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이야기 2 - 정채봉, 류시화 엮음 1. 평범한 행복 2 지붕 위의 풀 - 강형철 은행에서 태민이가 하는 일이란 작원들의 구두를 닦는다든가 잔심부름을 하는 일이었다. 그래도 오후 세 시 반쯤 책가방을 들고 야간 고등학교에 나가는 모습을 보면 활기에 차 있고 밝아 보였다. 다른 친구들은 직장을 구하려 해도 구하지 못하는데 한 달에 얼마씩이라도 받는다는 게 얼마나 다행이냐는 것이었다. 직장인들이 의레 그렇듯이 나도 태민이에 대해 특별한 관심을 가진 건 아니었다. 내 구두나 잘 닦아 주고 잔심부름을 해주면 그만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개인적으로 일이 생겨서 그 친구를 찾게 되었는데, 분명 학교에 갈 시간이 아님에도 보이지 않았다. 한참 찾다가 무심코 은행 뒤편으로까지 가 보았다. 편소에 거의가지 않던 곳이었다. 거기에는 사다리가 지붕에 걸쳐져 있었다. 순간 나는 탐정이라도 된 듯이 사다리를 오르기 시작했다. 거의 올라갔을 때 슬라브 지붕 구석에 태민이가 고개를 숙이고 조용히 앉아 있는 모습이 보였다. 습관적으로 그 친구의 이름을 부르려다 갑자기 야릇한 생각이 들어 발자국 소리를 죽이고 그 친구 몰래 다가가 보았다. 그 친구는 책을 읽고 있었다. 순간 그 모습이 너무나 아름답고 거룩하리만치 고와 보였다. 또한 심부름을 시키기 위해 지붕까지 집요하게 추적해 올라간 내 모습이 매우 부끄럽게 느껴졌다. 나는 슬급슬금 물러나 내려오고 말았다. 사다리를 잡고 내려오면서 내 눈이 지붕과 거의 수평이 되었을 때 나는 보았다. 그 슬라브 지붕 위에는 어느 곳으로부터 날아왔는지 풀씨들이 싹을 틔우고 있었다. 분명 흙도 없는데 그 시멘트 바닥 위에 뿌리를 내리고 파랗게 풀이 자라고 있었다. (시인) 서 있는 껌팔이 소녀 - 박수자 나는매일 출퇴근길에 명동 충무로 지하도를지나야 한다. 그 지하도 계단 중간즘엔 열여섯 살쯤 된 소녀가 매일 껌을 팔고 있다. 양쪽 어깨 밑에는 소아마비로 인해 불편해진 몸을 지탱하는 목발을 언제나 짚고 있다. 처음 그 소녀를 보며 난 동정심에서 아침마다 껌을 하나씩 샀다. 그때마다 소녀는 작은 목소리로 "감사합니다"라는 말과 함께 고개를 숙이곤 했다. 하찮은 일, 내가 껌을 하나씩 팔아 주는 것이 그녀에게 작은 보탬이 된다는 생각에 그후로 지하도를 지나는 것이 내겐 하나의 기쁨이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난 이상한 의문을 가지게 되었다. 삼복 더위, 그것도 목발 때문에 힘이 들어 얼굴에는 담방울이 흘러내리는데도 소녀가 한 번도 주저앉아 있는 걸 보지 못한 것이다. 그래서 하루는 내가 물었다. "그렇게 서 있으면 힘들 텐데 왜 하루 종일 서 있기만 해요? 그냥 앉아 있기도 하지요." 그러자 그녀는 한참을 머뭇거리다 조용히 말했다. "제가 털썩 주저앉아 껌을 판다면 사람들은 다만 동정심으로 제 껌을 사줄 거예요. 이렇게 서 있기라도 한다면 저 또한 땀을 흘리며 노력하는 자세를 보여 줄 수 있고, 제 껌을 팔아 주는 손님께도 최소한의 저의 성의인 것 같아서요..." 그 앞에서 난 말을 채 맺지 못하는 그녀의 손을 잡고 그저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요, 정말 그렇군요." (회사원)
Board 삶 속 글 2022.01.13 風文 R 597
과혁지시(裹革之尸) // 전쟁에서 싸우다 죽은 시체. 《出典》'後漢書' 馬援傳 마원(馬援)은 후한 광무제 때 복파장군(伏波將軍)으로 지금의 월남인 교지(交趾)를평정하고 돌아온, 용맹과 인격이 뛰어난 맹장으로 다시 계속해서 남부지방 일대를 평정하고 수도 낙양(洛陽)으로 돌아왔을 때 많은 사람들의 찬사를 받았다. 환영인파 속에는 지모가 뛰어나기로 유명한 맹익(孟翼)도 있었는데 그도 판에 박은 듯 한 인사말을 하자 마원은, "나는 그대가 남다른 충고의 말을 해줄 것으로 기대했는데 남과 똑같은 인사만 한단 말 인가. 옛날 복파장군 노박덕(路博德)이 남월(南越)을 평정하고 일곱 군(郡)을 새로 만드는 큰 공을 세우고도 겨우 수백 호(戶)의 작은 봉토를 받았다. 지금 나는 별로 큰 공을 세우지도 못했는데 작은 공에 비해 상이 너무 크네. 이대로 영광을 오래 누릴 수는 없을 것 같네. 그대에게 무슨 좋은 생각이 없는가?" 맹익이 좋은 꾀가 생각나지 않는다고 하자 마원은, "지금 흉노와 오환(烏桓)이 북쪽 변경을 시끄럽게 하고 있다. 이들을 정벌할 것을 청하리라. 사나이는 마땅히 변방 싸움터에서 죽어야만 한다. 말가죽으로 시체를 싸서 돌아와 장사를 지낼 뿐이다.(以馬革?尸還葬耳) 어찌 침대 위에 누워 여자의 시중을 받으며 죽을 수 있겠는가?" 그가 자청하여 다시 싸움터에 나가게 되자 광무제는 백관들에게 조서를 내려 마원을 다 같이 환송토록 명했다고 한다.
