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대표수필 - 김동리 외 9명 "이상편" 이상(1910~1937) 시인. 소설가. 본명은 김해경. 서울 출생. 경성 공고 졸업. 총독부 내무부 건축과 근무, 특이한 소재와 특이한 기법, 특이한 행적으로 이채를 띠었던 이상은 수필에도 뛰어났다. 독특한 안목과 감성으로 사물을 바라본 그의 수필은 실험적인 시나 황당한 소설보다 훨씬 짙은 감흥을 불러일으킨다. 권태 5 원숭이가 사람의 흉내를 내이는 것이 내 눈에는 참 밉다. 어쩌자고 여기 아이들이 내 흉내를 내이는 것일까? 귀여운 촌동들을 원숭이를 만들어서는 안 된다. 나는 다시 개울가로 가 본다. 썩은 물 늘어진 대싸리 외에 아무것도 없다. 그러나 나는 거기 앉아서 이번에는 그 썩은 중의 웅뎅이 속을 들여다본다. 순간 나는 진기한 현상을 목도한다. 무수한 오점이 방향을 정돈해가면서 움직이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생물임에 틀림없다. 송사리 떼임에 틀림없다. 이 부패한 소택 속에 이런 앙증스러운 어족이 서식하리라고는 나는 참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요리 몰리고 조리 몰리고 역시 먹을 것을 찾음이리라. 무엇을 먹고 사누. 벌러지를 먹겠지. 송사리보다도 더 작은 벌러지라는 것이 있을까. 잠시를 가만 있지 않는다. 저무도록 움직인다. 대략 같은 동기와 같은 모양으로들 그러는 것 같다. 동기! 역시 송사리의 세계에도 시급한 목적이 있는 모양이다. 차츰차츰 하류로 향하여 가고 있는 것이 확실하다. 하류로 하류로! 5분 후에는 그들의 모양이 보이지 않을 만치 그들은 멀리 하류로 내려갔다. 그리고 웅뎅이는, 아까와 같이 도로 썩은 물의 웅뎅이로 조용해지고 말았다. 나는 그 자리에서 일어나서 풀밭으로 가 보기로 한다. 풀밭에는 암소 한 마리가 있다. 고 웅뎅이 속에 고런 맹랑한 현상이 잠복해 있을 수 있다니.....하고 나는 적잖이 흥분했다. 그 현상도 소낙비처럼 지나가고 말았으니 잊어버리고 그만두는 수밖에. 소의 뿔은 벌써 소의 무기는 아니다. 소의 뿔은 오직 안경의 재료일 따름이다. 소는 사람에게 얻어맞기로 위주니까 소에게는 무기가 필요없다. 소의 뿔은 오직 동물 학자를 위한 표지이다. 야우 시대에는 이것으로 적을 돌격한 일도 있습니다. 하는 마치 폐병의 가슴에 달린 훈장처럼 그 추억성이 애상적이다. 암소의 뿔은 수소의 그것보다도 더 한층 겸허하다. 이 애상적인 뿔이 나를 받을 리 없으니 나는 마음놓고 그 곁 풀밭에 가 누워도 좋다. 나는 누워서 우선 소를 본다. 소는 잠시 반추를 그치고 나를 응시한다. '이 사람의 얼굴이 왜 이리 창백하냐. 아마 병인인가 보다. 내 생명에 위해를 가하려는 거나 아닌지 나는 조심해야 되지.' 이렇게 소는 속으로 나를 심리하였으리라. 그러나 5분 후에는 다시 반추를 계속하였다. 소보다도 내가 마음을 놓는다. 소는 식욕의 즐거움조차를 냉대할 수 있는 지상 최대의 권태자다. 얼마나 권태에 지질렀길래 이미 위에 들어간 식물을 다시 게워 그 시금털털한 반소화물의 미각을 역설적으로 향락하는 체 해 보임이리오? 소의 체구가 크면 클수록 그의 권태도 크고 슬프다. 나는 소 앞에 누워 내 세균같이 사소한 고독을 겸손해하면서 나도 사색의 반추는 가능할는지 몰래 좀 생각해 본다. 6 길 복판에서 6,7인의 아이들이 놀고 있다. 적발동부의 반나체이다. 그들의 혼탁한 안색, 흘린 콧물, 둘른 베, 두렝이 벗은 웃통만을 가지고는 그들의 성별조차 거의 분간할 수 없다. 그러나 그들은 여아가 아니면 남아요, 남아가 아니면 여아인 결국에는 귀여운 5, 6세 내지 7, 8세의 '아이들'임에도 틀림없다. 이 아이들이 여기 길 한복판을 선택하여 유희하고 있다. 돌멩이를 주워 온다. 여기는 사금파리도 벽돌 조각도 없다. 이 빠진 그릇을 여기 사람들은 버리지 않는다. 그리고는 풀을 뜯어 온다. 풀--이처럼 평범한 것이 또 있을까. 그들에게 있어서는 초록빛의 물건이란 어떤 것이고간에 다시없이 심심한 것이다. 그러나 하는 수 없다. 곡식을 뜯는 것도 금제니까 풀밖에 없다. 돌멩이로 풀을 짓찧는다. 푸르스레한 물이 돌에 가 염색된다. 그러면 그 돌과 그 풀은 팽개치고 또 다른 풀과 돌멩이를 가져다가 똑같은 짓을 반복한다. 한 10분 동안이나 아무 말이 없이 잠자코 이렇게 놀아 본다. 10분만이면 권태가 온다. 풀도 싱겁고 돌도 싱겁다. 그러면 그 외에 무엇이 있나? 없다. 그들은 일제히 일어선다. 질서도 없고 충동의 재료도 없다. 다만 그저 앉았기 싫으니까 이번에는 일어서 보았을 뿐이다. 일어서서 두 팔을 높이 하늘을 향하여 쳐든다. 그리고 비명에 가까운 소리를 질러 본다. 그러더니 그냥 그 자리에서들 겅충겅충 뛴다. 그러면서 그 비명을 겸한다. 나는 이 광경을 보고 그만 눈물이 났다. 