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마음이 강해야 내 소원도 이루어진다 - 잭 캔필드, 마크 빅터 한센 4. 가족들과의 더 좋은 관계를 위하여 천리길도 한걸음부터 - 로이드 웨인트럽, 빈 디 보나 프로덕션의 부사장 '아메리카 퍼니스트 홈비디오'라는 텔레비전 쇼프로그램의 에피소드는 마흔 개의 장면으로 이루어진다. 도착한 테이프 가운데 단 1%만이 방송에 나올 수 있기 때문에 우리는 약 4천개의 후보작을 필요로 했다. 우리들은 종종 이러한 할당된 몫을 미국의 2천 7백만 시청자들에게 특정한 주제, 이를테면 아이의 첫 번째 이발이라든지, 달걀을 깨는 재미있는 방법, 또는 스파게티를 먹을 것 등에 대한 적절한 테이프로 보내달라고 요청한다. 그리고는 주제에 대해서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하지 않았다. 처음 곧 이빨 없는 노신사가 마지막 스파게티 줄기를 빨아들이는 것부터 아기가 생전 처음 먹는 스파게티에 이르기까지 우리의 상상을 초월하는 수천 종류의 테이프를 받아볼 수 있다. 시청자들은 지시를 따라가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요구는 특정화되어야만 한다. 우리가 어떤 특별한 주제에 대해 보내달라고 하면 그들은 그렇게 해준다. 하지만 우리가 그것을 자유로운 형식으로 놔두면 시청자들은 스스로 판단하게 되고 판단하게 되고 결국 범위가 너무 넓어지게 되는 것이다. 대상을 받았던 참가자들 중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그들이 가진 비디오 테이프에 대해서 의심스러워했느지 아는가? 그들은 그 테이프가 쓸모없다고 생각하면서 2년 동안이나 그저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사람들은 가끔 그들이 인정받을 만한 무엇인가를 가지고 있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물론 대부분의 경우, 그것들은 정말 대단한 가치가 있다. 화성인을 자처하라 - 빈 디 보나 회사의 프로그램 <아메리카 퍼니스트 홈 비디오>의 제작자 많은 텔레비전 리포터들은 단지 대본에 쓰여 있는 질문만을 하며 거의 대답을 듣지 않으려고 한다. 하지만 나는 내가 대답을 듣지 않는다면 나뿐만 아니라 시청자들도 그 사람이 이야기한 것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을 일찍 깨달았다. 그렇게 된 것은 경제학자인 존 K.칼브레이스와 인터뷰했던 이후라고 생각된다. 우리는 초기 17세기의 경제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었지만 나는 그가 말하는 개념들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래서 나는 그에게 부탁했다. "이봐요, 저는 지금 막 지구에 착륙한 화성인이라서 어떻게 된 영문인지 전혀 알 수가 없군요. 내가 화성인이라고 생각하고 설명 좀 해 주시겠습니까?" 그뒤로 나는 어려운 상황이나 개념을 이해하기 위해서 이 '화성인'이라는 방법을 자주 사용했다. 나는 스포츠에 대해서는 문외한이었지만 사람들은 나의 인터뷰 방식을 좋아했다. 그래서 나는 반시간짜리 방송원고를 가지고 로스엔젤스 풋볼팀 킥커를 만났다. 당시에는 축구를 하는 것처럼 공을 차는 선수인 프랭크 코럴이 활약하고 있었다. 나는 여전히 스포츠에는 깡통이었다. 얼마나 몰랐나 하면 지금까지 한 번도 프로 풋볼 게임에 가본 적이 없을 정도였다. 그래서 나는 그에게 말했다. "프랭트씨, 아무것도 모르지만 한 번 해봅시다. 어떻게 공을 차나요?" 우리는 거기에서부터 시작했다. 그리고 나는 마침내 '모스크바로 가는 길'이라고 불리는 시리즈를 진행할 수 있었다. 그때부터 나는 87명의 올림픽 선수들과 인터뷰했고 계속 어떻게 하는 건지 한 번 보여 달라고 질문했기 때문에 그것은 모두 성공적이었다. 나는 이해할 수 없는 점들에 대해 물어보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다른 사람들도 모두 그러한 사실을 알고 있지만 그들은 누군가 멍청하다고 생각할까봐 질문하는 것을 두려워한다. 하지만 나는 '당신이 아는 것을 나는 모릅니다'라고 말하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Board 추천글 2022.10.21 주인장 R 1498
기화가거(奇貨可居) 奇:기이할 기. 貨:재물 화. 可:옳을?허락할 가. 居:살?있을 거. [출전]《史記》〈呂不韋列傳〉 진귀한 물건을 사 두었다가 훗날 큰 이익을 얻게 한다는 뜻. 곧 ① 좋은 기회를 기다려 큰 이익을 얻음. ② 훗날 이용할 수 있는 사람을 돌봐 주며 기회가 오기를 기다림. ③ 기회를 놓치지 않고 잡음. 전국시대 말, 한(韓)나라의 큰 장사꾼인 여불위(呂不韋:?~B.C.235)는 무역을 하러 조(趙)나라의 도읍 한단(邯鄲)에 갔다가 우연히 진(秦)나라 소양왕(昭襄王)의 손자인 자초(子楚)가 볼모로서 이곳에 살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이때 이 장사꾼의 머리에는 기발한 영감이 번뜩였다. ‘이것이야말로 기화로다. 사 두면 훗날 큰 이익을 얻게 될 것이다.’ 여불위는 즉시 황폐한 삼간 초가에 어렵게 살아가는 자초를 찾아가 이렇게 말했다. “귀공의 부군이신 안국군(安國君)께서 멀지 않아 소양왕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르실 것입니다. 하지만 정빈(正嬪)인 화양부인(華陽夫人)에게는 소생이 없습니다. 그러면 귀공을 포함하여 20명의 서출(庶出) 왕자 중에서 누구를 태자로 세울까요? 솔직히 말해서 귀공은 결코 유리한 입장에 있다고는 말할 수 없습니다.” “그건 그렇소만, 어쩔 수 없는 일 아니오?” “걱정 마십시오. 소생에게는 천금(千金)이 있습니다. 그 돈으로 우선 화양부인에게 선물을 하여 환심을 사고, 또 널리 인재를 모으십시오. 소생은 귀공의 귀국을 위해 조나라의 고관들에게 손을 쓰겠습니다. 그리로 귀공과 함께 진나라로 가서 태자로 책봉되도록 전력을 다하겠습니다.” “만약 일이 성사되면 그대와 함께 진나라를 다스리도록 하겠소.” 여불위는 자기 자식을 회임한 조희(趙姬)라는 애첩까지 자초에게 양보하여 그를 완전히 손아귀에 넣은 뒤 재력과 능변(能辯)으로 자초를 태자로 세우는데 성공했다. 그리고 자초가 왕위에 오르자[장양왕(莊襄王)] 그는 재상이 되었으며, 조희가 낳은 아들 정(政)은 훗날 시황제(始皇帝)가 되었다.
