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 방황은 큰 사람을 낳는다 - 마 데바 와두다 41. 실패 <그대 혼자 자기 고집대로 하면 전체와 분리되어 실패하리니, 성공은 신 속에 더불어 있는 것> 내 속안의 너에게 말한다. 왜 그다지도 수선스러운지? 우린 알지, 새들과 짐승들과 개미들을 사랑하는 한 영혼이 있음을 어머니 자궁 속에서 너에게 빛을 주셨을 하나의 영혼을. 이제 천하의 고아가 되어 떠도는 게 당연한 일 아닐까? 아닐까? 사실 넌 자기 자신을 외면하고 혼자 암흑 속으로 들어갔으니. 거기서 얽히고설켜 알던 것을 까맣게 잊어버렸으니. 네가 하는 일마다 실패하는, 수상쩍은 까닭이 바로 그것 아닌가. 그대는 아는가? 그대가 하는 일마다 실패하고 있지 않은가? 지금도 그 핵심을 못보는가? 그대는 아마 생각할 것이다. 그렇게 한 적이 전혀 없다고. 그러나 설혹 그대가 달리 한다 하더라도 또 실패할 것이다. 그러면 그대는 아마 생각할 것이다. 아직 완숙하지 못해서라고. 그러나 가령 그대가 숙달된다 하더라도 또 실패할 것이다. "세상이 날 거부하는가" 혹은 "아~ 난 사람들의 질투에 희생되누나" 하고. 그대는 자시의 실패 원인을 계속 찾고 있으나 실패의 진짜 배경을 결코 알아내지 못할 것이다. 인도의 신비가 까비르는, 실패란 그대가 신을 잃었음을 뜻한다고 말한다. 그게 바로 실패의 근본 원인이다. 신 속에 더불어 있음, 거기에 성공이 있다. 신 속에 더불어 있음. 그대가 비롯하여 되돌아가는 우주 혼, 도를 앎.
Board 추천글 2020.07.20 風文 R 2952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참 가슴 찡한 이야기 - 황지니 제주목사 이시방 달면 삼키고 쓰면 뱉고 은의도 저버리고 세상 만났다고 나불대는 얄팍한 세속인심은 예나 지금이나 가실 날이 없다. 더구나 저에게 조금이라도 불리해지면, “나는 그를 모르노라.” 너무한 얘기다. 조선 왕조에서 폐출되어 임금 자리를 쫓겨난 인물로 광해군이 있다. 그는 임진왜란 때 신세도 졌고, 또 역대로 평화롭게 사귀어 온 명나라의 세력이 날로 기울어가고, 만주족 청의 세력은 나날이 강성해지는 틈바구니에서, 등거리 양면외교로 고식적이나마 잘 버티어 온 왕조의 주인공이다. 그런 그가 사생활에는 엉망이어서 하필이면 선왕의 후궁인 개시를 사랑하여 수령방백이 그녀의 손에 좌우되고, 동기간인 임해군과 영창대군을 살해하고 심지어는 인목대비를 서궁에 유폐하여 아무리 계모라도 폐모하기에 이르자, 뜻있는 이들이 군사를 일으켜 능양군을 세우고 왕위에서 몰아내니 이른바 인조반정이다. 이렇게 왕위에서 폐출되었어도 호칭에는 군을 붙였는데, 세조에게 밀려난 단종도 복위되기 전 노산군으로 불리었고, 연산군은 나면서부터 세자라 폐위와 함께 주어진 칭호이었으며 광해군은 본래의 군호가 그것이었다. 이렇게 군으로 부르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아무리 실덕하여 왕노릇한 것도 없거나, 세자로 있던 것이 아니라 해도 선왕의 아들인 것만은 어쩔 수 없는 사실인지라, 왕자로서의 예우만은 지키는 체통이었던 것이다. 