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이야기 2 - 정채봉, 류시화 엮음 2. 잊을 수 없는 사람 분장실 청소를 잘해야 명배우 된다 - 김지숙 원래 소심한 성격 탓에 대학을 졸업하고도 별다른 취업 준비도 없이 시간만 죽이고 있던 내게 어느 날 한 통의 전화가 걸려 왔다. 학교 때부터 외톨이인 나를 따뜻하게 대해 주신 유일한 분, 교양 학부의 이반 선생님이셨다. 나의 근황을 들으신 선생님은 "지숙이는 세상을 좀 다르게 살아 볼 필요가 있어. 연극 한 번 해보지 않을래"하시며 (현대극단)에 나를 소개해 주셨다. 누구나 사회 초년 생활이 힘들지만 나의 극단 생활은 여러 모로 더욱 어려웠다. 그 중에서도 분장실 청소는 정말로 힘들었다. 내가 연극을 배우러 왔는지 청소부로 고용되었는지 분간을 못할 정도였다. 눈물을 찔끔거리며 허탈해 하는 내게 이반 선생님은 날카롭고도 넉넉한 위로를 곁들여 주셨다. "한술 밥에 배부르겠니. 붙장실 청소를 잘해야 좋은 배우가 된다." 4년 전 극단 (전설)을 창단하고 대표직을 맡게 된 나는 요즘 단원들과 함께 연극인이 몸으로 느껴야 하는 현실적 난제 속에서도 무대에 올릴 작품 준비로 밤낮이 없다. '분장실 청소를 잘해야 좋은 배우가 된다'는 이반 선생님의 한마디는 20년 전, 출발선에 서 있던 내게 많이 움츠리는 개구리가 멀리 뛸 수 있음을 일깨워 준 일침이었다. 인생은 결국 속도가 아니라 방향인 것이다. (연극인) 소금 같은 사람 - 임웅균 음식 문화, 특히나 우리의 식습관에서 소금을 빼고 요리를 한다면 어떻게 될까. 심심한 설렁탕, 심그운 김치 등 군침은커녕 생침도 돌지 않을 것이다. 소금이 없이는 우리에게 주어진 먹는 즐거움 중 많은 부분을 놓치게 되듯이 나의 음악 인생을 뒤돌아보면 순간순간 고마웠던 분들도 많고 힘들었던 기억도 적지 않다. 그 중에서도 지금껏 가장 기억에 남는 말은 초등학교 졸업식 날 육성회장님이 하신 한 마디였다. "여러분들은 앞으로 살아가면서 음식에서처럼 인생의 맛을 조절하는 소금과 같은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여러 가지 비유를 하며 어린 마음에 뭔가를 심어 주려던 그분의 눈빛은 지금도 기억하고 있지만, 옆 친구와 장난을 치며 그때는 솔직히 그냥 흘려 보냈었다. 그후 세월이 흘러 인생의 참맛을 알기 시작할 즈음, 홀연 30년 전의 그 말씀이 새로이 내 삶의 화두로 자리잡게 되었다. 당시 뚝섬에서 풍년라면을 경영하던 최덕남 사장은 배고픈 이들과 목 배운 이들에게 그가 가진 소금을 적절히 나누어 준 분이셨다. 성수고등공민학교를 통해 수많은 청년들이 내일의 꿈을 향해 나아갈 수 있게 한 것이다. 나는 요리사가 아니라 성악가이기에 노래로 삶의 소금이 되려한다. 사회의 어두운 구석구석 나의 노래가 밝은 햇살로 스며들 수 있기를 바라며 지금은 나의 제자들에게 그날의 기억을 더듬어 준다. "여러분들은 삶을 감칠맛 나게 하는 소금과 같은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성악가, 한국예술종합학교 음악원 교수) 인생은 미리톤이다 - 오세훈 나에게는 결정적인 순간에 어떤 영감을 준 극적인 한 마디나 거창한 좌우명 같은 것은 없다. 