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가 쏟아지는 우리선인들 이야기 글자 수 맞춰서 글을 지으라 조선조 전기에는 중국 명나라와의 국교가 유례없이 도타와 많은 학자와 문인들이 서로 오갔다. 그 중에 최립이라는 분이 있었는데, 중종 34년에 나, 문과에 급제하여 여러 벼슬을 거치는 사이, 뛰어난 글재주를 인정받아 자주 명나라에 드나들며 그곳 명사들과 많이 교유하였다. 뒤에 벼슬이 참판에까지 오른 분이다. 임진왜란 때는 외교문서 작성에 제1인자로서 공로가 컸고, 그곳 학자들로부터 명문장가로 추앙받기도 하였다. 또한 같은 고장, 같은 시대의 오산의 시, 석봉의 글씨와 함께 송도삼절로 꼽힌 그런 인재이다. 그가 중국에 갔을 때 그곳 문장가 중에도 제1인자로 명성높던 왕세정의 서재를 찾았더니, 마침 서양사람 하나가 찾아와 대나무 그린 병풍 위에 서문을 지어 달라고 청하는 것이었다. 엄주가 지어 놓을테니 아무날 다시 오라고 승낙하자, 폐백을 드리는데 마차로 한 대분이나 되는 부피였다. 글이나 서화같은 점잖은 예술품에 대한 사례는 예의 갖춰 피륙으로 하는 것이 예사라, 진귀한 물품이나 직접 돈으로 내더라도 의당 폐백이라고 한다. 지정한 날짜에 간이(최립의 호)가 먼저 찾아가 왕세정의 지은 글을 구경하니, 도도하게 천여 자에 이르는 대문장이었다. 시간이 되어 정작 부탁한 서양인이 와서 보더니 자못 실망하는 눈치라 주인이 물었다. `왜 글이 마음에 차지 않아서 그러는가?` `천만에.... 감히 어찌 그런 생각을 하오리까마는, 죄송한 말씀이오나 글을 부탁드리러 올 적에 저의 아비가 이르던 말을 미처 여쭙지 못한 것이 죄송해서 그럽니다. `이 그림 병풍은 우리집 보물이다. 네 갖고 중국에 가거든 다른 이는 말고 꼬옥 왕선생이 지으신 글로, 또 제일 가는 명필의 글씨를 받아서 가져오되 화폭의 여백이 한자로 스물다섯 자밖엔 더 들어갈 수 없으니 그리 알고 부탁드리라.` 하였는 것을 지난 번에 잊고 미처 말씀드리지 못하여서 이렇게 앞뒤가 맞지 않게 되어 죄송하옵고, 이제 다시 부탁말씀 드리려 하나 감히 입이 떨어지지 않아서 그러옵니다.` 왕엄주는 어이없다는 듯이 웃으면서 `세상에 어디 글자 수 헤어가며 글짓는 이가 있단 말인가? 다시 짓지는 못하겠노라.` 그러고는 먼젓번 예물로 들여놓은 물건들을 도로 내어주려하니, 서양인도 그럴수는 없다고 굳이 사양하고, 사태는 아주 재미있게 벌어지고 말았다. 예술인들 사이에는 꼿꼿한 오기가 살아있고, 또 속에 품은 재주가 소리없이 고개를 쳐드는 법이다. 최간이는 번개같이 영감이 떠올라 그들 사이에 끼어들었다. `스물다섯자 서문이 무에 그리 어려워서 그러십니까?` 그 당시 외국에 나가는 우리 사행들은 소매없는 남천익을 입고 품수에 맞는 색깔의 술띠를 흉복통에 띠며, 붉은 빛깔의 주립으로 무관의 평상복 차림을 하는 것이 법이다. 서양인은 이 낯선 차림의 이방인을 무척 기이한 눈으로 보았을 것이다. 주인이 너그러이 웃으면서 소개한다. `이 분은 이웃나라 조선에서 온 분인데, 문장실력이 대단한 분이외다. 최공! 한 번 지어 보시구려.` 최립은 붓을 집어들자 그 자리에서 스물다섯자 문장을 단번에 써 내려갔다. 이런 때 섣부른 통역을 중간에 넣고 하느니 이와같이 하는 것이 가장 빠르고 효율적인 방법이다. 유서양인화죽자하니 유죽은 습하고 연죽은 미하며 설죽은 한하고 풍죽은 소소연시유성지라 서양사람으로서 대나무를 그린 이가 있으니 비 맞은 대는 축축한 맛이 나고 안개에 서린 대는 희미해 보이며 눈을 이고 있는 대는 추운 느낌이 드는데 바람에 불리고 있는 대는 소소하니 금방이라도 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구나 주인이 무릎을 치며 감탄을 한다. `조오타! 정말 실감이 나는 좋은 글이다. 내 재주 가지곤 어림도 없소이다.` 서양사람도 감탄하여 마음에 들어하고, 이제는 어떻게 명필을 구할까 하고 망설이는 눈치라, 일동은 또 한번 서로 보고 웃었다. `왕희지의 필법을 쏙 뽑은 신필이 여기 있는데, 누굴 찾소이까?` 그리고는 동행했던 한석봉을 시켜 써서 내주니, 서양인은 좋아서 가지고 돌아갔다.그리고는 왕세정이 서양인에게서 예물로 받은 것을 간이와 석봉에게 주려는 것이다. 굳이 사양했으나 막무가내라, 하는 수 없이 받아서 동행했던 일행에게 나누어 주었다고 한다. 