그 분들의 최후도 노산군 단종은 목을 졸려 비명에 돌아간 분이니까 말할 것도 없고, 연산군은 폐위 강봉되어 강화 교동으로 귀양갔다가 오래지 않아 더위에 곽란으로 급서하였다 하는데, 향년이 33세이니 아무래도 타살의 혐의가 짙다. 아무튼 그의 묘는 서울 도봉구 쌍문동에 있는데 묘역을 꾸민 석물이랑 그래도 왕자의 예모를 갖추고 있다. 광해군은 선조 8년(1575년)에 태어나 1608년부터 15년간 왕위에 있다가 밀려나 인조 19년(1641년)까지 생존했으니 그런대로 천수를 다한 것이라 하겠다. 그 사이에도 공신들 사이에서는 슬쩍 해치워버리자는 공론도 있었으나 모진 목숨을 부지하여 처음에는 강화도에서 귀양살이 하다가 다시 제주도로 유배되었는데, 그야말로 볼 일 다 본 터에 대접이 온전할 까닭이 없다. 겹겹이 막히어 외부세계와 완전히 차단된 공간에서 들여 보내주는 음식을 받아먹는 것이 고작이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전에 없이 공궤가 깨끗하고 좋아져서 폐주는 이런 말을 하였다. “이렇게 처우가 달라졌을 제는, 아마도 전일 나에게 은혜를 입은 사람이 제주목사로 왔는가 보이.” 그랬더니 따라와 모시고 지내는 늙은 궁녀가 그런다. “그렇진 않을 것이옵니다.” “그것을 그대가 어찌 아노?” “생각해 보십시오. 마마께서 재위하시는 동안 신하들 승진이나 보직을 모두 궁인들의 말이나 듣고 처리하셨사온대, 그렇게 뒷구멍으로 손을 써서 출세한 사람이라면, 제 밑이구려서라도 일부러 마마께 박하게 굴어, 전혀 그렇지 않았던 양으로 꾸밀 것이지, 그런 용렬한 인간들이 어떻게 감히 마마를 특별히 정성껏 받들어 모시겠습니까? 아마 옳은 가문에서 바로 배운 공자가 도임해 왔을 것이옵니다.” 뒤에 차차 알아보니, 새로 취임한 목사는 이시방으로 반정공신 중에도 원훈인 이귀의 둘째 아들이요, 자신도 형 시백과 함께 정사 이등공신에 오른 사람이다. 말하자면 광해군을 내어 쫓은 가문이요, 장본인이다. 그가 제주목사로 와 보니 광해군이 거기 안치돼 있어 주방에다 단단히 이른 것이다. “비록 실수는 했어도 왕자요. 십여 년이나 임금으로 받들던 분이다. 추호라도 소홀함이 있어서는 안될 것이니라.” 그러다가 인조 19년(1641년) 광해군이 세상을 떠났다. 그러나 바닷길이 하도 멀어 일일이 중앙에 품해 지시를 기다릴 길이 없다. 곧장 섬 안의 관원들을 데리고 소복하고 들어가 친히 수시걷고 염습까지 말끔히 하여 조금도 소홀함이 없었다. 아마 망인도 영혼이 있었더면 그랬을 것이다. “나는 못된 놈의 꼬임에 빠져 어머니도 폐했는데, 이미 왕의 몸도 아닌 나를...” 이 사실이 알려지자 대간은, 무슨 일이고 트집잡아 따지는 관원인지라, 멋대로 처사한 죄를 다스려야 한다고 주장하였으나, 모두들 잘한 일이라고 공론이 돌아서 무사하였다. 그는 뒤에 벼슬이 호조판서에까지 올랐고 시호를 충정이라 하였으며 자손도 크게 번창하였다. 그가 수습한 광해군의 묘소는 현재 경기도 남양주군 진건면 송릉리에 부인과 함께 모셔져 있다.