다만 기쁠 때나 슬플 때 나도 모르게 중얼거리게 되는 말이 한두 마디 있다. 아마도 중학교 때 고사성어 사전에서 본 것이 첫 대면인 듯하다. 청계천의 헌 책방에서 책을 고르다가 우연히 (고사성어집)을 손에 넣었다. 당시 내 용돈에 비추어 상당히 출혈을 했음직한 그 책을 기회 있을 때마다 반복해서 읽었는데, 여러 가지 좋은 말들이 사춘기 소년에게는 적지 않은 재미를 주었다. 살면서 이런 저런 곡절을 겪다 보니 어느새 그 책의 한 구절을 주문처럼 되뇌게 되었다. 참으로 나를 기쁘게 했던 일이 얼마 후 참담한 실패의 계기가 되는가 하면, 세상이 무너지는 듯한 좌절의 체험이 결국 따지고 보면 도움이 되었을 때 그 장엄한 인생의 파노라마를 설명할 수 있는 단어는 한 마디로 '새옹지마'였다. 언제부터인가 넘어졌을 때는 이 말을 떠올리며 다음을 기약할 수 있었고, 몹시 기쁠 때는 이 말을 떠올리며 차분히 다음을 준비할 수 있었다. 그러고 보니 환희와 좌절의 순간에 되뇌는 말이 또 하나 있다. '인생은 마라톤이다'라는 평범한 말이다. 인생은 100미터 경주가 아니기에 더욱 살아 볼 만한 가치가 있는지도 모른다. 단칼에 승부가 난다면 무슨 재미로 살겠는가? 이 말은 또, 게을러지고 싶은 유혹을 느낄 때나 스스로를 다잡는 데도 한몫을 단단히 한다. 마라톤 같은 인생! 새옹지마 같은 인생! 순간마다 일희일비할 필요 있을까? (변호사)
Board 삶 속 글 2022.05.09 風文 R 655
남상(濫觴) / 사물의 처음. 시작. 《出典》筍子 孔子家語 공자의 제자에 자로(子路)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공자에게 사랑도 가장 많이 받았지만 꾸중도 누구보다 많이 듣던 제자였다. 어쨌든 그는 성질이 용맹하고 행동이 거친 탓에 무엇을 하든 남의 눈에 잘 띄었다. 어느 날 자로가 화려한 옷을 입고 나타나자 공자는 말했다. "양자강(揚子江 : 長江)은 사천(泗川)땅 깊숙히 자리한 민산(岷山)에서 흘러내리는 큰 강이다. 그러나 그 근원은 '겨우 술잔에 넘칠 정도[濫觴]'로 적은 양의 물이었다. 그런데 그것이 하류로 내려오면 물의 양도 많아지고 흐름도 빨라져서 배를 타지 않고는 강을 건널 수가 없고, 바람이라도 부는 날에는 배조차 띄울 수 없게 된다. 이는 모두 물의 양이 많아 졌기 때문이니라." 공자는 모든 일은 시초가 중요하며 시초가 나쁘면 갈수록 더 심해진다는 것을 깨우쳐 주려 했던 것이다. 공자의 이 이야기를 들은 자로(子路)는 당장 집으로 돌아가서 옷을 갈아 입었다고 한다. 《筍子》'孔子家語'의 기록은 다음과 같다. 子路가 옷을 잘 차려입고 孔子님을 뵈었다. 그러자 孔子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由야, 이 옷자락은 무엇이냐? 옛날에 강은 민산(岷山)으로부터 흘러나왔다.그 처음에 나옴에 그 근원은 가히 써 술잔에 넘칠 만하였다. 그러나 그 강의 나루에 이르러서는, 배를 늘어놓지 못하고 바람을 피하지 못하여, 건너지 못하였다. 오직 下流에 물이 많음이 아니겠느냐? 지금 너도 의복을 이미 盛하게 차려 입고 얼굴빛이 충만되었구나. 천하에 장차 누가 즐겨 너에게 간하랴!" 子路盛服見孔子 孔子曰 由 是??何也 昔者江出於岷山 其始出也 其源可以濫觴 乃其至江津 不放舟不避風 則不可涉也 非唯下流水多邪 令女衣服旣盛 顔色充盈 天下且孰肯諫女矣. 【유사어】효시(嚆矢), 권여(權與)
