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언 분투기 우리가 표준어로 인정하는 어휘 가운데서는 한때 방언에 속했거나 방언으로 다루던 것들이 들어 있다. 한때는 ‘빈자떡’이 표준이었고 ‘빈대떡’은 방언으로 다루어졌었지만 이제는 그 신세가 서로 뒤바뀌었다. ‘멍게’도 방언이었고 그 표준어는 ‘우렁쉥이’였지만 이제는 누구 하나 그 옛날의 당당했던 표준어를 기억하지 못한다. 애당초 표준어를 정하면서 무리한 결정을 내린 경우도 있었지만, 대개는 그 이후의 사회 변화가 어휘의 지위를 변화시켰다. 제일 큰 사회 변화는 표준어의 주요 조건인 ‘서울말’의 사용 주체였던 토착 서울 사람들의 인구 비율이 급격히 줄어든 것이다. 그리고는 수많은 지방 사람들과 뒤섞여 버렸다. 그렇다고 해서 서울에서 사용되는 말이 ‘방언 범벅’이 된 것은 아니다. 일정한 ‘서울말다움’은 유지하고 있기는 하다. 그러나 그러는 가운데 원래 서울말 ‘가리구이’는 어느덧 ‘갈비구이’가 되어 버렸다. 아무리 서울 중심의 발전을 했다고는 하지만 지방이 항상 변두리 역할만 하지는 않았다. 그래서 서울 사람들의 귀에도 꽤 익은 방언도 생겨났다. 아마 얼마 있으면 그게 방언인지 표준어인지 헛갈리게 될 가능성도 있을 것이다. 가장 최근에 대박을 터뜨린 방언은 단연 제주 방언 ‘올레’일 것이다. 엄밀히 본다면 이 단어는 아직도 방언의 신분이다. 그러나 누구든지 그 어휘의 보편성과 그 의미의 호소력을 부정하지 못할 것이다. 그래서 너도나도 ‘올레길’이라는 말을 당겨쓰고 있다. 또 텔레비전의 연예 프로가 방언을 살려 주기도 한다. 최근에 등장한 ‘꽃할배’가 이끌어낸 인기는 ‘할배’를 방언이라기보다는 ‘할아버지의 애칭’ 정도로 생각하게 만들었다. 어휘의 지위를 변화시키는 사회 변화는 저 높은 곳보다는 우리의 주변에서, 시시해 보이는 일상생활에서 먼저 일어난다. 전문가들이 아닌 보통사람들이 언어 변화의 주력부대라는 인식이 필요하다. ……………………………………………………………………………………………………………… 국민 정서 ‘국민’이라는 말이 들어가면 중요한 뜻이 만들어질 것 같은데 유독 ‘국민 정서’라는 말은 그렇지 못하다. 이 말은 국민의 비합리적인 감정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그릇된 정책을 시행하게 되는 것을 경계하는 말로 쓰인다. 그러나 실제로는 부정을 저지른 기업인들의 사면을 비판하면 국민 정서 때문에 경제 활성화가 잘 안된다고 하며 마치 국민들이 질투가 나서 사면을 반대하는 것처럼 말하는 데 쓰인다. 또 정부가 부담스러워하는 일은 적당히 시간만 끌다가 역시 ‘국민 정서’를 핑계대면서 뭉개기도 한다. 세월호 사건을 보면 이런 면이 나타난다. 