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과 북의 협력 북의 미사일이 날아가고 언제 또 핵실험을 하게 될지도 모르는 이 어수선한 분위기에 남과 북이 서로 협력할 것이 없을까 하는 생각을 한다면 철이 없거나 아니면 허무맹랑한 사람으로 보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상황이 엄중하다 해도 역사적으로 멈추지 말아야 할 것은 그 또한 계속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정치나 경제, 또는 군사나 스포츠 등은 손익과 우열, 그리고 승패의 문제가 얽혀 있다. 그러나 그런 것 말고도 남과 북이 해결해 나가야 할 일도 퍽 많다. 서로의 언어와 표현 차이의 극복, 믿음직하고도 유용한 사전 편찬, 맞춤법의 공통성 확대 등은 싸우면서도 늘 해야 할 숙제들이다. 더 나아가 해외 동포들과의 소통 문제, 올바르고 적절한 번역 등을 위한 사업은 한시도 외면할 수 없는 일들이다. 굳이 언어 문제에 한정할 필요는 없다. 역사 분야로 넘어들어가 서로 유적 발굴을 함께 한다든지, 박물관 수장품들을 공동 전시한다든지 공동 목록집을 만든다든지 하는 것은 무시할 수 없는 큰 가치를 지니고 있다. 요란한 언론 플레이를 할 필요도 없다. 우리들끼리 이러한 ‘안전통로’를 확보하는 것이 국제적으로도 훨씬 유리하다. 이미 남과 북은 함께 ‘겨레말사전’이라는 것을 편찬하는 중이었다. 그간의 정치적 장애로 지체되었던 사업을 이럴 때일수록 정치적 긴장과 관계없이 대범하게 밀고 나갈 필요가 있다. 그런 것은 민족 내부의 문제이기 때문에 각종 ‘국제적 제재’와 굳이 연동시킬 필요도 없다. 정치적 군사적 갈등의 전제는 언젠가는 통합하려는 의지가 있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갈등이 심할수록 이런 사업에는 더욱더 힘을 쏟는 것이 당연하지 않은가. 기나긴 분단의 세월을 극복하고 서로를 이어줄, 가늘면서도 질긴 명주실을 언어와 역사의 문제에서 찾아보는 것은 매우 현명한 일일 것이다. 김하수/한겨레말글연구소 연구위원·전 연세대 교수
깨가 쏟아지는 우리선인들 이야기 버젓하게 배짱도 좀 있어야 조선의 말엽을 흔히 구한말이라고 하였고 그당시 연안 김씨 명문가에 김사철이라는 인물이 있었는데 그에 얽힌 이야기다. 아버지가 동지돈녕부시를 지냈으며 외숙이 뒤에 영의정을 두 번이나 한 홍순목이니, 우정국의 초대국장으로 있으면서 김옥균 등과 갑신정변을 꾸몄다가 실패해 죽은 홍영식과는 내외종간이 된다. 높은 벼슬을 했으면서도 청렴했든지 아버지를 여의어 수입의 줄이 끊기자 생계는 매우 곤란하여 낙원동 납작한 초가집에서 어머니가 바느질 품을 팔아서 지냈는데, 뛰어난 천품을 지닌 그를 눈여겨 보고, 사실상 생계는 그의 외숙이 대주고 있는 실정이었다. 당시 이른바 양반 가문에서 출세와 성공의 길은 공부하여 과거에 급제하는 것 뿐이라, 이 김사철 소년도 바깥출입을 않고 밤낮없이 틀어박혀 글공부에 온힘을 쏟았다. 그러던 어느 하루 사람을 찾는 소리가 났다. “하님 아뢰오.” 그 당시 점잖은 분이 남의 집을 심방하면 대문 밖에서 목청을 높여, “이리오너라!” 하고 긴 소리로 하인 부르는 구호를 외고 하인이 있으면 득달같이 달려나간다지만 그러지 못하고 주인 여자 혼자 있든지 하면, “아무도 아니 계신다고 여쭈어라.” 이 역시 중간에 하인이 있는 양으로 하여, 간접적으로 응대를 하는 것이 법이었다. 그러나 주인댁 대감의 심부름으로 온 하인쯤 되면 그 식으로는 안 통한다. “하님, 아뢰오.” 하님이란 남의 집 하인에 대한 존칭이다. 김소년은 보던 책에서 눈을 떼고 물었다. “거 누구냐?” “예! 도련님 혼자 계시구먼입쇼. 가회동서 양식하고 나무바리를 가져왔사와요.” 도령은 훤칠한 키에 벌떡 일어서며 가뜩이나 부리부리한 눈을 화경같이 떴다. “뭐야? 이놈! 