Board 고사성어 2022.05.09 風文 R 978
인종 구분 ‘인종’이라는 단어는 사람의 종류를 구분해 보려고 만든 단어이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완전히 ‘실패한 어휘’이다. 사람을 제대로 분류해내지도 못했을 뿐 아니라 숱한 혐오감과 고정관념을 만들어내어 많은 갈등과 분쟁의 씨앗만 뿌렸다. 그 판단 기준도 문화권에 따라 서로 다르다. 어떤 한국 여성이 독일 남성과 결혼하여 아기를 낳았다. 어머니 쪽 친척들은 그 아기의 눈이 푸른색인 것을 보고는 꼭 아빠를 닮았다고들 했다. 반면에 아빠 쪽 친척들은 아기의 광대뼈가 살짝 올라온 것을 보고는 엄마를 고대로 닮았다고들 했다. 서로 다른 부분을 결정적인 요소로 보고 있었던 것이다. 머지않아 겨울올림픽도 열린다고 하니 미리부터 걱정되는 바가 있다. 아마 훌륭한 기량을 보여서 메달을 딴 선수가 유럽계 여성일 경우에는 틀림없이 ‘푸른 눈의 미녀 선수’라는 말이 언론에 등장하지 않을까 하는 짐작이다. 종종 어려운 사람들을 위해 헌신한 유럽계 수녀들한테도 ‘푸른 눈의 천사’라는 표현이 나타나곤 한다. 그만큼 우리에게는 ‘푸른 눈’이 ‘미인’이나 ‘천사’라는 말에 자연스럽게 연결되고 있다. 이번 겨울올림픽에는 유난히도 한국 대표팀에 귀화 선수들이 많다. 따라서 언론 보도나 중계방송에서 예민하게 신경을 쓰지 않으면 황당한 표현이 나올 가능성이 퍽 많다. 또 일부는 해외로 이주했던 이들의 자녀가 다시 고국에 귀화해서 출전하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너무 뜨거운 국수주의적 표현이 난무하는 곳이 경기장인데 무슨 말실수가 터지지 않을까 걱정이 앞선다. 피부색과 눈의 빛깔은 사람의 능력을 판단하거나 평가하는 데 아무런 기준이 되지 못한다. 오로지 그런 말을 한 사람의 편견과 무지만 드러낼 뿐이다. 김하수/한겨레말글연구소 연구위원·전 연세대 교수
호언장담 호기롭고 자신 있게 하는 말을 호언장담이라고 한다. 매사에 호언장담을 잘하는 사람은 개인적으로 볼 때 부럽기도 하고 걱정이 되기도 한다. 그러나 공직자들이 그런 말을 쏟아내면 오히려 불안감이 들 때가 더 많다. 특히 정보를 독점한 사람들의 호언장담은 믿어야 할지 의심해야 할지 심란하기 그지없는 일이다. 가장 유명한 호언장담은 6·25 전쟁 직전에 당시 우리의 군 수뇌부 인사의 발언이었다. “(남과 북이 전쟁을 벌이게 되면) 아침은 개성에서 먹고, 점심은 평양에서, 저녁은 신의주에서 먹겠다”며 엄청난 ‘뻥’을 터뜨렸다. 그리고 머지않아 터진 전쟁에서는 도대체 어떤 판이 벌어졌는가? 전선의 붕괴는 이렇게 무능한 지휘부의 망상과 허위의식이 중요한 원인이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북의 핵무장이나 미사일 실험 소식을 접할 때마다 걱정이 되는 것은 충돌의 가능성이나 우리 측 무장의 열세가 아니라 안보 관계자들의 지나친 호언장담일 때가 더 많다. 몇 해 전부터 북에서 도발적인 일을 벌일 때마다 무슨 ‘참수’ 작전이니 지하 벙커를 박살낼 수 있는 무기니 하는 호언장담을 얼마나 자주 했는가? 