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참 가슴 찡한 이야기 - 황지니 아름다운 로스페데 옛날 왕자를 무척 따르던 로스페데라는 예쁜 처녀가 있었는데, 그 당시에는 평민은 왕자를 사랑하지 못하므로 그녀는 몰래 가슴만 태우면서 왕자를 기다리며 지냈습니다. 한번은 이웃나라와 큰 싸움이 벌어졌는데, 가장 믿었던 장군의 배반으로 왕자는 홀로 도망쳐 왕의 사냥터에 숨었습니다. 이때 로스페데는 언제나와 마찬가지로 이 산에 가서 왕자에게 바치고 싶었던 금반지며 금팔찌를 묻은 싸리나무 밑에서 신께 기도를 드리려다가 의복이 찢긴 채로 한 청년이 지쳐 누워 있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동정심이 많은 로스페데는 그 청년을 조용히 깨워 포도주와 빵을 먹이고 상처를 씻어 주었는데, 그때 왕자의 무늬가 박힌 보석반지를 낀 손을 보았습니다. 로스페데는 그제야 그가 행방불명이 되었다던 왕자인 줄을 알았으나 모르는 체하고는 찢어진 옷을 꿰매고, 싸리나무 밑을 팠습니다. 그러나 숨겨 두었던 보물은 모두 노란 황금물로 녹아 있었습니다. 할 수 없이 로스페데는 거기서 돋아난 싸리가지를 꺾어 드리며, "왕자님 여기 지휘봉이 있으니 정신을 차리고 나가 싸우세요."라고 말했습니다. 이에 왕자는 용기를 얻어 싸리가지 지휘봉으로 처녀가 가지고 온 말을 타고 나가 싸워 크게 승리했습니다. 물론 로스페데는 왕후가 되었습니다. 아직도 싸리나무 속이 노란 것은 황금물로 자란 까닭이며, 좋은 향내는 지성의 로스페데의 몸의 향수 냄새라고 합니다. 사랑은 인간의 주성분이다. 인간의 존재와 같이 사랑은 완전무결하게 존재하고 있으며, 무엇 하나 더 보탤 필요가 없는 것이다. - J. G. 피히테 내겐 너무 예쁜 당신 산을 좋아하는 젊은 말콤은 애인인 바브와 6천 1백 피트나 되는 발루파스 산꼭대기에서 폭설을 만났습니다. 산장에서 밤을 새우고 눈쌓인 미끄러운 계곡을 타고 내려오다 어미곰의 공격을 받았습니다. 은빛 털을 가진 굉장히 큰 곰이 바브를 덮쳤습니다. 순간 말콤은 바브를 밀쳐 눈덮인 냇독으로 쓰러지게 하고 곰과 결투를 벌였습니다. 말콤은 곰의 앞발 공격 한 대에 정신을 잃었습니다. 잠시 후 정신을 차려 고개를 드니 10 피트나 떨어진 곳에 바브가 내동댕이쳐진 것을 알았습니다. 곰은 얼굴을 땅쪽으로 돌린 채 눈 위에 죽은 듯 넘어져 있는 바브의 등을 물려는 찰나였습니다. 말콤은 지체할 수 없었습니다. 무서워할 겨를도 없이 허리띠에서 사냥용 칼을 빼들고 곰에게 달려들어 육중한 곰의 등에 매달려 목 부근에 칼을 박았습니다. 곰은 신음소리를 내며 말콤을 땅에 떨어뜨리고 얼굴을 발로 마구 긁어댔습니다. 말콤의 머리털은 가발처럼 홀랑 벗겨졌고 마지막 힘을 다해 곰의 코를 때리면서 의식을 잃었습니다. 바브의 필사적인 탈출로 병원에 옮겨진 뒤에야 의식을 되찾은 말콤은 중대한 수술과 함께 20여 번의 성형수술을 받아야 했습니다. 하루는 간호사가 붕대를 갈다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에 그는 자신의 얼굴을 거울에 비춰 보았습니다. 