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을 어떻게 쓸까 - 이오덕 2부 - 시를 어떻게 쓸까 살아있는 시는 어디서 오는가 - 시란 무엇인가 시라고 말하는 글은,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가는 가운데(무엇을 보거나 듣거나 생각하거나 일하는 동안에) 마음속에 일어나는 느낌(감동)을 싱싱한 우리말로 나타낸 글이다. 이렇게 시의 뜻을 밝혀 놓고 볼 때, 시가 되는 조건을 세가지로 나누어서 말할 수 있겠는데, 첫째는 살아간다 는 것이고, 둘째는 감동 이고, 셋째는 싱싱한 우리말 이다. 이것을 또 달리 말하면 첫째는 무엇을 썼는가 하는 글감(소재)의 문제가 되고, 둘째는 시의 알맹이가 되고, 셋째는 시의 형식, 또는 시가 담겨 있는 그릇 아니면 시가 입고 있는 옷 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 세 가지 가운데서 둘째에 들어가 있는 감동 에 대해서는 누구나 그렇다고 여길 것이다. 시가 감동이 없이 쓰일 수 없고, 감동이 시의 생명이라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는 상식이다. 그래서 이 글에서는 첫째(삶)와 셋째(말)를 중심으로 해서 살펴보기로 하겠다. 감동 은 삶 과 말 을 이야기하는 가운데 저절로 생각하게 될 수도 있을 것이다. 또 제목에서 삶 이란 말을 넣지 않은 까닭은 말 의 문제가 그대로 삶 의 문제로 이어진다고 보기 때문이다. 시에서 삶이 빠지면 삶, 곧 살아간다(생활한다)는 것은 넓게 말하면 우리가 이 세상에서 숨을 쉬는 동안에 하는 모든 행동의 상태를 가리킨다. 무엇을 보거나 듣거나 냄새를 맡거나 일하거나 길을 걸어가거나 책을 읽거나 글을 쓰거나 싸우거나 먹거나 무슨 흉내를 내거나 거짓말을 하거나.. 잠자고 꿈꾸는 것도 삶이고, 방안에 앉아 공상을 하는 것도, 미친 사람이 미친 짓을 하는 것도 다 삶이다. 이렇게 보면 무엇을 쓰든지 삶 아닌 것이 없으니 문제가 될 것이 없다. 그러나 이 글에는 삶이 없다 고 할 때 그 삶은 사람이 하는 모든 행위를 가리키는 삶이 아니고, 적어도 시의 알맹이가 생겨날 만한 삶이다. 병들지 않은 삶이요, 제 정신이 없는 상태에서 남을 따라가기만 하는 삶이 아닌 삶, 바람직하고 건강한 삶을 말한다. 바윗돌 위에서나 콘크리트 바닥에서, 또는 플라스틱 상자 속에서는 씨앗이 싹터날 도리가 없다. 잡초가 나 있더라도 적어도 흙이 있고 햇빛이 죄는 땅이라야 씨앗이 싹틀 수 있으니까. 그럼 시를 쓰는 사람이 어디 미친 짓을 하거나 잠꼬대를 하겠는가? 이렇게 말할 사람이 있겠는데, 내가 보기로는 그렇지 않다. 미치거나 잠꼬대를 한다고는 할 수 없더라도 대체로 우리 나라의 시인들이 그렇게 건강하게 살아간다고 볼 수 없다. 시인들이 써 놓은 시를 보면 그렇게 느껴진다. 그 이야기를 지금부터 하겠다. 사람에게 가장 가치가 있는 삶은 일을 하는 것이다. 사람은 우선 일을 해야 먹고 살 수 있지만, 일을 해야 몸도 마음도 건강하게 된다. 일을 하지 않으면 어떤 사람이고 다 병든다. 이것은 어느 시대에 어느 땅에서고 진리다. 아이들도 일을 하면서 배워야 (일하는 것이 그대로 배움이 되어야) 참 배움이 된다. 일이 없는 공부, 책만 읽고 쓰고 외우는 공부는 지루하고 따분하고, 그래서 그런 공부만 해야 할 대 사람의 성격은 병들고 비뚤어져 버린다. 일이 없는 공부, 책만 읽는 공부는 하지 않는 것이 열 배 백 배 낫다. 사람에게 생각한다는 것이 중요하고, 글을 쓰는 것도 매우 필요하다. 그러나 방안에 혼자 앉아서 생각만 하거나, 글만 쓴다면 그런 삶도 좋지 않다. 일을 하지 않고 생각만 하게 되면 그 생각이 병든다. 일을 하는 것이 없는데 글만 자꾸 쓴다면 그 글이 제대로 쓰일 수가 없다. 그래도 시인과 소설가들은 글만 잘 쓰고 있더라. 그렇다. 시인과 소설가들이 글만 쓰고 있다는 것, 이것이 문제다. 나는 글만 쓰고 있는 이들이 써 놓은 글을 제대로 되었다고 보지 않는다. 일제시대고 오늘날이고 많은 문인들이 글만 써 왔는데, 그래도 지난날에는 그 폐단이 좀 덜했지만 오늘날에는 글만 쓰고 있는 사람들이 글의 공해, 문학의 공해를 아주 크게 일으키고 있다고 본다. 지난날에 폐단이 덜했다는 것은, 일제시대나 60년대까지만 해도 많은 시인들이 글만 쓰기는 했지만 그들이 자라난 과정에서는 삶이 있었고, 대체로 일을 하면서 자라났기에 시가 될 만한 땅을 저마다 가지고 있었다고 본다. 