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을 어떻게 쓸까 - 이오덕 1부 산문을 어떻게 쓸까 논설문 쓰기 - 생각과 느낌을 어떻게 표현할까 (1/4) 말을 책에서 배우지 말고 이제부터 글을 어떻게 써야 하나 하는 이야기를 해 보자. 무엇을 어떻게 쓰나 하는 여러 가지 글쓰기의 문제를 실제 작품을 보아 가면서 풀기로 하겠는데,내가 가장 힘들여 말하려는 것은 깨끗하고 바른 우리말을 살리는 일이다. 그 까닭은, 지금 우리말과 글이 남의 나라 말을 따라 함부로 써서 아주 엉망이 되어 있기 때문이다. 우리말은 초등 학생 때부터 잘못 배우기 시작하여 중고등학생이 되면 어른들과 거의 다름없는 정도로 오염된 말을 쓴다. 그런 상태가 학생들이 쓴 글에 너무나 잘 나타나 있다. 따라서 중고등학생 때 우리말을 제대로 익히지 않으면 아주 평생을 괴상한 병신 같은 말로 살아가게 되고, 이래서 우리말은 죽어버리는 것이다. 말이 죽으면 우리 겨레도 죽는 수밖에 없다. 그러나 나는 중고등학생들의 청순한 마음을 믿는다. 이제부터 우리가 기어코 살려야 할 우리들의 목숨인 겨레말과, 어떻게 해서라도 물리치고 뿌리 뽑아야 할 불순한 남의 말을 구별해서, 말할 때나 글을 쓸 때 티없이 깨끗한 겨레의 양심을 살려주기 바란다. 여러분이 우리말을 살리지 않으면 누가 살리겠는가? 먼저, 글 한 편을 들어 보기로 한다. 다음 글은 고등하교 1학년인 두 학생의 이름으로 어느 학급문집에 발표된 글이다. 제목 앞에 주장글 이라 적혀 있다. 논설문이라 하지 않고 주장글 이라 한 것이 잘 되었고, 지도한 선생님의 믿음직한 태도까지 나타난 듯하다. 두 학생이 의논해서 썼겠는데, 주장하는 글을 이렇게 몇 사람이 토론하고 의논해서 쓸 수도 있을 것이다. 보충수업 이대로 좋은가? 신문지상을 통해서 보면 광주의 많은 고등학교들이 보충,자율학습 반대 시위를 하고 있다고 한다. 도시와 농촌간의 보충수업이 주는 의미는 다를지라도 우리 학교 보충수업의 실태를 보면, 선생님들의 열의에 비하여 수강하는 학생들의 태도는 매우 소극적이다. 처음 출발이 타의가 아닌 자의(?)로 했음에도 불구하고 점점 학습태도가 나빠지는 이유가 무엇일까? 지금 우리들이(미경,정숙)함께 생각해 보면 첫째, 농촌의 특수성 때문이라생각한다. 학교가 끝나기 무섭게 집에 들어 가면 들에 나가신 부모님을 대신하여 집안 일을 도맡아 해야 한다. 어떤 남학생들은 아침 일찍 일어나 농약을 하고 온다고 들었다. 육체에는 한계가 있는 법, 피로가 겹친다. 이에 가중하여 보충수업 한 시간씩을 받으려는 정말 잠이 올 수밖에.. 의욕상실증 환자 같다. 둘째로는, 능력별 보충수업이 아니라서 정숙이는 잘 따라가지만 나는 도통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 많다. 만약에 2학기에 보충수업을 한다고 하면 자신의 능력에 맞춰 반을 편성했으면 좋겠다. 그러나 이런 원인을 접어두고 보충수업 자체를 놓고 생각해 보면, 학교에서 하는 수업만 가지고도 대학을 들어가는 사회가 되었으면 하는 바램이다. 수업중에도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 많은데, 보충수업까지 괴롭히니 보충수업이 아니라, 이중 짐 지우기 수업이다. 그래도 우리는 밤 10시까지 하는 살인적인 심야학습이 없으니 참 좋다. 하기야 농촌에서는 할 수도 없지만, 보충수업을 현행대로 하면 마땅히 없어져야 한다. 하루 빨리 정상화되었으면 좋겠다. ------------------------------------------------------------------ 이 글은, 농촌학교에서 하고 있는 보충수업이 농촌의 현시로가, 학생들의 능력 차이를 생각하지 않은 반 편성 때문에 그 실제 효과를 거두지 못하고 있음을 지적하고, 이런 보충수업은 없애는 것이 옳다는 주장을 한 글이다. 주장을 하는 글은 이와같이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가지고 있는 문제에 대해, 자기의 의견을 차근차근 조리있게 써야 한다. 그런데 이 글은 생각을 알기 쉬운 말, 바른 말로, 어른들이 흔히 쓰는 글말이 아니라 살아 있는 우리말로 써야 한다는 점에 다듬어야 할 데가 많다. 다음에 다듬어야 할 곳을 차례로 들어 보겠다. - 신문지상을 통해서 보면 첫머리에 나오는 이 말은 신문을 보면 하면 된다. 신문 에다가 지상 을붙일 필요가 없고, 통해서 도 안 쓰는 것이 훨씬 읽기 좋고 깨끗한 말이 된다. 이 -을 통해서 란 말은 많이 쓰는데, 이렇게 아주 없애 버리든지, 다른 더 알맞은 말로 바꾸든지,통으로 를 쓰면 된다. 보기를 들면 이 길을 통해서 학교로 간다 는 이 길을 지나서 학교로 간다 고 써야 되고, 친구를 통해서 알았지요 라면 친구가 소개해서 알았지요 로 쓰는 것이 좋고, 노동을 통해 삶을 배우고 는 노동으로(일을 해서) 삶을 배우고 하면 되는 것이다. - 도시와 농촌간의 보충수업이 주는 의미는 다를지라도 이 대문은 말이 좀 이상하게 되어 있다. 그리고, 다음에 오는 말을 볼 때 도시 학교의 보충수업 실태는 잘 모르지만 이렇게 써야 할 말이 아닌가 싶다. 