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권으로 읽는 조선인물실록 - 김형광
조선 성리학의 대부 이황
이황은 학자이자 교육가이며 정치가였던 인물이다. 또한 그는 이언적의 주리설을 계승하여 주자의 철학을 이 땅에서 독창적으로 발전시킨 선도자이기도 하다. 그가 있기 전까지의 성리학은 조선의 통치 이념으로 채용되어 면면히 이어져 오기는 하였지만 주자의 이론을 맹목적으로 추종하는 것에 불과하였다. 그러나 퇴계에 이르러 학문의 기본 정신에 충실하면서도 독보적인 이론 체계를 형성하고 발전할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되었다. 그로부터 비롯된 분석적 학문 이론이 계속적으로 분화 발전하였기 때문에 조선의 철학 사상은 퇴계의 영향을 무시하고는 생각할 수 없다. 그에 의하여 이와 기의 상호관계가 설명되었으며, 단순히 당위적 가치로만 인식되어 왔던 성리학의 기본 이념에 대한 심도 있는 고찰이 시작되었기 때문에 그는 넓게 보아 동양 철학사적 측면에서, 좁게는 조선 성리학 발전사에서 일대 전환점을 이룬 사람이다. 특히 성리학적 철학을 인성론에 적용하여 독창적인 이론을 전개하였으며 이로부터 조선 정신 철학의 내재적 가치가 증폭되었다.
그의 철학적 사색에서 창조된 인간형은 당시 사회적 현실에 비추어 보면 평이하고 일반적인 유형이었지만 시대가 요구하는 바람직한 모습이었다. 통치 질서에 부합되는 인간 모형을 도출해 냈기 때문에 보수적인 당시 체제를 유지하는 데 사상적으로 일조하였다고 볼 수 있는 그는, 서경덕이 상정한 창조적 인간 모형보다는 본질적 가치에 충실한 이념적 인간형을 더 선호하였다. 그는 절대선과 최고의 가치를 끊임없이 추구하면서 그 자신 그러한 삶의 모습에 충실하려고 노력한 실천 철학자였으며, 그 스스로 독행을 올바른 삶의 방향으로 삼고 70평생을 지행합일적 태도로 일관하였다. 그는 "글을 배우는 것은 마음을 바르게 하기 위한 것"이라고 하면서 학문하는 도리를 인간 본성의 회복에 두었으며, 그것을 실제 생활에서 실천하는 것을 중요시하였다. 아무튼 그는 주자 성리학의 뜻을 충실히 따르는 보수적 원칙론자이면서도 인간성 고찰이라는 독창성을 발휘하여 도덕적 실천 철학을 구축하여서 그 후 면면이 이어진 영남학파의 비조가 되었다. 일본에서까지 학문의 스승으로 추앙받아 그에 대한 연구가 지속되었을 정도로 대유학자이면서도 평생 동안 자신을 잘 드러내지 않고 타인의 견해 속에서 진리를 구하고 수용하려는 자세를 가졌던 대기만성형 학자의 전형이다.
온유한 성품을 타고난 사람
퇴계 이황은 조선 10대 왕인 연산군 7년(1501년) 경북 예안군(지금의 안동군)에서 아버지 진사 이식과 어머니 박씨 사이에서 7남 1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어렸을 때 이름은 서홍이었고 자는 경호요, 호는 퇴계이며 본관은 진성이다. 그는 조선 성리학의 교량적 역할을 한 인물로서 조광조보다는 19살, 서경덕보다는 2살 어렸지만 기대승에 비해서는 26살, 이율곡에게는 35살 연상이었다. 그의 아버지는 그가 태어난 지 7개월 만에 40살의 젊은 나이로 사망하여 퇴계는 당시 32살이었던 홀어머니 밑에서 자라났다. 당시는 연산군의 폭정으로 세상이 혼란했던 시절이었던 만큼 여자 혼자의 몸으로 어린 자식들을 데리고 살아가야 했던 그의 어머니의 고생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그러나 그녀는 자식들에게 항상 이렇게 말하면서 온갖 정성을 다하면서도 엄하게 가르쳤다.
"세상 사람들은 과부의 자식들은 배운 것이 없다고 비난하는 법이니 너희들은 남들보다 몇 배 더 노력하여 공부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러한 비난을 면할 수 없다."
이러한 홀어머니의 훈도를 따라 퇴계의 형제들은 모두 열심히 학업에 정진하여 나름대로 성공할 수 있었다.
