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의 평가절하 사람을 가리키는 말은 그 대상을 높여서, 혹은 낮춰서 표현할 수도 있다. 예를 들어 ‘훈장’이라는 말은 좋은 뜻을 가졌었건만 세월이 지나면서 고루한 사람을 가리키는 듯한 의미가 강해졌다. ‘사장’이란 말도 기업인을 가리키는 말이었으나 어느덧 평범한 세속적 호칭이 되었다. 이런 현상은 그 말 자체의 가치 추락이 아니라 사회 변화에 따른 가치관의 변화에서 비롯한다. 지난날 ‘양반’이란 말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간절히 희구하던 신분이었는가? 이제는 ‘이 양반, 저 양반’ 하고 좀 추켜 주는 듯하면서 오히려 대수롭지 않게 일컫는 말이 되었다. 예전에는 대학을 졸업한 여성들도 ‘주부’로 가정살림과 육아에 전념하는 것을 그리 개의치 않았다. 그러나 요즘은 주부라는 말을 들으면 ‘무급 가사노동자’라는 정도의 의미가 먼저 떠오른다. 1980년대 초만 하더라도 ‘박사’가 드물었다. 어느 대학에서는 ‘교수’라고 부르면 대꾸도 안 하다가 ‘박사’라고 불러야 대답을 했다는 우스개가 나돌 정도였다. 요즘 ‘박사’는 대학원을 졸업했다는 것 외에는 별다른 의미가 없는 것 같다. 아직도 ‘명예박사’니 ‘명예교수’니 하는 말들은 그나마 인정받고 있으나 ‘명예퇴직’ 같은 말은 ‘명예’라는 말의 가치를 크게 흔들어 놓았다. ‘명예퇴직당하다’라는 말이 구성되는 것만 보아도 알 수 있다. 시장의 힘이 언어에 미치게 되니 여러 현상이 일어난다. 이익의 사유화, 손실의 사회화라는 법칙이 언어에도 그대로 적용되는 것 같다. 이익이 생기는 새 어휘는 너도나도 사용하려 한다. 반면에 이익이 안 생기는 낡은 말은 주로 약자에게 사용하려 한다. 이제 사회적 약자를 보호하려면 그들의 호칭과 지칭을 평가절하하는 데 원인을 제공하는 사회적인 불평등 구조를 먼저 해소하도록 해야 하지 않을까 한다. 김하수 / 한겨레말글연구소 연구위원·전 연세대 교수
어떤 문답 자유롭게 질문과 대답을 주고받는 일은 주어진 상황의 문제를 깨달아가는 데 매우 중요한 절차다. ‘질문’은 지식과 정보의 빈틈을 보여준다. 그리고 ‘대답’은 바로 이 틈을 메워준다. 그래서 이 둘은 짝을 이루며, 합쳐서 ‘문답’이라고 한다. 또 남에게 가르치기 위해 일부러 질문을 만들 수도 있다. 대답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깨달음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 제자백가가 그리 난해한 이론을 가르친 것은 아니다. 그저 제자들의 오만 가지 질문에 성실히 대답했을 뿐이다. 그리스 철학자들도 아카데미아에서 제자들이 던지는 질문에 답을 해주었을 뿐이다. 석가모니도 예수도 무슨 복잡한 교리를 전달하려고 애쓴 것이 아니다. 그저 제자들의 질문에 짝이 맞는 대답을 해주었을 뿐이다. 그 과정에서 제자들은 깨달음을 얻었고, 삶의 방향을 바꾸기도 했다. 질문과 대답의 위력이다. 인류의 지식은 이렇게 켜켜이 쌓아 올린 문답의 산물이다. 다음은 어느 기자와 검찰에 소환된 전직 대통령의 문답이다. 기자: 검찰 수사가 불공정했다고 생각하십니까? 대답: 국민 여러분께 송구스럽게 생각합니다. 성실하게 조사에 임하겠습니다. 기자: 아직도 이 자리에 설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십니까? 대답: ……. 모든 메시지가 언어화되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깊은 해석이 필요한 것이다. 그런데 이 문답에서는 정치를 오래 한 사람에게서 풍기는 묵직한 정치관, 법철학, 권력에 대한 통찰 등 무언가를 해석해낼 여지가 전혀 없다. 