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의 권모술수 세상의 말을 쉽게, 순진하게 믿는 것보다는 왜 이런 말이 나왔을까 하고 비판적으로 생각하는 것이 언어를 현명하게 사용하는 길이다. 또 불투명하거나 엉뚱해 보이는 단어의 개념도 깐깐하게 따져 보는 것도 현명한 언어 사용 방식이다. 더구나 사회 구조가 복잡해질수록 추상적 표현이 많아지기 때문에 더욱더 똑똑해져야 하고 언론 매체도 더 기여를 해야 한다. 특히 사람들의 이해관계를 다루는 경제 관련 어휘는 무엇보다도 그 개념이 정확하게 이해되어야 한다. 그래야 이익과 손해를 가름할 수 있고, 또 적극적인 의미의 시장 참여자가 될 수 있다. 그런데 종종 언어가 그 길을 가로막곤 한다. 예를 들어 ‘마이너스 금리’ 같은 말은 전통 개념에 익숙한 사람들한테는 한동안 멍해지는 개념이다. 도대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방책이 떠오르지 않는다. 이번에는 우리도 ‘양적 완화’를 해야 한단다. 반대 의견들이 나오니 이번에는 ‘한국형 양적 완화’란다. 무언가 대단히 심각한 결정이 내려질 모양인데 이것이 우리 살림에 덕이 된다는 말인지 무언가 각오하란 말인지 실마리가 잡히지 않는다. 전문성이 대중성을 압도해 버리는 복잡한 담론, 대개 이런 곳에 무언가 수상한 권모술수들이 꾀어들게 되어 있다. 더구나 이 말이 ‘한국은행의 발권력’, ‘비전통적 통화 정책’, 심지어 ‘헬리콥터 화폐’ 등의 생소한 말과 연동되는 것을 보니 여차하면 각자의 흥망을 각오하란 말처럼도 들린다. 이것은 돈을 찍어내는 주체만 다를 뿐이지 위조지폐 만드는 것과 모양새가 똑같아 더욱 수상하다. 이런 발언들을 그대로 받아쓰기만 해서 보도하는 것은 독자들이 언어의 권모술수에 넘어가기 딱 좋게 방치하는 일이다. 언론인과 전문가들은 도대체 누가 더 손해 보고 누가 이익을 보는지, 그리고 누가 상이나 벌을 받게 되는지를 명료하게 보도하고 설명해야만 그 권모술수에 동조하지 않는 길이다. 김하수 한겨레말글연구소 연구위원·전 연세대 교수
고령화와 언어 기대 수명이 날로 늘어나면서 장수보다 건강 수명에 관심을 가지는 시대이다. 보건, 복지, 의료 등이 주로 고령화 문제로 고민하고 교육, 경제 등에도 새로운 과제들이 등장하고 있다. 그러면서 동시에 언어 문제에 대해서도 고려해야 할 부분이 눈에 띈다. 노인들이 말 때문에 불편한 것은 한두 가지가 아니다. 공공 기관에 가도 안내하는 ‘젊은 분’들의 말이 너무 빠르다. 미안하게도 자꾸 되묻게 된다. 특히 거대한 종합병원 같은 곳에서는 늘 어리둥절하게 마련이다. 날이 갈수록 ‘주변화’되고 있다는 느낌, 바로 그것이 노인들의 소외감일 것이다. 그러다가 동네 병원에 가면 마음이 느긋해진다. 톱니바퀴처럼 숨쉴 겨를도 없는 조직 체계가 불편하게 느껴지고, 마음 편한 환경을 찾게 된다. 뿐만 아니라 젊은 사람들이 활발하게 사용하는 신조어나 특이한 약어에도 매우 불편함을 느낀다. 새로운 외래어가 지독히 낯선 것은 물론이다. 그렇다고 그런 언어를 탓하기도 쉽지는 않다. 노인의 언어가 ‘고령자방언’이 되어 가고 있는 중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세대간의 소통 장애’는 다가온 것이다. 나이든 세대의 언어를 젊은 세대가 열심히 배우기만 하면 됐던 시기는 이미 저물었다. 노인의 말은 무관심의 대상이 되었고, 노인들이 젊은 언어를 배울 기회는 없다. 세대간 소통 장애는 저절로 해소되지 않는다. 방치하면 점점 더 벌어진다. 늙어도 또 배울 수 있는 기회, 그래서 젊은이들의 새로운 지식을 함께 공유하고 그들의 의견을 이해하고 지지할 수도 있는, 또 젊은이들은 노인들이 왜 매사에 이러저러한 반응만 보이는지를 이해하게 되는 ‘지속가능한 소통 체계’에 대해 더 늦기 전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젊은이들도 점점 늙어간다. 사실 ‘살아간다’는 말과 ‘죽어간다’는 말은 서로 대척점에 있는 반대말처럼 들린다. 그러나 그 의미는 똑같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죽어가고 있는 것이다. 김하수 한겨레말글연구소 연구위원·전 연세대 교수