동양화 가운데서 전문가 아닌 아마추어로서 즐기는 그림을 문인화라 하는데, 그들은 거기 흐르는 고상한 운치를 사랑하였다. 매란국죽의 사군자도 처음엔 화법의 초보 과정이었으나, 각각 덕목을 붙여 문인화의 여기로 즐기었고, 여백에는 그림에 걸맞는 시나 문장을 필치좋은 글씨로 써서 함께 감상하는 전통이 생기게 된 것이다. 산신령의 노여움을 풀어야 옛날에 지방관이 탐욕을 부리거나 실수가 있으면, 백성이 산에 올라가 큰소리로 욕하는 일이 종종 있었다. 그렇게나 해야 시쳇말로 스트레스가 풀렸던 모양이다. 원주시에서 서울 쪽으로 가까이 안창이라는 곳이 있는데, 고려 때 굉장히 큰 규모의 절이 있었던 곳이다. 거기서 서울로 오자면 약간 후미진 곳에 묘한 이름을 가진 바위가 하나 있다. 이름하여 욕바위. 앞에서 보면 오똑하게 높이 솟았는데, 뒤는 등이져서 그대로 밋밋하게 산으로 연해 있다. 원주서 벼슬 살았던 이는 물론이요, 그 방향 고을에서 원 노릇을 하였던 이라면, 서울로 돌아갈 때에 반드시 이 목을 거쳐서 가야 하는데, 이자가 임지에 내려와서 못된 짓을 많이 하였다면, 그 피해를 입은 사람이 관원의 행차가 지날 때, 그 바위위에 올라서서 낱낱이 조목을 들어서 욕을 퍼부었더라고 한다. 물론 끝에 가서는 갖은 악담을 늘어놓았을 것이고... 그것을 듣고 원님이 화가 나서 `저놈 잡아오라.` 고 소리치면, 쫓아갈 신명도 안났을 것이고, 어쩌지 못해 쫓아 간대도 밑의 사람이 도달하기 전에 등성이를 타고 뺑소니치면 그만이다. 본래 욕이란 것은 남의 자존심을 상하게 해 주면 되는 것이고, 악담은 뒤끝이 좋지 않으라고 잘못되기를 비는, 말하자면 일종의 저주다. 그래서 남의 잘못을 욕할지라도 악담은 하지 말라고 일러오는데, 억울하게 피해를 당한 이라면 어떻게 욕만 하고 말 것인가? 자자손손이 어떻게 되라는 둥 갖은 악담을 늘어놓았을 것이니, 입담좋은 사람이 그 몫을 삯 받고 다니며 하는 이도 있었을지 모른다. 정혁선이라는 분이 청주목사로 내려갔는데, 밤에 어느 놈이 산에 올라가서 걸차게 욕을 해댄다. 물론 새로 도임해 갔으니, 자신에게 돌아올 욕은 아니었겠지만 속이 상한다. 그것이 여러 날 계속되기에 그 고장 출신의 이속을 불렀다. `사람이 그럴 리는 없고, 아무래도 우암산 산신이 덧나서 그런 모양이니, 집집마다 10문씩만 거둬서 굿을 하든지 제사를 지내 주도록 하라.` 분부받은 아전 생각에, 산신이 그런게 아니라고 했다간 그놈을 잡아 들이라고 할 판이라, 구역을 갈라 분담해서 돈을 거두고 하라는 대로 기도행위를 하여서 며칠은 그냥 조용하였다. 그런데 얼마 안가서 또 그놈이 욕질을 한다. 고요한 밤하늘에 욕하는 소리가 울려 퍼지니 멀리까지 들렸을 것이고, 그 중의 몇몇은 아무개 놈의 짓이 틀림없다는 지목도 갔을 것이다. 원님은 또 담당자를 불렀다. `산신령이 단단히 노여운 모양이다. 일전의 그것 가지고는 심정이 가라앉지 않는 모양이니, 이번엔 갑절씩 거둬서 앞서보다 더 성대하게 치르도록 해라. 얻어먹을 만큼 먹어야 가라앉을 모양이로구나.` 없는 중에 생돈으로 추렴을 내면서 백성들의 원망은 원님보다도 밤중에 소리지른 놈에게로 돌아갔다. 그리하여 다시 한 번 굿판을 차린 뒤로 신령님의 노여움은 식어졌고 원님은 빙싯이 웃었다. `싱거운 산신도 다 있지. 좀더 보챘더라면 더 얻어먹는 것을....` 한가지를 보면 열가질 안다고, 이만한 배짱이라면, 아마 공사도 변변하게 잘 처리했을 것이다. 섭섭하게도 그의 다른 행적이나 생존기간에 대해서는 달리 나온데가 없다. 이것은 딴 이야기지만 한 곳을 감사의 행차가 지나가는데, 길옆 정자나무 아래 덕이 진 곳에 건장한 청년이 조골조골하게 참혹하도록 늙은 할머니 하나를 앉혀서 부축을 하고 서 있다. `저건 어떠한 백성인고?` 그 고장의 연세높은 집장이 앞으로 다가서며 여쭙는다. `이 골짜기 안 20리 쯤에 사는 백성이온대, 어미 말이 `나라님 거동하시는 행차가 거룩하다더구만도 서울을 못 가니 구경할 길이 없고, 감사님 영내 순찰하시는 행차 또한 근감하다던데 그거라도 한번 구경하였으면...` 하고 입버릇처럼 소원해 왔건만 살기에 바빠 이뤄드리지 못했다가, 보시다시피 기력이 아주 쇠해 더 지탱하기 어렵게 돼서, 이번 기회에 사또 행차를 보여드리려고 먼길을 업고 와 구경시켜 드리고 있는 것이랍니다.` 감사는 그의 효성에 감동해 누구 다른 사람에게 붙들어 드리라 하고, 그 효성스런 청년을 앞으로 불렀다. 