퇴계는 어려서부터 공손하고 온유하였으며 항상 스스로 옷차림을 단정히 하여 거칠거나 게으른 기색이 없었던 조숙한 아이였다. 타고난 천성부터가 너무나 깨끗하고 착하기만 한 것이 도무지 어지러운 세상에 어울리지 못할 것처럼 보여서 그의 어머니는 가끔 그에게 말하기를 "나중에 관직에 나가더라도 너는 조그만 지방의 수령이라면 몰라도 중앙의 큰 직책은 맡지 말아라. 세상 사람들이 너와 같은 성품을 용납하지 못할 것이 걱정된다."고 말할 정도였다. 따라서 그는 소학을 읽기 전부터 이미 그 몸가짐이 소학을 배워 그 가르침을 실천하는 것처럼 보였다 한다.
어려서부터 도연명의 전원적인 시 세계를 좋아하였는데 그 까닭은 퇴계 자신의 심상이 원래 조용하고도 깨끗하여서 목가적인 전원시에 자연스럽게 이끌렸던 것이다. 그가 온화 겸양한 성격의 소유자인 것은 분명하였지만 감수성이 예민하고 기가 약한 면도 있었던 것 같다. 다음은 8살 때의 일화이다.
손위 형이 손을 베어 피를 흘리자 그는 형을 껴안고 정작 다친 형보다 더 아픈 것처럼 울었다고 한다. 이 모습을 본 어머니가 "다친 형은 울지 않는데 네가 왜 우느냐?" 하고 물었다. 퇴계는 계속 눈물을 흘리며 "형이 울지는 않고 있지만 저렇게 피가 나는데 얼마나 아프겠습니까?"하고 대답했다. 이렇듯 퇴계의 어질고 착하면서도 유약하고 소심한 성격은 태생적이었다. 퇴계는 12살 때부터 숙부인 송재 우에게서 학문을 배웠다. 송재는 그때 관직에 있던 사람으로 바쁜 와중에도 어린 퇴계 형제들에게 성심을 다하여 가르침을 주었던 훌륭하고도 엄격한 스승이었다. 송재는 영민한 조카들을 친아들처럼 아끼며 훈육했는데 특히 어린 퇴계를 가장 사랑했다. 이런 숙부 밑에서 논어를 배우던 퇴계가 어느 날 문득 이라는 글자의 의미를 물었다. 숙부가 곧바로 답을 주지 않자 혼자 한참을 궁리하더니 "일이 옳은 것이 이입니까?" 하고 되물었다. 숙부는 스스로 깨우친 어린 조카의 이해력에 감탄해 마지않았다. 어려서부터 깊이 사색하고 스스로 깨우치는 천재성을 보였던 퇴계는 선친이 물려준 장서를 독파하면서 계속 학문에 정진하였다.
사임과 복직이 반복된 관직 생활
퇴계는 19살 때 성리대전을 읽고 성리학의 진수를 접한 후 유학을 제대로 공부하고 우주와 인생의 문제를 깨닫기 위해서는 주역의 연구가 필수적이라고 생각하여 20살 때는 주역을 공부하느라 거의 침식을 잃을 정도였다고 한다. 이 시기에 지나친 학문 탐구로 건강을 해쳐서 평생토록 소화 기능이 좋지 않아 고생을 하였다. 21살 때에는 문관 출신인 허찬의 외동딸과 결혼한 후 23살에 한성으로 유학하여 성균관에서 공부했다. 당시는 기묘사화라는 큰 변을 당한 후라서 젊은 유생들도 허탈감에 젖어 진지하게 공부하려는 분위기가 없었다. 그는 이 시절 진서산이 저술하고 황돈이 주를 붙인 심경부주라는 책을 탐독하였는데, 그 내용은 옛 성현들의 심오한 어록을 기록한 것으로 이른바 심학의 대표적 서적이었다. 그러나 이 책은 내용이 상당히 난해하여 해독하기조차 어려웠지만 퇴계는 깊은 사색을 통해 오랫동안 음미하면서 독서하여 그 뜻을 스스로 깨우쳤다. 이 심경은 그 후 깊은 사색을 강조하는 퇴계 철학의 근원적 바탕이 되었다. 퇴계는 말년에도 심경을 읽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하였고 마음공부를 시작하는 후배들에게 철학적 사색의 길잡이로서 항상 심경을 권했다.