물론 지난날에는 삶이 있었더라도 지금 삶에서 떠나 있으면 제대로 쓰기가 힘들기는 하지만 그래도 시가 아주 병들 정도로까지는 되지 않을 바탕이 있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오늘날은 어떤가? 거의 모든 사람들이 아주 어려서부터 자연과 일하는 삶을 떠나서 방안에 앉아 책만 읽으면서 자라나 어른이 되었다. 이런 사람들이 또 방안에 앉아 생각만 하고 시만 쓰고 있으니, 이런 시가 어떤 알맹이를 담고 어떤 말고 되어 있을 것인가는 그것을 바로 읽어 보지 않고서도 충분히 의심할 만하고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면 오늘날의 시를 검토하기에 앞서 일제시대부터 가장 이름이 나 있는 시인들의 시를 몇 편 들어서 시와 삶의 문제, 시와 말의 문제를 생각해 보겠다. 우리 나라에서 이른바 명시를 모아 놓은 책들의 맨 앞머리에는 흔히 새로운 우리 시의 첫 작품이라고 해서 최남선의 시 해에게서 소년에게 가 실려 있는데, 그 첫 연이 이렇다. 처얼썩 처얼썩 척 쏴아아. 따린다 부순다 무너버린다. 태산 같은 높은 뫼 집채 같은 바윗돌이나 요것이 무어야 요게 무어야. 나의 큰 힘 아느냐 모르느냐 호통까지 하면서 따린다 부순다 무너버린다. 처얼썩 처얼썩 척 튜르릉 콱. 1908년에 나온 소년 창간호에 실린 이 시를 두고 오늘날까지 우리 문단에서는 새로운 시의 역사를 열어 놓은 시라고 하고, 또 너무 생각을 드려내려고 한 까닭으로 현대시라 할 수 없다고 말해 왔는데, 그런 면도 있겠지만 나는 달리 본다. 무엇보다도 이 시를 보면 말이 깨끗하다. 살아 있는 우리말로 되어 있다. 오늘날 많이 시인들이 써 놓은 시와 견주어 보면 이 시가 얼마나 오염되지 않은 우리말로 쓰여 있는가를 잘 알 수 있다. 그런데 이 시의 제목이 아주 잘못되었다. 해에게서.. 가 뭔가? 해 란 하늘의 해가 아니고 한문글자인 바다 해 자의 해 다. 그 무렵에는 한문글자를 섞어서 쓸 때라, 요즘 같이 한글만으로 쓰는 시대에 와서는 마땅히 바다에게서.. 로 바꾸어서(번역해서) 써야 하는데, 모든 책에서 이렇게 해에게서.. 라 써 놓았다. 사실은 이렇게 바꿔서 쓰기조차 어럽게 되어 있다. 아직도 신문이고 잡지고 광고들이고 해에게서 꼴로 쓰고 있는 글이 얼마나 많은가! 또 바다에게서.. 라고 써 보았자 우리말이 안 된다. 바다에게서 소년에게 란 우리말은 그때고 지금이고 없다. 바다가 소년에게 라 해야 말이 되지. 시의 제목을 왜 이렇게 붙였는가? 이 시의 제목만이 아니다. 많은 시인들이 시의 제목을 이렇게 우리말일 수 없는 괴상한 말로 붙였다.(물론 소설도 그랬다.) 일본글을 그대로 직역해 놓은 꼴로 쓴 것이다. 이것은 시인들의 삶을 그대로 나타내는 것으로 볼 수 밖에 없다. 일본 학교에서 일본글로 공부를 하고, 우리 글로 시를 썼지만 언제나 일본말로 된 책만 읽고 책 속에 파묻혀 살고 있었으니 이렇게 되는 것이 당연하다. 일을 하면서 살았더라면 결코 이런 말을 쓰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와같이 지난날의 시인들은 어렸을 때 삶이 있었고, 그 삶 속에서 제대로 우리말을 익혔기에 시를 쓸 때는 자연스럽게 우리말을 살려 쓸 수 있었는데, 시의 제목에서는 병든 지식인의 삶을 그대로 보여 주게 되었다. 우리말을 가장 아름답게 다듬어 썼다는 정지용 시인의 시 제목은, 한문글자로 쓸 수 없는 바다 별 달 나무 같은 말만 한글로 쓰고, 그밖에 한문글자로 쓸 수 있는 것은 모조리 한문글자로 썼다. 심지어 유리창 기차 까지 한문으로 써 놓았다. 또 우리말로 쓰면 될 것을 일부러 한문으로 써서, 배 멀미 라 할 것을 선취 라 쓰고, 봄눈 이라면 될 것을 춘설 이라 했다. 그리고 보통사람으로는 알 수 없는 한문글자를 시의 제목뿐 아니라 본문에서도 마구잡이로 섰다. 우리말을 그렇게 구슬같이 다듬어 썼다는 시인이 어째서 이토록 우리말일 수 없고 우리 글일 수가 없는 글로 시를 썼는지 참으로 이해할 수 없다. 그러나 정지용 시의 이 모순된 비밀은 시인의 삶과 말의 관계를 생각할 때 쉽게 풀어진다. 이것은 일제시대에 삶이 없이 시만 썼던 식민지 시인의 비극이었으니, 어찌 정지용 시인뿐이겠는가. 이들은 시가 무엇인지 알고 있었기에 제 겨레의 말로 쓸 수밖에 없었고 우리말로 버리지 못하고, 글만 쓰면서 살아가는 지식인의 권위 를 아주 팽개쳐 버리지 못하고 그 겉 껍데기나마 꾸며 보이고 싶어서, 다시 말해 우리는 비록 한글을 쓰지만, 글만 쓰면서 살아가는 지식인의 권위 를 아주 팽개쳐 버리지 못하고 그 겉 껍데기나마 꾸며 보이고 싶어서, 다시 말해 우리는 비록 한글로 쓰지만 일만 하면서 살아가는 무식한 사람은 아니라는 걸 보여주고 싶어서 그렇게 한문글자를 섞어서 썼던 것이다.
