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가 쏟아지는 우리선인들 이야기 반역자를 죽이려다 병자호란에 따른 민족의 비극은, 책을 들추기조차 역겨울 만큼 참혹하고 억울하고 분통이 터져 견디기 힘들다. 패전으로 `성하지맹`의 수모를 당한 후에, 세자와 후에 효종이 된 봉림대군이 볼모가 되어 저들의 땅으로 끌려가게 됐을 때, 명색이 벼슬아치들이라는 게 평소에 나불대던 충성은 어디다 던져두고, 핑계를 대어 배행해 모시고 가기를 모두들 꺼려 하였다. 오직 정뢰경만이 시강원 사서로서 수행하기를 자원해서, 그를 모시고 일했던 강효원도 함께 가게 되었다. 오래지 않아 정공은 필선으로 승임되었는데 그는 인조 8년(1630년) 23세로 문과 별시에 장원급제하여 장래를 촉망받는 문신으로 당시 나이 30세밖에 안되었다. 병자호란에는 약간 복잡한 사정이 있는데, 그 대강은 이러하다. 중국 본토의 명나라와는 건국초부터 남달리 친밀한 관계를 맺어 왔고, 조정에서는 임진왜란 때 이여송을 시켜 10만 대군으로 구원병을 보내준 것을 다시 없는 은혜로 여겨 오던 터라 그들에 대한 은의도 저버릴 수 없고, 만주땅에서 새로이 일어나는 청나라 세력에 맞설만한 군사력도 갖고 있지 못했다. 그래서 광해군이 집권하던 14년 동안엔, 이른바 등거리외교로 그럭저럭 양편으로 다 좋은 척하며, 내 몸만 상하지 않으면 된다는 식의 자위책으로 일관해 왔다. 그러는 동안 광해군 10년 무오에 명나라의 만주토벌에 협력하기 위해 강홍립으로 도원수를 삼아 10만 병을 동원했는데, 심하싸움에서 패전해 김응하는 전사하고 강홍립은 남은 병력을 이끌고 청에 항복하고 말았다. 그런 지 5년 만인 인조원년, 반정에 공이 컸건만 논공행상에 불만을 품은 이괄이 반란을 일으켰으나 전세가 불리하자, 이괄편에 붙었던 구성부사 한명련의 두 아들이 청으로 도망가 거기서 저들의 장수가 되어 병자호란 때 향도의 구실을 하게 된다. 이때 정명수라는 놈이 있었는데, 본시 은산고을의 관노로 역시 같은 계급 출신인 김돌이와 함께 청군에 붙잡혀 갔다. 그런데 요놈이 어찌 영리하고 약아 빠졌는지 어느 결에 저들의 말을 배우고 익혀서 용골대, 마보대라는 저들 장군 신변에 있어 통역구실을 하고 저들의 창귀가 되어 본국 정부에 대해 차마 못할 짓을 무던히도 하였다. 여기 창귀라는 말을 썼는데 이것은 범에게 잡아 먹힌 사람의 영혼이라고 한다. 이것이 범의 앞잡이가 되어 `조놈 잡아 먹어라, 저놈 맛있겠다, 먹어 치워라.`하며 인도하고 다닌다는 것이다. 그래 세력을 믿고 못된 꾀만 내는 놈을 가리키는 말이 된 것이다. 나라 안 사람들이 모두 이를 갈면서도 어쩌지 못했는데, 꼬리가 길면 밟힌다고 청나라 조정에서도 차츰 놈들의 행동을 수상쩍게 여겨 놈의 행동을 캐밝히어 죽여 없앨 생각을 갖게 되었다. 정뢰경 일행이 이 낌새를 알고, 이 기회를 틈타 `요놈을 손 안대고 저들의 힘으로 죽여 없애리라.` 마음먹게 되어 현지에 와 있던 박호, 신득연, 박계영, 신욱, 김종일, 정지화, 여러 분이 힘을 모으기로 했는데 주모자는 물론 정뢰경이었다. 이 해 정월에 김종일과 상의 끝에 수하 이속 중에 믿고 일 맡길 사람은 강효원만한 이가 없다고 의견이 일치되어 그를 불러 앉히고 말하였다. "명수와 돌이 두 도적놈의 못된 짓은 세상이 다 아는 바로, 청나라 조정에서도 요놈들을 없애려 하니 이 기회를 놓쳐선 안되겠네." 