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을 어떻게 쓸까 - 이오덕 1부 산문을 어떻게 쓸까 논설문 쓰기 - 생각과 느낌을 어떻게 표현할까 (4/4) - 의문 있어도 확인까지 기다렸어야 이것은 동아국제마라톤에서 코스 길이가 문제가 됐을 때, 바로 한국최고기록을 세운 김완기 선수가 한 말을 동아일보에서 기사로 실으면서 낸 제목이다. 이것도 기다렸어야 가 아니고 기다렸더라면 이라 하든지, 아니면 기다려야 했다 고 허야 우리말이 된다. 그런데 이 경우는, 기사를 읽어 보니 바로 김선수가 그렇게 말을 한 것으로 되어 있다. 코스 길이에 의혹이 있더라도 이의를 제기하는 수준에 그치고 최종확인을 기다렸어야 하는데 일부 언론에서... 신문기사란, 남이 말한 것조차 흔히 기자의 글 버릇대로 고쳐서 나오는 글이 되어 있어서 김 선수가 이런 말투로 애기했는지 알 길이 없지만, 실제로 또 이렇게 말을 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하도 잘못된 말법으로 쓴 글이 많이 쏟아져 나와서 어렸을 때부터 그런 글만 읽어 왔으니 입으로 하는 말까지 오염이 되지 않을 수 없다. 아무튼 갔어야 했어야 라는 말은 쓰지 말아야 한다. 갔더라면 했더라면 하든지 가야했다 해야 되었다 고 써야 우리말이 된다는 것을 잊지 말 일이다. - 그래도 나는 이유를 단다. 이런 말도 순조롭게 이해되지 않는다. 무슨 이유 를 달았다는 것일까? 그 앞에 이 지긋지긋한 담배, 어떻게 할까 하고 말했다고 했으니, 일을 그만 두고 무슨 핑계를 대서 어디로 빠져 나가려고 한 것일까? 그렇다면 이 말은 그래도 나는 핑계를 대고 어디로 놀러 가려고 했다 고 써야 할 것이다. 이유 란 말은 까닭 이나 핑계 로 쓰는 것이 좋다. - 우리를 위해 봉사하시는 분을 잊기 쉽다. 여기 봉사 란 말이 나오는데, 왜 이런 말을 썼을까? 봉사란 남을 위해서 일하는 것을 두고 하게 되는 말이다. 그러니 부모가 자식을 위해서 일하는 것을 봉사한다고 할 수 없다. 이 글에서 봉사하시는 이란 말 대신에 애쓰시는 이란 쉬운 말을 쓰면 아주 알맞고 자연스럽게 읽힐 것이다. 무엇이든지 잘 써 보려고, 유식한 글을 써 보려고 하면 이런 탈이 난다. 어렸을 때부터 서 와서 잘 알고 있는 말을 쓰면 틀림이 없고 좋은 글이 되는데, 그런 쉬운 말 쉬운 글은 안 쓰고 어려운 말과 글을 쓰려고 하니 잘못된다. 머리로 글을 만들면 저절로 이런 꼴이 되고 만다. - 엄마는 고달픔을 참고 우리 자식들을 위해서 끊임없이 항쟁하듯 노력을 하신다. 이 글월에도 고개를 갸웃거리게 하는 말이 있다. 항쟁하듯 이란 말인데, 정말 어머니가 일하시는 것을 항쟁하듯 한다고 보았을까? 이런 경우에도 보통 우리라 말하는 쉬운 말로 썼으면 좋겠다. 항쟁하듯 노력을 하신다 고 쓰지 말고 땀 흘려 일하신다 든지, 뭐 이렇게 말이다. - 그러나 엄마, 미래를 기다려요. 여기 나온 미래 란 말, 참 딱한 말이다. 왜 입으로 하는 우리말을 쓸 줄 모르고 유식병에 걸린 어른들의 글말을 따라 쓸까? 이럴 때 실제로 어머니 앞에서 말을 한다고 해 보라. 어떤 말이 나오겠는가? 아마 틀림 없이 이렇게 말할 것이다. 엄마, 먼 훗날을 기다려요. 그리고 미래 란 말은 앞날 이라고 해도 된다. 신문이나 잡지에 나오는 미래 라는 말은 거의 모두 앞날 이란 우리말로 바꿔야 한다. 그런데 나는 아직 어느 신문, 어느 잡비에서도 앞날 이란 우리말을 쓴 글을 보지 못했다. 모조리 미래 라고 쓴다. 이래서 우리 어른들은 모두 한자말에 중독이 되고, 한자말을 쓰고 싶어하는 무더기 정신병(집단정신병)에 결려 있다고 하는 것이다. 한자말을 쓰고 싶어하니 한문글자를 써야 한다고 우기는 것은 당연하다. 그리고 이렇게 한문글자와 한자말을 쓰고 싶어하는 마음이 바로 외국숭배사상이다. 