여북하면 저렇게 놀까. 이들은 놀 줄조차 모른다. 어버이들은 너무 가난해서 이들 귀여운 애기들에게 장난감을 사다 줄 수가 없었던 것이다. 이 하늘을 향하여 두 팔을 뻗치고 그리고 소리를 지르면서 뛰는 그들의 유희가 내 눈에는 암만 해도 유희같이 생각되지 않는다. 하늘은 왜 저렇게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푸르냐, 산은, 벌판은 왜 저렇게 어제도 오늘도 푸르냐는 조물주에게 대한 저주의 비명이 아니고 무엇이랴. 아이들은 짖을 줄조차 모르는 개들과 놀 수는 없다. 그렇다고 모이 찾느라고 눈이 벌건 닭들과 놀 수도 없다. 아버지도 어머니도 너무나 바쁘다. 언니 오빠조차 바쁘다. 역시 아이들은 아이들끼리 노는 수밖에 없다. 그런데 대체 무엇을 가지고 어떻게 놀아야 하나, 그들에게는, 장난감 하나 없는 그들에게는 영영 엄두가 나서지를 않는 것이다. 그들은 위선 싱거워서 그 짓을 그만둔다. 그들은 도로 나란히 앉는다. 앉아서 소리가 없다. 무엇을 하나. 무슨 종류의 유희인지 유희는 유희인 모양인데--이 권태의 왜소인간들은 또 무슨 기상천외의 유희를 발명했나. 5분 후에 그들은 비키면서 하나씩 둘씩 일어선다. 제각각 대변을 한 무데기씩 누어 놓았다. 아--이것도 역시 그들의 유희였다. 속수무책의 그들 최후의 창작 유희였다. 그러나 그 중 한 아이가 영 일어나지를 않는다. 그는 대변이 나오지 않는다. 그럼 그는 이번 유희의 못난 낙오자임에 틀림없다. 분명히 다른 아이들 눈에 조소의 빛이 보인다. 아--조물주여, 이들을 위하여 풍경과 완구를 주소서. 7 날이 어두웠다. 해저와 같은 밤이 오는 것이다. 나는 자못 이상하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나는 배가 고픈 모양이다. 이것이 정말이라면 그럼 나는 어째서 배가 고픈가. 무엇을 했다고 배가 고픈가. 자기 부패 작용이나 하고 있는 웅뎅이 속을 실로 송사리 떼가 쏘다니고 있더라. 그럼 내 장부 속으로도 나로서 자각할 수 없는 송사리 떼가 준동하고 있나 보다. 아무렇든 나는 밥을 아니 먹을 수는 없다. 밥상에는 마늘장아찌와 날된장과 풋고추 조림이 관성의 법칙처럼 놓여 있다. 그러나 먹을 때마다 이 음식이 내 입에 내 혀에 다르다. 그러나 나는 그 까닭을 설명할 수 없다. 마당에서 밥을 먹으면 머리 위에서 그 무수한 별들이 야단이다. 저것은 또 어쩌라는 것인가. 내게는 별이 천문학의 대상이 될 수 없다. 그렇다고 시상의 대상도 아니다. 그것은 다만 향기도 촉감도 없는 절대 권태의 도달 할 수 없는 영원한 피안이다. 별조차가 이렇게 싱겁다. 저녁을 마치고 밖으로 나와 보면 집집에서는 모깃불의 연기가 한창이다. 그들은 마당에서 멍석을 펴고 잔다. 별을 쳐다보면서 잔다. 그러나 그들은 벌을 보지 않는다. 그 증거로는 그들은 멍석에 눕자마자 눈을 감는다. 그리고는 눈을 감자마자 쿨쿨 잠이 든다. 별은 그들과 관계없다. 나는 소화를 촉진시키느라고 길을 왔다갔다한다. 돌칠 적마다 멍석 위에 누운 사람의 수가 늘어 간다. 이것이 시체와 무엇이 다를까? 먹고 잘 줄 아는 시체......나는 이런 실례로운 생각을 정지해야만 되겠다. 그리고 나도 가서 자야겠다. 방에 돌아와 나는 나를 살펴본다. 모든 것에서 절연된 지금의 내 생활......자살의 단서조차 찾을 길이 없는 지금의 내 생활은 과연 권태의 극 권태 그것이다. 그렇건만 내일이라는 것이 있다. 다시는 날이 새이지 않는 것 같기도 한 밤 저 쪽에 또 내일이라는 놈이 한 개 버티고 서 있다. 마치 흉맹한 형리처럼--나는 그 형리를 피할 수 없다. 오늘이 되어 버린 내일 속에서 또 나는 질식할 만치 심심해야 되고 기막힐 만치 답답해해야 된다. 그럼 오늘 하루를 나는 어떻게 지냈던가. 이런 것은 생각할 필요가 없으리라. 그냥 자자! 자다가 불행히--아니 다행히 또 깨거든 최 서방의 조카와 장기나 한 판 두자. 웅뎅이에 가서 송사리를 볼 수도 있고--몇 가지 안 남은 기억을 소처럼 반추하면서 끝없는 나태를 즐기는 방법도 있지 않으냐. 불나비가 달려들어 불을 끈다. 불나비는 죽었든지 화상을 입었으리라. 그러나 불나비라는 놈은 사는 방법을 아는 놈이다. 불을 보면 뛰어들 줄도 알고......평상에 불을 초조히 찾아다닐 줄도 아는 정열의 생물이니 말이다. 그러나 여기 어디 불을 찾으려는 정열이 있으며 뛰어들 불이 있느냐. 없다. 나에게는 아무것도 없고 아무것도 없는 내 눈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암흑은 암흑인 이상 이 좁은 방 것이나 우주에 꽉 찬 것이나 분량상 차이가 없으리라. 나는 이 대소 없는 암흑 가운데 누워서 숨쉴 것도 어루만질 것도 또 욕심나는 것도 아무것도 없다. 다만 어디까지 가야 끝이 날지 모르는 내일 그것이 또 창 밖에 등대하고 있는 것을 느끼면서 오들오들 떨고 있을 뿐이다.
