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키다’ 얼마 전 한 홈쇼핑 방송에서 진행자가 “오늘은 ○○을 소개시켜 드리겠습니다”라고 말하는 것을 들었다. ‘소개시키다’는 평소 자주 듣던 말이다. 그런데 홈쇼핑 방송 진행자가 직접 어떤 상품을 소개하면서 한 말이므로, ‘소개시키다’는 부적절한 사동 표현이다. 우리말에서 자기 스스로 어떤 일이나 행동을 하지 않고 남에게 어떤 일이나 행동을 하게 하는 일을 ‘사동’이라 한다. 즉 ‘사동’이란 남에게 어떤 일이나 행동을 ‘시킴’을 나타낸다. “어머니가 아이에게 밥을 먹이다”나 “어머니가 아이에게 밥을 먹게 하다”에서 어머니가 아이에게 밥을 먹게 함을 뜻하므로 이들은 사동 표현이라 할 수 있다. 앞의 예는 ‘먹-’에 결합된 ‘-이-’에 의해, 뒤의 예는 ‘-게 하다’에 의해 사동을 나타낸다. 그 밖에 ‘-시키다’에 의해 사동을 나타낼 수도 있다. 예를 들어, “선생님이 쉬운 설명으로 학생에게 어려운 수학을 잘 이해시키다”에서는 ‘이해’에 결합된 ‘-시키다’에 의해 사동을 나타낸다. 그런데 최근 ‘-시키다’의 사용이 남용 수준에 이르렀다. 사동의 의미가 없는데도 빈번히 ‘-시키다’를 쓰고 있다. ‘소개시키다’, ‘접수시키다’, ‘교육시키다’ 등이 그렇다. 남에게 소개ㆍ접수ㆍ교육하게 한 경우가 아니라면 이 말의 사용은 부적절하다. ‘소개시키다’ 등이 ‘소개하다’ 등을 강조한 말이라고 많은 사람들은 생각한다. 잘못된 생각이다. 내가 초ㆍ중ㆍ고등학교 학생이었을 적, 선생님께서는 우리들이 ‘거짓말시키다’를 쓸 때마다 그것이 ‘거짓말하다’의 잘못임을 지적해 주시곤 했다. 그땐 선생님께서 별것 아닌 것 가지고 괜히 꼰대질(?)을 한다 생각했는데, 이제는 내가 선생이 되어 그런 꼰대질(?)을 계속하고 있다. 박용찬 대구대 국어교육과 조교수
Board 말글 2023.12.22 風文 R 3151
여보세요? 휴대전화는 예전엔 안 하던 고민을 하게 만든다. 유선전화는 누구 전화인지 알고 싶으면 무조건 받아야 했다. 하지만 휴대전화는 액정화면에 ‘아는 사람’과 ‘모르는 번호’를 또렷이 구분해 보여준다. 모르는 번호면, 모르는 사람일 텐데…. 받을까 말까 망설이게 된다. 대부분 보험 가입을 권하는 광고전화. 목화솜이불을 닮은 나는 전화를 끊지 못해 계속 들어주다 미안함만 쌓인다. 그렇긴 하지만, 모르는 번호로 걸려 온 전화가 광고전화라는 걸 언제 아는가? 생각보다 빠르다. 딱 첫마디! 두번째도 아닌 첫번째. 당신도 마찬가지일 테지. 광고전화는 “여보세요?”라는 말에 “반갑습니다, 고객님!”, “안녕하세요, ○○○ 고객님 맞으신가요?”라고 말한다. 처음 통화하는 사람이 주고받으며 채워나가는 대화의 쌍을 완성하지 못하기 때문에 광고전화라는 걸 쉽게 들킨다. 우리는 전화를 받으면 “여보세요?”라고 말한다. 그러면 상대방도 십중팔구 “여보세요?”라고 대답한다. 첫마디가 뭐냐에 따라 내 답이 달라진다. 