제것을 멸시하고 남의 것만 쳐다보는 이 더러운 마음가짐은, 일제시대에는 왜놈들한테 붙고 그 뒤로는 미국에 매달리고 서양만 쳐다보면서 서양 것이라면 무엇이든지 받들어 모시는 판이 된 것이다. 말 하나 바로잡는 것이 단지 말버릇 하나 고치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죽어가는 우리 겨레의 마음을 살리는 일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이 어머니 란 글은 어느 학급문집에 실려 있는 글인데, 글 끝에는 놉 이란 말을 다음과 같이 풀이해 놓았다. - 식사를 제공하고 날삯으로 일을 시키는 품꾼. 식사를 제공하고 이게 안 된다. 밥을 먹이고 다. 마지막으로, 이 글을 쓴 학생이 일하면서 살아가는 삶을 어떻게 보고 있는가를 생각해 본다. 이 학생이 일을 어떻게 하고 있는가 하는 것은 - 이 지긋지긋한 담배, 어떻게 할까 하고 말하니.. 이런 말에 잘 나타나 있다. 방이 더러우면(농사짓는 집에서 방이 좀 어질러져 있는 것을 더럽다 고 하는 것부터 크게 잘못되어 있다.) 스스로 깨끗하게 청소할 생각은 안 하고 어머니한테 야단치다니 참 어이가 없다. 또 담배 모종을 하면서 그 일을 지긋지긋하게 여긴다. 다음, 어머니가 일하시는 생활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가 하는 것은 - 일상생활에서 살펴보면 빨래 청소는 물론, 모든 것을 자식들을 위해 희생하신다. - 엄마는 고달픔을 참고 우리 자식들을 위해서 끊임없이 항쟁하듯 노력하신다. 이런 대문에서 읽을 수 있는 희생 이라든가 항쟁하듯 하는 말에서 잘 나타나 있다.어머니가 자식들을 위해 빨래하고 청소하는 것을 희생 이라고 보고, 또 어머니가 쉴새 없이일 하시는 것을 항쟁하듯 하는 것으로 본 것은, 이 학생 스스로 일을 하면서 느낀 것과 마찬가지로 일이란 것은 귀찮고 고달프고 지긋지긋하고 그래서 될 수 있는 대로 피해야 할 것으로 알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오늘날 잘못된 교육과 사회풍조에서 거의 모든 학생들이 가지고 있는 일과 일하는 사람들에 대한 생각이며 태도이지만, 어땠든 잘못된 생각이고 태도인 것만은 분명하다. 이 그이 어수선하고 말이 제것으로 되어 있지 않는 것도 사실은 자기의 마음과 삶을 올바르게 가꾸어 가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한국대표수필 - 김동리 외 9명 "류달영편" 류달영(1911~2004) 농학자. 사회 운동가, 수필가. 경기도 이천 출생. 수원 고농 졸업. 미네소타 대학 수학. 서울 농대 교수. 재건 국민 운동 본부장 역임. 그는 수필 "신문 망국론" "흙과 사랑"에서는 경세가로서의 풍모와 자연 찬미를 보여 주었다. 담백하고 진지한 인간상을 모색하는 철학적인 필치로 정평이 높다. 겨울 정원에서 정원에 흰 눈이 가득하게 덮였다. 연인을 안으려고 벌린 두 팔처럼 광교산에서 뻗어내린 산줄기가 겨울철에는 우리 평화 농장 좌우편에서 유난스레 푸르르다. 우리 농장도 광교산의 한 줄기로 완만하게 뻗어내린 경사지이다. 왼편으로 맑은 시내가 흘러내리고 바른편으로 제법 노송의 티가 도는 수령 백 년 안팎의 송림이 길게 둘러 있어 우리 농장의 울타리 구실을 하고 있다. 농막 주위에는 십여 년 전, 내가 이 땅을 개간하던 무렵에 심어서 가꾸어온 여러 종류의 나무들이 이제는 모두 크게 자라서 고개를 젖히고 올려다 보게 되었다. 나와 내 아내가 해마다 땅을 파고 거름을 묻고, 가지를 간추려 주고, 벌레를 잡고 병을 막기 위해 소독을 하면서 지성스럽게 가꾸어 온 나무들이다. 그러므로 어느 한 그루 정들지 않은 것이 없다. 남들처럼 돈을 벌기 위해서 심어 가꾼 것들이 아니기 때문에 작고 큰 여러 종류의 나무들은 그대로 우리집 가족들이다. 