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참 가슴 찡한 이야기 - 황지니 가난한 곡예사의 헌금 프랑스 루이 왕 시대에 어느 가련한 곡예사가 있었습니다. 바르나베라는 이 사람은 콩피에뉴 태생으로 이 마을 저 마을 돌아다니며 힘든 곡예를 하며 살았습니다. 장날이 돌아오면 그는 우선 재미있는 얘기로 구경꾼을 모으고 이어서 백랍으로 만든 접시를 코에 얹어 균형을 잡았습니다. 물구나무서기를 하고, 구리공 여섯 개를 발로 차고 받고, 목덜미가 발뒤꿈치에 닿을 만큼 몸을 뒤로 젖혀 완전히 원을 그린 자세로 열두 개의 칼을 가지고 곡예를 할 때면 관중 속에서 감탄의 소리가 터져 나오며 동전이 비오듯이 날아와 깔개 위에 떨어졌습니다. 그러나 그의 생활은 매우 힘들었습니다. 하루 종일 비가 내리던 어느 날 저녁, 헐어빠진 깔개에 공과 칼을 말아서 겨드랑이에 끼고 저녁도 굶은 채 잘 만한 헛간을 찾아 걸어가던 그는 같은 길을 걷는 수도자를 보고 공손히 인사를 했습니다. 수도자는 바르나베와 이야기를 하는 도중 그의 순박한 마음에 감동되어 '마음이 깨끗한 사람'임을 알고는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바르나베 친구, 나와 함께 갑시다. 내가 원장으로 있는 수도원에 들어올 수 있도록 하겠소." 이리하여 바르나베는 수도자가 되었습니다. 그가 들어간 수도원에는 각자 하느님께서 주신 재능과 지식을 다해 성모님께 봉사하고 있었습니다. 박식한 모리스 수사는 글을 독피지에 옮겨 쓰고 일렉산드로 수사는 거기에 아름다운 세밀화를 그려 넣으며 마르보드 수사는 쉬지 않고 석상을 깎고 있어서 수염과 눈썹, 머리칼이 온통 먼지로 하얗게 뒤덮여 있습니다. 수도원 안에는 또한 시인들도 있어서 성모님을 찬미하는 송가나 산문을 짓기도 했습니다. 이렇게 서로 다투어 성모님을 찬송하고, 훌륭한 작품들이 많이 쌓이는 것을 보고 바르나베는 자신이 단순하고 무지한 것을 탄식하였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아침, 바르나베는 기쁜 듯 자리에서 일어나 성당으로 달려가더니 한 시간 이상 머물러 있었습니다. 저녁식사 후에도 또 성당에 갔습니다. 이때부터 매일 성당이 비어 있는 시간이면 바르나베는 성당에서 지냈습니다. 그의 행동을 수상히 여긴 수도원장이 고참수사를 데리고 문틈으로 유심히 들여다보았습니다. 바르나베 수사는 성모님 제단 앞에 거꾸로 서서 허공에 쳐든 발을 여섯 개의 구리공과 열두 개의 칼을 가지고 재주를 부리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수사가 분개하여 그를 끌어내려 할 때였습니다. 성모님이 제단에서 내려와 푸른 옷자락으로 곡예사의 이마에 흐른 땀을 닦아 주었습니다. 원장은 땅에 엎드려 말했습니다. '마음이 깨끗한 자는 하나님을 뵙게 될 것이다.' 마음은 항상 비지 않으면 안되나니, 마음이 공헌하면 정의와 진리가 거기 와서 살 것이요, 마음은 항상 꽉 차 있지 않으면 안 되나니, 마음이 충실하면 물욕이 거기에 들어오지 못할 것이다. (홍자성) 타임머신을 타 보셨나요? 런던 교외의 길거리에서 웬 힘센 사내애가 저보다 어린 아이를 들어올린 후 내던졌습니다. 버티(허버트의 애칭)는 그 아이를 받으려다가 그만 한쪽 다리가 부러지고 말았습니다. 그는 몇 개월 동안 발에 추를 매달고 침대에서 고생했으나 접합이 되지 않아 수술을 받아야만 했습니다. 어린 소년에게 그 일은 참으로 무서운 경험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완전히 재수없게 걸려든 사고였지만 그것이 그에게는 큰 행운이었습니다. 꼭 1 년간을 꼼짝도 못하고 누워 있는 바람에 할 수 없이 책만 닥치는대로 읽은 결과 세계적 대문호로 성장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허버트 웰스는 도기점을 하는 집안의 2층 좁은 방에서 태어났습니다. 지하에는 음침한 작은 방이 있어 부엌으로 쓰고 있었는데 머리 위의 행길로부터 쇠창살 틈으로 광선이 들어왔습니다. 