국가 사전을 다시?(2) 지난주 칼럼을 보고 <미친 국어사전>, <국어사전 혼내는 책> 등으로 <표준국어대사전>의 문제를 속속들이 파헤쳐온 박일환 선생님이 댓글을 다셨다. “국가 사전을 없애야 하는 건 당연한 일이지만, 국립국어원이 표준국어대사전을 포기할 리 없다. 어차피 개정할 거면 방향이라도 제대로 잡고 숱한 오류를 바로잡아야 한다. ‘국어사전이 가야 할 길’, ‘국어사전 이렇게 만들자’는 내용을 담은 책을 서둘러 내야겠다.” 하지만 차마 미련을 버릴 수가 없다. 다시 에둘러 설득해본다. 산불이 휩쓸고 간 숲은 어떻게 되살아나는가? 2000년 최악의 피해를 본 강원도 고성은 처음으로 피해지를 반씩 나눠 인공 조림과 자연 복원을 진행했다. 인공 조림지엔 소나무를 들입다 심었다. 자연 복원지는 숲이 스스로 복원하도록 놔두었다. 그랬더니 조림지보다 더 빨리 더 많은 생물량을 축적해 20년이 지나니 ‘풀-떨기나무-작은키나무-큰키나무’로 이뤄진 전형적인 숲 구조를 갖췄다(정연숙 강원대 교수). 국가 사전은 인공 조림을 닮았다. 전쟁으로 전국이 민둥산이었을 땐 인공 조림이 산림녹화에 결정적 기여를 했다. 하지만 인공 조림은 불에 취약하고 자생력과 다양성이 떨어진다. 자연 복원은 산불에 대한 저항력뿐만 아니라 생물종 다양성, 수자원 보호, 토양 보전, 수려한 경관 등 공익적 가치가 더 높다. 옷깃을 여미며 제안한다. ‘사전 생태계, 어떻게 복원할까’란 주제로 토론회를 열자. 국립국어원, 사전 편찬 전문가, 글로 밥벌이하는 사람들, 시민 독자들이 모이면 좋겠다(그 자체로 생태적이겠군). 한겨레신문이 주최해주길. 국가 사전을 다시?(3) 일본의 <산세이도 국어사전>은 짧고 간결하며 객관적인 뜻풀이가 특징이다. 편집자 겐보 히데토시는 ‘사전은 거울’이라는 신념으로 일본어의 ‘현재’를 반영한 사전을 만들기 위해 당대의 낱말과 용례를 집요하게 수집한다. 잘못 쓰이는 것도 있는 그대로 실었다. 반면에 <신메이카이 국어사전>은 주관적이고 독특한 뜻풀이가 특징이다. 편집자 야마다 다다오는 ‘사전은 문명비판’이라는 신념으로 색다르고 장난기 넘치는 뜻풀이를 했다. 두 사람의 신념은 전혀 다른 성격의 사전을 탄생시켰고, 4천만부가 팔릴 정도로 사랑을 받았다(사사키 겐이치, <새로운 단어를 찾습니다>). 사람들은 상상하지. 국립국어원에도 좋은 사전을 만들려고 평생 낱말들을 찾아 모으고 어떻게 뜻풀이할지 골머리를 앓는 학자들이 즐비할 거라고. 하지만 그런 사람 없다!(있어서도 안 된다.) 국립국어원은 다양한 언어 자료를 모으고 분석하는 ‘국책연구기관’에서 탈피하여, ‘사업의 외주화’에 익숙해진 ‘사업관리기관’으로 승격하였다. 사업의 외주화는 말과 관련한 모든 일을 가능하게 해주었다. 단, 예산이 허락하는 범위 내에서, 단기간에! 개정판 사전도, 지난 사전처럼 국립국어원이 ‘사업 관리자’가 되어 마치 조각보 만들듯이 전국의 언어학자 수백 명을 동원해 표제어 나눠주고 뜻풀이와 용례 제시를 맡길 것이다. 지난번에 7년이 걸렸는데, 이번엔 5년 만에 주파 목표. 놀라운 속도전이다. ‘편찬 지침이 있으니 문제없다’고? 물론이겠지. 다만, 말의 본질은 왜곡되고 사전엔 개성이 사라지며 말을 국가가 통제하는 꼴을 21세기에도 봐야 할 뿐. 김진해 | 한겨레말글연구소 연구위원·경희대 교수
무엇을 어떻게 쓸까 - 이오덕 1부 산문을 어떻게 쓸까 설명문 쓰기 - 무엇을 어떻게 설명할까(1/4) 싱싱한 입말로 쓰고 우리가 글을 읽다 보면 그 글에 씌어 있는 낱말이나 말법의 잘잘못을 따지기에 앞서 이야기 내용에 아주 압도당하는 경우가 있다. 이렇게 되면 그 글은 성공한 글이고, 좋은 글 또는 훌룡한 글이라 할 수 있다. 이와는 반대로 낱말이나 말법에 잘못이 한 군데도 없이 깨끗하게 씌어진 글이라 하더라도 그 내용이 시시하거나 옳지 못한 생각 또는 행동을 적어 놓았다면 그 글은 읽을 가치가 없다. 그런데 이런 말은 논리로 따져서 하는 말이다. 실제로는 글의 내용이 절실한 이야기로 꽉 차 있으면 허튼 말이 없고 겉치레 글 꾸이기도 없다. 