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참 가슴 찡한 이야기 - 황지니 비누거품에 이는 무지개를 사랑합니다. 50여 년 동안 장님이었던 다알 교수에게 새롭게 펼쳐진 세계는 놀라움과 기쁨이었고 하얀 비누거품이 쏟아지는 무지개색의 빛나는 색채를 볼 수 있는 접시닦는 일조차 큰 기쁨이었습니다. '나에게는 한쪽 눈밖에는 없다. 그 한쪽 눈도 심한 상처 때문에 나는 왼쪽 눈 끝의 작은 틈으로 사물을 본다. 그러므로 책을 읽을 때에는 책에 얼굴을 깊숙이 박고 되도록 한쪽 눈을 왼쪽으로 쏠리도록 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것은 50 년 동안 거의 장님이었던 B. 다알의 '나는 보고 싶었다'라는 책에 나오는 글입니다. 그녀는 어렸을 때 동무들과 돌차기를 하며 노는 것을 좋아했습니다. 그러나 그녀에게는 땅에 쳐진 금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다른 아이들이 전부 집으로 돌아간 뒤에는 땅바닥을 기다시피 하면서 금을 찾아 헤맸습니다. 그리고는 땅바닥의 금을 구석구석까지 머릿속에 넣어 버렸습니다. 그리고 얼마 후에는 집에서 책을 읽는 것도 배웠으나 큰 활자의 책도 눈썹에 닿을 정도로 가깝게 해서 보지 않으면 안 될 정도의 시력이었으나 그녀는 미네소타 대학의 문학사와 콜롬비아 대학의 문학석사 학위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미네소타주의 한 가난한 마을 학교의 교사가 되었으며 마침내 오거스타나대학의 신문학과와 문학과의 교수가 되었습니다. 그녀는 거기서 12 년간 강의를 했고 라디오 방송도 맡아 했습니다. 1943 년 그녀가 52세 때 그녀에게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유명한 '마요진료소'에서 수술한 결과 지금까지보다 40배나 잘 볼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새로운 세계가 그녀 앞에 펼쳐졌습니다. 그녀에게는 접시 닦는 일까지도 기쁨이었습니다. '나는 접시 위에 부드러운 하얀 비누거품과 장난친다. 그 속에 손을 넣고 비누거품을 떠올리는 것이다. 그것을 떠올려 햇빛에 비치면 그 하나하나 속에 작은 무지개색의 빛나는 색채를 볼 수 있다'라고 그녀는 쓰고 있습니다. 그녀는 저서의 마지막 페이지를 다음과 같이 맺고 있습니다. '사랑의 신 하느님이시여, 하늘에 계신 우리들의 아버지시여, 나는 당신에게 감사드립니다.' 적은 모래의 변위도 때가 되면 깊은 강줄기를 바꿀 수 있다. (M. 곤질레스 프리다)
Board 삶 속 글 2021.10.31 風文 R 711
작은 이야기 2 - 정채봉, 류시화 엮음 1. 평범한 행복 2 싸움의 가치 - 정명숙 대학 시절에 아르바이트로 기자 생활을 한 것이 인연이었다. 작가 한 분에게 원고를 청탁하러 찾아 다니면서 몇 번이나 허창을 쳤다. 더구나 교통 수단이라곤 걷는 것밖에 없던 부산 피난 시절이었다. 울상이 되어 거의 단념하려 할 때 탈고를 했노라며 전달식을 하자는 연락이 왔다. 고급 레스토랑에 불려가 양식을 먹으면서 작가가 묻는 대로 띄엄띄엄 신세 타령을 했다. 1,4후퇴 때 월남한 탓에 영어 실력이 모자라 고민이라는 고백도 했다. 