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할 땐 별이 되고 - 이해인 처음에 지녔던 사랑으로 - 유진 수사님께 유진 수사님, 펭귄새를 연상케 하는 수도복을 입고 새벽 두 시면 어김없이 일어나 기도하는 `새벽의 바람` 트라피스트 수도자로서의 수사님의 모습을 그려 보며 새해 첫 글을 드립니다. 헨리 나웬의 <제네시 일기>를 통해 더욱 친숙했던 그곳을 방문하여 기도 시간에 숨도 크게 못 쉬고 앉아 있었던 저는 은은한 불빛 속에 흘러나오던 수사님들의 그 아름다운 노래를 잊을 수 없습니다. 그곳은 마치 깊고 큰 침묵의 섬으로 느껴져 일상적인 말을 하기도 조심스러웠으나 그러한 침묵속에서도 경직되지 않은 사랑의 미소를 보았습니다. 얼마 전 여행에서 돌아오니 함께 일하는 수녀님이 고운 단풍잎도 몇 개 끼워 넣어 새로 도배한 우리 방의 하얀 창호지문이 얼마나 은은한 기쁨을 주던지요, 바구니에 담겨있는 우편물들 속엔 수사님이 보내 주신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희망의 문턱을 넘어서>영문판과 반가운 편지도 들어 있었습니다. 소설<침묵>의 작가 엔도 슈사쿠의 <깊은 강>과 더블어 제가 최근에 가장 읽고 싶은 책 중의 하나였기에 더욱 반가웠습니다. `수도자의 단순성이란 것이 부정적 고행 연습에서 온다기보다 단호한 생의 긍정에서 온다고 생각된다`는 말과 함께 단순노동에 대한 묵상을 생생히 적어 보내신 수사님의 글은 늘 깊은 침묵 속에서 건져 올린 참된 말과 지혜로 빛납니다. 오늘은 `묵시록` 2, 3장의 다음 말씀을 되풀이해 읽으며 제 자신의 모습과 삶을 돌아보았습니다. `네가 살아 있다는 말이 있지만 실상 너는 죽었다. 그러므로 깨어나거라. 너에게 아직 남아 있는 것이 완전히 숨지기 전에 힘을 북돋워 주어라. ...너에게 나무랄 것이 한 가지 있다. 그것은 네가 처음에 지녔던 사랑을 버린 것이다. 그러므로 네가 어디에서 빗나갔는지를 생각하여 뉘우치고, 처음에 하던 일들을 다시 하여라.` 살아오면서 어느 순간 삶에 활기가 없어지고 모든 것이 시들하게 느껴지는 이유는 따지고 보면 우리가 한껏 순수하고 뜨거웠던 `처음의 마음`을 잃어버리고 적당히 타협하면서 타성에 빠져 안일하게 사는 데에 길들여졌기 때문이 아닌가 싶습니다. 이미 정상에 올라와 있는 예술인은 그가 처음으로 데뷔할 당시의 겸허하고 진지했던 노력을 새롭게 해야 퇴보하지 않으며, 수도자들은 수도원에 갓 들어올 때의 그 풋풋했던 설레임과 `열심히 잘살아 보겠다`던 선한 의지를 끊임없는 노력으로 새롭게 실천해 나가야만 제 모습을 갖춘 행복한 수도자가 될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래서 저도 올해는 좀더 겸허하고 참을성 있게 살고 싶다고 다짐했던 첫마음, 평범한 작은 일에 더욱 충실해야겠다고 다짐했던 첫마음, 다른 이에게 상처 주는 말을 하지 않고 좋은 말도 헤프게 하지 말아야겠다고 다짐했던 첫마음을 되찾아 실천해야겠습니다. 구슬이 서 말이라도 꿰어야 보배이듯이 매일 새롭게 주어지는 새해 새시간의 구슬들을 믿음과 사랑으로 꿰어 귀하고 쓸모 있게 만들 수 있는 지혜를 구하고 싶습니다. 하느님과 이웃을 향해 `처음에 지녔던 사랑`이 퇴색치 않는 푸르름으로 남아 있을 수 있도록 애쓰고 기도해야 겠습니다. 수사님의 그 고요하고 따뜻한 마음과 제네시수도원의 색유리처럼 아름다운 기도 속에 저를 자주 기억해 주신다고 생각하면 기쁘고 마음 든든하답니다. 그곳의 유명한 빵 굽는 냄새처럼 소박하고 구수한 분위기를 지니셨던 객실의 친절한 죠지 수사님께도 문안드려 주시길 바랍니다. 떠나신 지 오래되므로 모국의 산천과 사람들이 종종 그리우실 수사님께 새로 나온 한국우표도 몇 장 동봉할께요. 주님의 은총 속에 부디 건강하시고 새해 복 많이 받으십시오! (1994)
Board 삶 속 글 2022.10.11 風文 R 400
한국대표수필 - 김동리 외 9명 "한흑구편" 한흑구(1909~1979) 수필가. 소설가. 평양 출생. 미국 템플 대학 신문학과 수료 포항 수산 대학 교수 역임. 30년대에 월간지 '대평양', 문예지 '백광'을 창간. 주재하면서 단편 소설과 평론을 활발하게 발표한 바 있으며 해방 후에는 주로 수필에 전념하여 자연의 아름다움과 시정 생활의 애틋함을 그렸다. 석류 내 책상 위에는 몇 날 전부터, 석류 한 개가 놓여 있다. 큰 사과만한 크기에, 그 빛깔은 홍옥과 비슷하지만, 그 모양은 사과와는 반대로 위쪽이 빠르고 돈주머니 모양으로 머리 끝에 주름이 잡혀져 있다. 보석을 꽉 채워 넣고 붙들어매 놓은 것 같다. 아닌게아니라, 작은 꿀단지가 깨어진 것같이 금이 비끼어 터진 굵은 선 속에는 무엇인가 보석같이 빤짝빤짝 빛나는 것이 보인다. 나는 가만히 앉아서 석류의 모양을 한참이나 물끄러미 바라본다. 매끈한 사과와는 달리 무엇에 매를 맞았는지 혹과 같은 것이 울툭불툭한 겉모양 그 속에는 정녕코 금은보화가 꽉 채워져 있는 것 같은 모습이다. 나는 아까워서 아까워서 석류 한 개를 놓고 매일같이 바라만 보고 있다. 행여, 금이 나서 터진 그 석을 쪼개 볼 생각을 하지 않는다. 보석 주머니 같은 이 석류 한 기를 구하기에 얼마나 많은 꿈을 꾸었나. 나는 그것이 꽃 피는 봄부터 비바람이 부는 여름 장마철 속에서도, 또한 새맑은 가을 하늘에 추석달이 기울 때까지도, 얼마나 오랜 나날을 그리운 정으로 보고 싶고 갖고 싶은 꿈을 꾸었었나. "할머님, 추석도 지나고 했으니, 이젠 그 석류 하나 따 주세요." 나는 석류나무집 할머니에게 이렇게 애걸했으나, 할머니는 또 더 기다려야 한다고 했다. "아니 약에 쓴다면서 벌써 따아? 찬서리를 맞고, 터져서 금이 나야 약이 되는 거지! 가래도 잘 삭고, 오랜 해수병엔 특효지. 몇 날만 더 참아요." 이렇게 한 해의 철이 다 기울어져서야, 끝내 구해 온 귀한 석류 한 개가 내 책상 위에, 내 눈앞에 고요히 놓여 있다. 석류나무는 소아시아가 원산으로 살구나무보다는 키가 작은 관상용의 낙엽 교목으로서, 이상한 꽃과 열매를 맺는 특색을 가진 나무다. 