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 방황은 큰 사람을 낳는다 - 마 데바 와두다 51. 용기 <일단 신을 찾아 길을 떠나면 되돌아 갈 수 없으니, 크나큰 용기를 일으키라> 예수가 어느 날 이른 아침 물가에 이르렀다. 한 어부가 그물을 던지고 있었다. 예수는 어부의 어깨 위에 가만히 손을 놓았다. 어부가 예수를 바라보았다. 침묵 속에서 예수와 어부는 통했다. 예수는 그저 어부의 눈을 바라보기만 하였다. 어부는 곧장 사랑에 젖었고, 뭔가 일어났다. <물고기를 잡으며 얼마나 인생을 헛되이 했느냐? 나를 따르라. 신을 낚는 길을 보여주리> 어부는 상당한 용기를 가진 사람이었다. 그는 아무것도 묻지 않은 채 그물을 내던지고 예수를 따랐다. 그들이 도시 외곽에 다다랐을 때 한 사람이 헐떡이며 뒤쫓아 왔다. 그가 어부를 붙잡고 말하기를, <자네 지금 어딜 가는가? 미쳤는가? 얼른 집에 가자! 병석에 누워계시던 자네 아버지께서 돌아가셨네. 그래서 우리가 장례 준비를 하고 있단 말일세> 어부는 처음으로 예수에게 물었다. <아버님이 돌아가셨답니다. 사흘만 집에 돌아갔다 오게 해주십시오. 아들로서 제 의무를 다 하게 해주십시오> 예수가 말을 했다. <걱정하지 마라. 거기엔 죽은 사람들이 아주 많이 있으니. 그리들이 자네 아버지를 돌봐 줄 것이다. 그들이 장례를 잘 치뤄 줄 것이다. 그대 날 따르라>
Board 추천글 2021.10.09 風文 R 1366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참 가슴 찡한 이야기 - 황지니 흰소를 타고 간 화가 이중섭은 1916 년, 평남 평원군에서 이창희씨의 5 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습니다. 부농 집안에서 태어나 그는 8세 때 종로 보통 학교에 입학했습니다. 화가 김병기, 소설가 황순원, 희곡 작가 오영진 등과는 모두 그때 동문수학하던 사이였습니다. 보통학교를 졸업한 이중섭은 오산보고에 입학하면서 그림에 눈을 뜨기 시작했습니다. 풍족한 생활 속에서 미술에 정진하기 위한 유학길에 오르면서부터 그의 인생은 평탄함에서 파란만장한 길목으로 들어섰다고 할 수 있습니다. 동경제국 미술학교에서 서양학과에 입학한 중섭은 운명의 여인인 마사꼬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수줍음을 잘 타고 내성적인 중섭을 대신하여 홍하구라는 친구가 마사꼬에게 그의 사랑을 전해 주었습니다. 그들의 사랑은 마침내 타올랐지만 처음부터 순탄하지 못하고 어려움에 부딪혔습니다. 마사꼬의 부모들이 식민지 국민인 조선 청년을 좋게 볼 리가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태평양전쟁의 전황이 갈수록 일본에 불리해지자 마사꼬는 부모의 곁을 떠나기로 결심했습니다. 사랑하는 남자 이중섭과 함께 있기 위해 무조건 현해탄을 건넌 것입니다. 이때 이중섭은 원산에 있었는데 우여곡절 끝에 연락을 받고 극적인 해후를 하게 되었습니다. 얼마 후 해방이 되자 두 사람은 결혼해서 원산에 신혼의 보금자리를 마련했습니다. 마사꼬는 결혼하면서 이남덕이란 새이름을 갖게 되었습니다. 이중섭이 즐겨 그린 소재는 주변에서 얼마든지 볼 수 있는 것들인 물고기, 나비, 곤충 같은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소재들은 공산치하에서 비판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그런 소재는 부르조아 성향을 드러낸다는 이유에서였습니다. 