한국대표수필 - 김동리 외 9명 "김동리편" 김동리(1913~1995) 소설가. 본명은 시종, 경북 경주 출생. 경신 고보 중퇴, 서라벌 예술대학장. 한양대 예술대학장 역임. 일찍이 민족 진영의 문학을 대표하여 좌익을 분쇄한 바 있고 순수 문학의 옹호자로서 전후 문단을 실질적으로 주도해 왔다. "황토기" "등신불" "까치 소리" 등 문제 소설의 작가이다. 흰나비 어느 날 대낮에 흰나비 한 쌍이 난데없이 뜰로 날아 들어왔다. 그리하여 하얀 박꽃이 번져 나가듯 뜰 안을 펄펄펄 날아다녔다. 그 때 집 안은 절간 같은 고요에 잠겨 있었다. 내가 이 집으로 이사를 온 것은 금년 여름이 시작될 무렵이었다. 뜰에는 이미 녹음이 가득 차 있었다. 나는 본래 수풀을 좋아하여 내가 집을 가진다면, 한 백 평 가량은 울창한 수풀이 우거지게 하려고 생각하여 왔다. 위는 나뭇잎이 어우러져 하늘을 가리고, 아래는 찔레와 칡덩굴이 엉켜서, 그 속이 천고의 비밀을 감춘 듯한 그러한 수풀을 집 안에다 가지고자 했던 것이다. 그러나, 나는 본래부터 그렇게 유여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러한 뜰을 장만하고 집을 이룩할 수는 없었다. 뿐만 아니라, 그러한 수풀을 가진 집이라고는 여지껏 본 적도 없었다. 아무리 돈이 있대도 그러한 수풀을 집 안에 가지기란 수십 년의 적공을 요할 터인데, 50이 가깝도록 이 모양인 나에게 그러한 꿈이 실현되기란, 참으로 너무나 꿈 같은 이야기였다. 그렇건만, 나는 아직도 그러한 나의 꿈을 포기한 적은 없다(나에게는 이밖에도 이러한 꿈이 몇 가지 있다.). 이것은 엉뚱하고 데퉁스럽게 낙천적인 나의 성격에 기인하는 바 크겠지만, 나에게는 정말 남이 상상할 수도 없는 희망과 자신과 자부가 넘치고 있다. 나 자신이 생각해도 이상한 일이다. 그러한 막연한 희망과 자신들이 도대체 어디서 솟아나고 있는지 알 수 없는 것이다. 그런데, 금년 들어 나는 우연히 그러한 나의 꿈의 한 조각이 이루어진 듯한 집을 하나 얻어들게 되었다. 앞뜰이 넓은데다 나무가 꽤 많다. 가위 거목이라고도 일컬을 만한 은행나무가 네 그루요, 거의 그만한 크기의 잣나무와 그보다는 좀 작으나 정원목으로서는 보기 드물 만큼 큰 편인 단풍나무가 네댓, 그리고 역시 그러한 라일락이 몇 그루, 이 밖에 소나무. 향나무. 밤나무. 매화나무, 등나무, 포도, 찔레, 개나리들도 의외로 어우러져 있었다. 이 나무들이 모두 그렇게 화려한 꽃을 달지는 못하지만, 잎들은 심히 무성하여 그 푸르름이 바야흐로 성하 염천을 물리치리만큼 뜰에 가득하다. 그리하여, 진실로 오랫동안 수풀에 주려 온 나의 두 눈에 싱그러운 기쁨과 위안을 던져 주었다. 나는 온종일 대청에 나와 앉아 뜰을 내다보고 있다. 대낮은 고요하다. 복중이 돼서 그런지 숨이 막힐 듯한 고요다. 햇빛이 강렬할수록 나무 그늘은 더욱 짙다. 뜰에 가득 찬 푸르름이 햇빛을 전부 강물로 만든다. 나는 끄덕끄덕 졸면서도 그냥 뜰에 가득 찬 푸르름을 안고 있었다. 바로 그러한 어느 순간이었던 것이다. 갑자기 흰나비 한 쌍이 난데없이 날아든 것은... 뜰에 가득 찬 녹음이요, 숨막힐 듯한 고요 속이었기 때문에 흰나비의 흰 빛깔은 더욱 눈에 띄었고, 그것은 마치 어떤 '의미'에 도전하는 상징과도 같은 아름다움이었던 것이다. 흰 햇빛은 독수리 날개를 꺾고 이것은 내가 20여 년 전에 쓴 "표박 행로음"이란 시의 한 구절이다. 지금까지의 나의 가장 순수한(혹은 내적인) 경험으로써, 내가 가장 희다고 느낀 것은, 이 시구의 그 '독수리 날개를 꺾은' 햇빛이 아니었을까고 생각한다. 나는 그 때부터 '도의 광휘'는 이렇게 눈이 부시도록 흰빛이거니 생각하여 왔던 것이다. 우리 민족은 태고로부터 흰 빛깔을 숭상하여 왔다고 한다. 이것은 우리의 옷 빛깔을 보아도 곧 알 수 있는 일이다. 요즘의 양복은 외래복이니까 별도지만, 우리의 재래복은 신통하리만큼 일색으로 희다. 