한국 정치의 답답함은 이렇게 기본적인 짝이 만들어지지 않는 문답법에서 비롯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자유롭게 묻고 성실하게 답하는 풍토, 그것이 모든 깨달음으로 가는 지름길이다. 김하수/한겨레말글연구소 연구위원·전 연세대 교수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참 가슴 찡한 이야기 - 황지니 고독을 덜어 주는 고독한 황제 헐렁한 바지와 어눌한 동작으로 희극계의 왕으로 한 시대를 풍미했던 채플린, 그러나 그의 불행한 성장처럼 언뜻언뜻 보이는 고독과 외로움의 정체. 둘레가 높은 모자, 다 떨어진 저고리에 헐렁한 바지, 질질 끌리는 큼지막한 구두의 대나무 단장으로 분장한 채플린의 어릿광대 모습을 볼 때면 웃음보다 먼저 무언지 모를 고독과 외로움을 떠올립니다. 그의 일생을 들여다보면 그 고독과 외로움의 의미를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우리 시대 최고의 희극왕 찰리 채플린은 1889 년 4월 16일, 영국 런던에서 태어났습니다. 가족은 어머니와 네 살 위의 의붓형밖엔 없었습니다. 아버지는 술로 세월을 보내다 처자를 버리고 종적을 감추어 버렸으니 어머니가 밤낮을 가리지 않고 삯바느질을 하여 끼니를 때워야만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어머니마저 심한 편두통에 시달리다 쓰러져 생계를 이어갈 수 없게 되자 어머니는 빈민구제원에, 여섯 살 된 채플린과 형은 고아원에 수용되었습니다. 추운 겨울, 옷도 제대로 입지 못한 채플린, 배를 움켜쥐고 추위에 떨면서도 어머니를 기다렸으나 2 년 동안 어머니는 면회 한번 오지 않았습니다. 지난날에는 배우였고, 가수 겸 피아니스트였던 어머니는 그 당시 정신병원에 입원한 상태였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 것도 모르고 채플린은 아버지에게 버림받았고, 어머니에게까지 버림받았다고 생각하면서 고독과 외로움을 벗삼게 되었습니다. 결국 법원이 아이들에 대한 양육을 아버지에게 명령했습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이미 다른 여자와 살고 있었으며, 그 여자는 형제를 길거리로 내쫓는 등 구박이 말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어머니가 퇴원하고 방 한 칸을 빌어 아이들을 데려와 바느질을 하면서 살림을 꾸려나가자 차츰 안정되었습니다. 그러는 동안 형은 뱃사람이 되고 채플린은 아버지의 주선으로 가끔 무대에 서서 어린아이 역을 맡아 배우의 길에 들어섰습니다. 그런데 어머니의 병이 재발하여 다시 정신병원에 입원하자 채플린은 고아원에 가기 싫어 한때 자취를 감추었다가 학교는 문앞에도 가보지 못한 빈민가의 부랑아가 되었습니다. 부랑아 생활을 하면서도 간혹 무대에 선 덕에 21세 때 극단을 따라 미국으로 건너가 헐리우드에 진출, 31세 때는 최초의 영화를 제작하였고 4 년 후에는 자기 프로덕션을 세우면서 미래를 신뢰하기 시작했습니다. 겁많고 외로운 부랑아가 심술궂은 상대방의 술책에 애를 먹다가 아차, 하는 순간 요절복통한 묘수로 위기를 모면하는 연기는 전세계인의 박수갈채를 받기 시작했습니다. 공부를 하지 못한 것을 후회하며 쇼펜하우어의 '의지의 표상으로서의 세계'를 40 년간 되풀이해 읽기도 한 채플린은 히틀러를 '독재자'로 비판하고, '모던타임즈'로 현대문명을 통렬히 비판했으며, '살인광 시대'로 군비확장을 규탄했습니다. 미국 보수층으로부터 반발을 사 한때 국외추방처분을 받기도 했으나 1972 년 아카데미상을 받음으로써 이에 대한 종지부를 찍을 수 있었습니다. 채플린은 은막을 통해 말하고 있습니다. '기술, 지식, 두뇌보다 진정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착한 마음, 다정한 마음이다. 