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 방황은 큰 사람을 낳는다 - 마 데바 와두다 56. 지성 <사물이 없는 곳이 아니라, 있는 곳을 보라. 어둠 속일지라도. 속안을 보라> 어느 날 저녁, 라비아가 자신의 오두막집 앞 길가에서 뭔가를 찾고 있는 것을 사람들이 발견하였다 사람들이 몰려갔다 라비아는 가난한 할머니였다. <무슨 일이세요? 뭘 찾으시죠?> 라비아가 말하기를, <바늘을 잃었어> 그래서 사람들은 라비아를 도와 바늘을 찾기 시작했다. 얼마 후 한 사람이 물었다. <라비아 할머니 날이 저물어 곧 어두워질 거예요 이렇게 넓은 데서 조그마한 바늘 하나를 어떻게 찾을 수 있겠어요 그걸 어디다 떨어뜨리셨는지 혹 모르세오?> 라비아가 말하기를, <엉, 집안에서 떨어뜨렸어> 사람들이 어이없는 듯 외쳤다. <이런, 그럼 이게 대체 무슨 짓이예요? 집안에다 떨어뜨린 걸 왜 여기서 찾는단 말예요?> 라비아가 말하기를, <여기가 밝기 때문이지 집안은 어두워> 한 사람이 물었다 <이런, 아무리 밝아도 그렇지, 여기서 잃은 적도 없는 바늘을 어떻게 찾는단 말예요? 집안에다 불을 밝히고 찾으면 되잖아요> 라비아가 웃으며 말하기를, <아주 똑똑한 양반들이구먼. 작은 일에는 말이지. 근데 그대들 내적 삶에서는 어떻던가? 죄다 바깥에서만 찾지 않던가. 그대들이 찾는 그것들이란 안에서 잃어 버린 게 아니던가 머리를 바로 쓰게들! 왜 바깥에서 은총을 찾는가? 거기서들 잃어버렸는가?> 사람들은 깜짝 놀라 멍청히 서 있었고, 라비아는 슬며시 집안으로 사라졌다.
Board 추천글 2021.10.28 風文 R 1164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참 가슴 찡한 이야기 - 황지니 우리 며느리 만세! 서울 어느 산동네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버스가 다니는 큰길에서 비탈길과 계단을 20분 정도 올라야만 골목 어귀에 들어설 수 있는 이 작은 산동네에 팔순 시어머니를 모시고 사는 며느리가 있었습니다. 산동네의 살림이 대개 그렇듯이 빠듯하게 꾸려나가는 생활 속에서도 시어머니와 며느리는 큰소리 한번 내지 않고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하루는 주민등록증을 갱신하러 동회에 가야만 했는데 평소 문밖 출입이 자유롭지 못할 정도로 약했던 시어머니도 별 수 없이 길을 나서야 했습니다. 시어머니와 며느리는 한 낮의 무더위를 피하려고 오전에 서둘러 동회를 향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동회에 도착했을 땐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기다랗게 줄을 서서 자신의 차례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며느리가 병약한 노인을 모시고 이리저리 사람들에게 부대끼며 주민등록 갱신을 끝마쳤을 땐 이미 해는 중천에 떠 있었고 그냥 서 있기만 해도 땀이 흐를 정도 였습니다. 며느리는 힘겹게 몸을 추스리시는 시어머니를 모시고 집으로 되돌아가기 위해 비탈길을 향해 걷기 시작했습니다. 시어머니의 더딘 걸음으로 인해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 더욱 멀게 느껴지고 더위도 한층 심하게 느껴졌을 법도 한데 며느리의 얼굴에선 짜증스러움을 찾을 수 없었습니다. 자신을 껴안듯이 부축하는 며느리가 안쓰러워 맘이 급해진 시어머니는 무리하게 걸음을 재촉했습니다. 그러다가 오히려 더 오랜 시간을 길가에 앉아 쉬어야만 했습니다. 드디어 비탈길을 무사히 지나온 시어머니와 며느리는 그보다 더 힘든 계단 앞에서 망연하게 위를 바라보고 서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때까지 묵묵하게 걷기만 하던 며느리가 별안간 무슨 생각을 했는지 자신의 등을 시어머니 쪽으로 돌리고는 덥썩 시어머니를 업는 것이었습니다. 내내 며느리에게 미안했던 시어머니는 짐짓 싫은 듯 몸을 비틀며 내려오려고 애를 썼습니다. 며느리는 시어머니의 발버둥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계단을 씩씩하게 오르기 시작했다. 며느리는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이었지만 따뜻한 목소리로 시어머니를 달랬습니다. "어머니, 제 어깨를 꽉 잡으세요. 그렇게 몸을 움직이시면 집에 가서도 안 내려 드릴 거예요." 그러나 시어머니는 열 손가락에 물든 지문을 찍고 난 잉크가 며느리의 옷에 묻을세라, 손을 도리어 번쩍 쳐들고 머리만 며느리 등에 꼭 기대어 있는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만세를 부르듯 양팔을 번쩍 들어올린 채 업힌 시어머니와 이마에 땀방울이 송글송글 맺힌 채 계단을 오르는 며느리를 바라보던 산 동네 주민들의 얼굴에는 서서히 미소가 퍼져 나갔습니다.
