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민정음 어느 국회의원이 엄숙한 국정조사장에서 갑자기 웃음을 터뜨렸다. 점잖지 못하다는 말을 피하지는 못하겠지만 그런 경우가 이해되지 않는 것은 아니다. 긴장되고 지엄한 분위기일수록 아주 사소한 불균형이나 예상치 못했던 긴장 파괴로 웃음이 터지기 쉽다. 또한 말이란 것에는 엄숙한 용도도 있으나 우스개의 용도도 있다. 말로 하는 놀이에까지 이르지는 못했지만 종종 글자로 장난치는 놀이도 있다. 주로 인터넷에서 ‘대한민국’을 ‘머한민국’으로 쓴다든지 하면서 모양이 비슷한 글자로 규범화된 언어가 가지고 있는 엄숙함을 희화화하는 것이다. 또 그 장난이 여러 공직자들이나 유명 인사들의 이름에까지 다다른다. 그러다 보니 이제는 박근혜 대통령의 이름을 ‘박ㄹ혜’라고 적는 것도 꽤 자주 눈에 뜨인다. 돌이켜보면 과거에 이명박 대통령의 이름도 ‘이띵박’, 김대중 대통령의 이름은 ‘김머중’으로 적어 놓는 짓궂은 일도 꽤 있었다. 대통령만 아니라 연예인 유재석씨도 ‘‘윾재석’으로 적어 놓으면 발음도 쉽지 않다. 야구 동호인들의 사이트에서 시작해서 ‘야민정음’이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고, 그러다 보니 야구선수 강귀태씨도 ‘강커태’라는 야민정음으로 표기되기도 했다. 결국 야민정음은 공직자나 유명 인사들한테 대중이 농담을 걸거나 장난치는 모양새가 된 듯싶다. 일종의 ‘문자 오락’이 된 셈이다. 또 이런 장난을 보고 ‘한글 파괴’라고 노여워하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그 정도의 장난 가지고 무너지거나 망가질 한글이 아니다. 오히려 다양한 용도를 가지게 되면서 우리의 언어 문화의 통속적 저변을 더욱 넓혀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도 된다. 한글로 다양한 디자인 작품을 만드는 것도 큰 틀에서 보면 이런 자유분방한 의식에서 비롯했다고 할 수 있지 않겠는가? 김하수/한겨레말글연구소 연구위원·전 연세대 교수 ………………………………………………………………………………………………………………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참 가슴 찡한 이야기 - 황지니 뱁새들은 황새를 몰라본다. 정명공주 집에 새로 며느리를 맞는 큰 잔치가 있었습니다. 정명공주는 상감 인조에게 있어서는 고모가 되는 터라 특히 잔치를 성대하게 하기 위하여 중신들의 부인에게 참여하라는 명이 내려졌습니다. 그래서 정명공주 집에는 높은 벼슬자리에 있는 중신들의 부인들이 모여들었는데 그 차림새의 호화스러움은 가히 백화난만한 것이었습니다. 한데 그 와중에 보잘 것 없는 가마가 들어오더니 한 노파가 내렸습니다. 그 행색은 수수하기 이를 데 없어 여느 평민집 늙은이 같았습니다. "저런 늙은이가 여기에는 왜 왔을까?" "아마 어느 댁의 심부름 온 하인이겠지요." 성장한 부인들은 각기 한마디씩 하면서 비웃는 빛이 역력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때 정명공주는 황망히 내려가 노부인을 정중하게 맞으며 융숭하게 대접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자 모든 사람들이 수군거리기 시작했습니다. "공주마마께서는 저 늙은이를 꽤나 극진히도 대하시는군요." "인자하셔서 그러시겠지만 좀 과한 것 같군요. 보잘것없는 하인배를 저토록 우대하시다니" 얼마 후 노파는 돌아가겠노라며 일어섰습니다. 정명공주가 만류하였으나 노파는 극구 사양하다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사실은 어서 돌아가 저녁을 지어야 합니다. 집의 대감은 약원도 제조로 일찍 대궐에 들어갔으며 이조판서인 큰아들은 정사가 많다 하여 대궐에 들어갔습니다. 둘째는 승지로 마침 입직하는 날입니다. 그러니 제가 가서 저녁을 준비하여 각기 보내 주어야만 한답니다." 그제서야 이 노파가 바로 재상 이정귀의 부인임을 안 손님들은 모두 입을 다물고 말았습니다. 공손한 사람은 남을 모욕하지 않고 검소한 사람은 남에게서 빼앗지 않는다. (맹자) 우리들 마음가짐의 바탕 끈기는 마음의 상태이므로 그것을 얼마든지 발전시킬 수 있습니다. 