야당도 여당의 정책을 공격할 때 명분이 마땅치 않으면 쉽사리 ‘국민 정서’라는 말의 뒤에 숨어버린다. 생소하고 낯선 성 소수자 축제 등에 대해서 아직 ‘국민 정서’가 용납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도 비슷한 현상들이다. 국민 정서는 참으로 복잡하다. 사람의 정서는 환경과 자극에 따라 부단히 변한다. 그러한 정서에 모든 공공 업무를 맞춘다는 것은 정말 말이 안 된다. 더구나 국민이 품는 정서는 딱 한 가지라고 할 수도 없고 복합적이다. 따라서 이러한 것은 ‘정서’가 아니라 ‘의견’으로 받아들여 의사 결정을 하게 해야 한다. 의견으로 받아들여 논의할 생각은 하지 않고 ‘별 의미가 없는 정서’라고 내뱉는 것은 국민의 의견을 모욕하고 빈정거리는 것이다. 더 나아가 국민의 ‘공적인 의견’을 ‘사적인 정서’로 왜곡하는 짓이다. 국민 정서니 떼법이니 하는 말이 쓰이는 문맥은 그렇기 때문에 반국민적이며, 옳지 못한 술수가 있다. 공공 영역에서 옳고 그름을, 책임의 소재를 밝히는 공공 언어는 그 사회적 의미와 용도가 분명해야 한다. ‘국민 정서’라는 말처럼 아무렇게나 필요에 따라 엿가락처럼 임의로 쓰이는 언어는 정치인이나 언론인들이 각별히 삼가야 할 말이다. 김하수 한겨레말글연구소 연구위원
큰 방황은 큰 사람을 낳는다 - 마 데바 와두다 34. 분노 <분노가 일 때 그걸 엉뚱한데 풀거나 억제하지 말라. 분노란 긍정적인 쪽으로 바꿔쓸 수 있는 아름다운 현상이다> 학승이 스승을 찾아 말하기를, <스승님, 제겐 참 처치곤란한 못된 성질이 하나 있는데 어찌해야 할지요?> 스승이 말하기를, <거 재미있는 소릴세. 어디 한번 뵈다오> 학승이 말하기를, <지금 당장은 없습니다. 그러니 지금은 뵈드릴 수가 없군요> 스승이 말하기를, <그럼 그게 있을 때 와서 뵈다오> 학승이 다시 말하기를, <그게 생겨나 있게 되더라도 아마 못 뵈어 드릴 겁니다. 아주 뜻밖에 생겨났다가는 제가 달려오기도 전에 금새 없어져 버릴테니까요> 스승이 다시 말하기를, <그런 거라면 그대의 것이 아니잖은가. 정말 그대 것이라면 언제라도 내게 뵈줄 수 있어야지. 그건 그대가 세상에 나올 때 가지고 나온 게 아니야. 밖에서 주워온 거지. 한즉, 그놈이 또 생겨나거들랑 멀찌감치 달아날 때까지 지팡이로 네 머리통을 막 쳐라 쳐> 앞으로 화가 나거던 한 일곱 바퀴쯤 집 주위를 뺑뺑 돈 다음 나무 밑에 가만히 앉아 그게 어디로 가는가 보라. 분노는 일종의 심적 구도다... 그러므로 그걸 억제한다거나 억누른다거나 남한테 토해내지 말라. 좀 달래버거나, 아니면 베개같은 것을 집어 던지거나, 막 쳐보라. 긴장이 풀릴 때까지. 분노는 일어나는 것. 분노는 아름다운 것. 구름과 구름이 부딪쳐 일어나는 번개 같은 것.
