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을 어떻게 쓸까 - 이오덕 머리말 이 책은 청소년들이 정직한 자기표현을 하는 글쓰기의 길잡이가 되도록 하려고 쓴 것이다. 정직한 자기 표현의 글쓰기' 라고 한 까닭은 이렇다. 지금 우리 나라 어른들이 쓰는 글만 쓰고, 어른들이 좋아할 것 같은 글만 쓰고 있다. 초등학교에서 어른들이 쓰는 동시를 흉내내고, 독서감상문을 억지로 써내고, 불조심,저축..따위 글을 써내는 데 시달리던 아이들이 중학생이 되면 시인들의 시를 읽어서 그 흉내를 내고, 소설의 한 토막을 교과서로 읽어서 소설 쓰는 흉내를 내고, 수필을 읽어서 또 수필 쓰는 흉내를 낸다. 흉내를 낸다기보다 내도록 훈련을 받고, 강요당하고 있다고 하는 것이 더 맞는 말이다. 이래서 아이들이 어른들에 끌려 다니기만 하고, 조종당하기만 하고, 어른들의 도구 노릇만 하면서 어른이 된다.(어른이 되어서 다시 또 그 다음 자라나는 아이들을 그렇게 길들인다.) 정직한 자기 표현이란 것을 도무지 할 줄 오르는 가엾은 아이들! 흉내만 내고, 시키는 대로만 하고, 주는 것만 받아서 되뇌는 점수따기 기계들! 제 마음, 제 정신, 자기 말, 자기 것은 도무지 가질 줄 모르도록 되어 있는 허수아비 인생들! 나는 결코 부풀려서 하는 말이 아니다. 그 수많은 학생들이 써놓았다는 글이 어디 얼마나 있는가? 살아 있는 글이 어디 몇편이나 있는가? 어쩌다가 나오는 학급문집에 실려있는 글을 보면 눈물이 날 지경으로 비참하다. 왜 우리 학생들이 이 모양으로 되었는가? 사람은 누구든지 아주 어린 아이 때부터 자기 표현으로 자라난다. 자기 표현으로 슬기가 생겨나고, 재능이 피어난다. 자기 표현이 제대도 안될 때, 자기표현을 할 수 없게 될 때 사람은 병들고 죽게도 된다. 자기 표현의 가장 좋은 수단이 글쓰기다. 그런데 흉내내기는 자기 표현이 아니다. 말재주와 글장난도 자기 표현이 아니다. 그것은 참된 자기 표현을 가로막는 병들고 비뚤어진 글짓기다. 이래서 이 책은 청소년 학생들에게 참된 자기를 표현하는 길을 보여주려고 했다. 자기를 찾고, 자기 말을 찾고, 자기 삶을 찾아 그것을 스스로 키워가는 글쓰기, 이것이 사람의 목숨을 살리는 글쓰기다. 모두 3부로 나누었는데, 1부는 여러 가지 글의 갈래에 다른 글쓰기의 방법과, 글쓰기와 문학의 관계를 밝혔다. 여기서는 각 절마다 두 편 정도씩 학생들의 글을 보기로 들어, 그 글을 중심으로 해서 글을 어떻게 보고 어떻게 써야 하는가를 말했다. 2부는 시에 대한 이야기다. 시를 어떻게 보고 어떻게 써야 하나 하는 문제를 누구든지 잘 알 수 있도록 쉽게 쓰면서, 지금까지 아무도 말하지 않았던 우리말과 삶이란 관점에서 시를 환히 비춰 보도록 했다. 3부에서는 국어 교과서가 우리에게 어떤 말을 가르치고 어떤 글을 쓰게 하였는가를 살펴 보았고, 또한 대학 입시 공부로 하는 논술 문제를 어떻게 보고 어떻게 풀어야 하는지를 다루었다. 이 책을 읽는 여러 청소년 학생들이 글을 보는 참된 눈을 뜨게 되고, 그래서 글쓰기로 그 표현을 즐기게 된다면, 반세기 동안 꽉 막혔던 물꼬가 확 트이는 새 역사가 시작될 수도 있겠기에, 어린애같이 가슴 두근거리며 그날을 기다리고 싶다. 1995년 9월 이오덕