팔의 근육을 떼어내 코를 만들고 다리에서 벗겨낸 피부로 얼굴을 덮은 자신의 얼굴을 보자 미칠 것 같았습니다. 그 날 이후 말콤은 심한 우울증에 빠졌고 사랑하는 바브가 매일같이 전해 오는 편지에도 답장하지 않았습니다. 사고가 난지 6개월만에 말콤은 바브를 찾아갔습니다. 흉터 투성이 얼굴에 팔은 깁스를 했고 온몸은 바싹 여윈 말콤을 바브는 여전히 변함없는 사랑으로 맞아 주었습니다. 결국 말콤은 바브의 청혼을 받아들여 결혼했습니다. 말콤에 관한 기사는 캐나다 전역에 퍼졌고 캐나다를 방문한 엘리자벳 여왕은 '용기의 별'이란 훈장을 수여했습니다. 사람들이 바브에게 자기를 살려 준 의무감 때문에 결혼했냐고 물었을 때 그녀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사고 전부터 그를 사랑했고 앞으로도 사랑할 것입니다. 외모가 사람이 살아가는 데 무슨 소용이 있어요. 흉터가 사람 됨됨이까지 바꾸는 것은 결코 아니니까요." 외모가 훌륭하다고 사람을 칭찬하지 말고 외모가 볼품없다고 경멸하지 말아라. - 구약성서
작은 이야기 2 - 정채봉, 류시화 엮음 1. 평범한 행복 2 여인 2대 - 오창익 서울역이다. 연이가 도착하기까지는 아직도 15분이 남았다. 영하의 추운 날씨. 마중 나온 사람들은 저마다 기다리는 시선을 외투 깃에 묻은 채 빠른 재자리 걸음으로 서로들 초조하다. 그러나 나는 마치 첫아기를 낳아 친정을 다니러 오는 딸을 기다리는 심정으로 사뭇 만족하고 흐뭇하기만 하다. 추위마저 느낄 수 없는 것은 내 기대를 한 몸에 짊어진 맏딸 연이가, 기한부 시골 유학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날이기 때문이다. 기한부 시골 유학. 한 마디로 선뜻 이해가 되지 않는 말 같지만 재작년 봄이었다. 메마른 인정, 각박한 도시 생활에 시들어만 가는 연이의 동심에 무엇인가 신선한 것을, 아직 때묻지 않은 시골의 정취를 불어넣어 줘야겠다고 생각한 나는, 연이를 2년 간이란 기한부로 시골 유학을 보내기로 했다. 장소는 아내의 고향이자 연이의 외갓집이 있는 충남 금산의 인삼골. 그곳은 아직 때묻지 않은 동심이 무럭무럭 자랄 수 있는 시골 마을로, 향나무 울타리 사이로 노란 개나리가 휘어지게 피고, 보리밭 둑길을 따라 나물 캐는 여자들과, 벼를 싣고 방앗간으로가는 소달구지를 얼마든지 볼 수 있는 곳이다. 더구나 인삼골은 연이의 엄마를 내게 보내 준 해바라기의 사연이 묻혀 있는 곳으로, 내겐 평생 잊을 수 없는 마음의 고향이기도 한 곳이다. 연이가 금년으로 열두 살이니까 꼭 12년 전 일이다. 그때도 오늘같이 추운 영하의 날씨로, 겨울 방학 때였다. 나는 서울역 바로 이 자리에서 초조한 눈빛을 외투 깃에 묻고 미지의 시골 처녀 한사람을 기다리고 있었다. 나이는 스물두 살,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는 초면의 인삼골 여교사였다. 수없이 오고 간 편지의 사연으로 이미 깊은 정이 들어 만나면 손이라도 덥석 마주잡을 사이였지만, 한 번도 얼굴을 본 적이 없으니 복잡한 대합실에서 서로를 알아보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다만 한 가지 그녀를 확인할 수 있는 유일한 표시가 있었다. 