Board 추천글 2020.07.10 風文 R 2655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참 가슴 찡한 이야기 - 황지니 나이팅게일의 기도 제1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군 병참장교가 치명상을 입고 후송되었습니다. 그가 신자임을 안 간호사는 목사를 불러오려고 했지만 그 장교는 한사코 거절을 했습니다. 하는 수 없이 간호사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럼 하나님이 당신의 마음속에 계시도록 제가 열심히 기도 드리죠." 이 말을 들은 장교가 말했습니다. "하지만 당신은 곧 피로와 싫증을 느껴 기도를 그만두게 될 거예요." "아니, 저는 포기하지 않습니다. 저는 한 사람의 마음을 하나님께로 향하게 하기 위해 16년 동안 기도해 왔답니다." "16 년간을? 그렇다면 그 사람은 당신이 사랑하는 남자임에 틀림없겠죠?" "아닙니다. 그분은 제가 결코 본 일이 없는 사람입니다. 나의 어머니는 독실한 백작 부인의 시녀였는데 지금으로부터 16년 전, 백작 부인은 저의 어머니에게 방탕 생활을 하고 있는 자기의 아들을 위한 기도를 부탁했답니다. 저도 그분을 위해 계속 기도했죠. 지난달 백작 부인에게서 온 편지에 의하면 그는 지금 군인이 되었다더군요." 열심히 그녀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장교는 이렇게 묻습니다. "그러면 당신 어머니의 이름이 아베타입니까?" "그렇습니다. 그럼 당신은 내가 16 년 동안 기도했던 찰스 씨군요." 그것은 사실이었습니다. 그는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는 이 간호사로부터 간호를 받도록 이곳으로 자신을 보낸 것은 분명 하나님의 뜻이고 계획이라는 사실을 가슴 깊이 깨달았습니다. 그 후 그는 세례를 받았고 얼마 후 편안한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그의 어머니 또한 큰 위안을 받고 세상을 떠났다고 합니다. 시간과 장소에 의하여 변하지 않는 마음, 그 마음은 자신의 처소이며, 스스로 지옥을 천국을 지옥으로 만들 수 있다. (J. 밀턴)
Board 추천글 2020.07.10 風文 R 2364
작은 이야기 1 - 정채봉, 류시화 엮음 2. 평범한 행복 꽃집 소녀 - 김주동 얼마 전 일이다. 교통 사고로 입원한 친구가 있어 퇴근길에 문병을 가면서 잠시 꽃가게에 들러 꽃 한 다발을 산 적이 있다. 그때 나는 일상 생활에서 흔히 지나쳐 버리기 쉬운 소중한 경험을 하게 되었다. 내가 꽃가게 문을 열고 들어섰을 때 꽃가게 일을 보는 소녀가 무슨 일인지 손님이 들어서는 줄도 모르고 고개를 떨군 채 어깨를 들먹이며 울고 있었다. 나는 그냥 다시 나갈까 하다가 근처에 다른 꽃가게가 있는지, 또 어디에 있는 지 알 수도 없어서 소녀를 불렀다. "아가씨, 나 꽃 좀 사려고 왔는데..." 그러자 소녀는 고개를 들고 손등으로 눈물을 닦으면서 나를 맞이했다. 그때 그 소녀의 얼굴을 본 순간 나는 오랫동안 잠자고 있던 나의 어떤 감정이 한 자락 꿈틀 하고 깨어나는 것을 느꼈다. 소녀가 웃으며 내게 말했다. "손님, 죄송합니다." 울었던 탓에 눈물 젖은 두 뺨을 손등으로 닦아 내자 거기에 해맑은 웃음이, 꽃보다 더 아름다운 웃음이 피어난 것이다. 소녀를 눈물 젖게 하고 어깨를 들먹이면서 울게 한 일이 어떤 일인지는 몰라도 찾아온 손님을 웃음 띤 얼굴로 맞이할 수 있는 그녀의 고마운 마음씨가 내게는 여간 감사한 것이 아니었다. 소녀가, 내가 가리킨 노오란 프리지어꽃 한 다발을 내려 가위로 밑동을 잘라 다듬고 흰 종이로 싸고 있는 모습을 곁에서 지켜보면서 나는 그녀가 사랑하는 사람과 오래 떨어져 있어야 하거나 헤어지게 되어서 울고 있었을까, 아니면 내 경우처럼 가까운 사람이 교통 사고나 병으로 입원을 한 것일까, 하고 생각을 하였다. 소녀가 건네주는 꽃다발을 들고 꽃가게 문을 나서다 말고 나는 이 궁금증을 떨쳐 내지 못하고 기어이 소녀에게 묻고 말았다. "아가씨, 아까는 왜 울었죠?" 그러자 소녀는 잠시 망설이는 듯싶더니 화분들 사이에 걸려 있는 빈 새조롱을 눈으로 가리켰다. "오늘 오후에 저기 살던 십자매 한 쌍이 죽었어요." (한국화장품 선전개발부장)