사랑할 땐 별이 되고 - 이해인 편지 - 친구에게 친구에게 부를 때마다 내 가슴에서 별이 되는 이름 존재 자체로 내게 기쁨을 주는 친구야 오늘은 산숲의 아침 향기를 뿜어내며 뚜벅뚜벅 걸어와서 내 안에 한 그루 나무로 서는 그리운 친구야 때로는 저녁노을 안고 조용히 흘러가는 강으로 내 안에 들어와서 나의 메마름을 적셔 주는 친구야 어쩌다 가끔은 할말을 감추어 둔 한 줄기 바람이 되어 내 안에서 기침을 계속하는 보고 싶은 친구야 보고 싶다는 말 속에 들어 있는 그리움과 설레임 파도로 출렁이는 내 푸른 기도를 선물로 받아 주겠니? 늘 받기만 해서 미안하다고 말할 때 빙긋 웃으며 내 손을 잡아 주던 따뜻한 친구야 너에게 하고 싶은 말들이 모였다가 어느 날은 한 편의 시가 되고 노래가 되나 보다 때로는 하찮은 일로 너를 오해하는 나의 터무니없는 옹졸함을 나의 이기심과 허영심과 약점들을 비난보다는 이해의 눈길로 감싸 안은 친구야 하지만 꼭 필요할 땐 눈물나도록 아픈 충고를 아끼지 않는 진실한 친구야 내가 아플 때엔 제일 먼저 달려오고 슬픈 일이 있을 때엔 함께 울어 주며 기쁜 일이 있을 때엔 나보다 더 기뻐해 주는 고마운 친구야 고맙다는 말을 자주 표현 못했지만 세월이 갈수록 너는 또 하나의 나임을 알게 된다. 너를 통해 나는 사랑하는 법을 배우고 기뻐하는 법을 배운다 너의 그 깊고 넓은 마음 참을성 많고 한결같은 우정을 통해 나는 하나님을 더욱 가까이 본다 늘 기도해 주는 너를 생각하면 나 또한 기도하지 않을 수 없다 내 마음까지 훤히 들여다보는 네 맑고 고요한 눈을 생각하면 나는 함부로 행동할 수가 없다 나도 너에게 끝까지 성실한 벗이 되어야겠다고 새롭게 다짐해 본다 우리가 서로를 이해 못해 힘든 때도 있었지만 화해와 용서를 거듭하며 오랜 세월 함께 견뎌 온 우리의 우정을 감사하고 자축하며 오늘은 한 잔의 차를 나누자 우리를 벗이라 불러 주신 주님께 정답게 손잡고 함께 갈 때까지 우리의 우정을 더 소중하게 가꾸어 가자 아름답고 튼튼한 사랑의 다리를 놓아 많은 사람들이 춤추며 지나가게 하자 누구에게나 다가가서 좋은 벗이 되셨던 주님처럼 우리도 모든 이에게 마음의 문을 여는 행복한 이웃 행복한 세상을 만드는 벗이 되자 이름을 부르면 어느새 내 안에서 푸른 가을 하늘로 열리는 그리운 친구야 (1996)
Board 삶 속 글 2022.10.05 風文 R 527
한국대표수필 - 김동리 외 9명 "김소운편" 김소운(1907~1981) 수필가, 시인. 일본 문학가. 호는 소운. 경남 부산 출생. 일본에서 중학 중퇴. 초기에는 시로 출발하여 관념시 계통의 시작품을 발표했으나 일본인들의 근거 없는 우월감과 한국 문화에 대한 인식 부족을 통감하고서 한국의 민요, 동요, 시 등을 일본에 소개하는 작업을 벌여 크게 주목받았다. 문학의 사회자로 문화 수출의 상인으로 자처했던 그는 후기에는 인생에의 통찰이 담긴 격조 높은 수필을 많이 발표하여 많은 감동을 불러일으켰다. 놓지 않았던 그 손 '가난'이 갖다 주는 프리미엄-그렇다고는 하나 가난만 하면 그 프리미엄이 절로 따라온다는 것은 아니다 서로 위하고 아끼는 애정의 불씨-그 불씨가 없고서야 어느 아내가 간장 하나로 밥을 먹으면서 '눈물이 나도록 행복'할 것이며, 어떤 사내가 아침 끼니를 삶은 고구마에 홍차 한 잔으로 때우려는 아내를 남의 앞에 치사하고 다닐 것인가. 귀하고 소중한 것은 가난 그것이 아니요, 제아무리 염라 대왕 같은 가난의 위력 앞에서도 굴하지 않고 시들지 않는 '진실의 애정' 그것이라는 것은 더 말할 나위도 없다. 가난한 내외간 이야기가 또 하나 있다. 사내는 등산을 좋아했고, 책읽기를 좋아했다. 쉬는 날은 젊은 아내를 데리고, 자그마한 륙색을 어깨에 메고는 일쑤 산을 잘 찾아다녔다. 몇 가지 일에 실패를 겪고 나서 사내는 사과 장사를 시작했다. 