그것은 온다는 소식에 앞서 내가 보내 준 해바라기 무늬가 있는 녹색 바탕의 스카프였다. 해바라기 무늬의 스카프... 봄나물의 싱싱한 시골 정취를 풍기는 처녀를 아내로 맞이할 수 있다는 기대에 부푼 나는 그날도 여기 서울역에서 영하의 혹한을 무릅쓰고 해바라기 무늬의 스카프만을 눈이 빠지게 기다리고 있었다. 그 여교사를 알게 된 것은 실로 우연한 기회에서였다. 여름 방학 때였다. 묵은 신문을 뒤적이다가 나는 무심히 어느 여성 독자의 투고란을 읽게 되었다. 시골 장날에 벌어지는 교실 주변의 정겨운 풍경을 그린 원고지 서너 장 정도의 토막 글. 필자는 그곳 학교의 여선생이었다. 나는 그 여교사의 명랑한 문체에 끌려 편지를 보냈다. 답장이 왔다. 그로부터 답장은 답장의 꼬리를 물고 서로의 사연이 오가기 시작했다. 그러기를 만 1년, 편지 600여 통이 오간 이듬해 가을이었다. 나는 견디다 못해 사진이라도 한 장 보내라고 했다. 그러나 보내라는 사진은 보내지 않고, 잘 여문 해바라기 씨 몇 알을 깨끗한 색종이에 싸 보냈다. "우리 집 대대로 심어 오는 해바라기입니다." 그 해바라기의 씨앗을 받아 보낸다고만 했다. 짧고 수식 없는 단 한 줄의 글, 그 글 속에 무한히 많은 사연이 깃들여 있음을 내 나름대로 해석했다. 씨앗을 보낸다는 것은 심으라는 뜻, 심으라는 것은 대를 이어 해바라기를 같이 키워 보자는 뜻으로 나는 알았다. 그 씨앗을 이듬해 봄, 나는 하숙집 장독대 옆에다 심게 되었고, 그게 자라서 탐스럽게 씨알이 영글어 갈 무렵, 해바라기 여교사는 마침내 내게로 시집을 왔다. 이제 5분만 더 참고 기다리면 우리 연이가 "아빠!" 하고 소리치며 달려들 것이다. 해바리기처럼 키가 늘씬하게 카 가지고, 해바라기처럼 환하게 웃으면서 말이다. 대견하고 자랑스러운 기분, 흐뭇한 순간이 다가오고 있다. 어느 새 기차가 도착했는지, 트렁크를 사이 좋게 맞든 신혼부부 한 쌍이 발걸음도 가볍게 출구로 나오고 있다. 순간, 그게 내 딸 연이가 아닌다 하고 착각을 한다. 그렇다. 앞으로 10년, 꼭 10년만 있으면 연이가 스물두 살이 되고, 10여 년 전 제 엄마의 나이가 된다. 그때가 되면, 늙어 볼품 없는 아빠가 아닌 젊고 싱싱한 청년의, 체구도 늠름한 신랑감이나 대신 여기 서울역에 지키고 서서 연이를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나는 다시 한 번 시계를 보고, 그날을 생각하며 마음속으로 미소를 짓는다. (남산공고 교감) 맹인 연주자와 거리 가수의 노래 - 손종식 우리는 더 이상 영리해지려고 할 필요가 없다. 이미 우리 모두는 충분히 영리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이제 서로도와 주자. - F,J, 잭슨 지난 해 섣달 그믐,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분비는 서울역 앞 지하도를 들어설 때였다. 저마다 바쁘게 지나는 사람들에게 외면당한 듯한 한 쌍의 맹인 부부가 지하도 한 모퉁이에 서 있었다. 