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산이 북산을 보며 웃네 - 역사 속으로 찾아가는 죽음 기행 : 맹란자
제8장 화려항 명성, 처참한 최후
뇌가 온전치 못했던 전범자 - 무솔리니 / 히틀러
히틀러의 영웅인 무솔리니
이탈리아의 무솔리니와 독일의 히틀러는 파시즘적 독재자의 대표적 인물이며, 전범으로서의 콤비였다. 어려서부터 고집이 세고 영웅주의적 기질이 강한 무솔리니는 초등학교 때 아이들을 칼로 찔로 두 번이나 퇴학을 당했다. 고향에서 교사생활을 하다가 문란한 사생활이 들통나는 바람에 스위스로 건너간 뒤에는 10여 년간 방랑생활을 했다. 그곳에서 사회주의자로 변신하여 파업을 선동하는 등 사회활동을 벌이다가 추방당하자 프랑스로 도망가서 혁명적 쌍디카리스트들과 어울렸다. 그러나 프랑스 생활도 오래 가지 못했다. 마르세이유 파업을 선동했다는 죄로 추방되어 이탈리아로 다시 돌아와야만 했던 것이다. 그 뒤, 오스트리아에 입국해서 사회주의 신문의 편집인이 되었는데, 필화 사건을 세 차례나 일으켜 추방당해 또 다시 이탈리아로 되돌아왔다. 고향에 돌아온 그는 주간신문 계급투쟁 을 창간하는 한편, 이탈리아 사회당의 선전활동에 종사하여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고, 마침내 사회당 집행위원 및 당 기관지 아반티 의 편집장이 되었다. 아반티 란 전위라는 뜻이다. 그 동안 옛 제자 리체라와 동거하다가 이를 반대한 그녀의 부모를 권총으로 위협하는 해프닝을 벌이면서 결혼하여 딸 하나를 두었다. 그리고 몇 차례의 투옥을 당하기도 했다.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그는 처음에는 참전을 반대했다가 몇 달 뒤 열렬한 참전론자로 변신했으나, 사회당에서 제명되고 만다. 이탈리아가 연합군에 가맹하자 그는 또 의용병으로 참전했다가 부상을 당한다. 대전 후, 제대 군인과 반사회주의적 분자를 규합하여 1백 50명의 단원으로 파시스트 단체를 조직하고 1921년 국회의원 선거에서 40여 의석을 확보하여 의회 주도권을 잡는다. 서른아홉 살 때였다. 그해 10월, 50만 당원과 30만 의용병을 이끌고 로마진군 이라는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탈취한 뒤, 수상을 비롯하여 국무, 국방장관 등 요직을 독차지하면서 파시스트 독재 체제를 구축했다. 명령하는 자는 오직 나뿐이다 라고 할 만큼의 권력을 독점했다. 무솔리니의 로마 진군 이 있기까지 히틀러는 무솔리니를 몰랐다. 로마 진군 사건 후 그는 무솔리니에게 반했고 일방적인 친근감을 갖게 되었다. 히틀러의 <나의 투쟁>의 일부를 옮겨 본다.
요즈음 나는 알프스 남쪽의 위대한 인물에게 매료되어 있다. 민족에 대한 그의 뜨거운 열정은 내부의 적을 용인하지 않는 정도가 아니라, 모든 수단과 방법을 동원하여 그들을 절멸시키고자 하는 단호함으로 나타나고 있기 때문이다.
히틀러의 이러한 초기의 감동 은 그의 일생 내내 유지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히틀러는 뮌헨에 있었던 자신의 집무실에 무솔리니의 흉상을 모셔놓고 있었다. 나치스 돌격대의 갈색 셔츠는 검은 셔츠의 모방이었으며, 팔을 뻗어 치켜드는 나치스 인사법 역시 원산지는 이탈리아였다. 그 후 나치스의 국호에는 이런 것이 추가되었다. 독일의 무솔리니는 히틀러다! 그만큼 그가 닮고 싶어한 사람이 무솔리니였다. 1934년 6월, 히틀러는 독일정부 수반의 자격으로 이탈리아를 방문했다. 그러나 그를 맞은 무솔리니의 손길은 차가웠다. 중립국 오스트리아를 둘러싼 정치적 현안이 문제가 된 탓이기도 했으나 근본적인 것은 무솔리니에게 히틀러는 하잘 것 없는 존재로 여겨졌던 탓이다. 사실 독일은 패전국으로서 항복시에 약속한 전쟁 배상금조차 제때에 지불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리고 수상이라는 작자는 자신에게 홀딱 반한 오스트리아 변방 출신의 촌놈이라고 하니, 무솔리니가 히틀러를 융숭하게 대접할 이유는 당시로서는 없었다. 그러나 히틀러는 이탈리아가 고립되고 경제가 어려워지자 무솔리니에게 물자를 지원하기 시작했다. 히틀러는 그를 아주 요령 있게 다룰 줄 알았다. 히틀러는 무솔리니에게 독일의 잠재력을 은근히 과시했다. 그리고 은연중에 유럽을 둘이서 갈라 먹자고 꼬드겼다. 그 당시 무솔리니의 심경을 묘사한 좋은 자료가 있다. 무솔리니 밑에서 외무장관을 지냈던 그의 사위 치아노라는 사람이 일기에 적은 내용이다.