이제는 서리 맞아 낙엽이 져서 벌거벗은 앙상한 나무들이 못가에도 언덕 위에도 잔디밭가에도 정자 주위에도 을씨년스럽게 찬 바람에 떨고 서 있다. 각종의 산새들이 몰려와 앙상한 가지 위에 앉아서 재재거릴 때에는 잎사귀 하나 꽃 한 송이 없는 나무들은 더욱 살벌해 보인다. 그러나 마음을 가라앉히고 고요히 바라보면 어느 나무 어느 가지 하나도 오달진 눈을 지니지 않은 것은 없다. 목련. 라일락. 산수유 가지에는 탐스러운 꽃을 잉태한 야무진 꽃눈이 다닥다닥 붙어 있다. 그리고 벌거벗은 앙상한 나무의 수피 속에는 강인한 생병이 충만해 있다. 손으로 나무 줄기를 어루만져 보노라면 나무와 나의 생명이 서로 하나가 되어 흐르는 듯한 삶의 신비를 느끼게 된다. 버드나무, 벚나무, 백양나무, 자작나무, 밤나무, 살구나무, 매화나무, 오동나무, 박태기나무, 아기씨나무, 복숭아나무, 모과나무, 은행나무... 그 어느 것을 보더라도 백인의 용기를 가진 도인처럼 느껴진다. 그리고 싹틔울 때와 꽃 피울 때와 잎을 떨어 버릴 때를 올바로 아는 선지자처럼 느껴진다. 예술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깊이를 알 수 없는 함축이라고 할 것이다. 차원이 높을수록 소박하고 떫은 것을 좋아하게 되는 것은 바로 그 함축 때문이다. 그런데 겨울 나무들은 네 계절 중에서 그 어느 때보다도 가장 함축을 느끼게 한다. 그렇게 을씨년스럽고, 그렇게 메마르고, 또 그렇게 외로워 보이건만 겨울 나무들의 가지가지에는 이미 봄날의 찬란한 꽃 세계도 신록의 청신한 향연도 충분히 마련해 가지고 있는 것이다. 나는 내가 씨 심어 가꾸어 기른 나무들 사이를 무한의 애정을 느끼면서 거닌다. 세월이 내 머리칼을 은실로 표백하면서 쉬지 않고 흐르고 있건만 나는 그것을 잊어버리고 나무들을 어루만지면서 흰 눈 위를 거닌다. 봄이 돌아오면 시냇가의 능수버들은 어느 나무보다도 일찍 꿈처럼 아련한 초록으로 실가지들을 물들이고 흐느적거리겠지. 언덕 위의 산수유나무는 잎이 돋기도 전에 잔설 속에서 황금의 꽃을 마술처럼 가지마다 푸짐하게 피우겠지. 그리고 진달래, 개나리, 미선, 백목련들이 일찍 피기 경쟁을 벌일 것이고 철쭉, 아기씨꽃, 살구, 매화, 앵도, 홍도, 백도, 박태기 들이 각각 제 시간을 찾아 피어 나겠지. 모란, 옥싸리, 모코렌지, 레드멘들이 차례차례로 뒤를 이어 피겠지. 언덕 위의 과수원의 사과나무, 배나무도 푸짐하게 꽃을 피울 것이고, 숲 속의 자작나무, 백양나무, 은사시나무, 상수리나무, 참나무, 밤나무꽃들도 멋을 아는 눈에는 버릴 수 없는 풍취를 심어 줄 것이 틀림없다. 그 무렵에는 연못에 수련의 둥근 잎이 물 위에 몇 개씩 동동 뜨기 시작하겠고, 금잉어 떼들이 물을 굽어 보는 나에게 먹이를 달라고 수면에 호화롭게 떠올라 조를 것이다. 적막하기 짝이 없는 깊은 겨울날에 앙상한 나뭇가지 사이로 거칠 것 없이 비쳐 오는 겨울볕을 받으면서 나는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는 뚜비와 함께 눈 위를 거닌다. 잎 하나 지니지 않은 겨울의 낙엽수들은 제각기 특유의 골격과 수형을 지니고 있어 제나름의 본 모습을 보여 준다. 수석의 아름다움에 도취될 줄 아는 사람들은 겨울의 벌거벗은 나무들을 감상해 볼 것이다. 그 소박하고 깊이 있고 떫은 멋에 취하여 반드시 삼매경에 잠기게 될 것이다. 난만한 봄을 마른 가지에 빈틈없이 준비하고서 하루하루 다가오는 봄날을 의심 없이 믿고 기다리는 겨울 나무, 눈서리와 매운 바람을 희망 속에 꾸준히 견디고 참는 침묵의 겨울 나무, 볼수록 믿음직하고 멋지고 아름답다. 탁월한 예술인 같기도 하고, 천년을 내다보는 철인 같기도 하다. 겨울 정원의 낙엽수 사이를 거니는 멋을 나는 점점 즐기게 된다.
