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참 가슴 찡한 이야기 - 황지니 두려움 없는 사랑 나이아가라 폭포에는 이런 전설이 있습니다. 오래전에 폭포 근처에 살고 있던 인디언 부족은 해마다 폭포의 신에게 제물을 바쳐 왔습니다. 그들은 달빛이 환하게 비치는 밤 폭포의 안개 위에 나타나는 무지개를 신이 나타나는 것으로 믿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해마다 폭포의 신에게 바치는 제물은 바로 예쁜 소녀였습니다. 제물을 바칠 때가 되면 제물이 될 소녀를 제비로 뽑아 정해진 날에 홀로 배에 태워서 폭포로 흘러내려 떨어지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한번은 제물을 결정하는 제비가 추장의 외동딸에게 떨어지게 되었습니다. 부인이 죽은 후 오직 이 딸에게 모든 정성과 사랑을 쏟아 온 추장에게 그것은 크나큰 슬픔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사람들이 추장의 얼굴을 보니 여전히 근엄한 표정을 잃지 않고 있었습니다. 억지로 근엄한 표정을 짓고 있었지만 그 얼굴 뒤에는 가슴이 에이는 아픔과 고통이 용솟음치고 있음을 사람들은 몰랐던 것입니다. 드디어 제물을 배에 태워 신에게 바칠 날이 다가왔습니다. 꽃으로 장식된 배에 추장의 딸은 실려졌고 추장의 어린 딸은 아빠를 찾았지만 보이지 않았습니다. 소녀의 눈에는 눈물이 흐르고 결국 공포에 떨며 울음을 터뜨렸지만 끝내 아빠를 찾을 수 없었습니다. 배는 폭포를 향해 미끄러져 갔습니다. 이때 수풀 속에 숨어 있던 한 사람이 배를 저어 소녀 쪽으로 다가갔습니다. 그는 바로 소녀의 아버지였습니다. 추장은 소녀의 배 가까이로 노를 저어 갔습니다. 그리고 딸과 아빠는 손을 꼭 마주 쥔 채로 나이아가라 폭포의 엄청난 물결에 휩쓸려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지구상에 인간이 존재하는 근본적인 소아는 부자의 도리가 지켜지고, 부자의 사랑이 이루어지는 데에 있는 것이다. - 강유위
Board 추천글 2020.07.14 風文 R 2413
Board 고사성어 2020.07.14 風文 R 10115
'사과'의 참뜻 사과를 한다는 것은 손상된 자기정당성을 말하기를 통해 회복하는 일이다. 그런 점에서 사과하는 사람이 자기가 잘했다는 말인지 잘못했다는 말인지 모를 소리를 하고, 이리저리 둘러대거나 남의 말 하듯이 한다면 자기정당성을 회복할 수가 없다. 참된 사과의 표현은 뉘우치는 자에게는 잘못을 면소받을 수 있는 기회를 주고, 사회윤리 척도를 재확인하면서 서로의 유대관계를 회복시킨다. 또 공동체 의식을 높이는 데 매우 유용하다. 종종 이런저런 큰 사건이 터졌을 때 관계된 책임자 혹은 공직자들의 사과를 요구하는 것은 그들을 공연히 망신 주자는 것이 아니다. 이왕 터진 사건을 마무리하는 기회에 우리 사회윤리의 기준과 내부적인 유대관계를 강화하자는 것이다. 국제관계도 마찬가지다. 지난날의 어두웠던 부분을 드러내고 제대로 된 사과를 함으로써 다시는 과거가 반복되지 않는 새로운 시대를 만들자는 것이다. 20세기의 양차 대전은 참혹한 역사적 비극이었기 때문에 그 시기에 각자가 무엇을 했는지를 잘 새겨 두고 제대로 평가해야 한다. 이것은 남을 지배했던 자들이나 지배당했던 자들 모두의 미래를 결정하는 중요한 공동 행위이다. 사과를 하려면 아주 철저히 하는 것이 좋다. 그래야 재론의 여지가 없다. 자존심 살린다고 일부러 사과를 엉성하게 하거나 희화화해 버리면 훗날 똑같은 짓을 되풀이할 수도 있다는 의심을 받기 마련이다. 말을 바르게 하라는 것은 틀리지 않게 하라는 뜻도 있지만 옳은 태도로 말하라는 뜻도 있다. 