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와 은유(2): 목소리 나이 들수록 힘이나 논리보다는 공감과 연결성 같은 심성이 문제를 더 잘 푼다는 걸 알게 된다. 타인과 연결되어 있다는 감각은 상상이나 이성만으로 얻기 어렵다. 눈물과 스며듦이 있어야 한다. 사람들이 한자리에 모여 앉아 대화하는 이미지로 정치를 그려볼 수 있다. 혁명의 꿈이 사라진 자리에, 당사자들이 ‘얼굴을 맞대고’ 끝없이 대화하는 모습 말이다. 물론, 목소리는 불평등하다. 그래서 지배자나 권력자보다는 목소리 없는 자들의 목소리가 맨 앞자리에 놓인다. 버려지고 지워지고 억압받고 은폐된 사람들의 목소리에 발언권을 줄 때, 목소리 은유가 갖는 정치적 급진성이 담보된다. 주변부로 내몰린 사람들의 목소리야말로 이 세계가 단일한 질서를 갖는 것도 아니며, 적대적인 이원 대립으로 나뉘어 있는 것도 아님을 알게 하기 때문이다. 이 세계는 지배와 피지배, 자본과 노동, 남성과 여성, 갑과 을, 정신과 육체, 정규직과 비정규직, 자국인과 외국인으로 깔끔하게 양분되지 않는다. 이분법은 우리 머릿속에 선후경중과 효율성을 따지게 하여 ‘뭣이 중헌디?’란 질문을 반복하게 만든다. 목소리 은유는 목소리가 겹칠 때 발생하는 관계의 공명―함께 울림, 함께 울기, 함께 바뀜―을 지향한다. 지금의 권력을 상대화하고 기존의 분할을 다르게 분할하여 무력화한다. ‘육성’. 몸의 소리. 목소리는 몸과 분리되지 않는다. 인간다움의 추구는 발성(소리 지름)에서 출발한다. 그래서 ‘목소리’ 없는 사람, 목소리를 빼앗긴 사람들이 있다는 자각은 중요하다. 진보는 어제보다 많은 목소리가 참여하는 것이다. 정치와 은유(3): 가정 당신은 국가를 어떻게 상상하는가? 인지언어학자 조지 레이코프는 사람들은 국가를 가정과 비슷한 걸로 생각한다고 말한다. 어떤 가정으로 비유하느냐에 따라 보수와 진보가 갈린다. 보수는 국가를 ‘엄한 아버지’의 가정으로, 진보는 ‘자상한 부모’의 가정으로 비유한다. 엄한 아버지는 이 험한 세상을 이겨내려면 아이가 성실함과 실력을 갖추도록 훈육해야 한다고 본다. 잘하면 상을 주고 못하면 벌을 준다. 잘 견뎌낸 아이가 물질적 부와 명예를 얻고 그러지 못한 아이는 가난과 실패를 맛보는 게 당연하다. 삶의 성패는 개인의 책임이다. 그러니 가난뱅이들을 돌보는 것은 쓸데없는 돈 낭비이자 비도덕적인 행위다. 자기 절제와 성실함이 없는 자들에게 복지라니. 힘 있고 능력 있는 사람이 세상을 지배하는 것은 자연의 이치다. 반면에 자상한 부모는 자신들의 보살핌으로 아이는 더 선해지며 세상도 더 선하게 만들 수 있다고 본다. 부모는 아이의 성공과 실패에 동참하며 함께 울고 웃는다. 자신뿐만 아니라 공동체와 세계에 대한 책임감과 헌신을 중시한다. 무엇보다 물질적 성공과 도덕을 연결시키지 않는다. 훌륭한 삶은 물질적 성공과 아무런 관계가 없다. 따라서 누구나 이 세계에 존재할 가치가 있으며, 국가는 모든 이들이 기꺼이 삶을 살 수 있도록 옹호할 책임밖에 없다. 역할과 책임의 차이가 있을지언정 위아래로 나뉘지 않는다. 학생들에게 농담조로 말한다. “여러분 모두 진보주의자가 되길 바랍니다. 공부하는 사람이 진보주의자가 되지 않을 방법을 도무지 찾을 수가 없습니다.” 잘 안 먹힌다. 내가 보수라서(!) 김진해 | 한겨레말글연구소 연구위원·경희대 교수
무엇을 어떻게 쓸까 - 이오덕 1부 산문을 어떻게 쓸까 일기글 쓰기 - 일기글 어떻게 쓸까 (1/4) 책으로만 익힌 말을 쓰지 말고 다음은 여중 3학년 학생이 쓴 어느 날의 일기다. 이 글 가운데 잘못 쓴 낱말이 있는지 없는지 살펴보기로 하자. 진성여중 3학년 김하연 모의 고사 시험 보는 날이다. 난 어제 아파서 공부를 하지 못했다. 성적이 떨어질까봐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학교에 왔다. 나는 어제 큰 일을 치른 사람처럼 정신이 하나도 없고 맥이 없었다. 시험 보기 3분전, 나는 필통 속에 있는 컴퓨터용 연필을 깎으려고 꺼냈다. 내가 아무리 연필을 깎아도 심이 자꾸자꾸 끊어진다. 나는 가슴이 어두근거렸다. 시험 볼 시간은 2분도 채 안 남았는데. 앞에 있는 선아에게 연필을 깎아 달라고 부탁했다. 선아 역시 연필심이 자꾸 끊어진다고 한다. 내가 선아에게 계속 깎아봐, 선아야! 하고 말했다. 조금 있다가 선아는 미안하다는 듯이 연필을 보여주었다. 연필은 몽당연필이 되었고, 심은 끊어진 것 같았다.나는 괜찮아 하면서도 속으로는 마음이 두근거렸다. 종이 울렸다. 나는 컴퓨터용 연필이 없어 울똥말똥한 눈이 되었다. 나도 모르게 울음이 나오려 했다. 아직 선생님은 들어오시지 않았다. 그때 내 앞에서 하연아, 너가 내 연필 써. 나는 샤프연필로도 쓸 수 있으니까. 선아의 말이다. 아까 선아가 연필을 몽당연필로 만들어서 죄책감에 빌려주는 것보다 친구의 우정으로 빌려주는 것 같았다. 나는 눈물이 핑 돌았다. 나는 선아에게 잘 대해주지 못했는데, 그리고 샤프연필로 잘못하면 틀린 채점이 나오는데, 나에게 연필을 주고 자기는 샤프연필로 쓰다니! 고민이 많고 혼자라고 생각하는 나는 혼자가 아니라는 것 느꼈다. 내 주위에도 나를 생각해주는 친구가 있구나! - (학급문집 <추억을 되새길 땐 이 책장을 넘기셔요>에서) ------------------------------------------------------------------ 앞에서 잘못 쓴 말이 있는지 없는지 살펴보자 고 했지만, 이 글을 읽은 사람은 누구나 이 글에 나오는 선아란 학생의 고운 마음에 감동했을 것이다. 