내 마음이 강해야 내 소원도 이루어진다 - 잭 캔필드, 마크 빅터 한센 할인 가격을 요청하라 - 데이비드 요고 2세 나는 새 여행 가방이 필요했기 때문에 버지니아의 브루밍데일 백화점을 찾았다. 내가 가방 판매부에 도착하자, 한 판매 사원이 나에게 다가와서 물었다. "찾아주셔서 감사합니다.,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그녀의 도움으로 나는 원하던 가방을 발견했다. 그 가격은 약 300달러였다. 나는 소매점에서 가격을 깎아 준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으므로 종종 흥정을 걸었다. 내가 물었다. "이 가방의 세일 가격은 어떻게 됩니까?" 판매 사원은 나를 응시하며 말했다. "세일은 어제 날짜로 끝났는데요." "그래요? 세일 가격은 얼마였는데요?" "25% 할인 특가였습니다." 나는 암산을 잘 했으므로 지금 문제가 되는 액수가 75달러임을 알아차렸다. 나는 판매원의 눈을 똑바로 응시하며 말했다. "나는 편한 마음으로 어제 225달러에 살 수 있었던 가방을 오늘 300달러나 내고 구입할 수 없습니다. 도저히 그럴 수 없어요. 당신이 가방을 225달러에 팔아야 합니다." "하지만 어제 세일이 끝났다니까요." "어제 225달러였다면, 오늘도 그 가격이 될 수 있어요. 높은 사람에게 가서 내가 세일이 오늘 끝나는 줄 알았다거나, 어제 아팠다고 말하고 그 가격을 허락 받는 게 어떻습니까?" 그래서 그녀는 내 말대로 갔다가 5분 후에 돌아왔다. "손님, 기다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하지만 아직 책임자를 만나지 못했습니다. 한 분을 만나기는 했지만, 내가 찾는 사람은 우리가 원하는 대답을 줄 수 있는 분이에요." 그 다음에 그녀는 또 5분 후에 돌아와서 말했다. "좋은 소식이에요! 그 가방을 225달러에 팔게요!" 6. 더 나은 자신을 위하여 롱 펠로우 끈질김은 성공의 큰 요소이다. 오랫동안 요란하게 문을 두드린다면 결국 누군가를 깨우게 될 것이다. 좋은 질문을 하라 - <이 이야기, 저 이야기> 중에서 한 친구가 의학 노벨상 수상자인 이시도르 I. 루비에게 물었다. "어떻게 과학자가 되셨습니까?" 루비는 대답하기를 방과후에 그의 어머니가 항상 학교 생활에 대해서 물었다고 했다. 어머니는 그가 배운 것에 대해 관심을 보이는 대신 이렇게 질문하셨다. '오늘 좋은 질문을 했니?' 루비는 이렇게 말했다. "좋은 질문이야말로 오늘의 나를 만들었습니다."
Board 추천글 2022.11.10 風文 R 1679
농단(壟斷) 壟:언덕 롱. 斷:끊을 단. [원말] 농단(籠斷). [출전]《孟子》〈公孫추篇(공손추편)〉 (깎아 세운 듯이) 높이 솟아 있는 언덕이란 뜻. 곧 ① 재물을 독차지함. ② 이익을 독점함. 전국시대, 제(齊)나라 선왕(宣王) 때의 일이다. 왕도정치(王道政治)의 실현을 위해 제국을 순방 중이던 맹자는 제나라에서도 수년간 머물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귀국하려 했다. 그러자 선왕은 맹자에게 높은 봉록을 줄 테니 제나라를 떠나지 말아 달라고 제의했다. 그러나 맹자는 거절했다. “전하, 제 의견이 받아들여지지 않는데도 봉록에 달라붙어서 ‘재물을 독차지[壟斷]’할 생각은 없나이다.” 이렇게 말한 맹자는 ‘농단’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농단’은 ‘깎아 세운 듯이 높이 솟아 있는 언덕’이란 뜻인데, 전하여 ‘재물을 독차지한다’, ‘이익을 독점한다’는 뜻으로 쓰이게 된 데는 이런 이야기가 있다. 먼 옛날에는 시장에서 물물 교환을 했었다. 그런데 한 교활한 사나이가 나타나 시장의 상황을 쉽게 알 수 있는 ‘높은 언덕[壟斷]’에 올라가 좌우를 살펴서 장사함으로써 ‘이익을 독점’했다. 그러자 사람들은 모두 이 사나이의 비열(卑劣)한 수법을 증오(憎惡)하고 그에게 세금을 부과하기로 했다. 이 때부터 장사꾼에게 세금을 부과하는 제도가 생겼다고 한다.
Board 고사성어 2022.11.10 風文 R 770
