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월’ ‘오뉴월’ 해마다 이맘때가 되면 라디오에서 자주 나오는 노래가 있다. 낮은 바리톤 목소리에 유려한 소프라노 화음이 곁들여진 ‘시월의 어느 멋진 날에’이다. 고운 선율뿐만 아니라 ‘널 만난 세상 더는 소원 없어, 바람은 죄가 될 테니까’라는 아름다운 가사 덕에 결혼식 축가로도 자주 불린다. 그런데 이 노래 제목은 왜 ‘십월’이 아니고 ‘시월’일까? ‘십 일, 십 원, 십 점’ 등 ‘열’을 나타내는 한자 ‘十’은 모두 ‘십’으로 읽히는데, ‘월’과 결합할 때만 유독 ‘시월’로 발음한다. ‘유월’도 마찬가지로 ‘육월’이라 하지 않고 ‘유월’이라고 한다. ‘십월, 육월’ 대신 ‘시월, 유월’로 소리를 내는 것은 ‘활음조’ 현상으로 설명할 수 있다. 활음조란 인접해 있는 두 소리를 연이어 발음하기 어려울 때 어떤 소리를 더하거나 빼기도 하고, 때로는 다른 소리로 바꾸어서 발음하기 쉽고 듣기 부드러운 소리가 되게 하는 것이다. ‘한글맞춤법’에서는 ‘시월, 유월’의 ‘시’나 ‘유’처럼 한자의 본래 음이 변해서 사람들 사이에 널리 통용되는 발음이 있다면 그 소리에 따라 적도록 하고 있다. 굳이 그 한자의 본래 발음을 살려 ‘십월’이나 ‘육월’로 적지 않는다. 사람들이 실제로 사용하는 말과 그 말을 적은 글이 서로 다르지 않게 하려는 ‘언문일치’ 원칙이 적용된 것이다. 활음조의 영향으로 본래의 음과 다르게 발음되는 예에는 ‘시월, 유월’ 말고도 ‘오뉴월, 초파일’ 등이 있다. 오월과 유월을 아울러 이를 때에는 ‘오륙월’이나 ‘오유월’이 아니라 ‘오뉴월’로 발음하고 표기해야 한다. ‘부처님 오신 날’도 ‘사월 초파일’이라고 하지 ‘초팔일’이라고 하지 않는다. 정희원 국립국어원 어문연구실장
Board 말글 2024.01.20 風文 R 3397
중원축록(中原逐鹿) 中:가운데 중. 原:근원/들/벌판 원. 逐:쫓을 축. 鹿:사슴 록. [준말] 축록(逐鹿). [동의어] 각축(角逐). [유사어] 중원장리(中原場裡), 중원석록(中原射鹿). [출전]《史記》〈淮陰侯列傳〉 중원[天下]의 사슴[帝位]을 쫓는다는 뜻. 곧 ① 제위(帝位)를 다툼. ② 정권을 다툼. ③ 어떤 지위를 얻기 위해 서로 경쟁함. 한(漢)나라 고조(高祖) 11년(B.C. 196), 조(趙)나라 재상이었던 진희가 대(代:산서성) 땅에서 반란을 일으키자 고조는 군사를 이끌고 토벌에 나섰다. 그 틈에 진희와 내통하고 있던 회음후(淮陰侯) 한신(韓信)이 도읍 장안(長安)에서 군사를 일으키려 했으나 사전에 누설되어 여후(呂后:고조의 황후)와 재상 소하(蕭何)에게 모살 당하고 말았다. 이윽고 난을 평정하고 돌아온 고조는 여후에게 물었다. “한신이 죽기 전에 무슨 말을 하지 않았소?” “괴통의 말을 듣지 않은 것이 분하다고 하더이다.” 괴통은 제(齊)나라의 언변가로서 고조 유방이 항우와 천하를 다투고 있을 때 제왕(齊王)이었던 한신에게 독립을 권했던 사람이다. 그 후 고조 앞에 끌려 나온 괴통은 조금도 겁내는 기색 없이 당당히 말했다. “그때 한신이 신의 말을 들었더라면 오늘날 폐하의 힘으로도 어쩌지 못했을 것이옵니다.” 고조는 크게 노했다. “저놈을 당장 삶아 죽여라!” 그러자 괴통은 이렇게 항변했다. “폐하, 신은 전혀 삶겨 죽을 만한 죄를 진 적이 없나이다. 진(秦)나라의 기강이 무너지고 천하가 어지러워지자 각지에 영웅 호걸들이 일어 났사옵고, 진나라가 사슴[鹿:帝位]을 잃음으로 해서 천하는 모두 이것을 쫓았던[逐] 것이오며, 그중 키 크고 발빠른 걸물(傑物:고조 유방을 가리킴)이 이것을 잡았던 것이옵니다. 그 옛날 대악당인 ‘도척의 개가 요(堯) 임금을 보고 짖었다’고 해서 요 임금이 악인이라 짖은 것은 아니옵니다. 개란 원래 주인이 아니면 짖는 법이온데 당시 신은 오직 한신만 알고 폐하를 몰랐기 때문에 짖었던 것이옵니다. 그런데 천하가 평정된 지금 난세에 폐하와 마찬가지로 천하를 노렸다 해서 삶아 죽이려 하신다면 이는 도리에 어긋나는 일이옵니다. 통촉하시옵기를…‥.” 빈틈없는 항변에 할 말을 잃은 고조는 괴통을 그냥 놓아주지 않을 수 없었다. [주] 요 : 중국 고대의 이상적 성군(聖君). 도척 : 춘추 시대, 성인(聖人) 공자(孔子)와 같은 시대를 살다 간 같은 노(魯)나라 사람으로 큰 도둑. 도당 9000여 명과 늘 전국을 휩쓸며 같은 악행(惡行)을 일삼음으로 해서 대악당(大惡黨)의 대명사가 되었다고 함.