그렇게 큰소리쳐 놓고 나서 진짜로 괌섬을 공격할 수도 있다는 위협을 받으니 이제 와서야 그게 가능하겠냐는 둥, 그럴 리가 없다는 둥 하며 은근히 꽁무니를 빼고 있다. 자고로 믿음직한 장수는 입을 그리 가볍게 놀리지 않는 법이다. 오히려 말을 아끼며 적이 외통수에 걸려들기만을 끈질기게 기다릴 뿐이다. 가볍게 입을 놀리는 짓은 사실 잔뜩 겁먹은 졸장부들의 불안감의 표현에 지나지 않는다. 새로 진용을 갖춘 안보 관계자들은 부디 호들갑스럽지 않게 안보 체계를 다듬어 나갔으면 한다. 그리고 안보에 대한 보도 역시 좀 더 진중했으면 좋겠다. 김하수/한겨레말글연구소 연구위원·전 연세대 교수 ……………………………………………………………………………………………………………… 인종 구분 ‘인종’이라는 단어는 사람의 종류를 구분해 보려고 만든 단어이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완전히 ‘실패한 어휘’이다. 사람을 제대로 분류해내지도 못했을 뿐 아니라 숱한 혐오감과 고정관념을 만들어내어 많은 갈등과 분쟁의 씨앗만 뿌렸다. 그 판단 기준도 문화권에 따라 서로 다르다. 어떤 한국 여성이 독일 남성과 결혼하여 아기를 낳았다. 어머니 쪽 친척들은 그 아기의 눈이 푸른색인 것을 보고는 꼭 아빠를 닮았다고들 했다. 반면에 아빠 쪽 친척들은 아기의 광대뼈가 살짝 올라온 것을 보고는 엄마를 고대로 닮았다고들 했다. 서로 다른 부분을 결정적인 요소로 보고 있었던 것이다. 머지않아 겨울올림픽도 열린다고 하니 미리부터 걱정되는 바가 있다. 아마 훌륭한 기량을 보여서 메달을 딴 선수가 유럽계 여성일 경우에는 틀림없이 ‘푸른 눈의 미녀 선수’라는 말이 언론에 등장하지 않을까 하는 짐작이다. 종종 어려운 사람들을 위해 헌신한 유럽계 수녀들한테도 ‘푸른 눈의 천사’라는 표현이 나타나곤 한다. 그만큼 우리에게는 ‘푸른 눈’이 ‘미인’이나 ‘천사’라는 말에 자연스럽게 연결되고 있다. 이번 겨울올림픽에는 유난히도 한국 대표팀에 귀화 선수들이 많다. 따라서 언론 보도나 중계방송에서 예민하게 신경을 쓰지 않으면 황당한 표현이 나올 가능성이 퍽 많다. 또 일부는 해외로 이주했던 이들의 자녀가 다시 고국에 귀화해서 출전하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너무 뜨거운 국수주의적 표현이 난무하는 곳이 경기장인데 무슨 말실수가 터지지 않을까 걱정이 앞선다. 피부색과 눈의 빛깔은 사람의 능력을 판단하거나 평가하는 데 아무런 기준이 되지 못한다. 오로지 그런 말을 한 사람의 편견과 무지만 드러낼 뿐이다. 김하수/한겨레말글연구소 연구위원·전 연세대 교수
작은 이야기 2 - 정채봉, 류시화 엮음 2. 잊을 수 없는 사람 거절할 수 없는 것 - 이외옥 드디어 제가 첫아들을 낳고 보란 듯이 그이에게 아이를 보였을 때 아이를 바라보는 그이의 눈에는 눈물이 고였습니다. 아빠로서의 뿌듯한 기쁨과 함께 당장 닥친 돈 걱정 때문이었지요. 아니 단순히 돈 때문만은 아니었지요. 가장으로서, 아빠로서의 책임과, 스스로 무능하다고 자신을 학대하는 비탄의 눈물을 저는 그때 완전히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기쁨도 잠깐, 으료보험 카드가 없어(지금은 전국민이 의료보험 혜택을 받을 수 있지만) 할인 받을 수도 없는 병원비 때문에 그이는 거리를 해메고 있었습니다. 