그리곤 등을 투덕거리고 껄그러운 손도 만지며 무수히 칭찬하고 행리 중에서 비단 두 필을 꺼내 상으로 주고 그곳을 떠났다. 감사라는 직책이 본시 각 고을의 직책을 살피며 돌아다니는 것이라, 그 행보에 열 고을을 두루 돌아보고, 이제 돌아오는 길인데 앞서 그곳에서 벌어졌던 것과 똑같이 늙은 할머니를 젊은이가 부축하고 서 있는 것이다. 행차를 멈추고 까닭을 물으니 그때 그 집강이 와서 고한다. `먼젓번 상금을 내리셨던 효자집 옆에 사는 놈이온데, 평소에 어미에게 심하게 굴어 불효로 소문난 녀석이, 상 타 먹을 욕심에 어미가 싫다고 싫다고 하는 것을 억지로 업고 와 구경시키고 있는 것이옵니다.` `그랴?` 일러바친 사람은 못된 놈 볼기 몇 대 얻어맞게 하자던 것인데, 감사는 시침 뚝 떼고 청년을 불러서 전과 똑같이 상급을 주고 그곳을 떠났다. 그런데, 다음부터 그곳 관청에서 사령이 나오면, 두 사람 효자를 똑같이 찾아보고 인사를 드렸다. `어떻습니까? 어머님 봉양하시기에 어려움은 없으신지 알아오라는 분부십니다.` 하 세우 인사를 오는 때문에 불효자는 저도 모르게 진짜 효자가 되어 버렸다는 그런 이야기다. 때려줘서 혼내느니 칭찬해서 효자 만드는 일이 얼마나 좋은 일인가?
Board 삶 속 글 2022.02.13 風文 R 670
작은 이야기 2 - 정채봉, 류시화 엮음 2. 잊을 수 없는 사람 울음으로 전한 안부 - 패티 김 "저는 아버지가 두 분 계십니다." 이렇게말하면 "그래요?"라거나 "그렇군"하면서, 패티네 집안도 복잡하구나 생각해 버리는 분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나의 어머니에게 남편이 두 사람 있었다는 이야기는 절대로 아니다. 나를 낳아 주신 아버지를 제1의 아버지라면 오늘의 나를 있게 한 은인을 나는 제2의 아버지라고 부른다. 현재 AFKN 편성국장으로 계신 에드 매스터즈 씨는 바로 내가 제2의 아버지라고 부를 수밖에 없는 분이다. 1960년 초 무명 가수인 나는 조선 호텔 전속으로 밤마다 노래를 부르고 있었고, 매스터즈 씨는 당시 VUNC의 영어 회화를 맡고 있었다. 조선 호텔에 왔다가 우연히 내 노래를 들은 매스터즈 씨는 나를 일본에 보내 주고 싶다고 말했다. 그 부렵 나는 여러 사람으로부터 외국에 보내 준다는 말을 들어 왔었고, 그런 말들이 헛된 소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으므로 매스터즈 씨의 그 제안도 귀 밖으로 흘려 버렸었다. 그러나 얼마 뒤 그는 내 앞에 여권을 내밀었다. 나는 우선 놀랐고, 그의 진실성에 감격했다. 여기에 밝히고 싶지 않지만 그는 하반신 마비로 목발을 양쪽 겨드랑이에 끼고 걸어 다녔는데, 비로소 나는그의 신체적불행에 짙은 동정이 가기 시작했다. 그 몸으로 손수 여권 수속을 끝내다니! 그래서 나는 1960년 말에 최초의 동경 공연을 가질 수 있었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그후 나는 동남아로, 미국으로 진출할 수 있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매스터즈 씨는 오늘의 나를 있게 한 분이라고 아니할 수 없다. 그때의 나의 동경 공연은 해방 후 16년 만에 일본이 한국 연예인을 정식 초청한 첫 케이스였다. 스무 살의 풋내기였던 나는 외국이라고는 처음 가보는 일본에서 여간 고생스럽지가 않았다. 일본말은 전혀 못하고 영어도 형편없었으므로 언어 장벽이 주는 고통은 정말 큰 것이었다. 동경에 도착하는 날부터 긴장과 흥분으로 너무 골이 아팠다. 호텔에 들어갔으나 무섭기만 하고, 아스피린을 구해야 할 텐데 사람 부르는 법도 모르고... 나는 밤을 꼬박 새우면서 울었다. 그때 한국에서 전화가 왔다. 매스터즈 씨로부터의 전화였다. 잘갔느냐, 거기 형편은 어떠냐고 묻는 그의 목소리는 머나먼 곳에서 전파를 타고 온 것인데도 정에 가득 차 있었다. 나는 아무 대꾸도 못하고 그저 소리내어 울기만 했다. 반갑고 고마운 마음을 오직 울음으로써만 전할 수 있을 뿐이었다. 이튿날 매스터즈 씨는 자기가 알고 있는 재일 한국 유학생에게 연락, 그 학생을 나한테 붙여 주었다. 그의 세심한 정성과 배려는 나으 일본 공연을 한결 쉽게 해주었고, 또 그를 통해 재일 교포들을 사귀어 김치도 얻어먹고 불고기 파티도 할 수 있었다. 