Board 삶 속 글 2021.10.28 風文 R 542
작은 이야기 1 - 정채봉, 류시화 엮음 3 시련을 딛고 희망으로 살이 오르는 삶 - 이영희 '난 할 수 있어, 꼭 할 수 있어.' 김형희 씨는 이를 앙다물고 팔에 온 힘을 주었다. 그러나 휠체어를 미는 팔에는 아무런 감각이 없다. 약한 허리에 힘을 주기 위해 휠체어에 몸을 묶고 팔에 힘을 주지만, 오늘 아침만도 고꾸라지길 벌써 스무 번 남짓. 이 문턱만 넘으면 뭐든 내 힘으로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이렇게 힘이 들까. 넘어져도 아픔을 모르는 그녀지만 어머니, 아버지는 딸이 주저앉는 모습을 볼 때면 가슴이 무너진다. "혼자 힘으로 밥 먹으면 됐어. 휠체어도 살살 밀고 다닐 수 있잖니. 엄마 아빠는 더 바라는 게 없다. 애쓰지 말아라." 병원에서 퇴원한 지 1년. 목 아래 부분은 전혀 쓸 수 없다는 의사의 선고를 받고도 꾸준한 운동 끝에 보조기를 가지고 혼자 힘으로 밥 먹고 휠체어를 밀고 다니게 된 그녀. 하지만 휠체어를 밀고 방문턱을 넘는 것만은 아버지 힘을 빌려야 한다. 혼자 힘으로 문턱을 넘어 보겠다며 1년 넘게 아침마다 벌이는 그녀의 외로운 사투를 볼 수 없다고 어머니는 일찌감치 부엌 쪽으로 자리를 피하셨다. 눈자위가 붉어진 아버지만 고개를 돌린 채 그녀 곁을 지키고 있다. 그녀는 다시 한 번 힘을 모은다. 난 할 수 있어, 할 수 있어, 얼굴이 빨갛게 달아오른다. 허리가 꺾일 것만 같다. 해보자, 할 수 있어. 휠체어 바퀴가 힘겹게 문턱을 넘는다. 드르륵 쿵. 그녀가 콧김을 훅훅 뿜으며 "아빠!" 하고 부른다. 아버지가 고개를 돌려 쳐다본다. "해냈어요!" 걸음마를 처음 시작한 딸아이를 바라보는 아버지의 눈빛이 이럴까. 저 환한 눈빛. 어머니가 달려온다. 그녀는 씩 웃는다. "할 수 있다고 했잖아요." 교통사고가 나기 전까지만 해도 김형희 씨는 겨드랑이에 날개가 돋힌 듯 무대를 훨훨 날아다니던 아름다운 무용학도였다. 성균관대 무용학과 4학년. 현대무용을 전공하면서 지금은 해체된 서희앤 댄서즈의 단원으로 활약하는가 하면, 패션모델 일도 했다. 그러나 부모님과 두 오빠의 사랑을 듬뿍 받던 귀여운 막내인 그녀의 운명은 오랜만에 만난 여고 동창생이 바래다 주는 차를 타고 남태령 고갯길을 넘던 1992년 3월에 완전히 뒤바뀌고 말았다. 면허를 딴 지 한 달밖엔 안된 친구가 운전 미숙으로 중앙 분리대를 들이박고 말았던 것이다. 차는 붕떠 나뭇가지에 걸리고 안전벨트도 하지 않고 뒷좌석에 앉아 있던 그녀는 차 밖으로 팽개쳐졌다. 그녀가 정신을 차린 것은 병원으로 가는 차 안이었다. 그녀는 소리쳤다. "몸이 움직이지 않아. 움직일 수가 없어." 차는 새벽길을 달려 이 병원, 저 병원을 옮겨 다녔다. 하얀 병원 천장. 부산한 발자욱 소리. 열한 시간에 걸친 대수술. 병원에서 그녀는 경추 5, 6번 손상으로 인한 전신마비 진단을 받았다. "뼈가 으스러지며 중추신경을 건드렸어요. 환자는 목 아래 부분은 앞으로 전혀 움직일 수 없을 거예요. 물론 고통도 느낄 수 없겠지요." 의사의 설명을 듣고 어머니, 아버지는 스르르 주저앉고 말았다. 하나도 아프지 않은데 중환자실에 있는 게 싫다며, 빨리 퇴원시켜 달라고 조르는 현희한테 뭐라고 얘기를 해야 하나. 창 밖의 개나리꽃은 저리도 화사하게 피었는데 우리 현희는, 현희는... 수술이 끝난 후 그녀는 주사약 부작용으로 치사율이 25퍼센트에 이른다는 스티븐 존슨병까지 걸렸다. 피부가 허물처럼 벗겨지고 따가운 병. 목 수술로 잘 나오지 않는 말을 더듬거리며 그녀는 울먹였다. "엄마, 나 못 참아. 그만 살 거야." 