두 놈의 이름에 성을 붙여 말하지 않았는데, 옛날부터 역적같은 질 나쁜 죄인을 지칭할 때는 그 일가들이 거북해할까 보아 그냥 이름만으로 부르는 것이 선례였다. "요사이 두 놈의 행적이 더욱 방자해져서 하한에게 보내는 물품 중에서 배와 감 각 열 접씩을 가로채 먹었고, 최상국이 올때 가져온 은자 2백냥과 역관 최득남이 싣고 온 은 일곱 바리를 몽땅 떼어먹었는데 증명할 만한 문건은 모두 여기 있어. 그러니 그대는 천노와 함께 문서로 그 간악상을 고발하라. 청관이 증거를 대라거든 시강원 양반들이 알고 있다 하라 그러면 뒷일은 우리가 담당함세." 그러나 명수 일당은 철저하게 간사하였다. 증거물로 제출한 문서를 박로라는 자를 시켜 태워 없애고, 박로가 신문 당할 때는 `그런 일이 없다`고 잡아떼게 하였다. 적반하장으로 정뢰경 일행은 되레 완전히 뒤집어 쓴 꼴이 되어 사형을 당하게 됐는데 그들을 용서받게 하려고 세자께서 납셨다. 이때 웬놈이 길을 가로막아 서기에 정지화가 이런 무엄한 데가 있느냐고 했더니 "이놈, 나를 누구로 아느냐? 내가 정명수다, 이놈아!" 하고 주먹으로 마구 쳐서 의관이 다 파열을 당하였다. 끝내 정뢰경과 강효원, 천노는 함께 참형을 당했는데 그들의 태도는 끝까지 당당하였다고 한다. 그 뒤 조정에서는 정뢰경을 충신으로 정문을 내리고, 강효원은 아전의 지위를 면해 주었다. 당시의 사실은 훗날 청나라에 오가는 과정을 쓴 연암 박지원의 `열하일기` 가운 `하필이면 정명수란 놈에게 형벌을 맡기어서 그 참혹함을 눈 뜨고는 볼 수 없었다.`고 나와 있다. 청나라에서도 놈의 행적에 정이 떨어지고 본국에 와서 행한 행패도 낱낱이 알려져, 이 반역자의 무리는 저희들이 저지른 죄값으로 청인들 손에 목이 날아갔고, 남은 건 씻을 길 없는 악명뿐이었다. 한편 청에 투항한 도원수 강홍립은 인조반정 후 자신의 온 가족이 몰살당했다는 풍설을 듣고 저들의 군대를 끌고 평산땅까지 왔다. 조정에서는 그의 온 가족을 군문까지 데리고 가 면회시켜 주어서 오해는 풀렸으나, 그의 숙부 강진은 `조선사람이 어찌 그럴 수가 있느냐`고 크게 꾸지람을 했다. 청에서도 이 사실을 알고는 그를 남겨 두어 조정의 처분에 맡기고 회군해 갔다. 조정에서는 청이 강성한 것을 두려워해 드러내 놓고 죽이진 못하고, 강홍립을 양화 나룻가에 있는 정자에 나가 있게 했는데, 나라안 분들을 대할 면목이 없어서인지 방 문지방을 나서지 않은 채 여러해 동안 탄식하며 신음하는 소리가 끊이지 않더니 인조 5년 병사해다고 한다. 그러나 가족들이 슬그머니 목매어 없애 버린 듯 그렇게 나와 있는 기록도 몇 군데 있으니 나라를 배신한 자의 말로는 비참하기 짝이 없다고나 할까. 국그릇을 엎질러서 조선왕조 건국당시 공이 컸던 분에 하륜이라는 분이 있었다. 공민왕 14년 문과에 급제하여 신돈의 횡포를 탄핵하고 최영의 요동정벌을 반대하였으며, 태조의 등극(1392년) 때는 이미 46세의 장년이었다. 특히 관상술에 뛰어나 일찍이 동료 친구 민제에게 "내가 사람을 많이 보았으나, 둘째 사위 이방원(뒷날 태종)같은 이를 보지 못하였으니, 한번 만나게 해 주시오." 해서 교제를 터 깊이 사귀며, 하늘을 덮을 영특한 기상이라 하였다니, 태종에 대한 기대가 무한히 컸었음을 알 만하다. 태조 7년, 그가 충청도 관찰사로 임명받아 떠나기에 앞서, 그의 저택에서 여러 친구들이 모여 전송하는 자리가 벌어졌는데, 당시 한창또래 씩씩한 청년왕자 정안군 이방원도 자리를 같이했다. 당시 우리나라 잔치하는 식이, 음식상은 각자가 따로 받고, 술은 단지 앞에서 부어 한잔씩 들고 가, 돌려가며 권하는 식이었다. 