지금도 그는 내 공연에 빼놓지 않고 참석한다. 그는 언제나 내가 부른 노래 (틸 (사랑의 맹세))을 흥얼거리며 아버지 같은 눈길로 나를 격려한다. (가수) 잊혀지지 않는 얼굴 - 최정희 6,25 때의 일이다. 우리 집은 동숭동에 있었고, 지금은 이미 납북되어 버린 우리집 남편이 그때 다른 곳에 피신해 있어 집 안에는 어머니와 아이들과 나뿐이었다. 낙산 밑 우리 동네에는 인민군들이 주둔하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우리 동네에 일제 폭격이 시작되었다. 아군기들이 날아와서 산이 다 패이도록 폭탄을 퍼부어댔다. 그 공포는 겪어 보지 않은 사람은 모를 것이다. 어머니와 아이들과 내가 결국오늘 살아 남을 수 있을 것인가 하고 나는 늘 절박하게 생각했었다. 전투기가 날아오면 훈련받은 대로 아이들은 눈과 귀를 막고 입을 벌리고 벽에 엎드리게 하고 어머니와 나도 그렇게 했다. 어느 날 한 차례의 폭격이 끝나고 비행기가 가 버렸다. 공습 해제의 사이렌이 울렸다. 나는 곧 앞집으로 가 보았다. 그 집 사람들도 공포로 해서 파랗게 질린 채 저 아래쪽 학자네 집 지하실로 옮기겠다고 했다. 우리들 집은 너무 산에 가까워 위험한 데다가 지하실이 없기 때문이라고 했다. 나도 그분들을 따라 학자네 집으로 가 보았다. 우리 집도 옮길 만한가 알아보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학자네뿐만 아니라 지하실이 있는 집이면 모두 사람들로 꽉꽉 들어차 있었다. 그때 공습 경보 사이렌이 또 울렸다. 나는 곧바로 집으로 향했다. 우리 집 골목엔 개미 새끼 한 마리 없이 조용한데 나 혼자 언덕을 바삐 올라 집을 향해 뛰어가고 있었다. 그런데 바로 우리 집 대문께에 전투기 한 대가 아주 낮게 떠 있었다. 어찌나 가까이 떠 있는지 조종석에 앉은 외국인 병사의 얼굴까지 알아볼 수 있을 정도였다. 그 조종사는 나를 내려다보고 있는 듯했다. 집 가까이 이르러 나는 정신없이 소리를 쳤다. 모두들 굴 속으로 들어가라고 했던 것 같다. 우리 집엔 산을 파고 만든, 김칫독 같은 걸 넣어 둘 만한 작은 굴이 있었다. 그곳응ㄴ 물이 고일 정도로 습기 찬 곳으로 평소 김칫독을 넣어 두는 일도 하지 않던 곳이었다. 내가 허둥지둥 집 안으로 뛰어들어가 어머니와 아이들을 굴 속으로 몰아 넣고 굴 입구의 문을 닫을 때까지 그 외국인 조종사는 폭격을 하지 않고 있었다. 그는 그렇게 공중에 떠서 나를 지켜보고 있다가 내가 식구 모두를 피난시키고 나서야 비로소 폭격을 퍼부었다. 쌩 하고 큰 파편 한 덩어리가 날아가 우리 집 사랑방 문에 가서 꽂혔다. "하느님, 1분만 늦었어도..." 어머니 입에서 낮은 부르짖음이 새어 나왔다. 그 순간 파편처럼 내 가슴속을 휙 달려간 것은 아까 낮게 공중에 떠서 아래를 굽어 보던 그 외국인 병사의 선한 마음씨였다. 그는 죽음의 공포 앞에 허둥대는 한 가족을 구해 준 것이다. 그날 폭격에 놀란 인민군들은 다른 곳으로 옮겨 갔다. 저녁 무렵 폭격이 끝난 후 질항아리쪽 같은 파편을 만졌더니 오래도록 싸한 쇳내와 화약내가 손에서 가시지 않았다. (작가)
Board 삶 속 글 2022.02.13 風文 R 696
금의야행(錦衣夜行) / 비단옷을 입고 밤에 간다는 뜻으로, 아무 보람없는 행동을 가리킴. 《出典》'漢書' 項籍傳 / '史記' 項羽本紀 유방(劉邦)에 이어 진(秦)나라의 도읍 함양(咸陽)에 입성한 항우(項羽)는 유방과 대조적인 행동을 취했다. 우선 유방이 살려둔 3세 황제 자영(子?)을 죽여 버렸다.(B.C 206) 또 아방궁(阿房宮)에 불을 지르고 석 달 동안 불타는 것을 안주 삼아 미인들을 끼고 승리를 자축했다. 그리고 시황제의 무덤도 파헤쳤다. 유방이 창고에 봉인해 놓은 엄청난 금은 보화(金銀寶貨)도 몽땅 차지했다. 모처럼 제왕(帝王)의 길로 들어선 항우가 이렇듯 무모하게 스스로 그 발판을 무너뜨리려 하자 모신(謀臣) 범증(范增)이 극구 간했다. 그러나 항우는 듣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오랫동안 누벼온 싸움터를 벗어나 많은 재보와 미녀를 거두어 고향인 강동(江東)으로 돌아가고 싶어했다. 그러자 한생(韓生)이라는 사람이 또 간했다. "관중(關中)은 사방이 산과 강으로 둘러싸인 요충지인데다 땅도 비옥합니다. 