Board 삶 속 글 2020.07.10 風文 R 1964
愚公移山(우공이산) 愚(어리석을 우) 公(존칭할 공) 移(옮길 이) 山(뫼 산) 열자 탕문(湯問)편의 이야기. 태행산과 왕옥산은 원래 기주의 남쪽, 하양의 북쪽에 있었는데, 산 밑에는 90세가 다 된 우공(愚公)이라는 노인이 살고 있었다. 그는 가로 막은 두 산 때문에 큰 불편을 겪고 있었다. 어느 날, 우공은 가족들을 모아 놓고 산을 깎아 평지로 만들자고 제안했다. 그의 부인은 불가능하다고 하면서 반대했으나 다른 가족들이 모두 찬성했기 때문에 곧 공사에 착수했다. 이를 본 지수라는 사람은 이름 그대로 우직하고 미련한 노인네라고 비웃었다. 그러나 우공은 이렇게 말했다. 내가 죽으면 아들이, 그 아들이 죽으면 또 손자가 있고, 또 그 손자의 아들이 또 있을게 아닌가. 이와 같이 자자손손 일을 계속한다면 이 산을 평지로 만들 수 있을 것이네. 하늘에서 이 말을 들은 천제(天帝)가 우공의 꾸준한 노력과 성의를 가상히 여겨, 산 하나는 삭동 땅에, 다른 하나는 옹남 땅에 옮겨 놓게 했다. 愚公移山 이란 아무리 큰일이라도 꾸준히 노력하면 이루어짐 을 비유한 말이다. …………………………………………………………………………………………………………… [유사어] 마부작침[磨斧作針(鍼)], 수적천석(水適穿石), 적토성산(積土成山). [출전]《列子》〈湯問篇〉 우공이 산을 옮긴다는 뜻으로, 어떤 큰 일이라고 끊임없이 노력하면 반드시 이루어짐의 비유. 춘추 시대의 사상가 열자[列子:이름은 어구(禦寇)]의 문인들이 열자의 철학 사상을 기술한《열자(列子)》〈탕문편(湯問篇)〉에 다음과 같은 우화가 실려 있다. 먼 옛날 태행산(太行山)과 왕옥산(王玉山) 사이의 좁은 땅에 우공(愚公)이라는 90세 노인이 살고 있었다. 그런데 사방 700리에 높이가 만 길이나 되는 두 큰 산이 집 앞뒤를 가로막고 있어 왕래에 장애가 되었다. 그래서 우공은 어느 날, 가족을 모아 놓고 이렇게 물었다. “나는 너희들이 저 두 산을 깎아 없애고, 예주(豫州)와 한수(漢水) 남쪽까지 곧장 길을 내고 싶은데 너희들 생각은 어떠냐?” 모두 찬성했으나 그의 아내만은 무리라며 반대했다. “아니, 늙은 당신의 힘으로 어떻게 저 큰 산을 깎아 없앤단 말예요? 또 파낸 흙은 어디다 버리고?” “발해(渤海)에 갖다 버릴 거요.” 이튿날 아침부터 우공은 세 아들과 손자들을 데리고 돌을 깨고 흙을 파서 삼태기로 발해까지 갖다 버리기 시작했다. 한 번 갔다 돌아오는데 꼬박 1년이 걸렸다. 어느 날 지수라는 사람이 ‘죽을 날이 멀지 않은 노인이 정말 망녕’이라며 비웃자 우공은 태연히 말했다. “내가 죽으면 아들이 하고, 아들은 또 손자를 낳고 손자는 또 아들을… 이렇게 자자손손(子子孫孫) 계속하면 언젠가는 저 두 산이 평평해질 날이 오겠지.” 이 말을 듣고 깜짝 놀란 것은 두 산을 지키는 사신(蛇神)이었다. 산이 없어지면 큰일이라고 생각한 사신은 옥황 상제(玉皇上帝)에게 호소했다. 그러자 우공의 끈기에 감동한 옥황상제는 역신(力神) 과아의 두 아들에게 명하여 각각 두 산을 업어 태행산은 삭동(朔東) 땅에, 왕옥산은 옹남(雍南) 땅에 옮겨 놓게 했다. 그래서 두 산이 있었던 기주(冀州)와 한수(漢水) 남쪽에는 현재 작은 언덕조차 없다고 한다.