독불장군 볼수록 특이하다. 여염집이나 가게 벽에 무심히 걸린 ‘가화만사성’, ‘진인사대천명’ 같은 한자성어를 볼작시면 ‘집안이 화목하면 모든 일이 잘된다’는 식으로 그 문구가 뭔 말인지 그대로 해석이 되건만, 이 말은 어쩌다가 이리 삐뚤어졌을꼬. ‘독불장군(獨不將軍)!’ 한자 그대로는 ‘혼자서(獨)는 장군(將軍)이 될 수 없다(不)!’는 뜻. 타인과 협력하고 타협하지 않으면 지도자가 될 수 없단 말이다. 중국에서도 비슷하게 ‘나무 한 그루로는 숲을 이룰 수 없다’(독목불림, 獨木不林)는 표현이 있다. 웬걸, 그런 뜻은 온데간데없고, 이젠 정반대로 ‘자기 멋대로 행동하는 사람’을 가리키다니. 하기야 세상사 한 끗 차이. 독불장군도 좋게 봐주기만 한다면 ‘뚝심 있다’, ‘결단력 있다’, ‘카리스마 넘친다’는 칭찬을 들었을 테지. 나처럼 신념도 줏대도 없는 사람이 듣기 십상인 ‘허당, 흐리멍덩이, 허수아비, 말년병장’이란 놀림보단 백배 흐뭇할 듯. 무엇이 사람을 그렇게 만들까. 자기 경험에 대한 확신이 지나치게 강하거나, 반대로 사랑이나 관심을 충분히 받지 못해 열등감에 시달리던 사람들이 이런 성향을 갖는다더라. 내 의지의 관철은 타인의 의지의 좌절을 뜻하는 것이니 독불장군 주변에는 사람이 없고, 있다손 치더라도 아첨꾼이나 자리를 탐하는 해바라기들만이 즐비할 뿐. 힘없는 사람들은 짐짓 모르는 척하지만, 뒤에선 수군수군 경멸과 냉소를 날린다. 그래서인지 ‘독불장군’이란 말엔 ‘따돌림을 받는 외로운 사람’이란 뜻도 있더군. 친구여, ‘자기 멋대로’와 ‘외로움’은 그리 멀리 떨어져 있지 않다오. 만인의 ‘씨’ 나는 스스로를 소개할 때 ‘김진해 교수입니다’라 하는 걸 싫어한다. 직업명을 이름 앞에 놓는 건 지금 그 일을 하고 있으니 어쩔 수 없지만, 뒤에다 붙이면 죽을 때까지 쫓아다닐 거 같아 싫다. 인문학자 도정일 선생은 주변 인물들 몇몇에게 이렇게 불렀다, 이를테면 ‘김진해씨!’ 호칭엔 위계와 귀천에 대한 감각이 새겨져 있다. 신문에선 이를 세가지 방식으로 실현한다. 첫째, 정치·경제·사회적 지명도가 있는 사람에겐 이름 뒤에 그의 직위를 붙인다. 둘째, 일반시민에겐 ‘씨’를 붙인다. 셋째, 운동선수, 배우, 예술가에겐 아무것도 붙이지 않는다(롯데의 이대호, 배우 박은빈, 피아니스트 임윤찬). 첫째 부류의 사람들은 죄를 지어도 변함없이 그대로다. 대한제국 시절 발행된 <독립신문>을 보자. ‘대황제 폐하’나 ‘임금’처럼 군주만 빼면, 비교적 일관성 있게 모든 사람에게 ‘씨’를 붙였다. ‘전 군수 이병륜씨’, ‘전 참판 박기양씨’. 현직에도 ‘고등재판소 재판장 이유인씨’, ‘황주 군수 김완수씨’. 다만, 죄지은 사람에겐 ‘씨’마저 안 붙이고 ‘철원군 아전 박기병이가’, ‘공주에 사는 한병순은’이라 썼다. 군주제 국가의 신문에서도 호칭이 자못 평등하였으니, 어찌 이를 모범으로 삼지 않으리오. 언어적 평등의 실현에 애써온 <한겨레>가 “오늘부터 우리 신문은 예외 없이 모든 이름 뒤에 ‘씨’를 쓰기로 한다.”고 선포해 버리는 거다. 공정과 상식, 정의가 차고 넘치는 지금이 호칭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할 최적의 시기다. ‘롯데의 이대호씨’와 ‘대통령 윤석열씨’. 당장은 어색해도 나중엔 좋지 않겠는가. 한겨레말글연구소 연구위원·경희대 교수
무엇을 어떻게 쓸까 - 이오덕 1부 산문을 어떻게 쓸까 논설문 쓰기 - 생각과 느낌을 어떻게 표현할까 (3/4) 글을 머리로 만들지 말고 글은 몸으로 부딪힌 일을 쓰고 가슴에 울려온 느낌과 생각을 쓰는 것이지, 머리로 써서 는 안 된다. 머리로 글을 만드니까 말을 부질없이 꾸미게 되고 사실과는 다른 것을 쓰고 유식한 말을 흉내낸다. 알맹이는 없이 말만 요란한 글, 남을 속이는 거짓스런 글은 이렇게 해서 씌어진다. 거짓글까지는 안 된다고 하더라고 읽는 사람의 마음을 움직일 수 없는 글이 되는 것만은 분명하다. 글을 논리로 써서는 안되는 까닭도 그 때문이다. 논리로 쓰는 것이 머리로 쓰는 것이다. 다음은 고등하교 1학년 학생이 쓴 글이다. 이 글이 몸으로 부딪힌 일을 쓴글인지, 머리로 쓴 글인지 살펴보자. 어머니 우리는 흔히 어머니를 위대하다 라고 일컫는다. 일상생활에서 살펴보면 빨래 청소는 물론, 모든 것은 자식들을 위해 희생하신다. 그러나 그런 어머니를 위해 별로 도움을 드리지 못했다. 새벽부터 일어나 꼭 의무적으로 일을 하신다. 이럴 땐 나의 마음은 흐뭇할까? 아니다. 돕고 싶을 뿐이다. 