큰 방황은 큰 사람을 낳는다 - 마 데바 와두다 52. 회개 <회개는 아주 심원한 일을 일으킨다. 온몸의 세포 하나 하나에서 눈물 흘리게 한다. 아! 아름다운 변화> 위대한 수피 알힐라이 만소르. 예수는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지만 만소르는 갈갈이 찢겨 죽었다. 만소르는 십자가에 못 박힌 다음 먼저 다리를 잘렸다. 그래도 그는 살아 있었다. 다음엔 팔이 잘렸다. 다시 혀가 잘렸고, 양쪽 눈이 패였다. 그래도 그는 살아 있었다. 그런 다음 마지막으로 몸통을 찢겼다. 그의 죄목은 오직 하나였다. 그가, "나는 진리요, 신이다"라고 말했다는 것이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와 만소르에게 돌을 던지며 조롱하였다. 만소르는 웃었다. 발목을 잘려 피가 넘쳐 흐르자 그는 양손으로 피를 받았다. 구경하고 있던 한 사람이 뭘 하는 거냐고 물었다. 만소르가 말하기를, <어찌 물로 손을 씻을 수 있으리? 피로써 저지른 죄는 오직 피로써만이 닦을 수 있느니. 피로써 내 손을 닦고 기도하리니> 사람들이 손을 자르려 하자 만소르는 말하기를, <잠깐만, 내 기도가 끝난 다음 자르라. 손이 없으면 기도하기가 어려우니> 만소르는 하늘을 우러르며 신에게 말했다. <당신은 절 속일 수 없습니다. 전 여기 있는 사람들 모두에게서 당신을 봅니다. 살인자로 나타나셨고 적으로 나타나셨어도 절속일 순 없습니다. 어떤 모습으로 오셔도 전 당신을 볼 수 있습니다. 제 속안에 계신 당신을 전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미친듯이 돌을 집어 던지며 그를 조롱하였다. 만소르는 웃고 있었다. 웃고만 있던 만소르가 돌연 울기 시작하였다. 아, 그의 친구이자 제자인 시블리가 장미 한 송이를 그에게 던졌던 것이다. 사람들이 괴이쩍어 다시 까닭을 물었다. 왜 우느냐고. 만소르가 말하기를, <돌을 던지는 사람들은 저들이 뭘 하고 있는지 알지 못하지만, 저 시블리는 안다. 신에게 용서를 구하기가 어려울 것임을> 훗날 누가 시블리에게 그때 왜 장미꽃을 던져느냐고 묻자 시블리는 말했다. <난 군중들이 무서웠소. 내가 아무것도 던짖 않으면 군중들이 날 가만두지 않을 것 같았소. 난 만소르가 참으로 순진무구한 사람임을 알기 때문이오. 그렇다고 또 아무것도 던지지 않을 순 없었소. 난 겁장이었소. 그래서 꽃이 제격이라 생각했소. 만소르는 나의 두려움과 겁 많음을 보고 눈물을 흘린 것이오> 만소르의 눈물은 시블리를 완전히 변화시켰다. 그 후 시블리는 십여 년 동안을 거지처럼 떠돌며 가슴 에이는 고통 속에서 눈물을 흘렸다. 그는 나머지 인생 동안 끊임없이 회개하였다. 이렇게 말하면서. <내가 만소르를 죽였다. 적어도 나만은 그를 이해했었고, 그래서 그를 구할 수 있었지만, 나는 그러지 못했다. 나는 군중들한테 동조했다. 아 나는 그에게 꽃을 던졌다!> 그대가 책임을 알기만 한다면 회개는 아주 심원한 일을 일으킨다. 그럴 때 자그마한 것일지라도 그대의 뿌리로 깊숙이 파고들어가, 두 눈에서만이 아니라 온몸의 세포 하나하나에서 눈물 흘리게 한다. 아, 아름다운 변화.