내 마음이 강해야 내 소원도 이루어진다 - 잭 캔필드, 마크 빅터 한센 4. 가족들과의 더 좋은 관계를 위하여 최상의 결과를 요청하라 - 조 그리피스의 '사업계 일화 모음집'에서 전직 국무장관인 헨리 키신저는 분석작업을 준비할 조수를 고용했다. 그 조수는 보고서를 위해서 밤낮을 가리지 않고 일했다. 하지만 그것을 완성해서 제출한 지 한 시간도 못되어, 재작성하라는 쪽지가 붙어 보고서가 되돌아왔다. 조수는 밤을 세워 그것을 다시 작성했지만 보고서는 또 되돌아왔다. 그것을 세 번째 새로 만들고 나서 조수는 키신저에게 말했다. "저는 정말로 최선을 다했습니다." 그러자 키신저가 말을 받았다. "그렇다면 이제야말로 그것을 읽어보도록 하지." 결과에 대해서 분명하게 설명하라 - '이 이야기, 저 이야기'에서 샘을 제외한 회사의 모든 사람이 고용자들을 위한 새로운 연금제도에 대해서 찬성했다. 그것은 회사가 나머지의 모든 비용을 부담하는 획기적인 것이었다. 하지만 불행히도 그 계획은 100%의 찬성을 얻지 않으면 실현될 수 없었다. 샘의 상사와 동료들은 그를 구슬러보기도 하고, 간곡하게 부탁하기도 했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마침내 사장이 샘을 사무실로 불러서 말했다. "샘, 여기에 새로운 연금제도에 대한 계획서가 있고 또 여기에는 펜이 있네. 만일 사인하지 않는다면 미안하지만 당장 자넬 해고할 수밖에 없군." 그러자 샘은 즉시 서명했다. 이에 사장이 다시 물었다. "그럼, 도대체 왜 그전에는 찬성하지 않았는가?" "글쎄요, 지금까지는 누구도 이 계획에 대해서 이렇게 분명하게 설명해주지 않았거든요." 외교적으로 요청하라 - '이 이야기, 저 이야기'에서 남북전쟁이 끝났을 때, 남부연방의 수뇌인 제퍼슨 데이비스를 잡아서 교수형에 처하라는 여론이 빗발쳤다. 대통령인 아브라함 링컨은 가능한 빠른 시일 내에 국가가 입은 손실을 복구해야 했기 때문에 이러한 요구를 받아들일 수 없었지만 정치적인 입장 때문에 나서서 그렇게 말할 수도 없는 형편이었다. 마침내 셔먼 장군은 대통령을 만나서 제퍼슨을 어떻게 하기를 원하냐고 물어보았다. 링컨이 대답했다. "그의 문제에 대한 나의 생각을 말해보기로 합시다. 옛날 상가몬이라는 나라에 규칙의 철저한 준수와 절대금주를 주장하는 한 늙은 수도사가 있었다오. 찌는 듯한 더위 속을 여행하던 어느날, 그는 한 친구의 집으로 가서 레몬에이드를 만 들어달라고 요청했소. 사실은 이미 그 속에 약간의 알콜이 섞여 있었지만, 그 친구는 수도사에게 더위로 지칠 대로 지친 그를 기운나게 해줄 약간의 술기운 을 혹시 싫어하지 않느냐고 물어보았지오. 그런데 그 수도사는 괜찮다고 대답했소. 왜냐하면 원칙적으로는 음주를 반대하지만, 자신이 모르게 한 일이라면 그렇게 나쁘지는 않을 것이라는 뜻이었소." 대통령은 말을 이었다. "자, 장군. 나는 분명히 제퍼슨을 놓아주는 것을 반대하오. 하지만 당신이 내가 관계하지 않은 것처럼 그를 풀어줄 수 있다면, 그것은 그다지 나에게 피해를 주지 않을 것이오."
Board 추천글 2022.10.15 風文 R 1479
금의야행(錦衣夜行) 錦:비단 금 衣:옷 의. 夜:밤 야. 行:다닐.행할 행. [동의어] 의금야행(衣錦夜行). 수의야행(繡衣夜行). [반의어] 금의주행(錦衣晝行). [출전]《漢書》〈項籍傳〉.《史記》〈項羽本紀〉 비단옷을 입고 밤길을 간다는 뜻. 곧 ① 아무 보람없는 행동의 비유. ② 입신 출세(立身出世)하여 고향으로 돌아가지 않음의 비유. 유방(劉邦)에 이어 진(秦)나라의 도읍 함양(咸陽)에 입성한 항우(項羽)는 유방과는 대조적인 행동을 취했다. 우선 유방이 살려 둔 3세 황제 자영(子?)을 죽여 버렸다(B.C. 206). 또 아방궁(阿房宮)에 불을 지르고 석 달 동안 불타는 그 불을 안주삼아 미녀들을 끼고 승리를 자축했다. 그리고 시황제(始皇帝)의 무덤도 파헤쳤다. 유방이 창고에 봉인해 놓은 엄청난 금은 보화(金銀寶貨)도 몽땅 차지했다. 모처럼 제왕(帝王)의 길로 들어선 항우가 이렇듯 무모하게 스스로 그 발판을 무너뜨리려 하자 모신(謀臣) 범증(范增)이 극구 간했다. 그러나 항우는 듣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오랫동안 누벼온 싸움터를 벗어나 많은 재보와 미녀를 거두어 고향인 강동(江東)으로 돌아가고 싶어 했다. 그러자 한생(韓生)이라는 사람이 간했다. “관중(關中:함양을 중심으로 하는 분지)은 사방이 산과 강으로 둘러싸인 요충지인데다 땅도 비옥하옵니다. 하오니 이곳에 도읍을 정하시고 천하를 호령하시오소서.” 그러나 항우의 눈에 비친 함양은 황량한 폐허일 뿐이었다. 그보다 하루바삐 고향으로 돌아가 성공한 자신을 과시하고 싶었다. 항우는 동쪽 고향 하늘을 바라보며 말했다. “부귀한 몸이 되어 고향으로 돌아가지 않는 것은 ‘비단옷을 입고 밤길을 가는 것[錦衣夜行]’과 같아 누가 알아줄 것인가…….” 항우에게 함양에 정착할 뜻이 없다는 것을 안 한생은 항우 앞을 물러나자 이렇게 말했다. “초(楚)나라 사람은 ‘원숭이[沐?]에게 옷을 입히고 갓을 씌워 놓은 것[沐?而冠]처럼 지혜가 없다’고 하더니 과연 그 말대로군.” 이 말을 전해 들은 항우는 크게 노하여 당장 한생을 삶아 죽였다고 한다. [주] 이 ‘금의야행’에서 ‘금의주행(錦衣晝行:비단옷을 입고 낮길을 간다)’ ‘금의환향(錦衣還鄕:비단옷을 입고-입신 출세해서-고향으로 돌아간다)’이라는 말이 나왔음.