과일 시장에서 사과를 사들여 트럭으로 춘천까지 실어 가서 거기 장사꾼에게 넘기면 수송 운임을 제하고도 얼마만큼은 이윤이 생겼다. 제날로는 못 와도 춘천서 하룻밤을 묵고 다음날은 아내가 기다리는 서울로 돌아왔다. 남의 곁방 하나를 사글세로 빌려서 장모와 같이 사는 세 식구 살림이다. 그러던 어느 날, 남편은 사과를 싣고 춘천으로 떠난 뒤 사흘이 가고 나흘이 지나도록 소식이 없었다. 기다리다못해 닷새째 되는 날 아내는 집을 나와 서울역에서 기차를 탔다. 젊은 년이 사내를 못 잊어한다고 혹시나 그런 소리를 들을 것 같아, 친정 어머니에게는 가까운 시골에 사는 동무의 병문안을 빙자했다. "춘천에만 닿으면 자연 만나지려니 했지요. 춘천을 손바닥만하게 알았던가 봐요. 정거장에 내렸더니 읍내까지가 왜 그렇게 멉니까. 지금은 어떻게 됐는지 모릅니다마는, 그 날 밤으로 춘천에 있는 여관이란 여관은 모조리 찾아다녔지요. 그런데도 그이는 아무 여관에도 없어요. 하룻밤을 지내고 나서 이튿날 아침, 그이의 친한 분이 도청에 있다는 생각이 나서 거기를 찾아가느라고 나선 길에, 행여나 해서 정거장에를 가 보았지요." 그랬더니 차표를 사려고 줄을 지은 행렬의 맨 앞에 그 남편이 서 있었더란 것이다. 아내는 반가움, 그리움에 가슴이 뛰면서도, 입으로는 아무 말도 못하고 남편 곁으로 가서 그저 가만히 서 있었다. 두 내외의 눈이 서로 마주치기까지 얼마나 시간이 걸렸을까? 2초나 3초밖에 안 되는 그 짧은 시간이, 아내에게는 몹시도 길고 지루했을 것만 같다. 춘천시 서울까지 서너 시간이나 달리는 그 거리를 남편은 아내 손을 꼭 쥔 채 찻간에서 한 번도 그 손을 놓지 않았다. 닷새째가 되도록 남편이 돌아가니 못한 사연-춘천으로 올 때 중도에서 태워 달라는 사람들을 트럭에 올렸더니, 인원이 좀 많았던지 가마니에 넣었던 사과들이 사람 무게에 눌려서 서의 모두 껍질이 상해 버려 옳은 값으로 흥정이 되지 않았다. 밑지고 돌아갈 수는 없는 사정이라 장터에 임시로 자리 하나를 빌려 낱개로 소매를 하느라고 꼬박 나흘이 걸렸다. 아내가 기다릴 것을 모르는 것은 아니나, 그 당시는 전보도 옳게 제 구실을 못하던 시절이다. 남편이 유숙한 곳은 친구네 집이었다. 여관을 주름잡아서 필경 찾지 못했던 이유가 밝혀졌다. 그러나 그런 주석이나 해명은 지금 쓰는 이 이야기와는 별로 상관이 없다. 춘천서 서울까지 서로 말이 없이 찻간에 실려 오면서 아내의 손을 쥔 채 그 손을 놓지 않았다는 지아비. 남편에게 손 하나를 맡긴 채, 행복에 젖어 그저 황홀했던 그 날의 그 아내. 이런 행복은 어느 장관 댁이나 고루 거각의 부잣집에서는 좀처럼 못 찾아보는 행복이다. 그러나 그런 행복론보다도 생각해 보아야 할 일이 따로 있다. 간직한 행복의 실태 사과 장사에서 몇 해나 지났는지-그 새 어린것이 강보에 싸인 갓난애까지 셋이나 생겼다. 서울서 백여 리 떨어진 시골 농촌에서 돼지를 기르고 닭을 치고 하면서 영영 자립하던 그들의 단란한 가정이 하루 아침에 산산이 부서졌다. 6.25사변에 한 마을 청년 네다섯과 같이 끌려나간 채 1주일이 지나도록 남편은 돌아오지 않았다. 수소문으로 30리 밖 재 너머 언덕으로 찾아간 아내는 거기 총알에 꿰뚫려 쓰러진 송장 속에서 남편의 시체를 찾아 내었다. (이런 이야기를 들추기로 들면 한이 없다. 6.25의 피비린 희생이 어찌 이 한 가정뿐이랴. 여기서는 그가 죽었다는 사실, 두 번 다시 그들 가족 앞에 나타나지 않는다는 그 사실만을 적어 두기로 한다.) 