실의에 빠진 그는 집안에만 틀어박혀 지냈습니다. 비판의 대상이 되었던 시인, 화가 , 작가들은 그 무렵 하나둘 월남했으나 이중섭은 그런 결단을 내리지 못한 채 세월이 흘러 6,25가 터졌습니다. 그러자 이중섭도 처자를 거느리고 부산으로 내려가게 됐습니다. 부산에 도착한 그는 단칸방에서 지내며 막노동을 하다가 선배의 주선으로 해군 종군 화가단에 가입하였고 거기서 나온 배급으로 연명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때 일본인들을 본국으로 귀환시켜 준다는 소식을 듣고 부인이 같이 동행해 일본으로 갈 것을 설득했으나 중섭은 듣지 않습니다. 결국 부인과 자식들만 귀환선에 오르게 됩니다. 중섭은 뒤따라간다고 했지만 여비를 벌 뾰족한 수가 없었습니다. 그는 부둣가 다방에서 바다를 하염없이 바라보기만 했습니다. 이별한 아내와의 해후를 갈망하는 이중섭은 그의 말처럼 살아갈 힘도 재주도 없이 끊임없이 그림만 그렸습니다. 판잣집 골방에서, 부두에서 막일하다 쉬면서도, 다방 한구석에 웅크리고 앉아서도 한없이 그림만 그려나갔습니다. 이중섭은 그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유화, 수채화, 데생 등 2백여점, 은지화 약 3백여 점을 남겨 현대 한국미술사에 찬란한 한 페이지를 남기게 됩니다. 드디어 이중섭은 꿈에도 그리던 아내를 만나기 위해 일본으로 건너갔습니다. 그때가 헤어진 후 3 년이 지난 1953 년 1월이었습니다. 약 2주일간의 짧은 만남을 끝으로 그는 다시는 그리운 처자를 만날 수 없었습니다. 일본에서 만난 아내는 중섭의 친구였던 사람에게 사기를 당하여 생활이 몹시 어려웠습니다. 그는 더 이상 그것을 지켜볼 수 없다면서 귀국한 것이었습니다. 아내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돌아온 그는 여러 방면으로 돈을 마련했으나 그때마다 주위사람에게 사기를 당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늘 생활에 쪼들리면서도 돈에 대해서는 전혀 애착이 없었습니다. 열심히 그림을 그려 판 돈도 친구들이나 지인들의 술값으로 날리기 일쑤였으니 그에게는 일본으로 건너갈 여비조차 모아지지 않았습니다. 일본행은 거의 절망에 가까웠고 그는 나날이 좌절감과 자학 속에 빠져들었습니다. 그는 병이 들어 죽음이 임박하자 식음거부증세를 나타냈습니다. "내가 이 밥을 먹으면 나 때문에 한 끼를 굶는 사람이 생길 것 아냐? 그러니 어떻게 먹겠나?" 그는 온종일 방안에 드러누워 아무것도 먹지 않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결국 그는 간장염으로 적십자병원에서 끝내 세상을 뜨고 말았습니다. 아마도 그의 영혼은 그리운 아내와 자식들에게 자유롭게 날아갔을 것입니다. 험난한 세파와 사람들의 배신 속에서도 예술적 품성을 지켜 나갔던 이중섭은 이렇게 우리들 앞에서 한많은 세상을 마친 것입니다. -------------------------- * 이중섭(1916--1956) 평양 출생. 오산고등보통학교를 졸업 후 일본으로 유학을 처났다. 동경문학학원 재학 중 일본 자유미협전에 입상한 것을 시작으로 본격적인 작품활동에 들어갔다. 그의 작품 성향은 포비슴(Fauvisme, 야수파)의 영항을 받았으며 향토적이고 개성적인 것으로서 우리나리에 서구 근대화 화풍을 도입하는 데 공헌했다. 그는 1956 년 간장염으로 자신의 예술세계를 활짝 피워 보지도 못한 채 유명을 달리했다. 주요 작품에는 소, 힌소 등이 있다.