하오니 이곳에 도읍을 정하시고 천하를 호령하십시오." 그러나 항우의 눈에 비친 함양은 황량한 폐허일 뿐이었다. 그보다 하루바삐 고향으로 돌아가서 성공한 자신을 과시(誇示)하고 싶었다. 항우는 동쪽의 고향 하늘을 바라보며 말했다. "부귀한 몸이 되어 고향으로 돌아가지 않는 것은 '비단옷을 입고 밤길을 가는 것[錦衣夜行]'과 같아 누가 알아줄 것인가…." 항우에게 함양에 정착할 뜻이 없음을 알게된 한생은 항우 앞을 물러나가 이렇게 말했다. "초(楚)나라 사람은 '원숭이에게 옷을 입히고 갓을 씌워 놓은 것처럼 지혜가 없다'고 하더니 과연 그 말대로군." 이 말을 전해 들은 항우는 크게 노하여 당장 한생을 잡아 삶아 죽였다고 한다. 【동의어】의금야행(衣錦夜行), 수의야행(繡衣夜行)【반의어】금의주행(錦衣晝行)
Board 고사성어 2022.02.13 風文 R 741
새말과 소통 신조어는 새로 만든 말이다. 그래서 신조어에는 새로운 지식이나 문제의식이 들어 있기 마련이다. 과거에는 새로운 말을 만들어 퍼뜨리는 사람들이 대개는 지식인이었다. 그들이 학습 기회와 매체를 독점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제는 누구든지 매체를 자유롭게 이용하면서 새말을 만들어 퍼뜨릴 수 있게 되었다. 단지 누군가가 그 신조어에 호응만 해준다면 말이다. 신조어는 대개 젊은층이 잘 만들어낸다. 종종 중장년층도 젊은층의 언어에 호기심을 보이기도 하는데, 그런 말을 따라 쓰면서 마치 젊음이 오래가는 듯한 기분을 느끼는 게 아닌가 한다. 반면에 젊은층은 중년 이상의 언어를 기피한다. 따분하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나 세월이 지나가면 젊은 사람들의 어휘도 또 따분해질 것이다. 그리고 새로운 젊은이들한테 외면받게 될 것이다. 이렇게 언어의 역사는 진행된다. 옛날에는 젊은 세대가 끊임없이 기성세대의 언어를 배움으로써 사회구조가 유지되었다. 그러한 사회적 소통망이 사회의 위계질서를 지속가능하게 해준 것이다. 그러나 요즘은 이 위상이 뒤바뀌고 있다. 노령세대가 젊은이들의 언어와 중장년의 어휘를 부지런히 배워야 생존이 가능한 시기가 온 것이다. 또 그래야 건강한 생존이 가능해졌다. 주도 세력이 상대적으로 더 젊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젊은 세대의 신조어가 새로운 지식과 문제의식만 담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에 못지않게 현실에 대한 불만이나 속상함과 같은 감성적 요소도 대단히 많다. 그렇기 때문에 세대간의 이해와 소통을 위해서라도 기성세대가 젊은층의 신조어에 관심을 가지고 배워둘 필요가 있다. 이것이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보통사람들이 사회통합을 위한 소통망 강화에 함께 동참하는 일이기도 하다. 김하수/한겨레말글연구소 연구위원·전 연세대 교수 ……………………………………………………………………………………………………………… 국어공부 성찰 퍽 오래전에 국어에 대한 재미있는 조사가 하나 나왔다. 서울 사는 학생들에게 ‘서울’의 반대말이 뭐냐고 물었더니 다수가 ‘시골’이라고 대답했다. 이번에는 대구에 있는 학생들한테 ‘서울’의 반대말이 뭐냐고 물었더니 대다수가 ‘대구’라고 답했다. 누가 맞고 누가 틀렸을까? 아무도 틀리지 않았다. 이 조사는 반대말이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 상대적이고 문화적이라는 것을 보여 준다. 그러니 국어공부는 밑줄 치고 외우는 게 아니라 깊이 생각하는 연습을 더불어 하는 게 옳다. 아버지의 반대말은 어머니인지 아들인지 아니면 딸인지? 땅의 반대는 하늘인가 바다인가? 살펴보면 대칭의 짝이 모두 반대말이 되는 것도 아니다. 좀 더 사회적인 주제를 골라 보자. ‘남자’의 반대는 ‘여자’일까? 혹시 생각을 비틀어서 ‘남자’와 ‘여자’를 비슷한말로 보면 안 될까? 또 더 나아가 ‘남자’와 ‘수컷’을 비슷한말이 아닌 반대말로 보면 안 될까? 사실 남자와 여자는 신체의 몇 군데를 제외하고는 거의 다 같다. 그런데 우리 습관에는 서로 반대인 것 같다. 또 남자와 수컷은 성격의 몇 군데를 빼놓고는 같은 점이 별로 없다. 