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대표수필 - 김동리 외 9명
"피천득편"
피천득(1910~2007)
수필가. 시인. 영문 학자. 서울 출생. 중국 호강 대학 영문과 졸업. 하버드 대학 수학. 피천득은 한국의 서정적 수필의 대표자이다. 생활 속에서 명상의 표적을 찾아 내어 섬세하면서도 다감한 문장으로 그려 낸 그의 수필은 '수필의 전형'으로 지목되고 있다.
유순이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전화는 끊겼다. 암만 되불러도 나오지를 않으니 전신줄이 끊어졌나 보다. 나는 어두운 강가로 나왔다. 멀리서 대포 소리가 들려 온다. 이따금 기관총의 이를 가는 소리도 들린다. 잡북 쪽을 바라다보니 볼케이노 터지는 남양의 하늘보다 더 붉다. 그리고 쉬일새없이 번개 같은 불이 퍼졌다 스러진다. 캠퍼스를 돌아다니다가 마음을 진정시키려고 방으로 들어갔다. 겨울 방학이므로 학생들은 다 집에 돌아가고, 나하고 남양에서 온 사람 몇만이 기숙사에 남아 있었다. 이불을 쓰고 드러누웠다. 여전히 대포 소리, 폭탄 떨어지는 소리가 들려 온다. 여러 번 몸을 뒤채도 잠은 들어지지 않았다. 아까 전화로 들은 그의 음성이 나를 괴롭게 하기 시작했다. 그가 지금 총에 맞아서 쓰러지는 것 같기도 하고 불붙은 병원에서 어쩔 줄 몰라 애통하는 양이 눈앞에 보이는 듯하였다. 나는 서가회라는 곳에 있는 요양원에 입원을 하였다. 그리 심한 병은 아니었으나 기숙사에는 간호해 줄 사람이 없어서 입원을 하였던 것이다. 요양원이 있는 곳은 한적한 시외였다. 주위에는 과수원들이 있었고 멀리 성당이 보였다. 병실이 많지 않은 아담한 이 요양원은 병원이라기보다는 별장이나 작은 호텔 같았다. 아침에 눈을 뜨면 흑단 화장대 거울에 정원의 고목들이 비치는 것이었다. 간호부들이 아침 찬미 소리가 들리지 않았던들 얼마나 고적하였었을까.
내가 입원한 그 이튿날 아침 노크 소리와 함께 깨끗하게 생긴 간호부가 들어왔다. '안녕히 주무셨어요?'하고 그는 한국말로 인사를 한다. 그 때의 나의 놀람과 기쁨은 지금 뭐라 형용할 수가 없다. 그 때 그가 가지고 들어온 오렌지 주스와 삼각형으로 자른 얇은 토스트를 맛있게 먹은 것이 가끔 생각난다. 마멀레이드도 맛이 있었다. 나는 그 후 어느 레스토랑에서도 그런 오렌지 주스와 토스트를 먹어 본 일이 없다. 그는 틈만 있으면 내 방을 찾아왔다. 황해도 자기 고향 이야기도 하고 선물로 받았다는 예쁜 성경도 빌려 주었다. 자기는 '누가 복음'을 좋아한다고 하였다. 타고르의 "기탄자리"를 나에게 읽어 준 때도 있었다.
밖을 내다보니 동이 터 갔다. 교문을 나서니 찬바람이 뺨을 에인다. 시외요 때가 새벽이므로 한적도 하겠지마는, 길에 공장 가는 노동자 하나 보이지 아니한다. 싸움을 중지하였는지 대포 소리도 아니 들리고 사면이 모두 고요하였다. 나의 마음도 "서부 전선 이상 없다"를 연상할 만치 고요하다. 별안간 어디서인지 프로펠러 소리가 요란히 들린다. 쳐다보니 비행기들이 열을 지어서 잡북 방면을 향하고 날아간다. 용기를 내느라고 두 주먹을 쥐고 걸레 같은 보따리 진 사람, 누더기 같은 이불 멘 사람, 한 아이는 앞세우고 한 아이는 안고 또 한 아이는 끌고 가는 여인--피난민들이다. 그때 본 산 아이의 둔한 눈들이, 여인네의 해쓱한 눈들이 지금도 내 눈앞에 어른거린다. 길에는 차차로 사람이 많아졌다. 사람이 황포강 물결 같이 흐른다. 푸른 옷 입은 사람들의 푸른 물결! 나는 그들 속에 섞여서 가는 동안에 공포를 느끼기 시작하였다. 만약 불행히 그 중에서 한 사람이라도 나를 잘못 일본 사람으로 본다면 나는 그 자리에서 맞아 죽을 것이다. 이런 생각을 하고 나도 모르게 몸서리쳤다.