Board 고사성어 2022.10.15 風文 R 855
선입견 나는 말에 잘 속아 넘어가는 편이다. 가게 채소 칸에 ‘밤고구마’라 적혀 있으면 분명 당근인데도 ‘햐, 밤고구마가 발그스레한 게 맛있어 보이는군’ 하고 속는다. 어제는 아들이 가으내 해바라기씨를 말려 투명 비닐봉지에 넣어 왔는데 하필 겉에 ‘취나물말림’이라는 스티커가 붙은 걸 보고, ‘말린 취나물이 씨앗처럼 생겼군’ 하며 얼토당토않은 추측을 했더랬다. 말에 속아 판단을 그르치는 것보다 나를 더 좌우하는 건 선입견이다. 선입견은 머리보다는 몸의 기억에 가깝다. 아버지는 각자가 경험한 아버지다. 같은 쥐래도 들쥐는 등골이 오싹해지고 다람쥐는 웃음이 나온다. 바퀴벌레는 4억년의 끈질긴 생명력으로 과학자들에겐 관심의 대상일지 모르지만 우리에겐 ‘해충’이다. 기독교도들은 기도 중에 (부처가 아닌) 예수를 만나고, 불교도들은 (예수가 아닌) 부처를 만난다. 깊고 깊은 심층에도 선입견이 작용하나 보다. 구름이 사라지면 달이 선명해지듯이, 선입견을 없애면 ‘있는 그대로’ 볼 수 있다고 한다. 하지만 우리는 선입견을 없앨 수 없다. 우리는 언제나 선입견을 가지고 어떤 것을 이해한다(가다머). 선입견은 인간이 세계를 알아가는 방법이다. 개인의 삶의 역사가 쌓여 선입견을 만들고, 이 선입견을 바탕으로 현재를 이해한다. 사회 전체가 공통으로 쌓아올린 선입견을 ‘상식’이라고도 하고 ‘공통기억’, ‘공통감각’, ‘역사’라고도 한다. 투표는 우리의 선입견에 대한 관찰보고서다. 진정한 정치의식은 자신의 선입견을 자각하고 재음미하는 데에서 길러진다. 나는 이 땅의 뭇 생명들과 어떤 삶의 인연을 맺어왔던가를. 부동층이 부럽다 확신이 안 선다. 사무실 온풍기 불을 껐는지, 안 껐는지. 이미 버스는 탔고, 돌아갔다 오면 약속 시간엔 늦는다. 끈 거 같기도 하다. 종일 틀어놔도 별 탈 없었고. 하지만 ‘만에 하나’ 불이라도 나면 어쩌나 하는 마음에 버스에서 내린다. 돌아가지 않으면 내내 걱정일 테고, 갔는데 불이 꺼져 있으면 허탈하겠지. 되돌아간 보람이라도 있으려면, 차라리 불이 켜져 있기를! 선거는 사람들 마음에 심리적 확고함이라는 굳은살이 자라게 한다. 일종의 최면 상태이다. 평소보다 접하는 정보는 더 편향적이고, 입에서 나오는 말도 확신에 차 있다. 나는 언제나 정의와 진리의 편. 무너진 정의를 세우고 시대정신을 구현하려면 ‘그’가 되어야 하고, ‘그놈’은 반드시 떨어뜨려야 한다. 지지 후보와 정서적 일체감과 사상적 동질감을 느낀다. 확고함은 간절함과 친구 사이. 고약하게도 간절할수록 불안감도 커진다. 혹시 ‘그놈’이 당선되면 세상은 엉망진창, 뒷걸음질하겠지. 투표를 하면서 ‘안 되면 어떡하지?’보다 ‘내가 틀렸을지도 몰라’라는 말을 되뇐다. 우리가 틀렸을지도 모른다고 되뇌다 보면 정치를 둘러싼 말이 쪽수나 당락의 문제로 귀결되지 않게 만든다. 어느 누구도 이 세계를 명징하게 설명하거나 해결할 수 없다. 나는 정의의 편이 아닐 수 있다. 그런 점에서 ‘부동층’이 부럽다. 흔들리는, 한곳에 정박하지 않는, 공중에 둥둥 떠다니는, 오늘과 내일의 생각이 같지 않은 사람이 많아질수록 정치는 생활현실에 더 가까워지고, 사회는 더 두툼해지리라. 분하게도 나는 부동층이 되기엔 이미 머리가 굳었다. 김진해 | 한겨레말글연구소 연구위원·경희대 교수
무엇을 어떻게 쓸까 - 이오덕 1부 산문을 어떻게 쓸까 일기글 쓰기 - 일기글 어떻게 쓸까 (2/4) 고사리 꺾자 동내 울산을 넘어가자 (66쪽. 이것은 충남 공주 사람이 적은 것인데, 제목은 동래 울산 이라고 되어있다) 고사리 대사리 꺾세 좃침 댓침 꺾세 (74쪽. 충남 부여 사람이 적었는데, 제목에는 잡이라 되어 있다. [고사리 대사리 꺾자] 거춘 대춘 꺾자 광주 무등산에 가서 고사리 대사리 꺾자 제주 한라산에 가서 고사리 대사리 꺾자 (123쪽. 전북 고창군 대산면 사람이 적었다. 제목이 고살 이고, 끝에 처녀들이 명절 때 모여 놀며 라고 써 놓았다.) 고사리 캐로 간다고 핑계핑게 하드니 총각낭군 무덤에 삼우제 지내러 간다네 (328쪽. 