Board 삶 속 글 2021.10.09 風文 R 783
작은 이야기 1 - 정채봉, 류시화 엮음 3 시련을 딛고 둥지 없는 새의 사랑 노래 - 심철호 1992년 7월의 무더운 오후, 퇴근을 앞둔 정신여자중학교 교무실에 전화 벨이 울렸다. "여보세요. 박양희 씨 계십니까?" 굵고 점잖은 목소리의 전화를 받은 학교 급사 박양희는 당황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자신에게 전화를 걸어 올 사람이 없었다. "제가 박양희인데요..." "다름아니라 박양희 씨의 원고를 보고 전화를 드렸습니다." 그제야 그녀의 머리 속에 떠오른 것이 있었다. 얼마 전 자신이 썼던 몇 편의 시가 한 출판사에서 기획한 <독자 시집> 난에 실린 적이 있었다. "저는 시를 쓰는 김유권이라고 하는데, 박양희 씨를 꼭 한 번 만나 보고 싶습니다." 그날 오후 박양희와 첫 대면한 김유권 씨가 말했다. "우연히 박양희 씨의 시를 접하게 되었습니다. 부모님을 잃고 꿋꿋하게 살아가는 모습을 그린 박양희 씨의 시가 이미 아마추어의 수준을 넘고 있는 걸 알았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그녀가 시집을 낼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 돕고 싶다고 말했다. 전혀 예상치 못한 따뜻한 호의에 박양희는 뭐라 대답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로부터 3년이 지난 1995년 1월, 박양희는 드디어 처녀 시집을 출간하기에 이르렀다. <둥지 없는 새는 마음껏 날지 못한다> (운문문화사)라는 제목으로 세상의 빛을 보게 된 이 시집은 박양희가 견뎌낸 인고의 세월을 그대로 담고 있다. 뇌성마비라는 신체적 장애와 현실적 고통에 굴하지 않고 용기와 희망을 갖고 살아온 스물네 해 동안의 삶. 그녀는 태어날 때부터 선천성 뇌성마비라는 짐을 짊어져야 했다. 그것은 그녀가 싸워 나가야 했던 무수한 시련의 전주곡이었다. 태어나면서부터 병약했던 그녀는 언제 꺼질지 모르는 촛불과도 같은 생명이었으나, 어머니의 지극한 사랑과 정성이 위태로운 막내딸의 생명을 지켜냈다. 다행히 그녀의 장애는 그 정도가 심하지 않아 일상 생활에는 큰 불편을 주지 않았다. 약간 어눌한 말씨를 제외하면 평범한 여자아이와 다를 바가 없었다. 하지만 불행은 예기치 않은 곳에서 밀려왔다. 언제나 그녀의 따뜻한 둥지였던 어머니가 3년 간의 투병 생활 끝에 결국 세상을 떠나셨다. 박양희의 나이 채 열 살이 되기 전이었다. 어머니의 죽음으로 가뜩이나 어려운 살림은 더욱 각박해졌다. 슬픔에 잠겨 있던 아버지는 어떻게 해서든 살아 보려고 바둥거렸다. 하지만 아버지의 몸 속에서도 이미 죽음의 병균이 자라고 있었다. 병명은 간경화, 그는 네 딸을 남겨 두고 이내 아내의 뒤를 따라갔다. 박양희는 그때의 슬픔을 이렇게 노래한다. 연기 되어 날아가려고 하는 당신에게 옷과 가재 도구를 드렸더니 재로 만들어 가져가신다. 마을 어귀 한 구석에 타오르는 당신의 껍질들 혼불 --'혼불' 중에서 하루아침에 고아가 된 네 자매는 아버지의 상여가 나가는 날 뿔뿔이 흩어져야 했다. 큰언니는 서울로 직장을 찾아서 떠나고, 둘째 언니와 셋째 언니는 먼 일가 친척집으로, 그리고 박양희는 작은집으로. 그때 그녀는 초등학교 4학년이었다. 작은집에서 박양희는 울보가 되어 버렸다. 돌아가신 부모님에 대한 그리움과 어딘가로 떠나 버린 언니들에 대한 보고픔이 작은 가슴에 더욱 고여 와 그녀는 날마다 아무도 모르게 눈물을 흘렸다. 더구나 그녀의 불편한 행동을 보며 놀려대는 아이들은 악마처럼 그녀의 주위를 맴돌았다. 일기를 쓰기 시작한 것은 그즈음이었다. 그녀는 일기장을 펼치고 그리운 사람들의 이름을 빼곡히 적었다. 하지만 아무도 그녀에게 돌아오지 않았고, 자고 나면 눈물에 얼룩진 일기만이 안쓰러운 듯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렇게 2년의 시간이 흘렀다. 어느 날 큰언니가 작은집으로 그녀를 데리러 왔다. 빗물이 새는 자취방이나마 자매들이 함께 살 방을 마련한 것이었다. 박양희는 언니를 보자마자 터져 나오는 눈물을 참을 수 없었다. 