하륜은 자기를 전별하는 자리에 귀하신 몸인 왕자가 친히 임석하신 것을 감격스럽게 여겨, 몸소 그 앞에 가 무릎 끓고 잔을 받들어 올린 것까지는 좋았는데, 국그릇을 왕자 옷자락에 둘러엎는 실수를 저지르고 말았다. 한창 팔팔하던 정안군은 자리를 박차고 일어서며, 뛰쳐나와 자신의 말을 끌어내 타고, 속력을 내어 자택으로 돌아가고 말았다. 하륜은 허둥지둥 왕자의 옷자락을 잡고 만류하려 하였으나 뿌리치고 가 버리자, 자신도 뒤따라 말을 달려 정안군의 뒤를 쫓았다. 누가 보나 왕자께 실례한 것을 사과하러 가는 것이었다. 정안군이 댁에 돌아와 대문에 들어서 그대로 말을 몰아 중문을 통과해 들어왔는데, 뒤미처 하륜이 게까지 따라 들어오며 붙잡지 않는가? `나으리!` 정안군도 그제사 조금 이상한 생각이 들어서, 방에 데리고 들어와 마주 대해 앉았다. `나으리, 어쩌려고 난국을 앞에 두고, 그 풍파를 어찌하시려고 안연히 앉아 계시는 겁니까?` `...` `왕위 계승에 있어 평상시에는 적장자로 잇는 법입니다마는, 건국초에는 공 있는 왕자를 세우는 것이 도리요, 또 전례이온대, 지금 우에서는 막내왕자 방석을 세자로 세웠지 않습니까? 이럴 땐 유능할수록 신변이 위험한 법입니다. 세자 방석의 처지가 되어 생각해 보십시오. 용같고 범같은 이복 형님들이 쭈욱 버티고 있는데, 마음놓고 그 자리를 지키겠습니까? 거기다 그쪽에는 꾀주머니같은 정도전이 딸려 있습니다.` 이번엔 정안군이 딱 20년 연상의 이 노련한 정치가 하륜의 손을 꽉 잡으며 물었다. `그러면 어떻게 대처해야 되겠소?` `예! 소인은 충청도 임지로 떠납니다마는 서울에는 이숙번이 지안산군사로 있어 일을 같이 의논할 만하며, 그밖에 아무아무가 같이 보좌해 올릴 것입니다. 아, 이것좀 보게! 자리를 너무 오래 비우면 남의 의심을 사겠기로 이만...` 그가 황망히 떠나가는 뒷모습을 뒷날의 태종인 정안군은 멍하니 바라만 보고 있었다. 물론 그것을 계기로 모의는 급속도로 진전해 이숙번의 지휘아래 정도전을 잡아 없애고 방번과 방석 두 이복동생을 잡아 죽이는 제1차 왕자의 난은 발발하였고, 태조는 화가 치밀어 그길로 서울을 떠나 금강산을 구경하고는 함흥 고향에 돌아가 오랜동안을 버티는 사이, 많은 충신이 잇달아 목숨을 잃는 함흥차사의 비극으로 펼쳐진다. 이 사실상의 쿠데타에서 정도전을 사로잡았을 때, `살려만 주시면 극력 왕업을 돕겠습니다.` 라고 하는 것을, 태종은 눈을 딱 감고 `네가 고려조를 망해 먹고, 이제 또 창업초의 이 왕조마저 망하게 하려는 거냐?` 하며 그 자리에서 목쳐 죽였다고 하는데, 일제말 서울 창동역 확장공사장에서 그의 것이라는 시체가 미이라 형태로 발견되어, 6.25 사변 때까지 국립 중앙박물관에 진열돼 있었다. 공사 현장 발굴에 참여했던 한 인부의 얘기를 들으니, 말짱한 모습으로 드러났을 때, 일으켜 세워놓고 재 보았더니, 자기의 키도 적지는 않은데 어깨밖에 닿지 않더라고 하며, 머리통이 이만이나 하고 왼쪽 옆구리로 비스듬히 칼로 찢긴 자국이나 있더라고 호들갑을 떨며 떠들어댔다. 박물관 유리함에 진열됐을 때 보니, 옷으로 가려서 상처는 볼 수 없었고, 확실히 우람한 체격에 어마어마하게 큰 머리통에는 사모 둘레의 철대가 그냥 붙어 있었다. 그것이 정도전이라는 중요한 근거는 창업초 지금의 노원벌을 국도로 정하자는 것이 그의 주장이었고, 삼봉이라는 그의 호도 자신이 사는 집터에서 우람하게 쳐다보이는 삼각산의 세 봉우리에서 유래했다고 보는 견해이다.