그러자 그 작가가 말했다. "그래? 내 집에 매일 오라구. 개인 지도를 해줄 테니." 나는 구세주를 만난 듯이 고마워서 시키는 대로 했다. 작가는 독신으로 어린 두 아들을 데리고 자취 생활을 하고 있었다. 나는 한 자라도 더 배울 욕심에 매일 저녁 찾아가서는 빨래와 청소, 취사까지도 거들어 준 뒤 영어 몇 줄을 배우곤 했다. 그리고 우리는 결혼했다. 전쟁이 끝나고 서울로 돌아온 뒤 '학생 엄마'는 전처 소생의 아들 둘을 기르느라고 여간 힘들지 않았다. 이가 들끓는 개구쟁이의 옷은 아무리 빨아도 소용없어 태워 버려야 했고, 시장에 나가 구호 물자 중에서 얼추 맞을 만한 옷을 골라다 서투른 솜씨로 개조해서는 학교에 입혀 보냈다. 하지만 고학년이 되자 이유 없는 반항을 하는 데는 무척 서운했다. 계모에 대한 반항이었다. 당시 아이들 사이에는 시간제로 자전거를 빌려 타는 놀이가 성행하고 있었다. 한 번은 저녁때가 지났는데도 자전가를 타고 나간 큰아이가 돌아오지 않았다. 찾아 나섰더니 친구 아이들 말이 자전가를 타다가 부닺혀 어떤 어른의 코트를 찢은 탓에 잡혀 갔다는 것이었다. 상대를 거칠고 무식하기로 동네에서 소문난 사내였다. 사과도 할 겸 변상을 하려고 찾아갔더니 아니가 마루에 꿇어앉은 채 훌쩍훌쩍 울고 있었다. 애쓰고 찾아 다닌 일도 분한 데다가 내 신세 내 설움이 복받쳐 나는 죽기 살기로 싸움을 벌였다. 정말이지 이 싸움에서 죽어도 좋다는 만만한 투지로 악을 쓰며 덤비고 욕설을 퍼부었다. "그 코트가 대체 몇 푼짜리이길래 무슨 권한으로 남의 집 귀한 애를 잡아다가 폭행을 가하는 거야?" 울면서 불꽃처럼 대드는 '학생 엄마' 앞에 '적'은 마침내 굴복하고 말았다. 그뿐이었다. 아들과 나 사이에는 아무런 대화도 없었다. 나는 그 애를 야단치지도 않았고, 아이 역시 비슷한 건 하지 않았다. 그런데 이심전심이었을까, 그 뒤부터는 반항이 사라졌다. 아들이 대학을 마치고 군복무를 끝내고 취직이 되기까지 우리 사이에는 아무 문제가 없었다. 비밀스런 의논까지 아버지를 제쳐놓고 나에게 의논하는 아들이 되었다. 이제서른 살이 넘은 아들은 아버지보다 10센티미터나 더 큰 늠름한 모습으로, 대기업의 한 부서의 채깅ㅁ을 맡고 있다. 분가를 했지만 가끔 찾아오면 내 앞에서 응석을 부린다. 아버지와는 별로 대화가 없지만 내게는 시시콜콜한 생활 보고로 밤 가는 줄을 모른다. 이 대견스런 보람은, 내가 난생처음으로 단 한 번 벌였던 혈투의 결과일 것이다. 아니, 싸움을 통한 마음과 마음의 접근인 것이다. (명지대 강사)
Board 삶 속 글 2021.10.31 風文 R 507
외부인과 내부인 한 사회의 구성원이 되면 여러 가지 문제나 사건에 참여할 권리가 생긴다. 따라서 광범위한 참여가 있을수록 기능이 왕성해지는 정치, 시장, 종교 같은 영역에서는 많은 사람의 참여를 북돋우며 길에서 전단지를 나눠주기까지 한다. 가능한 한 많은 외부인을 내부로 끌어들이려 하는 것이다. 그러나 서로의 이해관계를 조정하는 영역에서는 내부인들끼리도 매우 절도 있게 행동해야 한다. 이익과 우선권을 분배하는 과정에서는 ‘결정권자’와 ‘의뢰인’ 사이에 신뢰와 절제를 갖추며 규율과 질서를 지키는 일이 중요하고, 그러지 못할 경우에는 외부인보다 더 위험한 일을 저지르기 쉽기 때문이다. 