만약 말이 좀 잘못되었더라도 이 대문을 그대로 둔다면 우선 의미는 다를지라도 만은 뜻은 다르겠지만 으로 고쳐야 하겠다. - 열의에 비하여 이 말은 열의에 견주어 라고 쓰는 것이 좋다. -에 비하여 는 일본글따라서 쓰는 꼴이니 어떤 경우에도 우리말 -에 견주어 라고 써야 한다. - 매우 소극적이다. 적극적, 소극적, 주관적, 객관적, 사회적, 역사적.. 이렇게 어떤 중국글자말 다음에 -적 을 붙여 쓰기를 잘 하는데, 이것은 일본사람들이 쓰는 말을 따라서 쓰는 것이고, 또 말뜻을 흐리게 하는 좋지 못한 말이니 안 쓰는 것이 좋다. 버릇이 되어 자꾸 나온다면 될 수 있는 대로 적게 쓰도록 애써야 한다. 적극적으로 는 적극으로 하면 되고, 소극적으로 는 소극으로 하면 그만이다. 주관적으로 와 객관적으로 도 주관으로 객관으로 하면 된다. 주관적인 생각 이라면 주관인 생각 이나 주관으로 된 생각 하면 더 분명한 말이 된다. 사회적 명성이 는 사회에 이름이 라고 하면 되고, 역사적인 일을 은 역사에 은 일을 하면 시원스런 우리말이 된다. 여기 나오는 말 매우 소극적이다 는 매우 소극이다 고 써도 되고, 소극이란 말도 쓰지 말고 아주 다른 말로 바꿀 수도 있다. 겨우 따라 가는 상태다 이렇게 말이다. 이 -적 이란 말을 자꾸 쓰다 보니 아무데나 마구 -적 을 붙여서 우리말이 아주 어설프고 어지럽게 되어가고 있다. 대체로 하면 될 것을 대체적으로 라고 말하고, 상식으로 할 것을 상식적으로 하고 하고, 시간이 바빠서 할 것을 시간적으로 바빠서 하는 것과 같다. 또 늘 언제나 하는 우리말을 안 쓰고 일상 이란 말을 쓰다가 여기에다 -적 을 또 붙여 일상적으로 한다든지, 크게 하면 될 것을 대체적으로 한다든지, 몸이 고달파서 할 것을 육체적으로 피곤해서 하는 것이 다 그렇고, 마음 이란 말을 써도 될 자리에 정신 을 쓰고, 다시 여기에도 -적 을 붙여 정신적 으로 하는 것도 그렇다. 이렇게 어릴 때부터 배운 쉬운 우리말을 안 쓰고 책에 나오는 글말(곧 그 대부분이 남의 나라에서 온말)을 쓰는 것은 남들에게 유식함을 자랑해 보이려는 아주 얄팍하고 천한 마음에서 나온 것임을 알아두어야 한다. 하도 이 -적을 많이 쓰다 보니 그만 이 말이 굳어져서 어떤 경우에는 대신할 말이 얼른 생각나지 않는 수도 있다. 민주적 질서와 독재적 질서 이럼 말은 민주의 질서와 독재의 질서 하든지, 민주 질서와 독재 질서 하면 되겠지만 민주적 목소리를 죽이지 말고 했을 때는 어떻게 하나? 이것도 민주의 목소리를.. 하면 되지만 처음 쓰는 말이라 좀 낯설게 느껴질 때는 민주적 목소리 가 어떤 목소리인가 하고 스스로 물어볼 필요가 있다. 민주적 목소리가 국민 전체의 목소리라면 민주적 을 쓰지 말고 국민의 목소리를 죽이지 말고 하면 되는 것이고, 이렇게 쓰는 것이 훨씬 더 정확한 말이 되는 것이다.
한국대표수필 - 김동리 외 9명 "정비석편" 정비석(1911~1991) 소설가. 평북 의주 출생. 일본 니혼 대학 문과 중퇴. 통속적인 신문 소설로 대중의 인기를 끈 바 있는 정비석은 흔히 예정 소설만 쓴 것으로 오인되기도 하지만 그 문장의 점착력이나 심리, 상황의 뛰어난 묘사는 그를 수필 문학에 있어서도 많은 작품을 남기게 하였다. "산정 무한"은 금강산 기행문의 일부인데 그의 뛰어난 문장력을 엿볼 수 있는 글이다. 산정 무한 이튿날 아침, 고단한 마련 해선 일찌감치 눈이 떠진 것은 몸이 지닌 기쁨이 하도 컸던 탓이었을까. 안타깝게도 간밤에 볼 수 없던 영봉들을 대면하려고 새댁같이 수줍은 생각으로 밖에 나섰으나, 계곡은 여태 짙은 안개 속에서, 준봉은 상기 깊은 구름 속에서 용이하게 자태를 엿보일 성싶지 않았고, 다만 가까운 데의 전나무, 잣나무들만이 대장부의 기세로 활개를 쭉쭉 뻗고, 하늘을 찌를 듯이 솟아 있는 것이 눈에 뜨일 뿐이었다. 모두 근심 없이 자란 나무들이었다. 청운의 뜻을 품고 하늘을 향하여 밋밋하게 자란 나무들이었다. 꼬질꼬질 뒤틀어지고 외틀어지고 한 야산 나무밖에 보지 못한 눈에는, 귀공자와 같이 기품이 있어 보이는 나무들이었다. 조반 후 단장 짚고 험난한 전정을 웃음경삼아 탐승의 길에 올랐을 때에는, 어느덧 구름과 안개가 개어져 원근 산악이 열병식하듯 점잖이들 버티고 서 있는데, 첫눈에 비치는 만산의 색소는 홍! 이른바 단풍이란 저런 것인가 보다 하였다. 만학천봉이 한바탕 흐드러지게 웃는 듯, 산색은 붉을 대로 붉었다. 자세히 보니, 홍만도 아니었다. 청이 있고, 녹이 있고, 황이 있고, 등이 있고, 이를테면 산 전체가 무지개와 같이 복잡한 색소로 구성되었으면서, 얼른 보기에 주홍만으로 보이는 것은 스펙트럼의 조화던가? 복잡한 것은 색만이 아니었다. 산의 용모는 더욱 다기하다. 혹은 깎은 듯이 준초하고, 혹은 그린 듯이 온후하고, 혹은 막잡아 빚은 듯이 험상궂고, 혹은 틀에 박은 듯이 단정하고..., 용모, 풍취가 형형색색인 품이 이미 범속이 아니다. 산의 품평회를 연다면, 여기서 더 호화로울 수 있을까? 문자 그대로 무궁무진이다. 장안사 맞은편 산에 울울창창 우거진 것은 다 잣나무뿐인데, 모두 이등변삼각형으로 가지를 늘어뜨리고 섰는 품이, 한 그루 한 그루의 나무가 흡사히 괴어 놓은 차례탑 같다. 