Board 삶 속 글 2022.02.10 風文 R 679
작은 이야기 2 - 정채봉, 류시화 엮음 1. 평범한 행복 2 친구의 편지 - 강준희 대학 3학년 때 우리 집이 망했다. 망해도 아주 철저히 쫄딱 망했다. 건축업을 하던 아버지가 어떤 사기꾼에게 속아 그렇게 된 것인데, 그때 우리 식구들은 살던 집은 물론 가재도구, 살림살이 도구, 옷까지 고스란히 남겨 놓고 알몸으로 거리에 나앉았다. 당장 잠잘 곳을 잃어버린 식구들에게 그나마 상도동 산비탈에 흙집을 마련한 것은 역시 아버지가 건축업을 했던 덕이었는지 모른다. 아무튼 그 한심하기 이를 데 없는 흙집이 아버지가 지은 마지막 작품이었다.아버지는 흙집을 짓고 나서 한 달 뒤에 그곳에서 분한 마음을 누그러뜨리지 못하고 숨을 거두시고 말았다. 졸지에 당한 겹친 불행은 나로하여금 끝없는 절망만 알게 했다. 거의 실신하다시피 되어 버린 어머니와 나이가 어린 세 동생들. 나는 장남의 입장에서 어쨌든 집안을 책임져 나가야 했지만 도무지 암담할 뿐이엇다.그 지경에 이르러서는 친척이란 것도 별로 도움이 되지 못한다는 걸 그때 처음으로 뼈저리게 느꼈다. 죽음이라는 걸 몇 번이고 생각하며 오로지 절망만을 바라고 앉아 있던 어느 날 어떻게 알고 왔는지 K가 찾아왔다. 손에는 알사탕 한 봉지와 사과 한 봉지 그리고 엉뚱하게도 국화 한 묶음을 들고. K는 같은 서클 활동을 하던 고등학교 1년 후배로 대학에 진학한 뒤에는 그다지 자주 만나지 못했었다. 그런 그가 어떻게 알고 찾아온 것일까? K는 그날 별로 말을 하지 않고 그냥 돌아갔다. K의 편지를 받은 것은 그로부터 2주일쯤 뒤였다. 논산 훈련소로 떠나며 보내 온 편지였는데 편지 속에는 2만 5천 원의 돈과 함께 나의 고등학교 등록금을 낸 영수증이 들어 있었다. 형, 제발 언짢게 생각하지 말아 주십시오. 제가 무슨 서푼짜리 동정이나 베풀고 다닌다고 노여워하지 마십시오. 많은 말을 하지 않아도 형은 저를 잘 알고 계시리라 믿습니다. 졸병이 된 제가 형에게 경례를 붙이는 날, 그날 한 잔 사주십시오.) 나중에 안 일이지만 그가 내게 보낸 돈과 등록금은 1년 동안 가정교사를 하며 꼬박 모아 온 돈이었다. 그 역시 넉넉치 못한 가정 형편으로 스스로 학자금을 마련해야 할 처지였고 내게 보낸 돈은 그의 전 재산이었다. 떡하게 된 내 처지를 보고 그는 군대에 지원 입대를 하고 대신 나를 구해 주기로 던 것이다. (회사원) 어떤 결혼 예물 - 이상헌 어느 날, 젊은 남녀가 내 사무실로 찾아왔다. 며친 전 결혼 예물에 대해 얘기했던 내 방송을 듣고 왔다는것이다. "저희들은 곧 결혼할 사이인데 흔한 결혼 예물이 아닌 '우리들의 보석'으로 예물을 마련하고 싶습니다. 좀 도와 주십시오." 그들이 가져온 것은 그동안 보석 가공업과 금속 디자인을 해온 나로서는 처음 보는 보석(?)이었다. 아니 보석이라기보다 희귀한 돌맹이라고 보는 것이 전문가다운 감정일 것이다. 그들이 부부가 되기로 약속하고 처음으로 함께 등산을 한 강원도 어느 산골에서 주웠다는 그 돌은 산과 들에서 흔히 발견되는 아제이트(Agate) 류의 준보석이라든가 조직의 치밀도, 색상 등에서 볼 때 보석의 구비조건이나 호나가의 가치로는 탐탁치 않은 것이었다. 그런 그들은 사랑의 약속을 오래 오래 기념하고 굳게 다짐할 정신적 신표로서 이 돌을 꼭 간직하고 싶다는 얘기였다. 이 돌맹이(그들은 즐겨 그렇게 불러 주기를 바랐다)를 똑같은 모양으로 나눠 갖고 싶다면서 디자인까지 연구해 온 것이다. 남 보기에는 하잘것없는 돌맹이에 불과하겠지만 결혼 예물을 마련하는 마음 자세로는 이 이상 의미 깊고 정성스러울 수 없을 것 같았다. (보석 연구가)