다른 모든 마음가짐과 마찬가지로 끈기도 분명한 기초 위에 세워지는 것입니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자신이 품고 있던 목표나 목적이 조그만 장애나 불행에 부딪치면 금방 체념하곤 합니다. 그래서 나타난 장애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목적달성을 위해 노력하는 사람은 드문 것입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서 끈기가 이기지 못하는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성공에 이르는 모든 요소 중에서 가장 큰 것이 바로 이 끈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반대로 끈기가 없는 것이 실패의 주된 요인이 된다는 것은 말할 나위도 없습니다. 이같은 사실은 빛나는 업적을 남긴 사람들을 살펴보면 금방 알 수 있습니다. 포오드는 끈기를 제외하면 아무런 자랑할 만한 특징을 지니지 못한 사람이었다고 합니다. 미시건의 그린필드에서 태어난 포오드는 어려서부터 기계 만지는 일에 흥미를 가지고 오직 자동차의 설계에 힘을 기울여 결국은 가솔린으로 달리는 자동차를 만드는데 성공했습니다. 그 후에도 계속 자동차의 개량에 전념하여 포오드 자동차 회사를 설립하여 값싸고 성능 좋은 T형 자동차를 생산해 냈습니다. 마침내 그는 대량생산으로 원가절감이 가능해지자 노동자의 임금을 올려 주고 노무비를 절감하는 바람직한 경영체제를 확립시켰습니다. 에디슨은 학교를 석 달밖에 다니지 않았지만 세계 최대의 발명왕이 됐습니다. 그는 끈기있게 연구에 매달려 축음기와 전화기, 전등과 전지 등을 만들어 냈습니다. 포오드와 에디슨의 성공을 가져오게 한 비결이 끈기라는데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그런 끈기를 형성시켜 나갈 수 있을까요? 끈기는 마음의 상태이므로 그것을 얼마든지 발전시킬 수 있습니다. 다른 모든 마음가짐과 마찬가지로 끈기도 분명한 기초 위에 세워지는 것입니다. 이렇게 기초를 이루는 몇 가지 요소를 발전시켜 나간다면 우리도 끈기를 양성화시켜 나갈 수 있습니다. 다음에서 몇 가지 요소를 제시해 보고자 합니다. 첫째, 먼저 자기가 무엇을 하는가를 알아야 합니다. 이것이 끈기를 기르는 가장 중요한 단계라고 할 수 있습니다. 분명하고 강한 동기가 있어야만 많은 어려움을 뚫고 나갈 수 있는 것입니다. 둘째, 구체적으로 뚜렷한 계획을 세우고 그것을 끊임없이 실천해 나가야 합니다. 이때에는 자신의 계획이 건실하고 조직적이어야 하며 경험과 관찰이 뒷받침되어야 합니다. 셋째, 목적달성을 위해서는 강한 의지력으로 좋은 습관을 만들어 나가야 합니다. 넷째, 다른 사람들과 친밀한 우호관계를 맺어 그들과 협력해야 합니다. 상대방의 입장이 되어 그 사람을 이해하는 것은 끈기를 기르는 중요한 요소 중 하나라고 할 수 있습니다.
Board 삶 속 글 2022.01.15 風文 R 1000
작은 이야기 2 - 정채봉, 류시화 엮음 1. 평범한 행복 2 일흔에 연 신기료 가게 - 안만득 "아버님께서 여태껏 지으신 집들을 모아 놓으면 족히 서울의 한동네는 될 겁니다." 내 나이 칠십 고개를 넘기던 날 큰아이가 한 말이다. 사실 나는 열일곱엔가 우리 열두 남매가 겨우 여남은 마지기가 될까말까 한 논밭을 붙들고 아둥대던 고향을 뛰쳐나와 평양에서 제일가는 도목수 아래서 집 짓기를 시작했다. 그로부터 반백 년이 흐르도록 대부분의 시간을 나무를 다듬고, 기둥을 세우고, 상량을 올리는 기쁨으로 보냈다. 그쯤 이르자 발이 부르트도록 넘나들던 서울의 아현동 고개며, 중림동, 영등포 일대를 거닐다 보면 내 손떼가 묻은 건물들을 쉽게 찾아 낼 수 있다. 그때마다 난 눈시울이 뜨거워지곤 한다. 그러나 작업의 대부분을 난장에서 해온 탓인지 그 즈음에 이르러서는 가끔씩 어깨가 결리기도 하고, 연장 바구니가 무겁게만 느껴졌다. 이런 나를 지켜보면서 아이들은 은근히 그 동안의 내 노고를 치켜세우는 한편, 이제는 그만 집 안에 계셔도 좋지 않느냐고 내 의중을 물었다. 