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참 가슴 찡한 이야기 - 황지니 진정한 스포츠 정신 1913 년 2월의 맑게 개인 오후, 영국 국민들은 뜻밖의 사건에 놀라 숨을 죽였습니다. 그것은 넬슨 제독이 트라팔카 해전에서 전사한 이래 처음 있는 일이었습니다. 남극 대륙을 두 번째로 밟은 스코트 대위가 로스빙벽에서 대원 두 명과 함께 숨을 거둔 것입니다. 스코트 대위는 탐험선 테라 노바('새로운 대지'라는 의미)호를 타고 남극으로 향했습니다. 그러나 남극권에 들어서자마자 재난이 시작됐습니다. 뱃전에 산더미 같은 파도가 밀어닥쳐 짐을 모두 바다에 내던졌으나 배 밑바닥으로 물이 계속 들어왔습니다. 엔진은 고장을 일으켰고, 펌프는 작동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아직 재난의 제1보에 불과한 것이었습니다. 건강한 말을 몇 마리 데리고 갔으나 갈라진 얼음장에서 허우적거리기 일쑤여서 사살하고 말았습니다. 또한 개들도 미친 듯이 날뛰며 빙하의 가장자리에서 뛰어내려 결국 스코트 대위와 대원 네 명이 천 파운드가 넘는 장비를 실은 썰매를 끌며 남극을 향해 나아갔습니다. 그들은 해발 9천 피트의 희박한 공기에 호흡곤란을 느끼면서 생물이라고는 살지 않는 극지를 향해 무거운 발걸음을 옮겼습니다. 14일째가 돼서야 비로소 남극점에 도착했습니다. 그러나 그곳에는 한 개의 막대기 끝에 갈가리 찢겨진 헝겊 한 장이 나부끼고 있었습니다. "국기다.! 노르웨이 국기다.!" 그들의 실망과 슬픔은 말로 형언할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겨우 5주일 전 노르웨이 탐험가 아문센이 한 발 먼저 남극점을 밟고 돌아간 것이 아닙니까. 일행은 크게 낙심한 끝에 귀로에 올랐습니다. 정면으로 불어닥치는 찬바람으로 눈과 코는 얼어붙었고, 수염에는 고드름이 매달렸습니다. 맨 처음 하사관인 에번스가 발이 미끄러져 넘어지면서 머리를 다쳐 죽어갔습니다. 다음에는 오츠 대위가 병이 났습니다. 대위는 발에 동상이 걸려 걸을 수가 없게 되자, 자신이 일행의 발을 묶고 있음을 깨닫고 어느날 밤 무서운 눈보라 속으로 사라져 버렸습니다. '내 목숨을 버려 동료를 살리자'는 생각으로 그 길을 택한 것이었습니다. 스코트 대위와 나머지 두 명은 옮겨지지 않는 발걸음으로 길을 재촉했습니다. 이젠 더 이상 인간의 상태가 아니었습니다. 코도 손가락도 다리도 꽁꽁 얼어 금방이라도 꺾어질 듯했습니다. 드디어 1912 년 2월 19일 남극을 뒤로한 지 50일만에 일행은 최후의 텐트를 쳤습니다. 한 사람 앞에 두 컵 정도의 연료와 이틀 분의 식량이 남아 있었습니다. "됐다. 이젠 살았다"고 그들은 외쳤습니다. 식량을 묻어둔 곳까지는 18km밖에 남지 않아 단걸음에 갈 수 있었습니다. 그때 돌연 얼어붙은 대지 끝에서 맹렬한 눈보라가 몰려왔습니다. 스코트 대위 일행은 11일 동안 텐트 속에 갇혀 꼼짝할 수 없었습니다. 식량은 떨어진 지 이미 오래였고 이젠 죽음을 기다릴 뿐이었습니다. 눈보라는 더욱 맹렬히 몰아쳤습니다. 그들에게는 좋은 기분으로 잠들면서 최후를 맞기 위한 아편이 준비되어 있었으나 아무도 아편을 쓰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좋아, 정면으로 죽음과 대결해 보자! 