또 66살 때는 심경후론을 지음으로써 평생에 걸친 심경의 연구를 마무리하기도 했다. 따라서 퇴계의 사상을 이해하려면 심경에 대한 이해가 선행되어야 한다. 이렇게 학문에 정진하던 퇴계였지만 과거에는 인연이 없었던지 24살 때에는 연속하여 세번이나 불합격하였다가, 27살인 중종22년(1527년)에야 경상도 향해진사시에 수석 합격하고 이듬해 봄에는 한성 진사회시에도 합격하였으나 방이 나붙기도 전에 귀향했다. 과거에 처음 합격하던 해에 첫 부인과 사별한 후 30살에 권질의 딸과 재혼했지만 그는 그때까지도 백면서생으로 학문에만 몰두하고 있었다. 과거시험에 나가보라는 주위의 권고가 계속되자 32살에 다시 과거에 응시하여 문과초시에 합격하였고, 이듬해에는 또다시 경상도의 향시에 장원 급제한 후에 34살 되던 해 3월에야 문과에 최종 합격하여 승문원 부정자로 관직 생활을 시작하였다. 그 이듬해에는 왜구 포로 호송관으로 차출되어 임무를 수행하면서 왜인들의 요구나 불평을 알게 되었고 이때의 경험으로 그는 일본의 실태나 성향 등을 깊이 파악하여 일본에 대한 대응책을 남다르게 강구하였다.
36살 때는 호조좌랑을 지내다가 그 이듬해 어머니 박씨가 세상을 뜨자 사직하고 귀향하였다. 모친의3년상을 마친 후 39살에 홍문관 지제교로 다시 복직하여 여러 관직을 역임하다가 42살에는 어사로서 충청도와 강원도를 순찰하기도 하였다. 그 해에 사헌부 장령을 거쳐 이듬해에는 성균관 대사성에 임명되었지만 건강상 이유로 사직하고 다시 귀향하였다. 그러나 반년도 지나지 않아 출사의 명을 받아 관직에 다시 돌아왔었고, 이 사이에 중종과 인종이 잇달아 죽어서 나이 어린 명종이 등극하게 되었다. 명종 원년에는 퇴계에게 가정적으로 불행한 일이 발생하였는데, 그 하나는 재혼하였던 두 번째 부인 권씨가 사망한 것이다. 퇴계는 처복이 없었던 셈이다. 다만, 첫번째 부인 허씨는 부잣집 외동딸로 꽤 많은 재산을 남겨 주어 그에게 경제적 뒷받침이 되었다. 또 그 해의 을사사화에서 바로 손위 형인 해가 희생되기도 하여 퇴계로서는 참혹스러운 한 해였다.
이렇게 고통스러운 일들을 겪자 그렇지 않아도 벼슬길이 탐탁지 않았던 그는 그 해 11월에 다시 사직하고 고향에 칩거해 버렸다. 이때 토계라는 고향 냇가의 동쪽편 바위 옆에 조그만 집을 지어 양진암이라고 이름을 정하고는 냇물의 이름도 퇴계로 고치고 아예 자기의 호로 삼았다. 퇴계는 물러가는 시냇물이라는 뜻인데, 그 자신은 학문은 구할수록 오히려 멀다는 뜻으로 지었다고 한다. 사직하기 얼마 전 대마도주로부터 화평조약을 맺고 싶다는 의사 표시가 있었는데, 당시 조정은 일본의 화의 요청을 거절해 버렸지만 퇴계는 유일하게 온건책을 건의하였다. 이때 퇴계의 건의는 그의 일본에 대한 인식을 잘 알 수 있는 사례이기 때문에 살펴볼 필요가 있다.
" 북방에서 여진족의 침입이 염려되는 때에 남쪽의 일본을 자극하다가는 남북 양쪽에서 외침을 당하는 국가의 불행이 예상되기 때문에 왜인들을 함부로 도전하지 못하도록 단속은 하되 한편으로는 달래서 남쪽에 해한 걱정을 줄일 필요가 있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었다. 이같은 그의 판단은 예전에 호송관 임무를 하면서 일본의 움직임을 예의주시한 결과 얻게 된 것이었는데 그 후의 사태 진전 상황으로 보면 탁월한 선견지명이었다. 그러나 당시 조정은 권력 암투에만 몰두하여 있지도 않은 국경 불안을 떠들어 공연히 민심만 어지럽힌다라고 오히려 그를 무고하기까지 하였다. 어쨌든 그는 사직 후 1년에 동안 양진암에서 또다시 학문 연구에 정진하였다. 48살인 명종3년(1548년)에 다시 조정의 부름을 받고 이번에는 지방관으로 나가서 단양 군수와 풍기 군수를 역임하다가 이듬해 12월에 병을 얻어 다시 사직하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단양 군수 시절에는 둘째 아들이 세상을 떠나서 그에게 슬픔을 더해 주었지만 기생 두향과의 로맨스도 있었고 풍기 군수 시절에는 조선 역사상 중요한 의미를 가지는 교육사업의 뿌리를 내리는 일을 하게 된다.