무솔리니에게 있어서 중요한 것은 히틀러가 전쟁을 하고 있다는 사실이 아니라, 히틀러가 혼자서 전쟁을 이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었다. 그것은 그가 도저히 용인 못할 상황이었다.
아마도 무솔리니의 머릿속에서 히틀러는 여전히 촌놈이었던 모양이다. 그러나 연이은 이탈리아군의 패전은 독일에게 부담만 안겨주는 꼴이 되었다. 북아프리카에서의 참패 이후 무솔리니는 가진게 아무것도 없는 상태가 되어 버렸다. 히틀러의 지원 없이는 단 하루도 버티지 못할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알려진대로 소련이 연합군측에 가담하면서 전쟁은 보다 가파르게 진행되었고, 스탈린그라드에서의 참패 이후 동맹군의 패배는 기정사실이 되었다. 두 독재자의 관계에도 많은 변화가 왔다. 둘이 만나면 히틀러 혼자 떠들었다. 자신의 약화된 위치를 잘 아는 무솔리니는 듣고만 있었다. 당시 목격자들의 기록에 따르면 때로 무솔리니는 눈물을 흘리기도 했던 모양이다. 그 무렵부터 무솔리니의 고질이었던 위장병이 도졌다. 그는 바짝 말라갔고 걷기조차 힘든 상태에까지 이르렀다. 1943년 7월 10일, 연합군은 이탈리아 남부의 시칠리아 섬에 상륙했다. 이탈리아군은 거의 저항하지 않았다. 1943년 7월 25일, 무솔리니는 실각했고, 왕을 알현한 직후 그는 체포되었다. 무솔리니는 저항하지 않았다. 그 후 어디론가 실려갔다. 그 소식을 들은 히틀러의 반응은 나는 무솔리니가 어디에 있는지 모른다. 그러나 위치가 확인되는 즉시 낙하산 부대를 보내야겠다. 히틀러는 그 약속을 지켰다. 1943년 9월 12일, 무솔리니는 크랜 사쏘에서 극적으로 구출되었다. 구출된 다음 그는 살로 공화국의 수반이 되었다. 무솔리니는 히틀러에게 치사했다. 그에게 힘을 주고 있는 것은 오직 히틀러 한 사람뿐이었다. 그러나 히틀러는 겉으로만 우정을 가장하고 속으로는 그를 신뢰하고 있지 않았다. 1945년 4월 초에 이르자 소련, 영국, 미국 등의 연합국 군대가 북부 이탈리아에 최후 공격을 전개했다. 무솔리니도 최후 반격을 개시했다. 그리고 그는 파시즘이 탄생한 밀라노로 향했다. 추종자들은 벌써 몇 명 남지 않았고 끝까지 함께 한 사람은 정부 클라라 페치타뿐이었다. 독일군 복장으로 위장하고 스위스로 망명하려다가 이들은 돈고에서 빨치산에 의해 체포되었다. 그들이 총살당한 것은 1945년 4월 28일, 오후였다. 무솔리니와 클라라 페치타의 시체는 그 다음 날 밀라노 광장 한복판에 거꾸러 매달려졌다. 이틀 뒤 히틀러도 자살해 버림으로써 마침내 유럽에서의 전쟁은 종결되었다. 1939년 당시 56세로 기력이 최고조에 오른 무솔리니는 노출광적인 히스테리의 특징을 거침없이 발휘하고 있었다. 카니발의 시저같이 베니스의 광장과 로마를 행진했다. 군복을 입고, 머리를 빡빡깎고, 턱을 내밀고 노기를 띤 눈을 굴리면서 도전적인 자세를 취한 채, 후세에 남기기 위해 사진을 찍게 했다. 스위스와 네덜란드의 의사들은 알고 있었다. 그의 병명은 신경매독이었다. 매독은 으뜸가는 환각성 뇌병이라고 한다. 무솔리니와 히틀러, 두 사람의 정신은 이미 온전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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