영국인 특유의 스포츠 정신이란 바로 이런 것이다." 스코트 대위는 죽기 직전 유명한 작가인 제임스 벨리 경 앞으로 다음과 같은 편지를 써 그때의 극심한 상황을 기록으로 남겼습니다. "식량은 이제 동이 났고, 죽음은 눈앞에 다가왔습니다. 그렇지만 제발 안심해 주십시오, 이 텐트 안에서는 힘찬 노래 소리가 울려퍼지고 있습니다." 8개월 뒤, 반짝거리는 남극의 빙원 위를 태양이 부드럽게 쓰다듬고 있을 때 스코트 일행 세 명의 동사체가 발견됐습니다. 스키 두 개를 교차시켜 급히 만든 십자가 아래 그들은 조용히 묻혔습니다. 동궁의 진심 "흐흐흐흐......" 사람만 보면, 아니 혼자 방안에 있을 때도 동궁 양녕은 미친 사람처럼 히죽히죽 웃습니다. 태종 임금의 맏아들로서, 앞으로 임금 자리에 오를 왕세자가 미쳤다는 소문이 장안에 쫙 퍼졌습니다. 양녕은 그럴수록 하라는 공부는 하지 않고 낮에는 사냥을 하고, 밤에는 대궐 담을 뛰어넘어 술집에서 술을 마시고 오가는 사람을 때려눕히기 일쑤였습니다. 무술년, 이젠 양녕의 나이도 25세. 열한 살에 왕세자로 책봉된 후 오늘에 이르는 동안 그중 7, 8 년의 세월을 미치광이 노릇을 하고 지낸 것입니다. 몇 해 전의 일입니다. 양녕은 부왕 태종과 어머니 민비가 소곤거리면서 하는 이야기를 문밖에서 들었습니다. "참 아쉬운 일이오. 충녕과 양녕이 바뀌어 태어났으면 좋았을 것을......" "누가 아니랍니까. 충녕이 맏이였어야 할 것인데." 이 이야기는 양녕의 가슴에 비수처럼 꽂혔는데 어느 날 세자를 가르치는 스승 이래가 찾아오자, "옳지, 지금부터다!" 하고 일부러 비스듬히 기대 앉아서 개 짖는 시늉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멍멍멍......" 양녕은 잇달아 짖어대며, 물어뜯을 듯이 이래의 다리에 매달렸습니다. 그러다 정신을 차리는 듯도 하였지만 이래는 양녕의 이러한 행동을 태종에게 낱낱이 고했습니다. 양녕이 미친 짓을 하자 둘째 효녕은 은근히 자기에게 세자 책봉의 기회가 올 줄 알고 눈가림으로 공부를 하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양녕이 효녕의 방을 찾아가 그를 나무라며 자신이 미친짓을 하는 것은 아버지의 뜻을 헤아려 충녕을 세자로 책봉시키기 위한 것임을 말합니다. 이에 효녕도 크게 감동을 받아 깨닫고 그 날로 머리를 깎고 염불을 외우는 불제자가 되어 궁을 떠납니다. 결국 황희 판서와 개국공신 이직의 간언도 뿌리치고 태종이 충녕대군을 왕세자로 책봉하자 양녕대군은 편안한 마음으로 광주로 귀양을 떠나고, 황희와 이직도 귀양살이를 하게 되었습니다. 1418 년, 제4대 임금에 오른 세종은 형님들의 마음을 헤아려 지성껏 모시며 가까이 두고자 하였으나 양녕은 홀가분한 마음으로 전국을 돌아다니며 풍류객들과 사귀고, 아우 세종을 돕기 위해 암행어사의 자격으로 민정을 살피기도 했습니다. 시, 글씨, 활과 무술 등 다방면으로 뛰어난 양녕이었지만 순리를 알았기에 왕의 자리와 호화로운 생활을 과감히 버리고 평민과 더불어 시원한 삶을 살다간 그의 인생관은 오늘을 사는 우리들에게 가슴 뭉클한 감동과 지혜를 줍니다.