시간은 흘러 퇴원날이 되었지요. 그이는 아침에 잠깐 얼굴을 비치고 나서 열한 시가 되어도 열두 시가 되어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때의 그 초조함과 불안한 심정을 누가 알겠습니까? 두 시간 가까이 되어서야 상기된 얼굴의 그가 들어왔습니다. 돈을 빌려 주겠다던 친구에게 돈이 안되었다는 청천벽력 같은 소리를 듣고 그이는 그대로 주저앉고 싶은 것을 겨우 추슬러 혹시 하고 다른 침구를 찾아갔답니다. 그런데그도 형편이 어려운 친구로서 간신히 약간의 돈을 빌릴 수 있었답니다. 병원으로 달려와서 원무과장 수녀님(성가병원)에게 돈을 내밀며 남편은 말했습니다. "조금 적습니다. 제가 갖고 있는 전부입니다." 그러자 수녀님은 돈을 세어 보고 말없이 웃더니 말했습니다. "얼마 부족하지 않네요." 수녀님은 많이 부족한 병원비에서 다시 그이에게 돈을 주며 말했습니다. "1만 원은 아기 우유값, 또 1만 원은 산모와 아기와 택시 타고 가시고 나머지는 직장 구하는 데 필요한 교통비로 쓰세요." 그이는 원무과 사무실에서 그동안 가슴 조이며 뛰어다니던 설움과 고마움에 그만 엉엉 울고 말았답니다. 수녀님은 그이의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습니다. "지금은 어렵지만 제가 보기엔 꼭 성공하실 분이에요. 앞으로 큰사람이 되었을 때 어려운 이웃을 위해 도움을 주도록 하세요. 지금 이것은 아기를 위해 외상으로 드리는 거예요." (MBC라디오 여성시대 주최 신춘편지쇼 대상 수상자) 외상으로 살린 아들 - 전부순 지금부터 30년도 더 지난 일이군요. 1960년 10월에 신랑은 이불짐을 지고 저는 아기를 업고 자그만한 보따리를 들고 금호동 달동네를 찾아들었습니다. 남편과 저는 열심히 살려고 애를 썼지만 하늘도 무심한지 우리 아기가 병에 걸렸습니다. 이듬해 여름의 일이었지요. 아기를 보는 사람마다 오래 못 살겠다고 눈짓을 나누었습니다. 저는 그때 돈이 없어서 아기를 병원에도 데려가지 못했습니다. 그저 불쌍한 우리 아기가 죽으면 서울 어디에다 묻을 것인가 그런 걱정만 하던 몹쓸 어미였지요. 그런 어늘 날이었습니다. 아기를 업고 돈 300원을 들고 왕십리를 향해 무작정 걷고 있는데 보건병원이라고 씌어진 간판이 우연히 눈에 들어왔습니다. 저희는 그때 끼니도 잇기 어려운 시절이었지만 저는 아기를 업고 병원으로 들어갔습니다. 원장 선생님의 "아기 때문에 오셨군요"하시는 말씀에 저는 대답도 못하고 눈물만 흘렸습니다. 원장 선생님은 "어디 보자"하시더니 아기를 진찰하셨지요. "저는 저... 저... 가진 것이 300원밖에 없는데요"하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러자 원장 선생님은 고개를 끄덕이시더니 이렇게 말씀하셨어요. "치료비는 외상입니다. 다음에 가져오셔도 돼요. 그런 걱정 마시고 아기는 사흘 동안 꼬박꼬박 데려오셔야 합니다." 저는 우물쭈물하다가 "치료비는 얼마인가요?" 하고 물었습니다. 원장 선생님은 "900원입니다"라고 하셨어요. 제가 그때 갖고 있던 돈 300원을 우선 드렸더니 원장 선생님은 웃으시면서 "이거면 됐습니다."하셨어요. 