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어와 인권 오랫동안 사람들은 각종 폭력에 시달려 왔다. 그래서 현대 사회는 국가가 공권력을 독점적으로 관리함으로써 시민들의 일상생활을 안전하게 보호하는 길을 택하고 있다. 그러는 중에 언어 사용의 자유는 점점 그 폭을 넓혀 왔다. 그러다 보니 요즘은 오히려 ‘언어의 횡포’가 기승을 부리면서 새로운 매체를 타고 그 폐해가 점점 커지고 있다. 과거엔 화장실 낙서에나 나오던 못된 표현들이 이제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나돈다. 언어 표현을 사법적으로 징치한다는 것은 적잖은 부담이 있을 수 있다. 민주 사회의 가장 중요한 부분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문제의 핵심은 표현의 규제가 아니라 반사회적 ‘언어폭력’에서 피해를 보는 약자들을 어떻게 보호할 것인가 하는 문제의식에서 시작하자는 말이다. 곧 ‘인권 수호’의 새로운 국면을 말하는 것이다. 특정한 개인에 대한 언어적 공격은 당사자의 제소를 통해 사법적인 해결을 구할 수도 있다. 그러나 불특정 다수, 곧 특정 지역이나 국적, 인종, 성, 종교, 이념 등에 대한 노골적인 공격 행위는 몇몇 개인의 힘으로 제어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특히 그 피해가 사회적 약자 집단에만 집중된다면 더 이상 방치할 수가 없는 문제다. 언어가 인권을 해치는 흉기가 되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사법적 장치를 넘어서 이러한 언어적 제도를 안정화시키려면 모든 공직자들부터 임명직이나 선출직을 막론하고 언어적 인권 보호에 대한 자신의 태도를 분명히 드러낼 필요도 있다. 지금은 다양한 인종과 종교 그리고 각종 신념이 뒤엉켜 살아가게 된 세계사적인 대전환의 시대이다. 우리가 문화적으로, 정치적으로 스스로를 단련시키지 않는다면 100여년 전의 대전환 시기에 저지른 실책이 또다시 반복될까 봐 걱정이다. 김하수/한겨레말글연구소 연구위원·전 연세대 교수
큰 방황은 큰 사람을 낳는다 - 마 데바 와두다 55. 헌신 <지고한 경지에서는 그대가 사랑의 길을 가든 명상의 길을 가든 절정의 경지에서는 여성적이 된다> 위대한 신비의 여인 메라는 실제로 열정적인 헌신자였다. 그녀의 신에 대한 사랑은 엄청난 것이었다. 메라는 왕비였다. 왕비인 그녀가 어느 날 갑자기 길거리로 뛰쳐나가 춤을 추기시작했다. 그러자 왕실에서는 그녀와 연을 끊고 독살하려 하였다. 왕실을 욕되게 하였다는 것이었다. 왕비가 길거리에서 춤을 추자 사람들이 모여 들었고, 그녀는 신에 취하여 사리를 벗어 던졌다. 그녀의 얼굴과 손이 드러났다. 사람들 앞에 드러내서는 안 되는 맨살을.왕실에서는 난리였다. 그런데 그녀의 노래가 그렇게 아름다울 수가 없었다. 그녀의 노래는 가슴 깊은 곳에서 저절로 울려나오는 소리였다. 메라는 남편에게 말했다. <당신이 제 남편이라는 걸 믿지 못하겠어요. 제 남편은 크리슈나예요. 당신은 그저 대리인을 뿐이예요> 왕은 크게 분노했다. 왕은 그녀를 쫓아내 버렸다. 메라는 크리슈나의 성지인 마투라로 갔다. 거기엔 크리슈나를 모시는 가장 큰 사원이 있었다. 그런데 그 사원의 사제장은 죽을 때까지 어떤 여자도 보거나 만나지 않으리라 맹세한 터였다. 30년 동안 그는 단 한 번도 여자를 만나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 어떤 여자도 사원엘 들어와 머물 수가 없었다. 사원에 도착한 메라는 문 앞에서 춤을 추기 시작했다. 그걸 보고 문지기들은 넋이 나갔고, 그저 황홀하였으므로 그녀를 막을 엄두를 아예 못 내었다. 그녀는 쉽게 사원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사원 안에서는 사제장이 마침 예배를 보고 있었다. 그러다 문득 메라를 본 순간 그는 자신의 눈을 의심치 않을 수 없었다. 아찔하였다. 사제장이 외쳤다. <썩 물러가라! 어서 썩! 그대는 어떤 여자도 여기에 들어올 수 없다는 걸 모르는가?> 메라는 웃었다. 그리고 말하기를, <내가 알기로는, 크리슈나 신을 제외한 모든 사람은 다 여자예요. 당신도 그렇지요. 삼십 년 동안이나 크리슈나를 모셨으면서도 아직도 자신이 남자라고 생각한단 말예요?> 사제장은 눈이 번쩍 띄였다. 지고한 경지에서는, 그대가 사랑의 길을 가든 명상의 길을 가든, 절정의 경지에서는, 여성적이 된다.