하고 싶은 말이 없으니까 뭔가 있는 것처럼 쓰려고 하는 것이고, 그러다 보니 남의 것 흉내나 내고 말재주를 부리게 되고, 이래서 깨끗한 우리말 대신에 어려운 한자말이나 유식하게 보이는 남의 나라 말과 말법을 쓰는 것이다. 다음에 드는 글은 어느 고등학생이 쓴 것이다. 이 글을 읽고 자신이 이 학생과 같은 처지에 있다면 어떻게 하겠는가 생각해 보자. 나는 이런 학생과는 사정이 다르니 골치 아픈 것 가지고 생각하기 싫다고 한다면 할 수 없지만, 그런 사람은 자기밖에 모르는 사람이고 사람답게 살아가는 길을 찾는 공부를 하지 않겠다는 사람이다. 정말이지 내가 만약 대학의 입시문제를 내는 일을 맡았다면 수험생들에게 이 글을 읽게 해서 자신이 이 글을 쓴 학생이라면 어떻게 하겠는지 써 보시오 라는 문제를 낼 것이다. ( 이 편지글은 십대들의 쪽지 라는, 달마다 거저 나눠주는 작은 책을 펴내는 분에게 보내는 글이고, 바로 그 책에 실렸던 것이다.) 너무 답답해서 또 펜을 듭니다. 오늘 학교에서 오는 길에 편지를 부쳤었는데 그리고 쪽지 상담실에 전화도 했었는데 그래도 이렇게 다시 또 써야만 마음이 가라앉는다면 전 정말 이 세상에서 가장 비참한 아이겠죠? 요즘 들어서 하루라도 안 운 날이 없어요. 특히 어제 오늘은 하도 펑펑 울어서 눈이 팅팅 부어 있구요. 정말 모든 게 제겐 너무 견디기가 힘듭니다. 전에 편지 보셨다면 제가 왜 이러는지 대충 이해는 하시겠죠? 오늘은 학교 갔다가 집에 와서 책상을 보니 책상이 아주 깨끗해요. 책이니 공책이니 그 많은 시험지들이 다 사라지고 없었죠. 전 누구 짓인지 다 알았죠. 아빠였어요. 자주 있는 일은 아니지만, 그래도 이런 짓을 할 사람이라고는 아빠뿐이니깐요. 아빠가 저에게 대응하시는 말이 넌 보아하니 대학 갈 필요도 없고 공부해봤자 그쪽으로는 성공도 못할 거라 그거였죠. 그래서 고등학교는 다니든지 말든지 맘대로 하고 니 멋대로 해보라 는 거였어요. 전 아빠가 왜 그러는지 알아요. 이번 성적이 나쁘게 나오고 또 전에 제가 농구선수를 좀 쫓아다녔다는 것 때문일 거예요. 하지만 그건 지난 얘기고 물론 지금은 안 그러죠. 시험 끝난 후로 제 능력에 많은 실망과 한계를 느꼈어요. 그래도 어떻게든 딛고 뭔가 해보려고 하는데.... 아빠까지...정말 너무 힘드네요. 아저씨, 이런 말 어떨지 모르지만 너무 암담해서 죽고 싶어요. 오늘 전화쪽지를 들고 보니깐 남의 말에 실망하지 말고 자신의 꿈을 이루도록 노력하라는 것이더라구요. 옳은 얘기지만 그 남의 말이 너무 나에게 큰 상처를주었을 때, 그래서 모든 것을 할 의욕을 잃었을 때 전 어떡해야 하는 걸까요. 아빠의 말은 100% 틀렸어요. 전 할 수 있고, 이렇게 힘들 때에 특히 부모님이 좀 도와주시면 거뜬히 해낼 수 있을 텐데.. 하지만 전 모든 희망을 잃었는 걸요. 모든 힘을 잃었죠. 제 능력을 의심하고 싶진 않은데. 이젠 그렇게 내가 노력해봤자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는 생각이 들어요. 아저씨, 정말 살고 싶지 않아요. 상담실에 전화를 걸어 얼마쯤 이야기를 했는데 곧 8시가 되어 결론을 못 내렸죠. 사실 지금 제겐 전화통화도 금지된 상태예요. 너무 답답하고 가슴이 저며 오네요. 이젠 학교에서 억지로 명랑한 척할 힘도 없어요. 제 처지를 생각하면 마구 울음이 나와서 학교에서도 거의 울상으로 지내다시피하죠. 절 이해해주는 친구가 하나 있는데 물론 제게 큰 힘이 되지만 이런 얘기까지 털어놓진 못하고 있어요. 으악 소리라도 막 지르고 싶어요. 아저씨, 전 아빠 때문에 소심하게 자라난 듯 싶어요. 아빠는 성격이 좀 괴팍하거든요. 말을 아주 함부로 하죠. 상처가 되는 말들을 마구 해요. 욕을 하는건 아니지만 속을 밟아놓는 말들을 마구 해요. 아빠 때문에 제가 열등감에 시달리는 건지도 모르죠. 전 아빠 말에 대꾸도 못하고 있으니깐요. 막 터져버리고 싶은데... 