그리고는 앞으로 사흘 동안 매일 아기를 데려와야 한다고 제게 말씀하셨습니다. 다음날 저는 다시 병원을 찾았습니다. 원장 선생님께서는 반가운 얼굴로 우리 모자를 맞아 주셨습니다. 아기를 치료하신 후, 원장 선생님께서는 아기 아버지가 무얼 하느냐고 물으셨습니다. "별 직업이 없어요"하니까 다시 고향은 어디냐고 물으셨지요. 저희 고향이 충청도 충주라고 말씀드리니까 원장 선생님께서는 "양반 고을에서 살지, 서울엔 왜 고생하러 왔느냐"고 하셨습니다. 저는 그 말씀에 또 눈물을 흘리고 말았습니다. 원장 선생님의 배려로 우리 아기는 사흘 동안 외상으로 병원에 더 다니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병도 깨끗하게 나았구요. 한 달 뒤였습니다. 저는 700원을 어렵게 마련해서 병원을 찾아 갔습니다. 원장 선생님께서는 기뻐하시면서 "어, 조진영이 왔구나"하고 우리를 반겨 주셨습니다. 원장 선생님께 저는 준비한 돈 700원을 드렸지요. 그랬더니 그분은 다음에 아기 아버지가 돈 많이 벌 때 가지고 오라고 하시면서 돈을 한사코 받지 않으셨습니다. 저는 너무나 부끄럽고 고마워서 어찌해야 할지를 몰랐습니다. 그로부터 2년이 지난 뒤, 저는 2천 백 원을 마련해서 늦었지만 기쁜 마음으로 병원을 찾아갔습니다. 그런데 그 자리에는 다른 의사 선생님이 앉아 계셨습니다. 저는 놀라서 그분께 물었습니다. 먼저 계시던 의사 선생님께서는 어디로 가셨느냐고요. 그랬더니 그분은 이민을 가셨다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어쩔 줄 몰라하다가 새로 오신 의사 선생님께 말했습니다. "그 선생님께 우리 아기의 병원 치료비를 드리지 못했거든요. 선생님께서 외상값 2천 백 원을 대신 받아 주세요." 하지만 선생님께서는 제 부탁을 거절하셨습니다. "다음에 만나면 대신 전해 주세요"하고 부탁드려도 선생님께서는 받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면서 앞으로 아기가 아프면 데려오라고 하셨지요. 저는 할 수 없이 그 자리를 그냥 돌아서 나오고 말았습니다. 저는 1969년도에 운전면허를 따서 지금은 개인 택시를 몰고 있습니다. 지금도 무학여고 앞에 있는 보건병원을 지날 때면 꼭 그 원장 선생님을 생각하면서 천천히 차를 몰고 있습니다. (MBC 라디오 여성시대 주최 신춘편지쇼 동상 수상자)
Board 삶 속 글 2022.05.06 風文 R 602
남귤북지(南橘北枳) / '강남의 귤을 강북에 옮겨 심으면 탱자로 변한다'는 뜻으로, 사람은 환경에 따라 악하게도 되고 착하게도 된다는말. 《出典》'晏子春秋' 춘추시대 말기, 제(齊)나라에 안영(晏?)이란 유명한 재상이 있었다. 어느 해, 초(楚)나라 영왕(靈王)이 그를 초청했다. 안영이 너무 유명하니까 만나보고 싶은 욕망과 코를 납작하게 만들고 싶은 심술이 작용한 것이다. 수인사가 끝난 후 영왕이 입을 열었다. "제(齊)나라에는 그렇게도 사람이 없소?" "사람이야 많이 있지요." "그렇다면 경과 같은 사람밖에 사신으로 보낼 수 없소?" 안영의 키가 너무 작은 것을 비웃는 영왕의 말이었다. 그러나 안영은 태연하게 대꾸하였다. "예, 저의 나라에선 사신을 보낼 때 상대방 나라에 맞게 사람을 골라 보내는 관례가 있습니다. 