Board 추천글 2021.10.15 風文 R 1019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참 가슴 찡한 이야기 - 황지니 모두를 사랑한 아버지 인구가 2천 명쯤 되는 미국 노스코와 주의 멜렌데일, 가난한 농촌 마을인 이곳에서 로이 린드 박사는 유일한 의사였습니다. 마을의 젊은이와 아이들은 대부분 린드 박사의 손을 거쳐서 세상에 나왔을 정도로 그는 오랫동안 마을사람들의 건강을 돌봐왔습니다. 허름한 정비소 2층, 박사의 진료소는 새벽까지 불이 환하게 켜져 있습니다. 이것은 '지금 얕은 잠을 자고 있으니 누가 아프면 곧 연락 주시오.'라는 뜻입니다. 또한 한겨울 눈사태 속에서도 만류하는 사람들을 뿌리치고 제설차를 동원해 환자를 진찰하러 가기도 했습니다. 아무리 먼 곳이라도, 아무리 험한 곳이라도 환자가 있으면 즉시 달려가는 린드 박사, 그가 환자 침대 곁에 나타나기만 해도 벌써 병의 절반은 나은 것 같다고 사람들은 말했습니다. 이렇게 평생을 남을 위해 살아온 린드 박사가 70 회 생일을 맞았을 때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독신이었기 때문에 생일을 축하해 줄 아내도 아이도 없었습니다. 이에 마을사람들은 마을 강당에 몰래 생일잔치를 마련했습니다. 밴드도 부르고 커다란 케이크도 준비하고...... 린드 박사는 영문을 모른 채 강당에 들렀다가 그만 깜짝 놀라고 말았습니다. 마을사람들이 한 사람도 빠짐없이 모두 강당에 모여 강당이 떠나갈 듯 큰 소리로 생일 축가를 불러준 것입니다. 그때 누군가가 린드 박사의 자손이 이 자리에 있었더라면 더 좋았을 것이라며 아쉬워했습니다. 그 말이 끝나자마자 꼬마 한 명이 일어나 말했습니다. "제가 박사님 아들이에요." 다시 그 옆에 앉아 있던 여인이 일어나 "제가 박사님 딸이에요."라고 하자 또 누군가가 "저도 박사님 아들입니다."라고 말하며 일어섰습니다. 마침내 강당 안의 모든 사람들이 린드 박사의 자식임을 자처하며 일어섰습니다. 린드 박사는 눈시울이 뜨거워져 할 말을 잃고 사랑스런 자식들을 바라보았습니다. 주름진 피부 밑에서도 우리들의 마음은 젊다. 인생은 우리들이 생각한 것보다 더 즐거운 일이다. (A. 랭)
Board 삶 속 글 2021.10.15 風文 R 572
작은 이야기 1 - 정채봉, 류시화 엮음 3 시련을 딛고 고마운 내 친구, 고통이여 - 양병건 중간고사를 치르는데 처음 뵙는 감독 선생님의 눈이 휘둥그래졌다. 책상을 밀고 휠체어에서 내려와 시험지를 교실 바닥에 놓고 굽은 손으로 문제를 풀고 있으니 놀라신 것도 당연했다. "선생님, 저는 장애가 심해서 엎드려서 시험을 봐야 합니다. 양해 바랍니다." 이렇게 속시원히 말하고 싶었지만 나는 그저 입술을 내밀어 "우, 우, 우..." 라는 말만 내뱉을 뿐이었다. 1973년 5월, 파란 바닷물이 춤추는 충청남도 홍성의 작은 어촌에서 나는 태어났다. 어린 시절 난 굉장히 튼튼한 아이였다. 겨울엔 신발도 신지 않고 지녔으며 사시 사철 산자락을 누비고 다녔다. 