아무거라도 얼른 잡아 타려고 하였으나 전차도 버스도 불통이었다. 가든 브리지에 다다르니 다릿목에 철망으로 만든 방색이 두 겹으로 막혀 있고, 그 뒤에는 흙을 담은 전대를 쌓아 놓았다. 그리고 공공 조계 미국 군인들이 총창을 낀 총대를 겨누고 있다. 기관총도 갖다 놓았다. 나는 어떻든 북사천로로 갈 작정이므로 빠둔조를 건너지 않고 사천로교로 갔다. 그 다리에도 역시 견고한 방색을 시설하여 놓았다. 북사천로를 내려다보니 그 곳이야말로 수라장이다. 가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고 몰려오는 사람들로만 가득 찬 그 길을 내려다보며 나는 한참이나 우두커니 섰었다. 밀물같이 밀려오는 그 군중과 정면 충돌을 하면서 목적지까지 갈 수는 도저히 없을 것 같았다. 다시 마음을 단단히 하고 걷기 시작하였다. 벌써 숨이 막힐 지경이요 정신이 아뜩아뜩하여진다. 빼- 소리가 났다. 발을 주춤하니 바로 내 앞으로 오는 노동자 하나가 비명을 지르며 엎어진다. 이어서 총 소리가 났다. 나는 얼떨결에 사람들의 줄기를 옆으로 뚫고 가로터진 샛길로 빠져나왔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그 때 상점 속에 숨어 있던 편의대 하나가 나를 일본인으로 보고 쏜 것이 빗나가서 그 노동자를 죽였는지 모른다. 골목으로 뛰어들어온 나는 뒤도 아니 돌아보고 달아났다. 육증한 바퀴 소리가 들려 온다. 사람들의 눈은 모두 그리로 쏠렸다. 탱크 두 대가 시멘트 바닥 위로 궁굴어 왔다. 잡북 전선으로 가는 것이다.
'비행기다!' 사람들은 일제히 담모퉁이로 가서 달라붙었다. 궁굴어가던 철갑차도 땅에 붙어 버렸다. 소란하던 거리가 고요하여졌다. 비행기는 날아오지 않았다. 마치 살얼음 위를 걷는 사람 모양으로 마음은 급하고 걸음은 아니 걸렸다. 간신히 소방서 앞을 지나서 인적 그친 거리를 걸어서 북사천로로 돌아 나가려 할 때, 일본 병정 하나가 총대를 내밀며 달려든다. 나는 일본말은 알아도 입술만 떨리고 말은 나오지 않았다. 적막한 아스팔트 위에는 불규칙하게 밟는 나의 발자국 소리만 울리었다. 부상당한 병정들을 실은 적십자 자동차 하나가 지나간다. 아마 그가 있는 병원으로 가나 보다 하고 바라보았다. 빨간 불길이 솟아오른다. 그리고 그 위로 안개 같은 연기가 퍼져 오른다. 불자동차 소리도 났다. 북사천로에 불이 붙은 것이다. 불덩이 튀는 소리와 아우성 소리도 간간이 들린다. 일본 육전대 방색 가까이 왔을 때 패--ㅇ 하고 탄자 소리가 나더니 재각재각 다시 총 재는 소리가 난다. 이어서 기관총을 내두른다. 나는 그 자리에 섰을 수밖에 없게 되었다. 한 5분이 지났을까, 총소리는 그쳤다. 나는 그가 지금 근무하고 있는 시내 클리닉에 도착하였다. 그는 내 손을 잡으며,
"위험한 곳에를 어떻게 오셨어요."
그는 나를 자기 일하는 방으로 안내하였다. 총 소리 대포 소리가 연달아 들려 온다.
"고맙습니다. 그러나 저는 책임으로나 인정으로나 환자들을 내버리고 갈 수는 없습니다."
나는 그의 맑은 눈을 바라다보았다. 상해 사변 때문에 귀국한 지 얼마 후였다. 춘원이 "흙"의 여주인공 이름을 얼른 작정하시지 못하는 것을 보고 있다가 나는 문득 그를 생각하고 '유순'이라고 지어 드렸다. 지금 살아 있는지 가끔 그를 생각할 때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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