시험점수를 서로 많이 따려고 하고, 점수를 올리기 위해서는 조금이라도 손해 보는 짓을 해서는 안된다는 생각을 하게 되어 있는 학생사회에서 이렇게 따스한 정을 나누면서 사람답게 살아가는 학생이 있다는 것은 얼마나 반갑고 기쁜 일인가? 정말 캄캄한 밤중에 등불을 켜고 둘레를 밝혀주는 사람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어둠 속에서 길을 못 찾고 헤매면서 고민하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밝은 불빛이 있음을 알려준 이 학생도 참 좋은 글을 썼다고 칭찬하고 싶다. 그러면 이제부터 이 글에 적힌 말의 문제를 이야기하기로 한다. 이 글은 어느 날 학교에서 있었던 일을 쓰면서 느끼고 생각한 것도 적었다. 어른들이 흔히 글에서만 쓰는 어려운 말이나 일본말법이 한 군데도 없고, 보통 입으로 하는 자기의 말을 그대로 썼다. 글을 쓰는 태도가 아주 제대로 되어 있는 학생의 글이라 하겠다. 더러, 좀더 정확한 말을 썼으면 싶은 데가 몇 군데 있지만 그런 것이야 대수롭지 않다고 본다. 그런데 단 한가지 그냥 지나칠 수 없는 말이 있다. 그것은 연필심이 끊어진다 고 한 말인데, 세 군데 나온다. - 내가 아무리 연필을 깎아도 심이 자꾸자꾸 끊어진다. - 선아 역시 연필심이 자꾸 끊어진다고 한다. - 심은 끊어진 것 같았다. 이 학생은 연필심이 끊어진다 고만 썼는데, 이렇게 써도 괜찮은가? 맞는 말일까? 만약 국어 시험에 다음과 같은 문제가 나온다면 여러분들은 어느 말에다가 맞는 말이라고 표를 해야 할까? 연필을 깎는데 심이 / 꺾어졌다.( ) / 끊어졌다.( ) / 부러졌다.( ) / 떨어졌다.( ) 연필심은 끊어졌다 고 하지 않는다. 꺾어졌다 고도 하지 않고 떨어졌다 고도 말하지 않는다. 연필심은 부러졌다 고 해야 한다. 왜 그런가? 우리말이 본래 그렇게 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부러졌다 고 해야 하는 까닭을 여기서 이치로 따져서 다른 세 가지 말이 주는 느낌과 말뜻의 다름과 함께 한참 설명말수도 있지만, 원체 이런 말에 대한 느낌이나 말뜻의 자세한 차이를 생활 속에서 제대로 느껴서 알고 있지 못한 사람이라면, 그런 사람에게 이런 느낌과 이치를 설명하는 짓이 다 소용이 없는 것이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이 역시 생활이다. 어떤 말이든지 생활 속에서 익혀야 비로소 제것이 되는 것이다. 앞에서 보기로 든 글을 쓴 학생이 연필심이 부러진다 고 하는 아주 쉽고 평범한 우리말, 국민하교 1학년이면 저절로 다 익히게 되어야 할 말을 제대로 쓰지 못하고 엉뚱한 말을 쓴 까닭은 결국 어려서부터 연필을 칼로 깎는 생활이 없었고, 그래서 생활에서 쓰게 되는 살아 있는 말을 익힐 기회가 없었기 때문이다. 이것은 이 학생뿐 아니라 이 학생과 같이 공부하는 오늘날 우리나라 학생의 문제다. 부러진다 는 말을 모르는 학생이 어째서 끊어진다 한 말은 썼는가? 끊어진다 는 말을 쓰게 된 까닭으로 우선 생각할 수 잇는 것은, 교과서나 그밖에 학생들이 보는 책에서 부러진다 는 좀처럼 나오지 않지만 끊어진다 는 가끔 나오기 때문이다. 책으로만 익히는 말의 허방 - 함정이 여기에 있다. 바로 며칠 전 몇 사람이 모인 자리에서 이 연필심이 끊어진다 는 글을 읽어주고, 학생들이 어째서 이런 말을 쓸까요 하고 물어 보았더니, 듣고 있던 한 분이 이렇게 대답했다. 그건 요즘 학생들이 끊는다 는 말을 많이 쓰기 때문이 아닐까요. 학원을 다니다가 그만두면 끊는다고 해요. 너, 요새 주산학원 끊었니? 난 피아노끊었어 이렇게 말하지요. 텔레비전에서도 끊는다는 말을 자주 써요. 이렇게 되면 이것은 한갖 유행하는 말이라고 볼 수도 있다. 그런데, 삶을 잃은 학생들의 입에서 유행하는 말은 결국 책과 방송에서 얻은 것밖에 될 수 없다. 이 끊는다 는 말에서 또 하나 생각나는 것이 있다. 얼마 전 동시를 쓰는 어느 학교 선생님이 시를 쓴 것을 보여 주었는데, 그 시에 고사리 끊으러 간다 는 말이 있기에 고사리는 꺾는다고 해야지, 왜 이렇게 썼어요? 했더니, 저도 고사리는 꺾는다고 알고 있었는데, 6학년 음악 교과서에 고사리 끊자 로 나와 있어요 했다. 교과서에 고사리 끊자 고 나와 있다니 세상에 무슨 그런 교과서가 있나 싶었지만, 교과서고 사전이고 잘못된 것이 많다고 알고 있기에 이렇게 또 말해 주었다. 아무리 교과서가 그렇게 되어 있다고 하더라도 문학작품, 더구나 시를 쓰는 사람은 살아 있는 우리말을 써야지요. 교과서고 사전이고 그밖에 어떤 책보다도 위에 있어야 하는 것이 백성들이 쓰는 살아 있는 말 아닌가요? 내가 이렇게 말했지만 그 시인은 시원스럽게 따라주는 태도가 아니었다. 그 음악 교과서에 나오 가사가 민요 교재로 되어 있어요. 했다. 그 뒤 6학년 음악책을 구해서 보았더니 정말 끊자 로 나와 있었다. 다음은 22쪽에 나와 있는 교재를 그대로 옮긴 것이다. [고사리 끊자] 전래동요 (한만영 채보) 고사리 대사리 끊자 나무 대사리 끊자 유자 꽁꽁 재미나 넘자 아장장장 벌이어 끊자 끊자 고사리 대사리 끊자 앞동산 고사리 끊어다가 우리 아빠 반찬하세. 이게 어찌 된 것인가? 아무리 생각해도 끊자 가 될 리 없다. 사투리도 이럴 수는 없다. 채보- 악보를 만든 사람이 어디서 잘못 들었거나, 교과서를 만드는 과정에서 잘못 적었음이 틀림 없다. 그러나, 그래도 모른다 싶어 1931년에 나온 [조선 구전 민요집](김소운편저)을 찾아 보았다. 이 책에는 고사리를 꺾는 민요가 네 편 나와 있다. 짧으니까 적어 보자.