Board 추천글 2021.10.10 風文 R 1219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참 가슴 찡한 이야기 - 황지니 진심을 포장한 선물 그는 갑자기, 그리고 완전히 잠에게 깼습니다. 새벽 4시. 그의 아버지가 항상 먼저 일어나서 우유 짜는 것을 거들라고 깨우던 바로 그 시간이었습니다. 그의 나이 15세, 아직 아버지와 함께 농장에서 살고 있을 때의 일이었습니다. 그는 아버지를 사랑했습니다. 그는 그 사실을 크리스마스 며칠 전의 어느 날, 아버지가 어머니에게 하는 말을 듣고 나서야 깨달았던 것입니다. "여보, 나로서는 아침에 마틴을 깨우는 것이 너무나 가슴아픈 일이오. 그 애는 한참 자랄 나이니까 잠을 푹 자야 하거든. 내가 깨우러 갔을 때 그 애가 얼마나 곤하게 자고 있는지 당신은 모를 거요. 나 혼자서도 일을 해낼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여보, 그건 안 될 말이에요. 게다가 그 애는 어린애가 아니에요. 자기 몫을 해야 할 나이지요." 어머니는 냉정하게 느껴질 만큼 또렷한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그건 그렇지만 정말이지 그 애를 깨우기 싫다니까." 이런 말들을 들었을 때 그의 마음속에서 무엇인가 눈뜨는 것이 있었습니다. '아버지는 나를 사랑한다. 그러니까 앞으로는 늑장을 부리지 말아야지.'라고 그는 굳게 다짐했습니다. 그 후로는 잠에서 덜 깨어나 비틀거리면서도 일어났습니다. 며칠 후 크리스마스 전날 밤, 그는 누워서 아버지에게 드릴 좀더 좋은 선물이 있었으면 하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오늘도 여는 해처럼 읍내의 상점에 가서 아버지께 드릴 목도리를 하나 샀으나 웬지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소년은 예수님이 마굿간에서 태어나셨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가 문득 아침 일찍 일어나 암소의 젖을 몽땅 짜놓고 헛간도 깨끗이 청소해 놓는 선물을 드려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습니다. 소년은 회심의 미소를 지었습니다. 그는 깊이 잠들면 안 된다는 생각에 열 번도 더 깨어났습니다. 1시, 2시, 2시 30분. 드디어 3시 15분 전에 소년의 옷을 갈아입고 조심스럽게 계단을 내려가 밖으로 갔습니다. 커다란 별이 헛간 지붕 의로 낮게 걸려 있었습니다. 암소들은 졸린 눈으로 놀란 듯이 소년을 바라보았습니다. 소년은 아버지를 생각하면서 부지런히 젖을 짰습니다. 일이 즐거워서 콧노래가 나올 정도였습니다. 아버지를 위한 선물이기 때문입니다. 헛간도 깨끗이 치우고 깨끗이 씻은 양동이는 벽에 걸어 놓았습니다. 방으로 돌아온 소년은 허둥지둥 어둠 속에서 옷을 벗고 잠자리로 들어갔습니다. 아버지가 계단을 올라오는 소리가 들렸기 때문입니다. "마틴, 얘야 일어나야지. 크리스마스라서 안됐다만." "알았어요." 그는 졸린 목소리로 대답했습니다. "내가 먼저 나가마." 아버지가 말했습니다. 문이 닫히자 그는 조그맣게 미소를 지었습니다. 불과 몇 분 후면 아버지가 모든 사실을 알게 될 것입니다. "이런 놈 봤나" 아버지는 웃음을 터뜨렸습니다. 흐느끼는 듯한 묘한 웃음소리였습니다. "누가 속을 줄 알고?" 아버지는 침대 옆에 서서 그를 더듬으며 이불을 걷어냈습니다. "크리스마스 선물이에요, 아빠." 