그는 창살문 위로 지나가는 사람의 신발을 보고 그 사람의 인품을 알아맞힐 수 있었다고 합니다. 아버지의 도기점이 망해 버리자 어머니는 부잣집의 가정부로 들어가고 버티는 포목점 점원으로 일했습니다. 수십 년 후의 '세계문화사 대계'의 저자가 될 인물이 매일 아침 5시에 일어나 가게 청소를 하고, 난로에 불을 지피고, 하루에 14시간씩 혹사당한 것입니다. 한 달이 되자 그마저 쫓겨와 약방 점원이 되었지만 여기서도 한 달 만에 쫓겨나고 말았습니다. 그는 또다시 다른 포목점에 들어가 2 년간 일을 했지만 어느 날 그곳을 도망쳐 나와 15 마일이나 떨어진 곳에 있는 어머니를 찾아가 눈물을 흘리면서 애원합니다. "어머니 더 이상 가게에 못 있겠어요. 더 있으라고 하면 자살해 버리겠어요." 그런 후 은사로부터 교사 일자리를 얻어 교사 일을 3 년 정도 하고 있을 때 또 불의의 사고가 일어났습니다. 어느 날 축구시합을 하다 밀려 넘어져서 신장 한쪽이 짓이겨지고 오른쪽 폐가 파열되는 바람에 출혈이 심해 위험한 상태가 된 것입니다. 의사들도 외면한 상태로 생사의 갈림길에서 12 년 동안 목숨이 이어졌습니다. 그러나 12 년간 그 수많은 생각을 했고 재능을 키웠습니다. 자리에서 일어난 후 5 년간 필사적으로 글을 썼지만 모두가 아마추어 냄새만 풍긴다는 것을 알고 스스로 써놓은 것들을 모조리 불태워버렸습니다. 얼마 후 반불구의 몸으로 교사직을 얻었는데, 그곳에서 자기처럼 불구인 한 여학생이 눈길을 끌었습니다. "그래, 지금 당장 최대의 행복을 붙들어 두자"라고 다짐한 후 그는 그녀와 곧 결혼했습니다. 그 뒤로 그는 쓰러지거나 죽기는커녕 건강을 회복하고 정력적으로 집필에 전념해 '타임머신' 등 80권 이상의 책을 썼고 그것은 모두 전세계에 커다란 반향을 불러일으켰습니다. 인간에겐 두 종류가 있다. 하나는 일을 얻지 못하면 맥이 빠져 버리는 인간, 또 하나는 비록 일이 없어도 반드시 자신에겐 무언가 할 수 있는 일이 있다고 믿는 인간, 이 두 종류의 인간이 있다. (디즈니) 평생을 두고 할 일 저희 할아버지는 폴란드에서 모자점을 경영하셨습니다. 할아버지는 만일 당신이 판 모자에 조금이라도 흠이 있거나 어떤 결함이 드러나면 손님의 집까지 찾아가 모자값에서 얼마쯤을 떼어 돌려 주셨습니다. 할아버지는 언제나 정당한 값을 받고 판다는 신념을 잊은 일이 없으셨습니다. 바른 장사를 하는 것은 하나님에게 바른 일을 하는 것과 같다고 당신 스스로 생각하셨기 때문입니다. 또 저희 외할아버지는 양복점을 경영하셨습니다. 외할아버지는 건너편의 양복점을 찾는 손님이 잘못하여 당신의 가게로 온 것이 아닐까 걱정이 되어 "틀림없이 저희 가게를 찾아오신 겁니까? 혹 건너편 양복점이 아니지요?"라고 확인하곤 했습니다. 양복점의 형편이 넉넉한 것도 아니었으므로 외할머니는 "새 손님이 오면 그저 잔말 말고 '이제부터는 우리 가게의 단골손님이 되어 주십시오' 하면 좋을 텐데"라고 불평을 했습니다. 그럴 때마다 외할아버지는 정색을 하고 "우리집만이 아니라 건너편의 양복점도 먹고 살아야 한단 말야" 하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이 태어날 때에 하나님께서는 그 사람이 평생 얼마 만큼의 일을 할 것인가를 미리 정해 놓으셨어. 그러므로 일을 너무 많이 하면 정해 놓은 일이 빨리 끝나고 그만큼 빨리 죽는 거야." 그 덕분인지 외할아버지는 오래도록 건강하게 사셨습니다.
Board 삶 속 글 2022.02.01 風文 R 628
작은 이야기 2 - 정채봉, 류시화 엮음 1. 평범한 행복 2 휠체어를 탄 농구 감독 - 박몽구 1982년 초겨울, 거울같이 맑은 빙판이 두껍게 깔린 동대문 실내 링크에서는 한 무리의 젊은이들이 연습 경기에 눈코 뜰 새 없이 돌아가고 있었다. 링크 밖 스탠드에 앉아 지켜보는 코치며 관전자들이 두꺼운 방한 파카 따위를 걸치고 있는데 비해, 빙판을 종횡무진으로 누비는 연세대 선수들의 땀에 젖은 얇은 유니폼에서는 연방 허연 김이 피어 오르고 있었다. 그런데 그런 팽팽한 열기에 찬물을 끼얹기라도 하는 듯 '쿵'하는 둔탁한 소리가 들렸다. 한 팀의 중심 공격수인 센터를 맡아 번개같이 뛰던 이성근 선수(25세)가 그만 펜스에 꽝 부딪힌 것이다. 