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새’와 ‘금세’ 오래된 수수께끼 중에 ‘세상에서 가장 작은 새는 무엇일까’라는 게 있다. ‘종달새’ ‘참새’ ‘벌새’ 등 모두 자기가 아는 작은 새 이름을 떠올리느라 바쁘겠지만 정답은 ‘눈 깜짝할 새’이다. 눈을 한 번 살짝 감았다 뜨는 짧은 동안이니, 과연 그보다 더 작은 ‘새’는 없을 것이다. 이것은 ‘사이’가 줄어서 ‘새’가 되는 데 착안한 언어유희로, 어르신들은 ‘싱거운’ 소리라고 하실 테지만 젊은이들은 ‘썰렁한’ 농담이라고 할 것이다. 요새 젊은이들이 새로 만들어 쓰는 말 중에 ‘금사빠’라는 게 있다. ‘금세 사랑에 빠지는 사람’을 줄여 이르는 말이다. ‘그 친구는 금사빠야’ ‘내 금사빠 성향을 어떻게 고쳐야 하지’처럼 쓴다. 그런데 이때 ‘금세’를 어떻게 써야 할지 혼란스러워 하는 사람이 많다. ‘금세’가 맞나, ‘금새’가 맞나? ‘요새, 어느새, 밤새’ 같은 말에서처럼 ‘새’로 적는 게 맞지 않을까? 이 말들을 적을 때 혼동하는 이유는 우리말에서 ‘애’와 ‘에’의 발음이 잘 구분되지 않기 때문이다. 말하고 들을 때는 구분되지 않는 소리들을 구분해서 적자니 혼란스러운 것이다. 그럴 때는 이 말들이 어떻게 해서 생겨난 말인지를 알고 있는 게 도움이 된다. ‘요새, 어느새, 밤새’의 ‘새’는 ‘눈 깜짝할 새’의 ‘새’처럼 모두 ‘사이’가 줄어든 말이다. ‘요사이’가 줄어서 ‘요새’, ‘밤사이’가 줄어서 ‘밤새’가 되었다. ‘아이’가 줄어서 ‘애’가 되는 것과 마찬가지다. ‘금세’는 ‘지금, 이제’ 등의 의미를 나타내는 ‘금시(今時)’에 조사 ‘에’가 결합된 ‘금시에’가 줄어서 된 말이다. ‘금시초문(今時初聞)’이라고 할 때의 ‘금시’와 ‘에’가 합쳐진 말로서, ‘금새’가 아니라 ‘금세’로 쓴다. 정희원 국립국어원 어문연구실장
Board 말글 2024.02.18 風文 R 3399
떼려야 뗄 수 없는 인연 KBS 특별 생방송 ‘이산가족을 찾습니다’가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되었다. 1983년 6월 30일부터 장장 138일간에 걸쳐 5만여 명이 출연한 역사적 방송, 분단이 빚어낸 슬픈 감동의 드라마였다. 삼십 년이 지났지만 이산의 아픔은 계속되고 있다. 얼마 전 금강산에서 이뤄진 이산가족 상봉을 보며 60년이 넘는 세월도 혈육의 인연은 떼려야 뗄 수 없는 것임을 다시 느꼈다. 흔히 인연을 얘기할 때 ‘뗄래야 뗄 수 없는’이라는 표현을 많이 쓴다. 그러나 이는 ‘떼려야 뗄 수 없는’의 잘못이다. ‘떼려야’는 ‘떼다’의 ‘떼’와 ‘려야’가 결합한 말로 ‘-려야’는 ‘-려고 하여야’가 줄어든 것이다. 즉 ‘떼려고 하여야 뗄 수 없는’이 줄어 ‘떼려야 뗄 수 없는’이 된 것이다. ‘떼’에 ‘ㄹ래야’가 결합한 ‘뗄래야’는 풀어 쓰면 ‘뗄라고 해야’가 되는데 이는 표준어가 아니다. 마찬가지로 ‘갈래야 갈 수 없는 고향’도 ‘가려야 갈 수 없는 고향’으로 쓰는 것이 맞다. ‘가려야’는 ‘갈라고 해야’가 아니라 ‘가려고 해야’가 줄어든 형태이기 때문이다. 이와 비슷한 예는 수도 없이 많다. ‘먹을래야 먹을 수 없는 음식’이 아니라 ‘먹으려야 먹을 수 없는 음식’, ‘볼래야 볼 수 없는 광경’이 아니라 ‘보려야 볼 수 없는 광경’, ‘할래야 할 수 없는 일’이 아니라 ‘하려야 할 수 없는 일’로 쓰는 것이 맞다. 많은 사람들이 ‘떼려야’가 맞는 표현이라고 해도 ‘뗄래야’가 자연스럽다고 말한다. 아마도 입에 익지 않아서일 것이다. 절대 다수의 사람들이 ‘뗄래야’를 계속 고집한다면 언젠가는 규정이 바뀔 수도 있겠지만 아직은 아니다. 임수민 KBS 아나운서실 한국어연구부장
Board 말글 2024.02.17 風文 R 3094
내 청춘에게? 나는 매주 한 번 이상 영화관에 가서 영화를 본다. 그렇게 본 영화에는 독립영화 ‘내 청춘에게 고함’(2006)도 있다. 그런데 영화 제목을 처음 접하자마자 아주 부자연스럽다고 느꼈다. ‘청춘에게’의 ‘에게’ 때문이다. 우리말에서 ‘에게’는 “사람들에게 소식을 알리다” “개에게 먹이를 주다” 등처럼 사람이나 동물을 나타내는 말 뒤에 붙는 격 조사이다. “본부에 상황을 알리다” “나는 꽃에 물을 주었다” 등처럼 식물이나 무생물을 나타내는 체언 뒤에는 ‘에게’ 대신 ‘에’가 붙는다. 체언의 의미에 따라 ‘에게’와 ‘에’를 구분해 쓰는 것이다. 물론 동시나 동화에서 식물이나 무생물을 의인화한 경우 “나무에게 말하다”처럼 식물이나 무생물이라도 ‘에게’를 쓸 수 있다. 그런데 영화 ‘내 청춘에게 고함’에서 ‘청춘’은 ‘십 대 후반에서 이십 대에 걸치는 인생의 젊은 나이 또는 그런 시절’을 이르는 말로서 무생물이다. 무생물인 ‘청춘’을 의인화한 것으로 볼 수도 없다. 따라서 ‘청춘’ 뒤에는 ‘에게’가 아닌 ‘에’를 써야 한다. 한편 그 의미가 쉽게 파악되지 않는 몇몇 체언이 있어 주의를 요한다. “○○ 세대에/에게 바치다”의 ‘세대’가 바로 그것이다. 이로 인해 ‘세대’ 뒤에 ‘에게’를 써야 할지 ‘에’를 써야 할지 헷갈릴 수 있다. ‘세대’는 ‘어린아이가 성장하여 부모 일을 계승할 때까지의 약 30년 정도 되는 기간’(무생물)과 ‘같은 시대에 살면서 공통의 의식을 가지는 비슷한 연령층의 사람 전체’(사람)의 의미를 갖는다. 따라서 ‘세대’ 뒤에는 그 의미에 따라 ‘에’를 쓸 수도 있고 ‘에게’를 쓸 수도 있다. ‘계급’이나 ‘계층’도 그런 체언에 해당한다. 박용찬 대구대 국어교육과 부교수
Board 말글 2024.02.17 風文 R 31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