다시는 되돌아오지 못할 막다른 외길, 그것이 '죽음'이다. 사람들은 이별을 슬퍼하고 죽음을 슬퍼한다. 과연 죽음이란, 이별이란 그렇게 슬퍼만 해야 하는 것일까? 슬픔, 눈물, 그런 불행의 저쪽에 행복이란 것이 있다. 도대체 행복이란 어떤 것이며 무엇을 가리킨 것일까? 거기에 대한 대답을 뚜렷이 내세운 사람은 아직은 없는 것 같다. 그러나 한 가지 확실한 것은 행복이란 객관의 눈으로는 헤아릴 수도, 잴 수도 없다는 것--제각기 제 주관 속에만 간직할 수 있는 것 그것이다. 천하가 다 내 것이면 행복할까? 전 세계의 미남 미녀를 혼자 독차지할 수 있다면 행복할까? 호화 찬란한 성찬보다도 주릴 때 먹는 보리밥 한 술-행복이란 어디까지나 내용의 문제요, 분량으로 판단할 것은 아닌 것 같다. R씨의 초대로 저녁 대접을 받은 자리에서 R씨가 자기와는 친한 어느 부인네 한 분에게 물었다. "부인은 지금까지 겪어 온 중에서 어떤 때가 제일 행복했나요? 가장 행복이라고 생각되던 일이 뭔가요?" 동석했던 그 부인네가 잠시 머뭇거리다가 입을 열어 한 말이 '서울 닿기까지 한 번도 놓지 않았던 남편의 손.' 그 이야기였다. 세 아이가 다 자라서 그 중 둘은 벌써 대학생이라고 한다. 거기까지 길러내면서 걸어 온 고생길. 어느 때는 길거리에 앉아서 떡장사도 했고, 시골을 찾아다니면서 옷가지와 양곡을 바꾸는 행상꾼 노릇이며 나중에 좀 자리가 잡힌 뒤에는 동대문 시장에 가게를 갖고 헌옷 장사를 하다가 믿었던 여자 친구에게 푼푼이 모은 돈을 떼어도 보았고-. 자식 셋에다 사는 보람을 걸고 격류를 거슬러 살아 온 그 고초 속에서도, 때로는 즐거운 일, 행복으로 느껴질 일도 전혀 없지는 않았으리라. 그런데도 한 여인의 가슴 속에 그 날 그 찻간에서 느꼈던 행복만이 오직 하나 간직한 행복의 실체였다는 사실-무슨 외국 영화의 한 토막 같은 그 날의 그 장면을 마음 속으로 새기면서 나는 또 하나 딴 생각에 잠겼다. - 만일에 그 남편이 죽지 않고 살아 있었더라면 그 날의 그 '행복'이 과연 지금까지 자리를 바꾸지 않고 그대로 이어졌을까? 젊어서는 그런 일도 있었더니라는 한낱 낡은 앨범의 한 장으로 그쳐 버리고 말지 않았을까? 만인이 슬퍼하는 죽음-그 죽음으로 해서 경화되는 사모가 있고, 퇴색하지 않는 사랑이 있다면 '죽음'을 어찌 슬프다고만 할 것인가-. 죽음이 가져오는 손실보다는 죽지 않고 삶으로 해서 결과하는 상실이 더 크다는 것을 생각할 때가 많다.
내 마음이 강해야 내 소원도 이루어진다 - 잭 캔필드, 마크 빅터 한센 먼저 베풀어라 - 중국 설화 중국 도시의 한 가난한 거지는 하루 종일 동냥 그릇을 내밀고 행인들에게 쌀이나 다른 것을 구걸했다. 하루는 황제를 필두로 한 장엄한 행진이 그가 동냥하는 거리를 통과했다. 황제는 천천히 움직이는 가마를 타고 백성들에게 공짜로 선물을 나눠주었다. 거지는 뛸 듯이 기뻐했다. 그는 생각했다. "이제야 좋은 기회가 찾아왔구나. 이번에는 값비싼 선물을 받게 될거야." 그리고 그는 좋아서 덩실덩실 춤을 췄다. 드디어 황제가 다가오자, 그는 열렬한 기대를 안고 동냥 그릇을 내밀었다. 하지만 황제는 그가 기대했던 선물을 주기는커녕 그에게 진상품을 요구했다. 불쌍한 거지는 매우 실망하고 화가 났다. 그래서 그는 동냥 그릇을 탁탁 털어 찾아낸 쌀 두 톨을 떨리는 손으로 황제에게 바쳤다. 황제는 그것을 받고 지나갔다. 하루 종일 그는 화를 내고 투덜거렸다. 그는 황제를 비난하고, 부처님을 원망하고, 그에게 말을 걸고 동냥을 던져 주는 사람들에게 짜증을 부렸다. 