경남 진해 사람이 적었는데, 제목이 속요 잡 이라 되어 있다) 이렇게 4편 중에 3편이 꺾자 로 적혀 있다. ( 캔다 는 말이 한 군데 나오는데, 이 말에 대해서는 다른 자리에서 이야기하고 싶다.) 역시 고사리를 끊는다는 말은 충청도고 경상도고 그 어디에도 없는 것이다. 그래도 또 찾아 보았다. 이번에는 정신문화연구원에서 펴낸 바로 초등 학교 6학년 음악책에 나온 민요의 원형임에 틀림없는 노래가 적혀 있었다. 그런데 여기는 뜻밖에도 껑자 로 되어 있다. 제목만은 고사리 꺾자 로 썼다. 노래 앞에 이 노래를 많은 사람들이 어떻게 부르면서 노는가를 설명해 놓았는데, 다음에 옮겨 놓은 노래말은 첫머리 것으로 이것은 전체의 4분의 1밖에 안 되지만 고사리 대사리 껑자. 만부 대사리 껑자 란 말은 끝까지 되풀이되어 있다. 설소리 고사리 대사리 껑자 만부 대사리 껑자 유자꽁꽁 재미나 놀자 아장장장 벌이어 받는 소리 고사리 대사리 껑자 만부 대사리 껑자 유자꽁꽁 재미나 놀자 아장장장 벌이어 설소리 껑자 껑자 고사리 대사리 껑자 수양산 대사리 껑거다가 우리 아배 반찬하세 받는 소리 고사리 대사리 껑자 만부 대사리 껑자 유자꽁꽁 재미나 놀자 아장장장 벌이어 껑자 껑자 고사리 대사리 껑자 여기서 의문이 다 풀렸다. 전북 고창 사람들은 옛날부터 고사리를 껑는다 (이것은 꺾는다 고 써도 같은 소리가 된다) 껑자 라고 말하고 노래도 그렇게 불렀다. 그런데 이것이 교과서로 옮겨지는 과정에서 껑자 가 끊자 로 되어버렸다. 실수로 그렇게 된 것이 아니고 일부러 고친 것이 분명하다. 껑자 란 표준말이 없으니 껑자 에 가까운 끊자 로 하자고. 내가 보기로는 악보를 만든 사람이 이렇게 고치지는 않았을 것 같고, 교과서를 만드는 실무자들이 이렇게 한 것이라 짐작된다. 이것은 국정 교과서가 우리말을 일부러 틀리게 고쳐 적어서 아이들에게 가르치게 하는 하나의 보기가 된다. 최근 전남 고흥군에 있는 한 선생님 얘기를 들으니 호남지방에서는 어디를 가도 고사리 껑자 라고 말한다 했다. 그래 이 문제는 다시 더 알아 볼 필요가 없게 되었다. 자, 그러면 이번에는 또 시험문제를 하나 내어 보기로 하자. 다음 네가지 말 가운데서 어느 것이 바른 우리말인가 표를하라. 고사리를 1) 껑는다. 껑자. ( ) 2) 끊는다. 끊자. ( ) 3) 꺾는다. 꺾자. ( ) 4) 캔다. 캐자. ( ) 어느것이 표준말이냐고 묻는 것이 아니라 바른 우리말이냐고 물었으니 3)과 함께 1)에도 표를 해야 맞다. 사투리도 틀리는 말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데 끊는다 는 아주 틀린 말이다. 캔다 도 더러 쓰기는 하지만 맞지 않는 말이다. 고사리는 꺾지, 캐지는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실제로 이런 시험문제가 나왔다고 할 때 3)과 1) 두 군데 다 표를 하는 사람은 말할 것도 없고, 3)에만 표를 하는 사람도 이 문제에서 맞는 점수를 얻지 못할 것이다. 교과서에 고사리 끊자 로 되어 있으니 교과서대로 채점을 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럼 어떻게 하나? 길은 우선 두 가지다. 점수를 따기 위해서 사실이고 진실이고는 다 덮어두고 교과서에서 배운 대로 외운 대로 2)에 표를 하든지, 아니면 자기가 옳다고 믿는대로 (그따위 점수 같은 것에 붙잡혀 있지 말고) 당당하게 3)과 1)에다 표를 하든지다. 나로서는 뒤의 길을 가라고 말하고 싶다. 그런데 여기 또 한 가지 길이 있다. 자기가 믿는 것은 마음속에서만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우선 점수를 따기 위해, 이것이 잘못된 것인줄 알면서도 2)에다가 표를 하는 것이다. 실제로 많은 학생들이 이 길을 가고 있지 않은가 싶은데, 나로서는 찬성하고 싶지는 않지만 어른들이 만들어 놓은 사회의 틀이 그렇게 되어 있으니 이런 사람들을 모조리 말릴 생각은 없다. 마음속에 지닌 그 믿음을 잃지만 않는다면 말이다. 말과 진리를 책으로 글로서만 배우고 찾으려 할 때 우리는 누구든지 헤어날 수 없는 깊은 수렁에 빠지고 만다고 사실을 깊이 생각할 필요가 있다.