가지가 꾸불꾸불하고, 터실터실하고, 대추나무같이 삐죽삐죽한 가지 같은 메마른 작은 가지들이 이파리도 없이 여기저기 돋아 나온다. 석류나무는 물론 목재도 될 수 없지마는, 과실을 맺는 나무치고는 작은 편에 들고, 꽃도 열매도 많이 맺지 못한다. 그러나 그 꽃은 양귀비꽃같이 붉고, 아름답고, 그 꽃받침은 무화과와 같이 살지 누두형으로 되어 있으며, 나중엔 석류의 귀한 과피가 된다. 봄이 지나고, 장미의 계절이라는 6월이 되면 석류나무는 정열의 꽃을 피우기 시작한다. 장구같이 생긴 꽃받침 속에 선홍의 꽃잎으로 꽉꽉 채워서 그 둘레를 오붓하게 피어나온다. 꽃도 되고 또한 열매도 되는 이 육중한 꽃은 7월의 장마로 반 이상이 땅에 떨어져 어린애들의 손가락에 골무 노릇을 하기도 한다. 10월이 지나고 하늘이 코발트색으로 높아 가면, 주먹 같은 빨간 석류 열매들이 검푸른 이파리들 속에서 뻔쩍뻔쩍 빛나는 왕관을 쓴 듯이 빛나고 있다. 석류의 머리 쪽은 별과 같이 삐죽삐죽한 왕관의 모양을 하고 있고, 그것들이 가을의 된서리에 쭈그러지면 돈주머니를 잘라맨 듯한 모양을 한다. 8월의 태양과 뜨거운 더위에서 정열을 다 뿜어 내지 못했는지 석류의 조롱박 같은 얼굴 위에는 매를 맞아서 부어오른 것같이 혹이 나와서 울툭불툭 매끄럽지가 않다. 나는 미국의 이미지스트인 여류 시인 힐다 둘리틀의(더위)라는 시의 몇 구절을 연상해 본다. 더위 이 짙은 공기를 통해서 열매가 떨어질 수 있을까 배들의 끝들을 뭉툭하게, 또한 포도알들을 동그랗게, 치받쳐 올리는 이 더위 속으로 열매가 떨어질 수 있을까. 둘리틀의 (더위)라는 시를 읽으면, 모든 열매가 8월의 치받치는 더위 속에서 뭉툭하고 매끈하게 된다고 그 이미지를 그리고 있다. 그러나 석류는 열매 속에 무수한 보물의 정열과 생명이 꿈틀거리고 있어서 그 겉모양까지가 울툭불툭 튀어나오다 못해서 찢어지고, 깨어져서 크게 금이 나지 않았나 하고 생각이 된다. 나는 석류를 손에 들고 깨어져 금이 난 그 속을 들여다보다가, 그 자수정 같고, 금강석 같이 빛나는 속을 쪼개 본다. 벌집같이 오몽고몽한 갈피 속마다 반짝거리는 보석 같은 석류씨(알)들이 꽉 차 있다. 그 수정 같고, 금강석 같은 석류알을 하나 떼어서 입에다 물고 혀로 굴려 보면서 주요한 씨의 시집 "아름다운 새벽"에 실렸던 "앵두"의 일절을 생각나는 대로 한 번 되새겨본다. 5월에 무르익은 앵두 한 알, 입에 넣고 터질까 봐 그냥 혀로만 굴려 봅니다. 입에 넣고, 혀로 굴려 보고, 씹어 보는 그 맛, 입 속, 가슴 속, 머릿속까지 시원하고, 새틋한 그 맛. 온 여름의 뜨거운 태양과 가을의 된서리 속에서 과피가 터질 때까지 정열을 간직하고, 또 터져나온 그 기개의 참되고, 아름다운 결정이여. 나는 책상 위에 쪼개 놓은 석류알들을 두루두루 바라보고 있다.
내 마음이 강해야 내 소원도 이루어진다 - 잭 캔필드, 마크 빅터 한센 4. 가족들과의 더 좋은 관계를 위하여 '사랑의 열 가지 방법'을 요청하라 다잉앤 로만스 - '완전한 존경을 향하여'의 저자 다음은 내가 요청했었던 '당신이 나에게 해줬으면 하는 사랑의 열 가지 방법'이다. 1. 한 달에 최소한 두 차례는 예상치 않은 행동으로 나를 놀라게 해 주세요. 2. 일주일에 몇 차례 전화를 걸어 애정어린 메시지를 남게 주세요. 3. 한 달에 두 번은 꽃을 사주세요. 4. 우리 관계에 대한 긍정적인 감정을 글로 써서 주세요. 우리가 더 친밀감을 느끼게 될 거예요. 5. 일주일에 두 번은 무조건 시간을 내서 내 말에 진지하게 귀를 기울여 주세요. 6. 멋진 데이트 계획을 세우세요. 예를 들어, '오페라의 유령' 순회 공연 소식을 들었다면 몇 달 전에 미리 관람표를 구해 놨다가 나중에 그것을 함께 보러 가지고 말하는 거예요. 7. 깜짝 여행 계획을 세우세요. 이번 주말에 어디론가 가자고 말하면서도 목적지나 그 세부사항에 대해서는 시치미떼는 거예요. 8. 당신이 나를 사랑할 수 있는 최고의 방법은 나에게 요청하는 거예요. 내가 이 목록을 만드는 것처럼 당신도 자세하게 나에게 요청해 주세요. 9. 당신이 평상시에 남에게 고마워하는 점에 대해서 말이나, 편지로써 표현해 주세요. 10. 내가 내 꿈을 이룰 수 있도록 도와주세요. 시간을 내서 당신의 꿈을 말해 준다면 우리는 힘을 합해 서로의 꿈을 성취할 수 있어요. 어리다고 우습게 보지 말아라 다른 이들은 현상을 보고 그 이유를 묻는다. 하지만 나는 무엇이 가능한지를 보고 그것을 왜 하지 않느냐고 묻는다. - 존 F. 케네디 제인 넬슨 우리는 아이들을 더 존경심을 가지고 대할 필요가 있다. 그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의견을 심각하게 받아들여야 한다. 항상 무슨 일이 있었는지, 왜 그런 일이 벌어졌는지, 그 일에 대해서 어떤 기분을 느끼고, 마땅히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말하지 말아라. 대신, 다음과 같은 명료하게 질문하라. 네가 무엇을 했니? 어떻게 되었니? 그것에 대한 기분이 어떠니? 네가 이루려는 것이 무엇이니? 네가 원하는 결과를 얻지 못했다면, 그것으로부터 어떤 교훈을 얻었니? 그 정보를 다음에 어떻게 사용할 수 있을까? 이런 질문은 자녀들에게 행동의 결과를 더불어 미래의 더 좋은 방법을 생각하도록 가르친다. 또한, 그들을 폐쇄적이고 소극적인 대신 개방적이고 적극적으로 유지시켜 준다. 교육은 '애주카레'라는 라틴어에서 파생되었고, 그 뜻은 '밖으로 끄집어낸다'이다. 우리 대부분은 아이들의 안에 너무 많은 것을 채워넣기만 하고 충분한 것을 밖으로 끄집어내지 못한다. 우리는 진정한 관심을 가지고 더 많이 질문할 필요가 있다. '그래, 이야기가 다 끝났니'라고 말하지 말고, '어머, 정말 재미있구나. 그래서 어떻게 됐니? 한 번 말해 볼래. 네 기분이 어땠니?' 혹은 '네가 거기에서 무엇을 배웠니? 라고 질문하라. 아이들에게 야단을 치거나 도와주려고 하지 말고, 그들이 더 많이 탐험하도록 도와줘라.