Board 삶 속 글 2022.02.10 風文 R 627
금성탕지(金城湯池) // 방비가 아주 견고한 성. 진(秦)나라 시황제(始皇帝 : B.C 246-210)가 죽고 어리석은 2세 황제가 즉위하자 전국시대 6강국의 후예들이 군사를 일으켜 고을의 우두머리를 죽이고 관청을 점거했다. 그 무렵, 무신(武信)이라는 사람이 조(趙)나라의 옛땅을 평정하고 무신군(武信君)이라 일컬었다. 이를 본 모사 괴통은 범양 현령(范陽縣令) 서공(徐公)을 찾아가 이렇게 말했다. "사또께서는 지금 매우 위급한 처지에 놓여 있습니다. 그러나 제 말대로 하시면 전화위복(轉禍爲福)이 될 수도 있습니다." 서공은 깜짝 놀라서 물었다. "무엇이 위급하다는 거요?" "사또께서 현령으로 재임한 지난 10년 동안에 진(秦)나라의 가혹한 형벌로 인해 부모를 처형당한 사람, 손발이 잘린 사람, 억울하게 죄인이 된 사람들이 많은데, 지금 그들이 사또를 원망하며 죽일 기회만 노리고 있다는 것을 모르십니까?" "모르오. 그런데, 전화위복이란 또 무슨 말이오?" "제가 사또를 대신해서 지금 세력이 한창인 무신군을 만나 싸우지 않고 땅이나 성을 손에 넣을 수 있는 계책을 말해 주면, 그는 틀림없이 사또를 후대할 것입니다." "그럼, 나를 위해 수고해 주시오." 이리하여 무신군을 찾아간 괴통은 이렇게 말했다. "만약 귀공(貴公)이 범양을 쳐서 현령이 항복한 경우, 그 현령을 푸대접한다면 죽음을 두려워하며 부귀를 바라는 각지의 현령들은 '항복하면 범양 현령처럼 푸대접받는다.'며 더욱 군비(軍備)를 강화하여 마치 '끓어오르는 못에 둘러싸인 무쇠 성[金城湯池]' 같은 철벽(鐵壁)의 수비를 굳히고 귀공의 군사를 기다릴 것입니다. 그땐 공격이 쉽지 않을 것이오. 그러니 지금 범양 현령을 극진히 맞이하여 그로 하여금 각지의 현령들을 찾아보게 하십시오. 그러면 그들은 모두 싸우지 않고 기꺼이 항복할 것입니다." 【동의어】탕지철성(湯池鐵城) 【유사어】금성철벽(金城鐵壁)
Board 고사성어 2022.02.10 風文 R 830
받아쓰기 없기 새 대통령의 일거수일투족이 모두 파격이라고 관심들이 많다. ‘파격’이란 오래된 격식이나 관행을 깨뜨리는 참신한 행동을 말하는 긍정적인 표현이다. 그중에 언어 문제에 대한 파격은 단연코 대통령의 발언을 받아쓰기하지 말고 의견을 말해 달라는 요구였다. 언어만이 아니라 기존의 태도, 생각, 가치 등을 전면적으로 혁신하려는 외침으로 해석된다. 남북한의 정치에 여러 가지 다른 점이 많고도 많지만 유일하게 똑같아 보이는 것이 상급자는 무언가를 말하고 있는데 참모들은 부지런히 수첩에 받아쓰기를 하고 있는 모습이었다. 누구 하나 고개를 갸우뚱하는 사람조차 없었다. 