솔선수범해서 도와야 할 우리는 일이 많다고 해서 피해 버린다. 이 일은 나만의 일이 아닐 것이다. 집에 돌아오면 나는 방이 더럽다고 야단이다. 그러면 어머니는 나에게 틈이 언제 있냐고 하신다. 이건 나의 일시적인 말에 불과하다. 어머니의 거룩한 상. 이건 나의 바램이기도 하다. 과연 내가 이것을 이룰지.... 그러나 나도 하염없이 노력을 하련다. 쓴내나는 생활을 이겨내는 어머니, 왜 어머니의 입에서 목구멍에서 쓴내난다 라는 말이 자꾸 나왔어야 할까. 어제의 일이다. 새벽부터 깨우는 소리에 일어나 보니 엄마는 오늘 답배 모종을 해야 하니 일찍 서둘러야 한다고 말씀하신다. 일에 대한 말만 들어도 귀가 따가울 정도다. 좁을 얻어야만 우리가 편할 텐데.. 하고 우선 편함을 앞세운다. 점심 전에 아버지께 이 지긋지긋한 담배 어떻게 할까 하고 말하니, 이건 너희들을 위해서 하는 일이니 그런 말하면 못쓴다 하고 말씀하신다. 그래도 나는 이유를 단다 우리를 위해서 봉사하시는 분을 잊기 쉽다. 엄마는 고달픔을 참고 우리 자식들을 위해서 끊임없이 항쟁하듯 노력을 하신다. 그러나 엄마, 먼 미래를 기다려요. 제가 할 수 있는 데까지 열심히 도울께요. 효도도 잘 할 거예요. ------------------------------------------------------- 이 글은 다 읽고 나서도 아무런 맛을 느낄 수 없다. 가슴에 울려오는 것이 없다. 맛이 없는 글, 가슴에 와 닿는 것이 없는 글이 된 것은 머리로 썼기 때문이다. 글 가운데 실제로 겪은 사실을 쓰려고 한 대문이 있기는 있다. 담배 모종을 한 것 같은 이야기가 나오는 대문이 그렇다. 그런데 이것도 제대로 쓰지 못했고, 쓰다가 그만두고 곧 머리로 말을 만드는 글로 되돌아가고 말았다. 우리를 위해 늘 일만 하면서 고생하는 어머니는 훌룡하시다. 나는 어머니께 효도를 해야 한다. 이런 내용을 쓰려고 했다면 무엇보다도 자기 어머니가 그렇게 고생하시는 모습을(언제 어디서 보았다든지, 함께 일하면서 깨달았다든지 하는 사실을) 뚜렷하게 그려 보여야 할 것이다. 그런 정직한 이야기는 없이 그저 머리로 생각한 말만 늘어놓았으니 그런 말이 군소리가 되고 빈 말이 될 수 밖에 없다. 이와같이 머리로 글을 쓰면 유식한 글말을 흉내내는 것으로도 나타난다. 이 글에는 공연히 쓴 글말, 유식한 한자말에다가 아주 허황한 말까지 나온다. 이렇게 잘못 쓴 말, 제것으로 되어 있지 않은 말을 차례로 보아 나가자. - 우리는 흔히 어머니는 위대하다 라고 일컫는다. 여기 일컫는다 란 말이 나오는데, 이 말은 우리가 일상에서 쓰지 않는다. 벌써 죽어버린말이라도 그것을 대신해서 쓸 말이 없다면 살려 쓰는 것이 좋다. 그러나 어린애들의 입에서도 쉽게 나오는 말한다 를 쓰지 않고 일컫는다 를 써야 할 까닭이 어디 있는가? 글을 전문으로 쓰는 문인이든지 학생이든지 일컫는다 란 말을 쓰는 까닭은, 뭔가 유식한 글을 써 보이려고 하는 마음이 숨어 있기 때문이라고 보면 틀림 없다. 실제로 말을 할 때도 우리 어머니는 훌룡하시다 고 하지 우리 어머니는 위대하시다 고 말하지 않으니까. - 새벽부터 일어나 꼭 의무적으로 일을 하신다. 여기 나오는 의무적으로 란 말은 어떤 말일까? 어쩔 수 없이 란 뜻일까? 앞뒤의 글을 보아서 그런 뜻은 아닌 것 같다. 반드시 란 뜻으로 썼는가? 그러나 바로 앞에 꼭 이란 말이 있다. 결국 이 말은 아무 쓸데도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 새벽부터 일어나 도 말이 좀 덜 되었다. 새벽에 일어나서부터 해야지. - 솔선수범해서 도와야 할 우리는 일이 많다고 해서 피해 버린다. 이 글월에 나오는 솔선수범 은 학교에서 많이 쓰는 말이다. 학생들 앞에서 선생님들이 무슨 교훈이 될 만한 이야기를 할 때 흔히 쓰는 이 말은, 자기 이야기를 하는 이런 글에서 쓸 것이 아니다. 먼저 본을 보여 하면 될 말이다. 그리고 우리는 했는데, 나는 이라고 할 것을 잘못 썼다. - 이전 나의 일시적인 말에 불과하다. 이 글월은 다음과 같이 써야 한다. 이건 내가 한 번 해본 말일 뿐이다. - 어머니의 거룩한 상. 갑자기 나오는 이 말은 무슨 뜻인가? 우선 상 이란 말부터 무슨 말인가? 모습이란 말이라면 어머니의 거룩한 모습 이라고 써야 할 것이다. 