전임자 주세붕이 설립한 백운동 서원에 대한 나라의 지원을 요청하여 전지와 서적을 지급 받아서 지방 자체의 교육기관으로 육성시켰던 것이다. 이것이 전례가 되어 각 지방에 서원이 만들어졌으니 그는 조선 교육 행정에 큰 공을 세운 셈이며 미래의 발전을 미리 준비하는 선구자적 역할을 수행한 것이다. 비록 조선말에 가서는 폐단이 생겼지만 서원이 제 기능을 충실히 하던 시기에는 사대부 여론의 중심이자 지방 교육의 중추 역할을 하였다. 조선 후반기에는 서원의 교육 기능이 강화되어 중앙보다 지방의 학문 수준이 더욱 향상되는 문화적 역전 현상이 빚어지기도 하였다.
본격적인 저술 활동
고향에 돌아온 퇴계는 한서암이라는 공부방을 다시 짓고 독서와 사색의 생활에 들어갔다. 이 기간 동안 그는 주자전서 연구에 몰두했는데 말년의 철학적 사색은 이 책을 근간으로 하였으며, 그의 심오한 사상적 깊이도 여기서 더욱 힘을 얻게 되었다. 이러한 연구를 바탕으로 53살 때 천명도설후서를 썼고, 56살에는 주자서 절요를 편저하였으며, 57살에는 주자가 지은 역학계몽에 대한 해설서격인 계몽전의를 저술하고, 59살에는 송계원명이학통록이라는 주자 연구의 결정판을 세상에 내놓았다. 아무튼 이때 2년여 한적한 연구 생활에 몰두하던 그가 다시 조정의 부름을 받은 것은 명종 7년(1552년)으로 그의 나이 52살 때였다. 그는 사헌부 집의로 복직한 후 여러 관직을 역임하다가 4년 후인 명종 11년(1556년)에 건강상의 이유로 또다시 사직하였다. 그 후 한동안 고향에 칩거하여 앞서 언급한 작품들을 저술하며 학문 연구에 정진하다가 사직한 지 2년만에 다시 성균관 대사성으로 임명되어 관직에 다시 출사하였다.
이렇게 사임과 복귀를 반복했던 것은 그의 건강상의 이유도 있었지만 퇴계를 필요로 하는 조정의 요청에 대해 그의 기질상 강력한 거절의 태도를 보이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대사성에 임명된 지 2개월 후 공조참판이 되었으나 관직에 큰뜻이 없던 그는 또다시 사임하고 말았다. 이제 59살이 된 퇴계는 본래 체질이 약하고 병도 많았지만 관직을 떠나 있을 때에도 편히 쉬기보다는 계속 공부에만 매달려 있었기 때문에 어지러움증을 많이 느꼈고 특히 안질에 시달렸다. 이 시기에 그는 몸이 불편한데도 왕성한 저작 활동에 임해서 도산기, 정암선생행장, 심무체용변, 심경후론 등을 저술하였다. 그 후 7년여 동안 관직에 나가지 않았지만 왕의 부름이 여러 차례 계속되자 어쩔 수 없이 명종 21년(1566년)에 66살의 나이로 공조판서를 재수받아 다시 출사했다. 명종은 퇴계가 관직을 계속 사양하자, "어진 이를 부르나 오지 않음을 탄식한다"는 글제로 유생들에게 글을 짓게 하기도 하고 은밀히 화공을 퇴계 은거지로 보내어 그곳의 풍경을 그려오게 해서 당시의 명필인 송인에게 퇴계가 지은 도산기와 도산 잡영을 그 위에 쓰게 하고는 병풍을 만들어 방에 두고 쳐다보면서 그를 그리워했다고 한다.