사랑할 땐 별이 되고 - 이해인 수평선을 바라보며 - 노영심에게 "바다는 짜다. 그가 적당히 짠 것은 자신에 대한 신고이다. 그래서 부패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 가슴에 품은 모든 생명이 달콤한 나태에 빠지지 않게 한다. 그는 스스로 죽지않는 생명이며 남을 위한 소금인 것이다. 바다는 언제나 그 등어리에 태양을. 동반하면서도 나의 눈높이 아래서 일렁이고 있다." 최근에 몇 번이나 되풀이해 읽은 황덕중님의 <바다>라는 수필의 일절을 소개하며 지금은 먼 여행길에 있을 영심의 모습을 그려 봅니다. 얼마 전에 인편으로 보내 준 앙증스런 십자가와 카드는 잘 받았어요. 이곳을 두 번째 방문했을때 우리가 함께 보았던 고운 무지개를 크레용으로 그린 걸 보니 무척 인상적이었는가 보지요? 나만큼이나 바다를 좋아하는 영심에게 나도 오늘은 수채화용 물감으로 하늘 같은 바다, 바다 같은 하늘을 그려 보내고 싶군요. 난 얼마 전에 언덕 위의 솔숲 집으로 방을 옮겼는데 이 방의 이름을 `솔숲 흰구름방`이라고 혼자 정해 놓고 즐거워 한답니다. 여기서 일터까지는 천천히 걸어도 3,4분밖에 안되는 거리지만 수평선을 바라보며 걸을 수 있는 기쁨이 있어 늘 새롭답니다. 하늘과 바다가 맞닿은 수평선을 바라보면 영원한 하느님도, 끝없이 출렁이는 사랑도 더 가까이 있는 것만 같고, 내안에 자리했던 욕심, 미움, 원망, 분노의 찌꺼기들이 사라지고 텅 비어 버린 수평의 마음이 되는 것을 느낍니다. 날마다 수평선을 바라보며 기도하고, 밥을 먹고, 일을 하다 보니 바다가 없는 도시엘 가면 이내 답답하고 지루해져서 꿈에도 자주 바다가 펼쳐지곤 합니다. 꽉 짜여진 규칙적인 일상 안에도 어느새 바다가 스며들어와 긴장과 단조로움을 잊게 해주고, 나의 좁은 소견으로 어떤 사람과의 관계가 트이질 못해 괴로워할 때도 바다는 파도를 일으키며 달려와 "넓어져라, 넓어져라" 하는 속삭임만으로는 안되는지 물살로 사정없이 나를 때려 주곤 합니다. 해가 떠오를 때는 만남과 생성의 환희 가득한 아름다움을, 해가 질 때는 이별과 소멸의 애틋한 아름다움을 내게 보여 주며 무한대의 아름다움으로 길게 누워 있는 수평선을, 그 푸른 음악과 시를 사랑합니다. 바닷가에서 휴가를 즐기는 많은 사람들에게 나는 "수평선을 바라보세요, 움직임을 멈추고 모래밭에 앉아 고요한 마음으로 수평선을 바라보면 푸른 평화가 고여 오는 소리가 들릴 거예요" 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조용하고도 힘찬 바다의 소리를 영심인 피아노 소리에 담을 수 있을테지요? 레이스 달린 원피스를 즐겨 입는 영심이가 이곳에서 피아노 치고 노래하던 일, 이야기하다 말고 눈물을 보이던 일, 일기장을 가슴에 꼭 품고 다니던 일, 함께 조가비를 주으며 즐거워하던 일이 잔잔한 그림으로 떠오르네요. 누구에게나 편안함을 느끼게 하는 해맑고 자연스런 웃음, 바빠도 서두르지 않는 태도와 꾸밈 없는 말씨의 은은한 매력을 지닌 음악인, 늘 작은것에도 의미를 부여하며 기도하고, 꾸준히 선과 사랑을 추구하고 실천하려는 영심의 그 모습이 반갑고 고마워요.지난번엔 파푸아뉴기니에 갔다가 그곳의 한국 수녀님들로부터 세실리아라는 이름까지 미리 받았다니 조금은 부담이 되겠지만 언젠가는 영세를 받도록 나도 기도 할까요? 무척 아름답다는 시애틀에서의 남은 일정도 잘 마친 후 더 성숙한 모습으로 우리 앞에 나타나 멋진 `이야기 피아노` 도 들려줄 수 있길 기대합니다. 난 올해 안으로 해남 땅끝 마을과 목포에 있다는 조개 박물관에 가보고 싶은데 뜻대로 될지 모르겠군요. 오늘은 치자꽃 향내 나는 주일, 잠시 창문을 열고 수평선에 눈을 씻은 다음 저녁기도에 가야겠어요. 안녕. (1995)
Board 삶 속 글 2022.10.12 風文 R 534
한국대표수필 - 김동리 외 9명 "이상편" 이상(1910~1937) 시인. 소설가. 본명은 김해경. 서울 출생. 경성 공고 졸업. 총독부 내무부 건축과 근무, 특이한 소재와 특이한 기법, 특이한 행적으로 이채를 띠었던 이상은 수필에도 뛰어났다. 독특한 안목과 감성으로 사물을 바라본 그의 수필은 실험적인 시나 황당한 소설보다 훨씬 짙은 감흥을 불러일으킨다. 권태 1 어서 차라리 어둬 버리거나 했으면 좋겠는데...벽촌의 여름날은 지루해서 죽겠을 만치 길다. 동에 팔봉산, 곡선은 왜 저리도 굴곡이 없이 단조로운고? 서를 보아도 벌판, 남을 보아도 벌판, 북을 보아도 벌판, 아~이 벌판은 어쩌라고 이렇게 한이 없이 늘어놓였을꼬? 어쩌자고 저렇게까지 똑같이 초록색 하나로 되어먹었노? 농가가 가운데 길 하나를 두고 좌우로 한 10여 호씩 있다. 휘청거린 소나무 기둥, 흙을 주물러 바른 벽, 강낭대로 둘러싼 울타리, 울타리를 덮은 호박넝클, 모두가 그게 그것같이 똑같다. 어제 보던 댑싸리나무, 오늘도 보는 김 서방, 내일도 보아야 할 신둥이 검둥이. 해도 백도 가까운 볕을 지붕에도 벌판에도 뽕나무에도 암탉 꼬랑지에도 나려쪼인다. 아침이나 저녁녘이나 뜨거워서 견딜 수가 없는 염서 계속이다. 나는 아침을 먹었다. 할 일이 없다. 