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망인'이란 말 남성과 여성의 관계가 옛날보다는 꽤 평등해진 것 같으면서도 한편으로는 ‘아직’이라고 생각되는 부분이 여전히 눈에 띈다. 우리가 부지불식간에 쓰는 어휘 속에도 배타적인 성적 구별을 노리는 뜻이 여기저기 도사리고 있기 때문이다. 남편이 먼저 죽어 홀로 남은 여성을 우리는 ‘미망인’이라고 부른다. 속되게 표현하는 과부니 과수댁이니 하는 말보다 매우 세련되고 다듬어진 것 같지만 들여다보면 ‘아직 죽지 않은 사람’이라는 섬뜩한 의미가 담겨 있다. 그 뜻을 염두에 둔다면 가까운 사람들한테 쉽게 쓸 수 있는 단어라는 생각이 안 든다. 원래 이 말은 1인칭을 나타내는 말이었다. 남편을 여읜 여성이 ‘자기 스스로를’ 가리키는 말이었다. 따라서 이 말은 남편을 잃은 여성이 남편을 어서 따라가고 싶다는 매우 감상적인 느낌을 표현하는 말이었다. 이것이 요즘은 별생각 없이 2인칭, 3인칭으로 쓰이고 있다.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가당치 않은 용법이다. 결론을 좀 급하게 말한다면 요즘은 배우자를 잃었을 때 받아들이게 되는 정신적인 아픔과 마음의 상처를 그리 극적으로 표현할 필요는 없지 않은가 하는 생각이다. 그 단어가 나타난 이삼천년 전의 중국에서는 배우자를 잃은 여성의 삶이란 정말 하늘이 무너진 것보다 더한 충격이었겠지만 말이다. 이제는 일정한 애도가 끝나면 담담하게 일상으로 복귀하는 것이 더 상식적이고 바람직한 태도가 아니겠는가? 애도 기간에 홀로된 배우자를 굳이 거명해야 한다면 “돌아가신 고 아무개의 부인 누구누구께서 …” 하는 식으로 풀어 말하면 오히려 더 자연스러울 것 같다. 그렇게 하면 반대로 아내가 먼저 세상을 뜬 경우에 홀로된 남편을 가리키기도 편하지 않을까 한다. 양성평등이라는 것은 마음만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 제도의 개혁도 필요하고, 나아가 나도 모르게 내 마음에 편견과 고정관념을 심어주는 말과의 투쟁도 필수적이다. 김하수 한겨레말글연구소 연구위원·전 연세대 교수
큰 방황은 큰 사람을 낳는다 - 마 데바 와두다 46. 찾고, 구하고, 묻다 <심상치 않은 상태에 있구나! 어느 순간 참으로 사랑하고, 기뻐 웃고, 살아 있게될지도 모르네. 뜻밖에 신을 발견할지도 모르네> 시인 타고르의 아름다운 한 이야기. 나는 수많은 생에서 신을 찾았다. 마침내 나는 신을 보았는데... 아득히 먼 곳에 신이 있어서... 나는 신에게로 달려갔다... 그러나 내가 가까이 가면 신은 또 그만큼 더 멀어져 갔다. 얼마나 그랬을까. 마침내 나는 한 문 앞에 이르렀다. 그 문에는 이렇게 씌여 있었다. "신이 사는 집" 나는 난생 처음으로 전율되어 중심이 흔들리고 떨렸다. 나는 계단을 올라가 문을 두드렸다. 그러자 돌연 빛이 번쩍하고 터졌다. 아 그때 나는 보았다. 만약에 내가 문을 두드릴 때 신이 문을 열어 준다면 그 후에 무슨 일이 일어날것인가? 그러면 분명 모든 게 다 끝장 난다. 나의 여행, 순례, 모험, 철학, 시. 아모든 게 다 끝장 난다! 그건 자살일 것이다! 나는 재빨리 신발을 벗어 들었다. 계단을 도로 내려갈 때 발소리가 나지 않도록. 그리곤 다리야 나 살려라 하며 내닫기 시작했다. 나는 결코 뒤돌아보지 않았다. 그때부터 나는 수없이 긴 세월을 달리고 또 달리곤 하였다. 나는 지금 신이 있는 곳을 알면서도 여전히 신을 찾고 있다. 신이 있는 곳을 피해다니면서 신을 찾고 있다. 신이 없는 곳으로만. 아 나는 신의 집을 피해 다녀야한다... 날 죽일 테니까. 나는 아주 잘 안다. 어쩌다 그 집으로 들어가게 되는 날이면 모든 게 끝장이라는 것을.