그날 밤 헤어졌던 네 자매는 다시 만났다. "어떤 일이 있어도 같이 살자." 시간이 빠르게 지나갔고, 언니들은 저마다 열심히 살기 위해 분주했다. 피곤에 지친 언니들이 집으로 돌아와선 씻지도 못하고 잠 속으로 빠져드는 모습을 보며 박양희가 할 수 있는 것은 공부뿐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평소에도 몇몇 학생들만 귀여워하던 담임 선생님이 그녀를 불렀다. 그는 다른 아이들은 부모님이 다녀가시며 수고비라도 주는데 네 부모는 어떻게 된 거냐며 노골적으로 물었다. 그녀는 어물어물 사정을 말했다. 그러자 담임 선생님은 "돈이나 벌지 학교는 뭐하러 다니냐?" 는 말을 남기고 그녀를 돌려보냈다. 그녀는 쏟아지는 눈물을 참으며 집으로 돌아왔다. 사람들에 대한 신뢰가 한꺼번에 무너져 내렸다. 그 시절 그녀의 일기장은 사람들에 대한 미움으로 가득했다. 얼마 후 큰 언닌가 결혼을 했다. 아무런 혼수도 없이 작은아버지의 손을 잡고 식장 안으로 들어서는 언니를 보며 박양희는 눈물로 언니의 행복을 기원했다. 그녀가 고등학생이 되었을 때 셋째 언니까지 모두 결혼을 한 뒤였다. '이제 정말 혼자구나.' 하지만 마냥 감상에 젖어 있을 수만은 없었다. 새로이 작은 자취방을 얻어야 했고 생활비를 벌어야 했다. 어렵게 일자리를 받아다 밤샘을 하며 일을 하면 손가락이 부르트는 건 예사였다. 그나마 일거리도 많지 않았다. 하지만 그 무엇보다 견디기 힘든 건 역시 외로움이었다. 돈이 많고 얼굴이 예쁘고 공부를 잘 하는 건 부럽지 않았지만 친구들의 어머니가 학교에 찾아와서 선생님을 만나고 돌아가는 모습을 보면 가슴 한 켠이 텅 비어 버렸다. 그녀는 부모님에 대한 사무치는 그리움과 하루하루의 고단한 삶을 이기기 위해 시를 썼다. 개미야 너는 어쩔래? 이 넓은 세상을 어찌 살아갈래? 너의 그 작은 몸으로 복잡한 이 세상을 어떻게 이겨 나갈래? 이 몸 살아가기도 벅찬 이 세상에 너는 얼마나 서럽겠니? 개미야 네 발 여섯 개로 뛰어라. 누구보다 힘차게 뛰어라 --'홀로된 개미' 중에서 그러던 그녀가 세상을 아름답다고 느끼기 시작한 것은 여고 2학년이 되면서부터였다. 힘겹고 외롭기만 한 그녀에게 첫사랑이 찾아온 것이다. 그녀는 언제나 온화한 미소를 가진 최근식 담임 선생님을 좋아하게 되었다. 물론 가슴속에서만 키우는 사랑이었다. 하지만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자신의 역경을 이길 수 있는 힘이 되었다. 선생님이 그녀의 마음을 알았던 걸까. 어느 날 선생님은 그녀를 불러 손수 마련해 온 돼지고기와 양념장을 조심스럽게 건넸다. "힘들고 괴로워도 양희는 잘 견딜 수 있을 거야." 선생님이 베풀어 준 온정과 다정한 위로의 말들은 그녀가 세상을 새롭게 이해하도록 만들어 주었다. 어린 시절부터 줄곧 사람을 두려워하고 경계하던 그녀의 닫힌 마음이 어느 순간인지 서서히 열리고 그 위에 사람들에 대한 새로운 애정이 싹트기 시작했다. 선생님에게 향하던 풋풋한 사랑을 뒤로하고 그녀는 여고를 졸업한 뒤, 모교인 정신여자중학교에서 급사로 일을 하게 되었다. 하지만 그녀에겐 학업에 대한 미련과 시를 쓰고 싶다는 열망이 남아 있었다. 굳이 누구에게 내보이겠다고 생각한 건 아니지만 그녀는 언제나 책을 읽고 시를 썼다. 그리고 마침내 소망하던 자신의 시집을 갖게 된 것이다. 신체적인 장애와 어린 시절의 불행을 딛고 날아오른 새, 박양희가 시집을 낼 수 있었던 것은 각고의 노력과 자신과의 싸움의 결과였다. 그녀의 시집을 받아 든 언니들과 친구들, 언제나 먼 발치에서 지켜보던 최근식 선생님은 눈시울을 붉히며 기뻐해 주셨다. 박양희는 현재 방송대학 국문학과 1학년에 재학중이다. 남들처럼 학업에만 열중할 수는 없지만 그녀는 보다 훌륭한 시인이 되기 위해 기꺼이 오늘의 힘겨움을 이겨 나갈 것이다. 힘들고 괴로웠던 둥지 없는 새의 나래를 접고 새로운 둥지를 만들기 위해. (시인)
Board 삶 속 글 2021.10.09 風文 R 804
Board 고사성어 2021.10.09 風文 R 1744