여름이면 바닷가, 겨울이면 산이 내 놀이터요, 친구요, 안식처였다. 일곱 살 때 아버지가 심장마비로 돌아가신 것말고는 내 어린 시절은 모든 것이 아름답고 풍요로웠다. 그러나 시샘이라도 하듯 갑자기 병마가 들이닥쳤다. 내가 아홉 살 되던 해였다. 학교가 끝난 뒤 40분이나 되는 길을 걸어 집에 오니 식구들은 모두 학교로 일터로 가고, 마당 멍석 위에 빨간 고추들만 널려 있었다. 평소 낮잠 자는 버릇이 없는데 웬일인지 몸이 나른해서 낮잠을 잤다. 두 시간 정도 자고 나니 오른쪽 허리가 딱딱한 몽둥이로 맞은 것처럼 몹시 아팠다. 시간이 흐를수록 머리가 깨질 것 같아 마침내 나는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마침 밖에서 돌아오신 어머니가 내 울음 소리를 듣고 불안한 표정으로 말씀하셨다. "아니, 병건아! 왜 그러니?" 어머니는 한 손으로 날 안으시고 한 손으로는 내 이마를 짚으셨다. "어휴! 이 열 좀 봐! 안되겠다. 빨리 업혀라." 어머니는 나를 업고 40분이나 뛰어서 홍성군 서부면 보건소로 옮겼다. 하지만 그곳엔 치료 기구도 없고 고칠 수도 없다고 해서 나는 곧바로 홍성의료원으로 이송되었다. 그러나 체계적인 치료가 아닌 얼음 찜질만 했기 때문에 열도 떨어지지 않고 혼수 상태는 계속되었다. 오히려 악화되어 가는 모습을 보신 어머니는 이틀 만에 서울대학병원으로 옮기셨다. 수많은 검사와 방사선 촬영 결과 내 병명은 뇌염으로 밝혀졌다. 이제 더 이상의 치유는 바라지 말라는 의사의 말에 어머니는 그냥 주저앉으셨다. 그때 난 처음으로 어머니의 눈물을 보았다. 서울대학병원에서 한 달 이상 치료를 받았지만, 더 이상의 차도가 없었다. 병의 차도는 둘째치고, 우리 가정이 감당하기에는 병원비가 너무 엄청났다. 인심을 잃지 않은 어머니가 동네 사람들에게 끌어 쓸 수 있는 빚은 모두 끌어 모았지만 병원비를 감당하기엔 역부족이었다. 조그만 구멍가게가 우리 다섯 식구의 생명줄이었는데, 면회 온 동네 아주머니들의 대화 속에서 그것마저 처분했다는 걸 알게 된 나는 어린 심정에도 괜히 살아서 가족들 고생만 시키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문어처럼 흐느적거리는 내 몸은 다시 홍성의료원으로 옮겨졌다. 한 가닥 희망을 붙들고 어머니는 간절하게 매달리셨다. 혼자 되신 어머니는 신앙적으로는 절대자에게 매달리셨고, 병원에서는 의사 선생님에게, 나와 단둘일 때는 내게 매달리셨다. 난 아직 철이 없었지만 옆에 계신 어머니를 위해 웃으려고 노력했다. 어머니가 힘들어하시면 내 가슴이 찢어질 듯 아팠다. 물론 어머니가 내 옆에서 간병을 하시는 동안 집안은 말이 아니었다. 끼니도 제대로 챙겨 먹지 못하는 형과 동생, 부실한 반찬과 메마른 밥, 차가운 국, 난 우리 가족 모두에게 죄인이었다. 내 병원비 때문에 가정 형편은 도저히 좋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홍성의료원에서 1년 정도 버티다가 어머니는 날 퇴원시키고는 끝까지 해보자며 당신의 몸은 아랑곳하지 않으시고 날 업고 경상도 영천, 전라도 여수 등 전국의 한약방, 병원, 심지어 두메산골의 용하다는 침쟁이에게까지 다 찾아 다녔다. 