Board 삶 속 글 2022.01.25 風文 R 583
작은 이야기 2 - 정채봉, 류시화 엮음 1. 평범한 행복 2 믿음 - 작자 미상 어떤 곡예사가 나이아가라 폭포 위에다가 밧줄을 매어 놓고, 이쪽에서 저쪽편으로 건너가 보이겠다고 말했다. 많은 군중들이 모여서 그의 대담성에 박수 갈채를 보냈다. 믿을 수 없었던 사람들도 그가 직접 건너가는 것을 보고 나자 믿게 되었다. 그 곡예사는 바퀴 달린 손수레를 가지고 다시 한 번 밧줄을 타고 건넜다. 또다시 군중들은 환호했다. 그러자 곡예사가 군중들에게 외쳤다. "자, 지원자를 모집합니다. 누가 이 수레에 타시겠습니까?" 박수를 보내던 사람들은 주춤주춤 물러섰다. 조용해졌다. 그때 한 소녀가 앞으로 나와서 말했다. "제자 수레에 타겠습니다." 그리고 그 소녀는 수레에 타고 폭포를 건넜다. 군중 속의 한 사람이 말했다. "저 소녀는 그 사람을 믿었기 때문이야.곡예사가 소녀의 아버지니까." 이 말은 사실이다. 만일 당신이 최고의 성공을 하려면 먼저 꿈을 갖고 그 꿈이 이루어질 것을 믿어야 한다. 사람들은 흔히 "보기 전에는 믿지 못하겠다"고 말한다. 그러나 사실은 반대이다. '보기 전에 믿겠다'는 자세를 갖게 될 때 당신은 성공할 수 있는 것이다. 자랑하리라 - 김명래 며칠 전 어느 모임에 강연이 있어서 주부들 몇과 함께 강연을 들으러 갔다. 그날의 강사는 강의 시작되자 우리에게 백지와 펜을 하나씩 나눠 주었다. 그리고는 지금부터 숙제를 내겠다고 하면서 나눠 준 종이에 자기 자랑 스무 가지를 적어서 내라고 했다. 우리는 순간 당황했다. 여기저기서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내 자랑? 내 단점을 쓰라고 하면 오십 가지도 넘게 쓸 수 있을 것 같은데, 내 자랑이라니? 전현 없을 것 같았다. 나는 받아 든 백지를 바라보고만 있었다. 많은 주부들도 나처럼 백지를 앞에 놓고 앉아서 곤란해 하고 있었다. 숙제 시간이 끝났다. 강사는 스무 가지를 다 쓴 사람은 손들어 보라고 하셨다. 그날 모임에 백 명 정도 참석했는데 두세 명이 손을 들었다. 열 개에서 열다섯 개 적은 사람은 대여섯 명 정도. 강사는 어디 나와서 발표해 보라고 하셨다. 한 주부가 나가서 자랑을 하기 시작했다. "나는 사람으로 태어나서 종교를 가진 것을 자랑합니다. 나는 어마가 된 것을 자랑하고 싶고, 빨래도 잘하고, 청소도 잘합니다. 그리고 쇼핑도 잘하고, 말도 잘하고, 칼국수도 잘한다고 남들이 그럽니다." 다시 한 주부가 나가서 말했다. "나는 자연을 사랑하고, 불쌍한 사람을 보면 도와 주고 싶고, 훌륭한 사람을 보면 존경하고, 슬픈 일이 있으면 울고 싶고, 기쁜 일이 있으면 웃을 줄 압니다." 순간 우리는 새로운 것을 발견했다. 나도 저런 것을 자랑할 수 있는데, 그래 나도 그렇게 하면서 사는데... 그것은 아주 평범한 진리이면서 우리가 늘 해오던 생활의 전부였다. 평소에우리가 너무나 시시하게 생각하고 재미없게 보던 조그마한 일들이 커다랗게 다가오는 느낌이었다. 가정에 묻혀서 날마다 반복되는 청소, 빨래, 밥짓기... 이런 일들이 얼마나 중요하고 자랑스러운 일인가를 새삼 느꼈다. 내가 없으면 이런 일들을 누가 할 수 있단 말인가. 이렇게 생각하자 내가 가족 중에서 가장 중요한 사람 같았다. (주부)
Board 삶 속 글 2022.01.25 風文 R 497