부처님은 예불상만으로는 미흡해서, 이렇게 자연의 진수성찬을 베풀어 놓으신 것일까? 얼른 듣기에 부처님이 무엇을 탐낸다는 것이 천만부당한 말 같지만, 탐내는 그것이 물욕 저편의 존재인 자연을 맘껏 탐낸다는 것이 이미 불심이 아니고 무엇이랴. 장안사 앞으로 흐르는 계류를 끼고 돌며 몇 굽이의 협곡을 거슬러 올라가니 산과 물이 어울리는 지점에 조그마한 찻집이 있다. 다리도 쉴 겸, 스탬프북을 한 권 사서, 옆에 구비된 기념 인장을 찍으니, 그림과 함께 지면에 나타나는 세 글자가 명경대! 부앙하여 천지에 참괴함이 없는 공명한 심경을 명경지수라고 이르나니, 명경대란 흐르는 물조차 머무르게 하는 곳이란 말인가! 아니면, 바로 명경대란 말인가! 아무러나 아름다운 이름이라고 생각하며 찻집을 나와 수십 보를 바위로 올라가니, 깊고 푸른 황천담을 발 밑에 굽어보며 반공에 외연히 솟은 층암 절벽이 우뚝 마주 선다. 명경대였다. 틀림없는 화장경 그대로였다. 옛날에 죄의 유무를 이 명경에 비추면, 그 밑에 흐르는 황천담에 죄의 영자가 반영되었다고 길잡이는 말한다. 명경! 세상에 거울처럼 두려운 물건이 다신들 있을 수 있을까? 인간 비극은 거울이 발명되면서 비롯했고, 인류 문화의 근원은 거울에서 출발했다고 하면 나의 지나친 억설일까? 백 번 놀라도 유부족일 거울의 요술을 아무런 두려움도 없이 일상으로 대하게 되었다는 것은 또 얼마나 가경할 일인가? 신라조 최후의 왕자인 마의 태자는 시방 내가 서 있는 바로 이 바위 위에 꿇어 엎드려, 명경대를 우러러보며 오랜 세월을 두고 나무아미타불을 염송했다니, 태자도 당신의 업죄를 명경에 영조해 보시려는 뜻이었을까! 운상기품에 무슨 죄가 있으랴만, 등극하실 몸에 마의를 감지 않으면 안되었다는 것이 이미 불법이 말하는 전생의 연일는지 모른다. 두고 떠나기 아쉬운 마음에 몇 번이고 뒤를 돌아다보며 계곡을 돌아 나가니, 앞으로 염마처럼 막아 서는 웅자가 석가봉, 뒤로 봐야 협착한 골짜기는 그저 그뿐인 듯. 진퇴유곡의 절박감을 느끼며 그대로 걸어 나가니, 간신히 트이는 또 하나의 협곡! 몸에 감길 듯이 정겨운 황천강 물줄기를 끼고 돌면, 길은 막히는 듯 나타나고, 나타나는 듯 막히고, 이 산에 흩어진 전설과, 저 봉에 얽힌 유래담을 길잡이에게 들어 가며 쉬엄쉬엄 걸어 나가는 동안에, 몸은 어느덧 심해 같이 유수한 수목 속을 거닐고 있음을 깨닫게 된다. 천하에 수목이 이렇게도 지천으로 많던가! 박달나무, 엄나무, 피나무, 자작나무, 고로쇠나무..., 나무의 종족은 하늘의 별보다도 많다고 한 어느 시의 구절을 연상하며 고개를 드니, 보이는 것이라고는 그저 단풍뿐, 단풍의 산이요 단풍의 바다다. 산 전체가 요원 같은 화원이요, 벽공에 외연히 솟은 봉봉은 그대로가 활짝 피어 오른 한 떨기의 꽃송이다. 산은 때아닌 때에 다시 한 번 봄을 맞아 백화 난만한 것일까? 아니면, 불의의 신화에 이 봉 저 봉이 송두리째 붉게 타고 있는 것일까? 진주홍을 함빡 빨아들인 해면같이, 우러러볼수록 찬란하다. 산은 언제 어디다 이렇게 많은 색소를 간직해 두었다가, 일시에 지천으로 내뿜는 것일까? 단풍이 이렇게까지 고운 줄은 몰랐다. 김 형은 몇 번이고 탄복하면서, 흡사히 동양화의 화폭 속을 거니는 감흥을 그대로 맛본다는 것이다. 정말 우리도 한 떨기 단풍에 지나지 않아 보인다. 다리는 줄기요, 팔은 가지인 채, 피부는 단풍으로 물들어 버린 것 같다. 옷을 훨훨 벗어 꽉 쥐어 짜면, 물에 헹궈 낸 빨래처럼 진주홍 물이 주르르 흘러내릴 것만 같다. 그림 같은 연화담 수렴폭을 완상하며, 몇십 굽이의 석계와 목잔과 철삭을 답파하고 나니, 문득 눈앞에 막아서는 무려 3백 단의 가파른 사닥다리-한 층계 한 층계 한사코 기어오르는 마지막 발걸음에서 시야는 일망무제로 탁 트인다. 여기가 해발 5천 척의 망군대--아! 천하는 이렇게도 광활하고 웅장하고 숭엄하던가! 이름도 정다운 백마봉은 바로 지호지간에 서 있고, 내일 오르기로 예정된 비로봉은 단걸음에 건너뛸 정도로 가깝다. 그밖에도, 유상무상의 허다한 봉들이 전시 할거하는 군웅들처럼 여기에서도 불끈 저기에서도 불끈, 시선을 낮춰 아래로 굽어보니, 발 밑은 천인단애, 무한제로 뚝 떨어진 황천계곡에 단풍이 선혈처럼 붉다. 우러러보는 단풍이 새색시 머리의 칠보 단장 같다면, 굽어보는 단풍은 치렁치렁 늘어진 규수의 붉은 치마폭 같다고나 할까. 수줍어 수줍어 생글 돌아서는 낯 붉힌 아가씨가 어느 구석에서 금방 튀어나올 것도 같구나! 저물 무렵에 마하연의 여사를 찾았다. 산중에 사람이 귀해서였던가. 어서 오십사는 상냥한 안주인의 환대도 은근하거니와, 문고리 잡고 말없이 맞아 주는 여관집 아가씨의 정성을 무르익은 머루알같이 고왔다. 여장을 풀고 마하연암을 찾아갔다. 여기는 선원이어서, 공부하는 승려뿐이라고 한다. 크지도 않은 절이건만 승려 수는 실로 30명은 됨직하다. 이런 심산에 웬 중이 그렇게도 많을까? 한없는 청산 끝나 가려 하는데, 흰구름 깊은 곳에 노승도 많아라. 옛 글 그대로다. 노독을 풀 겸 식후에 바둑이나 두려고 남포등 아래에 앉으니, 온고지정이 불현듯 새로워졌다. "남포등은 참말 오래간만인데." 