그런데 보통 비슷한 것처럼 생각된다. 결국 반대말이냐 비슷한말이냐 하는 것은 실체가 아닌 문화적 관념의 문제인 것이다. 그래서 늘 다듬어 써야 한다. 최근에 저서에서 특히 남녀 관계의 표현이 윤리적으로 문제가 된 몇몇 유명인사들의 글에서는 반짝이는 재치와 도발 정신이 돋보이는 게 사실이다. 그런데 뜻하지 않게 질타를 받은 것은 세상이 그들을 곡해하는 면보다는 그들이 변화한 언어적 감수성을 담아내지 못한 면이 많은 것 같다. 말은 늘 새로운 사회적, 문화적 맥락에 맞추어 벼려서 써야 한다. 그것이 평생 해야 할 국어공부이다. 김하수/한겨레말글연구소 연구위원·전 연세대 교수
역사와 욕망 역사는 이야기로 구성되고 글로 기록된다. 그래서 달리 보면 말과 글의 역할을 보여 주는 거울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 역사의 언어는 쉽게 왜곡되어 정치바람도 잘 탄다. 특히 역사 이야기로 자화자찬하려는 정치적 욕망은 정치 자체를 망가뜨리기도 한다. 근대 초기에 독일에서의 일이다. 로마의 역사가 타키투스가 썼던 게르만족에 대한 저술의 필사본이 15세기에 발견되었다. 그는 당시 야만인으로 알려졌던 게르만인들이 얼마나 순수하고 충직한지, 특히 여성들이 얼마나 순박하고 고결한지를 서술했다. 원래 공화정을 신봉하던 그는 제정 로마가 퇴락해 버린 데 실망하여 본 적도 없는 게르만족을 과장해서 그렇게 묘사했다. 이 책에 독일의 인문학자들은 열광했다. 자신들의 조상인 게르만이 최고의 고대 문명을 자랑하는 로마의 대역사가에게서 칭송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이를 통해 근대 유럽의 낙후 지역으로서의 열등감을 떨치려 했다. 그러나 그 게르만은 독일인들만의 조상이라기보다는 모든 유럽인의 조상이었을 것이다. 애국주의에 굶주렸던 독일의 인문학자들은 ‘게르만다움’, ‘독일인’, ‘독일 민족’ 등 ‘구별해야 할 개념’들을 뒤섞어 썼다. 역사의 언어를 정치적으로 일탈시켜 사용한 것이다. 영국과 프랑스보다 후진적이었던 독일은 그 뒤로도 배타적인 민족주의, 광적인 애국주의에서 헤어나오지 못했다. 그들의 자아도취가 어떤 결과를 낳았는지는 세상이 다 아는 이야기이다. 역사가 남겨준 옛사람들의 삶의 현실은 그 아픈 자취에서 교훈을 찾을 때 무척 유용하다. 그러지 않고 화려한 영웅의 이야기로 정치적 환각 상태에 빠지는 것은 역사의 언어를 정치적 욕망으로 해석하는 미련한 일이다. 그 때문에 역사의 언어와 정치의 언어가 늘 건강하게 서로 거리를 두도록 노력해야 한다. 김하수/한겨레말글연구소 연구위원·전 연세대 교수
되묻기도 답변? 나라의 안보를 책임진 장관의 대답이 눈길을 끈다. 국내에 추가된 무기가 있었느냐는 질문에 “그런 게 있었습니까?”라고 남 말 하듯이 대답한 ‘사건’이다. 이것을 반어법이라고들 일컫고 있는데, 반어법은 반대말을 이용해 원래의 의미를 강조하는 수사법이다. 느려터진 사람한테 “참 빠르기도 하다”고 비아냥대는 경우 따위를 말한다. 위의 답변은 반어법이 아니라 그냥 ‘반문’이다. 반문은 질문 자체가 이해되지 않거나 타당성이 없을 때 질문자에게 그 질문을 돌려주는, 즉 반품하는 행위다. 또는 질문의 전제에 동의할 수 없는 부분이 있음을 드러내는 진술 방법이다. 이 문답은 공적인 책임자들 사이의 것이기 때문에 그 내용의 진위는 대단히 ‘의무적’이어야 한다. 공적으로 무관한 사람이 물었다면 아무렇게나 대답해도 그만이고, 기자의 질문에 적당히 발뺌하는 답변이었다면 그 진위가 그리 ‘의무적’이지 않을 수도 있다. 대부분의 남성들이 군에 입대하면 민간 사회의 말을 쓰지 말라는 말을 귀가 아프게 듣는다. 그만큼 민간 사회에서는 진위가 불분명하고 사람에 따라 달리 해석되는 표현이 자주 사용되는 데 반해서 군대에서는 안전과 생명에 관한 문제를 일상적으로 접하는 만큼 매사에 명확하고 진위가 분명히 드러나는 말을 써야 한다는 의미를 강조한 것이라고 본다. 더 나아가 이 답변을 문제 삼자 “뉘앙스 차이였다”고 말한 것은 이 사태의 심각함을 보여준다. 어찌 군사 전문가가 안보 관련 발언을 하면서 ‘뉘앙스’에 좌우되는 표현을 했다는 말인가. 뉘앙스는 느낌과 기분에 따라 달리 해석되는 ‘함축적 의미’이다. 이런 말은 국가의 안보 책임자의 것으로는 적절하지 않다. 모든 공직자의 답변에는 그 위상에 따른 책임이 반드시 필요하다. 김하수/한겨레말글연구소 연구위원·전 연세대 교수