Board 추천글 2022.10.11 風文 R 1738
국사무쌍(國士無雙) 國:나라 국. 士:선비 사. 無:없을 무. 雙:쌍 쌍. [유사어]동량지기(棟梁之器) [출전]《史記》〈淮陰侯列傳〉 나라 안에 견줄 만한 자가 없는 인재라는 뜻으로 국내에서 가장 뛰어난 인물을 일컫는 말. 초패왕 항우와 한왕 유방에 의해 진나라가 멸망한 한왕 원년(元年:B.C. 206)의 일이다. 당시 한군(漢軍)에는 한신(韓信)이라는 군관이 있었다. 처음에 그는 초군(楚軍)에 속해 있었으나 아무리 군략(軍略)을 헌책(獻策)해도 받아 주지 않는 항우에게 실망하여 초군을 이탈, 한군에 투신한 자이다. 그 후 한신은 우연한 일로 재능을 인정받아 군량을 관리하는 치속도위(治粟都尉)가 되었다. 이때부터 그는 직책상 승상인 소하(蕭何)와도 자주 만났다. 그래서 한신이 비범한 인물이라는 것을 안 소하는 그에게 은근히 기대를 걸고 있었다. 그 무렵, 고향을 멀리 떠나온 한군은 향수에 젖어 도망치는 장병이 날로 늘어나는 바람에 사기가 말이 아니었다. 그 도망병 가운데는 한신도 끼어 있었다. 영재(英才)를 자부하는 그는 치속도위 정도로는 도저히 만족할 수 없었던 것이다. 소하는 한신이 도망갔다는 보고를 받자 황급히 말에 올라 그 뒤를 쫓았다. 그 광경을 본 장수가 소하도 도망가는 줄 알고 유방에게 고했다. 그러자 오른팔을 잃은 듯이 낙담한 유방은 노여움 또한 컸다. 그러데 이틀 후 소하가 돌아왔다. 유방은 말할 수 없이 기뻤지만 노한 얼굴로 도망친 이유를 물었다. “승상(丞相)이란 자가 도망을 치다니, 대체 어찌된 일이오?” “도망친 것이 아니오라, 도망친 자를 잡으러 갔던 것이옵니다.” “그래, 누구를?” “한신이옵니다.” “뭐, 한신? 이제까지 열 명이 넘는 장군이 도망쳤지만, 경은 그 중 한 사람이라도 뒤쫓은 적이 있소?” “이제까지 도망친 제장(諸將) 따위는 얼마든지 얻을 수 있사오나, 한신은 실로 ‘국사무쌍’이라고 할 만한 인물이옵니다. 만약 전하께오서 이 파촉(巴蜀)의 땅만으로 만족하시겠다면 한신이란 인물은 필요 없사옵니다. 하오나 동방으로 진출해서 천하를 손에 넣는 것이 소망이시라면 한신을 제쳐놓고는 함께 군략을 도모할 인물이 없는 줄로 아나이다.” “물론, 과인은 천하 통일이 소망이오.” “하오면 한신을 활용하시오소서.” “짐은 한신이란 인물을 모르지만 경이 그토록 천거하니 경을 위해 그를 장군으로 기용하겠소.” “그 정도로는 활용하실 수 없사옵니다.” “그러면 대장군에 임명하겠소.” 이리하여 한신은 대장군이 되었다. 즉 기량을 한껏 발휘할 수 있는 출발점에 서게 된 것이다.
Board 고사성어 2022.10.11 風文 R 657
안녕히 상상하는 인간은 얼마나 자유로운가! 끝을 가늠할 수도 가닿을 수도 없구나. 바퀴 없는 자전거 타기. 달의 뒷면에 앉아 도시락 까먹기. 우리 아들의 아들로 태어나기. 배낭 메고 부산에서 출발해 강릉, 속초, 원산, 청진, 두만강 건너 블라디보스토크 지나 모스크바까지 가기. 죽음의 길은 날아가는 걸까 걸어가는 걸까. 그러다 문득 현실로 돌아오면 새삼 알게 되지. 일상은 이다지도 진부하구나. 이토록 아무것도 아니구나. 그럴 때면 ‘안녕히’ 같은 말을 곱씹는다. ‘아무 탈이나 걱정 없이 편안하게’라는 뜻이렷다. ‘편안하게’ 할 수 있는 게 한둘이 아닐 텐데, ‘안녕히’는 어떤 말과 함께 쓰이나?(1분 안에 열 개를 생각해 낸다면 부디 당신이 이 칼럼을 맡아주오.) 아마도 이런 말들을 떠올릴 듯. ‘안녕히 계세요.’ ‘안녕히 가세요.’ ‘안녕히 주무세요.’ ‘안녕히 다녀오세요.’ 더 쥐어짜내면 ‘안녕히 돌아가세요.’ 정도. 뭐가 문제냐고? 이런 거지. ‘안녕히 오세요.’는 왜 안 되냐고? ‘안녕히 쉬세요. 안녕히 노세요. 안녕히 일하세요. 안녕히 드세요. 안녕히 보세요.’는 왜 어색하냐고? 뜻만 보면 낯가림 없이 여기저기 자유롭게 들러붙을 듯한데, 실제론 제약이 심하군. ‘안녕히’의 친구는 기껏 네다섯일 뿐. 안녕히 갈 수는 있어도 안녕히 올 수는 없다니. 인간은 말이 만들어 놓은 이런 ‘관계의 그물’ 속에 잡혀 있다. 설명할 수 없는 미지의 망. 이 옴짝달싹할 수 없는 반복 속에서 차이를 만드는 수밖에 없다. 그러니 어제와 다르게 ‘안녕히 가세요.’ 날마다 새롭게 ‘안녕히 계세요.’ ‘~고 말했다’ 모든 글은 편집이다. 본 것, 그중에서 몇 가지만 남기고 나머지는 버린다. 사진은 카메라 앵글에 잡힌 피사체를 모두 담는다. 글은 사진보다는 요리에 가깝다. 자르고 버리고 선택하고 이어 붙여서 그럴듯한 이야기 하나를 만든다. 직접 경험한 일을 쓸 때는 ‘전갱이구이가 맛있더군’처럼 ‘-더-’를 쓴다. 직접 경험했으니 확신이 있고 평가도 선명하다. 허나 어찌 세상만사를 다 경험하리. 남들한테서 들은 말을 옮기기도 하니, 이럴 땐 ‘~다고 하다’, 더 줄여 ‘~대’를 쓴다. ‘그 소설 재미있대’라 하면 나는 아직 못 읽었지만 먼저 읽은 사람이 그렇게 말했다는 뜻이다. 기자는 사건과 함께 말의 전달자다. 취재원의 말을 자주 인용한다. 우리는 기자가 그 말을 어떤 인용의 틀 속에 집어넣는지를 봐야 한다. 가장 건조하고 객관적인 틀이 ‘~고 말했다’이다. 아무리 저열한 기사라 해도 ‘~고 말했다’를 쓰면 마치 중립적이고 냉정을 잃지 않은 글처럼 보인다. 반면에 이 자리에 ‘비판했다, 비난했다, 촉구했다, 반박했다, 공격했다, 꼬집었다, 비꼬았다, 몰아세웠다, 맹공을 퍼부었다’ 등을 쓰면 기자의 ‘해석’과 ‘감정’이 느껴진다. 기자의 견해가 은근히, 노골적으로 개입된다. “‘나는 사기꾼이 아니다’고 말했다”와 ‘부인했다’와 ‘잡아뗐다’의 격차를 느껴보시라. 눈에 힘을 빼고 무표정한 얼굴을 한 사람이 눈싸움에서 이기더라. 평정심! ‘~고 말했다’는 기자가 자기 글에 힘을 빼고 있음을 보여주는 표시다. 나는 이걸로 신문을 비교하는 게 ‘비판적 신문읽기의 첫걸음’이라고 ‘우긴다.’