인간성을 잃어버린 인간생활은 살벌하기만 할 뿐 아무런 의미가 없다.' '그대만을 영원히 사랑해.' 오선지를 사용할 줄도 모른 어빙 벌린이 미국 음악에 영향을 끼친 작곡가가 된 것은 거리를 떠도는 장님 악사의 손을 붙잡고 길을 인도하는 생활을 하는 동안 가슴속 깊이 울리는 멜로디를 스스로 발견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서기 2천 년이 되면 미국 음악의 탄생일과 어빙 벌린의 탄생일은 같은 날이었다고 반드시 음악비평가가 말하게 될 것이다. 아무래도 그런 생각이 든다." 미국 최고의 작곡가인 카펜터가 한 말입니다. '화이트 크리스마스' '부활절 행진' '신이여, 미국을 축복하소서(Gad bless America)' 등의 곡을 작사 작곡해 지금까지도 미국을 감동시키고 있는 어빙 벌린은 미국 유행음악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사람입니다. 1888 년에 태어난 벌린은 가족들과 함께 1892 년 러시아에서 미국으로 도망쳐 나왔습니다. 악취가 코를 찌르는 컴컴한 선창 속에 처박혀 윗칸에서 떨어진 칼을 맞아 상처를 입으면서 대서양을 건넜습니다. 빈손으로 미국에 도착한 일가는 편물 수공업, 공장일, 정육점 등에서 일을 하며 어두운 지하 셋방에서 살았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러시아의 끔찍했던 생활에 비교하면 마치 천국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어머니는 늘 감사의 기도와 함께 '신이여, 미국을 축복하소서'라고 중얼거리곤 했습니다. 벌린은 어머니의 이 중얼거림을 놓치지 않았습니다. "노래의 내용은 어머님의 입을 통해 들은 여러 가지 이야기다. 노랫말은 가슴속 깊은 데에서 떠오른다." 1939 년 제1차 세계대전이 한창일 무렵 벌린은 이 곡을 발표했습니다. "또다시 세계대전이 벌어진다면 큰일이다. 정말로 온 미국이 일치 단결해서 일어서야 한다."라는 생각에서 발표했던 것입니다. 이 곡이 크게 히트하자 그는 애국심을 불러일으켜 돈을 벌려 한다고 비난을 받을까봐 인세를 모두 미국의 보이스카웃과 걸스카웃에 기부했습니다. 이듬해 이 곡은 전미 음악감상회로부터 그 해의 최우수 작곡상을 받았고, 순식간에 퍼져 나가 이젠 미국 제1의 국가가 되어 버렸습니다. 어빙 벌린은 학교를 2 년밖에 다니지 않았습니다. 책도 끝까지 다 읽은 것은 아마 자신의 전기 정도일 것입니다. 유명한 알렉산더 올코트가 그의 전기를 벌린의 나이 35세 때 썼기 때문입니다. 물론 오선지도 사용할 줄 몰랐습니다. 따라서 그의 작곡은 멜로디를 그가 흥얼거리면 음악을 아는 비서가 악보로 작성했고, 음악을 배우려고 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러나 아주 젊었을 적에 확실히 배운 것이 한 가지 있었는데, 그것은 거리를 떠도는 장님 악사의 손을 붙잡고 길을 인도해 주면서 그 악사가 연극하는 멜로디를 따라 흥얼거리곤 했습니다. 그는 여기에서 가슴속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아름다운 멜로디를 발견하곤 했던 것입니다. 1920 년 벌린은 뉴욕 사교계의 우두머리를 아버지로 둔 엘린 메케이와 사귀게 되어 서로 사랑하게 되었지만 손님이 던져 주는 푼돈을 바닥의 톱밥에서 주워 싸구려 하숙비를 지불하는 벌린과는 너무 큰 차이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의 눈초리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행복한 삶을 누렸습니다. 벌린이 결혼 전 아내에게 준 생일 축하 선물에는 오직 한마디 '올웨이즈(Always)'가 새겨져 있고 그 아래에는 가사 중 '그대만을 영원히 사랑해'라는 대목의 악보가 새겨져 있었습니다.