Board 추천글 2021.09.08 風文 R 1296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참 가슴 찡한 이야기 - 황지니 월계관을 선생님께 무선전신을 발명한 마르코니(Marconi, Guglielmo, 1874-1937)에게는 다음과 같은 감동적인 실화가 전해져 옵니다. 이탈리아의 볼로냐에서 태어난 마르코니는 어려서부터 기계를 만지고 분해한 뒤 다시 조립하는 일을 즐겼습니다. 그래서 그가 열두살 때에 벌써 유명한 과학자인 어거스트 리기 교수의 지도를 받게 되었습니다. 어느 날, 마르코니가 리기 교수의 실험실에 들어가 보니 책상 위에 이상한 기계가 놓여 있었습니다. 그는 호기심이 일어 그 기계를 유심히 살피고 있는데 리기 교수가 들어와 이 광경을 보고 말했습니다. "마르코니, 재미있는 것을 보여 주지." 리기 교수가 이렇게 말하며 기계의 스위치를 돌리자 찌직하는 소리를 내며 전기의 불꽃이 두 개의 진공관 사이를 달려갔습니다. "이것이 바로 위대한 과학자 헬쯔가 발견한 전파야. 전기가 공중을 뛰는 원리지." 리기 교수의 설명을 들은 마르코니는 전파의 원리에 대한 놀라움으로 인해서 심장이 빠르게 고동치는 것을 느낄 정도였습니다. '그렇다! 지금까지의 전신은 쇠줄로 보내는 것인데, 전파라는 것이 공중을 뛰는 원리라면 쇠줄 없이도 전신을 보낼 수 있지 않은가?' 그는 이러한 생각을 리기 교수에게 말했습니다. 리기 교수는 어린 제자의 생각에 다소 놀랐고 대견스러워했으나 유선 전신이 발명된지도 겨우 30 년이 되고, 전화도 최근에야 발명된 사실을 들어 반신반의했습니다. 그러나 리기 교수는 어린 제자의 착상 자체에 격려를 보냈습니다. "마르코니, 그것 참 대단한 착상이구나. 그래, 너는 꼭 그 생각을 실현해 보아라. 그러한 발명이야말로 네가 평생을 두고 연구해도 아까울 것 없는 사안이야." 리기 교수의 격려에 힘입은 마르코니는 무선 전신의 연구에 몰두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일 년, 이 년이 지나고 연구에는 진척이 없었습니다. 오히려 주위사람들, 많은 과학자들까지도 '쇠줄이 없이 통신이 된다는 건 있을 수도 없는 그야말로 어린애 같은 꿈이다.' 라며 비웃었고 심지어 어떤 사람은 '가엾게도 저 애는 전기 때문에 미쳤어.'라고 말하며 손가락질을 했습니다. 그러나 리기 교수만은 마르코니의 성공을 믿고 늘 격려를 아끼지 않았습니다. 어느덧 십 년의 세월이 흘렀습니다. 그때서야 비로소 마르코니는 간신히 조그만 무선 전신기 하나를 만드는데 성공할 수 있었습니다. 차가운 바람이 부는 겨울의 어느 날, 밤이 으슥한 무렵에 마르코니는 넓은 들판에서 십 년의 외로운 싸움 끝에 만들어진 기계의 실험을 시작했습니다. 몇 차례 시도를 했건만 발신기에는 아무런 반응이 없었습니다. 실패! 십 년의 노력이 수포로 돌아간 것입니다. 그는 말할 수 없는 허탈감에 그대로 무너지듯 털썩 주저앉고 말았습니다. 그때 문득 들판 저 멀리 정적을 깨는 희미한 말발굽 소리가 들려 왔습니다. 그 소리는 점점 가까워지더니 어느새 마르코니 곁에서 멎었습니다. 그는 다름 아니라 리기 교수였습니다. 선생은 말에서 뛰어내리기가 무섭게 마르코니에게 물었습니다. "어떻게 됐나? 오늘 밤 자네의 실험이 궁금해서 이렇게 달려왔네." 그리고 리기 교수는 다시 한 번 실험할 것을 제의했습니다. 그래서 깊은 밤중에 사제는 한마음으로 실험에 열중하게 되었습니다. "자, 준비는 다 되었지?" 선생이 수신기 가까이에 서자 마르코니는 떨리는 손으로 발신기의 버튼을 눌렀습니다. 그와 거의 동시에 '찌찌' 하는 소리가 수신기에 들려왔습니다. "성공! 