그날 밤 거지는 초라한 오두막으로 돌아와 빈약한 동냥 그릇을 엎었다. 그리고 거기에서 그가 황제에게 줬던 쌀알 크기의 금 덩어리 2개를 발견했다. 주는 만큼 얻는다 - '화자 근원서'에서 몇 년 전, 캘리포니아 아마르고사 사막의 인적 없는 철도역 근처에 다 쓰러져 가는 오두막이 한 채 서 있었다. 그 주변에는 우물이 있었고, 그것은 사방 여러 마일의 유일한 물 공급처였다. 펌프에는 베이킹 파우더 깡통이 달렸고, 그 깡통에는 갈색 방수 종이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적혀 있었다. 데저트 피터 씀 - 이 펌프는 1932년 6월만큼이나 잘 작동한다. 나는 펌프에 새 파이프를 연결했고, 앞으로 5년 동안 끄떡없다. 하지만 이제 파이프가 말랐기 때문에 펌프에 물이 축여져야 한다. 나는 저기 휜 바위 아래에 물병 하나를 묻어 뒀다. 그 병에는 이 펌프를 축이기에 충분한 물이 담겨져 있다. 하지만 당신이 먼저 물을 마신다면 그렇지 않다. 우선 물병의 1/4을 따라 가죽을 흠씬 적시듯 그렇게 펌프에 뿌려라. 그 다음에 남은 물의 절반을 콸콸 쏟아라. 당신은 물을 먹게 될 것이다. 우물은 절대로 마르지 않는다. 믿음을 가져라. 그리고 당신이 물을 다 마신 다음에 다른 사람을 위해서 병을 도로 채워서 원래 자리에 갖다 둬라. 추신 : 물을 먼저 마시지 말 것! 우선 펌프를 실컷 축이면, 당신은 얻을 수 있는 것을 모두 갖게 될 것이다. 그리고 다음에 기도할 때, 신은 펌프와 같다는 사실을 멍심하라. 주님에게 먼저 베풀어야 한다. 나는 마지막 남은 동전을 타인에게 베풀어 내 기도의 펌프를 채웠고, 감사 기도를 드리며 나의 마지막 콩 한쪽을 타인에게 먹였다. 그리고 어김없이 응답을 받았다. 당신은 마음을 주는 것에 고정시켜야만 얻을 수 있다. 당신이 원하는 대접을 타인에게 행하라 패티 룬디 - 오스트레일리아 치과의사 오스트레일리아 브리스베인의 치과 의사 패티 군디 박사의 진료실은 항상 환자들로 성황을 이룬다. 그 병원에서는 환자들이 기다리는 동안 갓 구워 낸 빵과 신선한 차를 마음껏 먹을 수 있다. 여기 환자에게 다음과 같이 물었다. "다른 병원에 가면 기다릴 필요가 없을 텐데, 왜 이곳을 찾습니까?" 그는 대답했다. "내가 이 병원에 오는 이유는 사람들이 나를 좋아하기 때문이에요." "그게 무슨 뜻입니까?" "몇 주일 전의 내 예약일에 진료실은 대기 환자들로 매우 혼잡했어요. 한 공급 업체에서 치료에 필요한 재료를 보내 주지 않았기 때문이었지요. 그래서 병원 측은 나에게 전화를 해서 깊이 사과했을 뿐 아니라, 그날 밤 '죄송합니다'는 메모와 함께 코냑 한 병을 보내 왔어요. 나는 정말 감복했습니다." 다음은 패티 룬디 박사, 본인의 말이다. 처음에 치과를 개업했을 때, 나는 한밤중에 여러 명의 환자들로부터 긴급 치료를 요청하는 전화를 받았다. 최소한 일주일에 한 번은 자다 말고 일어나야 했다. 하지만 우리가 환자들에게 전화번호를 알려 준 다음에는 그런 일이 벌어지지 않았다. 그저 재차 확인을 구하는 전화 몇 통이 전부였다. 참 이상하지 않은가? 당신이 환자들에게 전화번호를 알려주면, 그들은 전화하지 않는다. 하지만 당신이 그렇지 않으면, 그들은 전화한다. 그 이유는, 그들이 일단 손에 무엇인가를 갖고 있으면 이렇게 생각하기 때문인 것 같다. "나는 언제든지 전화를 걸 수 있어, 하지만 조금 참다가 전화를 걸자. 괜찮을 거야. 그는 나에게 전화번호를 알려줄만큼 좋은 사람이야. 나는 그의 잠을 방해하고 싶지 않아."