무엇을 어떻게 쓸까 - 이오덕 1부 산문을 어떻게 쓸까 감상문 쓰기 - 생각은 어디서 나오는가 이웃 사람들의 삶을 바라보며 다음은 고등학교 3학년 학생이 쓴 글이다. 이번에는 낱말이나 말법도 보아야 하겠지만 글의 내용을 더 많이 생각해 보자. 라면 한 그릇의 사색 정해진 밤 자습을 마치고 출출한 배를 채우기 위해 집에 와서 혼자 라면을 끓여서 마시다시피 먹고 있는데, 창 밖에서 싸우는 소리가 들린다. 내다보니 술이 취했는지 안 취했는지는 알 수 없는 아저씨와 아주머니의 목에 핏대 세우는 싸움이다. 동네 사람들도 몇 끼어든 것 같다. 나로서는 감히 해볼 엄두도 안 나는 욕이 동네를 울리고 있다. 그런 속에서 스프를 두 개 넣어 걸쭉한 라면과 걸쭉한 그 소란을 음미하여 본다. 저 사람들은 나쁜 사람들인가? 아닐 게다. 그런 보통 사람일 게다. 파라리 넥타이 매고 수많은 사람들의 인권이나 생명에는 관심도 없이 일을 처리하는 사람들이 훨씬 더 나쁘다. 그런데 저 사람들이 왜 나쁜 사람으로 보이는가? 신사답지 못하게 욕을 하기 때문이다. 솔직히 저 사람들이 부시 대통령보다 더 나쁜 사람으로 보인다. 국민에게 발포하는 것을 거리끼지 않는, 군인이었던 정치인도 더 나쁜 사람이다. 저 사람들은 사람을 죽이지 않는다. 그래도 저들은 상스러운 욕을 여러 사람이 듣도록 함으로써 남에게 피해를 주고 있지 않은가? 아니다. 우리들은 어떤가? 눈도 깜짝 않고 남의 마음을 도려낼 만한 가시 같은 말을 내뱉고 있다. 그것도 더 배운 놈일수록 남 공격하는 게 논리적이고 자연스러우며, 얼굴 빛은 물론 맥박이나 혈압의 변화도 없다. 그나마 저들은 흥분해 있고 이성이 잠시 비켜난 상태 아닌가? 그럼 저들이 우리보다 착한가? 그런 것 같지는 않다. 다 같을 게다. 그럼 왜 저들은 나쁘게 보이고 우리들은 그렇지 않은가? 왜 대통령이 전쟁 터뜨리면 인기가 하늘로 치솟는가? 돈 많고 많이 배운 놈일수록 포장을 잘 하기 때문이다. 그럼 저들은 못 배우고 돈 없다는 이유로 자기의 나쁜 점을 그대로 평가받아야 하는 불이익이 아니고 정당한 거다. 나쁜 것 나쁘게 평가받지 않는 게 부당한 거다. 그럼 나나 더 배운 놈이나 돈 많은 놈이 부당한 것이네? 그렇다. 그럼 어떻게 해야 정당해질 수 있지? 모르겠다. 어쨌건 플러스 마이너스로 볼 때 우리는 마이너스고 저들은 제로에 가까우니 저들에게 항상 미안해하는 마음을 가지고 반성하면서 살아야 한다. 가진 놈 배운 놈은 마이너스 벗어나기만 해도 대단한 인물이 된다. 그만큼 많이 가지고 많이 배울수록 더러워지기 쉽고 깨끗해지기 어렵다는 얘기다. --------------------------------------------------------- 이 글은 꽤 주의해서 읽어야 글쓴이의 생각을 따라가게 될 것 같다. 그만큼 남다른 생각이 나타나 있고, 글월마다 뜻이 차 있다. 배가 고파 라면을 끓여 먹는데, 밖에서 고함소리가 나서 내다보니 아저씨의 아주머니가 `지거리를 하면서 싸우고 있고, 마을 사람도 몇이 끼어들어 있다. 여기서 글쓴이는 그 이상자세히 그 싸움의 속사정과 모습을 살피지 않았다. 그럴 시간도 없었겠지만, 흔히 일어나는 이웃 사람들의 싸움이라 도 그런 것이겠지 하고 그 이상 관심을 안 가졌던 것 같다. 그런데 흔히 일어나는 사람들의 싸움에 대해서 오늘은 뭔가 생각을 좀 정리해 봐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래서 내가 먹는 라면과 함께 곰곰이 되씹어 보자고 해서 생각을 적은 것이 이런 감상문이 되었다. 이 글에 나타난 글쓴이의 생각을 따라가 보나. 저 듣기 거북한 욕지거리, 교양이 없고 무식한 사람들이 토해내는 고함소리, 누구나 저 사람들을 욕할 것이다. 그러나 저 사람들은 나쁜 사람들이 아니다. 나쁘기로 말하면 저들을 욕하는 점잖은 사람들, 신사 숙년들, 무엇을 배웠다는 이들이 훨씬 나쁘다. 저들은 상스러운 욕을 할뿐이지만, 교양을 갖추고 배웠다는 사람들은 점잖게 논리를 세워서 상대편을 아주 크게 해치는 말을 한다. 그뿐 아니고 권력을 가진 사람은 사람의 목숨조차 아무렇지도 않게 다루고, 전쟁까지 일으켜 사람을 무더기로 죽인다. 그런데 어째서 골목에서 욕설을 하면서 싸우는 저들을 나쁘게 보이고, 돈 많이 가지고 많이 배우고 권세 있는 사람들은 나쁘지 않게 보이는가? 그것은 포장을 잘 하기 때문 이다. 곧 속임수를 쓰기 때문이다. 골목에서 싸우면서 고함을 지르는 사람들이 잘 한다고 할 수는 없지만, 그들의 그런 행동이 다른 사람들한테서 정당한 평가를 받고 있다면, 돈 많이 가지고 많이 배우고 한 사람들은 부당한 평가를 받고 있다. - 대강 이런 생각이다. 이 글을 쓴 학생은 자기도 배운 놈 편에 들어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저들이 우리보다 착한가? 하고 스스로 묻는 말에는 그런 것 같지 않다 고했고, 다 같을 게다 는 대답을 하게 된다. 여기서 우리 라고 한 말에는 돈 많이 가진 사람이나 권력을 잡고 있는 사람까지 들어가 있지는 않은 것 같다. 아무튼 배우지 못한 사람들, 그래서 언제나 땀흘려 일하면서 살아가는 시민들은 겉으로 보기에는 무식하고 거칠어서 사회를 어지럽히는 것 같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그래서 그들은 플러스 마이너스로 볼 때 플러스도 아니도 마이너스도 아닌 제로 에 가까운 자리에 있는 사람들이다. 따라서 저들에게 항상 미안한 마음을 가지고 반성하면서 살아야 한다. 가진 놈, 배운 놈은 마이너스 벗어나기만 해도 대단한 놈이 된다 고 결론을 내리고 있다. 