Board 고사성어 2022.01.13 風文 R 738
주권자의 외침 세상이 들끓고 있다. 들끓는다는 말은 너도나도 하고 싶던 말들을 거침없이 쏟아낸다는 뜻일 게다. 살아가면서 거침없이 말을 할 수 있는 기회는 그리 흔하지 않다. 두루 알고 있다시피 우리 헌법 1조 2항을 보면,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고 한다. 주권이라 함은 매우 논쟁적이기는 하나, 한 국가가 자기결정권을 집행할 수 있는 천부적이고도 법적인 정당성을 가리킨다. 그런데 그러한 주권의 바탕이 되는 권력이 바로 우리들 한 사람 한 사람으로부터 나온다니 얼마나 뿌듯한 일인가? 문제는 우리의 이 권력이 그냥 집행되는 것이 아니라 선거로 뽑힌 자들에게 위임됨으로써 효력을 발생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권력을 위임받은 그들이 일을 그르치고 있으면 국민들은 답답하기 짝이 없게 된다. 어쩔 수 없이 주권의 원천이자 주인인 국민이 직접 정치에 가담하게 된다. 이것이 격렬해지면 혁명이 되고, 온건하면 저항운동이다. 주권자로서의 국민이 제일 쉽게 할 수 있는 것은 일단 ‘외치는 일’이다. 거리에서나 시장에서나 가리지 않고 외쳐서 뜻을 같이하는 사람들을 만나는 것이다. 이럴 기회가 그리 많지 않다. 꿈의 정치라고 할 수 있는 ‘직접민주주의’를 실천하는 것이다. 그리고 주권자 다수가 행동하면 그것이 바로 법이다. 주권자가 권력의 원천이기 때문이다. 국민이 위임했던 입법권과 사법권의 회수를 외치는 순간은 그래서 준엄하다. 거리의 함성은 개돼지들의 비명이 아니라 주권자의 선언이다. 투표가 끝나면 늘 허전했던 국민들이 ‘비로소’ 스스로 권력을 집행하는 것이다. 절대로 주눅 들 일이 아니다. 진정한 주권자는 자신의 요구를 분명히 ‘말’로 표현해야 한다. 그것이 주권의 구체적 실현이다. 김하수/한겨레말글연구소 연구위원·전 연세대 교수
마녀사냥 말로 정치적 공방을 정신없이 하다 보면 자신이 지금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지 정리가 안 되는 경우가 많은가 보다. 집권층에 쏟아지는 비판과 비난에 다급한 몇몇 사람들이 ‘마녀사냥’이라는 말을 입에 올린다. 그런데 과연 마녀사냥이란 말이 지금 펼쳐지는 상황을 적절하게 비유한 것일까? ‘마녀사냥’은 유럽의 중세기 막판에 벌어진 종교적 광기였으며 그 비이성적인 작태가 실로 엽기적인 수준이었다. 짐승도 차마 못할 짓을 인간이 저질렀으니 그 과정과 결과를 두고두고 역사적으로 기억해야 한다. 더구나 그 피해자 대부분이 당시엔 사회적 주체로 제대로 인정 못 받던 여성들이었다는 점에서 오늘날에도 또 다른 약자들이 외면받지는 않는지 교훈 삼아야 한다. ‘마녀사냥’이라는 단어로 우리의 정치 담론을 비유한다면 ‘현 집권층에 대한 분노 표현’보다는 단연코 ‘종북몰이’가 이에 해당한다. ‘마녀사냥’처럼 ‘종북몰이’도 불확실한 개념을 근거로 소수의견이나 정치적 약자들, 또 이들을 대변하는 지식인들을 도맷금으로 범죄화했다. 그 점에서 중세 말기의 마녀사냥과 별로 다를 바 없다. 그런데 지금의 정부 비판을 마녀사냥이라며 분개하는 이들이 사실상 종북몰이를 즐겼던 정파의 사람들, 혹은 그들과 한편에 섰던 사람들이란 것이 참 희한한 일 아닌가? 명료하지 못한 개념을 함부로 사용하면 스스로 발등 찍는 말을 하기 쉽다. 이것을 자가당착이라 한다. 말을 이성적으로 제어하지 않아 생기는 현상이다. 또 그동안 의미와 가치를 깊이 생각하지 않고 마구잡이 정책과 발언을 해왔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하루빨리 책임질 사람은 책임을 지고 정치의 언어를 이성의 언어로 혁신해야 한다. 그리고 우리도 이 같은 담론 공방을 잘 기록하여 길이길이 후세에 교훈으로 남겨야 한다. 김하수/한겨레말글연구소 연구위원·전 연세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