Board 삶 속 글 2022.01.30 風文 R 500
작은 이야기 2 - 정채봉, 류시화 엮음 1. 평범한 행복 2 껌 한 개 - 목혜균 그날도 나는 아이들과 수업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흘긋 올려다본 하늘은 큰 비라도 올 듯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 아이들을 급히 돌려보내고는 걱정스럽게 하늘을 보고 있는데 교실 뒷문이 삐그덕 열렸다. 검게 탄 주름 잡힌 얼굴, 내 쪽으로 걸어오는 그 아주머니를 어디서 본 것 같았지만 쉽게 기억해 낼 수가 없었다. "저...명덕이 엄만대유." 그제야 나는 그 여인이 방금 집으로 돌려보낸 명덕이의 어머니라는 것을 알았다. 학기 초, 가정방문 때 명덕이네 집을 간 적이 있었다. 명덕이네는 마을에서도 한참 떨어진 산비탈에 살았는데 방 한 칸에 움막 한 칸이 전부였고 볏짚으로 가마니를 짜서 문을 해서 달 만큼 살림이 어려웠다. 명덕이 어머니는 명덕이 전학증을 떼러 왔다고 하셨다. 소양댐 공사가 마무리되면서 다른 일거리를 찾아 떠날 참이라고 하셨다. 전학이란 말을 듣자 난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학생을 떠나 보내는 것은 처음이었다. 방과후에 공부를 시켜도 불평 없이 잘 따라하던 명덕이에게 특히 정이 많이 들었는데... 교장 선생님께 결재를 받고 나서 나는 명덕이 어머니를 배웅하러 나섰다. 운동장으로 내려섰을 때는 빗물이 투둑투둑 요란한 소리를 내며 떨어지고 있었다. 마을로 향하는 지름길로 들어서서 마지막 인사를 나누려는데 갑자기 명덕이 어머니가 내 손을 덥석 잡았다. 그리고는 무엇인가를 내 손에 꼭 쥐어 주는 것이었다. 명덕이 어머니는 화초 호박처럼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애원히듯 말했다. "선생님, 이 손 절대로 펴지 마세유." 나는 당황했다. 내 손에 쥐어진 것이 꼭꼭 접힌 지폐라는 느낌이 들었던 것이다. 그 당시 신문과 방송에서는 대도시 교사들의 촌지 문제가 한창 거론되고 있었다. 아치 모든 교사들이 사회를 어지럽히고 있는 것처럼 떠들썩했기 때문에 나는 그런 눈길 속에 살아야 한다는 사실이 억울하기 짝이 없던 터였다. 나는 결국 그 자리까지 따라 나오며 이별을 아쉬워하고 있는 내 자신이 답답해졌고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선생님, 지발 부탁이어유. 내가 간 다음에 보세유. 꼭이유." 난 절대로 안 받겠다며 손을 뽑아 내려고 안간힘을 섰다. 하지만 명덕이 어머니는 금방 울음이라도 터질 것만 같은 얼굴로 찢어진 비닐우산도 채 펼치지 못하고 김장밭을 가로질러 도망치듯 달려갔다. 나는 우두커니 서서 뿌연 빗줄기 속을 헤집고 도망치는 명덕이 어머니의 뒷모습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발걸음을 돌리면서 천천히 손을 펼치는 순간, 나는 놀라고 말았다. 내 손바닥에는 겉 껍질이 벗겨져서 은박지만 남은 껌 한 개가 놓여 있었던 것이다. 그것도 너무 만지작거려서 네 귀퉁이로 살이 다 나온... 나는지금까지도 그 껌을 내 비밀함에 보물처럼 소중히 간직하고 있다. 