그러나 무작정 널따란 백지 같은 '오늘'이라는 것이 내 앞에 펼쳐져 있으면서 무슨 기사라도 좋으니 강요한다. 나는 무엇이고 하지 않으면 안 된다.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 연구해야 된다. 그럼 나는 최 서방네 집 사랑 툇마루로 장기나 두러 갈까. 그것 좋다. 최 서방은 들에 나갔다. 최 서방네 사랑에는 아무도 없나 보다. 최 서방의 조카가 낮잠을 잔다. 아하 내가 아침을 먹은 것은 열 시나 지난 후니까 최 서방의 조카로서는 낮잠 잘 시간에 틀림없다. 나는 최 서방의 조카를 깨워 가지고 장기를 한판 벌이기로 한다. 최 서방의 조카로서는 그러니까 나와 장기 두는 것 그것부터가 권태다. 밤낮 두어야 마찬가질 바에는 안 두는 것이 차라리 나았지. 그러나 안 두면 또 무엇을 하나? 둘밖에 없다. 지는 것도 권태어늘 이기는 것이 어찌 권태 아닐 수 있으랴? 열 번 두어서 열 번 내리 이기는 장난이란 열 번 지는 이상으로 싱거운 장난이다. 나는 참 싱거워서 견딜 수 없다. 한 번쯤 져 주리라. 나는 한참 생각하는 체하다가 슬그머니 위험한 자리에 장기 조각을 갖다 놓는다. 최 서방의 조카는 하품을 쓱 한번 하더니 이윽고 둔다는 것이 딴전이다. 으레 질 것이니까 골치 아프게 수를 보고 어쩌고 하기도 싫다는 사상이리라. 아무렇게나 생각나는 대로 장기를 갖다 놓고는 그저 얼른얼른 끝을 내어 져 줄 만큼 져 주면 이 상승장군은 이 압도적 권태를 이기지 못해 제물에 가 버리겠지 하는 사상이리라. 가고 나면 또 낮잠이나 잘 작정이리라. 나는 부득이 또 이긴다. 이제 그만 두잔다. 물론 그만 두는 수밖에 없다. 일부러 져 준다는 것조차가 어려운 일이다. 나는 왜 저 최 서방의 조카처럼 아주 영영 방심 상태가 되어 버릴 수가 없나? 이 질식할 것 같은 권태 속에서도 자세한 승부에 구속을 받나? 아주 바보가 되는 수는 없나? 내게 남아 있는 이 치사스러운 인간 이욕이 다시없이 밉다. 나는 이 마지막 것을 면해야 한다. 권태를 인식하는 신경마저 버리고 완전히 허탈해 버려야 한다. 2 나는 개울가로 간다. 가물로 하여 너무나 빈약한 물이 소리 없이 흐른다. 뼈처럼 앙상한 물줄기가 왜 소리를 치지 않나? 너무 더웁다. 나뭇잎들이 축 늘어져서 허덕허덕하도록 더웁다. 이렇게 더우니 시냇물인들 서늘한 소리를 내어 보는 재간도 없으리라. 나는 그 물가에 앉는다. 앉아서 자. 무슨 제목으로 나는 사색해야 할 것인가 생각해 본다. 그러나 물론 아무런 제목도 떠오르지는 않는다. 그렇다면 아무것도 생각 말기로 하자. 그저 한량없이 넓은 초록색 벌판, 지평선, 아무리 변화하여 보았댔자 결국 치열한 곡예의 역을 벗어나지 않는 구름, 이런 것을 건너다본다. 지구 표면적의 백분의 99가 이 공포의 초록색이리라. 그렇다면 지구야말로 너무나 단조무미한 채색이다. 도회에는 초록이 드물다. 나는 처음 여기 표착하였을 때 이 신선한 초록빛에 놀랐고 사랑하였다. 그러나 닷새가 못 되어서 일망무제의 초록색은 조물주의 몰취미와 신경의 조잡성으로 말미암은 무미건조한 지구의 여백인 것을 발견하고 다시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어쩔 작정으로 저렇게 퍼러냐. 하루 온 종일 저 푸른빛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오직 그 푸른 것에 백치와 같이 만족하면서 푸른 채로 있다. 이윽고 밤이 오면 또 거대한 구렁이처럼 빛을 잃어버리고 소리도 없이 잔다. 이 무슨 거대한 겸손이냐. 이윽고 겨울이 오면 초록은 실색한다. 그것은 남루를 갈기갈기 찢은 것과 다름없는 추악한 색채로 변하는 것이다. 한겨울을 두고 이 황막하고 추악한 벌판을 바라보고 지내면서 그래도 자살민절 하지 않는 농민들은 불쌍하기도 하려니와 거대한 천치다. 그들의 일생이 또한 이 벌판처럼 단조한 권태 일색으로 도포 된 것이리라. 일할 때는 초록 벌판처럼 더워서 숨이 칵칵 막히게 싱거울 것이요, 일하지 않을 때에는 겨울 황원처럼 거칠고 구지레하고 싱거울 것이다. 그들에게는 흥분이 없다. 벌판에 벼락이 떨어져도 그것은 뇌성 끝에 가끔 있는 다반사에 지나지 않는다. 촌동이 범에게 물려 가도 그것은 맹수가 사는 산촌에 가끔 있는 신벌에 지나지 않는다. 실로 전신주 하나 없는 벌판에서 그들이 무엇을 대상으로 흥분할 수 있으랴. 팔봉산 등을 너머 철골 전선주가 늘어섰다. 그러나 그 동선은 이 촌락에 엽서 한 장을 내려뜨리지 않고 섰는 채다. 동선으로는 전류도 통하리라. 그러나 그들의 방이 아직도 송명으로 어둠침침한 이상 그 전신주들은 이 마을 동구에 늘어선 포플러나무와 조금도 다름이 없다. 그들에게 희망이 있던가? 가을에 곡식이 익으리라. 그러나 그것은 희망은 아니다. 본능이다. 내일, 내일도 오늘 하던 계속의 일을 해야지. 이 끝없는 권태의 내일은 왜 이렇게 끝없이 있나? 그러나 그들은 그런 것을 생각할 줄 모른다. 간혹 그런 의혹이 전광과 같이 그들의 흉리를 스치는 일이 있어도 다음 순간 하루의 노역으로 말미암아 잠이 오고 만다. 그러니 농민은 참 불행하도다. 그럼. 이 흉악한 권태를 자각할 줄 아는 나는 얼마나 행복된가.