Board 고사성어 2020.07.10 風文 R 1896
배제의 용어, '학번' 대학의 입학 연도를 가리키는 ‘학번’이라는 말은 대학 졸업자들에게는 출신 학교의 이름과 함께 하나의 중요한 정체성을 제공한다. 동시에 동문들 사이의 위계질서를 보여 주기도 한다. 오래전에는 쓰이지 않던 말이다. 40여 년 전만 해도 대학에 늦게 진학하는 사람도 많아서 동급생들끼리도 나이 차이를 중요시했다. 그러다 1970년대 말에서 1980년대 초쯤에 널리 번졌다. 누구나 학교에 입학하면 으레 그 햇수가 있기 마련이니만큼 그것을 가리키는 용어가 생기는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그런데 그 용어가 공식적인 신문 보도에도 버젓이 사용되고, 저명인사들의 프로필에도 함께 등장하는 말이 된다면 그 의미와 기능을 한번 곰곰이 되씹어 볼 필요가 있다. 무엇보다 학번이라는 말은 대학 졸업자들에게만 해당되는 용어이다. 그렇기에 그렇지 않은 사람들을 ‘배제’하는 용법을 가지고 있어서 일반 공직자를 설명하는 공식 용어로는 사려 깊지 못한 말이다. 대학을 다니지 않았거나 검정시험 출신자들에게는 개념이 잘 들어맞지도 않는다. 또 학제가 다른 외국에서 자란 사람들에게도 사용하기가 아주 불편하다. 학사편입이나 복학을 한 사람들은 두 개의 학번에 연고가 생긴다. 그리 유용하거나 정확한 개념이 아니다. 물론 학번이라는 말은 대학 졸업자들 사이에서, 특히 같은 학과 출신들끼리 동문의 안부를 주고받을 때는 그런대로 유용한 말이다. 따라서 매우 사적인 용도로만 제한되는 것이 옳다. 마치 누구네 집 몇 번째 자식이냐는 말이 가족이나 친척들 사이에서는 중요한 개념이지만 공식적인 인물 정보에서는 불필요한 요소이듯이, 또 이력서에서 개인 증명사진이 인사 결정 과정에서 오히려 용모에 대한 선입관만 주기 쉽듯이, ‘학번’이라는 용어를 공식 보도나 문서에 사용하는 것은 올바르지 못한 공적인 판단을 불러올 수 있다. 이제는 공적 소통 과정에서 지워 버리는 게 마땅한 사사로운 표현이다. ……………………………………………………………………………………………………………… '둠벙'과 생태계 우리의 표준어 원칙에는 ‘서울말’이라는 조건이 달려 있다. 그러면서도 무엇이 바로 서울말인지 명확한 정의나 해석이 달려 있지 않다. 그러다 보니 우리는 서울말이 아니면 모두 사투리라는 생각을 하게 되기 쉽다. 표준어 사용의 근본 취지가 모든 사용자들의 편의와 언어적 공감대를 위한 것이라는 점에서 본다면 지나치게 서울 사람들에게 특권을 주고 있는 게 사실이다. 그러나 잘 살펴보면 서울말임에도 표준어가 못 된 경우도 있고, 시골말인데도 표준어나 다름없이 사용되는 경우도 있다. 각 지방의 특유한 토산품이나 음식 또는 동식물의 이름 등은 불가피하게 표준어와 사투리의 경계선을 넘어서게 된다. 그런 점에서 본다면 유용한 의미를 가진 방언 어휘들은 너무 주눅 들 필요 없이 당당히 사용할 수도 있는 근거도 마련되어 있어야 하지 않을까 한다. 농촌에 가면 ‘둠벙’이라는 것이 있다. 논밭 근처에다가 물을 모아놓은 우묵한 곳인데 간이 저수지 역할을 하고 있다. 환경을 주제로 하는 영상물을 보면 생태계의 오아시스처럼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한다. 