이 글을 읽는 사람 누구나 고개를 끄덕일 수 있도록 친절하게 자기 생각을 잘 정리해서 조리있게 쓴 글이라고 말할 수는 없을 것 같다. 그러나 세상일과 삶을 보는 관점이 뚜렷하고, 그래서 아주 확신을 가지고 쓴 글이다. 글쓴이의 이런 주관과 신념은 어떤 책에 씌어 있는 이론을 읽어서 머리 속에 넣어 놓은 것으로 풀어 낸 것이 아니다. 삶 속에서 몸으로 느끼고 깨달은 것이다. 그렇게 느껴진다. 그만큼 자기 것으로 된 말로, 확신에 찬 말로 썼다. 이 글에서 무엇보다도 크게 느끼게 되는 것은 가진 것 없고 배운 것 없이 살아가는 보통 사람들에 대한 글쓴이의 깊은 이해와 따스한 사랑이다. 사람에 대한 이해와 사랑이 없이 이런 생각을 쓸 수는 없다. 그리고 고등학생으로서 이만한 생각을 가졌다는 것이 여간 놀라운 일이 아니라고 본다. 평소에 가지고 있던 느낌과 생각을 쓴 것이 자세하고 정확하며, 그래서 그것이 결코 어떤 감정에 치우치거나 한쪽으로 기울어지지 않고 매우 온당하게 나타나 있는 점도 주목할 만하다. 이것 또한 글쓴이가 가진 오염되지 않은 깨끗한 심정에서 오는 것이라 여겨진다. 글의 내용에 대해서는 이쯤 하고, 낱말과 문장에 대해서 말해 본다. - 라면 한 그릇의 사색 좀 멋을 부린 제목이다. 이런 멋이란 알고 보면 흉내다. 차 한잔의 사상 꼴로 쓴 것이다. 이렇게 쓰더라도 늘 입에서 나오는 낱말을 쓰면 느낌이 많이 달라진다. 사색 을 생각 으로 바꾸어 보라. 흉내가 아니고 제법 제 생각같이 느껴질 것이다. - 내다보니 술에 취했는지 안 취했는지는 알 수 없는 아저씨와 아주머니의 목에 핏대 세우는 싸움이다. 여기서 ...아저씨와 아주머니의 목에 핏대 세우는 싸움이다 고 하는 말이 괴상하게 되어 있다. 이것은 우리말법이 아니다. 우리말법일 수 없는 것은, 이런 말이 우리 입에서 나올 수 없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곧 깨달을 수 있다. 하도 외국글 따라 외국말법을 그대로 옮겨 써놓은 글을 많이 읽게 되니 자기가 쓰는 글도 그만 이렇게 되는 것이다. 어떻게 써야 하나? 말하는 대로 쓰면 된다. 아저씨와 아주머니가 목에 핏대를 세우고 싸운다 고 말이다. - 그런 속에서 스프를 두 개 넣어 걸쭉한 라면과, 걸쭉한 그 소란을 음미하여 본다. 글재주를 잘 부려 놓은 대문이다. ..라면을 먹으면서 시끄러운 소리에 대해서 생각해 본다 고 할 것을 이렇게 멋을 부려 썼는데, 그다지 억지스럽거나 부자연스러운 말재주는 아니다. 따지고 보면, 차를 마실 경우에야 이야기를 하면서 마실 수도 있고 무엇을 골똘히 생각할 수도 있지만, 배가 고파 라면을 마시다시피 마구 먹으면서 무슨 바깥의 사람 소시를 그렇게 깊이 생각할 수 있겠는가 하는 의문이 생긴다. 그러나 이 정도의 재치는 크게 허물하지 않겠다. 다만 이 이상의 말재주를 부릴 생각은 말아야 하고, 말재주를 즐기는 버릇을 조심해야 하고, 이런 말재주보다 차라리 소박하게, 보통 우리가 누구나 입으로 하는 말로 쓰는 것이 더 좋은 글이라는 것만은 알아 두어야 한다. 또 위의 글대로 쓴다고 하더라도 음미하여 본다 만은 맛보기로 한다 고 쓰는 것이 좋겠다. - 신사답지 못하게 욕을 하기 때문이다. 여기 신사 란 말이 나오는데, 이 말은 일본 사람들이 쓰던 말로 상류 사회의 남자 란 뜻이 들어 있다. 그러니까 오늘날 우리가 쓸 말은 아니다. 점잖지 못하게... 이렇게 쓰면 우리말이 되는 것이다. - 국민에게 발포하는 것을 거리끼지 않는... 여기에 쓴 거리끼지 않는 은 좀 맞지 않은 말이다. 서슴지 않는 이라고 쓰는 것이 좋겠다. - 그래도 저들은 상스러운 욕을 여러 사람이 듣도록 함으로써 남에게 피해를 주고 있지 않은가? 이 글월에 나오는 함으로써 가 틀린 말은 아니다. 그래도 이것은 글에서만 나오는 말이니 쓰지 않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 하여 나 해서 로 쓰면 될 것이다. 입으로 하는 말을 써야 글이 살아난다. -그것도 배운 놈일수록 남 공격하는 게 논리적이고 자연스러우며.. 논리적, 합리적, 비교적.. 이렇게 무슨 -적 이라는 말을 많이 쓰지만 이 말은 일본글을 따라서 쓰는 꼴이니 안 쓰는 것이 좋다. 도대체 논리적 이란 무슨 말인가? 논리가 잘 서 있다는 말인가? 잘 서 있는 것처럼 보인다는 말인가? 겨우 조금만 서 있다는 것인가? 논리가 잘 서 있다는 말이라면 논리가 서 있고 하면 될 것이고, 서 있는 것처럼 보인다면 또 그렇게 써야 할 것이다. 무슨 -적 이란 말은 말뜻을 흐리게 하는 좋지 못한 말이기도 하다. - 그럼 저들은 못 배우고 돈 없다는 이유로 자기의 나쁜 점을 그대로 평가받아야 하는 불이익을 짊어지고 있나? 여기 나오는 이유 란 말은 까닭 이란 말로 바꿔서 쓰는 것이 좋다. 돈 없다는 이유로 를 돈이 없기 때문에 라고 써도 되겠지. 그리고 평가받아야 를 값매겨져야 로 쓸 수는 없는가? 그랬으면 좋겠는데. 불이익 도 손해 라 하는 것이 좋다. 중국글자말 앞에 불 자를 써서 본디 말에 반대되는 뜻을 나타내는 말이 많고, 이런 말이 편리하다고 해서 자꾸 쓰지만, 우리말을 죽이는 결과가 되니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쓰지 말고 우리말을 살려 쓰는 것이 옳다. 우리말로 바꿔 써야 할 불- 자 붙은 말을 다음에 들어본다. 