내 마음이 강해야 내 소원도 이루어진다 - 잭 캔필드, 마크 빅터 한센 4. 가족들과의 더 좋은 관계를 위하여 사랑과 관심으로 접근하라 - 제인 넬슨 예전에 나는 잔뜩 흥분한 편모에게 전화를 받았다. 그녀는 14살난 딸과 힘 겨루기를 하느라 애를 먹었다. 그녀는 딸의 옷장에서 맥주를 발견하고, 그것을 귀가한 딸에게 들이밀었다. "마리나, 이게 뭐니?" "맥주처럼 보이는데요, 엄마." "시치미 떼지 말고 빨리 말해.?" "엄마가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정말 모르겠어요." "나는 이 맥주를 네 옷장에서 찾아냈어. 빨리 해명하는 게 신상에 이로울 거다." 마리나는 사태를 파악하고 재빨리 말했다. "아아, 내 친구 것을 보관해 둔 거예요." "내가 그 말을 믿을 것 같니?" 마리나는 화를 내고 쿵쾅거리며 방으로 들어가 방문을 꽝 닫았다. 그 엄마가 사정을 다 설명하자, 나는 이렇게 물었다. "딸의 옷장에서 발견된 맥주에 왜 그렇게 걱정을 하세요?" "딸이 문제를 일으키기를 원치 않으니까요." "알겠습니다. 하지만 왜 딸이 문제를 일으키기 원치 않으세요?" 이때쯤, 그녀는 전화를 괜히 걸었다고 후회하는 기색이었다. 그녀는 대답했다. "그야 딸이 인생을 망치기를 원치 않기 때문이지요." "알겠습니다. 하지만 왜 딸이 인생을 망치기를 원치 않으세요?" 마침내 그녀는 내 의도를 알아차렸다. "딸을 사랑하니까요." 그리고 나는 또 물었다. "따님이 어머니의 그 메시지를 알아들었을까요?" "물론 그렇지 않지요!" 나는 다시 물었다. "딸에게 사랑한다는 말로 서두를 꺼내면 어떻게 될까요?" 예를 들어서, '애야, 나는 너를 매우 사랑하기 때문에 이 맥주를 네 옷장에서 발견했을 때, 정말 두려웠단다. 이 문제에 대해서 이야기를 할 수 있을까? 네가 문제에 빠질까봐 정말 걱정스러워서 그래. 함께 이야기를 할까?'는 말로 시작하라. 이렇게 당신의 진심과 염려를 담은 말로 접근하라. 취조하는 투의 어조는 반발만 일으킨다. 사랑과 약자의 입장에서 시작하는 것이 친밀감과 믿음을 불러일으키기 때문에 자녀는 마음을 열고 당신과 함께 해결책을 찾을 수 있다. 아이들의 언어로 요청하라 가장 아름다운 이는 더욱더 아름다운 질문을 던지는 자이다. - E. E. 커밍스 아이들은 타고난 일류 판매원이다. 그들은 마지못해하는 부모들에게 사랑을 입힌 시리얼을 사도록 만들고도 자녀를 위해서 최선을 다한 듯한 기분을 들게 할 수 있다. 그 이유는 아이들이 판매의 두 가지 보편적인 기술인, 부가 의문문과 선택 의문문을 자유자재로 구사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당신도 아이들의 언어를 사용해서 대응해야 한다. 나는 여섯 살배기 딸을 데리고 그애의 가장 친한 친구인 아만다의 집으로 갔다. 그날 아이는 특히 피곤해지자, 나에게 거절할 수 없는 선물을 줬다. "아빠는 나에게 잘하고 싶지요, 그렇지요?" "그럼, 엘리자베스." "그럼, 아빠가 정말 나에게 잘하고 싶다면...... 내가 아빠에게 나를 업고 아만다의 집까지 가게 해드릴게요." 그것은 내가 들어본 중에 최고의 부가 의문문이었다. 부가 의문문으로 요청하라 기본적으로 부가 의문문은 상대에게 긍정을 이끌어 내는 구조로 되어 있다. 다음 문장을 질문 뒤에 덧붙임으로써 훨씬 능수 능란하게 자녀의 동의를 끌어낼 수 있다. 1. "다들 그렇지?" 2. "너는 그렇지?" 3. "네가 할 수 있지?" 4. "그게 될까?" 5. "안 그래?" 6. "동의하지?" 7. "그렇지?" 8. "해야 하지?" 9. "그래야지?" 10. "사람들이 그렇지?" 11. "그가 그렇지?"1 12. "그녀가 그렇지?" 13. "그게 옳지?" 14. "그렇겠지?" 15. "네가 할 거지?" 자녀에게 부가 의문문을 활용한 예를 들어보자. "숙제를 다 했니?" "아직 하지 않았어요, 엄마." "내가 그 말을 하고 싶으니, 잠깐 앉아봐라. 너는 금요일에 시험을 잘 보고 싶을 거야, 그렇지?" "네." "그 과목을 잘 알고 있는 편이 도움이 될 거야, 그렇지?" "네." "네가 시간을 내서 숙제를 한다면, 너는 나중에 조금 더 공부를 할 수 있을거야, 그렇지?" "그럴 거예요." "그러니, 지금 숙제를 하는 것이 나중에 땅을 치며 후회하는 것보다 좋아, 그렇지?" "알았어요......알았어요......알았다구요."
Board 추천글 2022.10.12 風文 R 1344
군맹무상(群盲撫象) 群:무리 군. 盲:소경 맹. 撫:어루만질 무. 象:코끼리 상. [동의어] 군맹모상(群盲摸象). 군맹평상(群盲評象). [출전]《涅槃經(열반경)》 여러 소경이 코끼리를 어루만진다는 뜻. 곧 ① 범인(凡人)은 모든 사물을 자기 주관대로 그릇 판단하거나 그 일부밖에 파악하지 못함의 비유. ② 범인의 좁은 식견의 비유. 인도의 경면왕(鏡面王)이 어느 날 맹인들에게 코끼리라는 동물을 가르쳐 주기 위해 그들을 궁중으로 불러 모았다. 그리고 신하를 시켜 코끼리를 끌어오게 한 다음 소경들에게 만져 보라고 했다. 얼마 후 경면왕은 소경들에게 물었다. “이제 코끼리가 어떻게 생겼는지 알았느냐?” 그러자 소경들은 입을 모아 대답했다. “예, 알았나이다.” “그럼, 어디 한 사람씩 말해 보아라.” 소경들의 대답은 각기 자기가 만져 본 부위에 따라 다음과 같이 달랐다. “무와 같사옵니다.” (상아) “키와 같나이다.” (귀) “돌과 같사옵니다.” (머리) “절굿공 같사옵니다.” (코) “널빤지와 같사옵니다.” (다리) “독과 같사옵니다.” (배) “새끼줄과 같사옵니다.” (꼬리) 이 이야기에 등장하는 코끼리는 석가모니(釋迦牟尼)를 비유한 것이고, 소경들은 밝지 못한 모든 중생(衆生)들을 비유한 것이다. 그리고 이 이야기는 모든 중생들이 석가모니를 부분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는 것, 즉 모든 중생들에게는 각기 석가모니가 따로 있다는 것을 말해 주고 있는 것이다.