광풍제월(光風霽月) / 비가 갠 뒤의 바람과 달이란 뜻으로, 마음결이 명쾌하고 집착이 없으며 쇄락함. 《出典》'宋書' 周敦滯傳 유교(儒敎)는 북송(北宋) 중기에 주돈이(周敦滯 : 1017-1073)가 나와서《태극도설(太極圖說)》과《통서(通書)》를 저술했고, 그 뒤에 정호(程顥)와 정이(程滯) 형제가 사서(四書 : 大學 中庸 論語 孟子)를 정하여 성도(聖道)를 밝히었으며, 주자(朱子)가 이것을 집대성하여 형이상학(形而上學)으로서의 경학(經學)을 수립하여 소위 송학(宋學)을 대성(大成) 시켰다고 알려지고 있다. 주돈이는 옛사람의 풍도가 있으며, 정사를 베풂에는 도리를 다 밝힌 사람이라고 한다. '연꽃은 군자다운 것이다'라는 구절이 있는 <애련설(愛蓮說)> 한 편은 글 안에 도학(道學)의 향기도 풍기지만 그의 인격을 잘 나타내고 있다. 소식(蘇軾)과 함께 북송(北宋) 시대의 시를 대표하는 황정견(黃庭堅 : 1045-1105)은 주돈이에 대하여 깊은 경의를 나타내고 있으며, 그의 인간성에 대하여, "춘릉(春陵)의 주무숙(周茂叔)은 인품이 몹시 높고, 가슴속이 담박 솔직하여 광풍제월(光風霽月)과 같다" 고 평하고 있다. 광풍제월(光風霽月)이란 앞에서 말한 뜻이거니와, "깨끗하게 가슴 속이 맑고 고결한 것, 또는 그런 사람"에 비유하여 사용되고 있다. 또 "세상이 잘 다스려진 일"을 뜻하기도 한다.
Board 고사성어 2022.01.25 風文 R 815
법과 도덕 가벼이 스치듯이 생각해보면 언어의 쓰임새는 깃털보다 가볍다. 그러나 깊이 돌이켜보면 언어의 무게는 태산보다 무겁다. 언어는 정치와 법률, 종교와 도덕 같은 묵직한 정신세계를 형성하는 유용한 도구이다. 이것이 시대정신에 맞추어 제도화되어, 우리가 옳고 그름의 기준으로 삼는 ‘규범’은 이 시대의 법률적 언어와 도덕적 언어로 구성하게 된다. 우리는 법을 성실히 지킴으로써 스스로 정당해진다. 동시에 도덕률도 잘 준수함으로써 자신의 행동과 사고가 올바름을 확신한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법과 도덕을 따로따로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함께 존재해야 하는 것으로 생각한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어떤 공직자를 준엄하게 비판할 때에는 “법적으로나 도덕적으로 모든 책임을 지라”고 요구한다. 법과 도덕은 함께해야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언제부터인가 법과 도덕을 나누어 말하는 일이 눈에 띈다. “법적으로는 잘못이 없으나 도의적으로는 죄송하게 생각한다”는 식의 표현들이다. 얼핏 들으면 도덕률을 중요시하는 것 같지만 법에 저촉만 안 되면 그까짓 도덕은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는 꼼수가 깊이 박혀 있다. 죄송하다는 말 정도는 골백번 해도 전혀 손해날 것 없다는 천박한 논리가 숨어 있는 것이다. 도덕의 알맹이보다 법의 껍데기만 갖춘 눈속임이다. 도덕은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이며, 법 조항 문구에만 저촉되지 않으면 된다는 사고방식의 밑바닥에는 근본적인 반도덕성이 숨어 있다. 법 조항 하나하나의 규정은 도덕에서 추구하는 ‘선량함’과 ‘올바름’을 구현하려는 보편적인 노력의 산물이다. 도덕 정신은 뒷전으로 미루고 일단 법 조항 사이사이에 숨어 있는 도덕률의 빈틈만 노리면 된다고 보는 사람들, 그들이 바로 우리를 분노하게 하는 ‘법꾸라지’들이다. 김하수/한겨레말글연구소 연구위원·전 연세대 교수