불가하다 - 옳지 못하다 불가분의 - 뗄 수 없는 불가사의하다 - 이상야릇하다 불가해하다 - 알 수 없다 불경기 - 세월없다 불계승 - 안 세고 이김 불과하다 - 지나지 않다 불가능하다 - 할 수 없다 불가불 - 마땅히 불가피하다 - 피할 수 없다 불결하다 - 깨끗하지 못하다 불경제하다 - 헤프다 불공평하다 - 고르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 그런데도 불굴의 - 굽힐 줄 모르는 불귀객 - 못 돌아올 사람 불균일한 - 고르지 않은 불균형 - 고르지 못함 불량 - 나쁨 불로소득 - 힘 안 들인 벌이 불리하다 - 이롭지 못하다 불만족하다 - 만족스럽지 않다 불매운동 - 안사기 운동 불면증 - 잠 안 오는 병 불멸 - 안 없어짐 불명예 - 명예롭지 못함 불모지 - 풀 안 나는 땅. 메마른 땅 불무하다 - 없지 않다 불문 - 묻지 않음 불문가지 - 물을 것 없음. 뻔함 불미스러운 - 좋지 않은 불변하다 - 변함없다 불복 - 복종 않음 불비 - 못 갖춤 불비점 - 못 갖춘 점. 덜된 점 불사약 - 안 죽는 약 불사조 - 안 죽는 새 불사한다 - 사양 않는다 불손하다 - 버릇없다 불순물 - 잡것 불식 - 씻음 불시에 - 갑자기 불안감 - 불안한 느낌 불야성 - 등불천지 불요불급하다 - 급하지 않다 불요하다 - 쓸데없다 불우 이웃 - 가엾은 이웃 불응한다 - 따르지 않는다 불원간 - 머지않아 불의 - 뜻밖 불충분하다 - 넉넉지 않다 불충실하다 - 충실하지 않다 불취학 - 학교 들지 못함 불치병 - 못 고칠 병 불침번 - 안 자는 당번 불쾌감 - 언짢은 느낌 불통 - 막힘 불퇴진의 - 안 물러설. 끄덕없는 불투명색 - 흐릿한 빛 불투명하다 - 흐릿하다 불편부당 - 공평함. 치우치지 않음 불평분자 - 불평꾼 불필요 - 필요없음 불허 - 허락않음. 허가않음 불황 - 세월없음 불후 - 안 썩음 불후의 - 안 썩는. 길이 생생한 이렇게 보면 우리가 얼마나 많이 중국글자의 해독을 입고 있는가를 알 수있다. 중국글자말에서 벗어나지 않고는 우리말을 살릴 수 없다. 끝으로, 이 글은 마지막에 라면을 다 먹은 이야기를 한마디 덧붙였더라면 자연스런 형식을 더 낫게 갖추었을 것임을 말해 두고 싶다.
사랑할 땐 별이 되고 - 이해인 사랑하면 될텐데 - 박완서 선생님께 방바닥에 내려앉은 아침햇살을 아기는 손으로 집어 듭니다 자꾸만 미끄러지는 햇살 잡다가 아기는 그만 울음이 터집니다 울음소리에 놀란 햇살은 슬그머니 문틈으로 달아나 버립니다 봄햇살 속에 사랑스런 손녀를 안고 계실 선생님의 모습을 그려 보며 강원도 초등학교 분교의 어느 친지가 보내 준 동시 한 편을 적어 봅니다. 얼마 전 따님을 통해 보내 주신 선생님의 새 작품집 <그 산이 정말 거기 있었을까>와 여행길에서 사다 주신 검은 목도리도 감사히 받았습니다. 언젠가 영국을 다녀오시며 선물로 주신 워즈워드의 `수선화`란 시와 그림이 새겨진 갸름한 접시에 저는 향나무 연필들을 담아 두었답니다. 신경숙 씨의 <외딴 방>을 읽을 무렵 선생님의 책을 읽었는데 다른 시대를 살아온 두 작가의 자전적인 소설을 통해 제가 배운 것은 어떤 어려움 가운데도 삶은 아름답고 그 삶을 이끌어 가는 이야기의 주인공들은 다 따뜻하고 사랑스런 사람들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체험적 진실, 웃음과 눈물 속에 그대로 우리를 빠져들게 하는 작가들의 그 빼어난 묘사력에도 탄복하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진정 좋은 글은 우리를 기쁘게 하는 힘을 지니고 있습니다. 겨울도 지나고 어느새 봄이 일어서고 있습니다. 저희 수녀원 정원에도 매화가 피어나기 시작하고 이젠 천리향, 수선화가 얼굴을 보이겠지요. "슬픔 가득할 땐 꽃 핀 걸 봐도 힘들기만 하다"고 어느 날 조용히 말씀하시던 선생님과 저의 첫만남은 수년 전, 선생님이 가장 사랑하는 가족 중의 두 사람과 사별을 해야 했던 고통의 한가운데서 이루어졌기에 선생님을 생각하면 늘 가슴 한 켠이 아려 오곤 합니다. 요즘 매주 <서울주보>에 글을 쓰시느라 얼마나 힘드실까 싶어 선생님의 애독자이며, 자매들인 저희는 좋은 글감이 많이 생기실 수 있도록 더 열심히 기도하기로 했답니다. 3월은 제가 수녀원에 입회했던 달이기에 더욱 새롭게 느껴집니다. 30년 전 제가 공부하던 강의실에 한참 어린 후배들이 앉아 있는 모습을 보면 신기하기도 하고 그 많은 세월 동안 사랑과 기도의 종소리에 제대로 깨어 살지 못한 부끄러움과 자책감에 한없이 우울해지기도 합니다. 얼마 전 연중 피정 강론에서 듣게 된 신부님의 말씀이 계속 제 안에서 떠나질 않습니다. "많은 경우에 수도자들은 모든 이를 사랑한다는 미명하에 어떤 누구도 참으로 사랑하지 않는 것 같은 느낌을 받습니다. 제발 한 사람, 한 사람을 귀히 여기고 사랑하는 법부터 배우십시오. 그리고 석고상같이 경직되어 있지 말고 실수해도 좋으니 좀 웃는 얼굴로 기쁘게 사시기 바랍니다. 다른 이들이 우리를 보고 기뻐할 수 있도록..." 서 신부님의 그 말씀은 제게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해주었습니다. 하느님과 이웃을 전적으로 사랑한다고 늘상 말로만 거듭했을 뿐 진정한 사랑의 길에선 멀리 있는 저의 모습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늘 조금씩 겁먹은 표정으로 거리를 두고 몸과 마음을 사려 온 자신을 들여다보며 저는 요즘 계속 스스로에게 타이르곤 합니다. `이봐, 뭐가 두렵지? 사랑하면 될텐데`하고 말입니다. 행동뿐 아니라 표현에 있어서도 늘 절제해야 된다는 생각 때문에 `그립다` `보고 싶다` `사랑한다` 등의 말을 접어 두었고, 어줍잖은 체면 때문에 인색하고 차갑게 군 적도 많았습니다. 