무색옷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것은 어린애들이나 그 밖에 특수한 경우에만 착용되는 것이고, 정상 상태는 언제나 흰 빛깔이다. 여기에 이런 문제가 생긴다. 최초에 흰 빛깔을 택한 사람은 누구인가? 어째서 흰 빛깔이 택해졌는가? 흰 빛깔엔 어떠한 뜻이 있는가? 흰 빛깔이 우연히 택해졌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설령, 우연히 택해진 것이라고 가정하더라도, 그것이 모든 사람에 의하여 오랫동안 지지되고 계승된 데는 우연 이상의 필연성을 인정해야 한다. 최남선 씨의 "고사통" 첫머리에는 이런 말이 나온다. - '백'민. 아득한 옛날에 대륙의 극오부를 출발하여 동으로 이동하는 인간의 일 집단이 있으니, 그의 향하는 바는 일출처의 진이라는 곳이었다. 그네는 스스로 '붉은'이라 하니 신명의 자손이란 의미요, 후에 한자로 '붉'을 '백'이라 쓰고 백을 다시 '맥', 또 '맥'으로 고쳤다. 백민은 천을 신계로 하고, 태양을 천주로 숭배하고, 대산을 인간과 천상과의 교통로로 생각하고, 천주는 하계를 감시하다가 필요할 때에는 그 아드님을 강림시키는 것을 믿는 백성이었다. 동으로 전진하는 동안에 여러 곳에 천산 또 신산을 정하고 한참씩 머무르다가 마지막 새벽에 태양을 맞이하는 곳에 있는 거룩한 대산에 이르러 천주의 신도가 여기 있다 하고서 그 주변에 안주할 땅을 이룩하고, 여기저기'불'이란 것을 만들고 있었다. '불'은 한편 '부유' 또 '부여'라고도 하여 인민이 많이 모여서 질서 있게 사는 바닥을 일컫는 말이었다. '불'의 큰 것에는 '나라'라는 이름을 쓰기도 하였다. 이로써 본다면 최초의 흰 빛깔을 택한 것은 어느 개인이기보다 '집단'이었던 것을 알 수 있다. 이 집단은 '태양을 천주로 숭배했다'고 하니 광명을 신명시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흰 빛깔은 신명의 빛깔이요, 도의 빛깔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 유지하기 어려운 흰 빛깔이 그 어려운 환경 속에서 그렇게 오랫동안 유지되며 계승되어 온 소이인 것이다. 흰 빛깔이 밝음을 뜻한다면 검정 빛깔은 어둠을 뜻한다. 어둠과 밝음이 상극적인 것처럼 흰빛과 검은빛도 빛깔의 양극이다. 흰 빛깔이 모든 빛깔의 바탕이라면 검정은 모든 빛깔의 말살을 뜻한다. 흰빛이 모든 빛깔의 모체라면 검정은 모든 빛깔의 죽음을 가리킨다. 흰 빛깔이 삶이라면 검정빛은 죽음이요, 흰 빛깔이 희망이라면 검정빛은 절망이요, 흰 빛깔이 순결이라면 검정빛은 오탁의 극이다. 우리 조상은 왜 '붉은'에서 신을 발견하고'도'를 느꼈을까? 이것은 그 성격이요 생리요 운명이었으리라. '붉은'은 '도'의 이름이요, '백'은 그 빛깔이다. 따라서 흰 빛깔을 숭상하는 한민족은, 그 성격과 그 생리와 그 운명에 있어, 광명의 민족이요, 순결의 민족이요, 희망의 민족이요, 명랑의 민족임을 알 수 있다. 나는 위에서 '나 자신이 생각해도 이상할' 정도로, 나는 막연한 희망과 자신에 차 있다고 말했지만, 그러고 보면 이것은 내 핏줄 속에 조상의 '붉은'이 흐르고 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지금 저 뜰에 박꽃이 번져 나가듯 펄펄펄 날고 있는 흰나비야말로 내 젊은 날의 시구 '흰 햇빛은 독수리 날개를 꺾고'의 '흰 햇빛'의 한 조각 또는 그 '독수리 날개'의 한 부스러기인지도 모르겠다. 아니, 그보다 바도 아득한 옛날 우리의 조상이 처음으로 외치던 '붉은'의 한 조각인지도 모르겠다. 아직도 내 뜰에는 강물을 퍼붓듯한 눈부신 햇빛과 푸른 나무 그늘이 대낮의 고요를 겨루고 있다. 흰나비, 나의 손님이여! 너를 맞이하는 나의 미소 속에 너는 마음껏 나의 뜰에서 날아다오.