서른이 갓 넘어 보이는 남자의 손엔 바이올린, 서너 살 아래인 것 같은 여자의 손엔 동전 몇 개가 담긴 작은 바구니가 들려 있었다. 맹인이 기타를 켜며 연주자 앞엔 듣는 이가 없었다. 행인들은 그저 쳐다보고 지나칠 뿐이었다. 그 앞에 서서 잠시 듣고 있노라니 어느새 세 명의 관객이 생겼다. 검은 베레모에 소위 계급장을 단 군인과 동행하던 두 아가씨가 저만치 지나쳤다가 되돌아왔다. 적은 관객을 위해 앞을 못 보는 연주자는 귀에 익은 캐럴들을 계속해서 연주해 나갔다. 다섯 곡이 끝났을까, 다음 곡을 켜려는 순간 검은 베레모의 젊은 장교가 말했다. "캐럴을 계속 켜주시겠습니까? 저희들이 같이 부르고 싶은데요." 군인의 말에 잠시 의아한 표정으로 머뭇거리던 연주자는 이내 익숙한 솜씨로 바이올린을 켜기 시작했다. 그 맑고 환한 밤중에 천사들 내려와... 바이올린 멜로디에 맞춰 군인과 두 아가씨는 화음을 넣어서 노래를 불렀다. 예사 솜씨가 아닌 그들의 노래가 바이올린과 멋진 화음을 이루며 넓은 지하도를 울렸다. 어느새 관객이 하나둘 늘어났고 따라 부르는 사람도 생겼다. 사람들의 얼굴엔 평화와 기쁨의 빛이 넘쳐흘렀다. 그때장고가 나서며 말했다. "여러분, 이 두 분을 위해서 바구니를 채워 줍시다." 군인은 에워싼 사람들 앞에 나와서 직접 바구니를 돌렸다. 이윽고 바구니가 다시 여인의 손에 들려졌을 땐 지폐로 수북하게 채워져 있었다. (학생)
Board 삶 속 글 2022.01.09 風文 R 546
올바른 명칭 사물의 이름은 그리 객관적으로 혹은 중립적으로 지어지지는 않는다. 주로 명명자의 관심사나 희망사항을 반영하기 때문이다. 특히 그 이름이 정치적인 성격을 띨수록 이런 현상은 점점 더 심해진다. 정치야말로 자신이 품고 있는 가치와 열망을 극대화시켜 그에 반영하려 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더 나은 사회를 향해 앞으로 나아가려 한다면 정치적인 일에도 만민의 생각을 담은 상식을 제대로 반영하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 돌이켜보니 1980년대에 한국 정치를 휘두르며 숱한 정치적 희생자를 만들어냈던 집단은 스스로를 ‘민주적이고 정의로운’ 정당이라는 이름을 ‘감히’ 사용했다. 그뿐만 아니라 그 이전에 있었던 이른바 ‘유신’ 체제는 그 이름에 걸맞은 변혁과 혁신의 기능을 했느냐는 물음에 많은 이들이 도리질하게 된다. 말뜻만으로는 세상을 환하게 비출 것 같으면서도 사실은 울적한 그늘만 만들었던 이름들이다. 곧 상식과 맞지 않았다. 시위 진압 과정에서 크게 다쳐 오랜 입원 끝에 죽음에 이른 한 사람의 죽음에 어떤 이름을 붙이느냐로 말다툼이 치열하다. 의학적인 판단 못지않게 상식적이고 예의에 맞는 이름이 있기 마련이다. 그를 죽음에 이르게 한 원인을 외부에서 찾는다면 그 죽음을 사회적 문제로 받아들이게 될 것이고, 오로지 생리적인 신체 내부의 현상으로만 본다면 사회적 책임을 단절하는 효과가 있을 것이다. 과연 어느 것이 ‘상식’에 맞는 명명인가? 대학생 박종철군은 외부적인 고문으로 죽임을 당했는가, 아니면 호흡곤란으로 세상을 떠났는가? 이에 대해 상식적으로 대답을 해보자. 그리고 고 백남기씨의 문제를 정직하게 생각해보자. 올바른 이름은 그렇게 정해야 한다. 왜 이리 오래전에 있었던 일이 마치 현재 일처럼 가깝게 느껴지기만 하는지 모르겠다. 김하수/한겨레말글연구소 연구위원·전 연세대 교수