그러나 남편 없이 혼자인 어머니의 뼈를 깎는 간병에도 불구하고 나의 뇌성마비 증세는 조금도 낫지 않았다. 결국 눈덩이처럼 커진 빚 때문에 객지 방문은 끝나고 어머니가 직접 집에서 물리치료를 시작하셨다. 내 몸은 낙지같이 흐물흐물해서 앉혀 놓으면 좌우로 힘없이 쓰러졌다. 그런데 석 달 동안 꾸준히 물리치료를 하자, 손에 힘이 오르기 시작했고 겨우 짚고 앉을 수 있게 되었다. 1년 만에 손발에 힘이 붙고 몸에도 차츰 힘이 생겼다. 우리 모자는 기뻐서 부둥켜안고 얼마나 울었는지 모른다. 그때 난 어머니의 눈에서 쏟아지는 형언할 수 없는 눈물을 보았다. 그때까지의 모든 회한을 씻어 내려는 눈물이었으며, 눈물로 얼룩진 얼굴은 오히려 광채가 났다. 그만큼 우리 어머니의 정성과 자식을 향한 헌신은 평범한 부모 자식간의 사랑을 한 단계 뛰어넘은 것이었다. 내가 힘을 얻고 방안에서 기어다니기라도 하게 되자 생계를 위해 어머니는 조그만 횟집을 시작하셨다. 횟집이라고 해봐야 두 평짜리 홀에 탁자 몇 개 놓고, 남자들이 만지기 힘들다는 생선회를 떠서 파는 곳이었다. 밤늦게 돌아오시는 어머니의 손을 보면 칼에 베어 여기저기 상처가 나고, 그 상처는 아물 날이 없이 흉터로 남았으며, 나중에는 손의 지문도 거의 찾아볼 수 없을 지경이 되었다. 횟집 덕택에 누나, 형 ,남동생의 학비 조달이 가능해지고, 내 병원비 때문에 빌린 돈도 조금씩 갚아 갈 수 있었다. 우리 가정에서도 가끔 웃음이 새어 나왔다. "사람은 태어나는 건 순서가 있지만 죽는 순서는 없다. 하지만 확률적으로 부모가 자식보다 먼저 세상을 뜨니, 내가 죽더라도 병건이 살아갈 최소한의 돈은 마련해야지." 어머니는 그렇게 말씀하시며 도다리, 광어, 붕장어의 뼈들을 추스리셨다. 몸은 조금씩 힘이 올라 가눌 수 있었지만 열서너 살이 되자 갈수록 신경이 바늘 끝처럼 예민해져 가고 육신 역시 야윈 얼굴에 광대뼈가 불쑥 튀어나왔다. 두 눈은 쑥 들어갔으며 목은 건들거렸다. 눈만 감으면 영락없는 송장이었다. 간혹 방송이나 신문에서 신병을 비관해서 자살했다는 기사를 보면 한없는 부러움을 느끼기까지 했다. 얼마나 대단한 일인가? 스스로 목숨을 끊을 수 있는 자유가 있다는 것이. 그러나 내겐 그런 용기도 없었다. 아니, 이상하게도 처참함의 끝에 도달해 있을 때면 항상 누가 나를 끌어당겨 나락으로 떨어지려는 내 생각들을 돌려놓곤 했다. 지금 생각하니 그것은 신앙이었다. 나보다 한 발 앞서서 나의 길을 예비해 두신 절대자와의 오묘한 만남이었다. 그래서 난 죽기를 포기하고 더 열심히 살아야 한다는 생각을 굳혔고, 고통의 밀림 한가운데서 끊임없이 그 고통을 참는 법을 터득해 나갔다. 고통은 고마운 내 친구, 먼 훗날 영광의 빛으로 틀림없이 인도해 줄 길잡이였다. 기쁘게 고통을 덥석 끌어안으니 고통의 과정을 뛰어넘는 놀라운 변화가 왔다. 평생을 고통의 감방에 갇혀 살도록 무기 징역을 선고받은 죄수이지만, 무엇이 문제랴! 