그는 아버지의 허리를 끌어안았습니다. 아버지의 팔이 그의 몸을 감싸는 것이 느껴졌습니다. "얘야, 고맙다. 아무도 이보다 더 흐뭇한 일은 못할 게다." "아, 아빠, 난 아빠가......" 말이 저절로 튀어나왔습니다. 그러나 그는 어떻게 다음 말을 이어야 할지 몰랐습니다. 그의 가슴은 넘치는 사랑으로 북받쳐 올랐습니다. 아버지는 30 년 전에 돌아가셨지만 그는 지금도 새벽 4시면 일어났다가 다시 잠이 들곤 합니다. 그러나 오늘 아침은 크리스마스이기 때문에 잠이 오지 않았습니다. 별들은 유난히 총총했습니다. 이제 생각해 보니 크리스마스 새벽 동트기 전의 별들은 언제나 크고 밝게 보였습니다. 다른 어느 날의 별들보다도 확실히 더 크고 더 밝은 별이 눈에 띄었습니다. 그 별이 움직이는 것 같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과거의 어느 날 밤 그 별을 보았을 때 그렇게 느꼈던 것처럼. 아이들마저 다 떠난 지금 그는 오늘 아침 아내에게 어떤 선물을 할 것인가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무엇보다 그는 아내에게 자기가 아내를 얼마나 사랑하는지를 말해 주고 싶었습니다. 그의 마음속에 사랑이 살아있는 것은 오랜 옛날, 아버지가 자기를 사랑한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비로소 그것이 자기의 내면에 싹을 틔웠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문득 떠올랐습니다. 오직 사랑만이 사랑을 일깨울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 아침, 이 축복받은 크리스마스 아침, 그는 아내에게 줄 선물을 준비하기 위해 책상으로 갔습니다. 그리고 아내에게 보내는 사랑의 씨앗이 열매맺기를 바라면서 편지를 쓰기 시작했습니다. "나의 가장 소중한 사랑 당신에게......"
Board 삶 속 글 2021.10.10 風文 R 542
작은 이야기 1 - 정채봉, 류시화 엮음 3 시련을 딛고 서른일곱 시간 만의 살아 돌아옴 - 하지애 1995년 6월 29일, 그날은 쉬는 날이었다. 그러나 휴일을 바꾸자는 선희 언니의 부탁을 거절하지 못한 탓에 출근을 해야 했다. 어젯밤 비디오도 보고 밤늦게까지 이야기도 나누며 함께 밤을 지샌 정원이와 손을 꼭 잡고 들어서는 백화점의 분위기는 여느 날과 다르지 않았다. 무슨 연유에서인지 에어컨이 작동되지 않았고, 위층에서는 쿵쾅거리는 소리가 계속 들려 왔다. 매장의 여직원들이 오르내리며 들은 바로는 4, 5층의 천장과 바닥에 균열이 생겨 수리를 한다고 했다. 오후 다섯 시쯤, 지하 3층으로 내려갔다. 백화점 일이라는 게 하루 종일 서서 손님들을 상대해야 하기 때문에 간식을 들며 휴식을 취하는 시간이 정해져 있었다. 간식을 먹고 근무 매장인 지하 1층 아동복 코너로 향했다. 근무하고 있는 아동복 매장에 들어서면 언제나 기분이 좋았다. 울긋불긋 밝고 화려한 색깔들, 그리고 앙증맞도록 작은 옷들을 보고 있으면 인형 나라에라도 온 듯 기분이 환해졌다. "어휴, 에어컨은 왜 가동이 안되는 거야?" 더위를 이기지 못해 자판기에서 음료수를 하나 뽑아 들고 매장으로 들어섰다. 너무 간식 시간이 길지 않았나 싶어 시계를 보니, 시계는 다섯 시 오십 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건물이 무너진다. 도망 가!" 어디서 들리는지, 누구의 목소리인지 모를 다급한 외침이 들려 왔다. 