성공! 마르코니, 대성공이다." 선생은 큰 소리로 외쳤습니다. "선생님!" 너무도 감격한 나머지 마르코니는 선생의 두 손을 잡고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습니다. "정말 대견스럽구나. 마르코니야, 정말." 리기 교수는 말을 잇지 못하고 그만 힘없이 땅에 쓰러지고 말았습니다. 그는 사랑하는 제자의 실험을 보려고 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무리해서 달려오느라 병을 얻고 만 것입니다. 마르코니는 선생을 말에 태우고 돌아왔습니다. 신열이 대단했습니다. 얼마 후 기운을 회복한 선생은 마르코니를 대견스러운 듯 바라보며 거듭 말했습니다. "정말 장하구나. 성공이야." 그로부터 2 년의 세월이 흘렀습니다. 이제는 몇 마일을 두고서 전신 없이도 송수신이 가능하게 됐습니다. 그 후 영국에 건너가 빅토리아 여왕과 황태자가 탄 요트에 기계를 놓고 실험할 때였습니다 황태자가 요트 위에서 급병이 났다는 사실을 무선 전신으로 해안에 통지하여 무사한 일로 말미암아 영국 정부는 특별히 마르코니에게 지원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이에 힘을 입은 마르코니는 1899 년에 영국에서 도보 해협까지, 1901 년에 대서양을 건너 아메리카 대륙까지 통신이 가능하도록 만들어 전세계를 놀라게 했습니다. 그때 마르코니의 나이는 불과 27세에 불과했습니다. 이탈리아로 마르코니가 귀국할 때에는 그야말로 개선장군과도 같은 모습이었습니다. 많은 시민들이 열렬한 환호와 사랑을 그에게 보냈습니다. 마르코니는 시장의 안내로 군중 앞의 연단에 섰습니다. 그는 여전히 겸손한 태도로 조용히 환영에 대한 답사를 했습니다. 그러고 나서 한 소녀가 그에게 월계관을 내밀었을 때 관중들은 떠나갈 듯 우뢰와 같은 박수를 보냈습니다. 그런데 마르코니는 뒤에 자리잡고 있던 유명인사들 가운데 나이가 꽤 들어 보이는 한 노신사 앞으로 월계관을 내밀면서 말했습니다. "리기 선생님, 이 월계관을 받으십시오. 이것은 선생님의 것입니다." 리기 선생은 한사코 그것을 받지 않으려고 했습니다. "선생님, 이 월계관을 선생님께서 받으셔야 합니다. 선생님의 뒷받침이 없었던들 오늘날 저의 영광이 어떻게 이루어 졌겠습니까? 받아 주십시오." 마르코니는 애원 반, 강제 반으로 월계관을 쓴 리기 선생에게 정중히 절을 했고 리기 선생의 두 눈에서는 뜨거운 눈물이 쏟아져내렸습니다. 수많은 군중들의 박수 소리에 묻힌 두 사람의 얼굴 위에는 조국, 이탈리아의 따스한 햇살이 쉼없이 쏟아지고 있었습니다. Fortune aids the brave. Fortis fortune adiuvat. (테렌티우스) -------------------------- * 마르코니(Marcony, Gugliemo, 1874-1937) 이탈리아의 전기 기술자, 발명가이자 후작으로 불로나에서 출생. 1865 년 헬츠의 전자파에 기초하여 실험을 거듭하여 무선 전신 장치를 발명했으며 이밖에도 광석 검파기. 수평 공중선 전파 등을 발명했다. 1909 년 브라운과 함께 노벨상을 수상하고 파리 평화 회의의 이탈리아 전권 대표가 되었다. -------------------------- 지연시키지 말라. 그것은 준비되어 있는 자에게는 언제나 치명적이다. Away with delay; It is always fatal to those who are prepared. (루카누스)
Board 추천글 2021.09.07 風文 R 1166