전화받는 사람이 “네, ○○부 홍길동입니다”라고 말하면 나도 “네, 저는 누구누구입니다”라고 말하게 된다. 자기 이름만 말했지만, 나도 내 이름을 밝히게 된다. 자기 이름을 밝히는 건 전화 건 사람도 이름을 밝혀달라는 메시지이다. 전화받는 사람이 “네, ○○부입니다”라고만 말하면, 나도 내가 누구인지 밝히고 싶지 않다. 비록 전화를 통해서지만, 우리는 대화를 하지 대본을 읽는 게 아니다. 말의 질서는 무척 섬세하고 교묘하다. 빈자리를 귀신같이 알아차린다. 우리의 대화는 암묵적이면서도 명시적이다. 아는 형이 전화해 “저녁에 뭐 해?”라고 묻는다면 이유는 뻔하다. 김진해 | 한겨레말글연구소 연구위원·경희대 교수
Board 말글 2023.12.22 風文 R 2490
전차복철(前車覆轍) 前:앞 전. 車:수레 차/거. 覆:엎어질 복. 轍:바퀴자국 철. [준말] 복철(覆轍). [대응어]~후차지계(後車之戒). [동의어] 전차복 후차계(前車覆後車戒), 후차지계, 복거지계(覆車之戒). [유사어] 답복철(踏覆轍), 답복차지철(踏覆車之轍), 전철(前轍). [참조] 은감불원(殷鑑不遠). [출전]《漢書》〈賈誼專〉,《說苑》〈善說〉,《後漢書》〈竇武專(두무전)〉 앞 수레가 엎어진 바퀴 자국이란 뜻. 곧 ① 앞사람의 실패. 실패의 전례. ② 앞사람의 실패를 거울삼아 주의하라는 교훈. ① 전한 5대 황제인 문제(文帝)때 가의(賈誼:B.C. 168~210)라는 명신이 있었다. 그는 문제가 여러 제도를 개혁하고 어진 정치를 베풀어 역사에 인군(仁君)으로 이름을 남기는 데 크게 기여한 공신인데, 당시 그가 상주한 글에 이런 구절이 있다. “속담에 ‘앞 수레의 엎어진 바퀴 자국[前車覆轍]’은 뒷수레를 위한 교훈[後車之戒]이란 말이 있사옵니다. 전 왕조인 진(秦)나라가 일찍 멸망한 까닭은 잘 알려진 일이 온데, 만약 진나라가 범한 과오를 피하지 않는다면 그 전철(前轍)을 밟게 될 뿐이옵니다. 국가 존망, 치란(治亂)의 열쇠가 실로 여기에 있사오니 통촉하시오소서.” 문제는 이후 국정 쇄신(國政刷新)에 힘써 마침내 태평 성대를 이룩했다고 한다. ② 이 말은《설원(說苑)》〈선설(善說)〉에도 실려 있다. 전국 시대, 위(魏)나라 문후(文侯)가 어느 날 중신들을 불러 주연을 베풀었다. 취흥(醉興)이 도도한 문후가 말했다. “술맛을 보지 않고 그냥 마시는 사람에게는 벌주를 한 잔 안기는 것이 어떻겠소?” 모두들 찬동했다. 그런데 문후가 맨 먼저 그 규약을 어겼다. 그러자 주연을 주관하는 관리인 공손불인(公孫不仁)이 술을 가득 채운 큰잔을 문후에게 바쳤다. 문후가 계속 그 잔을 받지 않자 공손불인은 이렇게 말했다. “‘전차 복철은 후차지계’란 속담이 있사온데, 이는 전례를 거울삼아 주의하라는 교훈이옵니다. 지금 전하께서 규약을 만들어 놓으시고 그 규약을 지키지 않는 전례를 남기신다면 누가 그 규약을 지키려 하겠나이까? 하오니, 이 잔을 받으시오소서.” 문후는 곧 수긍하고 그 잔을 받아 마셨다. 그리고 그 후 공손불인을 중용했다고 한다.