그래 김사철이가 외갓집에서 내주지 않으면 못 산다더냐? 낼름 도로 가져가거라. 고연놈 같으니.” 하인은 까닭없는 호령만 듣고 기가 죽어서 돌아갔다. 저녁때 나들이에서 돌아온 어머니는 부엌을 들여다 보아 여전히 횡뎅그레한 걸 보고 아들에게 물었다. “낮에 가회동서 무얼 보내오지 않았든?” “뭔가 실려 보냈기에 호통을 쳐서 쫓아 보냈지요. 그래 우리가 외갓집 그늘 아니면 못 산단 말씀이에요?” 이튿날 아들이 글읽기에 골몰해 있는 사이 어머니는 친정을 찾았다. “왜 하필 걔가 있을 때 보내셨어요? 그 애 성미가 그런 줄 아시면서...” 그런 뒤로 시량은 도령 없을 때만 전해지고, 그러는 사이 공부는 점점 숙달해 깊어져 갔다. 그러던 어느 날 외가에서 전갈이 왔다. 정부 안에서 한가닥하는 외숙이 부른 것이다. “너 이번에 과거를 봐라. 내가 시관이 됐느니라.” 그러나 대답은 또한번 뜻밖이었다. “싫어요, 내 힘으로 버젓하게 하지, 왜 외숙 덕에 했다는 말을 듣게 해요?” 대감은 성숙한 생질의 어엿한 대답을 듣고, 다시 더 뭐라 말을 잇지 못하였다. 그런데 돌아온 김소년은 엉뚱한 길을 택하였다. 과거에는 제술이라 하여 글을 지어 올리는 길이 있고, 유학의 경전을 외우고 해설하는 강경과가 있는데 후자를 택한 것이다. 당시 제술에는 차작(남의 글)을 받는 등 버젓하게 부정이 행해졌는데, 강경이라고 협잡이 없을까마는, 이것은 본인이 직접 나와 여러 시관 앞에서 당당하게 강론하는 것이라 그 길을 택한 것이다. 과장에 들어선 그는 먼저 정해진 순서대로 시관석을 향해 읍하여 경의를 표하고 거기 마련된 대통에서 첨자를 뽑아 얼핏 보고 대령한 서리에게 넘겼다. 거기엔 경전 중에 나온 글귀의 머리글 몇 자가 씌어 있는 것이다. 시관이 대쪽을 받아 탁자에 놓자, 그는 청산유수로 그 대목을 암송하고 거기 대한 주석을 거침없이 해 내려갔으며 시관들 사이에서는 귓속말이 오갔다. “야! 녀석 끌밋하게 잘도 생겼다. 언변도 좋고... 못보던 이름인데 누구야?” “누군 누구야? 홍판서 생질이지.” “그랴?” 과거는 순조롭게 합격이 되었다. 물론 외숙의 이름이 작용하였겠건만, 당자의 태도는 버젓했다. “당당하게 내 힘으로 하지, 왜 외숙의 힘을 입어?” 이리하여 당당히 합격한 김급제의 벼슬길은 순조롭게 트여 여러 요직을 두루 거치고 외직으로 선산 도호부사로 나갔을 때 일이다. 하루는 점잖게 생긴 늙은 백성 하나가 잡혀 들어왔는데 참혹해서 바로 보지 못하겠다. 무어 차림새가 초라한 것이 아니라, 눈은 초점을 잃고 전신을 후들후들 떠는데 아래웃니의 딱딱딱 부딪치는 소리가 곁에까지 들린다. “원죄로구나.” 김부사는 늙은이의 태도에서 억울하게 들어왔다는 것을 직감하였다. 죄목을 물으니 볼썽사납게도 늙은이가 며느리와 붙었다는 것이다. 우선 방 하나를 치워서 들여앉히고, 나이 든 기생을 불렀다. “영감을 잘 모셔야 한다. 잘못하면 자결할지도 모르는데 그렇게 되면 네년 모가지를 그냥두지 않을 테다.” 기생은 소합원을 달여먹여 노인을 안정시키고 돌봤으며, 부사는 눈치빠르고 믿을 만한 포교를 동원해 뒷조사를 일렀다. 아니나다를까, 노인의 재산을 탐내 못된 놈들이 조작해 낸것임이 낱낱이 드러났다. 그래 노인을 의관시켜서 곁에 앉히고 좌기를 차렸으니 요새로 치면 법정을 마련한 것이라. 일 꾸민 놈들을 오라지어 꿇리고, 그 사이 조사한 것을 읽어서 들려준 뒤 모두 사실임을 승복하는 다짐을 받았다. “이제 나라에 품하여 물고를 낼 것이요. 그동안 네놈들의 목숨은 내가 맡아둔다.” 노인은 눈물 콧물로 범벅이 되어 일어날 수도 없이 절을 했다. “그런 몹쓸 누명을 쓰고는 정말 죽을래야 죽을 수도 없었사옵니다. 사또!” 임기를 마치고 돌아온 뒤로, 노인은 줌안에 든 베, 모시와 명주를 바리로 실어 춘추로 보내 나귀째 두고 가기를 죽는 날까지 하였고, 김사철은 그것으로 살림을 일으켜 또다시 버젓하게 조정에 서서 높은 벼슬을 두루 하고, 합방이 된 뒤에 세상을 떠났다.