하며, 불을 바라보는 김 형의 말씨가 하도 따뜻해서, 나도 장난삼아 심지를 돋우었다 줄였다 하며, 까맣게 잊었던 옛 기억을 되살렸다. 그리운 얼굴들이, 흐르는 물의 낙화 송이같이 떠돌았다. 밤 깊어 뜰에 나가니, 날씨는 흐려 달은 구름 속에 잠겼고, 음풍이 몸에 선선하다. 어디서 솰솰 소란히 들려 오는 소리가 있기에 바람 소린가 했으나, 가만히 들어 보면 바람 소리만도 아니여, 물 소린가 했더니 물 소리만도 아니요, 나뭇잎 갈리는 소린가 했더니 나뭇잎 갈리는 소리만은 더구나 아니다. 아마, 바람 소리와 물 소리와 나뭇잎 갈리는 소리가 함께 어울린 교향악인 듯싶거니와, 어쩌면 곤히 잠든 산의 호흡인지도 모를 일이다. 뜰을 어정어정 거닐다 보니, 여관집 아가씨는 등잔 아래에 외로이 앉아서 책을 읽고 있다. 무슨 책일까? 밤 깊은 줄조차 모르고 골똘히 읽는 폼이, 춘향이 태형 맞으며 백으로 아뢰는 대목일 것도 같고, 누명 쓴 장화가 자결을 각오하고 원한을 하늘에 고축하는 대목일 것도 같고, 시베리아로 정배가는 카추샤의 뒤를 네프 백작이 쫓아가는 대목일 것도 같고..., 궁금한 판에 제멋대로 상상해 보는 동안에 산 속의 밤은 처량히 깊어 갔다. 자꾸 깊은 산 속으로만 들어가기에, 어느 세월에 이 골을 다시 헤어나 볼까 두렵다. 이대로 천지와 처자를 버리고 중이 되는 수밖에 없나 보다고 생각하며 고개를 돌이키니, 몸은 어느새 구름을 타고 두리둥실 솟았는지, 군소봉이 발 밑에 절하여 아뢰는 비로봉 중허리에 나는 서 있었다. 여기서부터 날씨는 급격히 변화되어 이 골짝 저 골짝에 안개가 자옥하고 음산한 구름장이 산허리에 감기더니, 은제, 금제에 다다랐을 때, 기어이 비가 내렸다. 젖빛 같은 연무가 짙어서 지척을 분별 할 수 없다. 우장 없이 떠난 몸이기에 그냥 비를 맞으며 올라가노라니까, 돌연 일지 광풍이 어디서 불어 왔는지, 휙 소리를 내며 운무를 몰아가자, 은하수같이 정다운 은제와, 주홍 주단 폭같이 늘어놓은 붉은 진달래 단풍이, 몰려가는 연무 사이로 나타나 보인다. 은제와 단풍은 마치 이랑이랑으로 섞바꾸어 가며 짜 놓은 비단결같이 봉에서 골짜기로 퍼덕이며 흘러내리는 듯하다. 진달래는 꽃보다 단풍이 배승함을 이제야 깨달았다. 오를수록 우세는 맹렬했으나, 광풍이 안개를 헤칠 때마다 농무 속에서 홀현홀몰하는 영봉을 영송하는 것도 과히 장관이었다. 산마루가 가까울수록 비는 폭주로 내리붓는다. 만 이천 봉을 단박에 창해로 변해 버리는 것일까. 우리는 갈데없이 물에 빠진 쥐 모양을 해 가지고 비로봉 절정에 있는 찻집으로 찾아드니, 유리창 너머로 내다보고 섰던 동자가 문을 열어 우리를 영접하였고, 벌겋게 타오른, 장독 같은 난로를 에워싸고 둘러앉았던 선착객들이 자리를 사양해 준다. 인정이 다사롭기 온실 같은데, 밖에서는 몰아치는 빗발이 어느덧 우박으로 변해서 창을 때리고 문을 뒤흔들고 금시로 천지가 뒤집히는 듯하다. 용호가 싸우는 것일까? 산신령이 대노하신 것일까? 경천동지도 유만부동이지, 이렇게 만상을 뒤집을 법이 어디 있으랴고, 간장을 죄는 몇 분이 지나자, 날씨는 삽시간에 잠든 양같이 온순해진다. 변환도 이만하면 극치에 달한 듯싶다. 비로봉 최고점이라는 암상에 올라 사방을 조망했으나, 보이는 것은 그저 뭉게뭉게 피어오르는 운해,--운해는 태평양보다도 깊으리라 싶었다. 내, 외, 해 삼 금강을 일망지하에 굽어 살필 수 있다는 한 지점에서 허무한 운해밖에 볼 수 없는 것이 가석하나, 돌이켜 생각건대 해발 육천 척에 다시 신장 오 척을 가하고 오연히 저립해서, 만학천봉을 발 밑에 끓어 엎드리게 하였으면 그만이지, 더 바랄 것이 무엇이랴. 마음은 천군만마에 군립하는 쾌승 장군보다도 교만해진다. 비로봉 동쪽은 아낙네의 살결보다도 휜 자작나무의 수해었다. 설자리를 삼가, 구중심처가 아니면 살지 않는 자작나무는 무슨 수중 공주이던가! 길이 저물어, 지친 다리를 끌며 찾아든 곳이 애화 맺혀 있는 용마석--마의 태자의 무덤이 황혼에 고독했다. 능이라기에는 너무 초라한 무덤--철책도 상석도 없고, 풍림에 시달려 비문조차 읽을 수 없는 화강암 비석이 오히려 처량하다. 무덤가 비에 젖은 두어 평 잔디밭 테두리에는 잡초가 우거지고, 석양이 저무는 서녘 하늘에 화석된 태자의 애기 용마의 고영이 슬프다. 무심히 떠도는 구름도 여기서는 잠시 머무르는 듯, 소복한 백화는 한결같이 슬프게 서 있고, 눈물 머금은 초저녁 달이 중천에 서럽다. 태자의 몸으로 마의를 걸치고 스스로 험산에 들어온 것은, 천 년 사직을 망쳐 버린 비통을 한 몸에 짊어지려는 고행이었으리라. 울며 소맷귀 부여잡는 낙랑 공주의 섬섬옥수를 뿌리치고 돌아서 입산 할 때에, 대장부의 흉리가 어떠했을까? 흥망이 재천이라. 천운을 슬퍼한들 무엇하랴만, 사람에게는 스스로 신의가 있으니, 태자가 고행으로 창맹에게 베푸신 도타운 자혜가 천 년 후에 따습다. 천 년 사직이 남가일몽이었고, 태자 가신 지 또 다시 천 년이 지났으니, 유구한 영겁으로 보면 천 년도 수유던가! 고작 칠십 생애에 희로애락을 싣고 각축하다가 한움큼 부토로 돌아가는 것이 인생이라 생각하니, 의지 없는 나그네의 마음은 암연히 수수롭다.
