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 오백년의 선비정신 - 강효석
1. 창업의 문
과거에 낙방하고도 장래 대제학감으로 평가받은 김종직
김종직(1431-1492)의 본관은 선산이고, 자는 계온,호는 점필재이다. 16세에 과거에 응시하여 '백룡부'를지었지만 낙방하고 말았다. 그런데 괴애 김수온이 대제학으로서 낙방자의 시권(시험 답안)을 열람하다가 그 속에 점필재의 시권이 있으므로 읽어보니 매우 뛰어난 글이었다. "이 글은 참으로 뒷날 대제학을 맡을 솜씨이다"
김수온이 뛰어난 재능에도 불구하고 점필재가 낙방된 것을 아깝게 여겨 그 시권을 가지고 대궐에 들어가 임금에게 아뢰었더니, 임금이 기특하게 여겨 영산 훈도에 임명하도록 명하였다. 당시 한강가에 있는 제천정 기둥에 시가 씌어 있었다.
눈 속에 핀 찬 매화와 비 개인 뒤의 산 모습 보기는 쉬워도 그리기는 어려워 시인의 눈에 띄지 않을 줄 일찍 알았다면 차라리 연지를 가져다 모란을 그릴 것을
어느 날 괴애가 제천정에서 유람하다가 그 글을 보고서 감탄하였다.
"이 글은 참으로 지난날 백룡부를 지은 사람의 솜씨이다"
김수온이 그 글을 지은 사람을 추적해 보았더니 과연 점필재의 작품이었으므로 시를 알아보는 지력이 귀신과 같다고들 하였다.
김종직은 단종 원년(1453)에 진사시에 합격하고 세조 5년에 문과에 급제하였다. 일찍이 승문원에 들어갔는데 어세겸이 승문원의 선배로 있으면서 김종직의 시를 보고 크게 감탄하였다.
"나로 하여금 채찍을 잡고 그의 종이 되라 하여도 달갑게 받아들였을 것이다"
성종이 그를 소중히 여겼으므로 여러 벼슬을 거쳐 형조 판서에 이르렀으며 시호는 문간이라 내렸다. 그 뒤 연산군 무오사화 때에 그의 무덤을 파고 관을 꺼내어 시신의 목을 자르는 화를 당하였으며, 문집도 태워 버리는 수난을 겪기도 하였으나 중종반정이 있고 나서 억울함이 씻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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