사랑할 땐 별이 되고 - 이해인 혼자만의 시간 - 스테파노 선생님께 나뭇잎 하나가 벌레 먹어 혈관이 다 보이는 나뭇잎 하나가 물속이 얼마나 깊은지 들여다보이려고 저 혼자 물위에 내려앉는다 나뭇잎 하나를 이렇게 오도마니 혼자서 오래오래 바라볼 시간을 갖게 된 것이 도대체 얼마 만인가 <외롭고, 높고, 쓸쓸한> 이란 제목의 시집을 펴낸 바 있는 안도현 시인의 `나뭇잎 하나가` 란 이 시를 공감하며 읽어 보는 조용한 주일 오후입니다. 스테파노 선생님, 아네모네와 여러 고운 꽃우표가 붙어 있는 정성스런 편지는 반갑게 받았습니다. 베토벤의 `전원교향악` 을 좋아해 필라델피아 중심가에 개업하는 새 식당 이름도 `전원` 이라고 하셨다구요? 하루 종일 고전음악이 흐르는 그곳에서 손님들이 잠시나마 기쁘게 쉼의 시간을 가질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만남의 인사도 으레 바쁘냐고 먼저 물어볼 만큼 늘 일 속에 파묻혀 사는 바쁜 시대의 우리들은 일부러 큰맘 먹고 선행하지 않으면 자기 혼자만의 시간을 갖고 기도하거나 조용한 명상 안에서 자신의 내면을 깊이 들여다보는, 조금은 쓸쓸하지만 고즈넉한 기쁨이 고여 오는 시간을 갖기가 어려운 듯합니다. 신과 자연과 인간 그리고 모든 사물에 대해 좀더 깊이 생각하고 오래 바라볼 틈을 갖지 못하는 것이지요. 한 가지 일이 끝났다 싶으면 또 해야 할 일이 생기고, 거듭되는 만남의 약속을 위해 쉴새없이 계획표를 짜야 하는 일도 때로는 우리를 힘들고 피곤하게 만듭니다. 이번 달의 잡지를 아직 다 읽지도 않았는데 어느새 또 다음달 잡지가 도착하는 것을 보면서 새삼 시간의 빠름을 절감하기도 합니다. 위의 시를 읽으면서, 저도 요즘은 그리 대단한 일을 하는 것도 아니건만 맡은 일들과 사람들 사이에서 분명하게 보내느라 차분히 혼자만의 시간을 갖고 재충전하지 못한 저 자신의 모습을 떠올리게 되었습니다. 저의 내면이 침묵과 고독의 전류로 충전되지 않으니 사소한 일에서도 실수가 뒤따르고, 다른 이들과의 관계도 원활하지 못하며 삐걱이고 있음을 감지하게 됩니다. 그래서 오늘처럼 이렇게 빈방에서 창문을 열어제친 채 멍하니 하늘을 바라보고, 산을 바라보고, 바람소리를 들을 수 있음이 얼마나 흡족하고 소중한지요. 새 한마리가 나뭇가지 사이를 부지런히 오르내리다 어느 순간은 움직임을 멈추고 가만히 앉아서 쉬고 있는 모습을 오래오래 바라보는 것 또한 기쁜 일입니다. 다른 날은 몰라도 이제 주일만큼은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혼자만의 여유를 가져야겠다고 저도 새롭게 결심해 봅니다. 책을 읽거나 글을 쓰는 일도 피하고, 산책을 하든 음악을 듣든, 혼자만의 시간과 공간 안에서 마음을 비우고 가볍게 만드는 연습을 꾸준히 함으로써 여럿이 모여 사는 공동체 생활도 더 잘해낼 수 있으리라 확신합니다. 최근에 가장 감명 깊게 읽은 책 중의 하나인 말로 모건(Marlo Morgan)의 <무탄트>라는 책에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평생을 사는 동안 우리가 누구이며 우리의 영원한 본질은 무엇인가를 발견하는 데 우리가 실제로 소비하는 시간은 너무나 적다` 라는 이 말은 외적인 일들에 마음이 매여 정신없이 살아가는 오늘의 우리 모습을 되돌아보게 하는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또한 촛불을 켜고 케이크를 자르며 즐기는 생일 파티에 대해 설명하는 이 책의 저자에게 반문하던 호주 원주민들의 말도 잊혀지지 않습니다. `나이를 먹는 게 무슨 특별한 일이라도 된다는 말인가요? 나이를 먹는 데는 어떤 노력도 들지 않아요. 우리는 나아지는 걸 축하합니다. 지난해보다 올해 더 훌륭하고 현명한 사람이 되었으면, 그걸 축하하는 겁니다. 하지만 그건 자신만이 알수 있으니까, 잔치를 열어야 할 때가 언제인지를 말할 수 있는 사람은 바로 잔치의 주인공이지요.` 이 말을 저는 요즘 하루에도 몇 번씩 뇌어 보곤 합니다. 겉으로는 늘 비슷비슷하게 반복되는 평범한 일상의 삶일지라도 끊임없는 노력으로 자신의 내면을 갈고 닦는 가운데 다른 이와의 관계를 진정한 사랑과 용서와 이해로 넓혀 나간다면 하루하루가 떳떳하고 자유로우며 새로운 기쁨과 보람으로 누가 옆에 없어도 스스로 충만함을 누릴 수 있을테지요. 아마도 `나이를 헛먹었다`는 자책감에 시달리기보다는 그야말로 작은 축제를 즐기는 느낌을 지닐 수 있으리라 여겨집니다. 스테파노 선생님. 지난번에 제가 보내드린 시들을 여러 사람들과 나누어 가지셨다니 기쁩니다. 오늘도 최근에 발견한 몇 개의 좋은 시들을 보내니 가까운 이웃들과 돌려보시길 바랍니다. 제게 편지를 보내는 독자들 중에는 제 자신의 글보다도 제가 인용한 다른 이의 좋은 글들을 보고 그 감동을 표현하는 분들도 적지 않기에 저는 앞으로도 계속 제가 발견한 아름다운 글들을 이웃에게 실어 나르는 심부름꾼이 되려 합니다. 한지에 적힌 글은 액자에 넣어 선물용으로 쓰셔도 좋으리라 생각합니다. 저희 수녀원의 솔 향기, 아카시아 향기 속에 고국의 늦봄을 담아 보내며 기도 안에 뵙겠습니다. (1996)
Board 삶 속 글 2022.10.13 風文 R 459