재출사한 그 이듬해 예조판서를 거쳐 선조 원년(1568년)에는 의정부 우찬성을 역임한 후에, 그 다음해 예문관 대제학을 마지막으로 완전히 관직 생활을 청산하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사임하기 전에 그는 어린 왕의 치도에 도움을 주기 위해서 무진육조소와 성학십도를 지어 바치기도 했다. 일반적으로 퇴계가 학문에만 몰두하여 은둔 생활을 영위한 것으로 알고 있지만, 그는 여러 차례 사직과 복귀를 반복하면서도 40년 가까이 관직에 있으면서 네 임금을 섬겼다. 마지막 퇴임시에는 율곡까지도 적극 만류하였으나 병도 깊고 벼슬보다는 자연과 학문이 더 그리웠던 퇴계는 결국 고향으로 돌아갔다. 당시 조정에는 어린 새 왕이 등극한 처지라서 퇴계 같은 중후한 대신이 남아 있어 주기를 원하는 공론이 높았지만 그는 그때 물러날 시기임을 알았던 것이다.
나중에는 관직에 나오지 않더라도 한성에 머물러 자문역이라도 해줄 것을 요청했으나 이 요청마저 모두 사양하고 낙향했다. 그리고 다음해 11월에 종가 제사에 참석한 후 감기에 걸려서 내내 고생하다가 12월 8일 오후에 일어나 앉은 자세로 홀연히 숨을 거두니, 그의 나이 70살의 겨울이었다. 임종하기 나흘 전에는 자신이 죽은 후에 묘지 앞에 세울 비문의 내용을 손수 지어서 남기기도 하였고, 죽던 날 아침에 마지막 남긴 말은 서재에 있는 매화나무에 물을 주라는 말뿐이었다 한다.
겸양하며 원칙에 충실한 성품
퇴계의 성품은 앞서 언급한 대로 온유, 겸양하고 마음이 약한 일면이 있었다. 사람을 만날 때에는 아무리 젊은이라고 하여도 너라고 부르는 법이 없이 경의를 다하였고, 첫 인사는 반드시 부형의 안부를 묻는 것이었다. 제자가 대단치 않은 질문을 해도 찬찬히 생각하여 성의껏 답변하였고 다른 사람의 말을 찬성할 수 없을 때에도 틀렸다고 공박하지 않고 서서히 자신의 의견을 말하면서 동의를 구하는 태도를 견지했다. 이렇듯 퇴계는 평생을 겸허한 자세로 일관하면서 긍지가 지나침이 없도록 항상 스스로를 경계하며 살았다. 또 막히지 않고 밝은 것을 좋아하는 성미라서 주거지 근처의수목도 항상 잘 다듬어 그늘이 져서 앞이 가려지지 않도록 하였다. 또, 그는 현유들의 공통된 생활 태도 그대로 검소한 자세로 살았는데 평상시에는 부들로 만든 자리에서 삼베옷을 입고 살았다 한다. 그가 거처하고 제자를 가르쳤던 완락재도 사방 모두 3미터도 안 되는 협소한 곳으로서 당시 영천 군수 허시가 그곳을 찾았다가 좁고 허름한 모습에 걱정 겸 탄식을 하기도 했다. 처가들이 모두 부유하여 부단히 경제적 도움을 주려고 했지만 받으려고 하지 않았고 대궐에 출입할 때도 헌을 사용하지 않고 말을 타고 다녔다. 김이정이라는 사람이 노새를 선물한 적이 있었는데 부모가 살아 계신 사람에게서 그런 것을 받을 수 없다고 거절하였으며, 사람을 사귐에 있어서 물질보다 마음으로 통하면 된다고 말했다고 한다.
한번은 장남 준이 지방 관리로 있으면서 나이 든 아버지의 생활에 불편함을 덜어 드리려고 일용품을 실어 보내자 이황은 정당치 못한 방법으로 얻은 물건이 아닌가 의심하여 못마땅하게 생각한다는 뜻의 서신을 보낸 적이 있었다. 그 편지의 내용에 다음과 같이 아들을 훈도하는 글이 있었다. "빈궁함은 선비의 예사로운 일이다. 그렇기 때문에 개의할 문제가 아니다." 또한 약삭빠른 처신을 경계하여 세상사 규범은 고지식할 정도로 철저하게 지키는 것을 당연한 도리로 알았다. 도산 서당 앞 낙천에 많이 살고 있는 은어를 보호하기 위해 관에서 고기 잡는 것을 금하자 아예 그 근처를 내왕조차 하지 않는 결벽함을 보였으나 반면에 관청에서 부역령이 있으면 누구보다 앞장서 나갔다. 또 일반적으로 퇴계는 적극적이거나 세찬 면이 부족한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국가 대사에 있어서 강한 신념을 피력한 일면도 있다. 42살 때 어사로 충청도를 순찰하고서는 탐관오리를 추상같이 숙청할 것을 건의하였으며, 말년인 68살 때에는 경연석상에서 왕에게 기묘사화의 치죄가 잘못되었음을 역설하여 이미 고인이 되었지만 조광조를 모함한 남곤, 심정 등의 관직을 박탈케 하는 강골을 보여주기도 하였다.
