 모으고 겸허한 참회의 눈물을 흘릴 줄 알게 하소서 나라의 일꾼으로 뽑힌 사람들이 거짓과 속임수를 쓰며 욕심에 눈이 어두운 세상 자식이 어버이를 죽이고 제자가 스승을 때리며 길을 가던 이들이 무참히 살해당하는 우리의 병든 세상을 불쌍히 여기소서 자신의 편리를 위해 자연을 훼손하고 그럴듯한 이유로 합리화시켜 잉태된 아기를 수없이 죽이면서도 해 아래 웃고 사는 우리의 태연함을 가엾이 여기소서 한 주검을 깊이 애도하기도 전에 또 다른 주검이 보도되는 비극에도 적당히 무디어진 마음들이 부끄럽습니다 하늘에서, 땅에서, 강에서, 바다에서 불의의 사고로 목숨을 잃은 우리 가족과 이웃들을 굽어 보소서 잘못된 것은 다 남의 탓이라고만 했습니다 "주님, 저는 아니겠지요?"라고 비겁하게 발뺌할 궁리만 했습니다 자신의 아픔과 슬픔은 하찮은 것에도 그리 민감하면서 다른 사람의 엄청난 아픔과 슬픔엔 안일한 방관자였음을 용서하소서 우리가 배불리 먹는 동안 세상엔 아직 굶주리는 이웃 있음을 따뜻한 잠자리에 머무는 동안 추위에 떨며 울고 있는 이들 있음을 잠시도 잊지 않게 하소서 사랑에 대해서 말하기보다 먼저 사랑을 실천할 수 있도록 생명에 대해서 말하기보다 먼저 생명을 존중할 수 있도록 우리 모두를 변화시켜 주소서, 주님 항상 생명의 맑은 물로 흘러야 할 우리가 흐르지 않아 썩은 냄새 풍기는 오만과 방종으로 더럽혀지지 않게 하소서 사랑이 샘솟아야 할 우리 가정이 미움과 이기심으로 무너져 내리지 않게 하소서 나 아닌 그 누군가가 먼저 나서서 해주길 바라고 미루는 사랑과 평화의 밭을 일구는 일 비록 힘들더라도 나의 몫으로 받아들이게 하소서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할 참됨과 선함과 아름다움의 집을 내가 먼저 짓기 시작하여 더 많은 이웃을 불러모으게 하소서 지워지지 않는 그리움을 가슴에 묻고 나직이 죽은 이를 불러 보는 낙엽의 계절 우리는 이제 뉘우침의 눈물을 닦고, 희망의 첫 삽에 기도를 담습니다, 주님 (1994)
Board 삶 속 글 2022.12.01 風文 R 602
내 마음이 강해야 내 소원도 이루어진다 - 잭 캔필드, 마크 빅터 한센 신에게 요청하라 3 - 로버트 쉴러 나는 유명한 영화배우 존 웨인이 병상에서 걸어왔던 그날의 밤을 잊지 못한다. 그는 다음날 아침에 암 제거 수술을 받을 예정이었다. 나는 병원으로 달려가는 길에 내가 해야 할 일에 대해 알려달라고 기도를 올렸다. 내가 친구인 존 웨인에게 신을 만날 준비가 되었느냐고 물어야 할까? 전지전능한 주님을 대신하여 그의 죄를 용서하고 현세의 삶을 정리하게 해야 할까? 내 마음속에서 울려오는 대답은 확고했다. "아냐, 그것은 내가 할 말이 아니야." 이어 주님의 성령처럼 작은 목소리가 이렇게 속삭였다. "존 웨인의 마음속에서 주님을 불러 일으켜라. 그는 스스로 주님을 받아들이거나, 거부할 것이다. 그에게 선택을 맡기는 것이 네가 할 일이다." 병원에 도착하자, 나는 유명 배우가 속옷 바람으로 병원 침상에 누워있는 초췌한 모습을 발견했다. 함께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눈 끝에 내가 말했다. "존, 내가 자네를 위해서 기도를 해도 될까?" 그의 대답은 즉각적이었다. "그럼. 나에게는 도움이 필요하다네." 내가 기도하는 동안 그는 눈을 꼭 감았다. 그의 주름진 얼굴은 팽팽하게 긴장되어 있었다. 그리고 아무런 의도나 계획, 의식적인 꾸밈없이 내 입에서 기도 말이 쏟아져 나왔다. "주님, 존 웨인은 당신을 알고 있습니다. 그는 평생 당신에 대해 들어왔습니다. 그는 당신을 존경합니다. 그리고 마음 속 깊이 당신이 그의 모든 죄를 용서하실 수 있고, 또 용서하고 싶어하심을 알고 있습니다. 그의 마음 속 깊이 당신을 받아들이고, 당신을 믿고, 당신을 사랑합니다." 