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참 가슴 찡한 이야기 - 황지니 절름발이 인생 큰 공업도시의 후생사업국의 한 여직원이 빈민가에서 일하게 되었습니다. 그곳에서 12살쯤 되는 한 아이를 알게 되었는데 그 아이는 소아마비로 희망없는 절름발이였습니다. 그녀는 그 아이를 매우 불쌍히 생각하여 그 아이가 걸을 수 있도록 무엇인가 도와주어야겠다고 결심했습니다. 어느 날 그녀는 시내의 유명한 의사를 찾아갔습니다. 그리고 의지 할 곳 없는 절름발이 소년에 대한 깊은 애정과 관심을 호소했습니다. 의사는 감동하여 즉시 그 아이를 수술해 보겠다고 승낙했습니다. 수술은 매우 오랫동안 계속되었습니다. 수술 후 의사와 후생국의 여직원은 소년의 회복을 위해 정성을 다했고 열심히 걷는 법을 가르쳤습니다. 마침내 소년은 같은 또래의 아이들처럼 뛰기도 하고 달리기도 하게 되었습니다. 세월이 흘러 중년부인이 된 후생국 직원과 의사가 길거리에서 우연히 마주쳤습니다. 의사는 자기네 집에 가서 차라도 들자고 했습니다. 많은 대화가 오가는 동안에 자연히 그들이 애를 쓴 절름발이 소년의 얘기가 나왔습니다. "히리안 소년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하고 외과 의사가 물었습니다. "예, 저......" 하고 부인은 말끝을 흐렸습니다. "미안합니다. 그동안 두 분께 소식이 끊겼습니다만, 지금 그는 무얼 하고 있습니까? 의사가 되었습니까? 아님 과학자?" "아니오." 부인은 매우 진지하게 대답했습니다. "그는 지금 여기에 없습니다. 감옥에 있습니다. 살인자로서 형기를 보내고 있습니다. 쵸우 박사님, 우리는 그에게 걷는 법만 가르치려고 애썼지 걸어가야 할 곳을 가르치는 걸 그만 잊고 있었습니다." 희망없는 일은 헛수고이고, 목적없는 희망은 지속할 수 없다. Work without Hope draws nectar in a sieve, And Hope without an object cannot live. (S. T. 코울리지)
작은 이야기 2 - 정채봉, 류시화 엮음 1. 평범한 행복 2 선물 - 박화영 가끔 아주 쓸쓸해지는 때가 있다. 마치 아무도 없는 벌판에 나혼자 서 있는 듯 막막한 느낌, 마치 고아가 된 기분이랄까. 그런 느낌은 많은 사람들 속에 섞여서 일하고 있을 때, 그리고 그 일이 매일 반복되는 단조로운 일일 때 더욱 자주 찾아온다. 내가 이런 기분에 대해 얘기하면 친구 K는 말했다. "마음이 공허해서 그런 거야. 연애라도 해봐." 하지만 원인이야 어쨌든 나는 내 감정을 점점 주체할 길이 없어져 한때는 불안하기조차 했다. 그런데 지난 크리스마스에 나는 K로부터 꽤 큼직하게 포장된 선물을 하나 받았다. 풀어 보니 그 속에는 스케치북 한 권과 붓 네자루, 팔레트, 유화 물감, 자그만 캔버스 하나에 이젤까지 그림 도구가 가득 들어 있었다. 이런 걸 왜 내게 주었을까? 스케치북을 펴보니 거기에 이렇게 적혀 있었다. (그림을 그려 보세요. 마음의 병이 나을 겁니다. K로부터.) 친구에게 하소연을 한 벌인 모양이었다. 붓도 제대로 쓸 줄 모르는 내가 어떻게 유화를 그린단 말인가? 나는 막막하고 미안하기조차 했다. 그대로 한 해를 넘긴 어느 날 마침 화방 앞을 지나치게 되었다. 나는 내 그림 도구 생각이 나서 안으로 들어가 보았다. 한참 표구해 놓은 그림들을 보다가 화방 주인과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내가 물었다. "유화는 어렵지요?" 화방 주인이 말했다. "왠걸요. 요새는 아마추어들이 유화를 많이 그려요. 초등학교 학생들도 그리는 걸요." 그날 저녁 나는 용기를 내어 그림 도구들을 펼쳐 놓았다. 그런 뒤로 나는 마음이 텅 빈 것 같은 느낌에서 어느 정도 벗어날 수 있었다. 점심 시간에는 가까운 화랑들을 순례하거니 화첩들을 사러 다니게 되었고, 내 딴에는 미술적 눈으로 세상을 음미하게 된 것이다. (회사원)