연말용 상투어 늘 쓰는 말 가운데 상투어가 있다. 단어 낱낱의 뜻과 관계없이 습관처럼 입에 익어서 사용하는 말들이다. 아는 사람과 우연히 마주쳤을 때 반가워하며 “그렇잖아도 연락 한번 드리려고 했는데…” 같은 말들은 그 문장 내용의 사실 여부가 중요하지 않다. 서로의 우호적인 감정을 드러내기만 하면 충분하다. 상당히 많은 상투어가 이렇게 의례적으로 주고받는 말들이다. 상투어는 대개 일정하게 ‘정형화된 상황’을 계기로 삼아 사용된다. 보통 결혼식, 장례식, 축하 모임, 문안 인사 등이 상투어 사용의 계기들이다. 상투어는 진부한 부분도 있지만, 지나치게 세세하고 복잡한 언어적 묘사와 서술을 줄여주는 무척 요긴한 역할을 한다. 이러한 상투어가 없었다면 우리는 매 순간 독특하고 적절한 표현을 찾느라 몹시 피곤했을 것이다. 한 해를 마감하는 ‘상황’에도 상투적으로 주고받는 인사말들이 있다. 그 가운데 가장 흔한 것이 아마도 ‘다사다난한 올해를…’이라는 표현일 것이다. ‘일도 많고 탈도 많은’이라는 의미이지만 그런 뜻보다는 올해도 수고 많았다는 인사처럼 쓰였다. 그런데 몇 해 전부턴가 왠지 이 말이 품은 심각하고 진지한 의미가 살아나며 부담스러워졌다. 단순한 상투어가 아니라 괜히 이런 말을 방정맞게 자주 사용해서 궂은일이 자꾸 터지는 것 같은 꺼림칙함 말이다. 특히 지난해는 정치적으로 국민들 마음이 이루 말할 수 없이 힘들고 번잡스러웠다. 뜻을 모아 마음을 함께하는 일이 보람도 있었지만 무척 힘들고 피곤했던 점도 부인할 수 없다. 진정 원래의 단어 뜻 그대로 ‘다사다난’했다는 느낌이 든다. 올해에는 그동안의 온갖 적폐를 속시원히 털어내고 다음 연말은 ‘다사다난’이라는 말을 정말 마음 가벼운 상투어로만 사용했으면 한다. 김하수 / 한겨레말글연구소 연구위원·전 연세대 교수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참 가슴 찡한 이야기 - 황지니 참을 실천하는 사람 도산 안창호는 1878 년 대동강변에서 태어나 1938 년 병원에서 죽음을 맞을 때까지 독립운동에 전 생애를 바친 사람입니다. 그는 국민의 마음과 생각을 높이는 데 앞장섰으며 흥사단을 조직하여 힘을 길렀고, 임시정부에서는 조국의 독립을 위해 혼신의 힘을 기울였습니다. 도산은 '참'의 사람이었습니다. '아아, 거짓이여! 너는 내 나라를 죽인 원수로구나. 내 평생에 다시는 거짓말을 아니하리라.' 도산은 스스로 이렇게 탄식할 정도로 거짓을 미워했으며 이 거짓이 우리나라를 망친 가장 큰 원인 중의 하나라고 생각했습니다. 도산은 '사랑'의 사람이었습니다 '남자도 여자도 우리 2천만이 다같이 사랑하기를 공부하자. 그래서 서로 사랑하는 민족이 되자. 오직 사랑하자.' 그의 동지애는 유별하였습니다. 동지에 대해서는 물질과 사랑과 정성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그는 독립운동을 하다 반신불수가 된 동지를 위해 운하 공사장에서 수개월 동안 인부로 일하여 약값과 치료비를 보내 주기도 했습니다. 그는 또한 웃음을 좋아했습니다. 저마다 좋은 마음으로 웃는 얼굴을 가지는 것이 그가 그리는 새 민족의 모습이었습니다. 도산은 '겸허'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겸손한 마음으로 인생을 살았으며 오만한 마음이나 권위주의적인 태도는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그는 언변과 통솔력과 덕성이 뛰어난 인격자였지만 자만하지 않았습니다. 