동료들이 우르르 몰려와 그를 세브란스 병원으로 옮겼다. 병원으로 옮겨진 이 선수는 부랴부랴 수술을 받았다. 그리고 두달 동안 병상에 묶인 채 꼼짝도 할 수 없었다. 밤낮 진통제로도 역제하기 어려운 아픔이 온몸을 뒤척이게 했으나, 그 고통 속에서도 빙판을 신나게 지치고 있을 친구들을 생각하며 다시 일어서서 멋진 슛을 날리리라는 기대로 꾹 참았다. 만 두 달이 되어서야 허리를 꼭 묶은 코르셋을 풀어 내고 '앉는 연습'을 시작했다. "아야, 허리에 바위가 얹힌 것 같아!" 걱정스레 지켜보시던 어머니 앞에서 허리를 일으키려던 이 선수는 무진 애를 써보았지만 겨우 15도밖에 구부리지 못했다. 이렇게 해서 바로 앉는 데만도 보름이나 걸렸다. 누구보다 활기차게 경기장을 쏘다니던 아이스하키 선수에게 그건 너무나 가혹한 시련이었다. 친구들의 휘파람을 날리며 빙판 위를 신나게 달릴 걸 생각하면 부러움으로 가슴이 미어지는 듯했다. 하지만 그 정도의 아픔은 서막에 불과했다. 친구의 등에 엎혀 물리치료를 받으러 다니던 어느 날, 문득 헐렁한 환자복을 들쳐 본 이 선수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 운동으로 잘 다져졌던 근육질의 두 다리가 '아프리카 난민'의 그것처럼 너무나 말라 있었던 것이다. "꼬집어도 꼬집어도 아프지 않은 거예요. 내 다리가 왜 이러느냐고 의사 선생님께 대들었죠." 눈물로 만류하는 어머니 조돈숙 씨(63세)의 팔에 안겨 겨우 흥분을 감추자, 의사는 자초지종을 털어놓았다. 흉추 열한 번째 마디가 삭아 무너지면서 중추신경이 끈기고 하체가 마비되었다는 것이다. 잠이 오지 않아 말똥말똥 몇 밤을 지샜는지 모른다. 그런 때면 친구들을 시켜 술을 사다가 몰래 마시기도 했다. 친구들은 이 부탁에 처음에는 난감해 하다가 그가 조금만 화를 내도 이내 시키는 대로 했다. 회복기의 환자에게 술은 극약이나 다름없음은 물론이었다. "좋은 친구인가 아닌가를 알려면 한 석 달쯤만 병원에 누워 있어 봐야 한다는 걸 그때 비로소 알았죠." 때로는 약까지 몰래 버리며 자포자기하던 그에게 한 친구가 나타났다. "그래 너는 널 잘 봤어. 넌 살 가치가 없는 놈이야. 정 죽고 싶음 이걸 먹어!" 정말이지 가슴이 오싹했다. 친구 녀석이 그렇게 매정해 보이고 야속할 수가 없었다. 1983년 어느 봄날 그는 친구가 준 약봉지를 품에 앉고, 가까스로 휠체어에 의지하여 병원 뒤의 숲으로 들어갔다. 몸을 던지기에 안성마춤인 가파른 언덕을 찾아서... "그런데 참 이상하대요. 막상 모종의 결심으로 산속으로 갔는데, 막 파릇파릇 피어나는 새싹들을 보니 눈물이 핑 돌면서 세상은 참 아름답구나 하는 생각이 물컹 드는 거예요." 그는 그때부터 술을 일체 멀리하고 열심히 치료했다. 그리고 보통 사람들의 발보다 더 편하도록 휠체어 타기를 연습했다. 때로는 온몸이 땀으로 젖기도 했지만 그렇게 즐거울 수가 없었다. 마침내 1983년 말 15개월 동안의 병원 생활 끝에 퇴원하여, 연세대 체육과에서는 처음으로 아니 아마도 국내에서는 최초로 1986년 봄 장애인으로서 체육학과를 졸업할 수 있었다. 그해 8월 30일 장충체육관에서는 전국 장애인 농구대회가 열렸다. 오후가 되어 홀트아동복지회 농구팀과 삼육재활원 농구팀 간의 마지막 결승 경기. 슛이 터질 때마다 관람석에서는 박수가 터져나왔다. 그런데 한 가지 재미있는 일은 대개 한 팀만을 일방적으로 응원하는 다른 경기와는 달리, 온 관중이 하나가 되어 아느 팀이건 슛이 터질 때마다 격려의 박수를 아끼지 않는 것이었다. 선수들의 몸놀림은 거추장스런 휠체어나 장애는 까맣게 잊은 듯 그지없이 빨랐다. 마침내 삼육재활원 팀이 34: 32로 가까스로 승리를 하였고 이제 곧 시상식이 있을 참이었다. "다음은 지도자상 시상이 있겠습니다." 모든 사람들의 눈이 집중된 가운데, 시상대 앞으로 휠체어를 타고 조심스럽게 나오는 사람, 그는 다름아닌 2, 3년 전까지 빙판에서 뛰어난 기량을 자랑하던 이성근 선수였다. 연세대 체육학과를 마치면서 당당히 교사 자격증을 딴 이 군은 장애자들의 요람인 삼육재활원에 교사로 몸담았던 것. 오늘도 이 교사는 누구의 힘도 빌리지 않고 이곳 삼육재활원 체육관으로 출근해 새싹들에게 탐스런 희망을 꽃피워 주고 있다. 