Board 추천글 2020.07.20 風文 R 3195
작은 이야기 1 - 정채봉, 류시화 엮음 3 시련을 딛고 조약돌 하나라도 - 임옥숙 저는 햇수로 7년째 투병 생활중인 스물다섯의 여자입니다. 뭐라고 마땅히 이름붙일 것일 없어서 '투병 생활'이라고 억지로 끌어다 붙이기는 했지만 그것은 사치스런 이름이고, 사실 제 몸에서 정상인 신체 기관은 눈과 귀뿐입니다. 사고 때 뇌신경을 건드린 까닭에 언어 장애가 와서 의사 표시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그 밖에도 여러 가지 신체적 이상이 찾아왔습니다. 사고 직후에는 안면 근육은 물론 전신이 마비되어 약 한 달 간 눈을 못 뜨고 누워만 있었습니다. 의식도 없는데 두 팔로 허공을 부여잡고 몸이 자꾸 치솟아 간호원이 두 다리를 꽉 누르고 있었지요. 언니의 등에 업혀서 퇴원을 했으나 저를 간호할 문제였습니다. 저는 식물 인간을 간신히 면했을 뿐 걷지도 말하지도 못했으니, 누군가 시중을 들어 줘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부모님은 장사하시느라, 언니는 회사에, 동생은 학교에 다니느라 제 곁에서 간호할 사람이 없었습니다. 하루 이틀 사이에 나을 병이 아니니 그것이 문제였지요. 궁여지책으로 분가해 사는 올케가 연년생의 젖먹이 조카 둘을 데리고 출퇴근을 하면서 저의 병 수발을 했습니다. 약 1년 후 걸음이 갓난아기 걸음마 정도가 되어 저 혼자 집을 지키게 되었을 때, 저는 사람들이 무서워서 나만의 성을 두텁게 쌓고 그 안으로만 숨어 들어갔습니다. 오랫동안 가족들 외의 남들하고는 접촉이 없는 밀폐된 생활을 해온 탓이기도 했지만, 그보다 제겐 여러 사람들과 쉬이 어울릴 수 없는 신체적인 결함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저는 매우 세심하고 상처 받기 쉬운 성격이어서 더 더욱 그러했지요. 사람들의 경멸하는 눈초리가 두려워서 저 스스로 달팽이처럼 내부의 세계로만 침잠해 갔습니다. 그리고 그때부터 저는 죽음을 생각했지요. 가족들이 자신의 생활 무대로 떠나 버린 텅빈 방에 남아서 저는 온종일 죽음만을 생각했습니다. 죽음의 천사-그렇습니다. 죽음을 천사에 비유하듯이, 그때의 내겐 죽음이 천사처럼 여겼습니다. 발전도 희망도 없는 이 삶에서 탈출할 길은 그것뿐이라고 생각했지요. 해질녘 강둑을 방황하다가 터덜터덜 집으로 맥없는 발길을 돌리기도 했고, 남의 눈에 띄어 슬그머니 도망치듯 집으로 돌아온 것 또한 몇 번인지 헤아릴 수가 없었습니다. 수없이 죽음의 시도를 꾀했으나 실패한 뒤의 어느 날 밤 저는 짤막한 내용의 유서를 남기고는 몰래 집을 나갔습니다. <먼저 가는 불효 자식을 부디 용서해 주세요. 이것이 저의 마지막 효도입니다.> 차가운 빗방울이 이마를 때리고 지나갔습니다. 정신없이 걷던 발길을 멈추고 칠흙같이 어두운 강변에 혼자 서 있었습니다. 강변은 무덤같이 조용했습니다. 마주 보이는 강 건너 마을의 아파트 창문마다에서 흘러나오는 불빛만이 조용히 강을 건너오고 있었을 뿐... 자갈을 밟는 내 발자국 소리가 어둠 속을 공허하게 울리고는 사라져 갔습니다. 발 밑으로 찰랑거리는 물결이 지나갈 때, 저는 하늘에 무수히 박혀 꽃같이 빛나는 별들을 우러러보며 마지막 기도를 했지요. "하느님, 이 가여운 영혼을 받아 주세요." 이상한 일이었습니다. 기도를 하고 나니 마음이 아주 편안해졌습니다. 동시에 죽는다는 일도 별 것 아니구나 하는 생각이, 곧 이어서 이대로 죽기는 너무나 허망하고 억울하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습니다. 