그런데 난데없이 어머니의 거룩한모습 이 나오는 까닭을 알 수 없다. 이 어머니의 거룩한 상 이 나온 다음에는 이건 나의 바램이기도 하다. 과연 내가 이것을 이룰지.. 라고 써 놓았는데, 이 말들이 서로 어떤 듯으로 이어져 있는지 알 수 없다. - 나도 하염없이 노력을 하련다. 이 하염없이 는 말뜻을 제대로 알지 못하고 쓴 것 같다. - 왜 어머니의 입에서 목구멍에서 쓴내난다 라는 말이 자꾸 나왔어야 할까. 이 글에 나오는 나왔어야 는 나와야 로 써야 우리말이 된다. 이것은 이중과거형은 아니고 그냥 과거형이다. 우리말 움직씨(동사)에는 이중 과거형이 없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과거형도 함부로 쓰는 것이 아니다. 두어 가지 보기를 들어 본다. - 복잡한 도로, 기사설명 혼란 알기 쉽게 약도 게재했어야 이것은 어느 신문에 난 독자의 글제목이다. 내용을 읽어 보니 신문에서, 서울 동남부 지역의 간선도로망 체계를 완성하기 위한 공사를 하는 형편을 보도한 모양인데, 그것을글로만 설명해 놓아서 알기가 어려웠다는 것이다. 그래서 지도를 곁들어 눈으로 보아서 잘 알 수 있게 설명 했더라면 좋았을 것이라 했다. 그렇다면 제목도 약도 게재했어야 로 쓰지 말고 약도 게재했더라면 으로 써야 우리말 답게 된다. 물론 게재 란 말도 쉬운 우리말로 바꾸어서 약도 실었더라면 이나 약도 그려 보였더라면 이라고 쓰는 것이 더 좋다. 또 이 말은 약도 게재해야 -> 약도 실어야 이렇게 써도 된다. 한 가지 더 들어 본다.
한국대표수필 - 김동리 외 9명 "류달영편" 류달영(1911~2004) 농학자. 사회 운동가, 수필가. 경기도 이천 출생. 수원 고농 졸업. 미네소타 대학 수학. 서울 농대 교수. 재건 국민 운동 본부장 역임. 그는 수필 "신문 망국론" "흙과 사랑"에서는 경세가로서의 풍모와 자연 찬미를 보여 주었다. 담백하고 진지한 인간상을 모색하는 철학적인 필치로 정평이 높다. 슬픔에 관하여 사람의 일생은 기쁨과 슬픔을 경위로 하여 짜 가는 한 조각의 비단일 것 같다. 기쁨만으로 일생을 보내는 사람도 없고 슬픔만으로 평생을 지내는 사람도 없다. 기쁘기만 한 듯이 보이는 사람의 흉중에도 슬픔이 깃들이며, 슬프게만 보이는 사람의 눈에도 기쁜 웃음이 빛날 때가 있다. 그러므로 사람은, 기쁘다 해서 그것에만 도취될 것도 아니며, 슬프다 해서 절망만 일삼을 것도 아니다. 나는 지금, 내 책상 앞에 걸려 있는 그림을 보고 있다. 고호가 그린 "들에서 돌아오는 농가족"이다. 푸른 하늘에는 흰구름이 얇게 무늬지고, 넓은 들에는 추수할 곡식이 그득한데, 젊은 아내는 바구니를 든 채 나귀를 타고, 남편인 농부는 포크를 메고 그 뒤를 따라 집으로 돌아오는 것이다. 생활하는 사람의 세계를 그린 그림 가운데 이보다 더 평화로운 정경을 그린 것은 그리 흔하지 않을 것이다. 넓은 들 한가운데 마주 서서, 은은한 저녁 종 소리를 들으며 감사의 기도를 드리는 농부 내외의 경건한 모습을 우리는 밀레의 "만종"에서 보거니와, 내가 지금 보고 있는 그림은 그 다음 장면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그리고, 밀레와 고호의 가슴 속에 흐르고 있는 평화 지향의 사상은 마치 한 샘에서 솟아나는 물처럼 구별할 수 없다. 그 무서운 가난과 고뇌 속에서 어쩌면 이렇게도 모든 사람의 가슴을 가라앉힐 수 있는 평화경이 창조될 수 있었을까? 신비로운 일이다. 베토벤의 (전원 교향곡)이나(봄의 소나타)를 들을 때도 나는 이러한 신비를 느낀다. 둘 다 베토벤이 귀머거리가 된 이후의 작품인 것이다. 슬픔은, 아니 슬픔이야말로 참으로 인간으로 하여금 그 영혼을 정화하고 높고 맑은 세계를 창조하는 힘이 아닐까? 예수 자신이 한없는 비애의 사람이 아니었더라면, 인류의 가슴을 덮은 검은 하늘을 어떻게 개게 할 수 있을 것인가? 공자도 석가도 다 그런 분들이다. 나의 막내 아들은 지난봄에 국민 학교 1학년이 되었어야 할 나이다. 벌써 2년 전의 일이다. 그 때 이 아이는 '신장종양'이라고 하는 매우 드문 아동병에 걸렸다. 그러나, 곧 수술을 받고 지금까지 건강하게 자라 왔다. 그런데 오늘. 그 병이 재발한 것을 비로소 알았고, 오늘의 의학으로는 치료의 방법이 없다는 참으로 무서운 서고를 받은 것이다. 