왜 벌써 절망합니까 - 정문술 사업은 외로운 예술창작이다 - 창조 경영 자네 복싱 좋아하나? 나는 권투를 좋아한다. 프로권투 신인왕전에 매번 참가한다는 어느 중년의 의사처럼 내가 직접 권투를 즐긴다는 뜻은 아니다. 이렇다할 경기라면 그저 빼놓지 않고 시청하는 정도의 권투팬 이라는 이야기이다. 요즘이야 농구다 야구다 해서 복싱팬들이 많이 줄었지만 몇 년 전가지만 해도 문성길, 유명우 같은 유망주들의 경기가 제법 인기를 끌었다. 대기업에서 멀쩡하게 직장생활 잘하던 후배가 어느 날 갑자기 사무실로 찾아와서는 창업을 하겠다며 조언을 구했다. 반도체에 재활용 사업이었다. 이야기를 들어보니 나름대로 시장조사도 자세하게 해보고 여기저기 견학도 꽤 다닌 모양이었다. 그러나 나는 엉뚱한 이야기부터 꺼냈다. "자네 복싱 좋아하나?" 내가 조언을 해줘야 한다면 나만이 할 수 있는 이야기를 해줘야 한다고 생각했다. 경영자라면 권투에 임하는 복서들의 마음가짐을 배워야 한다고 나는 생각해왔다. 복싱은 특히 기업경영과 닮아 있는 스포츠다. 새로운 사업을 시작할 때 가지게 되는 기대감이나 의욕은 모두가 똑같다. 다만 절망과 고독을 함께 준비하고 잇는 사람은 드물다. 내가 창업을 준비하는 사람들에게 꼭 해주고 싶은 말은 바로 그것이었다. 늦깎이 사업가가 성공할 수 있는 길은 남들과 다르게 생각하고 틈새를 개척하는 '거꾸로 경영'이란 말 그대로 동지가 없는 외로운 실험이다. 모든 것은 나의 판단과 결정에 달려 있다. 결과에 대한 책임도 완전히 내 몫이다. 복서의 고독한 투혼을 배워야 버틸 수 있다. 거꾸로 경영이란 그런 것이다. 성공한 선배에게 그럴 듯한 경영 노하우라도 얻어들을까 싶어 찾아왔을 그 친구가 의아스런 표정을 짓는 것은 당연했다. 그러나 나는 권투 이야기를 계속했다. "다른 스포츠라면 하는 것도 보는 것도 별룬데, 권투 하나는 무지 좋아하네." "...." 사각링은 복서들에게 천국이며 지옥이다. 둘 중 하나는 반드시 승리하며 둘 중 하나는 반드시 패배해야만 하는 것이 바로 권투이다. 물론 무승부라는 것도 있긴 하지만, 여전히 선수들은 아무런 도움도 없이 오로지 혼자 힘으로 상대방과 싸우고 자신과 싸워야 함에는 변함이 없다. 사업을 하는 데 있어서도 항상 승리와 패배만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어중간한 생존에 만족하는 경영자라면 그는 이미 패배한 것이나 다름없다. 특히 기술개발을 생명처럼 여겨야 하는 벤처기업에 있어서는 더욱 그렇다. 기술개발에 차선은 없다. 벤처기업은 항상 남들보다 새로운 기술과 제품을 개발해야만 살아남을 수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권투에 임한 복서들처럼 오직 승리 아니면 패배만을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나 시작부터 실패를 염두에 두는 경영자는 적다. "코너에서 매니저가 아무리 약을 써보게. 매니저는 결국 아무 것도 몰라. 당장 나는 피 튀기며 싸우고 있는데 제까짓 것들이 아무리 떠들어봐야 귀에 들어오지도 않아. 그런 소리나 듣고 있다간 한 순간에 쓰러져. 언제나 혼자라는 걸 명심하게. 외롭고 고통스럽지. 더구나 자넨 늙은 복서 아닌가. 쓰러트릴 확률보다는 스러질 확률이 더 많겠지. 자네도 사업을 하려면 권투를 자주 보게." 내가 권투경기를 통해 지켜보고 있는 것은 복서들의 주먹질이 아니다. 복서들은 서로의 얼굴을 노려보며 주먹을 날리지만, 결국 그들은 스스로의 고독과 사투를 벌이고 있는 중이다. 승세를 타고 있을지라도 복서들의 얼굴은 항상 절망과 고통으로 일그러져 있다. 1라운드가 시작되는 순간부터 둘 중 하나가 쓰러질 때까지 그들은 각각 혼자일 수밖에 없다. 그것도 행복한 혼자가 아니라 아주 고통스러운 혼자인 것이다. '거꾸로 경영'이란 말 그대로 동지가 없는 외로운 실험이다. 모든 것은 나의 판단과 결정에 달려 있다. 결과에 대한 책임도 완전히 내 몫이다. 복서의 고독과 투혼을 배워야 버틸 수 있다. 복서들은 서로의 얼굴을 노려보며 주먹을 날리지만, 결국 그들은 스스로의 고독과 사투를 벌이고 있는 중이다. 벤처는 고독한 것 나는 평소에 과묵한 편이다. 