정작 제가 하고 싶은 말을 못하고 눈물이나 뚝뚝 흘리며 땅바닥을 쳐다보는 일밖에 할 수가 없는 걸요. 이런 제 자신이 또 더욱 미워지고 싫어지네요. 엄마 아빠가 제 성적을 보고 실망하셨다는 건 알지만, 그건 그들이 절 성적 때문만으로 키워 왔기 때문일 거예요. 여태까지 성적이 꽤 좋았거든요. 아빠 엄마는 제가 성적 좋은 거 하나 빼면 사랑해 줄 가치도 없다고 생각했나 봐요. 성적이 떨어지니깐 여지없이 시달림을 받고 있어요. 하긴 전 부지런한것도 아니고 착하지도 못하고 성실하지도 못하고, 그나마 성적이 좀 좋았다는 거 그거 빼면 정말 사랑해 줄 가치가 없는 애인지도 모르죠. 머리가 아프네요. 울었더니 눈도 아프고, 생각나는 대로 쓰다 보니 말도 안 되는 것 같아요. 그래도 아저씨가 있어서 다행이예요. 전 벌써 죽었을지도 모르거든요. 제 삶에 대한 확신을 갖고 싶은데...내일 아침에 또 눈이 부어 학교 갈 생각을 하니 끔찍해요. 이런 세상에 하나님이 계시는 걸까요? 당연하다고 믿었던 그분의 존재까지 부정하게 돼요. 아저씨의 답장만을 기다릴께요. ------------------------------------------------------------------------- 이 편지의 내용을 정리해 보자. 첫째, 이 편지를 쓰기 전에 아저씨(십대들의 쪽지 발행인)하고 어떤 편지와 전화를 주고받았는지 자세히는 알 수 없다. 다만 이 학생이 아저씨의 회답을 고맙게 여기기는 했지만 만족하지는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둘째, 바로 또 이 편지를 쓰게 된 까닭은, 학교에 갔다 왔더니 책상 위에 놓아둔 책이고 공책이고 시험지들이 다 없어졌기 때문이다. 이것은 넌 보아하니 대학 갈 필요도 없고 공부해 봤자 그쪽으로는 성공도 못할거라. 고등학교는 다니든지 말든지 맘대로 하고 니 멋대로 해보라 고 하는 아버지의 짓이라고 했다. 그래서 아버지한테서 버림받은 이 학생은 구원을 청한 것이다. 셋째, 아버지가 이러는 까닭은 성적 때문이다. 이 학생은 아버지 어머니가 지금까지 성적 보고 저를 키워 왔다고 생각한다. 성적말고는 저를 사랑해 줄 가치가 없다고 아버지 어머니가 본다고 했다. 그래서 이제 성적이 나빠지니까 고등학교도 다니든지 말든지... 하고 자기를 자식으로 여기지도 않는 것이라고 보았다. 넷째, 아버지의 말은 100% 틀렸다. 자기는 그래도 공부를 잘 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노력도 하고 싶은데 아버지가 저러니 어찌할 수가 없다. 아버지가 도와주지 않으니 무슨 희망이 있는가? 죽고 싶다. - 이것이 이 학생의 마음이다. 다섯째, 이 학생은 전에는 성적이 괜찮았는데 요즘 와서 좀 나빠진 것 같다. 그 까닭은 쓰지 않았다. 이 학생은 지금 집에서 바깥과 전화통화조차 금지당한 상태로 감금당하다시피 되어 있는 듯하다. 여섯째, 이 학생의 성격은 본래 아주 밝았던 것 같다. 한때 농구선수를 좀 쫓아다녔다고 했는데, 농구선수로 경기를 하러 다녔다는 것이 아니라 구경하러 다녔다는 말이겠지, 그리고 아무리 괴로워도 학교에서는 명랑한 척 했는데, 이제는 그럴 힘도 없어졌다. 집에서는 아버지가 속을 밟아 놓는 말을 마구 해도 한 마디 대꾸도 못하고 눈물만 흘리고.. 속은 막 터져버리고 싶은데 그렇단다. 그래서 소심하게 되고 열등감에 시달린다고 했다. 그래도 삶에 대한 확신을 갖고 싶은데... 했다. 하긴 전 부지런한 것도 아니고 착하지도 못하고 성실하지고 못하고 했지만 이런 말에서 도리어 착하고 겸손하고 정직한 성품이 엿보인다. 일곱째, 이 학생은 어머니 이야기를 거의 하지 않았는데, 아마도 가정에서 발언권이 없거나 아버지 주장을 따르기만 하는 것 같다. 아버지는 성격이 괴팍해서 말을 함부로 한다고 했고 속을 밟아 놓는 말을 마구 해서 아들-딸일까? 이름도 적혀 있지 않다.-을 울려 놓는다고 했다. 전화를 못하게 하고 책을 없애 버린 것이 모두 아버지가 한 것이다.