입에 올리기도 부끄럽지만, 감히 나는 사람답게 살고 싶었다. 난 학교에 다니고 싶었다. 집에 누워 있으면 책상 앞에 앉아 공부하는 모습이 늘 아른거렸다. 또한 될 수 있으면 가족들 곁을 떠나고 싶었다. 어머니의 거칠어지고 칼에 베인 상처뿐인 손, 움푹 패인 눈, 굵어진 주름살, 이 모든 것에서 벗어나고 싶어서 이곳 저곳 수소문해 보니, 대전에 있는 지체부자유 특수학교인 성세재활학교가 있었다. 열 여섯 살에 초등학교 2학년 중퇴가 최종 학력인 내가 초등학교 4학년에 편입하게 되었다. 내가 학교에 다닐 수 있다니... 어머니는 펑펑 우시면서 날 보내셨다. 그리고 힘들고 어렵다더라도 포기하지 말고 목표를 향해 열심히 살라고 하시면서 애처롭기 그지없는 사랑하는 아들을 집에서 세 시간이나 떨어진 대전까지 보내셨다. 학교 생활과 기숙사 생활은, 갇혀 산 지 7년 만의 외출이어서 그런지 모든 것들이 생소하고 적응이 힘들었다. 아침 일찍 일어나서 방 청소하고 세수, 이불 정리, 등교 준비, 교재 챙기는 것, 과제물 정리, 화장실 사용 등은 내게 너무나 힘든 일이었다. 아무리 독한 마음을 품고 왔다지만 집에 가고 싶어서 우는 날이 훨씬 많았다. 더군다나 혼자 휠체어를 끌지 못하니, 같은 반 친구들이 밀어 주기 전에는 한 발자국도 움직일 수 없었다. 화장실에 가고 싶으니 휠체어를 좀 밀어 달라는 소리가 입 속에서는 나왔지만 상대방에게는 전달되지 못했다. 이틀에 한 번 정도는 바지에 대소변을 쌌고, 토요일마다 빨래와 목욕 때문에 학교에 오시는 어머니에게 내 체면은 말이 아니었다. 집에 가겠다고 우기는 나를 보고 어머니는 단호하게 말씀하셨다. "한 번만 그따위 소릴 하면 절대 내 아들이 아니다. 한 달 안에 대소변 처리에 적응하지 못하면 찾아오지도 않겠다!" 이렇게 소리치신 어머니가 훌쩍 집으로 가버리시자, 나는 무척이나 서럽고 한편으론 겁도 났다. '엄마가 정말로 날 버리면 어떡하지?' 처음 학교 왔을 때의 각오를 되새기며 한 달 동안 정말로 열심히 살았다. 흐물거리는 몸으로 베개를 굴리고, 입으로 이불 자락을 물어서 같은 방의 친구들과 방 정리를 하고, 한 발로 바닥을 디디며 휠체어를 끌고 화장실을 다녔다. 마음을 고쳐 먹으니 모든 것들이 그토록 변해 갔으며 적응 속도도 무척 빨랐다. 열심히 아주 열심히 살았다. 사감 선생님은 특히 작곡에 관심을 갖고 있는 나에게 작곡을 공부하고 있는 대학생을 소개시켜 주었다. 자원 봉사자인 그 대학생으로부터 기초 지식도 배우고 작곡에 대한 개념도 조금씩 정립해 갔다. 또 나는 필기 능력이 떨어지므로 작곡 공부를 컴퓨터로 할 수 있도록 지도해 주셨다. 그 대학생이 내 시에다 멋지게 곡을 붙여 불러 주었을 때는 황홀 그 자체였다. 아직 중학생이므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고등학교에 진학하고, 또 대학 작곡과에 입학해 보란 듯이 작곡 공부를 하는 것이었다. 나는 다각도로 모색한 결과 성세재활학교 중등부 졸업생들이 가장 많이 진학한 경기도 안산의 명혜재활학교 고등부에 진학하기로 결심했다. 