아무 쓸모 없는 사람일망정 그래도 만물의 영장이라는 인간으로 태어나서 이렇게 허망하게 죽을 수는 없지 않느냐고 자문자답했습니다. 그래, 좀더 살다가 죽자. 좀더 살다가 "그동안 열심히 살다 이제 하느님께로 돌아갑니다." 하고 떳떳이 말할 수 있을 때까지 열심히 살아 보자! 그때부터 두 평 남짓한 셋방에서 지겨운 병마와의 전투가 시작되었습니다. 기어코 승리하고 말리라고 전 결심했습니다. 인간의 의지는 무한정하며 불가사의한 것이니까요. 사람의 잠재된 능력이란 개발하기에 따라 큰 힘을 발휘한다고 하더군요. 죽음이란 단순히 육체의 소멸만을 가져오는 것이 아니라는 것도 그날 깨달았습니다. 모든 사랑하는 것들과의 이별... 그래서 죽음이 슬프다는 것도 그날 알았지요. 집에서는 한바탕 난리가 났었으나, 일단 결심한 바가 있는 터여서 저는 태연했고 침묵으로 모든 답변을 대신했습니다. 그리고 그날 이후로 다시는 죽음을 생각하지 않고 삶을 생각하기 시작했어요. 남에게는 있고 내게는 없는 것을 생각하기 전에, 남이 못 갖춘 것을 나는 갖고 있다고 생각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를테면 맹인에게는 없는 빛, 나는 그 빛의 충만함 속에서 살고 있다, 신체 중 일부가 없어진 사람이나 신체 내부에서 쉼 없이 솟구치는 고통으로 신음하는 사람들보다 나는 행복하다, 그렇게 저는 생각하기 시작했습니다. 고아에게는 없는 부모가 있으니 행복하고, 경련하는 턱을 베개에 얹고서 왼손으로 20초에 한 자씩이나마 하고 싶은 이야기를 이렇게 쓸 수 있으니 그 또한 행복하지 않은가! 그렇게 생각한 것이지요. 행복의 원리는 간단하다. 자신의 욕망을 줄이면 된다. 냇가의 조약돌이 쓸데 없다고 전부 걷어 버리면 그 냇물은 노래를 잃는다... 인생에서 고난과 시련의 돌을 제거하면 환희와 승리의 노래가 존재할 수 있을까요? 저는 믿습니다. 저도 반드시 쓸모가 있으리라고. 조약돌 하나라도 하느님께서는 결코 쓸모 없이 창조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런데 하물며 사람에게랴! (제2회 샘터 수기 당선작)
Board 삶 속 글 2020.07.20 風文 R 2494
말의 토착화 아주 오래전 이야기지만, 한때 ‘양담배’가 문제된 적이 있었다. 전매제품인 국산 담배 소비를 방해하는 불법 상품이었다. 주로 미군 부대에서 흘러나왔다. 전문 단속반이 있었고, 다방 같은 데서 몰래 단골한테만 팔기도 했다. 이름은 서양에서 왔다는 ‘양-’이라는 접두사를 붙이고 있었지만 사실상 모두 미제 담배였다. 미국은 곧 서양의 상징이었다. 그런데 요즘은 가게에서 합법적으로 외국 담배들을 판다. 그것도 미국 것만이 아니라 다양하다. 그러면서 어느새 ‘양담배’라는 말을 듣기 어려워졌다. 자유스러워지면서 동시에 그 이름을 잃어버린 것이다. 담배 종류를 일컫는 말도 달라졌다. 미국 담배, 일본 담배, 독일 담배처럼 생산한 나라를 일컫지 않고 구체적인 상표를 말하게 되었다. 제품의 국적보다 개별화된 상호와 상품명이 더 중요해진 것이다. ‘양-’이라는 접두사가 사실상 무의미해진 말도 대단히 많다. ‘양복, 양파, 양말, 양옥, 양배추, 양철’ 등의 어휘도 이 이상 서양에서 왔다는 표지가 무의미해졌다. 마치 우리 토산품인 양 수입품은 보기 어렵고 국내산이 자연스럽게 잘 소비된다. 실물이 토착화되면서 말도 토착화되어 버렸다. 원래 의미가 남아 있는 ‘양’자 돌림은 ‘양주’ 정도가 아닌가 한다. 그러나 양주의 의미도 이미 서양 술이라는 의미가 아니다. 서양의 ‘와인, 보드카, 코냑’ 등이 아닌 위스키를 주로 가리킨다. 그만큼 의미의 폭이 좁아져버렸다. 