아이의 손목을 하나씩 잡고 병원 문을 나서는 우리 내외는, 천 근 쇳덩이가 가슴을 눌러 숨을 쉬기도 어려웠다.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것은, 시골서 보지 못한 높은 건물과 자동차의 홍수, 사람의 물결들이 신기하고 재미있는 모양이었다. 그에게는 티끌만한 근심도 없었다. 나는 그의 얼굴을 바로 보지 못했다. 자기의 마지막 날을 알지 못한다는 것은 사람을 맹목으로 만들기 쉬울 것이다. 그러나 또한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인가. "아빠, 구두." 그는 구두 가게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구두가 신고 싶었었나 보다. 우리 내외는 그가 가리킨 가게로 들어가, 낡은 운동화를 벗기고 가죽신 한 켤레를 사서 신겼다. 어린것의 두 눈은 천하라도 얻은 듯한 기쁨으로 빛났다. 우리는 그의 기쁜 얼굴을 차마 슬픈 눈으로 볼 수가 없어서 마주 보고 웃어 주었다. 오늘이 그에게는 참으로 기쁜 날이요, 우리에게는 질식할 듯한 암담한 날임을 누가 알랴. 아버지가 돌아가시는 것을 '천붕'이라고 한다. 하늘이 무너진다는 뜻이다. 나는 아버지의 상을 당하고서야 비로소 이 표현이 옳음을 알았다. 그러나 오늘, 의사의 선고를 듣고, 천 길 낭떠러지 밑으로 두 아이를 잃은 일이 있다. 자식의 어버이 생각하는 마음이 어버이의 자식 생각하는 마음에 까마아득히 못 미침을 이제 세 번째 체험한다. 2년 전 어느 날이었다. 수술 경과가 좋아서 아이가 밖으로 놀러 나갈 때, 나는 그의 손목을 쥐고, "넌 커서 의사가 되는 게 좋을 것 같다. 의사가 너의 병을 고쳐 준 것처럼, 너도 다른 사람의 나쁜 병을 고쳐 줄 수 있게 말이다." 하고 말했었다. 그른 고개를 끄덕이었고, 그 후부터는 누구에게든지 의사가 되겠다고 말해 왔었다. 이 밤을 나는 눈을 못 붙이고 죽음을 생각한다. 그리고, 인간의 모든 고귀한 것은 한결같이 슬픔 속에서 생산된다는 생각을 하면서, 더없이 총명해 보이는 내 아들의 잠든 얼굴을 안타까이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서, 인생은 기쁨만도 슬픈만도 아니라는 그리고 슬픔은 인간의 영혼을 정화시키고 훌륭한 가치를 창조한다는 나의 신념을 지그시 다지고 있는 것이다. '신이여, 거듭하는 슬픔으로 나를 태워 나의 영혼을 정화하소서.'
사랑할 땐 별이 되고 - 이해인 - 기도 시 다시 시작하는 기쁨으로 첫눈, 첫사랑, 첫걸음 첫약속, 첫여행, 첫무대 처음의 것은 늘 신선하고 아름답습니다 순결한 설레임의 기쁨이 숨어 있습니다 새해 첫날 첫기도가 아름답듯이 우리의 모든 아침은 초인종을 누르며 새로이 찾아오는 고운 첫손님 학교로 향하는 아이들의 나팔꽃 같은 얼굴에도 사랑의 무거운 책임을 지고 현관문을 나서는 아버지의 기침소리에도 가족들의 신발을 가지런히 하는 어머니의 겸허한 이마에도 아침은 환히 빛나고 있습니다 새아침의 사람이 되기 위하여 밤새 괴로움의 눈물 흘렸던 기다림의 그 시간들도 축복해 주십시오, 주님 `듣는 것은 씨 뿌리는 것 실천하는 것은 열매 맺는 것`이라는 성 아오디스딩의 말씀을 기억하며 우리가 너무 많이 들어서 겉돌기만 했던 좋은 말들 이제는 삶 속에 뿌리내리고 열매 맺는 은총의 한 해가 되게 하십시오 사랑과 용서와 기도의 일을 조금씩 미루는 동안 세월은 저만치 비켜 가고 어느새 죽음이 성큼 다가옴을 항시 기억하게 하십시오 게으름과 타성의 늪에 빠질 때마다 한없이 뜨겁고 순수했던 우리의 첫열정을 새롭히며 다시 시작하는 기쁨으로 다시 살게 하십시오 보고 듣고 말하는 일 정을 나누는 일에도 정성이 부족하여 외로움의 병을 앓고 있는 우리 가까운 가족끼리도 낯설게 느껴질 만큼 바쁘게 쫓기며 살아가는 우리 잘못해서 부끄러운 일 많더라도 어둠 속으로 들어가지 말고 밝은 태양 속에 바로 설 수 있는 용기를 주십시오 길 위의 푸른 신호등처럼 희망이 우리를 손짓하고 성당의 종소리처럼 사랑이 우리를 재촉하는 새해 아침 아침의 사람으로 먼길을 가야 할 우리 모두 다시 시작하는 기쁨으로 다시 살게 하십시오
Board 삶 속 글 2022.11.09 風文 R 6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