그 순간, 나는 눈을 뜨고 존 웨인을 봤다. 이제 그의 얼굴에서 모든 긴장은 사라지고 막 떠오른 태양처럼 해 맑기 이를 데 없었다. 수치심이나, 심적인 저항감이나 불편한 흔적은 찾을 수 없었다. 의심할 나위 없이, 나는 올바른 말을 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는 순순히 그 말을 받아들였다. 신에게 요청하라 4 - 팀 피어링 캐더린은 암으로 가슴에 큰 멍울이 생겼다. 하지만 병원에 갈 수 없었다. 그녀는 다 쓰러져가는 오두막에서 헐벗고 사는 처지였다. 살림살이가 너무 초라하고 볼품없었기에 아무도 집안에 들이지 않던 그녀가 마침내 나의 방문을 허락했다. 나는 그녀와 친해졌고, 백방으로 구하여 식료품과 생필품을 댔다. 그녀는 암으로 격심한 고통에 시달리다 못해 당장 병원 응급실로 실려 갈 처지에 이르렀다. 그래서 나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진을 마주 보고 앉아 기도했다. "주님, 우리가 캐더린을 위하여 무슨 일을 할 수 있을까요? 그녀를 돕기 위해서 무엇을 할 수 있을까요?" 그 대답은 '너는 무엇을 하고 싶으냐?'였다. 그 순간, 한 가지 생각이 뇌리를 스쳤다. 사람이 이 세상에 태어나서 사는 이유는 교훈을 얻기 위함이요, 캐더린만 그 과정에서 제외시킬 수 없다는 것이었다. 아마 그녀가 영적으로 더 높은 단계에 이르기 위한 시련이 이 병이리라. 하지만 나는 병으로 고통받는 모든 이를 치료하고, 모든 일이 제대로 돌아가게 만들고 싶었다. 나는 온 마음을 다하여 주님의 질문에 대답했다. "진정으로 그녀가 완치되는 모습을 보고 싶습니다." 그리고 2주일 내로 그녀는 병원에 다니게 되었고, 두 달 내로 방사선 치료를 받아 가슴의 멍울이 씻은 듯 사라졌다. 의사들은 입을 모아 그녀의 회복을 기적이라고 했다. 그렇다, 그 일은 기적이었다! 그리고 정말 고통받는 이에 대한 나의 특별한 기도에 대한 응답이었다. 신에게 요청하라 5 - 산드라 로저스의 <여명>중에서 베티 J. 에디는 베스트 셀러가 된 저서 <빛으로 둘러싸여>에서 천사를 봤다고 고백했다. 1973년 거의 죽다 살아났던 경험 중에 그녀와 사람들의 기도에 천사가 나타나서 응답하는 모습을 봤다는 것이다. 천사들은 사랑과 기쁨으로 가득 차 있었고, 기도를 올렸던 이들은 빛으로 둘러싸여 작은 백열구처럼 빛나며 지상을 밝혔다고 한다. "나는 모든 기도가 응답받는다는 천사의 말을 이 귀로 똑똑하게 들었습니다." 그녀는 이렇게 말을 이었다. "주님은 언제나 우리의 필요를 아시고, 우리를 도와주실 초대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또한 주님은 우리의 모든 기도에 응답하실 권능을 지니셨지만, 그 힘은 그 분 자신의 법과 우리의 의지로 묶여 있습니다. 그러니 우리가 그분의 권능을 우리 자신의 것이 되도록 초대해야 합니다. 우리는 그분을 신뢰해야 합니다. 일단 우리가 진정으로 요청하고 그분을 의심하지 않는다면, 그것에 대한 보답을 반드시 받을 겁니다." - 캐서린 캐슬 어느날 아침, 나는 컨트리 클럽 플라자 근처를 지나고 있었다. 나는 한 상점에서 새 지갑을 막 구입한 터였다. 나는 쇼핑백에서 지갑을 꺼내서 손에 꼭 쥐고 주님에게 청했다. "이 지갑 속에 돈이 그윽하게 하시고, 그 돈을 다른 이를 위해 쓸 수 있도록 해 주십시오." 그 기도가 끝나자 마자, 스테이션 웨건 한대가 천천히 내 옆에 섰다. 그리고 그 안에 탄 두 명의 남자가 아무 말도 없이 반짝이는 동전을 나에게 와르르 던지는 것이 아닌가. 그것이야말로 '주님의 돈'이 아니고 무엇이랴!
Board 추천글 2022.12.01 風文 R 128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