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이야기 1 - 정채봉, 류시화 엮음 3 시련을 딛고 외톨이의 꿈 - 김경훈 일곱 살 때 간암으로 아빠 엄마를 잃었다. 엄마가 돌아가신 지 20일 후에 아빠가 돌아가셨다. 어떤 사람들은 귀신이 붙었다는 사람도 있고, 그런 일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하는 사람도 있었다. 형제도 없는 나는 갈 곳이 없게 되었다. 친척들은 많았지만 누구도 받아주지 않았다. 하루아침에 고아가 되어 버린 것이다. 그러자 작은아버지가 나를 데려갔다. 나는 처음으로 서울 구경을 했다. 작은집도 가난해서 작은아버지, 작은엄마는 일을 다니시고 사촌 형들은 중학교에 다니고 있었다. 집에 남는 사람은 나 혼자였다. 남의 집에 가면 청소도 하고 말을 잘 들어야 한다기에 나는 매일 밥을 하며 학교에 다녔다. 어떤 때는 학교에 가면 어디서 보았는지 남자가 밥을 한다고 놀리기도 하고, 돈이 없어서 준비물을 못해 가면 비웃기도 했다. 그때마다 나는 고양이 앞에 쥐가 되곤 했다. 맨 처음에는 작은엄마와 형들도 나를 한 식구처럼 대해 주었는데, 날이 갈수록 작은엄마가 나를 싫어했다. 배가 고파 밥을 많이 먹으면 "조금만 놈이 밥을 많이 먹는다" 고 하고, 형들도 "네가 많이 먹으니까 쌀값이 오르지" 하고 한 마디 덧붙였다. 밥을 먹을 때마다 눈치를 보며 먹어야 했다. 작은엄마는 나를 다른 데로 보내자고 며칠을 작은아버지와 싸우셨다. 그러자 사촌 형들은 "너 때문에 저런 일이 생긴다"며 나를 의자로 때린 적이 한 두 번이 아니었다. 그럴 때면 집에서는 못 자고 종점에서 쉬는 버스 안에서 잠을 자야만 했다. 그렇게 3년이 지났다. 초등학교 3학년 겨울 방학 때였다. 작은엄마가 옷과 책을 가방에 넣어 주시며 시골에서 놀다가 오라고 하셨다. 어린 마음에 얼마나 기뻤는지 모른다. 오촌 아저씨 댁에서 방학을 보내고 돌아와 작은집 대문 앞에서 아무리 불러도 잠긴 문은 열리지 않았다. 방에는 불이 켜져 있었다. 그때야 나는 알았다. 영영 돌아오지 말라고 옷을 다 싸주셨다는 걸. 버스를 타러 어두운 골목길을 내려왔다. 손에 든 가방이 무거웠다. 그날따라 밤 공기도 무척 차가웠고 아빠와 엄마가 너무 보고 싶어졌다. 그날 저녁 청량리역 대합실에서 잠을 자고, 이튿날로 다시 시골에 내려가 여러 친척들 집을 돌아다니며 밥을 얻어먹었다. 넉 달을 그렇게 보냈다. 어쩌다 보니 다시 서울로 올라오게 되었다. 그렇게 해서 초등학교 중퇴를 하게 된 것이다. 나는 고종 형수의 소개로 공장에 들어가게 되었다. 그때 나이 열한 살, 너무 어려서 월급은 없고 먹고 자는 것만 보장받았다. 공장에서는 처음 들어온 사람은 신고식을 한다고 했다. 나도 신고식을 했다. 신고식은 별다른 것이 없었다. 그냥 때리면 맞는 것이었다. 얼마나 많이 맞았는지 온몸이 멍투성이였다. 어떤 때는 열 사람 밥을 하니까 삼층밥이 되어 욕을 많이 먹었지만 차차 익숙해졌다. 하지만 기술자 마음에 안 들어 기술자가 "너, 곡소리 날 줄 알아" 하며 각목으로 마구 때렸다. 청바지가 찢어져 다리에 피가 난적도 있었다. 그때마다 신체적 아픔보다는 엄마 아빠가 보고 싶고 서러워서 눈물이 솟구쳤다. 하지만 그런 생활 속에서도 꿈은 있었다. 대법원의 판사가 되는 것이었다. 공장에 들어간 지도 3년이 넘었다. 설날 휴가가 돌아왔다. 갈곳은 없고 해서 문득 생각난 곳이 하일동 고모네 집이었다. 나는 설을 쇠기 위해 고모네 집으로 갔다. 상추밭을 하시는 고모부는 다른 친척들과 달랐다. 며칠을 고모네 있으면서 형들과도 친해졌다. 고모도 내가 공부를 하고 싶다는 말을 듣고 이렇게 말씀하셨다. "하일동에 무료로 학생들을 가르쳐 주는 학교가 있대." 그 이튿날 나는 학교를 찾아갔다. 교장 선생님을 만나서 어려운 사정 이야기를 하자 책가방, 책, 노트 등을 주시며 내일부터 같이 공부하자고 하셨다. 나는 한글도 잘 몰랐기 때문에 초등학교 3학년부터 공부를 시작했다. 같은 반에서 공부하는 애들은 나보다 더 불쌍했다. 다리를 못 쓰는 형도 있었고, 이마에 혹이 난 애도 있었다. 우리는 서로 도우며 공부했다. 어떤 때는 싸워서 선생님한테 혼난 적도 있지만 금방 친해져 친형제처럼 지내며 공부했다. 그러나 어려움은 많았다. 새벽에 나가 일을 하니까 몹시 피곤했고, 농삿일은 너무나 힘들었다. 밥을 못 먹어 위가 헐어 선생님의 도움으로 학교 기숙사에 있었다. 열심히 공부한 나는 그해 8월 검정 고시에 합격했다. 남들은 6년을 다녀야 받을 수 있는 초등학교 졸업장을 6개월 만에 받은 것이다. 내 눈에서는 눈물이 흘렀다. 그날 저녁 별들 중 두 별이 유난히 반짝였다. 꼭 아빠 엄마가 나에게 잘했다며 박수를 보내는 것 같았다. (하일 중등 성경 구락부 학생)