정치인들의 말 선거가 막바지로 치달으며 전망이 불확실해지자 거대 정당들의 주력부대가 이런저런 아쉬운 지역을 다니며 ‘사과’와 ‘반성’을 외치면서 열심히 조아린다. 그것을 유권자들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사과를 조심해서 받아야 하는 이유는 사과를 수용함과 동시에 그가 저지른 행위는 면소 처분이 되기 때문이다. 법적 용어로는 기소중지가 된다. 그리고 바로 그 행위를 또다시 문제 삼기가 무척 곤혹스러워진다. 다시 사과를 받으려면 과오가 추가로 발견되거나, 사과의 절차나 표현에 문제가 있을 때에나 가능하다. 사과를 영리하게 받아들이려면 확실한 ‘재발 방지’를 보장받을 수 있어야 한다. 아니면 더 확실하게 그 사람의 ‘권리’를 담보로 잡는 것이 유용하다. 그냥 ‘인간적으로’ 덜컥 사과를 받아들이면 결국 사과를 받아낼 수 있었던 그 ‘힘’은 사라지고 만다. 문제는 정치인들에게 확실한 미래 약속이나 현실적인 권력 일부를 담보물로 차압하기가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올바른 유권자, 영리한 유권자들은 어떤 태도를 가져야 할까? ‘정치인의 말’만 믿어서는 안 된다. 정치인의 말은 유난히도 상황의존적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정치적으로 시시각각 새로운 상황이 전개된다. 그래서 그들의 변심을 욕만 할 수도 없다. 다른 전략이 필요하다. 유권자 중심의 전략 말이다. 유권자들에게는 정치세력들끼리 상호견제를 시키는 것이 가장 유리하다. 유권자들이 ‘이이제이’를 해야 한다는 것이다. 한쪽만 강하게 만들면 유권자들만 허약해지게 마련이다. 그리고 일단 잘못을 저지른 정치인에게는 아무리 평소에 호감을 가지고 있었다 하더라도 가장 가혹한 징벌을 내리는 것이 다시는 유권자들을 만만하게 보지 못하게 하는 지름길이다. 마음 착한 정치인을 기대하지 말고 강한 유권자가 되자. 허약한 유권자 앞에 제대로 된 민주주의는 없다. 김하수 한겨레말글연구소 연구위원·전 연세대 교수
공공 재산, 전화 서비스업에는 몸을 움직여야 하는 일도 있기는 하지만 그래도 언어가 기본적인 역할을 한다. 그러고 보면 서비스업은 일종의 언어적 노동이라고도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일반적인 육체노동에서 조심해야 할 것은 ‘안전’이다. 몸을 다칠 가능성이 큰 편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서비스업에서, 아니 언어적 노동에서 ‘노동 안전’처럼 가장 조심해야 할 것은 무엇일까? 바로 ‘언어 예절’이다. 언어 예절을 훼손하면 마음에 상처를 깊이 남기게 되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언어 예절을 달리 말하면 ‘안전한 언어’라고도 할 수 있다. 말하는 사람도 듣는 사람도 상처를 받지 않는 그러한 언어 말이다. 특히 전화를 이용하여 언어적인 서비스를 하려면 서비스 제공자도 고객도 언어의 질서와 규율을 아주 잘 지켜야 한다. 이에 어긋나면 의사소통이 잘 안 되는 것은 물론이고 다툼과 갈등도 벌어진다. 서로 마주 보는 대화에서는 표정까지도 신경이 쓰이게 마련인데 얼굴도 안 보고 대화를 하다 보면 말을 함부로 하기 쉽지 않겠는가. 그 때문에 이런 익명성을 악용한 사례가 자주 생긴다. 특히 상대방이 ‘항상 친절하게 말을 해야 하는’ 전화 상담자들일 경우에 더욱 비일비재하다고 한다. 콜센터 같은 곳에서 자주 경험한다는 이른바 ‘전화 갑질’이다. 이런 행동을 하는 까닭 중의 하나는 전화 단말기가 개인 소유물이기 때문이리라. 그러나 전화와 관련된 시설물과 전파는 엄연히 공적인 재산이다. 이렇게 사회적 공유물이기도 한 전화로 욕설을 퍼붓거나 모욕을 하는 짓은 당연히 법적인 제재가 따라야 한다. 보이스피싱이 남의 재산을 훔치는 짓이라면 전화 갑질은 남의 마음에 상처를 내는 위험한 짓이다. 공공 도로에서 노점을 차리거나 마음대로 주차를 해보자. 다친 사람이 전혀 없어도 단속의 대상이 된다. 전화 갑질은 그냥 재수 없는 일 당했다고 우물우물 지나칠 일이 절대 아니다. 김하수/한겨레말글연구소 연구위원·전 연세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