늘 뒤에서 묵묵히 직분을 다하고 명예와 공은 남에게 돌리는 것이 그의 철학이었습니다. 그는 1919 년 상해 임시정부가 수립되었을 때 노동총판으로서 일을 한 적이 있는데 그때 대통령 대리 후보자로 추천되었습니다. 도산은 그 자리를 끝내 사양했지만 결국 대통령 대리로 선정되자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잠시라도 대통령 대리의 명목을 띠고는 몸이 떨려서 시무할 수가 없소.' 스스로를 능력이 없고 인격이 모자라는 사람으로 격하하며 높은 자리에 앉아 있으면 송구스럽고 민망하여 몸이 떨려 일을 할 수가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도마뱀처럼만...... 일본 도쿄에서 올림픽을 개최하게 됐습니다. 그래서 스타디움 확장을 위해 지은 지 3 년 되는 집을 헐게 됐습니다. 인부들은 지붕을 벗기려다가 꼬리 쪽에 못이 박힌 채 벽에서 움직이지 못하고 있는 도마뱀 한 마리를 발견했습니다. 집주인을 불러 그 못을 언제 박았느냐고 물어 보았더니 집을 짓던 3 년 전에 박은 것이 분명하다는 대답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3 년 동안이나 꼬리에 못이 박힌 채 죽지 않고 살아 있다니 정말 놀라운 일이라고 모두들 혀를 내둘렀습니다. 사람들은 이 신기한 사건의 까닭을 알기 위해서 공사를 잠시 중단하고 도마뱀을 지켜보기로 했습니다. 그랬더니 다른 도마뱀 한 마리가 먹이를 물어다 주는 것이었습니다. 그 도마뱀은 하루에도 몇 번씩이나 못에 박힌 친구를 위해 무려 3 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먹이를 가져다 주는 일을 계속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Board 삶 속 글 2022.01.21 風文 R 466
작은 이야기 2 - 정채봉, 류시화 엮음 1. 평범한 행복 2 온실꽃과 야생화 - 이창건 몇 해 전인가 비행기를 갈아타기 위해 유럽의 어느 비행장에서 몇 시간 기다린 적이 있다. 그때 초등학교 1학년쯤으로 보이는 꼬마도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비행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가 모든 승객들의 시선을 끈 것은 남달리 귀엽게 생긴 탓도 있지만 그보다는 혼자 여행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꼬마의 앞가슴과 잔등에는 커다랗게 써 붙인 글귀가 있었다. 자세히 보니 잔등에는 출발지, 경유지,행선지 그리고 비행기마다의 번호와 이착륙 시간 등이 적혀 있었고, 앞가슴에는 부모와 도착지의 보호자 이름, 전화 번호, 주소 등이 적혀 있었다. 그 개구쟁이는 호주의 부모 곁을 떠나 영국 학교에 유학가는 길이었다. 꼬마의 부모는 어떤 사람들일까? 역시 세계를 제패했던 앵글로 색슨족은 다른 데가 있구나 하는 생각과 함께, 어린이들을 너무도 과잉 보호하는 우리 나라 엄마들이 머리 속에 떠올랐다. 10여 년 전 나는 오스트리아의 수도 비엔나에서 카메라 셔트를 눌러 달라고 부탁하는 일본 사람을 만난 일이 있다. 그 다음엔 네거리에서 빨간 신호등에 걸려 그 일본 사람과 함께 기다리고 있는데 교통순경이 뛰어 와서 도와 달라고 했다. 