사랑할 땐 별이 되고 - 이해인 구슬비 시인 - 권오순 선생님께 송알송알 싸리잎에 은구슬 조롱조롱 거미줄에 옥구슬 대롱대롱 풀잎마다 총총 방긋웃는 꽃잎마다 송송송 고이고이 오색실에 꿰어서 달빛새는 창문가에 두라고 포슬포슬 구슬비는 종일 예쁜구슬 맺히면서 솔솔솔 제가 어린 시절에 그리 자주 불렀던 이 맑고 고운 노래말은 어른이 된 지금도 사랑스럽게 느껴져서 오늘같이 비오는 날은 더 자주 흥얼거리게 됩니다. 이원수 선생님이 열다섯 살에 쓰셨다는 `고향의 봄`과 권오순 선생님이 열여덟 살에 쓰셨다는 `구슬비`는 이제 우리나라 사람 모두의 정겹고 소중한 노래가 되었습니다. 작품뿐 아니라 삶 자체가 그대로 은구슬, 옥구슬 같았던 권오순 마리아 선생님, 일생을 수녀처럼 사신 선생님. `언제 다시 찾아뵈어야지`하고 벼르던 중에 선생님이 임종하셨다는 슬픈 소식을 받고 보니 `구슬비`의 밝은 노래말도 오늘은 슬프고 우울하게 느껴집니다. 40kg도 채 못되는 가냘픈 몸으로 평생 신앙에 의지하고 동시만을 써오신 선생님. 불편한 다리와 병약한 몸으로 1948년 단신 월남한 후, 이북에 두고 온 가족들에 대한 그리움과 통일의 염원으로 눈물 속에 끊임없이 기도하셨던 선생님의 그 해맑은 모습을 떠올려 봅니다. 몇 년 전 제가 충북 제천 백운리 성당 뒤, `선생님의 꽃숲 속의 오두막집`을 방문했을 때는 너무 반가워 어쩔 줄 모르시며 맛있는 점심도 차려 주셨지요. 꽃들이 가득한 정원의 성모상 앞에서 우리가 함께 찍은 사진도 다시 들여다봅니다. 마음처럼 자주 방문은 못했어도 종종 편지를 올리며 어쩌다 고운 우표라도 몇 장 넣어 보내면 소녀처럼 즐거워하셨습니다. `...전 괴팍하리만치 남의 도움을 원치 않는 성격이지만 향그러운 고마음 깊이 간직할게요. 사진, 상본, 우표들 모두 감사했어요. 이곳은 산골이라 기념우표 구하기도 어려워 겨우 몇 장에서 꼭 하나 남은 것을 수녀님 편지에 썼었는데...얼마나 기뻤는지 눈물날 정도였어요. 감히 바라지 못했던 만남의 기쁨으로 다녀가신 날은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답니다. 몸은 늙었지만 마음만은 아직 철부지인 듯해요. 이런 건강 상태로 아직 살아 있다는 것이 철부지인 듯해요. 평생의 소원인 통일! 비록 제 발로 고향 땅을 못 가보더라도 통일에의 서광만이라도 알고 죽는 게 소망이라 했더니... 이렇게 오래 살게 해주시나 봅니다.` 선생님의 음성이 살아나는 듯한 편지들을 읽으며 추억에 잠겨 보는 저녁입니다. 짬짬이 예비자 교리도 하고, 집필도 자유롭게 할 수 있었던 흰구름골의 거처를 떠나 수녀님들이 운영하는 `평화모후원` 양로원에 들어가신 후, 선생님은 나날이 더 약해지시고, 독방이 아니기에 글도 마음껏 쓸 수 없음을 안타까워하셨지요. `...한평생 고독을 즐기며 외롭게 자유롭게 살아오다가 생활이 달라지니 아직 얼떨떨하기만 해요. 오랫동안 정든 흰구름골 오두막을 떠나올 때는 참으로 서운해 눈물겹기도 했지만 이 생활에 적응해 선종 준비나 잘해야겠어요. 마지막으로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작품집을 출간하려 합니다. 이번 추석에는 지는 북녘하늘이나 우러러봐야겠지요. 지난 여름 오시어 기념사진 남긴 것이 새삼 감사할 뿐이에요. 가장 아름답고 귀한 추억의 보석이 아닐 수 없어요...` 제가 수원의 `평화모후원`에 들렀을 때 선생님은 자꾸만 제게 무얼 해주고 싶어 하시기에 하얀 손수건에 손생님의 솜씨로 들꽃을 수놓아 주십사고 부탁드렸습니다. 몇 주 후에 선생님은 갖가지 고운 꽃을 수놓고 제 빨래번호인 88번 숫자까지 곱게 새긴 다섯 장의 손수건을 정성껏 포장해서 선물로 보내 주셨습니다. 석 장은 아껴 두고 두 장을 번갈아 가며 쓰고 있는데 그 손수건을 만지작거릴 때마다 선생님의 겸손한 삶의 향기가 느껴집니다.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먼길로 떠나시고 나니 이 손수건이 더 귀하게 여겨지고 미리 부탁드리길 잘 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손수건 위의 작은 꽃들을 바라보며 선생님의 `풀꽃`이란 동시를 읊어 봅니다. 탐스럽게 크고 화사하진 못해도 장미처럼 곱고 예쁘진 못해도 파란하늘 한 웅큼 품은 하늘색 꽃이게 해주세요 이름은 없어도 하늘색 꽃이면 그만이어요 이젠 그토록 좋아하시는 하늘색 꽃이 되어 하늘나라로 떠나신 마리아 선생님, `구슬비`의 시인 선생님. 선생님을 부르면 늘 즐겨 입던 고운 한복을 차려 입으시고 미소를 보내실 것만 같습니다. `구슬비`를 애창하던 어린 소녀가 어느 날 수녀가 되어 그 노래말의 주인이신 선생님을 만나 뵙고 구슬비처럼 맑고 고운 정을 나눌 수 있었음은 참으로 잊을 수 없는 축복의 인연이며 추억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제 선생님은 비록 저 세상으로 떠나셨어도 아름다운 `구슬비` 노래 속에 동심으로 이어지는 기도 속의 만남이 있기에 슬픔 중에도 위로를 받습니다. `구슬비` 선생님, 부디 편히 쉬십시오. (1994)