그도 그럴 것이 6,25 난리통에 개성에서 피난길에 사남매를 한꺼번에 잃는 슬픔을 격기도 했지만, 두 손바닥에 옹이가 박히도록 바삐 뛰어다니며 거두어 나머지 사남매는 남 앞에 내놓기에 부끄럽지 않을 만큼 키워 놓았다. 그래서 나 하나가 집 안에 틀어박혀 지낸다 해도, 섭섭지 않게 용돈을 얻어 쓸 형편이 되었다. 그런데 내 생각은 달랐다. 원래가 굳은 살 풀릴 새도 없이 꿈쩍거리는 성미이기도 하지만, 집에서 붙어 지내자니 더욱 병만 커지는 것 같았다. 또 문득 늙음이 곧 짐이 되는 것이로구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 다음날부터 나는 짐을 벗기 위해 이곳 저곳을 기웃거리며 돌아다녔다. 일에만 쫓겨 다니던 때와는 달리 갖가지 사람들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선술집에 앉아 술 한 잔으로 목을 축이노라면 아낙의 어깨가 믿음직스러워 보였거, 공원에서 사귄 새 친구들과 함께 생전 처음 공개방송하는 자리에 가 마음껏 웃기도 했다. 그런데 때때로 깊어졌던 주름살을 펴면서도 어쩐지 마음 한구석이 허전한 것을 감출 수는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길 한 모퉁이에 쏠린 내 눈길이 떠날 줄을 몰랐다. 그것은 손바닥만한 터에서 한 노인이 구두를 깁고 있는 모습이었다. 비좁은 곳을망정 해진 구두를 깁고 있는 모습이 그렇게 신명에겨워 보일 수가 없었다. '옳지, 저것이로구나!' 나는 마음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그 몇 달 간 나는 남의 재미에 끌려 다니고만 있었던 것이다. 내게는 시간 때우기 오락이 아닌, 땀흘리는 재미가 필요했다. 며칠 후, 나는 서울 적십자 병원 후문 한 켠에 조그만 신기료 가계를 열었다. 아이들도 처음에는 미덥지 않은 듯 내 출근길에 동행하기도 했지만 한 컬레 두 켤레 불구가 된 구두들을 말쑥하게 만들어 보란 듯이 거리로 내보내면서 어느결에 쑤시던 어깨도 낫고, 웃음도 되찾은 나를 보고는 안심이라는 듯 돌아갔다. 그럭저럭 후미진 구석에서 해진 구두를 기우며 살아오기 어언 14년, 이제는 어엿한 어른이 된 손주 녀석들까지 내 일터를 찾을 때면 "우리 할아버지가 우리 나라에서 가장 나이 많은 사장님이야"하고 놀려댄다. 그동안 모은건 아무것도 없지만 내 가게를 찾아 주는 때묻지 않은 젊은이들과 때로는 진종일 먼지와 씨름하며 살지만, 속마음은 어느 높은 분네보다 자랑스럽고 순박한 청소년들과 얘기를 나누면서 '더불어 젊게 산 것'을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재산이라 여기고 있다. (신발 수선공) 황금들에 퍼지던 멘델스존 - 이만방 애학에 진학하기까지 나는 줄곧 고향인 거창에서 자랐다. 고등학교는 도실 나가고 싶었으나, 여러 가지 사정으로 고향에 있는 세 개의 고등학교 중 하나를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거창 고등학교를 선택했는데, 내가 이 학교를 선택한 데는 이 학교에 다른 학교보다는 조금 큰 오르간이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 학교는 읍에서 조금 떨어진 외곽 지대 언덕 위에 위치해 있어서, 등하교길에는 다른 학교처럼 행진가나 국민 가요풍의 음악을 크게 방송하는 대신에 비니야브스키의 (전설)이나 차이코프스키의(백조의 호수) 또는 베르디나 푸치니의 오페라 중 하이라이트를 논길을 걸어오는 우리들 촌놈들에게 들려주곤 했다. 벼이석이 고개를 숙인 가을날, 황금 물결치는 논뚝에서 메뚜기르 잡으면서 그와 같은 음악을 들었던 우리 촌놈들에게는 그것이 어떤 것들과도 바꿀 수 없는 값진 추억이었다. 비록 오르간 하나밖에 없는 시골 학교였지만 때로는 논둑에서 확성기를 통해 들었던 바이올린, 피아노 또는 관현악 소품들 덕분에 '아, 음악은 이렇게도 아름다운 것이구나!'하는 감동을 가질 수 있었다. 그리고 저와 같은 아름다운 소리를 내는 바이올린이나 피아노를 나도 가졌으며 하는 바람을 갖게 되었다. 입학 시험 면접시 거창 고등학교를 선택한 것은 오르간 때문이라는 나의 대답이 주효했던지 입학 후 줄곧 그 학교의 오르간은 내 전유물이다시피 되었다. 