한자를 몰라도 한자를 잘 아는 사람들이나 잘 모르는 사람들이나 쉽게 믿게 되는 것이, 한자를 알면 의미 파악에 도움이 된다는 주장이다. 정말 그럴까? ‘부모’나 ‘농촌’ 같은 말의 의미를 정말 父母, 農村이라는 한자를 통해서만 쉽게 알 수 있을까? 사실 그러한 어휘의 대부분은 소리만 들어도 금방 그 의미가 떠오르도록 우리의 인지 과정은 고도로 정비되어 있다. 그래서 거의 대부분의 한자어는 ‘한자’라는 중간 단계가 필요 없이 의미를 직접 파악해 버린다. 좀 어려운 말의 경우에, 癡?(치매), 蒙昧(몽매)와 같은 말들은 일일이 한자를 따지느니 그냥 말소리만 외우고 개념을 익히는 게 훨씬 더 편하다. 한자는 원래의 의미를 잃고 어휘의 한 부분으로 변한 경우도 많다. 사람의 모양을 한 노리개를 인형(人形)이라 한다. 한자로 사람의 모양이라는 뜻이다. 그러나 곰이나 개의 모양으로 만든 것을 웅형(熊形)이나 견형(犬形)이라 하지 않고 그냥 곰 인형, 개 인형이라고 한다. 이미 인형이라는 말이 굳어져 버렸기 때문이다. 이 경우도 한자 ‘人形’은 별다른 기능을 하지 못한다. 저녁거리에 주전부리를 파는 ‘포장마차’를 보라. 말이 끄는 포장마차를 보았는가? 말이 끄는 수레로 비유하다 보니 한자는 있으나 마나 하게 되었다. 수많은 한자어의 처지가 이러하다. 닭의 가슴에 붙은 살을 계륵이라고 했다. 그러나 요즘은 닭가슴살은 영양식으로, 불필요한 군것을 가리켜 계륵이라 한다. 한자의 ‘어휘 의미’로 나타낼 수 없는 ‘감성적 의미’가 풍부해진 것이다. 한자를 몰라도, 또는 안 써도 이제는 언어생활에 큰 불편은 없게 되었다. 2천여 년 동안 인습화된 문자 생활이 겨우 100년 남짓 동안 혁신된 셈이다. 김하수/한겨레말글연구소 연구위원·전 연세대 교수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참 가슴 찡한 이야기 - 황지니 진정한 용기의 본보기 영국인들은 항해 중 재난을 당했을 때 서로 상대방의 귀에 대고 이렇게 속삭인다고 합니다. "버큰헤이드 호를 기억하라." 이야기는 1852 년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영국해군의 자랑스러운 수송선 '버큰헤이드 호'가 사병들과 그 가족들을 태우고 항해중, 아프리카 남단 케이프타운으로부터 약 65km 떨어진 곳에서 암초에 부딪쳤습니다. 새벽 2시, 그 배엔 130여 명의 부녀자를 포함해 630여 명의 승객이 타고 있었습니다. 놀라서 잠을 깬 승객들은 커다란 공포 속으로 휘말려갔습니다. 완전히 허리가 끊긴 배에는 3척의 구명정이 있었지만 1척당 60 명, 전부 합해야 180 명밖에 탈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더구나 그곳은 사나운 상어떼가 우글거리는 곳, 엎친 데 덮친 격으로 풍랑은 더욱 심해져 승객들의 죽음을 앞둔 공포심은 더 높아지고 있었습니다. 