한국대표수필 - 김동리 외 9명 "이상편" 이상(1910~1937) 시인. 소설가. 본명은 김해경. 서울 출생. 경성 공고 졸업. 총독부 내무부 건축과 근무, 특이한 소재와 특이한 기법, 특이한 행적으로 이채를 띠었던 이상은 수필에도 뛰어났다. 독특한 안목과 감성으로 사물을 바라본 그의 수필은 실험적인 시나 황당한 소설보다 훨씬 짙은 감흥을 불러일으킨다. 권태 3 대싸리 나무도 축 늘어졌다. 물은 흐르면서 가끔 웅뎅이를 만나면 썩는다. 내가 앉아 있는 데는 그런 웅뎅이가 있다. 내 앞에서 물은 조용히 썩는다. 낮닭 우는 소리가 무던히 한가롭다. 어제도 울던 낮닭이 오늘도 또 울었다는 외에 아무 흥미도 없다. 들어도 그만 안 들어도 그만이다. 다만 우연히 귀에 들려 왔으니 그저 들었달 뿐이다. 닭은 그래도 새벽, 낮으로 울기나 한다. 그러나 이 동리의 개들은 짖지를 않는다. 그러면 모두 벙어리 개들인가, 아니다. 그 증거로는 이 동리 사람 아닌 내가 돌팔매질을 하면서 위협하면 10리나 달아나면서 나를 돌아다보고 짖는다. 그렇건만 내가 아무 그런 위험한 짓을 하지 않고 지나가면 천 리나 먼 데서 온 외인 더구나 안면이 이처럼 창백하고 봉발이 작소를 이룬 기이한 풍모를 쳐다보면서도 짖지 않는다. 참 이상하다. 어째서 여기 개들은 나를 보고 짖지를 않을까? 세상에도 희귀한 겸손한 겁쟁이 개들도 다 많다. 이 겁쟁이 개들은 이런 나를 보고도 짖지를 않으니 그럼 대체 무엇을 보아야 짖으랴. 그들은 짖을 일이 없다. 여인은 이 곳에 오지 않는다. 오지 않을 뿐만 아니라 국도연변에 있지 않는 이 촌락을 그들은 지나갈 일도 없다. 가끔 이웃 마을의 김 서방이 온다. 그러나 그는 여기 최 서방과 똑같은 복장과 피부색과 사투리를 가졌으니 개들이 짖어 무엇하랴. 이 빈촌에는 도적이 없다. 인정 있는 도적이면 여기 너무나 빈한한 새악씨들을 위하여 훔친 바 비녀나 반지를 가만히 놓고 가지 않으면 안 되리라. 도적에게는 이 마을은 도적의 도심을 도적맞기 쉬운 위험한 지대리라. 그러니 실로 개들이 무엇을 보고 짖으랴. 개들은 너무나 오랜 동안-아마 그 출생 당시부터--짖는 버릇을 포기한 채 지내 왔다. 몇 대를 두고 짖지 않는 이 곳 견족들은 드디어 짖는다는 본능을 상실하고 만 것이리라. 인제는 돌이나 나무 토막으로 얻어맞아서 견딜 수 없을 만큼 아파야 겨우 짖는다. 그러나 그와 같은 본능은 인간에게도 있으니 특히 개의 특징으로 쳐들 것은 못 되리라. 개들은 대개 제가 길리우고 있는 집 문간에 앉아서 밤이면 밤잠, 낮이면 낮잠을 잔다. 왜? 그들은 수위할 아무 대상도 없으니까다. 최 서방네 집 개가 이리로 온다. 그것을 김 서방네 집 개가 발견하고 일어나서 영접한다. 그러나 영접해 본댔자 할 일이 없다. 양구에 그들은 헤어진다. 설레설레 길을 걸어 본다. 밤낮 다니는 길, 그 길에는 아무것도 떨어진 것이 없다. 촌민들은 한여름 보리와 조를 먹는다. 반찬은 날된장 풋고추다. 그러니 그들의 부엌에조차 남는 것이 없겠거늘 하물며 길가에 무엇이 족히 떨어져 있을 수 있으랴. 길을 걸어 본댔자 소득이 없다. 낮잠이나 자자. 그리하여 기들은 천부의 수위술을 망각하고 낮잠에 탐닉하여 버리지 않을 수 없을 만큼 타락하고 말았다. 슬픈 일이다. 짖을 줄 모르는 벙어리 개, 지킬 줄 모르는 게으름뱅이 개, 이 바보 개들은 복날 개장국을 끓여먹기 위하여 촌민의 희생이 된다. 그러나 불쌍한 개들은 음력도 모르니 복날은 몇 날이나 남았나 알 길이 없다. 4 이 마을에는 신문도 오지 않는다. 소위 승합 자동차라는 것도 통과하지 않으니 도회의 소식을 무슨 방법으로 알랴? 오관이 모조리 박탈된 것이나 다름없다. 답답한 하늘, 답답한 지평선, 답답한 풍경, 답답한 풍속 가운데서 나는 이리 디굴 저리 디굴 굴고 싶을 만치 답답해하고 지내야만 된다. 아무것도 생각 할 수 없는 상태 이상으로 괴로운 상태가 또 있을까. 인간은 병석에서도 생각한다. 병석에서는 더욱 많이 생각하는 법이다. 끝없는 권태가 사람을 엄습하였을 때 그의 동공은 내부를 향하여 열리리라. 그리하여 망쇄할 때보다도 몇 배나 더 자신의 내면을 성찰할 수 있을 것이다. 현대인의 특질이요 질환인 자의식 과잉은 이런 권태치 않을 수 없는 권태 계급의 철저한 권태로 말미암음이다. 육체적 한산, 정신적 권태, 이것을 면할 수 없는 계급이 자의식 과잉의 절정을 표시한다. 그러나 지금 이 개울가에 앉은 나에게는 자의식 과잉조차가 폐쇄되었다. 이렇게 한산한데, 이렇게 극도의 권태가 있는데 동공은 내부를 향하여 열리기를 주저한다. 아무것도 생각하기 싫다. 어제까지도 죽는 것을 생각하는 것 하나만은 즐거웠다. 그러나 오늘 그것조차가 귀찮다. 그러면 아무것도 생각하지 말고 눈뜬 채 졸기로 하자. 더워 죽겠는데 목욕이나 할까? 그러나 웅뎅이 물은 썩었다. 썩지 않은 물을 찾아 가는 것은 귀찮은 일이고. 썩지 않은 물이 여기 있다기로서니 나는 목욕하지 않았으리라. 옷을 벗기가 귀찮다. 아니 그보다도 그 창백하고 앙상한 수구를 백일 아래 널어 말리는 파렴치를 나는 견디기 어렵다. 땀이 옷에 배이면? 배인 채 두자. 그렇다 하더라도 이 더위는 무슨 더워냐. 나는 내가 있는 집으로 돌아와서 세수를 하기로 한다. 나는 일어나서 오던 길을 돌치는 도중에서 교미하는 개 한 쌍을 만났다. 그러나 인공의 기교가 없는 축류의 교미는 풍경이 권태 그것인 것같이 권태 그것이다. 동리 아해들에게도 젊은 촌부들에게도 흥미의 대상이 못 되는 이 개들의 교미는 또한 내게 있어서도 흥미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 함석 대야는 그 본연의 빛을 일찍이 잃어버리고 그들의 피부색과 같이 붉고 검다. 아마 이 집 주인 아주머니가 시집올 때 가지고 온 것이리라. 세수를 해 본다. 물조차가 미지근하다. 물조차가 이 무지한 더위에는 견딜 수 없었나 보다. 그러나 세수의 관례대로 세수를 마친다. 그리고 호박넝쿨이 축 늘어진 울타리 밑 호박넝쿨의 뿌리 돋친 데를 찾아서 그 물을 준다. 좀 생기를 내라고 땀내나는 수건으로 얼굴을 훔치고 툇마루에 걸터앉았자니까 내가 세수할 때 내 곁에 늘어섰던 주인집 아이들 넷이 제각기 나를 본받아 그 대야를 사용하여 세수를 한다. 저 애들도 더워서 저러는구나, 하였더니 그렇지 않다. 그 애들도 나처럼 일거수 일투족을 어찌했으면 좋을까 하고 있는 권태들이었다. 다만 내가 세수하는 것을 보고 그럼 우리도 저 사람처럼 세수나 해 볼까 하고 따라서 세수를 해 보았다는 데 지나지 않는다.