사랑할 땐 별이 되고 - 이해인 어린 왕자를 생각하며 - 생텍쥐페리에게 날마다 해질녘이면 "나는 외롭다"고 칭얼대는 어린 왕자의 쓸쓸한 목소리가 들립니다. 별이 뜨면 가장 아름다운 어린 왕자 얘기를 우리에게 남겨 놓고 어느 날 마흔네 살의 나이에 하늘나라로 사라진 별 아저씨, 당신을 기억합니다. <어린 왕자>에서 이야기하는 마음으로 보는 법을 길들이는 법을 날마다 새롭게 깨우치며 우리는 이제 모든 만남에서 설레임의 별을 안고 삽니다. 올해는 아저씨의 `탄생 94주년` 비행기 타고 간 하늘길에서의 `실종 50주년` 각종 기념행사와 추모미사가 프랑스에서 열린다는데 신문은 당신을 `사라진 어린 왕자`로 대서특필하였습니다. <어린 왕자>를 읽은 모든 사람들은 의좋은 형제 자매가 되어 만난 일도 없는 당신을 따뜻한 마음으로 그리워합니다. `수녀님, 어린 왕자의 촌수로 따지면 우리는 친구입니다.` 한국의 번역판 머리글을 눈물나도록 아름답게 쓴 ㅂ스님이 어느 날 제게 써 보냈던 이 말은 항상 반쩍이는 별로 제 가슴에 남아 있습니다. 잠시 다니러 온 지구 여행을 마치고 다시 제자리로 돌아가기 위해 멋있게 작별할 줄 알았던 어린 왕자의 그 순결한 영혼과 책임성 있는 결단력을 사랑합니다. 사라져도 슬프지 않은 별이 되기 위해서도 우리는 오늘 이 순간을 놓치지 말고 사랑으로 길들이며 사랑 속에 사라야겠지요? 우리에게 <어린 왕자>를 낳아 주고 홀연히 하늘 저쪽으로 사라져 갔던 별 아저씨, 눈이 푸른 아저씨, 고맙습니다. 이제 보니 당신은 죽은 게 아니군요. 어린 왕자를 닮고 싶은 우리의 영혼 속에 당신은 별 아저씨로 새롭게 태어나 속삭이는군요. "아주 간단한 거야. 잘 보려면 마음으로 보아야 해." (1994)
Board 삶 속 글 2022.10.27 風文 R 656
내 마음이 강해야 내 소원도 이루어진다 - 잭 캔필드, 마크 빅터 한센 4. 가족들과의 더 좋은 관계를 위하여 책을 요청하라 - 린다 라이트 데이비드 올리필드의 세미나를 이수한 후에 나는 마우이 청소년과 가족 봉사기관인 '청소년 피난처'에 머무는 10대 아이들에게 나누어주고, 친구 카말루와 동료들과 함께 그 아이들을 가르칠 교재를 세미나 협회에 요청했다. 그러자, 눈 깜박할 사이에 6천 달러 어치의 교재가 담긴 커다란 상자가 내 앞으로 왔다. 그것도 무료로! 그로부터 2년 동안 우리는 이 개혁 과정을 수백만에 이르는 십대와 공유할 수 있었다. 어떤 정보를 원할 때, 책을 찾아보는 사람이 과연 몇 명이나 될까? 최근의 한 연구에 따르면, 미국 성인의 일곱명 중의 한 명만 고등학교 졸업 후에 책방으로 책을 사러 나갔다고 한다. 그 수치에는 전문적인 경력을 향상시키거나 더 풍요로운 결혼 생활이나 좋은 부모가 되는 법에 대한 책이 아니라, 슈퍼마켓이나 도서 할인점, 혹은 공항의 가판대에서 오락 위주의 책을 구입한 경우가 대부분을 차지할 것이다. 여러분이 원하는 삶을 누리도록 도와줄 수 있는 정보가 가득 실려 있다는 점을 감안할 때, 그 통계 수치는 안타까움을 금할 수 없다. - 짐 론 당신이 선택한 분야에서 일주일에 한 권씩 책을 읽는다면, 십년 후에 총 500권이 넘는 책을 읽는 셈이 된다. 그 독서량은 당신을 당신 분야에서 최상의 1%에 해당하는 인물로 만들 것이다. 융자를 요청하라 - 레스 휴윗, 액티버 캐나다 세미나의 창설자 나의 판매율이 한창 상승 곡선을 탔다. 그래서 1982년 여름에 아내와 나는 저택 부지를 구입하기에 적당한 시기라고 판단했다. 부지 매입 및 공사비는 총 24만 달러에 이르렀고, 우리는 건축업자를 선정하여 일을 벌였다. 1993년 2월 완공을 목표로 그해 11월에 저택 기초 공사가 착수되었다. 그런데 그로부터 2주일 후에 우리 회사가 파산했고, 나는 하루 아침에 직장을 잃었다. 전업 주부인 아내와 재롱을 떠는 세 살박이 딸, 이제 막 백일이 지난 아들을 생각하니, 하늘이 샛노래지고 뭘 해야 할 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지하실에 앉아있을 때, 한가지 생각이 갑자기 내 뇌리를 스쳤다. 나는 그 구상을 '액티버 캐나다'라고 명명했다. 그 내용인 즉, 일류 강사를 매월 갤러리로 초대하여 세미나를 개최하는 프로그램을 만들어서 그 회원권을 사업자에게 팔아 돈을 버는 것이었다. 정말 독창적이지 않는가! 내가 고용한 건축업자가 전화를 걸어왔다. "총 건축비의 절반이 있어야, 당신의 새집을 지을 수 있소." 나는 은행 지점장을 찾아가서 강력한 힘과 열정을 다하여 미래의 사업 구상을 설명하고 12만 달러를 융자해 달라고 설득했다. 그 과정에서 그는 강사들에 대해 물었다. 나는 짐 론의 10분짜리 비디오 테이프를 보여줬다. 그가 다시 물었다. "짐 론의 저서나 다른 테이프를 더 가지고 있습니까?" 그래서 나는 그에게 6개 테이프 한 세트인 '성공에의 도전'을 빌려줬다. 다음날 그가 전화를 걸어왔다. 융자서류를 다 꾸며 놨으니까, 금요일 은행에 찾아와서 서명하라는 것이었다. 나는 건축업자에게 일을 진행시키라고 했고, 아내를 꼭 껴안으며 말했다. "이제 다 잘된 거야." 금요일, 나는 포부도 당당하게 은행으로 들어가 지점장인 콜린과의 면담을 요청했다. 안내 접수원은 딱 세 마디를 했다. "그분은 회사를 그만 뒀어요!" 나는 완전히 얼이 빠져 반문했다. "언제 그만 뒀습니까?" "어제요." 그날 밤에 나는 콜린의 집으로 전화를 걸었다. 전화가 연결되자 내 첫 마디는 이것이었다. "단 이틀만 더 참을 수 없었단 말입니까? 그 융자 건이 나에게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아시잖습니까. 