작은 이야기 1 - 정채봉, 류시화 엮음 3 시련을 딛고 마음의 눈을 크게 뜨고 - 양정신 "이제 깨어났구나. 정신아, 정신아!" 여섯 날 나던 해 봄, 나는 어머니며 집안 어른들의 두런거리는 소리에 곤한 잠에서 깨어났다. 그런데 말소리가 나던 쪽으로 아무리 눈을 돌려도 어머니의 얼굴이 보이지 않는 것이었다. 나는 어머니를 찾으며 벌떡 일어났다. 하지만 내 몸은 따스한 어머니 품이 아닌 딱딱한 방바닥으로 넘어졌다. 마루에서 내 울음소리를 들은 식구들이 달려들어 와 나를 잡고 흔들었지만 내 눈에는 식구들의 모습이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매양 춥기만 한 내 고향 송화 들녘에 모처럼 아지랑이가 피던 날, 나는 언니 손에 이끌려 동네 뒷산으로 진달래를 꺾으러 갔다가 돌아오는 길로 그만 온몸에서 불같은 열이 나면서 정신을 잃었다. 고열은 며칠 새에 내 시력을 앗아 갔다. 나는 학교에도 다닐 수 없었고, 동네 아이들에게 겨우겨우 품앗이 공부를 할 수 있을 뿐이었다. 그러다가 열 살 때 우연히 맹아학교 교사를 만나 평양의 맹아학교에 입학했고 그 선생님의 각별한 보살핌으로 정진 소학교를 무사히 마칠 수 있었다. 그러나 내 앞에는 더 큰 장벽이 기다리고 있었다. 어서 빨리 점자 읽는 법을 배워 살 길을 찾으라는 집안 어른들의 권유를 뿌리치고 나는 무조건 평양의 오랜 명문인 숭의학교에 입학 시험을 치렀다. 그러나 막상 발표를 보니 내 이름이 빠져 있었다. 나는 혼자 교장실로 올라갔다. 학과 시험 성적은 우수하지만 맹인이라는 이유로 안된다는 것이었다. 나는 잠을 안 자더라도 정상인들의 힘을 빌리지 않을 자신이 있으니 입학을 시켜 달라고 항의했고, 마침내 우선 '가입학'의 조건으로 공부해도 좋다고 허락을 받았다. 이날부터 나는 정상인 친구들이 사춘기를 즐길 시간에 밤이 이슥하도록 점자를 더듬으며 공부를 했다. 또 학비를 벌기 위해 날마다 시골 목장에 나가 양털 고르는 일을 했다. 손바닥에는 사춘기의 꿈같은 보드라움 대신 굳은 살이 박혔지만 나는 부끄러울 게 없었다. 얼마 후 정식 입학이 허락되었고, 일제의 탄압 속에서 교사들이 속속 파면당하는 어려움 속에서도 졸업장을 받을 수 있었다. 내 꿈은 어디까지나 나처럼 버려진 사람들을 돕는 일이었다. 그래서 숭의학교를 마친 뒤 시골 교회들을 전전하며 전도사 생활을 시작했다. 하지만 과로와 가난에 폐병까지 겹쳤다. 나는 더 큰 삶의 무기가 필요하다고 느끼고 일본으로 건너갔다. 처음에는 동경 시립 음악학교에 들어갔다가 방향을 바꿔 미시마 의학 전문학교로 옮겼다. 아무래도 의학이 어려운 사람들을 돕는데 긴요하리라 여겼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물론 청강생이었다. 나는 몸이 두 쪽이 나기 전까지는 물러서지 않을 각오로 겨우 눈을 붙일까말까 하는 한두 시간을 빼고는 공부에 매달렸다. 그런 몰두는 이론 공부엔 효과가 있었지만 금방 또 다른 벽에 부딪쳤다. 해부학과 세균학 등의 분야가 그것이었다. 보이지 않는 눈으로 그것들을 정복하기란 난감한 일이었다. 그러나 두드리고 두드리는 사람들에게 영원한 문제는 없는 것이다. 내게 눈이 생겼다. 그것도 따스한 마음을 담은 눈이. 일본인 동료인 심보 군이 그 시간이면 항상 내 곁에 와 일일이 감각이 예민한 손으로 개구리의 뛰는 심장을 만지도록 해주고, 현미경에 비친 세균의 모습을 그려 주었다. 그것은 어떤 이성간의 사랑이라기보다 참으로 뜨겁게 파동쳐 오는 감동이었다. 덕분에 나의 정식 입학이 허가되었다. 졸업식 날 심보 군은 내게 청혼을 했다. 하지만 그에게 짐이 되어서는 안된다는 생각으로 그를 떠나 보냈다. 눈물은 귀국선 속에서 비로소 흘렸다. (기독교 장로회 최초의 여목사)
