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저와 자택 한국말에는 서로의 관계를 고려해서 조심해 써야 할 말들이 매우 많다. 존댓말만이 아니라 아 다르고 어 다르다는 말처럼 행여 오해 사지 않도록 신경 써야 할 부분이 한둘이 아니다. 그래서 우리의 어휘가 다양하고 다채롭다는 말을 들을 수도 있지만 반대로 그러한 세세한 구별이 과연 꼭 필요한가 하는 물음도 생긴다. 그 가운데 하루빨리 개선되었으면 하는 대표적인 것이 무심코 튀어나오는 전근대적인 표현들이다. 나이든 남자를 ‘영감’이라고 한다든지, 이미 고어가 되었어야 할 ‘아녀자’라는 말이 아직도 사전에 올라 있는 것이라든지, 같은 성인들 사이에서 손위 손아래 따지는 것 등은 우리 사회 곳곳에 아직 전근대적 요소가 버젓이 살아 있음을 보여 준다. 제대로 ‘시민사회’가 무르익지 못했다는 말이다. 언어만이 아니라 종종 터져나오는 약자에 대한 ‘갑’의 만행을 보면 분명히 전근대 사회의 양반이나 토호들이 머슴과 종들한테 해대던 패악질과 똑 닮지 않았는가? 대통령이 자리에서 물러나 본래 살던 집으로 돌아갔다. 너도나도 그 집을 ‘사저’라고 부른다. 사저는 관저와 대조되는 개념이다. 관저는 고위직에 있는 사람한테 제공된 집이다. 그러고 보니 사저라는 말 역시 그리 ‘현대적 표현’은 아니다. 공직이 끝나면 당연히 ‘자택’ 혹은 ‘자기 집’으로 돌아간다고 하는 것이 옳다. 듣자 하니 누군가는 ‘마마’라는 표현까지 했다고 한다. 물러난 대통령은 남달리 ‘영애, 시해, 아우라’ 등 우리의 시대정신과 어긋나는 비범한 말을 많이 들으며 살았다. 그러니만큼 그저 그런 보통사람의 삶과 다른 길을 걸었고 결국은 그것 때문에 사달이 나고야 말았다. 모든 사람의 삶에 좋은 교훈으로 삼기 위해서라도 그에게 덮어씌워져 있던 ‘전근대적 언어’를 우리 손으로 거두어내는 것이 바람직하다. 김하수/한겨레말글연구소 연구위원·전 연세대 교수
아줌마들 세계 여성의 날을 아무 생각 없이 무심코 지내 버렸다. 아마 대부분의 남성들이 대개 이렇게 이날을 보냈을 것이다. ‘여성의 인권’을 존중하자는 대의를 거부하지는 않는 사람들도 사실 그 대의를 얼마나 구체적으로 인식하고 있느냐 하는 것은 또 다른 문제다. 유흥가와 상가가 뒤엉킨 시장 골목을 다니다 보면 ‘아가씨 구함’이나 ‘아줌마 구함’ 같은 구인광고가 여기저기 붙어 있는 것을 쉽게 볼 수 있다. 언어적으로만 보면 아가씨는 미혼여성을, 아줌마는 기혼여성을 가리킨다. 그러나 언어의 사회적 기능을 본다면 이 두 가지 어휘는 천근만근 무겁기만 하다. 그 두 단어에는 이 땅의 여성들이 뒤집어쓰고 살아야 하는 삶의 무게가 함께 들어 있기 때문이다. 아가씨니 아줌마니 하는 말들에서는 노동시장에서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중요 개념인 ‘능력’이라든지 ‘업적’과 ‘경력’ 등의 의미가 전혀 떠오르지 않는다. 심지어 ‘인격’과 ‘품격’조차 별로 느껴지지 않는 단어들이다. 그저 여성으로서의 몸, 일하는 몸만 가리킬 뿐이다. 남성들을 가리키는 어떠한 단어들도 이처럼 비루하지는 않다. 특검이 국정농단을 수사하는 과정에서 ‘주사 아줌마’니 ‘기 치료 아줌마’니 하는 말을 만나게 되었다. 이미 ‘아줌마’라는 말 자체가 합법성이나 전문성 따위를 전혀 인정할 수 없다는 의미를 깔고 있다. 아무리 불법적인 일에 연루되었다 하더라도 과연 이러한 호칭의 사용이 정당했는지 다시 한번 자문해볼 필요가 있다. 청와대 관계자가 이 단어를 썼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언어의 사회적 기능에 민감한 주체’로서의 태도를 지닐 필요가 있었다. 온갖 불법행위의 주체였던 사람의 ‘여성으로서의 사생활’을 걱정해주면서 왜 그 조역들에게는 이렇게 남루한 표현을 함부로 사용하고 말았는가? 김하수/한겨레말글연구소 연구위원·전 연세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