명혜학교는 집에서 멀리 떨어져 있기는 했지만, 사감 선생님의 적극적인 추천으로 용기를 내어 원고를 냈고 합격했다. 내 나이 이제 20대 초반의 문턱에 서 있다. 그런데 한 200년 가량 살아온 것처럼 느껴지는 건 웬일일까? 매일 면도날처럼 날카로운 삶 위에서 곡예사처럼 가슴 조이며, 하루하루 살아온 날들을 되돌아보니 신기할 정도로 까마득하기만 하다. 나이를 한 살 더 먹을 때마다, 환경이 바뀔 때마다 벅차도록 숱한 사건과 고통의 연속, 험한 고개란 고개는 모두 내 앞에만 와 있는 듯싶었다. 의사도 포기했고, 그 누구 하나 따뜻한 눈길을 던져 준 이 없던 내가 이렇게 고등학교를 다닐 수 있다는 것은 참으로 믿기 어려운 현실이다. 그러나 아무튼 나는 이렇게 살아서 숨을 쉰다. 그리고 잠시 이렇게 학창 시절의 쉼터에서 지나온 날들을 돌이켜볼 여유도 갖는다. 진정 고맙고 기쁜 일이다. 눈물겹고 가슴 벅찬 일이다. 결국 인간이 되돌아오는 종착역은 신 앞에 무릎 꿇고 겸허하게 머리 숙이는 그곳이다. 그 모습으로 난 숙연히 20대를 받아들이고 싶다. (카톨릭 사회복지국 200주년 장학회 전국 학생수기 금상 수상자)
Board 삶 속 글 2021.10.15 風文 R 723
曲學阿世(곡학아세) 曲(굽힐 곡) 學(배울 학) 阿(아첨할 아) 世(세상 세) 사기 유림열전(儒林列傳)의 이야기다. 한나라 경제(景帝) 때, 시경(詩經)에 정통했던 원고생(轅固生)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강직한 성품과 학문으로 왕자의 스승을 지냈으나 병 때문에 물러났다. 얼마 후, 무제(武帝)가 즉위하자, 원고생은 90세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다시 조정의 부름을 받게 되었는데, 아첨을 일삼는 관리들은 그가 너무 늙었다며 헐뜯었다. 원고생이 조정의 부름을 받았을 때, 당시 60세이던 공손홍(公孫弘)이라는 사람도 함께 부름을 받았다. 공손홍은 늙은 원고생을 꺼리며 마땅치 않은 눈초리로 바라보았다. 이에 원고생은 공손홍의 태도를 보고 말했다. 바른 학문에 힘써 직언(直言)하도록 하시오. 배운 것을 굽혀 세상에 아부하는 일이 없도록 하시오(務正學以言, 無曲學以阿世). 일부 대학, 그것도 국립 대학의 교수 채용을 둘러싼 비리(非理) 소식이 보도되었다. 자존심을 포기한 선비들의 왜곡된 학문의 결과이며, 이미 알만한 사람들은 다 알고 있는 별로 신기하지 않은 비밀(?)이기도 하다. 曲學阿世 란 이렇듯 자신의 학문을 굽히면서 권세나 세속에 아첨하는 것 을 뜻하는 말이다. ……………………………………………………………………………………………………………… 곡학아세(曲學阿世) // 정도(正道)를 벗어난 학문으로 세상 사람들에게 아첨함. 《出典》'史記' 儒林傳 한(漢)나라 6대 황제인 경제(景帝:B.C 157-141)는 즉위하자 천하에 널리 어진 선비를 찾다가 산동(山東)에 사는 원고생(轅固生)이라는 시인을 등용하기로 했다. 그는 당시 90세의 고령이었으나 직언을 잘하는 대쪽 같은 선비로도 유명했다. 