건물이 무너지다니... 그게 무엇을 뜻하는 것인지 언뜻 머리에 들어오지 않았다. 우르르 몰려가는 사람들을 따라 무작정 뛸 뿐이었다. 어느 순간, 꽝! 하는 소리와 함께 땅이 푹 꺼지더니 몸이 붕 나는 듯했다. 그리고 머리에 쇳덩이라도 와서 부딪치는지 둔탁한 소리가 아득하게 들려 왔다. 내가 지금 눈을 뜨고 있는가, 감고 있는가, 아무리 눈을 비벼도 눈앞이 깜깜하기만 했다. 손을 뻗어 허우적거려 봤지만, 무거운 것들이 가로막고 있다는 것만이 느껴졌다. "무슨 일이 난 거지? 정원이는? 여기는 도대체 어디야?" 빠르게 몇 가지 생각들이 스쳐 지나가면서, 매캐한 먼지들이 코로 입으로 들어왔다. 그리고는 마치 진공 상태처럼 아득하기만 한 속에서 가느다란 사람들의 목소리가 들려 왔다. "살려 주세요! 여기 사람 있어요! 누구 없어요?" 뭐라 표현할 수 없을 만큼 애절한 사람들의 목소리를 들으니, 참을 수 없는 공포가 엄습하면서 눈물이 흘러 내렸다. "아무도 없어요? 구해 줄 사람 없어요?" 나도 울음인지 외침인지 모를 소리를 질러댔다. 그러면서 조심스레 몸을 이리저리 움직여 보았다. 다행히 다친 데는 없는 것 같았다. 큰 통증이 느껴지는 곳도 없었다. 살려 달라는 아우성들 속에서 언뜻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들렸다. "해정 언니! 경분 언니!" 따르며 가장 가깝게 지냈던 언니들이었다. 나 혼자 있는 것이 아니라는 안도감이 느껴졌다. "승현아, 괜찮니? 난 움직일 수가 없어." 언니의 소리가 나는 쪽으로 몸을 움직이려 했지만, 육중한 무게에 눌러 꼼짝도 할 수 없었다. 언니의 신음 소리가 계속될수록 몸도 마음도 점점 옥죄는 것만 같았다. 시간이 흘러감에 따라 사람들의 신음 소리가 점점 줄어들었다.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해정 언니, 경분 언니의 소리도 점차 줄어들더니 어느 순간부터는 아주 끊어져 버렸다. 아무리 불러도 대답이 없었다. 칠흙 같은 어둠, 사라져 가는 신음 소리들 그리고 고요. 세상이 모두 사라진 한복판에 혼자 덩그마니 남겨진 것만 같았다. 처음 느껴 보는 무서움이 밀려오기 시작했다. 엄마 생각이 났다. 분식집을 하느라 늘 바쁘던 엄마와 아버지. 병원을 몰래 다니시는 것 같아 카드를 훔쳐보기도 했었다. 왜 좀 더 착한 딸이 되지 못했을까. 때로는 생활비를 대느라 부족해진 용돈 투정을 하기도 했었다. 목마름과 배고픔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이렇게 무섭고 암담한 상황에서도 허기가 느껴지다니, 얼핏 웃음이 나왔지만 배고픔이 강해질수록 정신도 아득해졌다. '아냐, 난 살지도 모르잖아. 지금 이렇게 눈을 뜨고 있는데' 그때부터 열심히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정원이는 분명히 살아서 나를 찾고 있을 거야. 부모님도, 지방에서 대학을 다니는 오빠도, 이제 중학생인 동생도 바로 내 머리 위에서 나를 향해 오고 있을지 몰라. 그런데 왜 이런 일이 생겼을까. 텔레비전에서 본 것처럼 우리 나리에서도 지진이 난 걸까. 아니면 폭탄이라도 터진 걸까.' 도대체 알 수 없는 일이었다. 몇 시간이, 며칠이 지났는지 모르겠지만 배고픔은 그만두고라도 갈증을 참을 수가 없었다. 밖에는 비라도 오는지 그때 마침 얼굴 위로 물방울이 똑똑 떨어지고 있었다. 오랜만에 귀에 들리는 소리였다. 빗소리가 내 기분을 조금씩 바꿔 주고 있었다. 