도대체 어떻게 된 겁니까?" 그는 대답했다. "당신은 그 짐 론의 테이프를 기억하실 겁니다. 나는 그것을 전부 다 들었습니다. 사실, 메모를 열 한 쪽이나 했습니다. 나는 그 은행을 15년이나 다녔고, 그 일이라면 지긋지긋해요. 그런 차에 짐 론의 강연에 용기를 얻어 회사를 그만 둔 겁니다!" 다음날 나는 새 지점장에게 전화를 걸어 전의 융자 건을 되살려달라고 청했다. 우리 두 사람은 생판 초면이었고, 대화는 간단했다. 지점장은 대답했다. "이 융자가 어떻게 승인을 받았는지 모르겠지만, 나로서는 이에 동의할 수 없습니다. 당신은 사업에 무경험자이니까요." 그것으로 거래 끝이었다. 이제 어쩐다? 그때, 전에 들었던 강사의 말이 떠올랐다. "당신이 진정으로 갈망한다면, 항상 그것을 구할 길이 있는 법입니다. 그러니, 계속 요청하세요." 그래서 나는 그렇게 했다. 한달 후, 내가 예전에 축구를 함께 했었던 친구가 뜸금없이 찾아왔다. 그는 우연찮게도 또 다른 은행의 지점장으로 임명받은 터였다. 그는 내 사업 구상을 듣고 융자를 해 줬다. 내가 이번에는 그에게 짐 론의 테이프를 빌려주지 않은 것은 말할 나위 없다. 성경에도 '구하라, 그러면 얻으리라'는 구절이 있잖은가. 이제 나는 그 뜻을 정확히 알고 있다!
Board 추천글 2022.10.27 風文 R 1870
남상(濫觴) 濫:넘칠 람. 觴:술잔 상. [유사어] 효시(嚆矢). 권여(權與). [출전] 《荀自》〈子道篇〉.《孔子家語》〈三恕篇〉 겨우 술잔[觴]에 넘칠[濫]정도로 적은 물이란 뜻으로, 사물의 시초나 근원을 이르는 말. 공자의 제자에 자로(子路)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공자에게 사랑도 가장 많이 받았지만 꾸중도 누구보다 많이 듣던 제자였다. 어쨌든 그는 성질이 용맹하고 행동이 거친 탓에 무엇을 하든 남의 눈에 잘 띄었다. 어느 날 자로가 화려한 옷을 입고 나타나자 공자는 말했다. “양자강(揚子江:長江)은 사천(四川)땅 깊숙이 자리한 민산(岷山)에서 흘러내리는 큰 강이다. 그러나 그 근원은 ‘겨우 술잔에 넘칠 정도[濫觴]’로 적은 양의 물이었다. 그런데 그것이 하류로 내려오면 물의 양도 많아지고 흐름도 빨라져서 배를 타지 않고는 강을 건널 수가 없고, 바람이라도 부는 날에는 배조차 띄울 수 없게 된다. 이는 모두 물의 양이 많아졌기 때문이니라.” 공자는, 매사는 시초가 중요하며 시초가 나쁘면 갈수록 더 심해진다는 것을 깨우쳐 주려 했던 것이다. 공자의 이 이야기를 들은 자로는 당장 집으로 돌아가서 옷을 갈아입었다고 한다. [주] 양자강 : 티베트 고원의 북동부에서 발원하여 동중국해로 흘러 들어감. 장강(長江)이라고도 불림. 길이 5800Km. 민산 : 사천(四川)?청해(靑海) 두 성(省)의 경계에 위치한 산.
Board 고사성어 2022.10.26 風文 R 911
“힘 빼” 합기도(aikido) 선생님은 몸의 신통방통함을 간단한 실험으로 보여주곤 한다. 숨을 들이쉬는 사람을 손으로 밀면 쉽게 뒤로 밀리지만, 내쉴 때 밀면 잘 밀리지 않는다(해보시라!). 몸무게는 변함없건만, 숨을 내뱉기만 해도 몸이 묵직해진다. 모든 수련은 경직된 힘을 빼는 과정, ‘비움’의 연습이다. 몸의 어느 한 곳에 힘을 주기보다는 몸 전체가 하나의 기계가 되어야 한다. 우리말은 힘을 마치 보이는 대상처럼 표현한다. 힘은 어딘가에 존재하며(있다, 없다), 생성하며(나다, 솟다), 사용과 변형을 거듭한다(쓰다, 들다, 주다, 받다, 합하다). 모든 생명은 자기 존재를 유지하려고 기를 쓴다. 숟가락 들 힘이든 타인에 대한 지배력이든, 인간은 힘을 획득하고 과시하려고 안간힘을 쓴다. 죽음은 힘의 상실이자 기운의 소멸(역설적이게도 주검은 딱딱하게 굳어 있다). 풍선은 바람이 빠지면 순식간에 쪼그라들지만, 몸은 힘을 빼도 쪼그라들지 않는다. ‘탈진’, ‘맥 풀림’, ‘축 처짐’과 다르다. 그릇이 속이 비어도 그대로이듯이, 자신의 형태를 유지한다. 허리가 펴지고 등이 곧추선다. 힘 빼기는 내 뼈에 끈덕지게 눌어붙어 있는 독기를 떼어내고, 깃털의 깃대처럼 뼈를 공백으로 전환시키는 일. 비움이야말로 거짓 힘을 가로지르는 진짜 힘이다. 몸에 힘을 빼면 말에도 힘을 뺄 수 있다. 그러니 헛심 쓰지 말고 ‘힘 빼!’ (*힘 빼면 얻는 효과: 1. 멀리 넓게 볼 수 있음. 2. 순발력이 생김. 3. 용쓰는 자를 알아볼 수 있으니, 노골적 힘이 난무하는 이 삼류 무림세계도 그냥저냥 살아낼 수 있음.) 작은, 하찮은 접미사는 단어에 뿌리는 향신료다. ‘돌멩이’에 쓰인 ‘-멩이’처럼 어떤 말(어근) 뒤에 들러붙어 미세한 의미를 얹는다. 후춧가루처럼 애초의 의미에 풍미를 더하며 말맛을 살아나게 한다. 그중에는 대상이 보통의 크기보다 작다는 걸 표시하는 게 있다. 축소접미사라 이르는데, 이탈리아어에 흔하다. ‘빌라’(villa)보다 작은 규모의 집을 ‘빌레타’(villetta)라 하거나, 교향곡인 ‘신포니아’(sinfonia)와 달리 현악기 몇개로만 연주하는 소규모 교향곡을 ‘신포니에타’(sinfonietta)라 하는 식이다. 한국어에는 새끼를 뜻하는 단어 ‘강아지, 송아지, 망아지, 병아리’에 쓰인 ‘-아지’, ‘-아리’ 같은 접미사에 그 흔적이 남아 있다. 그런데 ‘작은 것’은 작은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작은 것은 귀엽고 친근하기도 하지만, 미숙하고 하찮고 보잘것없는 것이기도 하다. 그래서 작은 건 쉽게 낮잡아 보인다. ‘-아지’는 동물 아닌 대상에도 쓰이는데, ‘꼬라지’(꼴), ‘모가지’(목), ‘싸가지’(싹) 같은 말을 보면 대상을 속되게 일컫는다는 걸 알 수 있다. ‘-아리’가 들어간 ‘이파리(잎), 매가리(맥), 쪼가리(쪽)’에도 대상을 하찮게 여기는 게 묻어 있다. 축소접미사라 하긴 어렵지만, ‘무르팍(무릎), 끄덩이(끝), 끄트머리(끝), 배때기, 사타구니(샅), 코빼기’ 같은 말에 쓰인 접미사에도 대상을 속되게 부르려는 의도가 담겨 있다. 향신료가 음식의 풍미를 좌우하듯, 접미사엔 감정이 묻어 있다. 접미사가 있는 한 감정을 숨길 수 없다. 뭐든 작은 게 결정적이다. 김진해 | 한겨레말글연구소 연구위원·경희대 교수