특히 집에 있을 적에는 거의 말이 없는 편이다 그런데 아내와 아이들이 신기해하면서도 재미있어 하는 나의 모습이 있다. 권투경기를 시청할 대의 내 모습이다. 유독 권투경기를 볼 때만은 나도 모르게 흥분해서 헛손질을 하거나 버럭버럭 소리를 지르게 된다. 경기가 끝나면 나는 제일 먼저 화장실을 찾는다. 가족들 얼굴 보기 무안하기 때문이다. 내가 프로권투를 보면서 쉽게 흥분하는 것은 나의 일 같지 않기 때문이다. 한 판의 권투시합은 내가 걸어온 길고 걸어가야 할 길은 요약 판이다. 경영자들에게 가장 무서운 적은 외로움이다. 새로운 사업을 구상하고 있을 때나 어떤 어려움이 닥쳐올 때, 경영자들은 세상에 오직 나 혼자밖에 없음을 깨닫게 된다. 어떠한 조언과 위로도 귀에 들어오지 않는다. 고독을 참는 능력이라는 것은 새로운 희망과 용기를 찾아내는 능력과도 같은 말이다. 쓸모 없는 고난은 없는 법이다 .어떠한 고난을 통해서라도 우리는 무엇인가를 얻고 배우게 마련이다. 그러나 그것도 참고 견뎌낸 다음의 이야기이다. 나에게 경영자의 제1덕목을 꼽으라고 한다면 바로 고독을 참는 능력을 말하겠다. 창업과 관련해서 내게 조언을 구하는 사람들은 대개 벤처라는 것을 오해하고 있다. 벤처사업이라는 것을 아이디어와 순발력만 있으면 얼마든지 떼돈을 벌 수 있는 것처럼 생각하고 있다. 그런 조급한 생각으로 벤처사업에 뛰어들어서는 안 된다. 말 그대로 모험심만 가지고 이룰 수 있는 것은 적다. 정작 필요한 것은 진득한 지구력과 인내심이다. 앞으로 닥쳐올 엄청난 양의 환난과 고독을 참고 견디면서도 언제나 난간과 희망을 지켜낼 줄 아는 사람이 진정한 벤처리더인 것이다. 권투는 또한 우리들에게 인내가 최선이라는 점을 가르쳐준다. 조급한 생각으로 어깨에 힘이 너무 들어가면 헛손질이 많아 힘이 빠지게 되고, 결국은 케이오(K.O.)는커녕 오히려 상대방의 기습에 당하기 십상이다. 다소 지루하더라도 정석대로 밀고 나가야 한다. 잽을 무시하고 큰 손짓만 좋아하는 권투선수들은 케이오 당할 확률이 높다. 욕심 때문에 허점이 생기는 것이다. 벤처사업을 한다는 친구들은 '대박 한번 터져야 할 텐데...'라는 말을 자주 한다. 반짝이는 아이디어만으로 '대박'을 만들 수는 없는 일이다. 꾸준한 기술축적과 인재양성에 진자 대박이 나온다. 조급하고 욕심이 많을수록 제 스스로 쓰러질 확률이 높다. "왜 돈 좀 벌었다고 외제차 굴리면서 룸살롱이나 다니는 젊은 친구들 있잖나. 소위 벤처사업 한다는 친구들이 재수 좋게 돈 좀 벌고 나면 다 그리 되는 거지. 언제 카운터 펀치가 날아올지 모르는 건데 말야. 사업을 그만두지 않는 이상 안도하면 안 되네. 권투나 사업이나 안정은 없는 거라고 생각하게." 그 친구는 나로부터 구체적인 창업정보라고는 눈꼽만치도 얻어 가지 못했다. 그러나 내가 그에게 줄 수 있는 것은 다 준 셈이었다. 그는 그로부터 얼마 후 실제로 회사를 차렸고 한동안은 제법 잘 나간다는 소문도 들렸다. 얼마 후 어느 강연장에 연사로 참가했다가 그를 우연히 마주칠 기회가 있었다. 반가운 인사를 주고받고 나자 그는 습관처럼 IMF타령을 쏟아내었다. 죽을 지경이라는 것이다. "사실 그때 권투 얘기만 하시길래 좀 시큰둥했습니다. 이제야 사장님 말씀을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사장님께서 해주신 권투 얘기가 이런 때 얼마나 큰 힘이 되는지 모릅니다." 사업에 안정이란 없다. 긴장을 풀고 방심하는 순간 카운터 펀치는 예외 없이 날아든다. 끝없는 도전과 승부 욕만이 기업을 살게 한다. 상대를 케이오시키거나 마지막 공이 울릴 때까지 권투선수들은 안심할 수 없다. 케이오승이나 마지막 공은 기업인들에게 죽는 순간을 의미한다. 죽는 순간까지 기업인은 항상 위험하다. 눈앞의 알량한 성공을 부정하고 기꺼이 고난을 기다려라. 벤처란 늘 고독한 것이다. 정작 필요한 것은 진득한 지구력과 인내심이다. 앞으로 닥쳐올 엄청난 양의 환난과 고독을 참고 견디면서도 언제나 낙관과 희망을 지켜낼 줄 아는 사람이 진정한 벤처리더인 것이다. 사업에 안정이란 없다. 긴장을 풀고 방심하는 순간 카운터 펀치는 예외 없이 날아든다. 끝없는 도전과 승부 욕만이 기업을 살게 한다. 벤처란 늘 고독한 것이다.
Board 말글 2022.02.10 風文 R 199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