떨어지는 물방울을 받아먹으려고 손을 뻗었다. 그러나 이 역한 냄새. 녹이 슨 철근에서 떨어지는 물이었는지 너무도 괴로운 냄새가 났다. 할 수 없이 스타킹을 벗어 물에 적셔서는 얼굴과 머리를 닦아 냈다. 훨씬 갈증이 덜해지는 것 같았다. 입에 고였던 먼지 덩어리도 뱉어 냈다. 주변을 더듬어 보니 쇠 파이프 것 같은 것이 만져졌다. 그것을 들어 얼굴 위의 천장, 몸 옆의 막힌 곳을 두들겨 보았다. 누워 있는 공간이 너무 작아 마음껏 휘두를 수는 없었지만 여기저기 꾹꾹 눌러 보기도 했다. 유리 파편이 박혔는지 온몸이 따가웠다. 몸을 어렵게 구부려 옷을 벗었다. 무서운 생각이 들면 잠을 청했다. 그리고도 시간이 지나지 않으면 즐거웠던 일, 백화점에서 실수했던 일들을 떠올리며 소리내어 웃기도 했다. 설핏 잠이 들고 어렴풋이 눈을 떴을 땐 큰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얼굴 위에 있던 천장이 점차 내려와 몸을 움직일 공간조차 없어진 것이다. 억지로 몸을 돌려 눕고 나니 또 무서움이 밀려들었다. 이러다 저 돌덩이들에 눌린다면... 죽음은 어떤 것일까. 난 얼마나 더 살 수 있을까. 돌에 눌린다면 고통은 얼마나 클까. 죽은 뒤에 내가 발견되더라도 내 몸은 온전했으면 좋겠는데... 그러다 또 잠이 들었다. 잠결인지 꿈결인지 어디선가 스님이 갑자기 나타났다. 아무 말없이 내게 사과를 건네주었다. 그 순간, 눈을 번쩍 떴다. 어디선가 멀리서 깡통 소리 같은 게 들려 오고 있었다. 간간이 들리는 그 소리는 멀어졌다가는 가까워지고 또 멀어지기를 반복하면서 내 주변을 맴돌고 있었다. 가만히 들으니 사람 소리도 들리는 것 같았다. "드디어 날 구하러 사람이 왔구나." 이젠 살았다는 표현할 수 없는 기쁨에 가슴이 벅차 올랐지만, 한편으론 그만큼 조바심도 났다. 저러다가 얼굴 위의 콘크리트가 아주 내려앉으면 어떡하나. 조금만 기다리면 난 살 수 있는데. 어느 순간, 깡통 소리와 사람들 소리가 지척에서 들려 오고, 환한 빛이 얼굴 위로 쏟아졌다. 그리고 얼마 만에 들어 보는 사람의 목소리, 살아 있는 사람의 목소리가 들렸다. "거기 살아 있는 사람 있어요?" 나는 소리쳤다. "살려 주세요. 여기예요." "우리가 곧 구조해 줄 겁니다. 조금만 기다리세요." "이름이 뭐예요?" "박승현이에요. 오늘이 며칠이죠?" 이젠 정말 살았구나. 시간은 왜 이리 더딘지... 드디어 발 아래쪽에서 한 사람이 기어 들어오고 있었다. "아저씨, 저 옷 하나도 안 입었어요." 담요에 내 온몸이 둘둘 말리고, 내 몸이 번쩍 들려지고 그리고 온몸이 흔들리고 나니, 병원이란다. 내 주위는 몹시도 시끄러웠다. 여러 사람의 손길이 느껴졌다. 눈을 가린 채 듣는 목소리 속에 정말로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들려 왔다. "승현아!" 울음 섞인 목소리, 가장 그리웠던 목소리, 바로 엄마의 목소리였다. "엄마, 나 살았지요?" (자유기고가)
Board 삶 속 글 2021.10.10 風文 R 536