무엇을 어떻게 쓸까 - 이오덕 1부 산문을 어떻게 쓸까 설명문 쓰기 - 무엇을 어떻게 설명할까(4/4) 다음은 될 수 있는대로 고쳐서 쓰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되는 말을 들어 본다. - 부족한 이야기라든지 여기서 부족한 이라고 썼는데, 부족했던 이라고 쓸 말을 잘못 쓴 것 같다. 그런데 이 부족 이란 말도 모자란다는 말을 쓰는 것이 더 낫다. 그래서 모자랐던 이야기라든지 가 아니면 다 못했던 이야기라든지 하고 쓰는 것이 좋을 듯하다. -매월 틀린 말은 아니지만 달마다 라고 쓰도록 권하고 싶다. -보고되고 통과된다. 이것은 보고하고 통과시킨다 고 하는 것이 좋겠다. -발표자가 이 말은 발표하는 사람이 나 말하는 사람이 라고 쓰는 것이 좋겠다. - 더욱 함께 참여하는 마지막에 나온 말인데, 함께 보다는 많이 나 열심히 가 더 알맞은 말일 것같다. 참여 한다면 벌써 함께 하는 것이니까. 셋째로, 달리 쓸 수도 있는 말을 들어 본다. 왜 잘못 쓴 말도 아닌데 또 달리 쓸 수 있는 말을 드는가 하면, 무슨 글을 쓰더라도 말을 자유롭게 쓰고, 개성이는 자기 말로 써야 그 글이 더욱 잘 살아 나기에, 늘 자기가 쓰는 말이 아닌 다른 말을 들어 놓으면 더러 자기 말 버릇을 고치거나 말을 자유롭게 찾아 쓰는 데 참고가 될까 싶어서다. 이 글을 읽으면 너무 틀에 박힌 말이 많이 나온다. 학교에서 선생님들이 하는 말을 따라 학생들도 저절로 쓰게 되는 말, 그런 말을 아주 쓰지 말아라고 하는 것이 아니고, 그런 말만 쓸 때 결국 어른들의 말과 생각을 그대로 되풀이하는 것이 되고 만다는 사실을 알아 둘 필요가 있다. 이 글에서 그런 틀에 박힌 말을 보기로 들면, 앞에 나온 바로잡아야 할 말들 아니고도 입시위주 주인 참여 활동사항 건의사항 활동계획 최대한 토론 토의 적극 노력 학년별 ... 이럼 말들을 들 수 있다. 이런 말들은 실제로 학교에서 많이 쓰고 있을 것이다. 그래서 학교 생활을 소개하는 글에 이런 말이 나오는 것은 당연하고 자연스럽기도 하다고 볼 수 있지만, 학생들이 정말 학교의 임자가 되어 그 생활을 스스로 창조하면서 살아간다면, 입으로 하는 말까지 좀더 학생답게(어른들이 쓰는 판에 박힌 말에서 벗어나) 싱싱한 말을 쓸 수 있어야 하지 않겠나. 그런 정도까지 가야 학생들이 진짜 학교에서 주인 노릇을 할 수 있지 않겠나 싶다. 그래서 졸업을 하고 난 다음에도 정말 이 나라의 주인이 될 것 아닌가 싶다. 지금까지 쓰던 말을 모조리 다 물리치라는 것이 아니고 그럴 수도 없다. 우선 몇 가지 말이라도 달리 써 보려고 하는 노력만은 있어야 되겠다. - 학교의 주인은 학생이다 라는 말을 많이 쓴다. 이럴 때 나오는 ...라는 이 문제다. 언제부턴가 글이고 말이 모두 이렇게 되어간다. ...는 이나 ...하는 이 본래부터 많이 쓰던 우리말이다. - 입시위주의 교육 속에서 이것은 입학시험을 목표로 하는 교육에서 로 쓸 수 잇다. - 학생들 스스로 움직이고 참여하는 활동이 여기 나오는 참여 란 말은 참 많이 쓰고, 이 글에서도 여러 번 나온다. 많이 쓰는 말을 따라서 쓰다 보면 안 써야 할 자리에도 쓰게 된다. 여기서는 참여하는 을 함께 하는 이라고 써도 될 것이다. -학생자치기구이다. 여기 나온 기구 란 말을 우리말로 쓸 수 없을까? 얼거리 라고 할 수는 겠나 싶다. - 그 한달 중 이 중 이란 말을 가끔은 가운데 라고도 쓰면 좋겠다. 그래서 가운데 란우리말을 살렸으면 한다. - 건의사항 이것은 올리는 의견 해달라는 의견 바라는 것 이렇게 여러 가지로 자유롭게 말할 수 있다. - 최대한 학생들 안에서 이것은 될 수 있는 대로 학생들끼리 라고 써도 좋을 것이다. - 해결하려 노력하고 있다. 풀려고 애쓰고 있다 고 쓰면 어떨까. - 한 학기 중 학년별로 이것은 한 학기 동안 학년마다 따로 라고 써도 될 것이다. - 토의한다. 이 말은 따지고 의논한다 고 쓸 수도 있다. - 최소한 이 말은 적어도 하는 것이 더 낫겠다. - 주제 으뜸제목 중심제목 이라 할 수도 있다. 더러는 문제 라고 하는 것이 더 알맞은 경우도 있다. - 물론이고 말할 것 없고 해도 될 말이다. - 말한 바와 같이 바 란 말은 글에서만 쓴다. 그래서 이 경우에는 말했듯이 나 말한대로 라고쓰는 것이 낫겠다. - 적극 참여해야겠다. 열심히 참석해야겠다 든지 부지런히 함께 해야겠다 고 써도 될 것이다. 적극적으로 를 쓰지 않은 것은 잘 되었다. - 활동사항과 결과를 보고하고 이것은 앞에서도 나왔는데, 활동한 것과 결과를 알리고 이렇게 써도 될것이다. 창조 란 말을 사전에서는 처음 만들어냄 이라고 풀이해 놓았다. 그래서 삶을 창조한다 고 하면 새로 살아가는 길을 열어간다 는 말이 된다. 그런데 말을 창조하면서 쓴다 고 하면, 신기한 말로 머리로 궁리해서 만들어 낸다는 말이 아니다. 자기 말, 어렸을 때부터 배워서 잘 알고 있는 우리말을 살려서 써야 말을 창조하는 것이 된다. 말을 창조하는 마음가짐으로 써야 삶을 창조할 수 있다는 진리를 잊지 말아야 하겠다.