하루는 '곰'이란 별명을 가진 교장 선생님이 나를 호출하셨다. 곰은 내게 말씀하셨다. "야, 만방아! 이것이 바이올린이야." 그러면서 내게 몸통과 활만 있는 어린이용 바이올린을 주셨다. 당장 사용할 수도 없는 그 바이올린을 집에 가져와서 나는 며칠이나 가슴을 설레며 보냈다. 그로부터 몇 년 뒤, 독일에서 유학하고 있을 때였다. 마침 그때는 가족과 근 2년 가까이 떨어져 나 혼자서 생활하고 있었는데, 하루는 어느 유학생 가정에 점심 식사 초대를 받게 되었다. 점심식사르 준비하는 동안에 집주인이 멘델스존의 바이올린 협주곡을 들려주었다. 숲속에 위치한 집에서 넓게 터진 창문을 통해 듣는 멘델스존의 바이올린 협주곡이 그때의 나를 무척이나 향수에 젖게 했었나 보다. 한 악장을 다 들으려면 매우 긴 시간이 소요됨에도 불구하고, 누구 하나 식사를 하자는 소리를 하지 않은 것이다. 한참이 지나고 너무 늦은 식사 시간에 정신을 차리고 보니 전부 나만을 주시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내 눈에서 눈물이 하염없이 흐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 이 무슨 창피람! 구태여 변명은 필요 없었다. 난 그때 독일의 어느 유학생 부부에게 초대받은 시간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내 고등하교 시절의 논둑을 걸으며 누렇게 익은 벼이삭 속에서 멘델스존을 듣고 있었기 때문이고, 그렇게도 갖고 싶었던 바이올린을 삐삐선에 맞춰 내가 가슴 조였던 여학생에게 학교 앞뜰 코스모스 동산에서 열심히, 열심히 켜주고 있었기 때문이다. (숙명여대 작곡과 교수)
Board 삶 속 글 2022.01.15 風文 R 611
관포지교(管鮑之交) // 중국의 관중(管仲)과 포숙아(鮑叔牙) 같은 친교라는 뜻으로,친구 사이의 다정한 교제를 일컬음. 《出典》'史記' 列子 춘추시대 초엽, 제(齊)나라에 관중(管仲 : ?~B.C 645)과 포숙아(鮑叔牙)라는 두 관리가 있었다. 이들은 죽마고우(竹馬故友)로 둘도 없는 친구사이였다. 관중은 한때 소백을 암살하려 하였으나 그가 먼저 귀국하여 환공(桓公 : B.C 685-643)이라 일컫고 노나라에 공자 규의 처형과 아울러 관중의 압송(押送)을 요구했다. 환공이 압송된 관중을 죽이려 하자 포숙아는 이렇게 진언했다. "전하, 제(齊) 한 나라만 다스리는 것으로 만족하신다면 신(臣)으로도 충분할 것이옵니다. 하오나 천하의 패자(覇者)가 되시려면 관중을 기용하시옵소서." 도량이 넓고 식견이 높은 환공은 신뢰하는 포숙아의 진언을 받아들여 관중을 대부(大夫)로 중용(重用)하고 정사를 맡겼다 한다. 관중은 훗날 포숙아에 대한 감사한 마음을 이렇게 술회하고 있다. "나는 젊어서 포숙아와 장사를 할 때 늘 이익금을 내가 더 많이 차지했었으나 그는 나를 욕심장이라고 말하지 않았다. 내가 가난하다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또 그를 위해 한 사업이 실패하여 그를 궁지에 빠뜨린 일이 있었지만 나를 용렬하다고 여기지 않았다. 일에는 성패(成敗)가 있다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또 벼슬길에 나갔다가는 물러 나곤 했었지만 나를 무능하다고 말하지 않았다. 내게 운이 따르고 있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디 그뿐인가. 나는 싸움터에서도 도망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지만 나를 겁쟁이라고 말하지 않았다. 내게 노모(老母)가 계시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무튼『나를 낳아 준 분은 부모이지만 나를 알아준 사람은 포숙아이다.(生我者父母 知我 者鮑叔也)』" 【유사어】문경지교(刎頸之交), 금란지교(金蘭之交), 단금지교(斷金之交), 수어지교(水魚之交), 교칠지교(膠漆之交), 막역지우(莫逆之友) 【반의어】시도지교(市道之交)
Board 고사성어 2022.01.15 風文 R 105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