사랑할 땐 별이 되고 - 이해인 - 기도 시 슬픈 기도 - `삼풍` 사고의 희생자들을 기억하며 우리가 사랑하는 많은 사람들이 우리가 잘못 지어 무너진 건물에 깔려 처참히 목숨을 잃었습니다 매일 새로운 시신을 찾아냈다는 차디찬 죽음의 뉴스를 들어야 하는 이 우울한 여름의 슬픈 기도는 빗물처럼 흐르는 눈물일 뿐 그 누구도 그 무엇도 위로가 될 수 없는 절망의 한숨일 뿐 다시는 기억하고 싶지 않지만 잊어서도 아니 될 이 엄청난 희생과 슬픔은 멈추지 않는 원망과 분노의 파도로 밤에도 우리를 덮쳐 와 휴식을 잃습니다 앞으로의 교훈으로 삼기엔 너무 깊고 큰 이 아픔은 흉하게 무너져 내린 콘크리트 더미보다 더 괴롭고 무겁게 우리를 내리누릅니다 어둠에서 빠져나온 기적의 사람들을 반기느라 우리는 잠시 슬픔을 잊기도 했지만 아직도 따뜻한 웃음이 눈에 선한 우리의 수많은 그리운 얼굴 사랑스런 아들, 딸, 언니, 오빠 해와 달처럼 집 안을 비춰 주던 소중한 엄마, 아빠, 다정한 연인들 본래의 모습대로 다시 돌려 받을 기적은 없는 것입니까? 꿈에라도 보고 싶은 그리운 이들 흔적이라도 만지고 싶어 찾아 헤매는 가족들의 애타는 기다림 목쉰 통곡소리를 들으십니까? 정말 잘못했다고 이젠 잘해 보겠다고 항상 늦게야 가슴을 치는 우리의 어리석음을 불쌍히 여기소서 돌덩이처럼 무디어진 우리의 양심 오만한 이기심과 눈먼 욕심 서두르지 못한 게으름과 깨어 있지 못한 안일함으로 가까운 이들을 죽음으로 몰아부친 우리의 잘못을 용서해 달라기엔 너무 염치가 없으니 용서하지 마소서 차라리 두려운 침묵으로 벌하여 주소서 괴롭게 신음하다 죽어 갔을 영혼들 부디 밝은 곳에 편히 눕게 해주시고 상처 받은 이들 낫게 하시며 평생 뽑히지 않을 슬픔의 못이 박힌 유족들의 마음에 함께하소서 힘든 중에서 생업을 포기하고 구조와 봉사로 땀 흘렸던 사랑의 이웃들을 어여삐 보시고 우리가 서로의 지친 손 마주잡으며 슬픔을 이겨낼 힘과 용기를 주소서 무고한 이들의 희생이 헛되지 않도록 살아 남은 이들은 이제 다시 사랑하는 법을 배우며 다시 책임지는 법을 배우며 이 아픔을 조금씩 견뎌내게 하소서 (1995)
Board 삶 속 글 2022.12.02 風文 R 622
내 마음이 강해야 내 소원도 이루어진다 - 잭 캔필드, 마크 빅터 한센 하루에 한 가지 선행을 하라 - 로버트 뮬러 박사 전 UN 사무총장 최소한 하루에 한 가지 선행을 하겠노라고 결심하라. 여러 개가 아니라 딱 한가지만. 매일 아침 주님께 말하고 요청하라. "제가 오늘 어떤 일을 할 수 있을까요?" 그분은 당신에게 대답하고, 당신을 이끌어 주실 것이다. 왜냐하면 그분은 당신 안에 있으니까. 그리고 당신의 요청은 그분에게 생명을 드릴 것이다. 주님은 요청받지 않고 주님의 존재를 드러낼 수 없다. 주님은 당신 생명의 진정한 인도자인 당신이 영혼을 통하여 당신에게 말씀하신다. 주님에게 요청하라, 주님에게 말하라, 주님과 대화하라. 그러면 당신은 수많은 기적의 원동력이 될 것이다. 당신은 주변에서 기적을 만들리라. 당신의 삶이 끝나는 날까지 최소한 하루에 한 가지 선행을 하라. 그리고 얼마나 많은 선행이 쌓일지 생각하라! 지구상의 수억만이 하루에 한 가지씩 한다면, 우리의 지구는 어떻게 될까?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 삶에 연연하는 자는 그것을 잃은 것이다. 하지만 적절한 명분으로 그것을 내버리는 자는 삶을 얻을 것이다. - 셀리아 그레함 어느 선량하고 신심이 강한 남자가 재정적인 위기를 여러 번 겪게 되었다. 그때마다 그는 주변에 도움을 청했지만, 자신이 너무 가난하기 때문에 다른 이의 관심을 끌 수 없는 것처럼 보였다. 어느날 밤, 절망에 빠진 그는 무릎을 꿇고 앉아 하늘을 올려다보며 기도를 올렸다. "주님, 저는 파산했습니다. 제발 복권이 당첨되게 해주십시오, 빠른 시일 내로요!" 