Board 고사성어 2022.10.12 風文 R 844
‘~면서’ 명상법 중에 수식관(數息觀)이란 게 있다. 들숨과 날숨마다 하나 둘 숫자를 붙여 열까지 세는 것이다. 평소에는 관심을 두지 않던 호흡에 마음을 집중하여 망상의 족쇄를 끊는다. 이 관문을 통과하기가 쉽지 않다. 나도 모르게 딴생각이 나고 숫자를 까먹는다. 마음에 오만 가지 생각이 동시에 일어났다 사라진다는 걸 알아차릴 수 있다. 그나마 입이 하나인 게 다행. 동시에 두말을 하지 못하고, 한 순간엔 하나의 소리만 낼 수 있으니. 하지만 세상일 차근차근 순서대로 벌어지면 좋으련만 여러 일이 동시에 벌어지니 문제. 이렇게 동시에 벌어진 일을 한 문장에 담아내는 장치가 ‘~면서’이다. ‘음악을 들으면서 일을 한다. 공 차면서 껌을 씹는다. 화장실에서 볼일 보면서 책을 읽는다. 노래를 부르면서 운전을 한다.’ 앞뒤를 바꾸어도 뜻이 크게 다르지 않다. ‘일하면서 음악 듣기. 껌 씹으면서 공 차기. 책 읽으면서 볼일 보기. 운전하면서 노래 부르기.’ 가끔 결정적인 차이를 만들 때도 있다. 우스갯소리 하나. 중학생이 목사한테 당찬 질문 하나를 던졌다. “목사님, 기도하면서 담배 피워도 되나요?” 목사는 “어디서 그런 불경스러운 말을 하냐?”며 화를 냈다. 풀 죽어 있는 학생에게 친구가 넌지시 한 수 가르쳐준다. “질문을 바꿔봐.” 학생은 며칠 뒤 다시 묻는다. “목사님, 담배 피우면서 기도해도 되나요?” 목사 얼굴이 환하게 밝아지며 “물론이지. 기도는 언제 어디서든 할 수 있는 거잖아.” 한 문장 안에 두 개의 사건이 담기면 배치에 따라 선후 경중이 바뀌고 논리가 생긴다. 운명이 바뀌기도 한다. 정치와 은유(1): 전쟁 정치에서 제일 많이 동원되는 것이 전쟁 은유이다. 정치는 아군과 적군으로 나뉘어 싸우는 전쟁터다. 우리는 선하지만, 상대방은 악하며 궤멸시켜야 할 대상이다. 선거는 공격과 수비를 주고받는 운동 경기이자 게임. 둥둥 떠다니는 유권자들을 공략하여 우리 쪽으로 끌고 와야 한다. 특정 후보의 열정적인 지지자라면, 승리에 대한 간절함과 함께 혹여나 무능하고 위선적인 상대방이 권력을 잡을까봐 노심초사한다. 전쟁 은유는 사회적 대립을 말로 더욱 과장한다. 분단 상황은 대선 토론 주제로 ‘진짜 전쟁’을 올려놓았다. 사드 추가 배치를 정당화하기 위해 남북 대치 상황을 ‘옆구리도 치고 다리도 치고 복부도 치고 머리도 공격하면 다 방어해야 하는’ 격투기에 비유했다. 자연스럽게 내가 맞기 전에 ‘선빵’을 날려야 하는 거고. 문제는 같은 전쟁도 경험에 따라 전혀 다른 감각을 갖는다는 점이다. 경험의 차이는 상상의 차이를 낳는다. 은유는 중립적이지 않다. 총을 쏴본 사람에게 전쟁은 방아쇠를 당겨 총알이 날아가 상대방의 심장을 뚫고 나가는 장면이다. 총을 쏴보지 않은 사람은 총알이 날아와 자신의 심장을 관통하여 피를 철철 흘리며 쓰러지는 장면이 연상된다. 핵미사일에 대해서도 달라진다. 발사 버튼을 누르는 자와 폭격을 당하는 자. 그래 봤자 ‘전쟁에서 이긴다는 말은 지진과 싸워 이긴다는 말만큼이나 무의미’한데도 말이다(지넷 랭킨, 미국 최초 여성 하원 의원). 정치를 전쟁으로 본다면 갈등을 비폭력적으로 해결할 기회가 사라진다. 이 세계를 달리 해석하고 다른 처방을 내리는 대안적인 정치 은유는 없을까?
무엇을 어떻게 쓸까 - 이오덕 1부 산문을 어떻게 쓸까 감상문 쓰기 - 생각은 어디서 나오는가 (2/2) 친구의 죽음을 생각하며 다음은 지금부터 꼭 40년전에 쓴 글이다. 한 친구가 갑작스럽게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그 슬픈 마음을 적어 놓은 이 글은 지금 읽어도 가슴에 와 닿는다. 무엇을 쓰든지 진정으로 쓴 글은 이와같이 오래오래 사람의 마음을 움직인다. 머리로 재주로 쓴 글은 처음부터 사람들의 마음에 파고들 수 없지만, 참말로 쓴 글의 목숨은 이래서 영원하다 는 말이 나오는 것이다. 친구의 죽음 - 군복중학교 3학년 김종만 어느 날 초등학교 학생으로부터 오늘 진현이 초상친다는 말을 무심 중에 듣고 깜짝 놀랐다. 진현이가 죽었구나! 그가 병으로 신음하고 있다는 말을 벌써부터 듣고 있었으나 이처럼 갑자기 그의 앞에 애통한 죽음이 올 줄이야 누가 알았으랴! 진현이는 아직 열일곱 살밖에 되지 않는다. 어릴 때 부모님을 잃고 고생과 설움 속에 자라났건만 꽃다운 이 소년기도 넘기지 못하고 이처럼 갑자기 영원히 오지 못할 황천의 길을 가고 만 것을 생각하니 참으로 슬프다. 나도 오늘 죽을지 내일 죽을지 모르는 허무한 운명임을 다시금 생각한다. 과거 그와 한 학교에서 뛰놀고 학교에 오고 가던 그때가 어제 같건만, 이렇게도 애통한 죽음이 그의 일생을 끝마치게 한 것은 참으로 꿈 같은 일이다. 그는 오늘날까지 할아버지 한 분을 부모와 같이 여기고 삼촌 밑에서 한때는 남다른 설움과 고통을 받으며 꾸준히 학원의 길을 밟아 왔었다. 지난번 졸업식을 앞두고 교내에서 동무들끼리 추억장을 주고 받을 때, 나는 그가 써 달라는 추억장에 이렇게 써 주었다. 삼년 동안 하나님의 은총 가운데서 공부 충실히 하였으며 예수 진심으로 믿었느냐? 부디 진실히 믿어 천당에 갈 때는 너 혼자 가지 말고 나도 좀 다리고 가 달라. 이렇게 장난삼아 써 준 것이 지금 와서 생각해 보니 아무래도 이상한 생각이 든다. 이상하게도 내가 쓴 말대로 진현이는 천당으로 가 버렸다. 내가 쓴 그 추억장은 내 기억에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그는 과연 천당에 가서 내가 써준 추억장을 들여다보고 있을까? 아아 진현이! 이제는 너를 아무리 보고 싶어도 볼 수 없이 다만 안타까운 마음만 품을 뿐이구나. 이것은 나 혼자만이 아니라 너와 더불어 한 교실에서 뛰놀던 여러 친구들도 너의 죽음을 서러워하고 다시는 너의 모습을 찾아볼 수 없는 영원한 인생의 이별로서 슬퍼할 것이다. 