그 자신이 그런 과정을 거쳐 왔지만 제자들에게 하는 말은 단 한 가지. "아픔도 상처도 언제까지나 그 자리에 머물러 있다고 생각지 말아라.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에 몰두하다 보면 오느새 잊혀지고 새 사람이 되니까!" (샘터 부장) 일어나고 말리라 - 최병철 "장난 그만하고 어서 일어나거라. 학교 시간 늦을라." 어머님의 말씀이었다. 양 어깨에 가방을 메고 마루 디딤돌 밑 봉당을 뛰어 내려가다가 폭 고꾸라진 나. 몸과 사지가 꼼짝달싹도 하지 않는다. 교동 초등학교 5학년 6월 초, 안방으로 들어 온 나는 눈동자만 살아 움직일 뿐 고개 못 가눈 채 누워 있었다. 바람을 맞았다느니 중풍을 맞았다느니 소아마비라느니 의견이 분분한 가운데, 집안 어른들, 친지들이 문병 오셨다. 또 각기 나름대로 장안의 명의를 소개해 주셨다. 최고 하루에 열네 분의 주치의가 나를 주무르고 침 놓고 주사 놓고 약 먹이고 하였을 뿐 아니라, 각기 나를 혼자만 돌보는 주치의처럼 철저하게 돌보는 조치가 취해졌음은 말할 나위도 없었다. 다만, 시간차 치료를 받는 나는 처참하게 만신창이가 된 채 어떤 한 의사에게는 한 번에 백 대가 넘는 침을 두어 달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맞은 적도 있다. 곁들여 여러 가지 뜸질, 찜질, 한증, 심지어는 무꾸리, 박수무당굿마저도 좋다면 기꺼이 치러 내신 내 어머님께서는 그 하루하루를 어떻게 보내셨을까? 그런 가운데서도 어머님께서는 틈틈이 내 팔과 다리를 움직여 주시고, 혈액 순환을 돕는 마사지를 게을리하지 않으셨다. 만 1년이 지난 어느 날, 나의 엄지손가락이 미동하는 것을 발견하신 어머님의 세심한 관찰력이 아니었더라면 나는 영영 버려진 존재가 되고 말았을지도 모를 일이다. 함께 뛰놀던 학교 대표 축구팀 친구들이 문병 오면 나는 눈을 감은 채 그들을 맞이하곤 했다. 어느 날 그들은 전국대회 우승기를 가지고 나를 찾아왔다. 그들이 돌아간 뒤 나는 '반드시 일어나고 말리라'고 내 자신에게 수없이 말하고, 말하면서 울었다. 내 말이 드디어 나를 움직이게 한 것이었을까? 이듬해 얼음이 풀리듯 내 몸도 서서히 풀리기 시작했다. 내가 다시 학교에 나가게 된 첫날은 너무도 감격스러운 날이었다. 첫 걸음마를 하는 돌쟁이처럼 몇 걸음 발을 떼다가는 쓰러지고 또다시 일어나기를 몇 수십 차례를 거듭했을까? 부축하는 사람도 모두 떼어 놓은 채 서너 시간을 걸려 약 2킬로미터를 갔다. 너무도 신기했다. 그 벅찬 감격은 이루 말로 표현할 수 없었다. 교장 선생님께서는 반겨 주셨지만 그러나 친구들은 모두 졸업하고 없었다. 한국전쟁은 우리 집을 극빈 상태로 몰아넣었다. 겨우 걸어 다니는 주제에 여덟 식구의 생계를 짊어지게 되었다. 연년생인 형님은 늑막염으로 고생하시던 때였고, 할머님, 홀어머님, 남동생 하나, 막내 젖먹이를 포함하여 밑으로 여동생이 셋이나 있었다. 수수로 죽을 쑤어 두어 끼 먹은 날은 포식한 닐이었고, 푸성귀를 삶아 먹기도 쉽지 않았다. 어머님과 우리 육남매의 피나는 노력과 협조로 형님을 이어, 다음해인 1960년에 서울음대 작곡과를 졸업할 수 있었다. 피아노를 연습하면 손가락 운동이 되고, 걷는 것으로 다리 운동을 했기에 고등학교와 대학을 거치는 동안 남한 각처의 크고 작은 산들 중 안 가본 곳이 없게끔 됐다. 나의 아주 어릴 적부터 꿈이었던 음악 공부는 고생하신 어머님을 감동시켜 드리는 은혜의 보답이기도 했다. 나는 마음의 고향으로 깊이깊이 파고들어 갔다. '실존의 비약' 즉, 나의 외로운 투쟁과 엄청난 시련을 딛고 일어선 내적 희열을 악보에 담아냈다. 그리하여, 제1회 동아 음악 경연대회에서 작곡부 수석상을 타기에 이르렀다. (가톨릭대 교수)
Board 삶 속 글 2022.02.01 風文 R 814