그래서 사이비(似而非) 학자들은 원고생을 중상비방(中傷誹謗)하는 상소를 올려 그의 등용을 극력 반대하였으나 경제는 끝내 듣지 않았다. 당시 원고생과 함께 등용된 소장(少壯) 학자가 있었는데, 그 역시 산동 사람으로 이름을 공손홍(公孫弘)이라고 했다. 공손홍은 원고생을 늙은이라고 깔보고 무시했지만 원고생은 전혀 개의치 않고 공손홍에게 이렇게 말했다. "지금, 학문의 정도(正道)가 어지러워져서 속설(俗說)이 유행하고 있네. 이대로 내버려 두면 유서 깊은 학문의 전통은 결국 사설(私設)로 인해 그 본연의 모습을 잃고 말 것일세. 자네는 다행히 젊은 데다가 학문을 좋아하는 선비란 말을 들었네. 그러니 부디 올바른 학문을 열심히 닦아서 세상에 널리 전파해 주기 바라네. 결코 자신이 믿는 '학설을 굽히어 [曲學]' 이 '세상 속물들에게 아첨하는 일[阿世]'이 있어서는 안 되네." 원고생의 말이 끝나자 공손홍은 몸둘 바를 몰랐다. 절조를 굽히지 않는 고매한 인격과 학식이 높은 원고생과 같은 눈앞의 태산북두(泰山北斗)를 알아 보지 못한 자신이 부끄러웠기 때문이다. 공손홍은 당장 지난날의 무례를 사과하고 원고생의 제자가 되었다고 한다. 固之徵也 薛人公孫弘亦徵 側目而視固 固曰 公孫子 務正學以言 無曲學以阿世. 【유사어】어용학자(御用學者) ……………………………………………………………………………………………………………… 곡학아세(曲學阿世) 曲:굽을 곡. 學:학문 학. 阿:아첨할 아. 世:인간‧세대 세. [유사어] 어용학자(御用學者). [출전]《史記》〈儒林傳〉 학문을 굽히어 세속(世俗)에 아첨한다는 뜻으로, 정도(正道)를 벗어난 학문으로 세상 사람에게 아첨함을 이르는 말. 한(漢)나라 6대 황제인 경제(景帝:B.C. 157~141)는 즉위하자 천하에 널리 어진 선비를 찾다가 산동(山東)에 사는 원고생(轅固生)이라는 시인을 등용하기로 했다. 그는 당시 90세의 고령이었으나 직언을 잘하는 대쪽같은 선비로도 유명했다. 그래서 사이비 학자들은 원고생을 중상비방(中傷誹謗)하는 상소를 올려 그의 등용을 극력 반대했으나 경제는 끝내 듣지 않았다. 당시 원고생과 함께 등용된 소장(小壯) 학자가 있었는데, 그 역시 산동 사람으로 이름을 공손홍(公孫弘)이라고 했다. 공손홍은 원고생을 늙은이라고 깔보고 무시했지만 원고생은 전혀 개의치 않고 공손홍에게 이렇게 말했다. “지금, 학문의 정도(正道)가 어지러워져서 속설(俗說)이 유행하고 있네. 이대로 내버려두면 유서 깊은 학문의 전통은 결국 사설(邪說)로 인해 그 본연의 모습을 잃고 말 것일세. 자네는 다행히 젊은데다가 학문을 좋아하는 선비란 말을 들었네. 그러니 부디 올바른 학문을 열심히 닦아서 세상에 널리 전파해 주기 바라네. 결코 자신이 믿는 ‘학설을 굽히어[曲學]’이 ‘세상 속물들에게 아첨하는 일[阿世]’이 있어서는 안 되네.” 원고생의 말이 끝나자 공손홍은 몸둘 바를 몰랐다. 절조를 굽히지 않는 고매한 인격과 학식이 높은 원고생과 같은 눈앞의 태산북두(泰山北斗)를 보지 못한 자신이 부끄러웠기 때문이다. 공손홍은 당장 지난 날의 무례를 사과하고 원고생의 제자가 되었다고 한다.