죽음1 인간이란 것이 한 번 나서 한 번 죽기는 공통된 운명일 것이다. 그러나 그 죽음이란 말 한 마디가 왜 이렇게도 섭섭한지. 더구나 꽃다운 소년기도 넘기지 못한 애석한 젊은 죽음은 말할 필요도 없는 것이다. 이제 그는 오지 못할 황천 길에서 세상 모르고 잠든 것을 생각하니 그저 기가 막힐뿐, 인생의 허무함을 절실히 느끼는 바이다. 군북중학교 학생문집 (1955,10) ----------------------------------------------------------------------- 이 글은 참 깨끗한 말로 썼다. 어디 한 군데도 써서는 안되는 어려운 말이나 일본말투가 안 나온다. 그래서 요즘 학생들이 쓴 글에 견주어 볼 때, 역시 그때는 자연이 그다지 오염되지 않았던 것과 같이 말도 오염이 덜 되어 있었구나 하고 깨닫는다. 그런데 꼭 한가지 잘못된 말이 있다. -었었다 라는 이중과거형을 쓴 것이다. - 그는 오늘날가지 할아버지 한 분을 부모와 같이 여기고 삼촌 밑에서 한때는 남다른 설움과 고통을 받으며 꾸준히 학원의 길을 밟아 왔었다. 이 글월은 그는 오늘날까지...왔었다. 로 되어 있는데, 왔다 고 하면 될 것을 왔엇다 란 괴상한 말을 써야 할 까닭이 없다. 대관절 어째서 이런 말이 마치 갑자기 달라진 (돌연변이) 현상처럼 나타났는가? 이 글이 실려 있는 학생문집 을 죄다 훑어 봐도 다른 글에서는 이 었었다 (았었다)가 어디에도 안 나온다. 물론 이 말이 함안 군북지방의 사투리가 아님은 말할 것도 없다. 함안뿐 아니라 경남 어디에서도, 경북이고 전라도고, 우리 나라 어디서고 이런 사투리는 없다. 이 학생이 었었다 를 쓰게 된 것은 말로 쓴 것이 아니라 글에서 이 말을 배워서 글로 쓴 것이다. 그럼 어떤 글에서 이 말을 배웠을까? 두 가지 글에서 이 글말을 배웠다고 본다. 그 가운데 하나는 소설이나 동화나 수필, 그 밖에 문필가들이 써 놓은 온갖 글에서 이 -었었다 를 심심찮게 찾아볼 수 있는데, 책을 읽는 학생들이 이런 잘못된 글말을 저도 모르게 배워서 따르게 되는 것은 당연하다 하겠다. 이 -었었다 는 이광수의 소설에서부터 나온다. 그래도 일제시대에는 이 말을 안 쓰는 작가가 더러 있었고, 한 잡지에서 여섯 편의 소설이 실렸다면 그 가운데서 세편은 이 -었었다 란 말이 아주 안 나올 정도로 되어 있었다. 그런데 해방 후에는 이 말이 안 나오는 작품을 찾기가 매우 힘들다. 어느 글에서고 아무런 까닭도 원칙도 없이 제멋대로 여기저기 불쑥불쑥 나오는 꼴이 되어 있는 것이다. 우리말이 아니니까 무슨 원칙이 있을 수도 없다. 다음 또 하나는 어이없게도 학교에서 가르치는 문법 교과서로 이 괴상한 말법을 배운 것이다. 그때 나는 이 학생이 다니던 학교에서 철없게도 최현배 선생의 우리 말본 을 신이 나서 가르쳤는데, 바로 그 책에 이 었었다 가 나온다. 한글학자 최현배 선생은 한글 연구에 평생을 바쳤고, 우리말과 글의체계를 세우는 일에도 큰 업적을 남긴 분이지만, 우리말 움직씨(동사)의 때매김(시제)을 영문법의 틀에다가 억지로 맞추어 놓은 것은 큰 잘못이었다. 그래서 우리말에는 있지도 않고 있을 수도 없는 -었었다 -었었었다 따위를 쓰도록 한 것이다. 해방 후 온 나라의 학교에서 문법 교과서로 가장 많이 쓴 것이 우리 말본 이었다. 그래서 이 책을 배우고 가르친 사람들이 글을 쓸 때면 문법에 맞는 글, 유식해 보이는 글이 되게 하려고 -었었다 를 자랑삼아 쓰고, 심지어 말을 할 때도 가끔 지껄여 보고 싶어하는 풍조가 되어버린 것은 참으로 불행한 일이었다. 군북중학교는 우리나라에서 표준말을 쓴다는 서울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경상도 시골의 학교이기에 많은 학생들의 글을 모아 놓은 문집에도 이렇게 겨우 한 학생이, 그것도 단 한 번 -었었다 를 썼을 만큼 아니, 그보다 차라리 우연히 나타났다고 보는 것이 알맞을 정도로 글말의 공해를 적게 입은 것이다. 이 -었었다 는 최현배 선생보다 앞서서 우리 글을 연구한 주시경 선생의 문법책에서부터 나온다. 일제시대 문인들의 작품에 이 -었었다 가 나온 것도 우리 한글학자들의 잘못된 문법책에서 영향을 받아 그 모양으로 되었을 것이라는 짐작은 쉽게 할 수 있다. 한글학자들의 잘못은 말 을 떠난 글 의 질서에 매달리고, 그 질서 속에 빠져버린 데 있엇다. 말을 떠난 글의 질서는 남의 것이다. 중국 것이고, 일본 것이고, 미국 것이고 서양 것이다. 이 밖에 바로 영어 공부를 하고 영어를 우리말로 옮기면서 이 말을 쓰게 되었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이 경우에도 근본을 다지면 -었었다 란 말을 지어낸 한글학자들의 잘못이라고 아니할 수 없다. 앞에서, 이 글 친구의 죽음 이 입말로 쓴 것이 아니라 글말로 썼다고 했는데, 그것을 좀 설명해야 되겠다. 이 글이 들어 있는 학생 문집은 모두 123쪽으로 되어 있고, 이 책에 실려 있는 학생들의 글은 모두 입말로 씌어 있다. 이 친구의 죽음 바로 앞과 뒤에 있는 글들만 보더라도 아침을 일찍 먹고 지게를 걸머지고 나무를 하러 간다. 하루는 학교에서 공부를 하는데 어쩐지 눈물이 흐르고... 오늘부터 기다리던 하복을 입게 되었다. 이런 말들로 시작되어 있고, 어느 글이고 다 이와같이 보통 우리가 하는 말로 씌어 있다. 그런데 이 친구의 죽음 만은 좀 다르다. - 어느 날 초등 학교 학생으로부터 오늘 진현이 초상친다는 말을 무심중에 듣고 깜짝 놀랐다. 이렇게 처음 시작한 글월도 말을 하는 것처럼 쓴 것 같지만, 말과 다른데가 있다. 학생으로부터 이것은 입으로 하지 않는 말이고 글에서만 쓰는 말이다. 