한 번은 다른 수녀원에 계신 수녀님과 함께 교도소엘 가서 반가운 이들을 만났는데도 제가 너무 굳어 있었는지 저와의 첫만남을 설레며 고대하던 어떤 형제는 후에 편지로 `저는 수녀님을 보긴 했지만 느끼진 못한 것 같다`고 적어 보냈습니다. 작별하는 순간에도 수인들에게 따스한 미소와 함께 스스럼없이 포옹해 주던 옆의 수녀님과, 어색한 몸짓으로 물끄러미 그들을 바라보기만 하던 저의 냉랭한 모습이 비교되기도 했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일에 필요한 용기, 인내, 겸손도 거저 주어지는 것은 아닌 듯합니다. 모든 이를 사랑하면서도 한 사람 한 사람에게 각별한 관심과 애정을 보여 주신 예수님의 그 사랑을 조금이라도 닮으려고 애쓰는 이 연습생을 선생님도 기도중에 기억해 주세요. 어느 때보다도 저의 사랑 없음을 절감하는 요즘은 항상 넉넉하고 자연스런 모습으로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이글이 가장 부럽습니다. 사소한 일들로 우울했던 마음을 털고 흙냄새 가득한 정원으로 꽃삽을 들고 나가야겠습니다. 봄까치꽃이 가득한 길을 선생님과 봄햇살 속에 산책할 수 있기를 기대하며 항상 미풍처럼 은은하게 베풀어 주신 그 사랑에도 깊이 감사드립니다. 천리향 향기 속에 띄우는 남쪽의 봄을 먼저 받아 주십시오. (1995)
Board 삶 속 글 2022.10.10 風文 R 425
한국대표수필 - 김동리 외 9명 "한흑구편" 한흑구(1909~1979) 수필가. 소설가. 평양 출생. 미국 템플 대학 신문학과 수료 포항 수산 대학 교수 역임. 30년대에 월간지 '대평양', 문예지 '백광'을 창간. 주재하면서 단편 소설과 평론을 활발하게 발표한 바 있으며 해방 후에는 주로 수필에 전념하여 자연의 아름다움과 시정 생활의 애틋함을 그렸다. 옥수수 아내가 거리에 나갔다가 옥수수 두 개를 사 왔다. 하나씩 먹자는 뜻이다. 그러나 옥수수 자루가 얼마나 큰지 반 토막도 다 못 먹겠다. 한뼘 반도 넘으니 양적으로 한 자나 되는 것 같다. 요사이 TV에서 전하던 개량종 수원19나 20 호인 거 같다. 그리고 멀리 강원도 산간 지방의 화전에서 온 것이라고 생각이 된다. 나는 어린 시절부터 옥수수를 퍽이나 좋아했다. 키가 2미터 이상이나 자라난 옥수수밭이 길 양쪽에 서 있는 좁은 길로 혼자서 지나갈 때에는 무서운 짐승이나 뛰어나올 것 같아서 머리털이 오싹 일어서는 것 같았다. 무엇보다 옥수수의 이파리들은 야자수의 이파리처럼 길게 뻗어 나무의 양쪽이 늘어져서 춤을 추는 모양을 하고 있는 것이 좋았다. 그러나 바람이 세차게 부는 날에는 병사들이 칼을 빼들고 열을 지어서 몰려나오는 것 같은 무서움도 주었다. 키가 큰 옥수수나무들이 강한 비바람에 줄기가 휘어서 절을 하는 모양을 하였다가도 향일성이 강한 탓으로 다시 태양을 향하여 고개를 똑바로 쳐들었다. 나의 고향, 평양의 근방에는 옥수수를 전문으로 농사짓는 동리가 많았다. 대동강을 건너 동쪽에 있는 사동과 미림이 그 대표적이고, 밭이 많은 이북에서는 어느 지방을 막론하고 옥수수를 심어서 식량을 보탰다. 사동에는 내 누님이 살고 있어서 방학 때이면 으레 놀러 갔고, 그 곳의 옥수수는 좀 일찍여서 여름 방학 달인 8월이 한창이었다. 국민 학교 시절부터 나는 옥수수를 많이 먹었고, 또한 좋아했다. 옥수수의 나무는 키가 크고, 후리후리해서 멋이 있지만, 야자 이파리같이 길게 늘어진 것도 보기가 좋고, 또한 그 열매야말로 어느 열매와도 비길 수 없으리만큼 아름답고, 탐스럽고, 우아했다. 푸른 식물성 섬유의 천 조박지 같은 껍질로 싸여 있는 열매를 한 갈피 한 갈피 벗기어 가면, 마지막 속잎은 희고 깨끗한 모시 속옷과 같이 씌워져 있었다. 마지막으로 그것마저 벗기면 파릿하고 흰 수염들이 열매를 보호하는 듯이 감싸고, 품어 주고 있었다. 흰 명주실과 같은 수염들을 곱게 뜯어내면, 말할 수 없이 아름답고 순스럽고, 탐스러운 옥수수알들이 곱게 줄을 지어서, 지붕 위에 있는 기왓골같이, 가지런히 박혀 있는 것을 볼 수가 있었다. 참으로 황홀할 지경으로 아름다웠다. 처녀의 빨간 입술 속에서 진주알같이 빛나는 이빨보다도 더 빛나고 자연스러웠다. 하느님의 섭리로서만 이루어질 수 있는 하나의 신기한 조각이라고 생각하였다. 탐스러운 옥수수를 쪄서 먹어 보면 아무런 자극성이 없이 담백하면서도, 달고, 고소하고, 향긋하였다. 한알 한알 따먹어도 맛이 있고, 누에 모양으로 길다랗게 뜯거나, 이빨로 마구 뜯어 씹어도 그 맛은 한없이 달고, 고소하고, 향긋하였다. 열 자루를 그냥 계속해서 뜯어 치우는 젊은이들도 있었다. 옥수수를 가공해서 먹는 방법이 많이 있으나, 그 중에서도 여름에 시원하게 먹을 수 있는 것이 옥수수묵이다. 옥수수알을 맷돌에 갈아서 된죽을 쑤고, 찬 우물물을 자배기에 채운 다음, 여러 개의 잔 구멍이 뚫린 바가지로 된죽을 찬 물 속으로 뚝뚝 흘러내려서 식히는 방법이다. 이것을 옥수수묵이라고 부르기도 하고, 올챙이같이 생겼다 해서 올챙이묵이라고도 한다. 옥수수가 많이 생산되는 미국에서는 이 담백한 옥수수를 여러 가지로 가공해서 식품으로 많이 사용한다. 옥수숫가루를 비롯해서, 설탕, 전분, 과자 등과, 튀김과 야채 기름 등 많은 종류의 식품을 가공한다. 그러고도 남는 옥수수는 소, 돼지의 가축 사료로 쓰이고, 그러고도 또 남는 것은 외국으로 수출하는 형편이다. 