Board 삶 속 글 2022.04.27 風文 R 600
작은 이야기 2 - 정채봉, 류시화 엮음 2. 잊을 수 없는 사람 오토바이 불빛 - 지용옥 내가 이 직장으로 옮겨온 지 2주일쯤 되었을 때였다. 나는 시내에서 3킬로미터쯤 떨어진 고모님 댁에서 자전거로 출퇴근을 하고 있었다. 길은 넓고 평탄했으나 포장이 되지 않아 자갈이 깔리고 패인 곳이 많았다. 나는 늘 야근을 하게 되어 보통 밤 열한 시가 되어서야 퇴근을 하곤 했다. 그날도 늦은 귀가를 하게 되었는데 페달을 밟고 떠나려니 라이트가 켜지지 않았다. 전구가 끊어진 모양이었다. 밤중에 수리한 수도 없어 나는 그냥 출발했다. 때마침 그믐경이라 시내를 벗어나니 주변이 캄캄해 갈 길이 난감했다. 자갈에 바퀴가 튕겨지고 요철 부분에 닿을 때마다 엉덩방아를 찧어야 했다. 방향만은 바로수의 도움을 받으며 기억을 더듬어 알 수 있었으나, 이리 가도 덜컹, 저리 가도 쿵 하는 고역이 계속되었다. 한참을 그렇게 진땀을 빼며 가자니까 뒤에서 환히 불빛이 비쳐오기 시작했다. 그때처럼 빛의 고마움을 느낀 적은 일찍이 없었다. 오토바이였다. 나는 금방 지나갈 오토바이인 줄 알고 있는 힘을 다해 페달을 밟았다. 이럴 때 1미터라도 더 가려는 욕심에서였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잠깐 나를 추월해 갔던 오토바이가 그자리에 머물더니 내게 앞장서서 가라고 손짓을 하는 것이었다. 나는 미처 인사도 못한 태 무조건 달리기 시작했다. 오토바이는 최저 속력으로 서서히 내 측면을 달리며 앞을 비춰 주었다. 덕택에 무사히 귀가했지만 나는 그 고마운 사람의 얼굴조차 자세히 봐 두지 못한 걸 후회했다. (충남 괴산군청 근무) 진정한 만남 - 채규철 그 사람을 가졌는가. 만리 길 나서는 날, 처자를 맡기고 맘놓고 갈 만한 사람,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온 세상 다 나를 버려 마음이 외로울 때에도 "너 뿐이야"하고 믿어지는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탔던 배 꺼지는 시간, 구명대 서로 사양하며 "너만은 제발 살아다오"할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불의의 사형장에서 "다 죽어도 너희 세상 빛을 위해 저 사람만은 살려 두거라"일러 줄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잊지 못할 이 세상을 놓고 떠나려 할 때 "너 하나 있으니"하며 빙긋이 웃고 눈을 감을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온 세상의 찬성보다도 "아니오"하고 가만히 머리 흔들 그 한 얼굴 생각에 알뜰한 유혹을 물리치게 되는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아무리 읽어도 싫지 않은, 나의 애인과 같은 이 노래에 떠오르는 얼굴들이 내게는 있다. 내가 교통사고를 당했을 때, 그것도 온몸의 반 이상이 3도 화상을 입고 오른쪽 눈에는 유리 조각이 박혀 실명까지 한 보기 흉한 내 모습을 감싸 안아 준 아내. 그녀는 비관하는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내 눈에는 당신이 절대로 흉하게 보이지 않아요. 화상을 당하기 전의 모습대로, 아니 그보다 훨씬 아름답게 비쳐요." 또 한 얼굴이 있다. 나둥그러져서 불타고 있는 차, 그 속에서 내 몸을 의식했을 때, 나는 앞으로 두 시간밖에는 살 수 없다고 생각했었다. 마지막 남은 두 시간의 목숨. 그것을 쓰는 길을 나는 부산 복음병원의 장기려 박사님으로 택했다. 나처럼 가난한 사람들의 질병 치료를 위해 시작한 청십자 운동을 계속해 달라는 유언을 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그분은 자식같이 정성껏 나를 돌보아서 두 시간짜리이던 생명을 몇백 곱으로 늘려 주셨다. 이 얼마나 감사한 만남인가. (청십자 의료 협동조합 전무)
Board 삶 속 글 2022.04.27 風文 R 64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