그런데 이런 중요한 사물에 엄밀하게 해당하는 서울말은 찾을 수가 없다. 사전을 보면 ‘둠벙’을 그냥 ‘웅덩이의 방언’이라고만 설명하고 있다. 중심부 아닌 지방, 도시가 아닌 농촌이 가진 역동적인 생태계를 메마르고 협소한 도시의 언어로 표현하자니 어쩔 수 없이 웅덩이라는 맥 빠진 말로 나타내게 되었다. 도시에서도 어린이 생태 교육을 위해서라도 이젠 ‘도시 둠벙’을 만들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드는 판이다. 표준어가 진정 표준이 되려면 풍부한 형태와 의미를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우리의 표준어는 근대화 과정에서 불가피하게 서울 중심의 기준을 가지게 되었지만 더 풍부한 지혜와 감성을 품기 위해서는 방언에 대한 문호개방이 더욱 필요하다. 농촌의 삶이 도시에서보다 더 슬기로울 가능성이 높다. 김하수 한겨레말글연구소 연구위원
큰 방황은 큰 사람을 낳는다 - 마 데바 와두다 33. 거듭나기 <자신이 절대로 옳다고 믿어지는 여하한 상황이라도 자신의 확신을 초월하는 어떤 가능성이 항상 있는 것. 과거의 체험을 벗어나 전혀 새로운 차원으로 뛰어들라> 붓다는 크게 깨달은 뒤 우선 가족들한테 돌아갔다. 가족들은 붓다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 수 있었다. 물론 붓다는 자신이 사랑했던 사람들을 모두 기억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아내 야소다라는 단단히 화가 나 있엇다. 당연한 일이었다. 어느 날 홀연히 남편이 사라졌던 것이었다. 간다는 얘기 한 마디 없이... 그녀의 상처는 깊고 아픈 것이었다. 남편이 자신을 떠났기 때문만이 아니었다. 그건 사실 아무 문제도 안 되었다. 그녀는 남편을 매우 사랑했었다. 남편이 내적 탐구를 위해 산 속으로 들어가고 싶다면 기꺼이 보내줄 수 이는 만큼 사랑했었다. 문제는 남편이 자신에게 한 마디 말도 없이 떠난 데 있었다. 남편이 자신을 믿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그건 그녀에게 큰 상처를 주었다. 그녀는 보통 여인이 아니었다. 그렇지만 남편이 자신에게 아무 말도 없이 떠났다는 것은 그녀에게 아픈 상처를 입혔다. "어째서 남편이 날 믿지 않았을까?" 남편이 떠난 뒤 그녀는 이런 생각 때문에 쓰리고 아파서 고통스러웠었다. 남편이 돌아오자 그녀는 분노했다. 돌아온 남편에게 격분한 그녀가 외쳤다. <왜 제게 애기하지 않았습니까? 얘길 했어도 전 당신을 가로막지 않았을 것입니다. 전 당신을 잘 알지요. 아주 잘 알지요. 우린 여러 해를 함께 살았어요. 제가 당신 일을 방해라도 했던가요.? 전 당신을 깊이 사랑했어요. 제 사랑은 무한했어요... 제가 당신의 공부에 장애가 되진 않았을 거예요. 그런데 왜 말 한마디 없이 떠나셨어요?> 그녀는 묻고 또 물었다. 그녀는 분노를 좀체 가라앉힐 수 없었다. 이윽고 그녀가 아들을 불렀다. 붓다는 아들이 태어난 지 꼭 한 달만에 떠났었다. 그 아들이 벌써 열두 살이 되어 있었다. 아들이 물었다. <아버지가 어디 계셔요? 어느 분이 아버지세요?> 어머니가 아들에게 말했다. <라훌, 이 분이 아버님이시다. 아버지는 비겁하게 도망쳤었지. 