Board 추천글 2022.10.05 風文 R 1336
공중누각(空中樓閣) 空:빌 공. 中:가운데 중. 樓:다랄 루. 閣:누각 각. [유사어] 과대망상(誇大妄想). [출전]《夢溪筆談》 공중에 떠 있는 누각[蜃氣樓(신기루)]이란 뜻. 곧 ① 내용이 없는 문장이나 쓸데없는 의론(議論). ② 진실성이나 현실성이 없는 일. ③ 허무하게 사라지는 근거 없는 가공의 사물. 송(宋)나라의 학자 심괄[沈括:호는 몽계옹(夢溪翁)]이 저술한 일종의 박물지(博物誌)인 《몽계필담(夢溪筆談)》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실려 있다. 등주(登州)는 사면이 바다에 임하여 봄과 여름철에는 저 멀리 하늘가에 성시누대(城市樓臺)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이 고장 사람들은 이것을 해시(海市)라고 이른다. ..[登州四面臨海 春夏時 遙見空際 城市樓臺之狀 土人謂之海市(동주사면임해 춘하시 요견공제 성시루대지상 토인위지해시)] 훗날 청(淸)나라의 학자 적호(翟灝)는 그의 저서《통속편(通俗篇)》에서 심괄이 이 글에 대해 이렇게 쓰고 있다. 지금 언행이 허구에 찬 사람을 일컬어 ‘공중누각’이라고 말하는 것은 이 일을 인용한 것이다. [今稱言行虛構者 曰空中樓閣 用此事(금칭언행허구자 왈공중누각 용차사)] 이처럼 ‘공중누각’이란 말은 이미 청나라 때부터 쓰여 왔으며, 심괄의 글 가운데 ‘해시’라는 것은 ‘신기루’를 가리키는 말이다.
Board 고사성어 2022.10.05 風文 R 984
아이에이이에이 40년 전에 나온 문자의 역사 책을 보면 한국은 여전히 한자와 한글을 함께 쓰는 혼합문자 사회로 묘사된다. 한겨레신문의 한글전용은 한자 지식이 교양의 잣대였던 시기에 한글만으로도 지식 축적과 소통이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줌으로써 언어 평등을 앞당겼다. 한글전용을 거부하는 신문들도 이젠 한자를 덜 쓴다. 유력 정치인의 성(李, 尹, 洪)이나 국가명(韓, 北, 美, 中, 日), ‘與, 野, 靑, 檢’처럼 자주 입에 오르는 대상, ‘母, 車’처럼 다들 알 법한 한자어, ‘故 ○○○ 선생, 前 ○○○ 대표’처럼 고정된 표현 정도이다. 물론 현대사회에서는 자신의 문자만으로 정보를 기록할 수 없다. 하다못해 아라비아 숫자, 단위 기호(m, ㎏), ‘&, #’ 같은 특수기호를 섞어 쓴다. 영어가 문제인데, 한겨레도 고민이 깊어 보인다. 가급적 쓰지 않되, 쓴다면 ‘국제통화기금(IMF), 국제올림픽위원회(IOC)’처럼 한국어 대역어를 먼저 쓰고 괄호 안에 영어를 집어넣는다. 제목에는 어쩔 수 없이 영어를 쓰기도 한다(‘WTO 발표’). ‘브이시아르, 시시티브이, 피아르, 큐엘이디’처럼 대역어 없이 한글로 영어를 옮겨 쓰는 경우는 더 난처하다. 한국이 국제원자력기구 의장국이 되었다는 기사에 쓰인 ‘아이에이이에이’라는 글자는 얼마나 생소하던지. 저 기구를 적는 방법은 적어도 여섯가지가 있다. ‘IAEA, IAEA(국제원자력기구), 아이에이이에이, 아이에이이에이(IAEA), 국제원자력기구(IAEA), 국제원자력기구’. 어떤 것이 남녀노소 모두가 단박에 이해할 수 있는 자연스러운 표기 방법일까? 위드 코로나 까놓고 말해, 당신은 ‘단계적 일상 회복’과 ‘위드 코로나’ 중에서 어떤 말이 더 친숙한가? 나는 ‘위드 코로나’ 쪽인데, 왜 그럴까? 우리말에 대한 애정 부족? 설마. 모든 말은 현지화한다. 한 언어 안에도 이질성이 뒤섞여 있다. 