어버이들 말의 용도를 확장하여 한동안 쓰다 보면 정말로 그 뜻에 변화가 생긴다. ‘어르신’이라는 말은 ‘어른’이란 말의 존칭이었는데 얼마 전부터 ‘노인’에 대한 존칭으로도 쓰이기 시작해서 요즘은 그리 어색하게 들리지도 않는다. 이제는 ‘이모’라는 말도 어머니의 자매만을 일컫지 않으며, ‘언니’라는 말도 더 이상 여성들의 손위 자매만을 가리키지 않는다. 좋게 말해 의미가 풍부해진 것이다. 그리고 인간관계를 더 다양하게 표현할 수 있게 되었다. 마찬가지로 ‘어버이’라는 말은 부모를 뜻하는 말이다. 부모라는 말보다 더 정감 있는 말이기도 하다. 이 단어도 상당한 변화를 겪고 있다. 특히 북녘 사회에서는 우리가 생각하는 ‘어버이’가 아닌 ‘정치적 존경의 뜻’을 포함하고 있다. 원래 있던 ‘부모, 양친’이라는 뜻이 없어진 것은 아니지만 한 단어에 두 가지 뜻이 깃든 것이다. 최근에 어버이라는 말이 남쪽에서도 또 다른 정치적 의미를 획득했다. 매우 적극적인 보수적 사회운동에 열렬히 참여하는 어르신들의 단체명에서 비롯했는데, 이제는 거의 사회적 상징성을 지닌 단어가 되어버린 것 같다. 남과 북에서 묘하게도 동일한 어휘가 전혀 다른 함축적인 의미를 품게 된 것이다. 그러면서도 정감 어리던 그 말의 의미가 웬일인지 매우 긴장되고 조심스럽고 거북하게만 느껴진다. 어버이라는 말은 어느새 남과 북에서 무언가 권위적이고 완고한 의미를 품은 어휘가 되어버렸다. 제대로 된 의회민주주의라면 정당하게 개념화된 어휘로 정치적 가치를 현실화시킬 수 있도록 보장해야 할 것이다. 비정치적인 어버이라는 말이 정치적인 함의를 얻게 되는 것은 아직 우리가 정치를 정직하고 마음 편하게 이야기하지 못하는 탓이다. 남과 북의 관계가 더 나은 민주주의를 토대로 새로워질 필요가 있다. 그래야 삶을 다정다감하게 만들던 어휘가 갑자기 대립을 상징하는 말로 변하지 않게 될 것이다. 김하수 한겨레말글연구소 연구위원·전 연세대 교수
상투적인 반성 감사의 말이나 사과의 말이 얼마나 진정한 것인지를 알아차리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다. 표정에도 어느 정도 나타나게 마련이고, 행동의 변화나 개선이 빨리 드러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이와는 달리 “반성합니다”라고 하는 추상적인 말의 진정성을 파악하는 것은 쉽지 않다. 진정한 반성의 ‘물증’과 ‘과정’이 잘 드러나지 않기 때문이다. 청소년 시절에 반성문 써 본 사람들은 아마도 기억할 것이다. 죽어라 하고 베껴쓰면 곧 ‘사면’이 된다는 것을. 그리고 정말 제대로 반성했는지 뒤를 캐보는 선생님들은 없었다는 것을. 반성한다는 사람은 꽤 많은데 사실상 개선되는 게 없다는 것은 ‘엉터리 반성’이 너무 많다는 뜻이다. 엉터리 반성의 가장 큰 특징은 상투적인 어휘의 남용이다. 그 까닭은 ‘위기의 모면’만을 노리기 때문이다. 반성을 하는 게 아니라, 시간을 벌어 그 순간을 벗어나려는 것이다. 잘못했다고 상투적으로 말했을 때 “네가 도대체 무엇을 잘못했니?”라고 되묻는 선생님이 야단치는 분보다 더 무서웠다. 일단 위기만 넘기자고 한 말이었기 때문이다. 정치인들이 종종 머리를 깎고, 석고대죄를 하고, 읍소를 하고, 큰절을 하면서 성취하고자 하는 것이 진정한 반성인가 아니면 시간 벌기인가? 우선 그들의 상투적인 말에 넘어가지 말아야 한다. 가장 흔한 표현이 “뼈를 깎는 반성”인데 그 아까운 뼈 깎을 필요는 없다. ‘재발 방지’와 그에 대한 확고한 보증이 반성의 가장 큰 성과여야 한다. 이제는 유권자들이 그들에게 되물어야 한다. 당신들이 무엇을 잘못했다고 생각하느냐고. 그들이 이런저런 정치, 경제 문제들을 잘못했다고 되뇌면, 바로 그것을 고치라고 명령을 내려야 한다. 언론의 책임은 바로 이러한 대화를 중개해주는 것이다. 반성과 뉘우침은 인간만이 할 수 있는 가장 고도의 정신활동이다. 이 능력으로 정말 살 만한 세상을 만들어야 한다. 김하수 한겨레말글연구소 연구위원·전 연세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