그러면서 우리의 의식 속에서는 점점 ‘서양’이라는 거대 관념이 상품 세계 속에서는 점점 약해지고 있다. ‘서양 세계’와 ‘우리 세계’가 동질화되고 있는 것 같다. 다시 말한다면 실체는 지구화되고 있고, 기호는 토착화되고 있는 것이다. 세계화라는 물결에 놀라 외국어가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진정한 세계화는 세계가 다양한 문물을 공유하는 것이다. 그 문물을 자유롭게 우리 것으로 만드는 역할은 우리의 언어가 담당해야 할 일이다. ……………………………………………………………………………………………………………… 국가와 교과서 새삼스레 교과서, 그것도 국정교과서 문제를 생각해볼 기회가 생겼다. 교육을 어떻게 할 것인가 하는 문제보다 교과서를 누가 편찬하느냐의 문제가 일차적 사안이 된 것이 참 안타깝기 짝이 없다. 우선순위가 뒤바뀐 것 같은 느낌이다. 국가가 역사교과서를 편찬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대통령이 직접 집필할 상황은 아닌 것 같고, 그렇다고 장관이 직접 팔을 걷어붙일 일도 아니다. 결국은 전공자들의 몫이 될 수밖에 없다. 다시 말해서 국가가 한다는 일들은 구체적으로 보면 결국은 실무자나 전문가들의 일이다. 단지 ‘국가의 이름으로’ 낼 뿐이다. 국가의 이름을 사용하게 되면 국가기관이나 정권, 정파가 개입할 기회가 많아진다. 그렇기 때문에 관료체제나 정치세력들은 국가의 이름을 사용하면서 자신들이 원하는 내용을 담으려 할 것이다. 민족이나 국민의 이름을 이용해도 되지만 그것은 좀 부담스러운 점이 많다. 국가라는 존재를 내밀어야 하루하루 살아가는 보통 국민들은 쉽게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자고로 역사는 국가에 대해 할 말이 많지만 국가는 역사에 대해서 사실 할 말이 별로 없다. 그렇기에 국가가 역사에 대해 무언가 말해야 한다고 외치는 것은 특정 정치세력이 무언가 자신들의 말을 역사에 끼워 넣으려 한다는 의심을 사기 쉽다. 더구나 역사 문제에 대해 꺼림칙한 면이 많은 정권일수록 이런 일에는 자제할 필요가 있다. 자칫 역사에 대한 신뢰가 흔들릴 수 있기 때문이다. 차라리 이참에 모든 사람이 ‘국가’의 참뜻을 되돌아볼 기회를 가지는 것도 의미있는 일이다. 국가는 매우 추상적인 관념이다. 국가가 구체적인 실체를 가지려면 권력을 쥔 집단이 있어야 한다. 바로 그들이 국가의 이름으로 자신들의 견해를 ‘국민’들 앞에서 관철해 나가려고 하는 것이다. 국민이 진정 국가의 주인이 되려면 부단히 목소리를 내는 길밖에 없다. 침묵하면 체념으로 받아들여진다. 김하수 한겨레말글연구소 연구위원
왜 벌써 절망합니까 - 정문술 4. 다르게 끈질기게 파고들어라 - 시추 경영 다르게 생각해야 '물건'이 보인다 꾸준히 생각하고 고민을 집중하는 것에도 물론 노하우가 있다. 무조건 애탈캐달 매달려만 있다고 문득 영감이 떨어져주는 것은 아니다. 어느 정도의 유연성도 필요하고 의식적인 환기도 필요하다. 문제의 핵심을 벗어나지만 말되, 사면팔방을 우회하면서 발상의 전환을 꾀해야 할 때도 있는 것이다. 정밀도를 요하는 기술분야에서는 오차율이 가장 큰 적이다. 미래산업의 주력제품인 '메모리 테스터 핸들러'라는 장비는 완성된 반도체를 검사해서 불량품을 골라내고 나머지는 등급별로 분류하는 일을 한다. 이 핸들러를 만드는 데에는 이만여 개의 정밀한 부품이 필요하다. 그만큼 복잡하다는 얘기다. 미래산업은 백지의 상태에서 이 장비를 국산화했다. 난관이 많았음은 물론이다. 어려움을 해결할 때마다 우리는 항상 흡사한 과정을 반복했다. 죽어라고 고민하고 실험한다. 그래도 방법이 안나오면 실망한다. 