하물며 다른 말에 들어가면 애초의 모습 그대로일 리가 없지. 말은 집 떠나면 고생이 아니라, 바뀐다. 영어도 싱가포르에선 싱글리시, 스페인에선 스팽글리시, 프랑스에선 프랑글레, 한국에선 콩글리시. 쉽게 눈에 띄는 건 단어다. ‘핸드폰, 카센터, 모닝콜, 원샷, 백밀러(백미러), 리모콘(리모컨), 오토바이, 사인’. 옥스퍼드 사전에도 오른 ‘스킨십, 파이팅’도 콩글리시다. 콩글리시 중 상당수는 일본식 영어이고. ‘잘못’ 만든 영어가 아니다. 현지화한 영어다. ‘셀룰러폰’보다 ‘핸드폰’이 이해가 더 잘 되는데 어쩌라고. 외국 신문에서 ‘위드 코로나’도 콩글리시라고 지적하자 몇몇 언론에서 이를 받아쓰더라. 그러면서 ‘위드 코로나’가 ‘영어권에선 알아들을 수 없다’느니, ‘일본식 영어’라느니 하면서 이 말이 ‘불온하다’고 덮어씌우더라. 영어권 사람들이 이해 못 하는 건 당연하지. 또 ‘일본식 영어’면 어떤가? 사람들은 기원을 따지며 말을 쓰지 않는다. 생활이 먼저이므로. ‘위드 코로나’는 방역 정책이기도 하지만, 앞으로의 삶을 대하는 태도를 뜻하기도 한다. 이미 하나의 개념어로 자리잡았다. 외제든 짝퉁이든 어떤 말이 내 입에 달라붙었다면 쉽게 떼어지지 않는다. ‘남’이 뭐라 하든 우리는 우리식 영어를 쓰는 거다. ‘내땅내영!’(내 땅에선 내 맘대로 영어 쓰자.) 김진해 / 한겨레말글연구소 연구위원·경희대 교수
사랑할 땐 별이 되고 - 이해인 첫영성체의 하얀 기쁨 누가 나에게 가장 잊을 수 없는 선물을 받은, 잊을 수 없는 크리스마스가 언제였느냐고 묻는다면 나는 서슴지 않고 내가 첫영성체를 하던 해의 크리스마스라고 대답하고 싶습니다. 지금도 어쩌다 서울 혜화동 로터리를 지나게 되면 내게 아름다운 추억을 심어 준 혜화동성당을 정다운 눈길로 바라보곤 합니다. 거의 40년이 지난 지금도 그때의 기억은 생생하고, 아홉살 먹은 어린 소녀가 처음으로 예수님을 받아 모시고 행복한 미래를 꿈꾸었던 12월의 그날, 유난히 날씨는 추웠지만 마음은 따뜻하게 느껴졌던 그 성탄절을 잊지 못합니다. 한 장의 빛 바랜 사진 속에서 활짝 웃고 있는 어린 모습의 나와 옆의 동무들이 문득 그리워지기도 합니다. 늘 신비하게 보였던 하얀 고깔의 수녀님과 그분의 하얀 미소, 우리가 입었던 하얀 옷과 제대 위의 하얀 초, 신자들이 쓴 하얀 미사보, 성당에서 어린이들에게 끓여 준 하얀 떡국 등등 모든 것이 다 하얗게 눈부신 기억으로 살아 있습니다. 그날 가장 큰 사랑의 선물이었던 예수님의 몸(밀떡) 또한 거룩하고 순결한 흰 기쁨으로 나를 압도하였습니다. 첫영성체 때의 기도는 무엇이나 들어주신다는 수녀님의 말씀에 난 구체적인 내용은 잊었으나 `앞으로 예수님을 닮은 가장 착하고 올곧은 삶을 살겠습니다`는 결심을 봉헌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수십 년이 지난 지금 수녀원에서 해마다 성탄을 지내면서 난 그토록 아름답고 순결했던 첫영성체 때의 첫 결심을 다시 기억하며 행복해지곤 합니다. `화이트 크리스마스`라는 노래를 듣거나 부를 때면 눈이 오지 않았어도 눈나라에서 있는 것처럼 하얗게 황홀했던 어린 시절의 크리스마스를 떠올리며 훗날 주님이 불러 주신 사랑과 믿음과 희망의 하얀 길, 좁은 길로 들어서길 참 잘했구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가는 길이 힘겹게 느껴질 때도 그분이 함께 계심을 믿기에 마음 든든한 나는 지금껏 많은 성탄선물을 받았지만 첫영성체의 선물만큼 아름답고 큰 선물은 다시 없었다고 생각합니다.