이때 사령관 시드니 세튼 대령은 전 병사들에게 갑판 위로 집합할 것을 명령했습니다. 병사들은 명령에 따라 훈련시처럼 민첩하게 집합하여 부동자세를 취했습니다. 그동안 한쪽에서는 횃불을 밝히고 부녀자들을 3척의 구명정으로 옮겨 태웠으나, 마지막 구명정이 떠날 때까지 갑판 위의 사병들은 마치 열병식을 하는 것처럼 미동도 없이 서 있었습니다. 구명정에서 '버큰헤이드 호'를 바라보고 있던 부녀자들은 갑판 위에 의연한 자세로 서 있는 그 병사들을 향해 흐느꼈습니다. 잠시 후 병사들의 머리가 모두 낙엽처럼 물 속으로 숨어들었습니다. 세튼 대령도 함께였습니다. 겨우 판자에 매달려 목숨을 건진 한 장교는 그 당시의 상황을 이렇게 되뇌이며 울먹였습니다. "모든 병사들의 의연한 태도는 최선의 훈련에 의해서 이루어질 수 있는 기대효과를 훨씬 넘어서는 것이었다. 누구나 명령대로 움직였고 누구 하나 불평 한 마디 없었다. 그 명령이 곧 죽음이라는 것을 잘 알았으면서도 마치 승선명령이라도 되는 것처럼 이에 따랐다." '여자와 어린이 먼저'라는 훌륭한 전통이 세워진 것은 바로 이 사건 이후부터였습니다. 눈앞에 중대한 문제를 놓고 그에 관한 결정을 내리는 것은 강한 사람의 독특한 우수성이다. 약자는 항상 스스로 선택치 않은 약자택일의 결정에 강제당한다. (D. 본호에파)
Board 삶 속 글 2022.01.07 風文 R 526
작은 이야기 2 - 정채봉, 류시화 엮음 1. 평범한 행복 2 서울 나들이 - 복원규 급한 볼일로 서울에 가려고 고속버스 터미널에 이르렀을 때는 이미 오전 버스가 모두 매진되고 없었다. 난감하게 서 있는데 버스 운전사가 소리쳤다. "서울 가실 분 한 분만 올라오세요." 승객들이 우르르 몰려들었고, 다행히 행운은 나에게 돌아왔다. 그러나 막상 내 좌석을 찾은 나는 실망하고 말았다. 함께 앉고 싶지 않은 초라한 모습의 거지 부자가 바로 옆 좌석에 앉아 있었기 때문이었다. 난 퉁명스레 말했다. "여기는 내 좌석입니다. 꼬마를 안아 주시지요." "네, 죄송합니다. 태훈아, 이리 온." 나는 13번 손님이 표를 반환하고 내린 이유에 수긍이 가면서도 어쩔 수 없이 그곳에 앉아 우울한 여행을 해야만 했다. 금방 악취가 코를 찔렀다. 나는 몸을 등지고 자는 체했다. 그동안 꼬마는 사뭇 내게 몸을 밀착시키곤 재잘거렸다. 나는 운이 없음을 탓하면서 눈을 감았다. 얼마를 달렸을까. 나는 자신도 모르게 부자의 대화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아빠 저게 뭐야?" "응, 저건..." 쉴새없이 물어대는 아들의 갖가지 질문 공세에 남자는 침착하면서도 성의 있는 답변을 들려주고 있었다. 마침 바로 앞 좌석에서 다른 아이들이 엄마, 아빠에게 응석을 부리는 것을 본 꼬마가 돌연 물었다. "아빠, 난 엄마가 없어?" "그래. 엄마만 살아 있었더라면 얼마나 좋겠니? 네 엄마는..." 아들의 질문이 충격적이었는지 남자는 채 말을 잇지 못했다. 이윽고 그는 참담했던 지난날을 쉽고도 자상하게 아들에게 들려주는 것이었다. 오늘이 바로 꼬마의 생일날인 모양이었다. 그래서 고속버스를 태워 서울 구경이라도 시켜 주려고 남자는 아들을 데리고 나왔던 것이다. 순간, 난 그를 더 아프게 한 것 같아 자신을 나무라면서 그에게 정중히 사과했다. 그리곤 꼬마를 덥석 안아 내 무릎 위에 앉혔다. 이때만큼 흐뭇한 마음으로 여행을 한 기억도 찾을 수 없을 것 같다. (학생)