그러다가 누군가로부터 획기적인 발상이 튀어나온다. 고생이 충분히 무르익지 않으면 아이디어가 생겨나지 않는다. 물론 그 모든 고생들은 상상력을 가진 소수의 머리를 빌려 결실을 맺는다. '무인 웨이퍼 검사장비'라는 것을 개발하려다 처참히 실패하고 빚더미에 올라앉았을 때, 우리는 축적된 기술을 다시 핸들러 개발에 도전했다. 그런 반도체란 워낙에 작고 예민한 물건이라 다루기가 여간 까다로운 것이 아니다. 여차하면 핸들링은커녕 망가뜨리기 십상이다. 조심하자니 느리고, 서두르자니 위험했다. 엔지니어들이 아무리 머리를 맞대고 궁리해보아도 해결책이 나오지 않았다. 차라리 포기하는 편이 낫겠다고 모두들 수군거렸다. 그러나 그들과 나는 입장이 달랐다. 그것마저 포기하면 내겐 죽는 길밖에 남아 있지 않았다. 나중에 다시 이야기할 기회가 있겠지만 당시의 내 상황이 꼭 그랬다. 내가 아무리 문외한이라고 하더라도 절박성은 누구 못지 않았다. 당연히 내 머릿속에는 온통 그 생각뿐이었다. 마침내 내게 기가 막힌 생각이 떠올랐다. 탄창이었다. 여러 개의 반도체를 한꺼번에 정돈시켜 검사소켓에 정확하게 접속시킬 수 잇는 보조장치만 있다면 문제는 간단했다. 정밀할뿐더러 빠르지 않겠는가. 직렬에서 병렬과 발상을 전환하니 드디어 길이 보였다. 한국식 16병렬, 32병렬, 64병렬 테스트 핸들러는 이렇게 시작되었던 것이다. PCB드릴링머신을 개발할 때도 비슷한 일이 있었다. 전자부품용 회로가판에 필요한 수많은 구멍들을 자동으로 뚫어주는 장비였다. 당연히 회로도에 그려진 수많은 구멍들의 좌표를 정확하고 빠르게 기계에 입력시켜줘야 한다. 보통은 회로도 입력을 위해 초정밀카메라를 썼다. 그런데 광각에 따른 공차가 많이 발생하는 것이 문제였다. 렌즈와 수직에 위치한 구멍이라면 별 문제가 없겠지만, 렌즈의 초점으로부터 멀어지면 멀어질수록 공차가 심해졌다. 엔지니어들은 그 문제 때문에 골머리를 앓고 있었다. 나 역시 잠자고 있을 때말고는 항상 그 문제만 생각했다. 또한 끊임없이 사고의 방향을 바꿔보려고 애를 썼다. 카메라를 여러 대 사용할 수만 있다면 문제는 간단했다. 또한 끊임없이 사고의 방향을 바꿔보려고 애를 썼다. 그러나 몇천만 원짜리 장비 한 대를 위해 여러 대의 비싼 카메라를 낭비할 수는 없었다. 그렇다면 카메라 한 대로 여러 대의 효과를 내 수 있는 방법을 연구해야 했다. 해답은 스캐닝이었다. 기판이 움직이든, 카메라가 움직이든, 아무튼 어느 한쪽이 움직이면서 여러 장의 근접사진을 찍으면 되지 않겠는가. 신의 공평한 것은, 이러한 획기적인 발상도 죽어라고 고민하고 실험하는 과정이 없으면 결코 나와주지 않는다는 것이다. 획기적인 발상이 먼저 있다고 해도 그대로 현실에 적용하면 항상 예상치 못했던 변수가 튀어나와 실패하게 마련이다. 그러나 현실적인 변수들을 거의 모두 경험하고 제어할 수 있는 상태에서 획기적인 발상이 나와준다면 성공은 시간문제가 된다. 이러한 일련의 경험들이 나를 '기술학교 교장선생'이 되게 했다. 모두가 힘을 합쳐서 무엇이든 열심히 찾아 나가면, 언젠가는 누군가의 머릿속에서 틀림없이 '물건'이 튀어나와 준다는 사실을 깨달았던 것이다. 이 얼마나 신나고 재미있는 놀이인가. 고생이 충분히 무르익지 않으며 아이디어가 생겨나지 않는다. 물론 그 모든 고생들은 상상력을 가진 소수의 머리를 빌려 결실을 맺는다. 모두가 힘을 합쳐서 무엇이든 열심히 찾아 나가면, 언젠가는 누군가의 머릿속에서 틀림없이 '물건'이 튀어나오 준다는 사실을 깨달았던 것이다. 이 얼마나 신나고 재미있는 놀이인가.
Board 말글 2020.07.19 風文 R 333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