Board 고사성어 2021.10.15 風文 R 822
세로드립 언어의 기능을 교과서적으로 이야기하면, 정보와 사상을 전달하는 수단이라고 줄여 말할 수도 있다. 그러나 교과서 안의 지식보다 바깥 지식이 더 많듯이, 언어도 교과서 바깥의 기능이 더 많다. 예를 들어 말장난, 남을 놀리거나 약 올리기, 거룩한 대상에 대한 희롱이나 조롱 같은 것들은 언어의 또 다른 다양한 역할이다. 점잖은 작가들은 언어로 사랑과 비애, 순정과 분노를 적절히 걸러내며 그들의 ‘작품’을 만든다. 반대로 세속의 보통사람들은 언어로 온갖 장난을 치며 살아간다. 진지함보다는 가벼움으로, 감정의 승화보다는 배설을 선호한다. 이른바 속세의 말장난들이다. 대중이 생산한 통속문학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오래전에 유행했던 ‘덩달이 시리즈’라든지 ‘만득이 시리즈’ 또는 요즘도 간간이 하고 있는 ‘삼행시’ 같은 것들을 예로 들 수 있겠다. 뜻하지 않게 요즈음 ‘세로드립’이라는 새로운 장르가 등장했다. 가로로 쓴 문장들의 첫 번 음절들을 세로로도 읽을 수 있게 메시지를 이중으로 만든 것을 말한다. 가로로 던지는 사연은 긍정적인 것으로, 세로로 말하는 내용은 부정적이고 비판적인 것으로 엮음으로써 상호모순적이고도 양가적인 태도를 보여준다. 고도의 문학 정신을 보여주는 것은 아니지만 대중 속에서 끓어오르는 비아냥, 조소 등을 잘 드러내 준다. 이런 작품이 점잖은 공모전에 당선되어 웃음거리가 되고 이러한 언어유희를 놓고 송사까지 벌어지는 모양이다. 희롱당한 측의 노여움은 백분 이해되나 유희나 개그를 대상으로 재판을 벌인다는 것은 더 큰 조롱을 불러들이는 지름길이 되지 않을까 한다. 차라리 스스로를 되돌아보며 그와 같은 찬양 문학의 공모전이 과연 지금의 시대정신에 부합하기는 했는지를 되묻는 것이 가장 슬기로운 길이 아닌가 한다. 김하수 한겨레말글연구소 연구위원·전 연세대교수
‘선진화’의 길 흥미로운 현상이 벌어지고 있다. 우리 모두가 바라는 정치의 문제인 동시에 언어의 문제라고도 볼 수 있는 ‘선진화’라는 말이 여러 가지를 되돌아보게 한다. 기업이나 대학을 선진화하자는 말에 누구든지 일단은 수긍하지 않을 수 없다. 아직 우리 사회의 온갖 제도에 불완전한 부분이 많다는 것을 널리 받아들이고 있기 때문이다. 선진이란 말이 더 앞서 나아간다는 뜻을 품고 있으니 그것을 마다할 일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도대체 무엇이 선진인가 하는 것은 다시 한번 곱씹어 보아야 할 말이다. 선진국이라고 하면 무슨 호박이 저절로 굴러떨어지는 낙원처럼 생각하겠지만 선진 사회라는 게 뭐 별거 있겠는가. 남보다 문제를 먼저 발견하고 먼저 해결한 사회가 아니겠는가. 요즈음에 벌어지는 선진화라는 구호의 문제점은 아무 개념 없이 ‘선진’이라는 말을 남용하는 데 있는 것 같다. 그러다 보니 경영의 선진화, 국방의 선진화, 공기업의 선진화, 의료 선진화 등 거의 모든 주요 과제들을 얼토당토않을 정도로 선진화라는 하나의 개념에다가 꿰어 보려고 아등바등하고 있다. 그러다가 이루어낸 가장 그럴듯한 작품이 바로 속칭 ‘국회선진화법’이 아닌가 한다. 다수당이 횡포를 부리기 어렵게, 그리고 되도록 여당과 야당이 협력하게 만든 작품이다. 또 지난번에 목격했듯이 무제한 발언도 가능하게 만든 법이기도 하다. 국회의장의 본회의 직권상정 요건도 강화했다. 효율성보다는 협력적인 의회제도를 강화한 모양새를 갖추고 있다. 이 법에 대해 여당은 여당대로, 야당은 야당대로 불만이 있는 모양이지만 잘만 활용한다면 ‘협치’와 ‘민주주의’가 공생할 수도 있을 것 같다. 차제에 의회제도의 모순 하나를 이렇게 우리 손으로 풀어 보는 것도 아주 중요한 의미가 있다고 본다. 이 법으로 진정 의미 있는 선진화된 사회에 먼저 도달했으면 한다. 선진국은 이러면서 달성되는 것이다. 김하수 한겨레말글연구소 연구위원·전 연세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