한국대표수필 - 김동리 외 9명 "피천득편" 피천득(1910~2007) 수필가. 시인. 영문 학자. 서울 출생. 중국 호강 대학 영문과 졸업. 하버드 대학 수학. 피천득은 한국의 서정적 수필의 대표자이다. 생활 속에서 명상의 표적을 찾아 내어 섬세하면서도 다감한 문장으로 그려 낸 그의 수필은 '수필의 전형'으로 지목되고 있다. 인연 지난 사월, 춘천에 가려고 하다가 못 가고 말았다. 나는 성심 여자 대학에 가 보고 싶었다. 그 학교에 어느 가을 학기, 매주 한 번씩 출강한 일이 있었다. 힘드는 출강을 한 학기 하게 된 것은 주 수녀님과 김 수녀님이 내 집에 오신 것에 대한 예의도 있었지만, 나에게는 사연이 있었다. 수십 년 전, 내가 열일곱 되던 봄, 나는 처음 도쿄에 간 일이 있다. 어떤 분의 소개로 사회 교육가 M선생 댁에 유숙을 하게 되었다. 시바쿠에 있는 그 집에는 주인 내외와 어린 딸, 세 식구가 살고 있었다. 하녀도 서생도 없었다. 눈이 예쁘고 웃는 얼굴을 하는 아사코는 처음부터 나를 오빠같이 따랐다. 아침에 낳았다고 아사코라는 이름을 지어 주었다고 하였다. 그 집 뜰에는 큰 나무들이 있었고, 일년초 꽃도 많았다. 내가 간 이튿날 아침, 아사코는 스위트피를 따다가 화병에 담아 내가 쓰게 된 책상 위에 놓았다. 스위트피는 아사코같이 어리고 귀여운 꽃이라고 생각하였다. 성심 여학원 소학교 1학년인 아사코는 어느 토요일 오후, 나와 같이 저희 학교까지 산보를 갔었다. 유치원부터 학부까지 있는 가톨릭 교육기관으로 유명한 이 여학원은 시내에 있으면서 큰 목장까지 가지고 있었다. 아사코는 자기 신장을 열고 교실에서 신는 하얀 운동화를 보여 주었다. 내가 도쿄를 떠나던 날 아침, 아사코는 내 목을 안고 내 뺨에 입을 맞추고 제가 쓰던 작은 손수건과 제가 끼던 작은 반지를 이별의 선물로 주었다. 그 후, 10년이 지나고 3,4년이 더 지났다. 그 동안 나는 국민 학교 1학년 같은 예쁜 여자 아이를 보면 아사코 생각을 하였다. 내가 두 번째 도쿄에 갔던 것도 사월이었다. 도쿄 역 가까운 데 여관을 정하고 즉시 M선생 댁을 찾아갔다. 아사코는 어느덧 청순하고 세련되어 보이는 영양이 되어 있었다. 그 집 마당에 피어 있는 목련꽃과도 같이. 그 때 성심 여학원 영문과 3학년이었다. 나는 좀 서먹서먹 했으나, 아사코는 나와의 재회를 기뻐하는 것 같았다. 아버지, 어머니가 가끔 내 말을 해서 나의 존재를 기억하고 있었나 보다. 그 날도 토요일이었다. 저녁 먹기 전에 같이 산보를 나갔다. 그리고 계획하지 않은 발걸음은 성심 여학원 쪽으로 옮겨져 갔다. 캠퍼스를 두루 거닐다가 돌아올 무렵, 나는 아사코 신장은 어디 있느냐고 물어 보았다. 그는 무슨 말인가 하고 나를 쳐다보다가, 교실에는 구두를 벗지 않고 그냥 들어 간다고 하였다. 그리고는 갑자기 뛰어가서 그 날 잊어버리고 교실에 두고 온 우산을 가지고 왔다. 지금도 나는 여자 우산을 볼 때면 연두색이 고았던 그 우산을 연상한다. "셀부르의 우산"이라는 영화를 내가 그렇게 좋아한 것도 아사코의 우산 때문인가 한다. 아사코와 나는 밤 늦게까지 문학 이야기를 하다가 가벼운 악수를 하고 헤어졌다. 새로 출판된 버지니아 울프의 소설 "세월"에 대해서도 이야기한 것 같다. 그 후 또 10여 년이 지났다. 그 동안 제 2차 세계 대전이 있었고, 우리 나라가 해방이 되고, 또 한국 전쟁이 있었다. 나는 어쩌다 아사코 생각을 하곤 했다. 결혼은 하였을 것이요, 전쟁통에 어찌 되지나 않았나, 남편이 전사하지나 않았나 하고 별별 생각을 다 하였다. 1954년, 처음 미국 가던 길에 나는 도쿄에 들러 M 선생 댁을 찾아갔다. 뜻밖에 그 동네가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그리고 M 선생네는 아직도 그 집에 살고 있었다. 선생 내외분은 흥분된 얼굴로 나를 맞이하였다. 그리고 한국이 독립이 되어서 무엇보다도 잘 됐다고 치하를 하였다. 아사코는 전쟁이 끝난 후 맥아더 사령부에서 번역 일을 하고 있다가 거기서 만난 일본인 2세와 결혼을 하고 따로 나가 산다는 것이었다. 아사코가 전쟁 미망인이 되지 않은 것은 다행이었다. 그러나 2세와 결혼하였다는 것이 마음에 걸렸다. 만나고 싶다고 그랬더니, 어머니가 아사코의 집으로 안내해 주었다. 뾰죽 지붕에 뾰죽 창문들이 있는 작은 집이었다. 20여 년 전 내가 아사코에게 준 동화책 겉장에 있는 집도 이런 집이었다. "아! 이쁜 집! 우리, 이 담에 이런 집에서 같이 살아요." 아사코의 어린 목소리가 지금도 들린다. 10년쯤 미리 전쟁이 나고 그만큼 일찍 한국이 독립되었더라면 아사코의 말대로 우리는 같은 집에서 살 수 있게 되었을지도 모른다. 뾰죽 지붕에 뾰죽 창문들이 있는 집이 아니라도 이런 부질없는 생각이 스치고 지나갔다. 그 집에 들어서자 마주친 것은 백합 같이 시들어 가는 아사코의 얼굴이었다. (세월)이란 소설 이야기를 한 지 10년이 더 지났었다. 그러나, 그는 아직 싱싱하여야 할 젊은 나이다. 남편은 내가 상상한 것과 같이 일본 사람도 아니고 미국 사람도 아닌, 그리고 진주군 장교라는 것을 뽐내는 것 같은 사나이였다. 아사코와 나는 절을 몇 번씩 하고 악수도 없이 헤어졌다. 그리워하는데도 한 번 만나고는 못 만나게 되기도 하고 일생을 못 잊으면서도 아니 만나고 살기도 한다. 아사코와 나는 세 번 만났다. 세 번째는 아니 만났어야 좋았을 것이다. 오는 주말에는 춘천에 갔다 오려 한다. 소양강 가을 경치가 아름다울 것이다.