이러한 당연한 질서가 흔들리는 모습을 최근에 자주 보게 된다. 넓은 의미의 안보 관련 대중 집회에 말씨가 다른 사람이 참석했다 해서 혹시 ‘불순’한 사람이 끼어든 것이 아닌지 오해하는 경우가 있었다. 말씨의 차이는 당면한 문제를 해결하는 데 별다른 장애가 되지 않는다. 오히려 이러한 선입관이 문제 해결을 그르친다. 또 다른 경우 지역구 공천과 관련된 일로 주고받은 통화 내용이 그 공정성에 의문을 가지게 만든 경우가 나타나기도 했다. 이것은 반대로 간여할 일과 하지 말아야 일을 구별하지 못한 경우에 해당한다. 즉 ‘외부인’으로서 개입한 것이다. 더구나 ‘형’이니 하는 호칭을 사용하여 전반적인 공식 절차가 사사로이 흘러갔음을 노골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근본 질서가 흔들린 것이다. 인간관계도 그러하지만 사회 구조와 질서 역시 한시도 흐트러지지 않고 빈틈없이 다듬어야 반듯하게 유지된다. 잠시라도 “나 하나쯤이야” 하며 방심하는 순간에 사회적 균열이 오게 되어 있다. 사회의 통합은 지도자 못지않게 개별 구성원의 태도가 매우 중요하다. 김하수/한겨레말글연구소 연구위원·전 연세대 교수
개헌을 한다면 우리의 헌법을 들여다보면 아쉬운 점이 있다. 문화에 대해서 겨우 한 조항(9조), 교육에 대해서도 겨우 한 조항(31조), 그러고는 나머지 대부분이 권력을 어떻게 나눌 것인가에 집중되어 있다. 헌법 자체의 성격이 우리와는 사뭇 다르지만 그래도 북한의 헌법에는 문화와 교육 부문에 무려 20개 가까운 조항들이 들어가 있다. 한동안 정치권에서 개헌 이야기가 들리더니 또 조용해진다. 이렇게 중요한 문제를 정치인들에게만 맡겨 놓으면 보나마나 또 권력 문제만 논의할 것이다. 이럴 때 그저 그런 보통 사람들의 생각도 한번 모아 보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일단 너무 큰 기대는 하지 말고 한 가지씩 꿈을 이야기해 보자. (새) 헌법에 언어에 대한 조항을 마련한다면 무엇을 넣는 게 좋을까? 아마도 욕설을 금지하자는 둥, 표준어를 더욱더 강화하자는 둥, 또는 외래어를 못 쓰게 하고 순수한 우리 어휘를 살리도록 하자는 둥 하는 다양한 의견이 나올 것이다. 그러나 언어를 악용함으로 말미암아 사회에 대한 신뢰가 결정적으로 망가지게 되는 그 밑뿌리에는 분명히 공직자들이 하는 거짓말이나 오리발 내밀기, 또 더 나아가 유체이탈식 표현과 허위 선거 공약들이 둥지 틀고 있지 않은가? 지금까지 우리는 정치인들의 언어를 믿고 지지를 해 주었으나 결국은 배신당하는 경우가 참으로 많았다. 그러면서도 그릇된 언어 사용을 문제 삼아 형벌을 준다는 것은 별로 생각해 본 일이 없다. 그러나 보통 사람이 아닌 공직자들의 언어 왜곡은 아무리 보아도 다수를 향한 절도나 사기와 별 차이가 없다. 그리고 공동체를 향한 신뢰에 가장 치명적 상처를 내고 있다. 언어를 그릇되게 쓴 공직자에게 책임을 묻고 벌할 수 있는 무언가의 근거가 헌법에 명시된다면 좀 더 나은 사회가 되지 않을까? 김하수/한겨레말글연구소 연구위원·전 연세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