순직 세월호에서 학생들을 구하다 숨진 ‘기간제 교사’가 ‘현행법 때문에’ 순직으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상식적으로 본다면 배와 승객을 버리고 도망친 선장과 달리 존경과 우대를 받아야 마땅하거늘 어찌 우리의 법률은 그런 희생자에게 사후까지 이런 매정한 대우를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우리는 더 나은 가치를 위하여 자신의 목숨을 버린 행위를 ‘순절’이라는 말로 기린다. 종종 ‘순사’라고도 한다. 나라를 위하여 싸우다 죽은 이들은 ‘순국’했다고 하며, 신앙을 위한 것이었으면 ‘순교’라고 한다. 그리고 자신의 직분을 다하다가 희생된 사람들은 ‘순직’이라 해서 법적으로 그의 명예를 드높이고 유족에 대해 깊은 배려를 아끼지 않는다. 나라를 위해 순국한 사람들을 둘러보면 무슨 공직이나 관직에 있었던 사람들보다는 가진 것 많지 않은 사람들이 흔연히 몸을 바친 경우가 매우 많다. 그러니 기간제니 임시직이니 계약직이니를 꼽으며 순국 여부를 따진다면 이 얼마나 해괴한 일이겠는가. 순교자도 성직자인지의 여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얼마나 뜨겁게 신앙을 지켰는가가 유일한 잣대이다. 순직도 해당 직책과 임무에 얼마나 철저했느냐가 중요하지 직위나 직급을 따진다면 오히려 모욕이 될 것이다. 세월호 사건은 공직자들이 얼마나 무책임하게 어린 학생들을 죽음으로 내몰았는지를 보여주는 사건이다. 순직자를 기린다는 것은 공적인 책임자들이 자신의 임무를 끝까지 다하도록 독려함으로써 다시는 억울하고 원통한 희생이 나오지 않도록 하자는 것이다. 우리가 하루하루 큰 탈 없이 사는 것은 자신이 잘나서라기보다는 누군가 안 보이는 곳에서 희생과 헌신을 하는 덕분일 것이다. 희생과 헌신을 이렇게 소홀히 다루는 법률은 하루빨리 손질해야 한다. 김하수/한겨레말글연구소 연구위원·전 연세대 교수
삼디가 어때서 느닷없이 정치판에서 언어 문제로 입씨름이 붙었다. ‘3D 프린터’를 [삼디]라고 읽느냐 [스리디]라고 읽느냐 하는 문제다. 이상하게도 정치권에서 영어 발음 같은 언어 문제로 다툼이 생기면 대개 비본질적인 논쟁으로 비화한다. 여러 해 전에 ‘오렌지’냐 ‘어륀지’냐 하던 논쟁도 정책 수준을 무척 저급하게 만들었던 추억으로 남았다. 옛날 군에서 지급한 소총은 M1[엠원]이었다. 후에 M16이 지급됐다. 보통 [엠십육]이라고도 했지만 [엠식스틴]이라고 하는 사람도 있었다. 반면에 국산 고등훈련기 T-50은 [티오십]이고 보잉 707도 보통 [칠공칠]이라 한다. 역사 수업에서 배운 제국주의의 삼비(3B) 정책과 삼시(3C) 정책은 아무도 [스리비]나 [스리시]라고 하지 않았다. 더 나아가 힘든 직업을 가리키는 ‘3D’ 업종은 보통 [스리디 업종]이 아니라 [삼디 업종]이라 한다. 연필 ‘4B'도 보통 [사비]라 하지 [포비]라 하지 않는다. 그러니 도대체 발음의 원리가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언어 전문가로서는 민망스럽게도 ‘특별한 원리가 없다’고밖에 할 말이 없다. 이 두 가지 발음법은 윤리 문제도, 언어 원리의 문제도 아니다. 또 지식의 문제도 아니다. 그저 인습과 취향의 차이에 더 가깝다. 이런 것으로 누가 더 유능한 사람인지는 도저히 평가할 수 없다. ‘3D’를 차라리 ‘삼차원’ 혹은 ‘입체’라고 표현했다면 더 나았겠다. 이번 대선은 수많은 시민들이 무려 스무 번 넘게 길거리에서 ‘자기 이익’을 넘어서서 헌신함으로써 얻어낸 ‘역사적 기회’이다. 이 기회를 의미 없는 말꼬리 잡기로 낭비하지 말았으면 좋겠다. 말로는 ‘통합’이면서 실천은 ‘분열’과 ‘파열’로 나아가고 있지 않는가? 김하수 한겨레말글연구소 연구위원·전 연세대 교수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참 가슴 찡한 이야기 - 황지니 나는 무엇이 되고 싶은가? 짬렁 시므렁, 그는 뇌물을 모르는 채식주의자로 하루 한 끼밖에 먹지 않으며 서민들의 마음을 어떤 정치인보다도 잘 이해했습니다. 그 이유는 그 자신이 이미 서민이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두 차례의 방콕 시장 선거에서 우리나라 돈으로 약 18 만 원을 쓰고도 유효득표율이 63.5%의 지지를 얻으면서 당선되어 민주주의의 기치를 높이 세웠습니다. 