내 마음이 강해야 내 소원도 이루어진다 - 잭 캔필드, 마크 빅터 한센 4. 가족들과의 더 좋은 관계를 위하여 약속을 요구하라 - 작자 미상 한 대기업가는 죽어서 천국은 아니었지만 하여간 어떤 곳으로 가게 되었다. 생전에 늘 그를 성가시게 하던 전직 세일즈맨이 익숙한 손짓으로 그의 등을 잡아당기며 귀에다 대고 큰소리를 질러댔기 때문에 그는 편안히 담배를 피우며 쉴 틈도 없었다. "아, 스미스씨." 그 세일즈맨을 킬킬거렸다. "약속 때문에 왔는데요." "약속이라니? 무슨 말이오?" "기억하지 못하시나요? 죽기 전에 제가 당신의 사무실을 찾아갈 때마다 당신이 언제나 절더러 이곳에서 보자고 말씀하셨잖아요." ----------------------------------------------------------------- 우리는 최근에 한 세일즈맨의 이야기를 들었다. 그는 아무리 거대한 재벌 기업가를 상대하는 경우라도 약속시간을 잡는데 어려움을 겪지 않는 성공한 사람이었다. 그는 언제나 특이한 시간으로 약속시간을 잡는 것이 이러한 놀라운 성과의 비결이라고 설명한다. 이를테면 정각 11시보다는 10시 50분에 만나기로 약속을 하는 것이다. 바쁜 사람들은 분명히 11시에는 선약이 있겠지만 그렇게 어중간한 시각에는 아무 약속도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또한 그렇게 바쁜 사람들은 이런 자투리 시간을 이용한 약속이 어떻게든 가치가 있을 거라고 생각하며 당신과의 만남을 가능한 간결하게 매듭지으려고 할 것이다. ------------------------------------------------------------------------- 안될 약속도 되게 하라 선박왕 오나시스가 20대였을 때, 그는 아르헨티나에 살았다. 그는 밤에는 통신회사에서 기술자로 일했고 남는 시간들은 더 나은 일을 해서 돈을 벌고 싶어했다. 그는 동양의 담배를 수입해서 국내 담배 제조 공장에 판매할 가능성에 대해서 흥미를 가지게 되었다. 당시에 아르헨티나는 막대한 양의 브라질과 쿠바산 담배잎을 수입하고 있었으나 동양 제품은 별로 없었다. 그후에 오나시스는 아버지를 설득해서 자신이 직접 펠로폰네스 지역의 최상품 담배를 사올 수 있었다. 마침내 선적물이 도착했을 때, 오나시스는 부에노스 아이레스의 담배공장들을 돌아다녔다. 바이어들이 그에게 전화해주길 기다리며 샘플을 놓아두었지만 전화해오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는 결정권을 가진 누구와도 약속할 수 가 없었다. 그는 결정권을 가진 누구와도 약속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젊은 오나시스는 국내 굴지의 담배 공장 관리 감독인 환 가오나를 목표로 정하고 매일 그의 사무실 앞에 가서 조용하고도 희망에 차서 그를 기다렸다. 그리고 다른 날에는 그의 집으로 가서 그가 퇴근하기를 기다렸다. 14일만에 그는 결려들었다. 가오나는 그의 비서에게 저 밖에 있는 남자가 누구며, 또 왜 나를 그토록 기다리고 있었는지 알아오라고 지시했다. 가오나가 오나시스를 집안으로 불렀을 때, 그는 단지 자신이 원하는 것은 일등급의 동양담배를 그의 회사에 판매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가오나는 놀라면서도 흡족한 기분으로 그를 회사의 판매 부서에 보내주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오나시스는 까다로운 품질 테스트를 통과함으로써 그의 목표를 달성했다. 담배잎의 품질이 너무나도 뛰어났기 때문에 구매자들은 즉시 만 달러치를 주문했고 오나시스는 그의 아버지에게 5%의 커미션을 요구했다. 오나시스는 종종 그때 벌었던 500달러가 현재 그가 이루어낸 부의 종자돈이 되었노라고 이야기한다. 뉴욕의 사업가인 건더 크라인펠드는 오나시스가 뉴욕에 있을 때 그를 만나고 싶어했다. 하지만 약속할 수가 없었기 때문에 그는 오나시스가 사용했던 방법을 쓰기로 했다. 그는 오나시스가 아파트의 펜트하우스에서 머물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는 언젠가 그를 마주할 수 있을 거라는 기대를 가진 채 그 건물에 있던 단 한 대의 엘리베이터를 타고 하루종일 오르내렸다. 결국 다음날에 그는 꼭대기 층에서 일층으로 내려가는 도중에 엘리베이터 안에서 그를 만나 계약을 체결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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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호지세(騎虎之勢) 騎:말탈 기. 虎:범 호. 之:갈 지(…의). 勢:기세?형세 세. [원말] 기수지세(騎獸之勢). [유사어] 기호난하(騎虎難下). [출전]《 書》〈獨孤 傳〉 호랑이를 타고 달리는 기세라는 뜻. 곧 ① 중도에서 그만둘 수 없는 형세. ② 내친걸음. 남북조(南北朝) 시대 말엽인 581년, 북조 최후의 왕조인 북주(北周)의 선제(宣帝)가 죽자, 재상 양견(楊堅)은 즉시 입궐하여 국사를 총괄했다. 외척이지만 한족(漢族)이었던 그는 일찍이 오랑캐인 선비족(鮮卑族)에게 빼앗긴 이 땅에 한족의 천하를 회복하겠다는 큰 뜻을 품고 때가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던 참에 선제가 죽은 것이다. 양견이 궁중에서 모반을 꾀하고 있을 때 이미 양견의 뜻을 알고 있는 아내 독고(獨孤) 부인으로부터 전간(傳簡)이 왔다. “‘호랑이를 타고 달리는 기세이므로 도중에서 내릴 수 없는 일입니다[騎虎之勢 不得下].’만약 도중에서 내리면 잡혀 먹히고 말 것입니다. 그러니 호랑이와 끝까지 가지 않으면 안 됩니다. 부디 목적을 달성하시오소서.” 이에 용기를 얻은 양견은 선제의 뒤를 이어 즉위한 나이 어린 정제(靜帝)를 폐하고 스스로 제위(帝位)에 올라 문제(文帝)라 일컫고 국호를 수(隋)라고 했다. 그로부터 8년 후인 589년, 문제는 남조(南朝) 최후의 왕조인 진(陳:557~589)나라마저 멸하고 마침내 천하를 통일했다.