바로 이분이 널 낳으셨다. 어서 네 재산을 달라고 하거라!> 그녀는 비웃고 있엇다. 붓다는 이제 거지였기 때문이었다. 그에겐 아무것도 가진 게 없었다. 그러자 붓다는 어떻게 했는가? 그는 아들을 제자로 삼았다. 그는 라훌에게 동냥 바가지를 주며 말했다. <내가 돌아온 것은 이 때문이다. 나는 찾았느니, 그대도 찾기를 바란다. 그리고 야소다라, 이제 그대도 그만 화를 그치시오. 이젠 아무 소용 없는 일. 사내 때문에 화낼 일이 없을 것이오. 나는 죽어 거듭났느니. 그대의 분노를 충분히 이해하오. 허나 그대를 떠난 그 사내는 이미 세상에 있지 아니하오. 나를 다시 보시오!> 야소다라의 두 눈엔 눈물이 가득하였다. 그녀는 보았고... 알았다. 그녀의 분노는 어느 새 씻은 듯이 걷혀져 있었다. 그녀는 붓다의 발 밑에 무릎 끓었다.
Board 추천글 2020.07.09 風文 R 2219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참 가슴 찡한 이야기 - 황지니 한 걸음 진보하기 위해서 1992년 8월 25일 낮 12시 30분, 서울대학 병원에서는 여느 때와는 다른 감동의 집도가 진행되고 있었습니다. 입을 굳게 다물고 눈물을 삼키며 비장한 각오로 집도하고 있는 교수들은 고인의 뜻에 따라 안구를 떼내어 다른 사람에게 이식하고, 암세포가 퍼진 것으로 밝혀진 간, 폐, 심장 등의 장기들은 병리학 교실의 연구자료로 쓰기 위하여 조심스럽게 다루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의과대학에 시체를 기증키로 했으니 불의의 사망시 대학병원쪽에 연락 바람'이라는 내용의 유언서를 신분증과 함께 가지고 다닌 서울대 이광호 교수는 이 날 오전 10시 급성 신장암으로 운명했습니다. 그래서 고인의 뜻에 따라, 장남이 자리한 가운데, 후학들을 위하여 몸을 바치고 있는 살신성의의 순간이었습니다. 그는 평생을 해부학 발전에 몸바쳐 오다 최근 의과대학 해부실험용 시체의 공급이 급격히 줄어들어 실습에 차질을 빚게 되자 지난 1월 서울 지역 9개 의과대학 해부학과 교수 34 명과 함께 시신을 해부용으로 내놓기로 결의했습니다. 그로 인한 이 날의 숭고한 집도는 허준이 '동의보감'에서 의술 발전을 위해 남긴 스승의 시신을 눈물과 함께 해부했던 것과 똑같이 우리에게 참 삶의 고귀한 가치를 전해 주고 있습니다. "아버지로부터 기증 의사를 듣고 사체를 손상시키는 것은 우리의 전통에 어긋날 뿐 아니라, 자식으로서 아버지의 생전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싶은 욕심이 들어 처음에는 반대했으나 평생을 바쳐온 의학계의 발전에 죽어서까지 이바지하겠다는 아버지의 뜻을 거스를 수 없었습니다." 막내따님의 너무나도 소박하고 애틋한 이야기가 마치 가까운 이웃에서 들리는 듯합니다만, 죽어서까지 남을 위하고, 죽어서까지 할 일을 하는 이들의 용기와 귀한 생각을 우리는 얼마나 닮아가고 있을까요. 어쩌면 우리는 이분들에게 영원히 갚기 힘든 빚을 지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Board 추천글 2020.07.09 風文 R 205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