그는 우편열차의 직원이었던 아버지와 지게 행상이었던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였습니다. 그가 비록 가난한 집안의 아이였으나 그의 부모님은 훌륭한 분들이어서 어릴 때부터 바른 품성을 몸에 익혔습니다. 그는 스스로 말하기를 "나는 비록 가난한 집안의 아들이었고 길가에서 노는 아이들의 친구였지만 험한 말씨나 좋지 않은 말을 쓰지 않았습니다. 큰 소리로 버릇없이 떠들기는 했어도 악담은 하지 않았고, 천하게 남을 넘겨짚어 말하지 않았다는 점만은 장담할 수 있습니다."라고 했습니다. 물론 그에게도 계속되는 욕구와 갈등이 있었습니다. "어려서부터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고 놀고 공부하였습니다. 먹을 것이 있기를 바랐고, 마음 맞는 친구와 훌륭한 선생님이 있기를 바랐습니다. 어머니에게 매를 덜 맞기를 바랐으며, 유명한 학교에 진학하기를 바랐습니다. 근사한 칼을 차고 다니는 사관생도가 되고 싶었으며, 좋은 직장을 갖고, 아름다운 여자와 결혼하고 싶었습니다. 땅과 집 그리고 자동차도 갖고 싶었습니다." 이러한 평범한 꿈을 가진 그가 1985 년에 방콕 시장에 출마하여 당선되자 스스로 자문하기를 '나는 도대체 무엇이 되고 싶어 하는가? 나는 크게 되고 싶어 한다. 무엇을 하든 지금보다 더 크게 되고자 노력한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다른 사람과 달랐습니다. '만약 그 일이 되지 않는다면 나는 '짬렁'으로 돌아가고 싶다. 나는 7뼘의 폭과 12뼘 길이의 내 오두막으로 돌아가 자연과 더불어 즐겁게 그리고 계속해서 욕심을 잠재우는 참선을 벗삼아 살 것이다. 나는 더 바랄 것이 없다.' 그는 자신의 분명한 견해와 이상을 가지고 있으며 자신의 입장이 올바른가를 항상 되돌아봤습니다. 그는 언제나 따뜻하고 부드럽고 예의바른 사람이었습니다. 사람을 귀히 여기며 누구도 비난하지 않았던 그는 강한 인내의 소유자였으며 무엇보다도 항상 밝은 미소를 잃지 않았습니다. 그는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였고 군의 장학금으로 미국에서 공부하여 행정학 석사학위를 상원의원, 수상실 비서, 방콕 시장 등을 역임했습니다. 이런 그는 고기를 먹지 않으며, 취침시에는 널빤지 위에서 잘 뿐 아니라 우산을 갖고 다니다가 밤이 되면 우산을 펴 그 아래에서 자기도 했습니다. 이런 그를 선거 때마다 다른 후보들이 비정상이라고 혹독하게 비난하지만 그는 조금도 개의치 않고 자기가 해야 할 일에 최선을 다했습니다. 검소와 친절 그리고 자비심이 바로 그가 하는 일들에 수반되는 정신이었던 것입니다. 훌륭한 정신을 가진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그것을 잘 사용하는 것이다. (데카르트) 세 곳에 보낸 편지 '동물 이야기'를 쓴 시튼(Seton, Emest Thompson 1860~1946)이 열아홉 살 때의 일입니다. 그 해 캐나다의 한 미술학교를 졸업한 시튼은 런던으로 유학을 가게 됐습니다. 시튼의 집은 가난했기 때문에 그는 런던에서 일을 하면서 공부를 계속했습니다. 시튼은 원래 그림공부를 했으나 장차의 꿈은 박물학자가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책을 구해 읽으려고 애썼습니다. 그 무렵의 어느 날, 그는 브리튼 박물관에 전세계에서 발행된 귀중한 박물학 관계 서적이 많이 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시튼은 곧 박물관으로 뛰어가서 열람을 신청했습니다. 그러나 도서계원은 그가 19세의 어린소년이라는 이유로 열람권을 주지 않았습니다. 그 계원은 박물관 규칙상 21세가 되야 입관이 허용된다는 말을 덧붙였습니다. 시튼은 박물관의 규칙을 알지만 박물학을 공부하려는 자신의 뜻을 저버리지 말아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시튼의 열정에 마음이 누그러진 계원은 그렇다면 한 번 사서관장을 찾아가서 부탁해 보라고 말했습니다. 