작은 나라에는 작은 사람을, 큰 나라에는 큰 사람을 보내는데 신(臣)은 그 중에서도 가장 작은 편에 속하기 때문에 뽑혀서 초나라로 왔습니다." 가는 방망이에 오는 홍두깨격의 대답이었다. 그때 마침 포리가 죄인을 끌고 지나갔다. "여봐라! 그 죄인은 어느 나라 사람이냐?" "예, 제(齊)나라 사람이온데, 절도 죄인입니다." 초왕(楚王)은 안영에게 다시 물었다. "제나라 사람은 원래 도둑질을 잘 하오?"하고 안영에게 모욕을 주는 것이다. 그러나 안영은 초연한 태도로 말하는 것이었다. "강남에 귤(橘)이 있는데 그것을 강북에 옮겨 심으면 탱자[枳]가 되고 마는 것은 토질 때문입니다. 제(齊)나라 사람이 제(齊)나라에 있을 때는 원래 도둑질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자랐는데 그가 초(楚)나라에 와서 도둑질한 것을 보면, 역시 초나라의 풍토 때문인 줄 압니다." 그 기지(機智)와 태연함에 초왕은 안영에게 사과를 했다. "애당초 선생을 욕보일 생각이었는데 결과는 과인이 욕을 당하게 되었구려."하고는 크게 잔치를 벌여 안영을 환대하는 한편 다시는 제나라를 넘볼 생각을 못했다. 【동의어】귤화위지(橘化爲枳)
Board 고사성어 2022.05.06 風文 R 789
외국어 차용 서로 다른 언어가 접촉을 하다 보면 상대방의 언어에서 어휘를 빌려다가 사용하게 되기도 한다. 전문 용어로 이런 것을 ‘차용’이라고 한다. 우리가 쓰는 ‘버스’니 ‘택시’니 ‘티브이’니 하는 숱한 문물들이 이러한 ‘차용’에 바탕을 두고 있다. 그러나 어휘를 빌려 쓰는 과정에서 그 의미나 용도가 달라지기 쉽다. 전혀 다른 문화적 환경과 토양의 차이가 반영되는 것이다. ‘모텔’이라는 말은 자동차로 멀리 여행하다가 들르게 되는 숙박업소라는 뜻의 영어에서 왔다. 그러나 우리한테 들어온 이 말은 여행자를 위한 숙박업소라기보다는 그저 그냥 유흥업소들 틈새에 섞여 있는 간이 숙박업소라는 뜻이 더 강하다. 말은 분명히 영어에서 차용해 왔는데 그 의미는 전혀 다른 우리의 현실이 반영된 것이다. 외국어를 차용해서 우리한테 필요한 말을 만들어 쓰다 보면 가끔 그럴듯한 ‘걸작’들이 나타나기도 한다. 아마 한국인들이 외국어를 바탕으로 해서 만든 말 가운데 가장 그럴듯한 말은 ‘알바’가 아닌가 한다. 독일어의 ‘아르바이트’(Arbeit)보다 훨씬 유용하다. 독일어에서는 ‘노동, 일, 숙제, 일거리’ 등 매우 넓은 의미로 쓰이는데 한국어에 들어와서는 매우 유용한 개념인 ‘부업’ 내지는 ‘비정규 일자리’로 정착되었다. 근간에는 한국식 영어가 거꾸로 외국에 알려지기도 한다. 호들갑스러운 몇몇 정치인이 시도 때도 없이 사용하는 ‘코리아 패싱’이 바로 그것이다. 농구의 속어로 쓰이던 ‘노룩패스’는 한 유명 정치인의 동영상으로 널리 알려졌다. 언어적 세계화는 강력한 언어가 다른 언어에 투사되는 일방적 영향만 가리키지 않는다. 이렇게 거꾸로 주변 언어에서 영향을 주는 경우도 있다. 이왕이면 좀더 의미 깊은 어휘로 영향을 주었으면 좋겠는데 그저 그런 수준의 우스개 어휘로 세계화에 영향을 준다는 것이 퍽 아쉽기만 할 뿐이다. 김하수/한겨레말글연구소 연구위원·전 연세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