한국대표수필 - 김동리 외 9명 "안수길편)" 안수길(1911~1977) 소설가. 호는 남석. 함남 함흥 출생. 일본 와세다 대학 수학. 초기에는 만주에서 주로 농촌 소설을 썼고 해방 후에는 우리 민족의 역사적 비극을 더듬는 작업에 몰두하였다. 특히 장편 "북간도"는 10년 가까운 세월을 바쳐서 완성한 대하 소설로 4대에 걸친 겨레의 수난사를 그린 문제작이다. 수필에서도 깔끔하면서도 격조 놀은 품격을 보여 주었다. 일하는 행복 알랭이 그의 "행복론"에서, '파리의 경찰서장이 가장 행복한 사람'이라고 한 말은, 언제 생각을 해 보아도 재치 있고 의미심장한 말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경찰서장이 가장 행복한 사람이라고 하는 것은, 예기하지 않았던 사건들이 뒤를 이어 기다리고 있고, 직책상 그것을 처리하지 않아서는 안 되기 때문에, 할 일이 없어 하품을 하거나 적적한 느낌이 들 때는 결코 있을 수 없기 때문인 것이다. 이 말은, 사람이란 일을 하는 데서 행복을 누릴 수 있고, 행복을 차지하기 위해서는 일을 해야 한다는 뜻으로 풀이할 수 있겠다. 사실, 일에 열중하고 있노라면, 몸과 마음에 일종의 리듬이 생겨 쾌적한 느낌을 맛볼 수 있고, 일한 자리가 생기게 되므로, 역시 일종의 정복감 같은 것을 느낄 수 있게 된다. 더구나 특정한 일을 끝마쳤을 때의 쾌감은, 일이 주는 일련의 행복감의 절정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렇듯 행복감을 맛볼 수 있게 하는 일을 싫어하는 본능 같은 것이 사람에게는 있다. 게으름이 그것이다. 사람의 마음 속에 있는 이 게으름의 검은 흐름은, 마치 물이 낮은 데로 한없이 흐르게 마련인 것처럼, 걷잡지 않으면 끝가는 데를 알 수 없게 되고, 마침내는 일에서 맛볼 수 있는 행복감에 영영 참여하지 못하게 되고 만다. 세상에는 이런 사람들이 적지 않다. 물론 불행한 사람들이다. 이런 사람들이 많은 사회는 불행한 사회요, 이런 사람들이 많은 나라 역시 불행한 나라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므로 개인으로서도 행복해지기 위해서는 게으름의 검은 흐름에 둑을 쌓고 일에 열중해야 함은 물론, 사회나 나라를 위해서도 일하는 기풍을 불러일으키지 않으면 아니 될 것이다. 하물며, 우리가 처해 있는 현실이 이런 풍조를 절실히 요구하고 있음에랴. 일이 무엇이냐 하는 것은 어렵게 생각할 필요가 없다. 일이라고 하면 흔히 육체적인 것만을 생각하거나, 혹은 물질적 보수만을 앞세우는 사람들이 없지 않다. 물론, 정신적 노동의 경우에도 육체적 노동의 요소가 전연 없는 것이 아니요, 또 일에는 대체로 물질적 보수가 따르는 법이다. 그러나, 육체적 노동만이 일이라거나, 일에는 반드시 물질적 보수가 따른다고 할 수는 없는 것이다. 예를 들면, 학생이 공부로 책을 읽는 것은 학생으로서는 훌륭한 일이나 육체적 노동은 아닌 것이요, 일인 공부를 했다고 해서 학생이 보수를 받는 법도 없다. 그러므로 나는, 일이란 정신적인 것이든 육체적인 것이든, 보수가 있는 것이든 없는 것이든, 어쨌든 각자가 해야 할 바를 말하는 것이라고 하고 싶다. 각자가 해야 할 바에 게으름을 부리지 말고 달려들어 열중하는 습관을 특히 학생들은 길러야 할 것이다. 이런 습관을 기르기 위해서는 매일 일정 분량의 일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일이란 처음 달라붙을 때에는 싫고 신명이 나지 않으나, 견디고 그냥 밀고 나가는 사이에 리듬이 생기게 마련인 것이요, 리듬이 생기게 되면 비로소 행복감에 잠기게 되는 것이다. 로댕도 덮어놓고 일을 하지고 말했고, 도스토예프스키도 언제 영감을 기다려 일에 달라붙겠는가 하고 말했다. 스탕달도 매일 일정량의 일을 규칙적으로 했다고 스스로 써 놓고 있다. 이렇게 위대한 업적을 남겨 놓은 사람들의 일하는 방법은 한결같이 우선 달라붙는 것이요, 매일 끊임없이 일정량의 일을 하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