계원은 자기로서는 어쩔 수 없지만 사서관장이 허락한다면 예외로 들여보내겠다고 약속했습니다. 시튼은 다시 사서관장실 찾았습니다. 그는 한참을 찾은 끝에 사서관장이라고 써붙인 방을 노크했습니다. 시튼은 사서관장에게 자기가 찾아온 뜻을 전했습니다. 그러나 사서관장은 융통성없는 어조로 말했습니다. "학생의 뜻은 잘 알겠소. 그러나 여기서는 엄격한 규칙이 있어 그걸 어길 수는 없소. 미성년자들이 출입하게 되면 소설을 읽는다거나 과제 같은 것을 하는 사람이 많아서 정작 연구를 하는 사람들에게 방해가 되기 일쑤요. 학생 같이 열심히 연구하려는 열성을 가진 사람들에게는 안됐지만 어쩔 수 없소." 사서관장의 말을 조용히 듣고 있던 시튼은 별안간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기서 제일 높은 분이 누구십니까?" 사서관장은 그의 당돌한 질문에 웃음지으며 말했습니다. "제일 높은 분이라, 여기서는 내가 최고 책임자지만 평의원의 지시가 있으면 그대로 따르겠네." "그럼 그 평의원은 구체적으로 누굽니까?" 다시 묻는 시튼의 얼굴에서 진지함이 우러나고 있었습니다. 사서관장은 어느덧 시튼에게 마음이 끌렸습니다. 그래서 그는 부드럽게 설명했습니다. "평의원이란 황태자, 대승정, 그리고 총리대신 그렇게 세 분일세만, 그분들이 과연 학생의 청을 들어 줄까?" 그러나 시튼은 사서관장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인사를 하고 물러나왔습니다. 시튼은 하숙집에서 밤늦게까지 편지를 썼습니다. ...... 박물학은 제게 있어서 생명과도 같습니다. 그러나 지금 제게는 그것을 연구할 만한 책이 없습니다. 오직 박물관에서만 그 책을 볼 수가 있답니다. 저는 언제까지 영국에 머물지조차 알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저는 박물학을 연구할 생각만으로 희망을 느낍니다. 원컨대 저로 하여금 박물관에서 연구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십시오...... 시튼은 세 곳에 편지를 보내기는 했지만 그 중에서 누구든 단 한사람이라도 회답을 주길 바랬습니다. 그런데 뜻밖에도 모두에게서 회답이 왔는데 한결같이 그 문제를 진지하게 생각해 본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시튼이 사서관장을 찾아가자 그는 시튼의 손을 잡고 말했습니다. "놀랍네. 최후까지 자신의 신념을 관철하려는 용기는 정말 훌륭해. 황태자께서 허락을 내리셨네. 오늘부터 자네는 마음대로 연구하게 되었네. 열심히 연구해서 꼭 훌륭한 사람이 되길 바라네." 시튼은 그때부터 열심히 연구하여 후에 유명한 작가가 됐습니다.
작은 이야기 2 - 정채봉, 류시화 엮음 1. 평범한 행복 2 나의 행복은 걷는 것 - 김용택 여름 방학이 끝나고 개학을 하게 되면 여기저기 강가나 논두렁 밭두렁 도랑가에 새로 많은 꽃들이 피어난다. 그중에서도 처서 무렵에 피는 꽃은 구절초이다. 구절초꽃을 내가 좋아하는 것은 그꽃이 꽃의 전형적인 모양을 하고 있기도 하거니와 그 꽃이 필 때쯤이면 하늘은 높아지고 곡식들은 고개를 숙이기 시작하고, 햇살은 멀어지고 바람은 산들거리기 때문이다. 또 그 꽃이 피기 시작하면서 가을 꽃들이 연달아 피어나기 때문이다. 물가나 물기 있는 곳에 오불오불 피어 있는 고마리라는 꽃밭은 나를 참으로 들뜨게 한다. 아무 쓸모도 없는 풀이고 누가 예쁘라 꺾어 가지도 않지만 물기 있는 곳에 밭을 이루는 고마리 꽃밭은 나를 기쁘게 한다. 어디 고마리꽃뿐인가. 도랑가 도랑물을 따라 쭉하니 피어 있는 물봉숭아꽃은 또 얼마나 곱고 예쁜가. 나는 학교까지 걸어서 다닌다. 빨리 가면 한 35분쯤 걸리지만 천천히 이것저것 구경하다 보면 40분이나 50분이 걸릴 때도 있다. 아침밥을 먹고 논과 밭 사잇길로 걷다가 두 개의 마을을 지나게 되는데, 옛날에 내가 걸어서 학교까지 가면 만나는 친구들이나 어른들은 일을 하시다 말고 "어이 김 선상, 자전거를 사지 그려"하곤 했다. 