그리고 항상 왜구에 대해 근심하고 그 대책을 강조하여 장차 일본에 의해서 일어날 나라의 환난을 미리 예견하는 선견지명을 보였으며, 붕당의 해독에 대해서도 그것이 본격화되기 전에 이미 수차 진언을 했었다. 퇴계는 이미 노대가가 된 말년에도 자기의 잘못을 스스로 고치는 일에 인색하지 않았으며, 평생을 독서와 사색으로 일관하면서 서재의 벽에는 오로지 학구에만 일로 매진하려는 자신의 마음을 담은 다음과 같은 표어를 붙여놓고 자신을 채찍질하였다.
"번거로움을 구하는 데는 고요함만한 것이 없고 졸한 것을 구하는 데에는 부지런함만한 것이 없다."
이황의 철학과 사상
퇴계는 우주 현상을 형이상의 이와 형이하의 기의 상호 의존관계에서 설명하는 주자의 철학을 철저하게 계승하였다. 그에 의하면 이는 기를 움직이게 하는 근본 법칙이고, 기는 이의 법칙에 따라 구상화되는 존재라는 것이다. 모든 만물에 이와 기가 이원화되어 있으면서 양자 모두가 사물을 능동적으로 변화시킬 수 있다는 이기호발설이 그 사상적 핵심이다. 즉, 기도 발하고 이도 발할 수 있다는 것인데, 이 점에 있어서 발하는 것은 오로지 기뿐이고 이는 여기서 타는 것이라는 율곡의 생각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그는 이가 발하여 기가 따르는 것을 사단으로서 순수한 선이라고 보고 기가 발하여 이가 타는 것을 칠정이라고 하여 인간 존재를 선과 악이 혼재된 상태로 인식하여 인간의 마음의 작용도 두 가지로 구분하였다. 사단이라는 것은 본디 맹자의 실천 도덕의 근간인 인의예지에서 비롯된 측은지심, 수오지심, 사양지심, 시비지심을 말하여, 7정은 예기와 중용에 나오는 희, 노, 애, 구, 애, 오, 욕을 말한다. 즉 인성에 있어서 본연의 성인 사단과 기질의 성인 7정이 서로 다르므로 사단이 7정을 이끌어가면 도덕적 행동이 되지만 7정이 앞서면 부도덕하게 된다고 보았다. 따라서 사람은 사단이 마음의 중심이 되도록 수양해야 도덕 군자가 될 수 있다고 믿었다. 그에 따르면 인심의 수양을 통한 도심의 구현이 궁극적 목적이 되는 것이다.
그는 결국 인간의 존재와 본질의 문제를 행동적인 면에서보다 이념적인 견지에서 추구하였으며, 인간의 순수 이성은 절대선이므로 이에 따르는 것이 최고의 덕이라고 생각하였다. 그의 이러한 이선기후, 이귀기천 사상은 기대승과의 8년에 걸친 논쟁을 거치면서 사칠변론의 서막이 되었다. 기대승은 이와 기는 관념적으로 구분할 수 있지만 구체적인 마음의 작용에 들어가면 구분할 수 없다는 이기공발설을 주장한 바 있다. 퇴계 철학은 "진리는 평이, 명백한 일상에 있다"는 신념에 기초한다. 그래서 그가 해석한 인간 유형도 평범하고 말없는 다수가 동의할 수 있는 평이한 인간상이었다. 또 이치를 탐구하고 실천하는 데 철두철미하게 공경 하나로 일관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공경하는 마음만 있으면 모든 이치가 결국에는 밝게 드러날 것이고 심상도 안정되어 모든 일의 처리가 걸리는 것이 없다고 설파하였다. 즉, 경은 곧 심을 주재하는 정신으로 천리와 인간의 본연성이 경을 통하여 일심으로 합일할 수 있다는 것이 그의 중심 생각이었다. 이러한 그의 천인 합일 이론은 우주의 변화를 인간의 마음에 연관시켜 고찰하던 조선 철학 정신의 지주가 되었던 것이다. 결국 퇴계의 인생과 학문의 궁극적인 근거는 공경에 있었고, 그는 평생을 이 공경의 가치를 실천하며 살아갔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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