오로지 상명하달만을 목표로 삼고 있는 조직의 모습이었다. 어찌 이런 곳에서 창의적인 생각과 의견이 나올 수 있었겠는가? 잘되길 바라지만 적이 걱정되는 면은 이 결정이 대통령의 ‘지시’로 가능해졌다는 것이다. 참모 가운데 누군가가 이런 문제 제기를 먼저 했더라면 더 강력한 혁신이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회의 자료조차 없앤다는 말에는 이제 우리도 무의미한 형식을 떨어내고 제대로 의견을 모으는 회의에 충실할 수 있는 계기가 왔구나 하는 기대를 하게 된다. 이왕이면 언어 표현도 혁신의 길에 동반했으면 한다. 문장의 서술어들은 그 말의 사회적 기능을 암시한다. 예를 들어 서술어에 ‘지시, 명령, 하달’과 같은 말이 들어가면 의사결정의 혁신 취지는 사라진다. ‘의견을 모았다’라든지, ‘어떤 의견으로 조정되었다’와 같은 표현이 더 바람직하다. ‘전격적으로, 즉각적으로’ 같은 사려 깊지 못한 부사어들도 삼갔으면 한다. 그래서 부디 소통하고, 의견을 나누고, 다양한 주장을 통합하는 성숙한 정치의 첫걸음이 이 기회에 이루어지기를 바란다. 말이 탁상공론의 도구에서 벗어나 삶을 변화시키는 수단이 되어야 한다. 김하수 한겨레말글연구소 연구위원·전 연세대 교수
권력의 용어 모든 분야의 전문가들은 그 나름의 전문용어들을 가지고 있다. 심지어 비합법적인 영역에서조차도 전문용어 기능을 하는 말들이 있다. 그런 말들을 흔히 ‘은어’라고 한다. 정당성을 인정받지 못하는 음지의 전문용어라고 할 수 있다. 그런가 하면 또다른 영역이 슬며시 모습을 드러낸다. ‘권력’이라는 영역이다. 권력은 합법 세계와 비합법 세계를 다 들여다보게 된다. 그러다보니 합법과 비합법 양쪽을 아우르는 용어나, 양쪽에 다리를 걸친 듯한 개념을 쓰기도 한다. 예를 들어 과거에는 ‘정치자금’이라는 용어가 있었다. 불법인 듯, 합법인 듯, 어떻든 권력이 필요한 돈이었다. ‘고위층’이란 말도 그게 누구인지 알 듯 모를 듯하다. 누구인지 너무 관심 갖지 말라는 용어라고도 할 수 있다. 또 신기한 권력의 용어가 하나 발견되었다. 이름하여 ‘특수활동비’다. 공금이긴 한데 굳이 그 용처를 밝히지 않아도 되는 신기한 돈이다. 언론이 이미 ‘쌈짓돈’ 혹은 ‘눈먼 돈’과 동의어라는 듯이 빈정대고 있으니 이미 그 정당성이 무너진 말이다. 또 ‘돈봉투’라는 말이 유의어처럼 쓰인다. ‘돈봉투’의 또다른 유의어는 ‘금일봉’이란 말이다. 대개 금일봉은 권력자가 은혜를 베풀듯이 주는 돈이고, 돈봉투는 힘없는 사람이 권력자에게 바치고 싶어하는 돈이거나 어슷비슷한 사람들끼리 나누어 갖는 돈인 것 같다. 권력이 음지와 양지를 모두 들여다볼 필요는 분명히 있다. 그러나 그 활동의 정당성은 명백하게 해두는 것이 바람직하다. 공직에 있으면서 가장 경계해야 할 부분은 권력의 ‘사익’에 해당하는 부분이기 때문이다. 이 부분을 흐릿하게 처리하면 결국 정당하던 권력마저 무너지게 마련 아닌가? 국정농단은 그리 먼 곳에 있는 게 아니다. 권력의 사사로운 일상생활 바로 곁에 있다. 김하수/한겨레말글연구소 연구위원·전 연세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