입으로 하는 말대로 쓴다면 마땅히 학생한테서 라고 해야 할 것이다. - 그가 병으로 신음하고 있다는 말은 벌써부터 듣고 있었으나 이처럼 갑자기 그의 앞에 애통한 죽음이 올 줄이야 누가 알았으랴! 여기 나오는 대이름씨(대명사) 그 도 실제 입말에서는 좀처럼 쓰지 않는 말이다. 신음하고 도 입으로는 앓고 라고 말하고, 듣고 있었으나 도 입으로 말할 때는 듣고 있었지만 이라 한다. 마지막에 나오는 알았으랴! 도 알았겠는가! 라고 해야 살아 있는 말이 된다. 이 밖에도 입말로는 쓰지 않는 말을 적어 보면 다음과 같다. 자라났건만 - 자라나지만 황천의 길 - 저승길 과거 - 지난날 (과거는 입말로 어쩌다가 쓰인다) 어제 같건만 - 어제 같은데 학원의 길을 밟아 왔었다 - 학교를 다녔다 하였으며 - 하였고, 했고 과연 - 정말 너와 더불어 - 너와 함께, 너와 같이 애석한 - 아까운 황천 길 - 저승길 인생의 허무함을 절실히 느끼는 바이다. - 인생이 허무한 것을 절실히 느낀다 이와같이 보통 우리가 입으로는 하지 않는 말들이 때로는 이름씨(명사)로, 때로는 움직씨(동사)의 씨끝(어미)으로, 때로는 어찌시(부사)나 토씨(조사)로 여기 저기 섞여 있어서 글 전체의 분위기라 할까, 질서 같은 것이 입으로 하는 말과는 조금 다르게 되어있다. 이것은 아마도 이 글의 내용과 관계가 있을 듯하다. 사람의 죽음을 얘기하는 자리가 되자니까 여느 때는 농담을 하면서 지내던 친구였는데도 저절로 마음이 굳어지고 엄숙한 심정이 되어 이런 글말투가 된 것이 아닌가 싶다. -었었다 란 잘못된 말도 이런 글말의 분위기가 되다보니 갑자기 한 개가 나타난 것이다. 이러고 보면 글말에도 쓸 수 있는 것이 있고, 써서는 안되는 것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입으로는 말하지 않지만 글로 쓸 수 있는 말은 다시 또 세 가지로 나눌 수 있는데, 그 첫째는 중국글자말(한자말)이다. 앞에서 들어 놓은 글에 나오는 황천 과거 과연 애석 같은 말이 여기에 든다. 이런 말들은 입으로 더러 쓰게도 되었지만 어디까지만 글에서 생겨난 말이다. 다음은 옛말이 되어버려서 우리가 입으로는 말하지 않지만 글로서는 그대로 쓰고 있는 말이 있다. 앞에서 들어 놓은 말에서 -건만 -으며 -으랴 따위로 된 움직씨(동사)의 씨끝(어미)들과, -로부터 라는 토가 이런 말이다. 세번째는, 역시 옛말이지만 한문을 새겨 읽을 때 나오는 말을 그대로 글에서 쓰고 있는 말인데, 앞에서 든 글에서는 더불어 와 바 가 있었다. 이 밖에도 한문새김말은 하여금 이른바 -으로써 따위로 많이 있다. 이 세 가지 글말들은 오랫동안 우리가 읽어온 글 속에서 글말로 이어져 왔기에 우리 것으로 그다지 어색하지 않게, 때로는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진다. 그래서 이런 말들을 우리 것이 아니라든지 벌써 죽어버린 말이라 하여 아주 물리칠 수는 없고 그럴 필요도 없다. 다만 오늘날 우리가 나날의 생활에서 살아 있는 입말로 쓰지 않거나 쓰지 않아도 될 말이니 글을 쓰는 경우에도 될 수 있는 대로 이런 말을 안 쓰거나 쓰더라도 적게 쓰는 것이 좋겠다. 입으로 하는 깨끗한 우리말을 써야 글도 살아나는 것이다. 다음에, 써서 안되는 글말은 앞에서 말해 놓은 -었었다 란 말 밖에도 아주 많은데, 대강 다음과 같이 일곱 가지로 나눌 수 있다. 첫째, 아주 어려운 중국글자말이다. 조우, 해후, 호우, 하자(흠), 방불, 서식, 종용, 독백, 포효, 미지수.. 얼마든지 있다. 둘째, 말하기도 힘들고 알아듣기도 어려운 중국글자말이다. 오자, 오수, 오지, 수수, 유가, 주가, 고자, 기로, 끽연, 만끽, 가시화, 의의, 의외, 화훼, 회화, 박차, 미소, 미아, 유아, 발발.. 신문이나 잡지에서 얼마든지 볼 수 있는 이런 말들은 모조리 쓰레기통에 싹 쓸어 내버려야 할 말들이다. 셋째, 우리말이 있는데 공연히 쓰는 말이다. 돌연, 돌입, 붕괴, 비래, 작물,제초, 상호, 조기, 기호, 관건, 주방, 석권, 계곡, 도서(섬), 냉수, 여명, 초원, 수면, 휴식을 취한다.. 깨끗한 우리말을 아내고 안방에 들어와 앉아 주인 노릇을 하는 이런 엉뚱한 한자말이 얼마나 많은가! 넷째, 우리말의 얼개를 아주 망가뜨려 놓는 말이다. 구조를 파괴하는 말이라고 하면 더 잘 알아 들을지 모르겠다. 나의 집, 나의 어머니, 우리의 갈 길.. 이렇게 의 를 아무데나 쓰는 경우라든가, -에 있어서, -에 있어서의, -에의, -에로(의), -로의, -으로부터의... 이런 따위로 쓰는 말인데, 거의 모두 괴상하게 되어 있는 토로서, 일본말을 따라 쓴다고 이 꼴이 되었다. 다섯째, 아주 일본글을 그대로 쓰는 말이다. 입장, 입구, 역할, 수순, 수속, 취급, 수취인, 인상, 인하, 매입, 매도, 민초, 승부사, 보다(어찌씨 = 부사로 쓰는 경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이런 말들 가운데는 벌써 입말로 널리 쓰고 있는 말이 적지 않다. 그러나 아무리 널리 쓰고 있더라도 이런 말은 일본의 글말이니 언젠가는 꼭 없애야 한다. 여섯째, 서양말이다. 가이드, 오픈, 이미지, 쇼핑, 조깅, 레크리에이션, 캘린더, 조크, 스케줄, 해프닝.. 이밖에도 얼마든지 있다. 우리말이 될 수 없고 되어서도 안 되는 말들이다. 일곱째, 지식인들이 제멋대로 만들어서 퍼뜨리는 말을 쓰지 말아야 한다. 보기를 들면 먹을거리 란 우리말을 안 쓰고 공연히 먹거리 란 말을 써서 우리말을 어지럽게 하는 따위다. 책을 읽거리 라 하고 옷을 입거리 라 하니 참 어이가 없다. 이것이 다 책에 갇히고 글 속에 빠져 있는 사람들이 하는 꼴이다. 말은 우리 것이다. 그런데 글은 중국에서 오고 일본에서 오고 서양에서 왔다는 것을 꿈에도 잊어서는 안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