Board 삶 속 글 2022.10.04 風文 R 449
한국대표수필 - 김동리 외 9명 "김소운편" 김소운(1907~1981) 수필가, 시인. 일본 문학가. 호는 소운. 경남 부산 출생. 일본에서 중학 중퇴. 초기에는 시로 출발하여 관념시 계통의 시작품을 발표했으나 일본인들의 근거 없는 우월감과 한국 문화에 대한 인식 부족을 통감하고서 한국의 민요, 동요, 시 등을 일본에 소개하는 작업을 벌여 크게 주목받았다. 문학의 사회자로 문화 수출의 상인으로 자처했던 그는 후기에는 인생에의 통찰이 담긴 격조 높은 수필을 많이 발표하여 많은 감동을 불러일으켰다. 퇴색치 않는 사랑 / 왕후의 밥, 걸인의 찬 그 내외는 가난했다. 보통이면 사내가 직장으로 나가고 아내는 집을 지키기 마련이건마는 그 내외는 세상의 상식과는 반대로 아내가 직장으로, 교사이던 남편은 학교 일을 그만두고 집 안에서 시간을 보내는 실직자였다. 어린것은 아직 없었다. 젊은 아내의 직장은 그들이 깃들어 사는 단칸방에서 과히 멀지 않은 거리에 있었다. 어느 개인 회사에서 회계 사무를 맡아 보는 것, 그것이 그 젊은 아내의 직업이다. 어느 날 쌀이 떨어져서 아내는 아침밥을 굶은 채 직장으로 나갔다가 점심 시간을 틈타서 잠시 집으로 돌아왔다. 아침에 나갈 때 남편의 한 말이 있다. "어떻게라도 변통해서 점심을 지어 둘께 시장해도 그 때까지만 참으라우." 방 안에는 밥상이 나와 있고, 남편은 어디로인지 외출하고 없었다. 신문지로 덮은 밥상에는 남편이 지은 밥 한 그릇-반찬이라고는 간장 하나-그 밥상 위에 써 두고 간 쪽지가 얹혀 있다. '왕후의 밥, 걸인의 찬-이걸로 시장기만 속여 두시오.' 쌀은 간신히 샀는데도, 남편이 마련한 돈으로는 반찬에까지 손이 닿지 않았던 모양이다. 그 밥을 간장 하나로 먹으면서 젊은 아내는 미상불 왕후가 부럽지 않도록 가슴이 뿌듯했다. 촌철이 사람의 폐부를 찌른다지마는, 표어도 격언도 아닌, 남편이 적어 두고 간 그 한 마디 말에 아내는 눈물이 나도록 행복했다. '가난'이란 결코 환영할 것이 못 된다. 안빈 낙도니 청빈이니 하는 빛좋은 문자들이 있기는 하나, 인간을 시궁창에 뒹굴게 하는 것도 가난이요, 가까운 일가 친척이며 친한 벗들 사이에 길을 막고 담을 쌓게 하는 것도 역시 가난이다. 그런데도, 때로는 이 가난이 만금으로 못 살 보석을 경품으로 갖다 주기도 한다니 신기한 조화라고 아니 할 수 없다. 내가 잘 아는 어느 부부 이야기가 생각난다. 이 역시 남편은 실직-실직이라는 말은 가졌던 직업을 잃었다는 뜻이니 이 경우에는 해당되지 않는다. 그 남편에게는 본래 직업이 없었다. 남들은 그를 시인이라고 부르지만, 이 나라에서 싯줄이나 쓴다고 해서 그걸로 호구책을 삼는다거나, 가족을 먹여 살릴 의젓한 직업으로 치부할 수는 없다. 사내는 세수를 마치고 방으로 들어와 아침밥을 기다리고 있었다. 마누라가 쟁반에는 삶은 고구마 몇 개를 얹어 들고 들어왔다. "햇고구마가 하도 맛이 좋다고 아랫집에서 그러길래 우리도 몇 개 사 왔답니다. 하나 맛이나 보세요." 사내는 본래 고구마를 좋아하지 않는데다 식전에 그런 것을 먹는 게 꺼림해서 잠시 주저하다가 마누라 대접으로 그 중 제일 작은 한 개를 집어서 입에다 넣었다. 그리고는 쟁반 위에 같이 놓인 홍차를 마셨다. "하나면 정이 안 간대요, 한 개만 더 집으세요." 별로 달갑지는 않으나 이번에도 마누라의 강권에 못 이겨 마지못해 두개 째를 손에 집었다. 밖에서 만날 사람이 있어 약속한 시간이 가까워졌다. "인제 나가 봐야겠소. 밥상을 들여요." 사내가 재촉하자 아내는 태연 자약, "지금 잡숫잖았어요, 그게 오늘 우리 아침밥이랍니다." 그러면서 시치미를 떼었다. "뭐요? 그게 아침이라?" 사내는 그제야 쌀이 없어진 것을 알고, 무안과 미안을 뒤섞어서 마누라에게 한 마디 쏘았다. "쌀이 없어졌으면 없어졌다고 왜 좀 미리 말을 못하는 거요, 사내 봉변을 시켜도 분수가 있지!" 그 말에 대답이, "제가 XX장관 조카랍니다. 어디를 가면 쌀 한 가마가 없을라구요. 하지만 허구한 인생에 이런 때도 있어야 늙어서 얘깃거리가 되지요." 웃음을 지으면서 하는 아내의 그 한 마디 말에 내 친구는 대꾸를 잃고 묵연했다. 때마침 그의 처삼촌이 장관이었고, 그 장관에게 다리를 놓아 달라는 청도 몇 차례 없이 들어와서 성화를 겪던 터이다. 그 날로 쌀 한 가마를 주변해서 짐꾼에게 지위 들여가기는 했으나 내 친구는 그런 마누라를 가진 것이 무척 흐뭇했던지, 팔불출이는 자인한다면서 걸핏하면 이 이야기를 남의 앞에서 되씹곤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