Board 삶 속 글 2021.09.02 風文 R 719
언어 경찰 상상을 한번 해보자. 만일 언어 경찰이 있다면 어떻게 될까? 사람들이 항상 바른 말과 고운 말만 쓰고, 욕설 같은 것은 입에 담지 않는 낙원이 되지 않겠는가. 더 나아가 정확한 표준 발음과 맞춤법만 사용하도록 계도한다면 모범적인 사회가 이루어지지 않겠는가. 그럴듯하게도 들리겠지만 이건 아니다 싶다. 보통사람들한테는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언어 사용에 대해 검토와 평가를 하는 기관이 있다. 바로 방송 언어를 점검하고 경우에 따라 제재를 가하는 기관이다. 특히 지상파 방송의 경우는 혹시 윤리적으로나 교육적으로 문제 있는 언어를 사용했을 경우에 부담스러운 비판을 받을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교육이나 시사에 관한 방송에서는 언어 사용을 올바르게 하도록 지도한다는 것이 필요도 하고 의미도 있겠지만, 오락 프로는 좀 경우가 다르다. 자칫하면 웃자고 한 말에 죽자고 달려드는 일이 생기기 쉽다. 어찌 오락 프로에서 정확한 발음과 전형적인 의미만 사용할 수 있겠는가. 장난으로라도 비틀고 꼬아놓고 희롱하는 것이 인간의 유희 아닌가. 그러다 보니 '핳핳핳’처럼 장난에 가까운 자막에 대해서도 주의를 주기도 하고, “ㅋㅋㅋ”도 문제를 삼아 방송국 쪽에서 모음 글자를 뒤늦게 넣기도 했다고 한다. 우리의 맞춤법은 원래 공식적인 문장 활동에 주로 적용하려고 만든 규약이지 모든 사람의 삶 전반을 단속하는 것이 그 목적은 아니다. 방송 중에 짓궂거나 좀 주책스런 표현을 한 것을 미주알고주알 모두 문제 삼는 것은 분명 문제가 있다. 언어는 성스러운 면도 있지만 개구쟁이 같은 면도 있다. 언어에 대한 단속과 규제는 ‘구체적인 해악’이 드러나는 부분에만 한정해야지, 실오라기 같은 실수나 장난도 용납을 못하는 근엄함은 언어의 그 풍부한 기능을 왜소하고 옹졸하게 해석하는 일이다. 속상한 일이 많을 때는 웃고도 살아야 한다. 김하수 한겨레말글연구소 연구위원
대명사의 탈출 ‘나와 너’, ‘여기와 저기’와 같은 말을 대명사라고 한다. 대명사의 가장 큰 특징은 말하는 사람들 사이의 관계와 위치에 따라 말의 형태가 달라지는 것이다. 내가 나를 일컬을 때는 분명히 ‘나’였는데, 남이 나를 부를 때는 ‘너’가 된다. 또 ‘그 사람’이 될 수도 있다. 실체는 그대로인데 누가 어디에서 나를 호출하느냐에 따라 어휘의 모습이 달라진다. 어린아이들은 아직 관계라는 개념에 익숙하지 못하다. 그래서 ‘나’와 ‘너’라는 대명사보다는 아예 이름을 말한다. 관계를 언어로 드러내는 것은 퍽 까다로운 일이다. 영어를 처음 배울 때 인칭에 따라 달라지는 그들의 동사가 얼마나 귀찮았던가. 그들의 언어는 자신과의 관계에 따라 동사의 성격을 다르게 본 것이다. 대명사가 인간의 관계를 드러낸다면 명사는 그 관계를 무표정하게 만든다. 그냥 ‘집’이라 하면 건축물로서의 ‘집’이다. 그러나 ‘우리 집’이라고 하면 ‘우리’의 소유 대상이거나 거주 공간이다. 이러한 대명사들이 그 ‘관계의 표지’를 품에 안은 채 명사의 구역으로 자꾸 탈출하고 있다. 몇 해 전에 ‘우리’라는 말을 특정 정당과 은행의 이름에 사용하기 시작하더니, 요즘은 ‘요기요’, ‘여기 어때’, ‘여기다’ 같은 대명사가 마치 명사인 듯이 응용프로그램(앱) 이름에 등장했다. 품사의 경계를 넘나들면 기능이 중복되게 마련이다. 심지어 지방의 어느 지역을 지나가다가 ‘거기’라는 모텔 이름도 본 적이 있다. “우리 ‘거기’ 갈까?” 하는 소박한 문장 안으로 모텔의 의미가 침투해 들어온 것이다. 말의 성격이 슬슬 변하고 있다. 서로의 관계를 보여 주는 대명사가 에일리언처럼 명사(상품명)의 몸에 들어가 소비자들을 낚아채려 한다. 소비자들은 대명사 때문에 그 상품과 자신이 유의미한 관계인 것처럼 느끼게 된다. 원래 소비자와 관계 깊던 대명사가 상품의 진영으로 넘어가 버리고 있는 것이다. 김하수 한겨레말글연구소 연구위원·전 연세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