Board 고사성어 2023.12.21 風文 R 633
장녀, 외딸, 고명딸 엊그제 청첩장을 하나 받았다. 신부의 부모는 제 짝을 찾아 떠나는 딸이 대견하다면서도 아쉬움을 감추지 못했다. 그들에게 몇 마디 덕담을 건네고 돌아와 청첩장을 펴 보았다. 분명 일남일녀를 둔 것으로 알고 있는데, 신부는 ○○○의 ‘장녀’로 표시돼 있었다. 남동생이 있긴 하지만 하나뿐인 딸인데, 그럴 때도 장녀라는 말을 쓰나? ‘장녀’는 ‘큰딸, 맏딸’과 같은 말로 딸이 둘 이상 있을 때 그 중 맏이가 되는, 첫째 딸을 가리킨다. 이 말은 ‘차녀’, ‘삼녀’ 등과 상대적인 개념이어서 여동생이 있을 때만 쓸 수 있는 말이다. ‘장남’도 마찬가지로 외아들인 경우에는 쓰지 않고, 남동생이 있을 때만 쓴다. 그렇다고 청첩장에 ‘외딸, 외아들’이라고 쓰기는 꺼려진다. ‘표준언어예절’에서는 이런 경우에 그냥 ‘딸’이나 ‘아들’로 쓰도록 권장하고 있다. 하나뿐인 딸을 가리키는 말은 ‘외딸’ 또는 ‘외동딸’이다. 이 말은 두 가지 의미로 사용된다. 무남독녀, 즉 다른 형제나 자매가 없이 단 하나뿐인 딸을 가리킬 때도 있고, 남자 형제는 있지만 딸로서는 하나밖에 없을 때도 쓴다. 아들이 여럿 있는 집의 외딸은 특별히 ‘고명딸’이라고 한다. 어떤 지방에서는 ‘양념딸’이라고도 한다. 음식에 맛을 더하고 모양과 빛깔을 돋보이게 하는 고명처럼 여러 아들 사이에 예쁘게 얹혀 있어 더욱 사랑스러운 딸이라는 뜻이다. 언뜻 딸을 매우 귀히 여기는 말 같지만 꼭 그렇지만도 않다. 딸은 양념이나 고명처럼 구색 갖추기로 하나 정도만 끼어 있어야 좋다는 속뜻이 담겨있다. 반대로 딸이 여럿 있는 집의 외아들을 가리켜 ‘고명아들’이라고 하지 않는 것만 보아도 알 수 있다. 딸이 많을수록 좋다는 요즘 사람들에게는 격세지감을 느끼게 하는 표현이다. 정희원 국립국어원 어문연구실장
Board 말글 2023.12.21 風文 R 2672
어떤 반성문 사는 게 후회의 연속이다. 말을 해서 후회, 말을 안 해서 후회, 말을 잘못해서 후회. 집에서는 말이 없어 문제, 밖에서는 말이 많아 문제. 나는 천성이 얄팍하여 친한 사람과는 허튼소리나 하며 시간을 보낸다. 그러다가 탈이 난다. 며칠 전에도 후배에게 도 넘는 말장난을 치다가 탈이 났다. 아차 싶어 사과했지만, 헤어질 때까지 굳은 얼굴을 풀지 않았다. 상대방을 살피지 않고, 땅콩 까먹듯이 장난질을 계속하니 사달이 나지. 올해 가장 후회되는 말실수. 지난여름, 어느 교육청 초대로 글쓰기 연수를 했다. 한 교사가 ‘약한 사람들이 할 일은 기억, 연대, 말하기’라고 말한 이유를 물었다. 거기다 대고 나는 ‘뻘소리’를 했다. “교실에서 제일 힘센 사람은 선생이잖아요. 뭘 하라고도 할 수 있고, 하지 말라고도 할 수 있는…. 그러니 잘 견딥시다.” 잘못된 시스템 속에서 개인은 무엇을 해야 하는지 묻는 거였는데, 마음을 고쳐먹으라는 소리나 하다니. 그러곤 얼마 안 있어 교사들의 비극적 선택 소식이 이어졌다. 아찔했다. 교사들은 죽음을 감행할 정도로 깊은 좌절감과 무기력증에 시달리고 있었다(교사인 처제도 학생의 해코지가 두려워 얼마 전 노모를 모시고 이사를 갔다). 폐허로 변한 교실, 붕괴된 교육체계를 응시하기 위해서라도 말을 더 나누며 연대의 길을 찾아보자고 해야 했는데…. 그 말이 들어 있는 글을 다시 보니 ‘죽음은 개인이 당면해야 할 일이지만 개인에게 모든 걸 맡기지 않는 것, 죽음에 대해 말함으로써 죽음을 뛰어넘는 것’이라고 씨불이고 있었다. 말에서 비롯한 잘못은 자기감정이 과잉되거나 자기 확신이 강해서 생긴다. 무엇보다 상대를 넘겨짚다가 결국 큰코다친다. 나는 말이 앞서는 사람이다. 몹쓸 놈이다. 김진해 | 한겨레말글연구소 연구위원·경희대 교수
Board 말글 2023.12.20 風文 R 239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