내 마음이 강해야 내 소원도 이루어진다 - 잭 캔필드, 마크 빅터 한센 4. 가족들과의 더 좋은 관계를 위하여 선택형 의문문으로 요청하라 이 방법은 자녀에게 선택의 자유와 함께 그들의 의사를 존중한다는 뜻을 전달한다 그 예는 다음과 같다. "얘야, 지금 상을 차릴래, 아니면 그 TV 프로그램을 본 다음에 차릴래?" "붉은 색 잠옷을 입을래, 초록색을 입을래?" "시리얼을 먹을래, 계란을 먹을래?" "캐리어스를 먹을래, 콘프레이크를 먹을래?" 특히, 이 방법은 자녀의 관심을 당신이 거절하고 싶은 대상이나 환경에서 돌려놓는데 효과적이다. 당신이 상점의 시리얼 매장에 있다고 가정하자...... "엄마, 엄마, 바비 시리얼을 사주세요!" "그건 오늘 안돼, 웨얼티(통밀로 만든 간편식)를 살까, 그라놀라(납작보리로 만든 아침식사용 간편식)을 살까?" "바비를 사주세요!" 엄하고, 단호하게 선택 조건을 반복하라. "웨일티로 살까, 그라놀라로 살까?" 결국, 선택에 대한 자녀의 욕구가 우세해질 테고 다들 승리자가 된 기분으로 가게를 나온다. 5. 더 나은 내일을 위하여 생 텍쥐베리 - 진정한 삶은 첫걸음을 때는 것이다. 그리고 그 다음에 또 한 걸음을 때는 것이다. 격려를 요청하라 격려란 영혼의 청량제이다. - 구전 속담 1980년에 나는 브로드웨이의 뮤지컬 연출과 공연에 대한 열정을 가지고 부동산 분야에서의 매우 성공적이었던 직업 대신에 노래와 춤, 그리고 극작을 하고 싶어했다. 내가 그것을 하고 싶어한다는 사실은 분명했지만 곧 매우 중요한 무엇인가가 모자라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의 꿈을 다른 사람에게 이야기하면 그는 혹시 미친 게 아니냐고 반문하곤 했던 것이다. 그래서 나는 황금색 글씨로 '변화를 이루고자 하는 사람'이라고 쓰여 있는 푸른 리본을 만들었다. 그리고 거리로 나가 사람들을 만나면서 각자가 얼마나 대단한 사람인지를 일깨우고 당신의 꿈은 무엇인지를 묻기 시작했다. 나는 말했다. "저는 당신이 당신의 희망을 이루도록 격려할 것입니다. 그리도 당신 역시 제가 희망을 실현시킬 수 있도록 격려해 주기를 바랍니다. 들어보세요. 저는 2002년 3월 31일에 브로드웨이에서 저의 뮤지컬을 공연할 것입니다. 그리고 제가 당신을 만날 때마다 저는 당신이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우며 '계속 노력해, 해리스!'라고 말해주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노동은 네 몫 즐거움을 내 차지 - 조 그리피스의 '사업계 일화 모음집'에서 어떤 해군 장교와 사령관이 섹스에 대해서 너무도 다른 의견을 가지고 있었다. 장교는 섹스가 80%의 노동과 20%의 즐거움이라고 이야기했고, 사령관은 10%의 노동과 90%의 즐거움이라고 주장했다. 그들은 그 문제에 대해서 오랜 시간 논쟁을 벌였고 공평한 판정을 원했다. 그들은 옆에 있던 상사를 불러 세워 이런 논쟁에 대해 설명하고 그의 의견을 물었다. "네, 정확히 이야기하자면, 두분 모두 틀리셨습니다." 상사가 대답했다. 그들은 어째서냐고 다시 물어보았다. 그가 대답했다. "만일 섹스에 어떠한 노동이라도 있다면, 두분은 그 일을 저에게 대신 시키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더 나은 연장과 장비를 요청하라 - 마이크 위켓 몇 년전에, 커다란 석유 정유공장에서 화재가 일어났다. 불길은 수백피트 이상 치솟았으며, 하늘은 검고 매캐한 연기로 가득 찼다. 불길이 거세게 번져나가서 소방관들은 한 블록 떨어진 곳에 소방차를 대기시키고 불이 수그러들기를 기다렸지만 화재는 이미 걷잡을 수 없는 지경에까지 이르고 말았다. 그때 갑자기 몇 블록 밖에 있던 소방차가 브레이크도 잡지 않고 그곳으로 달려와 불길 바로 앞 커브에 충돌해서 멈췄다. 그리고 소방관들이 차에서 내려 불길과 싸우기 시작했다. 그것을 보고 있던 다른 소방관들 역시 다시 달려와 같이 협조했다.이러한 협동적인 노력의 결과로 화재는 거의 진압할 수 있었다. 이러한 화재 진압과정을 지켜보던 사람들이 소리쳤다. "세상에 저 불길 속으로 먼저 뛰어든 소방관들은 정말 용감하군!" 그들은 그러한 용감한 행위에 대해서 특별 포상을 내려야 한다고 생각했다. 시상식에서 시장이 말했다. "소방 대장님, 우리는 당신들의 환상적이고도 용감한 행동에 대해서 경의를 표합니다. 당신들은 재산은 물론이고 소중한 인명의 손실도 막아냈습니다. 무엇이든지 원하시는 게 있습니까?" 그러자 대장은 주저 없이 대답했다. "네, 존경하는 시장님, 새로운 브레이크 장치가 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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