Board 삶 속 글 2022.01.07 風文 R 604
계명구도(鷄鳴狗盜) // 행세하는 사람이 배워서는 아니 될, 천한 기능을 가진 사람. 《出典》'史記' 孟嘗君列傳 전국시대 중엽, 齊나라 孟嘗君은 왕족으로 재상을 지낸 정곽군(靖郭君)의 40여 자녀 중 서자로 태어났으나 靖郭君은 자질이 뛰어난 그를 후계자로 삼았다. 이윽고 설(薛) 땅의 영주가 된 맹상군은 선정을 베푸는 한편 널리 인재를 모음으로써 천하에 명성을 떨렸다. 이 무렵(B.C 298), 맹상군은 대국(大國)인 秦나라 소양왕(昭襄王)으로부터 재상 취임 요청을 받았다. 내키지 않았으나 나라를 위해 수락했다. 그는 곧 3,000명의 식객(食客) 중에서 엄선한 몇 사람만 데리고 진나라의 도읍 함양(咸陽)에 도착하여 소양왕을 알현하고 값 비싼 호백구를 예물로 진상했다. 그러나 소양왕이 정작 맹상군을 재상으로 기용 하려 하자 중신들이 반대하고 나섰다. "전하, 제나라의 왕족을 재상으로 중용하심은 진나라를 위한 일이 아닌 줄로 아옵니다." 그래서 약속은 깨졌다. 소양왕은 맹상군을 그냥 돌려보낼 수도 없었다. 원한을 품고 복수를 꾀할 것이 틀림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를 은밀히 죽여 버리기로 했다. 이를 눈치 챈 맹상군은 궁리 끝에 소양왕의 총희(寵姬)에게 무사히 귀국할 수 있도록 주선해 달라고 간청했다. 그러자 그녀는 엉뚱한 요구를 했다. "내게도 진상한 것과 똑같은 호백구를 주시면 힘써 보지요." 당장 어디서 그 귀한 호백구를 구한단 말인가. 맹상군은 맥이 빠졌다. 맹상군을 수행한 식객 중 도둑질에 능한 특기를 가진 '구도'란 자가 이 사실을 알고는 그날 밤 궁중으로 잠입해서 전날 진상한 그 호백구를 감쪽같이 훔쳐 내어 그녀에게 주었다. 소양왕은 총희의 간청에 못 이겨 맹상군의 귀국을 허락했다. 맹상군은 일행을 거느리고 서둘러 국경인 함곡관(涵谷關)으로 향했다. 한편 소양왕은 맹상군을 놓아준 것을 크게 후회하고 추격병을 급파했다. 한밤중에 함곡관에 닿은 맹상군 일행은 거기서 더 나아갈 수가 없었다. 첫닭이 울 때까지 관문을 열지 않기 때문이다. 일행이 안절부절 못하고 있는데 동행한 식객 중에 소리 흉내내기에 특기가 있는 '계명'이 인가(人家) 쪽으로 사라지자 이내 첫닭의 울음 소리가 들려왔다. 이어 동네 닭들이 일제히 따라 울기 시작했다. 잠이 덜 깬 병졸들이 눈을 비비며 관문을 열자 맹상군 일행은 함곡관 문을 나와 말에 채찍을 가하여 쏜살같이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추격병이 관문에 닿은 것은 바로 그 직후였다고 한다.
Board 고사성어 2022.01.07 風文 R 79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