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산이 북산을 보며 웃네 - 역사 속으로 찾아가는 죽음 기행 : 맹란자
제7장 떠도는 자의 노래
신성한 영혼의 병 - 도스토예프스키
도스토예프스키 [Dostoyevsky, Fyodor Mikhaylovich] Dostoevsky라고도 씀. 1821. 11. 11(구력 10. 30) 러시아 모스크바~1881. 2. 9(구력 1. 28) 상트페테르부르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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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특수한 천재성은 본인의 지병과도 깊숙이 상관되어 있음을 언급한 것에 우리는 주목하지 않을 수가 없다. 파가니니의 비사회적 여러 이상성 및 완벽한 예술적 명기를 그가 앓았던 홍역 병원체에 의한 만기성 뇌염이라는 병명에 케르너박사는 그 근거를 두었지만 여기에 또 다른 학설이 우리의 주목을 끌고 있다. 도스토예프스키의 문학과 그를 괴롭혀 온 간질과의 상관관계이다. 입에 거품을 물고 온몸을 파르르 떨며 사지를 축 늘어뜨린 채 죽음의 상태를 수없이 반복하게 하였던 그 간질이 한계상황에서의 직관력을 배양해 주었다 는 것이다. 이 신성한 영혼의 병 간질이 발작되면서 겪게 되는 심묘경의 체험. 발작 직전의 육체적 심리적 한계상황으로부터 야기되는 직관력과 예언적 통찰력이 그의 작품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고 하는 바로 그 점이다. 그의 대표작의 작중 인물, <백치>에서의 뮈슈킨, <카라마조프의 형제들>을 스케치코프, <악령>의 키킬로프의 언행을 통해서 그러한 심묘경이 그대로 반영되었다고 보는 것이다. <백치>의 주인공, 뮈쉬킨공작은 날 때부터 간질을 앓고 있었으나 남다른 직관력과 투시력을 지닌 선량한 인물로 설정되어 있다. 작가 자신임은 두 말할 나위도 없다. 그는 자신의 간질 체험을 이렇게 밝힌 적도 있었다. 이승과의 단절, 그것은 저승의 시작인 듯하다. 발작 직전, 바로 그 찰나에 더할 나위 없는 황홀감이 간질병 환자를 어떻게 사로잡는지 여러분들은 모를거요. 마호메트가 짧은 기간 동안 천국에 있었다고 말했듯이 나도 그처럼 발작이 일어나는 동안 천국에 있었소. 이쪽에서 보면 한없이 무서운 고통이, 저쪽에서 보면 한없는 기쁨으로 넘치오. 그는 생의 한가운데서 무수한 죽음을 체험하며 그때마다 고통과 기쁨을, 죽음의 양면으로 보았던 것이다. 표도르 미하일로비치 도스토예프스키는 1821년 빈민구제원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귀족 출신의 군의관이었으며 7남매의 둘째였다. 그는 18세가 되던 해, 농노에 의해 살해되는 아버지를 지켜보아야 했다. 1849년 스스로 반정부운동(페트라셉스키 사건)에 가담하였다가 사형언도를 받고 그는 처형 직전까지 가는 특수한 경험을 체험하게 된다. 12월 22일 오전 9시, 영하 22도의 추위속에서 셔츠바람으로 그는 세묘노프광장에 마련된 처형대 앞에 다른 사형수들과 두 줄로 나란히 세워졌다. 그때의 체험이 <백치>에 이렇게 나타난다. 이제 이 세상에서 숨쉴 수 잇는 시간은 5분 뿐이다. 2분은 동지들과의 결별에, 다음 2분은 세상을 하직하는 순간의 자신의 일을 위해, 그리고 최후의 1분은 이 세상을 마지막으로 봐 두기 위해 주위를 돌아보는데 쓰기로 했다. 그러나 처형 직전(5분전)에 황제의 특사로 감형이 되어 극적으로 사형을 면하게 된다. 그해 12월 25일 시베리아의 오스크감옥에 와서 유형생활을 시작하게 된다. 그것은 생이 아니라 죽음이었다 고 형에게 써 보낼 정도의 고통스런 생활이었다.
그러나 그의 만년은 명성과 부로 안정이 되어갔다. 죽기 3개월 전만하여도 의기양양하게 다음 20년 동안 살아가며 써야 할 것들 에 대해 적어두었다고 그는 말했다. 간질의 빈도도 점차 줄어들고, 지병이던 폐병도 악화되지 않아 모처럼 의욕에 찬 만년이었다고 하는데. 그러나 누이동생들과 유산문제를 놓고 다투던 날 밤, 폐의 동맥이 터졌고 각혈이 시작되었다고 그의 딸이 <전기>에서 밝혀 놓았다. 도스토예프스키으 어머니도 폐병으로 쓰러졌고, 첫 번째 아내 마리아도 폐병으로 죽었다. 안나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 알로샤는 세살 때 간질발작으로 죽었다. 가계의 병력은 이러하였다. 그는 펜을 들어 카트코프에게 <카라마조프의 형제들>의 나머지 원고료를 요청하였다. 그리고 신부를 불러 고해를 하고 종부성사를 받았다. 다음날 아침 7시에 그는 젊은 아내인 안나를 불렀다. 오늘 자신이 죽을 것을 확실히 알 수 있다고 말하며, 안나에게 촛불과 성경을 가져오게 하였다. 시베리아 감옥에서부터 늘 갖고다니던 성경책이었다. 안나가 아무렇게나 편 곳은 마태복음 3장 15절이었다. 이제 허락하라. 우리가 이와 같이 하여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니라. 그는 잠시 동안 허락하라. 그 말은 내 죽음을 말하는 거야. 됐어. 그 이상 읽을 필요가 없다고 손으로 제지했다. 도스토예프스키는 아이들을 불러 작별인사를 하고 아들에게 손때 묻은 성경책을 건네주었다. 1881년 1월 31일 밤 8시 30분. 입에서 피를 흘리며 그는 숨을 거두고 말았다. 61세였다.
1996년 여름, 나는 알렉산드르네프스키 수도원에 있는 그의 묘지를 찾아 무덤앞에 서 보았다. 늠름한 그이 흉상이 반기는 듯 하였다. 장례날 약 3만명의 조객이 이곳에 와서 추도를 했으며 추도사가 낭송될 때마다 무덤 위에 꽃다발이 하나씩 놓여졌는데 그 숫자는 무려 74개나 되었다는 말을 상기하면서. 또 아침 10시에 시작한 영결식은 오후 4시가 되어서야 끝이 났다는 걸 기억하며 주위를 둘러 보았다. 몇사람의 여행객이 조용히 지나갈뿐 별로 관심을 두지 않는 것 같다. 그러나 러시아는 그를 최상으로 대접하였다. 그는 궁핍과 신병의 고통 속에서 <가난한 사람들> <죽움의 집의 기록> <학대받은 사람들> <도박자> <죄와 벌> 등을 써 냈다. 신성한 영혼의 병 을 몸에 지닌 사람들은 도스토예프스키 외에도 카이사르와 나폴레온, 마호메트, 반고흐, 몽테뉴 등이 더 있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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