그리고 내 마음에 찬바람이 들 때마다 그 껌을 꺼내 보면서 어딘가에 살고 있을 그들 모자를 생각한다. (초등학교 교사) 가뭄과 태산붕알 - 강연균 "연균아, 너 불알 좀 보자!" 가뭄에 애타게 비를 기다리며 마을 앞 당산나무 밑 정자에 앉아서 하늘을 원망하시던 어른들이 어린 나를 보면 으레 하시던 말씀이다. 나는 유년 시절 별명이 '태산붕알'이었다. 그 이유는 그것이 비가 올 무렵이면 부풀어 쇠불알처럼 커지곤 했기 때문이다. 동내 어른들은 나를 불러 세워 놓고 엿을 사준다느니 착하다느니 추켜세우면서 밑 터진 바지 밑으로 고추를 꺼내 불알 만져 보시곤 했다. 그것으로 비가 올까 안 올까 점쳐 보셨는데 그것이 용케도 몇번 맞았던 모양이다. 그래서 나는 어느새 우리 동네 관상대가 되어 버린 셈이다. 그후 나는 불알을 헐값으로 꺼매 보여 주기가 싫어졌고, 귀찮기도 했지만 창피한 생각이 들어 오른들의 청을 별로 들어주지 않았다. 내가 예닐곱 살 때였던가. 가뭄이 극심해 모든 농작물이 바싹바싹 타들어가자 농부들의 한숨 섞인 탄식이 여름 하늘 뭉개구름 만큼이나 높아지고, 간밤에 자기 논에서 물을 빼내 갔다고 여기저기서 물싸움이 벌어지고, 이웃집끼리도 물꼬 싸움 때문에 말조차 않고 지내는 그런 흉흉한 때였다. 어린 나도 비가 오기를 기다리며, 가끔 골목 울타리 밑에 오줌을 냅다 깔겨대며 아랫도리를 슬그머니 내려다보며 확인하곤 했다. 하루는 정자나무 밑에서 하릴없이 동네 꼬맹이들과 흙놀이를 하고 있는데, 평소에도 골목에서 나를 만나면 그 넓디넓은 양팔을 떡 벌려 지나가지 못하게 붙들어 놓고는 이것저것 꼬치꼬치 묻곤 하던 아저씨가 다가왔다. 그 아저씨는 능글맞게 웃으며 말했다. "연균이 이놈, 불알 한 번 만져 보자!" 나는 그 어른을 피해 잽싸게 도망을 쳤다. 하지만 몇 걸음 못 가서 나는 잡혔고, 잡히자마자 나는 무지막지한 욕을 목청이 찢어져라 퍼부어댔다. 어느새 지나가던 동네 어른들과 아이들이 구경거리가 생긴 것처럼 빙 둘러섰다. "그래 연균아, 내가 이렇게 손 안댈 텐게 니가 한 본 만져 봐라." 아저씨는 쭈그려 앉으면서 사뭇 사정조로 나를 달랬다. 나는 마치 독안 든 쥐처럼 사면초가가 되었다. 나는 할 수 없이 어른들의 얼굴을 쳐다보며 슬그머니 아랫도리에 손을 넣었다. 초가집 처마 끝에 올라가 새 알을 꺼낼 때처럼 잠시 침묵이 흘렀다. "연균아, 어쩌냐 비 오것냐? 안 오것냐?" 아저씨는 마치 큰일이 난 것처럼 눈을 크게 뜨고 나에게 물었다. "비...오곳소. 비 온당께라우!" 나는 소리를 꽥 지르고 포위망을 빠져나와 집으로 도망쳐 버렸다. 그날 해질 무렵 투두둑 마른 대지에 흙냄새를 뿌리며 빗방울이 떨어지더니 이내 흠뻑 비가 왔고 농토는 해갈이 되었다. 그후 그 아저씨는 허름한 약봉지를 소중히 싸 갖고 와 아버지에게 주면서 말했다. "태산붕알 치료약은 이것이 잘 듣는다고 허대. 자네 아들놈 이것 한 번 먹여 보소." 쥐똥 같은 단방약 봉지였다. 어쨌든 그후 나는 비만 오려면 불알이 부어 오르던 그 병도 나았고, 세월은 이렇게 흘러 이제 그 어른은 만날 길이 없다. (화가)
Board 삶 속 글 2022.01.30 風文 R 557
Board 고사성어 2022.01.30 風文 R 93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