사과를 받는 사람의 태도도 중요하다. 우물우물 넘어가는 사과를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받아들이고 지나가 버린다면 그것 역시 문제다. 그것은 자존심이 없는 행위인 동시에 그러한 책임 회피에 동조하거나 또 그들과 공생하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 사람의 짓 예로부터 사람이 감당할 수 없는 재난을 당하면 으레 하늘이 벌을 내리는 줄 알았다. 그래서 그것을 재난 혹은 재앙이라고 했다. 그러한 말 앞에서 우리는 힘이 쪽 빠지게 마련이다. 그 까닭은 피해는 엄청난데 그 가해자가 없거나 불확실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모두 다 운수소관 아니면 하늘의 뜻이라고 하며 망연자실하게 된다. 사람들의 지식이 축적되면서 대부분의 재난이 자연의 법칙을 사람들이 충분히 알지 못한 까닭임을 깨달았다. 그리고 더 나아가 사람의 잘못이거나 예방을 소홀히 한 탓임도 뒤늦게 알아차렸다. 그래서 요즘은 신문 지면에 “천재(天災)가 아닌 인재(人災)”라는 표현이 적잖게 나타난다. 하늘의 뜻이 아니라 사람이 저지른 짓이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구조 비판적인 표현에도 여전히 숨어 있는 책임과 원인을 찾아내려 하지 않고 체념하려는 생각을 엿볼 수 있다. 사람이 일으킨 사고를 ‘재난’이라는 관념에 연동시킨 것이 그것이다. 돌이켜보면 지진이나 해일 등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재난은 사실 누군가가 그 원인을 만든 경우가 많다. 붕괴 사고, 화재 사고, 폭발 사고 등은 여지없이 누군가의 실수나 무책임 때문에 일어났다. 심지어 산불이나 돌림병의 확산도 사람 탓인 경우가 적지 않았다. 곧 재난이 아니라 사고인 셈이다. 그 인과관계를 따져보면 당연히 범죄자와 책임자가 있게 마련이다. “천재(天災)가 아닌 인재(人災)”라는 말이 사태의 인과관계를 깨달은 의식의 발전을 보여주듯이 이제는 한 걸음 더 나아가야 한다. 자연의 직접적인 도발이 아니라면 모든 것은 재난이 아닌 사고다. 그리고 책임자와 가해자가 ‘복잡한 구조’ 속에 숨어 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그들을 찾아내서 책임을 묻는 일이 앞으로 더욱 ‘안전한 사회’를 위한 첫걸음이 될 것이다. 이제는 “재난이 아니라 범죄”라는 시각으로 문제를 들여다보아야 한다. 김하수 한겨레말글연구소 연구위원
큰 방황은 큰 사람을 낳는다 - 마 데바 와두다 35. 자기 기분에 정통하기 <행이든 불행이든 모두 스쳐가는 것. 자신의 기분을 알아 거기에 희생되지 않을 수 있는 열쇠가 바로 여기에 있다> 현자들을 여럿 거느리고 있는 한 왕이 자신의 능력에 대해 크게 좌절하였다. 게다가 이웃나라의, 자신보다 힘이 더 센 왕이 쳐들어 오려고 호시탐탐 노리고 있다는 것이었다. 왕은 두려웠다. 죽음이, 패배가, 절망이, 늙음이 두렵고 무서웠다. 그래서 왕은 현자들을 불러 물었다. <까닭은 모르겠으나 어떤 반지를 하나 꼭 찾아야만 되겠소... 그걸로 말하자면 내가 불행할 때 날 즐겁게 해 줄 것이오. 또 내가 행복할 때 그걸 보기만 하면 저절로 날 슬프게 할 것이오> 왕은 하나의 열쇠를 구하는 것이었다. 두 개의 문을 열 수 있는 열쇠를. 행복의 문과 불행의 문을 모두 열 수 있는 열쇠를. 왕이 구하는 것이 무엇인가? 그는 자기 기분에 정통하길 원하는 것이다. 자기 기분의 진짜 주인이 되어, 더는 자기 기분에 희생되고 싶지 않다는 것이다. 