다음 주가 되자, 그는 상황이 호전되리라는 기대로 낙천적으로 되었다. 하지만 3개월이 지나도록 단 한푼도 생기지 않았고 그에 비례하여 그는 믿음이 약해졌다. 연말에는 화가 머리끝까지 났다. "주님, 정말 그곳에 계십니까? 저는 당신이 도와주리라 믿었습니다. 그런데, 일년이 지나도록 당신께서는 제 기도에 대한 답을 하지 않으셨어요." 그러자, 갑자기 하늘에서 어두운 구름이 사라지고 한 줄기 밝은 햇살이 비추며 주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네 말을 듣고 있다.... 듣고 있다. 사실, 나는 네 기도를 모두 들었노라. 하지만 나에게 힘을 발휘할 기도를 주어라. 최소한 너는 복권을 사야잖느냐."
Board 추천글 2022.12.02 風文 R 1964
Board 고사성어 2022.12.02 風文 R 931
“자식들, 꽃들아, 미안하다, 보고 싶다, 사랑한다, 부디 잘 가라” ‘삼가 고인들게 명복을 빕니다. 지금 가는 길 부디 행복하세요. 죄송합니다.’ 노파는 포스트잇을 벽에 붙였다. “할머니, 그렇게 뭐라도 적어 붙이면 마음이 어떠세요?” “잉, 편안혀. 잘 가라는 말이라도 하니 맴이 편안혀, 에휴.” 이태원 10·29 참사 현장, 사람들은 말없이 서성인다. 말을 하는 건 벽에 붙은 포스트잇. 사람들은 포스트잇이 하는 말을 듣는다. ‘친구들아, 언니야, 오빠야, 동생아, 자식들아, 꽃들아’ 이름을 부르며, ‘미안하다, 죄송하다, 괴롭다, 사랑한다, 보고 싶다, 부디 잘 가라’고 말을 걸고 있었다. 죄책감, 무력감, 우울감, 분노가 뒤엉킨 말들을 조용히 듣고 있었다. 사람들은 말을 쌓고 있었다. 기어코 이어붙이고 있었다. 옆으로 앞뒤로 위아래로, 같은 말을 겹겹이 쌓아나가고 있었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라는 상투적인 말일지라도 꾸역꾸역 적었다. 명령과 지침과 해명과 그럴듯한 논리로 무장한 권력자들에 비하면, 헛되고 부질없는 말들. 이 무력한 말들로 뭘 하려고. 얕은 바람에도 떨어져 나뒹구는 이 말들로 뭘 하려고. 어리석은 우리는 매번 사회적 참사(죽음들)를 맞닥뜨리고 나서야 권력자들이 구사하는 ‘통치’의 민낯을 본다. 치밀하되 졸렬하고, 뻣뻣하되 두려움에 싸인. 사람을 타락시키는 건 두려움이다. 권력을 상실할지 모른다는 두려움은 권력을 행사하는 사람을 타락시킨다(아웅산 수치). 두려움에 싸여 타락하고 있는 권력 앞에 사람들은 ‘통치되지 않는 말’을 쌓고 있었다. 무심히 흩날리는 포스트잇에서 ‘통치될 수 없는 것들’이 삐져나오고 있었다. 한겨레말글연구소 연구위원·경희대 교수
무엇을 어떻게 쓸까 - 이오덕 2부 - 시를 어떻게 쓸까 꾸며 쓰는 버릇 어떻게 고칠까(2/2) 다음은 역시 같은 문집에 있는 같은 학년 학생의 작품이다. 기쁨과 슬픔 꽃의 모습이 아름다워 손에 쥐었다. 언제나 창가에 두고 싶어서. 햇살이 비추면 그 빛에 빛나고 달빛이 비치면 내 작은 별이 되었다. 어느 날 아침 내 창가엔 빛이 보이지 않았다. 어둔 그림자만 보일 뿐. 내겐 기쁨을 주었지만 꽃에겐 아픔이었을 뿐이다. 여기에는 다듬어야 할 한자말이 없다. 쉬운 말로만 쓴 점은 잘 되었다. 그런데 말의 문제는 여전히 있다. 꽃의 모습이 아름다워 손에 쥐었다. 첫머리에 나온 이 말인데, 여기 씌어 있는 낱말들이 모두 깨끗한 우리말이기는 하지만 우리가 입으로 하는 말과는 다른 질서를 가진 말고 되어 있다. 우리가 말을 한다고 할 때 꽃의 모습이.. 라고는 하지 않는다. 꽃 모습이.. 라고도 안하고 꽃이 아름다워.. 하는 것이다. 시가 꼭 입으로 하는 말을 그대로 써야 되는 것은 아니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우리의 경우 입으로 하는 말을 떠나면 그것이 거의 모두 일본말법이나 서양말법을 따라가는 글말로 되어버린다는 것을 알아두지 않으면 안 된다. 