Board 삶 속 글 2021.09.07 風文 R 548
鐵面皮(철면피) / 鐵(쇠 철) 面(낯 면) 皮(가죽 피) 송(宋)나라 손광헌(孫光憲)이 쓴 북몽쇄언(北夢 言)에 나오는 이야기. 왕광원(王光遠)이란 진사(進士)가 있었다. 그는 학식과 재능이 뛰어나 진사시험에도 합격했으나 출세하고자 하는 욕망이 강했다. 그는 권세있는 사람들에게 줄을 대기 위해 이 사람 저 사람 만나며 아부를 계속했다. 하루는 어떤 고관이 술에 취해 매를 들고 그에게 때려 주고 싶은데 한 대 맞아 보겠나? 하고 말했다. 아부꺼리만 찾고 있던 왕광원은 기다렸다는 듯이 대인의 매라면 맞고 말고요. 라고 하였다. 사정없이 얻어 맞은 왕광원은 조금도 화를 내지 않았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그의 친구가 자네는 그런 수모를 당하고도 아무렇지 않나? 하고 물었다. 왕광원은 높은 사람들에게 잘 보여서 손해볼 게 없잖아? 하고 대답했다. 이런 왕광원을 가리켜 당시 사람들은 이렇게 말했다. 왕광원의 낯가죽은 열 겹의 철판만큼 두껍다. 라고. 독도문제로 한참을 떠들어 대더니, 이번에는 일방적인 어업 협정 파기. 낯가죽이 두꺼워도 너무 두껍다. 뻔뻔해도 너무 뻔뻔하다. 무식해도 너무 무식하다. 鐵面皮 란 뻔뻔스러워 부끄러워할 줄 모르는 사람 을 가리킨다. ………………………………………………………………………………………………………………
Board 고사성어 2021.09.07 風文 R 945
또 다른 공용어 지난 연말, 국회가 일을 제대로 하느니 마니 하던 순간에 우리 언어의 역사에 매우 중요한 사건이 후다닥 지나갔다. ‘언어수화법’이 통과된 것이다. 수화란 말을 못 듣는 장애인들을 위해 손짓으로 대신하는 의사전달 방식으로 알려져 있다. 따라서 소리를 기본으로 하는 언어와 그 체계와 기능이 다를 수밖에 없다. 그러나 오랫동안 그것은 ‘언어’라기보다는 불가피한 ‘비상수단’으로만 인식되었다. 교육하고 널리 보급해야 할 언어로 보지 않은 것이다. 일반적으로 수화를 ‘장애인 전용’으로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비장애인에게도 수화는 매우 유용하다. 물리적으로 말을 할 수 없을 때, 방독면을 쓰고 있을 때, 침묵 속에서 일을 처리해야 할 때, 물속에서 잠수나 자맥질을 할 때, 소리가 닿지 않는 먼 곳에 신호를 보낼 때, 또 반대로 너무 시끄러운 데서 말할 때 등은 수화 역시 하나의 자연언어로서 ‘기본적인 소통 수단’임을 재인식하게 된다. 수화가 이제 법적인 공용어가 됨으로써 우리는 ‘한국어’와 ‘한국수화언어(수어)’ 두 가지의 공용어를 지니게 되었다. 외국의 사례에 비추어보면 그리 이르지도 않다. 이미 130여 개국에서 수화를 공용어로 인정하고 있다. 늦게 시작하는 만큼 좀 더 정성 들인 제도가 뒷받침되었으면 한다. 수화는 이젠 국어 시간에, 혹은 이에 준하는 수업에서 가르칠 수 있어야 한다. 수화 통역사도 더 양성해야 한다. 수화의 약점이 전화 통화가 불가능하다는 것이었다. 이제는 다양한 화상 통화가 가능하기 때문에 그러한 영역에도 편의 장치를 개발해야 한다. 하나의 공용어보다 두 개의 공용어를 가지려면 그만큼 더 바빠야 하고 더 부지런해야 한다. 우리 사회에 소리로 내는 말을 듣지 못하는 27만여 이웃들이 더 나은 기회를 가지고 더 넉넉한 자기 몫을 차지해야 할 것이다. 당연히 그들에게 우리 모두 든든한 동반자가 되었으면 한다. 김하수 한겨레말글연구소 연구위원·전 연세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