내용인즉 길 건너에 서 있는 저 동양인이 손짓 발짓으로 묻고 있는데 무슨 얘기인지 알 수 없으니 통역해 줄 수 없느냐는 것이었다. "야팡, 야팡!" 하면서 교통순경에게 떠들어댄 사람은, 자기는 세계 일주 무전 여행중인 일본인인데 어디 공짜로 먹고 잘 곳이 없느냐는 사연이었다. 거지 같은 꼴의 그는 자전거를 타고 인도 봄베이에서 비엔나까지 두 달 반 걸려 달려왔다는 것이고, 자기와 함께 떠난 또 다른 일본인 두 명은 뒤에 쳐졌다고 했다. 우리 셋은 약속이나 한 듯 가까운 음식점에 들어가 실컷 먹고 마시며 흥미진진한 얘기를 주고받았다. 나에게 사진을 찍어 달라던 일본인은 다리를 절고 있었는데, 자기 나라의 어느 지방 신문에 유렵 여행기를 연재하고 있는 자유 기고가였다. 그때만 해도 일본인 해외 관광단이 별로 없었던 때라 그의 글은 주목을 받았고, 또 다리가 불편한 그가 갈 수 있는 곳이면 남녀노소 누구를 막론하고 가볼 수 있다는 식으로 글을 써 많은 독자를 확보하고 있다고 했다. (한국 에너지 연구소 원자력 연수실장) 부처님 모습 - 석지현 1985년, 나는 인도의 켈커타에 있었다. 이 세상의 끝, 인간의 온갓 더러운 모습이 다 있는 곳, 그리고 극도의 무질서와 무더위가 우글거리는 곳 켈커타... 벵갈리 마켓 부근의 빈민촌에 인도 절이 있길래 거길 찾아갔다. 반기는 것은 오직 무더위뿐. 사방이 벽으로 막혀 버린 이 수용소 같은 방에 머물 생각을 하니 기가 찼다. 모기떼와 엎치락뒤치락하다가 날이 새었다. 가는 햇살이 갈라진 벽 틈으로 들어와 밭에 꽂혔다. 또 고생이 시작되는구나... 나는 아득한 생각에 젖어 얼마 동안을 그렇게 앉아 있었다. 그때 누가 열려진 문으로 들어왔다. 나는 그 순간 거지가 돈 달라고 오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거지가 물었다. "어디서 왔는가요?" 나는 한국에서 왔다고 하면서 경계의 눈초리로 그를 보았다. 그러나 그에게는 전혀 악의가 없었다. 거지는 자기 소개를 했다. 그는 산티니케탄에서 산다고 했다. 그제야 나는 이 거지의 정체를 알 수가 있었다. 그는 산티니케탄 타골 대학의 청소부인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나는 시인 타골이 세웠다는 오두막집 대학 산티니케탄에 가볼 생각이었다. 그래서 그에게 산티니케탄으로 가는 길을 물었다. 그는 나를 데리고 부근의 차이나타운으로 갔다. 그곳은 마치 쓰레기와 세균의 집합장 같았다. 악취가 코를 찌르는 골목길들을 이리 돌고 저리 휘어 가면서 그는 차이나타운의 이모저모를 열심히 설명해 주었다. 그는 인도에서 27년째 살고 있다는 것이다. 그와 함께 아침 겸 점심을 먹었다. 그는 손국수를 사고 싶은데 같이 가자고 했다. 그러나 손국수를 파는 곳은 없었다. 이렇게 찾아 헤매이길 무려 세 시간, 나는 지치고 화가 났다. 느닻없이 나타난 웬 일본 거지가 손국수 하나로 나를 이렇게 골탕먹이고 있는가 싶어 울화가 치밀었다. 겨우 손국수 파는 곳을 발견하자 그는 너무너무 좋아했다. 드디어 손국수를 살 수 있다는 것이었다. 세 사람 몫의 손국수를 사들고 그는 나와 헤어졌다. 내일 산티니케탄 지나바반에서 만나기로 하고... 그 이튿날 나는 어렵게어렵게 산티니케탄 지나바반을 찾아갔다. 마키노(그의 이름)를 찾자 인도 여학생들은 대번에 마키노라는 이름 뒤에 '교수님'을 붙였다. 그는 산티니케탄 타골 대학교의 일본어과 주임교수였던 것이다. 나는 그의 서재로 들어갔다. 