Board 삶 속 글 2021.11.10 風文 R 602
주어 없는 말 주어가 없다는 말은 보통은 국어 선생님들이 해야 제격이다. 그러나 종종 정치권에서 주고받는 논쟁에는 주어가 없다는 둥 하면서 느닷없는 문법 논쟁이 일다가는 표연히 사라지곤 한다. 문법 상식으로는 당연히 모든 문장에는 주어가 있는 것이 옳게 느껴진다. 서술어는 있는데 그 움직임의 주체인 주어가 없다는 것은 세상의 순리가 아닌 듯이 느껴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언어는 이 세상의 이치를 그림 그리듯이, 또 사진 찍듯이 드러내지는 않는다. 언어 자체가 인습화된 구조를 가지고 있기도 하고, 시대에 따라 그 형식에 차이가 생기기도 한다. 그러면서 숱한 언어적 법칙이 역사적으로 켜켜이 쌓여 있어서 언어논리적인 규칙만으로는 설명이 쉽지 않은 부분도 생긴다. 그러다 보면 우리는 ‘비가 온다’고 하면서 ‘비’라는 주어를 내세우는데 영어에서는 의아하게도 ‘it’이라는 가주어를 쓰기도 한다. 또 우리가 말을 하다 보면 주어나 목적어를 내보이지 않는 것이 훨씬 더 자연스러울 수가 있다. 그렇다고 해서 주어가 무엇인지, 누구인지 모르는 것도 아니다. “도둑이야!” 아니면 “불이야!” 하고 소리를 지르면 주어가 없는 탓에 무슨 말인지 도무지 모르겠다고 할 사람은 없다. 어디냐고 되물으며 함께 뛰어가려 할 것이다. 언어를 해석하는 데 가장 중요한 것은 문법만도 논리만도 아니다. 그것은 남의 마음을 이해하고자 하는 감수성이다. 종종 외국에 가서 짧은 외국어로 실컷 여행했다고 자랑할 수 있는 까닭은 자신의 언어 능력 덕분이라기보다는 우리를 맞이하는 그 현지인들의 감수성 덕이 더 크다. 정치인들이 주어가 없다고 둘러댈 때마다 그들의 정치적 좌표를 감수성을 가지고 들여다보라. 그들이 왜 주어가 없다고 책임을 회피하고 있는지 더욱더 큰 문법을 이해하게 될 것이다. 김하수/한겨레말글연구소 연구위원·전 연세대 교수
국민께 감사를 감사를 드린다는 것은 남에게 도움과 은덕을 입은 사람들이 반드시 행해야 할 중요한 절차다. 남을 돕고 나서 감사를 받는 일도 무척 흐뭇하고 보람된 일인 것처럼 감사를 드리고 나면 조금이나마 마음의 빚을 갚은 듯한 느낌이 들기도 한다. 올림픽과 같은 큰 행사에서 좋은 성과를 올리는 선수들은 거의 하나같이 “국민 여러분께 감사를 …” 하며 인사를 한다. 뿌듯한 일이지만 사실 돌이켜보면 과연 그런 인사를 받아야 하는지 거북해지는 부분도 있다. 그들이 땀 흘리며 준비를 할 때는 그다지 관심을 표해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메달을 받은 다음에야 알려지는 일화를 통해서야 이날이 있기까지 본인과 가족의 노력과 희생이 얼마나 대단했는지를 겨우 접하게 된다. 그 기간 동안 국민들은 세금 낸 것 빼고는 인간적으로 이렇다 할 도움이나 편의 어느 것 하나 제대로 해주지 못한 것 같다. 반대로 조금이라도 실수를 하거나 메달을 놓쳤을 때의 비난과 야유가 너무 심하지 않았나 싶다. 그러니 그 감사에 마음이 편할 리가 없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그들의 감사는 그저 그런 사전적인 의미의 ‘고마움’의 표시가 아닌 더 깊은 뜻과 여망이 담겨 있지 않은가 한다. 일방적인 해석이지만 그들이 표하는 감사는 진정 감사를 표할 수 있도록 평소에도 깊은 관심을 보여 달라는 애원이 담겨 있는 것은 아닐까? 올림픽 같은 데에서만 열광하며 응원했지 평소에는 중계방송조차 찾을 수 없는 종목이 얼마나 많은가. 되도록 모든 종목이 골고루 중계되고, 장애인 스포츠나 난민 스포츠조차 소외되지 않게, 국민 모두 모든 스포츠를 골고루 즐기며 후원할 수 있는 시스템을 만들어 가는 것이 그들의 감사의 말씀에 응하는 국민의 올바른 태도가 아닌가 한다. 김하수/한겨레말글연구소 연구위원·전 연세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