시에서 쓰는 말이란 다른 게 아니다. 살아 있는 말, 우리가 살아가면서 입으로 하는 말이 가장 좋은 시의 말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다음 줄에 적힌 손에 쥐었다 는 매우 간결하고 요령있는 말 같지만 잘된 말이 아니다. 시는 어떤 모습이든지 행동이든지 될 수 있는 대로 뚜렷하게 보여주는 말로 되어야 하는데, 이 말은 그저 최소한도의 뜻만 전하는 말로 되어 있다. 대체 그 꽃은 어느 꽃밭에서 꺾었다는 것인가? 가계에서 샀다는 것인가? 누가 가지고 있는 것을 달라고 해서 얻었다는 것인가? 꽃이 아름다워 한 송이 샀다. 가령 이렇게 쓴다고 해서 말이 길어지지도 않는다. 그리고 이왕이면 그게 무슨 꽃이었는지도 쓸 것이지 왜 꽃 이라고만 했는가? 시는 될 수 있는 대로 사물을 뚜렷하게 나타내지 않고 추상으로 된 말로만 쓰는 것이라면 이렇게 써야 할 것이다. 그런데 시를 추상으로 된 말로만 쓰다니! 이것은 시에서 가장 거리가 먼 글이요, 시가 될 수 없는 글이다. 이래서 둘째 연도 최소한의 뜻만 전하면서 곱게 그려 보이려고 한 말이 되었고, 셋째 연은 쉽게 전달이 안 되는 말이 되어 버렸다. 이러고 보니까 이 시는 이 학생이 겪은 사실도 없는 일을 말로만 이렇게 만들어 쓴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그만큼 사물의 모습이 나타나지 않는다. 그런데 마지막 연에 와서, 지금까지 대강 설명만 하듯이 한 말들이 조금은 살아나는 것 같다. 하지만 여기서 가장 중요한, 꽃이란 생명을 두고 생각하는 태도가 고등학생이 마땅히 가져야 할 정도에 이르지 못했다. 그 꽃에게 어찌 아픔 정도이겠는가? 바로 죽음 인 것을! 다시 같은 문집에서 한 편만 더 들어 본다. 이번에는 3학년생의 작품이다. 아부지 난 거리를 헤매다 누군가를 보고 도망친다. 밑을 두세 번 걷어올린 헐렁한 군복 바지에 작업복 상의 검정 장화 목장갑을 끼고 두 바퀴 삐그덕 자전거를 타고 구슬땀을 흘리며 분주한 누군가를 보고 도망친다. 난 친구들과 거리를 나돌다 누군가를 외면한다. 외면하고 돌아선 나를 그 누군가의 시야에서 멀어질 때가지 한없이 바라보았다. 난 그 누군가의 시선조차도 외면한다. 뒤란에 뒷짐지고 홀로 서서 감나무를 눈물로 쳐다보는 아부지를 외면한다. 마치 잎이 떨어진 감나무처럼 서 있는 아부지를... 이 시에서도 어려운 낱말은 별로 없지만 상의 시야 시선 같은 말은 잎으로 하는 말로 바꾸는 것이 좋겠다. 상의 는 웃옷 이나 저고리 로 쓰면 좋고 시야 는 눈 하면 되고, 시선 은 눈길 이면 된다. 이 시는 모두 다섯 연으로 되어 있는데, 그 연의 마지막마다 도망친다 와 외면한다 는 말이 되풀이 되어 있다. (다만 끝연에서는 외면한다 다음에 다른 말이 더 붙어 있다.) 1,2연은 도망친다 이고 3,4,5연은 외면한다 이다. 이 도망친다 와 외면한다 는 비슷한 마음의 상태를 나타낸 말이다. 바로 이 시의 주제가 되는 말이겠는데, 그렇다면 지은이는 무엇에서 왜 도망치고 외면하려고 하는가? 이 물음에 대한 답은 벌써 제목에서 나타나 있다. 나를 낳아주고 길러주고 내 모든 앞날을 결정하는 아부지 로부터 도망하는 것이고, 그 아부지를 외면하는 것이다. 그 까닭을 이 시에서 뚜렷하게 말하지는 않았지만, 제목과 2연과 마지막 연에서 적어 놓은 말들로 느껴 알 수 있다. 사투리를 쓰는 무식한 아부지 가 싫고, 밑을 두세번 걷어 올린 헐렁한 군복 바지에 작업복 웃옷 이 싫고, 검정장화 와 목장갑 과 두 바퀴 삐그덕 거리는 자전거를 타고 구슬땀을 흘리며 분주하게 일만 하는 사람이 싫고 뒤란에 뒷짐지고 홀로 서서 감나무를 눈물로 쳐다보는 가난한 아부지 가 싫은 것이다.이렇게 되고 보면 이 작품을 쓴 사람의 정신 상태가 문제된다. 