납작하다 양말 속 발가락처럼 낱말도 꼼지락거린다. 가만히 있는 듯하지만 스멀스멀 다른 뜻으로 옮아간다. ‘납작하다’는 ‘납작한 돌’, ‘납작한 코’처럼 생김새가 평평하고 얇은 상태를 뜻했다. 비유적으로 쓰여 잘난 체하는 사람의 콧대를 납작하게 꺾어줘야 직성이 풀리기도 하지만, 일보전진을 위한 무한후퇴의 자세로 오늘도 납작 엎드려 산다. 요즘엔 다양하고 입체적인 대상이나 현상을 지나치게 단순화하여 이해한다는 뜻으로 쓰인다. ‘노인’이라는 말 한마디가 내 인생을 납작하게 만들었다’, ‘코로나는 우리 생활을 납작하게 만들었다’. 누군가를 한마디 말로 특정 부류에 포함시키면, 당사자의 구체적이고 개별적인 이야기가 지워진다. 복잡하고 입체적인 현상을 한두 가지 원인이나 갈래로 단순화하는 것도 ‘납작하게 만들었다’고 한다. ‘세대론은 세대 내부의 관계를 납작하게 만든다’, ‘불평등 담론은 너무나 빈약하고 납작하다’, ‘인구 문제를 저출생 문제로만 접근하면 논의를 납작하게 만든다’. 복잡한 문제를 ‘말의 압착기’로 내리눌러 마치 쉽고 간단한 문제로 뒤바꾸면 해결될까. 아니, 그냥 ‘압사’할 뿐. ‘납작하다’는 단순화에 대한 예민한 반발심이자 그런 평면적인 이해 방식을 그냥 내버려두지 않겠다는 다짐의 말이다. 매사를 한두 가지 원인으로 되돌리는 환원주의에 대한 거부이기도 하다. 장애인을, 여성을, 노인을, 노동자를, 아니 모든 생명을 납작하게 만들지 말라. 우리의 문제는 다차원적이다. 이 말의 반대편에는 ‘고유성, 입체성, 복합성, 두툼해지기, 부풀어 오르기’ 같은 말이 자리 잡고 있다. 즉, 사람. 국가 사전을 다시? 국립국어원이 70억원을 들여 <표준국어대사전>을 전면 개편하겠다고 한다. ‘<표준국어대사전> 없는 세상’을 상상조차 못 하게 되었으니, 국가사전 발행(1999년) 20여년 만에 우리는 언어국가주의에 완전히 포박되었다. 2년 전 호기롭게 ‘국가 사전 폐기론’을 주창한 입장에서 의견을 내지 않을 수 없으나 씨알도 안 먹히는 듯하니 딴 얘기로 에둘러 가볼란다. 사람들은 왜 박근혜 정부의 ‘역사교과서 국정화’에 그토록 반대했던가. 국정교과서에도 장점이 분명히 있다. 나라에서 펴내니 교과서의 질이 보장되고 일관성도 있겠지. 모든 학생이 같은 책으로 배우니 시험 준비도 편할 테고. ‘균형 잡힌 올바른 교과서’(박근혜)를 내면 세상은 ‘국론 통합’의 태평성대가 오리라. 하지만 교육계는 국정화에서 빠져나와 검정제와 인정제로 내달리더니, 이젠 자유발행제까지 고민한다. 이미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절반이 자유발행제를 채택하고 있다. 교과서 발행과 채택에 국가의 간섭과 통제가 없다는 뜻. 학교는 대혼란에 빠졌을까? 교과서에 대한 책임이 정부에서 교사나 학교운영위 등 시민사회로 옮아가 자율성과 다양성, 책임성이 높아질 뿐. 교과서도 이러한데, 하물며 꿈틀거리고 잡히지 않는 말을 모아 정리하는 걸 국가가 또 한다고? 서점 검색창에서 ‘(한)국어사전’을 쳐보라. 초등학생용이나 한국어학습자용 빼고 국어사전이 몇 종류나 살아 있는지. 가뭄철 물웅덩이에서 올챙이 몇 마리 보는 듯할 것이다(비교 삼아 아마존에서 일본의 ‘国語辞典’을 검색해보길). 그러니 더더욱 국가에서라도 내야 한다고? 하아…. 김진해 | 한겨레말글연구소 연구위원·경희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