또 얼마쯤 오토바이가 유행되니 사람들은 또 "어이 김 선상, 오토바이라도 사지 그려"하곤 하더니 몇 년 전쯤, 아니 2년여 전만 해도 "어이 김 선상, 차를 사지 그려"하면 그냥 나는 빙긋이 웃거나 "젊은 다리니까 그냥 깐닥깐닥 걷지요, 뭐"하곤 했다. 나도 한때는 자전거로 다닐 때도 있었지만 너무나 집까지 빨리 와버려 재미가 없어 그냥 이웃집 조카를 줘버렸다. 그 뒤로는 자전거를 사본 적이 없다. 외지에서 우리 집에 찾아온 사람들도 차를 사라거니, 오토바이를 사라거니 하면 나는 그냥 너무 빨리 학교에 가고 너무 빨리 집에 오니 재미가 없다고 한다. 너무 빨리 집에 오는 것이 재미없다고 하면 사람들은 웃는다. 지금은 어찌어찌해서 아내와 아이들은 전주에 가서 살고 나는 산중에서 살고 있지만, 아이랑 같이 이 집에 살 때 내가 학교에서 깐닥깐닥 걸어오면 아내는 아이를 업고 꼭 마중을 나오곤 했다. 해설픈 길, 아내와 내가 나란히 서서 걷는 맛이란 참으러 생각만 해도 행복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같이 걸어오면서 가을이면 가을꽃, 봄이면 봄꽃들을 꺾어다 내 방에 꼭 꽂아 두곤 했다. 내가 걷는 것에 맛을 붙인 것은, 아니 내가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일이 '걷는 것'이라고 어디 가서 자랑을 하는 것은 한 발 한 발 걸으면서 보는 자연의 온갖 변화를 자세히 볼 수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차를 타고, 자전거를 타고, 오토바이를 타고 휙휙 지나가면 지금 길가에 논두렁에 논과 밭에 무슨 꽃이 피어 있고 무슨 곡식이 어떻게 자라고 있는지 머르지만, 천천히 걸으면서 여기저기 이것저것 보며 걷다 보면 세상의 온갖 것들이 다 보인다는 것이다. 비가 오면 우산을 쓰고 길가로 흐르는 물에 발을 적시고, 이슬에 신발이 다 젖는다. 눈이 오면 눈보라를 피해 커다란 느티나무 등 뒤에 몸을 감추고 눈보라를 피하며 숨을 돌리곤 한다. 추울 땐 씩씩하게 걸으면 이마에 땀이 솟는다. 나는 여지껏 내복을 입어본 적이 없다. 바람 없이 눈이라도 들판 가득 펑펑 내려 봐라. 집에 가기가 아까웁고 혼자 들길을 걷기가 아까울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볕 좋은 봄날 보리밭가 논두렁에 쭈그려 앉아 눈곱만하게 피어나는 풀꽃들, 쑥쑥 자라나는 보리들, 어느것 하나 내 눈길을 잡지 않는 것이 없다. 해뜨면 해를 등지고 걸어가 학교에서 생활하다 해지면 해를 등지고 집에 걸어온다. 꽉찬 푸르고 노란 들판, 서리가 하얗게 깔린 들판, 봄 여름 가을 겨울이 뚜렷하게 그러나 알게 모르게 변화되는 것을 보는 기쁨과 행복함은 차나 오토바이, 자전거를 타고 휙휙 지나며 보진 못하리라. 요즈음 나는 이렇게 말한다. "산도 한 30년쯤 바라보아야 산이다. 걸으면서 산을 보는 그 행복이 나를 이 산중에 잡아 둔다." (시인) 강아지 장례식 - 김선희 며칠 전 해질 무렵, 공연히 짜증이 나고 울적해 변두리 지역의 야산에 올라 마음을 달래고 있는데언덕 저쪽에서 말소리가 들려왔다. 무심코 그쪽으로 가봤더니 열 살 가량의 사내아이가 조그만 꽃삽으로 땅을 파고 있었고, 그 옆에 일곱 살, 다섯 살쯤 먹어 뵈는 계집아이 둘이 무언가를 함께 안고 있었다. 나는 호기심에 그들의 대화를 들어 보았다. "얘들아, 이제 땅을 다 팠으니까 뽀삐를 묻자." 땅을 파던 사내아이가 말하자 조금 큰 계집아이가 대답하였다. "아냐, 아직도 이렇게 따뜻한데 어떻게 묻어? 우리 이렇게 보듬고 있다가 차게 식으면 묻자, 오빠야 응?" 사뭇 애원하는 투였다.그러자 쪼그리고 앉아 있던 가장 어린 계집아이가 말했다. "그럼 식지 말라고 내가 옷으로 싸줘야지." 그리고는 계집아이는 입고 있던 제 웃옷을 벗어 안았던 것을 돌돌 감아 주었다. 그것이 죽은 강아지였음을 안 나는 가슴이 뭉클해지며 이 각박한 세상을 구원할 수 있는 힘은 저토록 순수하고 아름다운 아이들의 마음이라고 생각했다. 아직 체온이 남아 있는 강아지가 땅속에 묻히지 않기를 바라는 아이들의 마음말이다. (회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