현자들은 이 문제를 가지고 머리를 있는 대로 다 짜봤지만 아무런 결론도 얻을 수가 없었다. 하는 수 없이 그들은 한 수피 신비가를 찾아가 조언을 구했다. 수피는 자기손가락에 끼어 있던 반지 하나를 빼주며 말하였다. <꼭 한 가지 명심해야 할 게 있소. 이걸 왕에게 주되, 왕이 모든 걸 다 잃고 혼란과 고통으로 어찌할 바를 모르게 될 때에 이 반지 밑을 보라 하시오. 그렇지 않으면 이 반지의 메시지를 놓칠 것이오> 왕은 수피의 말을 수락하고 반지를 받았다. 호시탐탐 노리고 있던 이웃나라가 침략을 개시하여 물밀듯이 쳐들어 왔다. 왕은 목숨만이라도 건지기 위해 왕궁을 빠져나가야만 했다. 적들이 뒤쫓아 왔다. 말들의 비명소리가 처절하게 들렸다. 왕은 자신의 말도 이미 죽었으리라 하고 그냥 뛰어 달아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이미 사태는 돌이킬 수 없는 절망의 구렁텅이로 그를 몰아넣고 있었다. 완전 포위된 왕은 막다른 골목에 갇혀버린 것이었다. 그때 왕은 불현듯 반지를 떠올렸다. 반지의 뚜껑을 열고 보석 밑을 살펴 보았다. 거기엔 이런 글귀가 박혀 있었다. "이것 역시 스쳐가리라"
Board 추천글 2020.07.12 風文 R 2409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참 가슴 찡한 이야기 - 황지니 27센트가 일으킨 기적 미국 필라델피아에는 3천 3백여 명이 앉을 수 있는 대형 탬플 침례교회와 탬플 대학, 탬플 병원, 탬플 주일학교가 있습니다. 이렇게 큰 탬플 재단이 설립되기까지는 여러 사람들의 노고가 있었겠지만 그 중에도 어린 꼬마아이의 애절한 이야기가 마음을 울립니다. 해티 와이얕이라는 어린 소녀가 있었습니다. 그녀는 한 작은 규모의 주일학교를 찾아가서 자기를 어떤 반에 넣어 달라고 했습니다. 그렇지만 자리가 부족해 학생을 더 받을 수 없는 주일학교에서는 해티를 그냥 돌려보낼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 후 채 2년이 지나지 않아서 해티 와이얕은 병을 앓다가 그만 세상을 떠났습니다. 해티가 죽은 후에 마음을 뜨겁게 한 사실이 발견됐습니다. 해티가 베고 있던 베개 밑에서 작은 어린이용 지갑이 하나 발견되었는데 그 지갑 속에는 동전 27센트가 들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꼬깃꼬깃 접혀진 종이에 메모가 적혀 있었습니다. "예배당을 더 크게 지어서 많은 어린이들이 주일학교에 갈 수 있도록." 그 교회의 목사님이 이 사실을 교회 성도들에게 알렸을 때 그들은 모두 감동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한결같이 예배당을 증축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또 신문에도 이 이야기가 보도되자 도처에서 사람들이 기부금을 내놓았습니다. 드디어 해티 소녀가 죽은 지 5년 만에 27센트였던 돈이 25만 달러라는 대단한 액수로 늘어났습니다. 그렇게 해서 탬플 침례교회 예배당 증축은 물론 대학교, 병원 등을 세우게 된 것입니다. 형제들이여! 너의 형제들을 너의 가슴에 껴안으라. 동정이 있는 곳에 신의 평화가 있다. O brother mam! fold to thy heart thy brother. Where pofy dwells, the peace of God is there. (J. G. 휘티어)
Board 추천글 2020.07.12 風文 R 2549
Board 고사성어 2020.07.12 風文 R 16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