북한에서 남한으로 귀순한 이들의 말을 들으면, 북한에서 살고 있는 서민들은 주식으로 옥수수를 배급받아서 살아가기 마련이고, 이것도 부족하게 주어서 수수죽을 쑤어 먹는 형편이라고 한다. 아무리 옥수수가 맛이 좋다고 해도 매일같이 주식을 삼아 먹어야 하고, 그것도 부족하여서 죽을 쑤어서 먹어야 한다니, 그 어렵고 슬픈 사정은 가히 짐작할 수가 있다. 식생활 사정이 이러하다니, 간장, 고추장은 어떻게 담가 먹으며, 채소나 고기는 구경도 할 수 없을 것이 뻔한 노릇이다. 우리 속담에 '굶는 것같이 서러운 일이 없다.'고 했는데, 북한에서는 무슨 까닭으로 백성들을 굶겨야 하나. 아내가 사 갖고 온 강원도산 수원 19호의 큰 옥수수 자루를 들고, 한알 한알 뜯어서 씹으며, 옛 추억에 잠겨 본다. 야자나무 수풀과 같이 우거져 서 있던 옥수수나무들의 긴 이파리들이 너울너울 팔들을 벌리고 춤을 출 때면, 손가락을 벌린 듯이 높이 피어난 옥수수꽃의 꼭대기로 수많은 풍뎅이들이 소리를 내며 날아다녔다. 서늘한 바람과 함께 옥수수의 시원한 그늘 속에 뚫린 길을 혼자서 20리를 즐거운 마음으로 걸어다니던 어린 시절이 아름다운 풍경화와 같이 머릿속에 떠오른다. 그리웠던 옛 시절을 되씹는 듯이 옥수수의 반 토막을 맛이 있게 뜯어먹다가 오늘의 고향을 생각하면서 그만 내어놓고 만다.
내 마음이 강해야 내 소원도 이루어진다 - 잭 캔필드, 마크 빅터 한센 4. 가족들과의 더 좋은 관계를 위하여 사랑은 자연으로 치장되고 상상력으로 수놓아진 캔버스이다. - 볼테르 요청과 사랑은 아무 관계도 없다 우리 어머니는 3년 연속 단추 달린 셔츠를 보내 주셨다. 어머니의 마음을 상하게 해드리지 않으려고 아무 소리 없이 그 옷을 받았다가는 앞으로 20년 동안 계속 새 셔츠를 받게 될 판이었다. 내가 단추 달린 셔츠를 원하지 않는다는 뜻을 전하는데 무려 3년이나 걸렸으나, 결국 성공했다! 바바라 드 안젤리스 여성들이 요청하기 두려워한는 이유는, 무의식 깊은 곳에 더 고분고분하고 요구가 적은 다른 여자에게 자신의 자리를 빼앗기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 도사리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남자들이 자신의 욕구나 필요를 인식조차 하지 못하는 이유는, 그 인식 자체가 사나이답지 못하다는 암시가 깔려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두 남녀는 서로에게 이것저것을 원하면서도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눈치만 살피게 된다. 그 다음에 그들은 모두 의기소침하고, 상대에게 서운함을 느끼고, 좌절감에 괴로워하다가, 서로 비난하고 헐뜯는 지경에 이른다. 그리고 결국 이혼한다. 이런 사태는 모두 직접적인 말과 분명한 요청으로 막을 수 있다. 명령하지 말고 요청하라 - 죠 배튼 내 세미나의 수강생 중 다수는 명령하는 것보다 요청하는 것이 좋다는 생각에 이의를 제기한다. 그럴 때마다 나는 이런 식으로 그 상황을 처리한다. 어떤 남성 우월주의적인 사내가 다음과 같이 말한다고 치자. "죠, 잠깐 기다려요, 당신이 사람들에게 명령해야 할 때가 있는 법이요" 나는 쏘아붙인다. "그럴지도 모르지요. 하지만 나는 예전에 해군에 있었을 때도 그 점에 대해 확신이 가지 않더군요. 그런데, 결혼하셨습니까?" "그렇소." "아내에게 청혼하셨습니까?" "당연히." "혹시 '넌 나와 결혼해야 해'라고 청혼하지 않으셨습니까?" "아, 아닌데요." "그런, 뭐라고 하셨습니까?" "그녀에게 결혼해 달라고 요청했소." 그 다음에 나는 이렇게 설명한다. "과거를 돌이켜 보십시오. 당신이 정말 이루고 싶어했던 중요한 업무가 있거나 돈이 바닥났을 때는 명령하지 않았잖습니까. 요청했지요." 그러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내 말을 이해하고 동의한다. 상대에게 만능을 요청하지 말라 당신의 배우자가 모든 필요를 다 충족시켜 줄 수 있거나, 기꺼이 그렇게 하리라는 기대는 아예 말아라. 그렇게 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당신은 다른 이에게 요청할 필요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종종 그러지 못하는 이유는 거절을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배우자에게 요청하는 것은 다른 이에게 손을 내미는 것보다 덜 부담스럽고, 덜 효과적이기 때문에 한 사람에게만 계속 너무 많은 요구를 한다. 훨씬 쉽지만 효과가 없는 방법이다. 우리는 배우자만큼 다른 이에게 요청할 필요가 있다. 다른 친구들과 갖고 구성원은 우리의 삶에 각각 다른 역할을 한다. 누구는 재미있는 익살꾼이고, 누구는 믿음직한 상담자이다. 어떤 이는 현명한 재정적인 충고자이고, 또 다른 이는 끈기있는 청취자이다. 그리고 이 사람이 영적인 동반자인 반면, 저 사람은 문제 해결사이다. 당신이 협조의 그물망에 많은 친구와 친지를 가졌는지 확인하라. 저스틴 스튜어트는 책의 아내에게 다음과 같이 충고했다. "당신 남편이 가장 친한 여자 친구와 똑같은 식으로 가까워지기를 기대하지 마세요. 하늘이 두 쪽이 나도 그런 일은 없어요. 그저, 당신의 그런 필요를 채워 줄 최고의 여자 친구가 곁에 있는지 확인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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