그는 소년처럼 활짝 웃었다. 그러나 옷은 역시 짝짝이인 어제 그 옷이었다. 그가 모는 자전거 뒤에 타고 그의 집으로 갔다. 인도의 밤. 먼 곳에서는 그리움처럼 불이 켜지고 저녁 식사가 준비되었다. 식탁(조그만 앉은뱅이 나무 책상) 에 앉은 나는 놀랐다. 어제 그가 그토록 사려고 헤맸던 손국수는 바로 오늘 자기 집 손님으로 오는 나를 대접하기 위한 것이었다. 나는 무엇엔가 한 대 세게 얻어맞은 느낌이었다. 발 씻을 물을 주고 잘 자리를 준비해 주는 그들 부부의 정성 어린 태도는 집 나간 아들을 대하는 바로 그것이었다. 아침. 마키노 교수는 조그만 신상 앞에 무릎 꿇고 앉아 기도를 드렸다. 부인은 작은 소꿉놀이 그릇에 다섯 알쯤 되는 밥풀을 담아 가지고 와서 신상 앞에 놓았다. 나는 뒤에 앉아서 마키노 선생의 모습을 유심히 보았다. 그에게는 전혀 꾸밈이 없었다. 교수라는 권위도 지식인의 오만도 그에게는 도저히 접근할 수 없었다. 여기 오직 간절하고 조그만 한 인간이 지금 내 앞에서 기도를 드리며 하루 일과를 시작하고 있는 것이다. 그 모습을 보는 순간 나는 무서움을 느꼈다. '바로 저것이었구나, 내가 찾고 있던 것이. 진정한 부처님의 모습은 바로 저것이었구나. 바로 저 겸허하고 절실한 한 인간의 모습이었구나.' (스님)
Board 삶 속 글 2022.01.21 風文 R 687
말로 하는 정치 정치가 잘 돌아가면 사람들은 편안해진다. 반대로 잘 안 돌아가면 무척 피곤하고 우울해진다. 전망이 불투명해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에겐 유능하고 성실한 정치인들이 많이 필요하다. 좀 답답하더라도 정직하고 노력하는 정치인들을 열심히 길러 주어야 한다. 요즘 진행되고 있는 국회 청문회를 들여다보자. 자신의 업무와 깊숙이 연관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모른다’, ‘기억나지 않는다’ 하며 잡아떼다가 증거물이 나오면 ‘제가 너무 늙어서’라는 개그 수준의 변명을 한다. 게다가 일부 의원들은 준비가 안 된 겉도는 질문을 하거나 불필요한 호통만 치면서 청문 중계를 보는 사람들을 답답하게 만든다. 이러한 시국 사건에 국회가 적극적으로 개입하는 것은 사법부에만 맡겨 두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사법적인 처리는 주로 법률 전문가들의 전문성에 기댄다. 보통 사람들이 끼어들기가 쉽지 않다. 따라서 일반인들은 자연히 소외된다. 이에 반해 국회에서의 논쟁과 청문은 일반인들에게 더 많은 기회를 보장하고 그 논의 과정에 시민적 참여가 가능하다. 특히 텔레비전과 인터넷 같은 매체 덕분에 더욱 활발한 참여가 가능해졌다. 또 법률적인 문제뿐만 아니라 윤리적인 문제나 상식적인 문제에 이르기까지 폭넓게 논의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국민의 분노를 불러일으킨 국정농단의 문제를 단칼에 처리하지 못하고 의회의 논쟁과 청문을 통해 접근한다는 것은 답답하고 짜증스러울 수도 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우리가 말로 캐어묻고 따지면서 사회 정의를 조금씩 실천해 나갈 수 있다는 것 또한 매우 가치 있는 일이다. 정치는 힘이 아니라 말로 하는 것이다. 김하수/한겨레말글연구소 연구위원·전 연세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