Board 고사성어 2024.01.16 風文 R 631
“영수증 받으실게요” 대형 커피전문점 컵 걸이에 새겨진 글이 화제다. “아메리카노 나오셨습니다(X). 나왔습니다(O)” 사물 존칭이 하도 문제가 되다 보니 아예 문구를 새겨 넣은 모양이다. 아르바이트생의 시급보다 비싼 커피이니 나오시는 것이 맞는 것이 아니냐는 비아냥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한때 씁쓸하게 웃었던 적이 있었다. 사물존칭의 문제에 대해서는 이제 사회적인 공감대가 어느 정도 생긴 것 같다. 하지만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높임말을 어려워한다. “커피 나오셨습니다” 못지않게 자주 틀리는 말 중에 “-(하)실게요”라는 표현이 있다.“영수증 받으실게요” “여기 앉으실게요” “다른 옷 입어 보실게요” 예는 수도 없이 많다. “-(하)실게요”는 모두 틀린 표현이다. 상대방을 높이는 ‘시’와 말하는 사람의 행동에 대한 약속이나 의지를 담은 ‘-ㄹ게요’는 함께 쓸 수 없다. “영수증 받으세요” “영수증 받을게요”는 되지만 “영수증 받으실게요”는 자신이 영수증을 받겠다는 얘기인지 상대방에게 영수증을 받으라는 것인지 뜻이 모호하게 된다. “영수증 받으세요” “여기 앉으세요” “다른 옷 입어 보세요” 정도면 충분하다. 높여야 할 서술어가 여러 개일 경우에는 어떻게 할까? ‘어머니는 나를 보시며 우셨다’ ‘어머니는 나를 보시며 울었다’ ‘어머니는 나를 보며 우셨다’ 어느 것이 맞을까? 어느 쪽도 틀렸다고 하기는 어렵지만 대체로 문장의 마지막 서술어에 ‘시’를 쓴다. 즉 ‘어머니는 나를 보며 우셨다’가 자연스럽다. 다만 존경의 어휘와 같이 쓸 때에는 다른 서술어에도 ‘시’를 쓴다. 가령 ‘주무시다’는 그 자체가 어른에게만 쓰는 존경의 뜻을 담은 어휘이기 때문에 ‘할머니께서 주무시고 가셨다’와 같이 쓴다. 임수민 KBS 아나운서실 한국어연구부장
Board 말글 2024.01.16 風文 R 3416
‘도와센터’ ‘몰던카’ 내가 자주 가는 대형 마트에서는 정문 한쪽에 ‘도와센터’를 설치하여, 장 보러 온 사람들의 궁금 사항이나 불편ㆍ불만 사항을 해결해 주고 있다. 다른 곳에서는 대부분 ‘고객센터’니 ‘서비스센터’라는 말을 쓰는 데 반해 그곳에서는 ‘도와센터’라는 말을 써서 처음에는 너무 낯설었다. 그러나 누구나 쉽게 알 수 있는 ‘도와’라는 말을 써서인지 그 대형 마트에서는 장 보러 온 사람들을 위해 정말로 열심히 노력하는구나 하는 인상을 받았다. 또 며칠 전 길을 가다가 ‘몰던카’라는 말을 쓰는 상호를 우연히 보게 되었다. 언뜻 봤지만 중고차를 사고파는 가게임을 곧바로 알 수 있었다. 집에 돌아와 인터넷으로 검색해 보니 ‘몰던카’라는 말을 쓰는 사이트도 서넛 있었다. 중고차를 사고파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중고차’, ‘used car’를 대신해 ‘몰던카’를 쓰기도 하는 모양이다. ‘도와센터’와 ‘몰던카’는 ‘고객센터’, ‘서비스센터’와 ‘중고차’,‘used car’에 비해 훨씬 이해하기 쉽다. ‘도와’와 ‘몰던’이 누구나 쉽게 알 수 있는, 일상적으로 쓰이는 순 우리말(고유어)이기 때문이다. 의미 전달의 효과는 순 우리말이 한자어, 외래어(외국어)에 비할 바가 아니다. 물론 ‘도와’, ‘몰던’ 등과 ‘센터(center)’, ‘카(car)’ 등의 결합이 아주 자연스럽지 않다는 문제가 있다. 게다가 ‘카(car)’는 외래어로도 볼 수 없는 외국어이다. 우리 언어생활에서 순 우리말이 한자어, 외래어(외국어)에 비해 제대로 대접받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순 우리말(고유어)은 ‘도와센터’와 ‘몰던카’처럼 의사소통 측면에서 탁월한 효과가 있다. 새말을 만들거나 가게 이름을 지을 때 적극적으로 활용해 봄직하다. 박용찬 대구대 국어교육과 부교수
Board 말글 2024.01.16 風文 R 35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