자기를 낳아 준 부모가 싫고 일하는 사람이 싫고, 가난한 사람들이 싫고, 그래서 이 땅과 조국이 싫고 부끄러워 남의 나라만 쳐다보고 서양나라만 부러워하는 이런 정신 상태는 비단 이 작품을 쓴 학생만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닐 것이다. 나는 이미 이런 정신 상태를 우리 겨레가 가지고 있는 무더기 정신병이라 하여, 우리말을 버리고 한자말, 일본말, 서양말을 쓰고 싶어하는 고약한 버릇으로 지적한 바가 있다. 시란 사람의 마음을 깨끗하게 해부고 높여주는 것인데, 이런 병든 마음을 보여주고 있으니 이 글을 어찌 시라 하겠는가? 난 거리를 헤매다 누군가를 보고 도망친다. 아버지를 아버지라 하지 않고 첫 연부터 이렇게 낯선 사람을 말하듯 누군가라 해서 되풀이해 놓은 것도 문제지만, 대관절 고등학생이 무슨 할 일이 없어서 거리를 헤매는가? 이래서 이 작품은 지은이의 마음가짐뿐 아니라 표현이 또 문제가 된다. 말하자면 시 같은 것을 흉내내고, 시인인 척하는 글 버릇 말이다. 이 작품은 지은이의 참마음을 쓴 것이 아니라, 전체가 어떤 틀의 시를 흉내내어 만든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든다. 앞에서 지은이가 아부지 를 외면하고 도망치고 싶어하는 까닭이 2연과 5연에 나타나 있다고 했지만, 사실은 2연도 5연도 제대로 쓴 것이 아니다. 2연에 그려 놓은 사람은 대관절 무슨 일을 하는 사람인가? 헐렁한 군복 바지에 작업복 웃옷 검정장화 .. 와 같은 말들을 늘어 놓고 구슬땀을 흘리며 분주 하다는 따위 틀에 박힌 말만 적었지, 조금도 그 사람의 뚜렷한 모습이 안 보인다. 5연은 더 엉터리로 되어 있다. 뒤란에 뒷짐지고 홀로 서서 감나무를 눈물로 쳐다보는 아부지 라 했는데, 이 아부지는 뭘 하는 사람인가? 왜 감나무를 눈물로 쳐다보는가? 잎이 떨어진 감나무처럼 아부지 가 서 있다니 무슨 뜻을 나타내려 했는가? 엉터리요, 흉내요, 무슨 척하는 말일 뿐이다. 4연을 보면 외면하고 돌아선 나를 그 누군가의 시야에서 멀어질 때까지 한없이 바라보 다가, 그만 그 누군가의 눈길조차도 외면한다 고 했다. 도망치고 외면하는 나를 바로 보려고 하는 또 하나의 나를 외면했으니, 이것은 부정의 부정이요, 따라서 도망치고 외면하는 나로 돌아간 것이다. 그러나 아무래도 장난스런 말이다. 시의 제목 아부지 란 말부터 문제다. 아부지 라고 아직도 말하는 고등학생이 있을 것이다. 그러니 아부지만 말을 얼마든지 글로 쓸 수 있다. 그런데 이 시에서는 아무래도 어색해 보인다. 그것은, 다른 말들은 모두 표준말이고 유식한 말인데, 이런 말을 쓴 사람이 하필 아버지란 말을 안 쓰고 아부지 라 했으니 말이다. 이것은 아부지 란 사투리를 쓰는데서 그런 사투리로 살아가는, 일만 하는 아버지, 가난하고 무식하고 그래서 부끄럽기만 한 살붙이의 모습을 일부러 보여주려고 한 속셈으로 쓴 것일까? 그래서 실제는 아빠 라고 말하면서 글에서는 일부러 아부지 라 쓴 것일까? 아마도 그럴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바로 계산이요 흉내다. 계산과 흉내가 시를 결딴낸다. 거짓되게 한다. 사투리나 써서 무식한 그 아버지가 싫고 부끄럽다고 도망치고 싶어하는 사람이 스스로 그 사투리를 자랑스럽게 쓴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니까! 지금까지 시 세편을 들어 말했는데, 오늘날 고등학생들이 쓰는 시의 특징 - 결점을 이 시들이 잘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한다. 고등학생들의 시에 공통되는 결점은 1.삶이 없고,삶을 떠나 있고, 2.시인들의 시를 흉내내고, 3.실감이 따르지 않는 허황한 말을 늘어놓은 것, 이 세 가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