딸의 사고 뒤에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그때부터 딸의 그림자가 된 어머니는 울며 말했다. "현희야, 너 엄마 사랑하지. 그럼 엄마랑 끝까지 같이 있자." 그녀는 다시 한 번 펑펑 울었다. 살갗이 찢어지는 아픔보다 더한 어머니의 사랑 때문이었다. 그녀는 이를 악물고 치료를 받았다. 1주일 뒤 그녀는 기적적으로 소생했다. 그리고 3개월 뒤, 일반 병실로 옮겼다. 여섯 명이 함께 쓰던 일반 병실에는 그녀와 비슷한 중환자가 많았다. 병에는 선배 격인 그들은 한결같이 그녀를 동정하고 '가망 없음'을 안타까워했다. 좋은 약 다 써봐도 전신마비는 절대 고칠 수 없다는 그들의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그녀는 자신의 처지가 처연해 울음을 터뜨렸다. 평생 동안 흘릴 눈물을 단번에 다 쏟아 버리듯 울어도 눈물은 멎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그녀는 침대 위로 쏟아져 들어오는 환한 빛살에 번쩍 눈을 떴다. 봄빛이, 찬란한 6월의 햇살이, 창문 틈으로 걷잡을 수 없이 밀려 들어오고 있었다. 그녀는 어머니를 졸라 휠체어를 타고 병원 마당으로 나갔다. 그녀가 병실에 누워 있는 사이에도 봄은 어김없이 찾아와 있었다. '살아 있는 모든 것은 모두 저렇게 자기 싹을 부지런히 틔워내는데 나는 뭘 하고 있는 거지. 나도 뭔가를 할 수 있을까. 나한테도 희망이 있을까... 이렇게 주저앉을 수는 없어. 그래, 시간은 걸리겠지만 나는 꼭 나을 수 있어.' 그녀는 희망의 싹을 다시 일구었다. 언젠가는 일어설 수 있을 것이라는, 목발을 짚더라도 제 힘으로 일어나고 말 것이라는 믿음의 싹이었다. 9개월 간의 병원 생활을 끝내고 집으로 돌아온 그녀는 먼저 손의 감각을 살릴 수 있는 운동을 시작했다. 바둑알이랑 콩을 집어 다른 통에 놓는 간단한 일이었지만, 콩 하나를 집어 옮기는 데도 아침 시간이 훌쩍 지나갔다. 아버지가 만들어 준 나무토막을 손으로 들어올리고, 휠체어도 살살 밀고, 보조기를 끼고 밥도 제 손으로 먹을 수 있게 되기까지 걸린 시간은 1년. 중학교 때부터 무용을 했던 데다 쉬지 않고 운동을 한 덕분에 전신마비라고 그녀의 병을 진단한 의사도 깜짝 놀랄 정도로, 더디지만 조금씩 감각이 살아났다. 손을 움직일 수 있게 되자 그녀가 도전한 것은 그림의 세계다. 국내에 두 곳뿐인 장애인 화실 <소울음>을 운영하는 최진섭 씨가 그녀를 그림의 세계로 이끌었다. 처음엔 같은 처지의 사람들을 만나면 새로운 운동 방법이라도 배울 수 있지 않을까 시작한 화실 걸음이었는데, 붓을 놀릴수록 색다른 맛을 느낄 수 있었다. 몸은 움직일 수 없었지만 캔버스에서만큼은 뭐든 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꽃이 되었다가 하늘을 훨훨 날 수도 있고, 그리고 무엇보다 무용을 할 수 있었다. 그녀가 주로 그리는 소재는 무용하는 여자이다. 발레복을 입은 우아한 자세의 여자, 한복을 곱게 차려 입고 살풀이 춤을 추는 여자... 그녀는 그림을 그리며 생각한다. '그래, 저 여인이 살아서 움직이는 때가 올 거야. 언제인지 모르지만 그래도 그날은 올 거야.' 김형희 씨의 그림은 전문가들로부터 '표현력이 뛰어나다'는 평가를 받으며 기량이 쑥쑥 자라났다. 장애인 초청 전시회 등 여섯 차례의 전시회를 거쳐 곰두리 미술 대공모전에서 입상하는 영예를 안았다. 언젠가는 부모님이 자신을 돌봐 주지 못하겠지만 그녀는 불안하거나 두렵지 않다. 사고를 당한 이후 마음이 한결 강해졌기 때문이자. 어제보다 손가락 하나를 더 움직였다고 뛸 듯이 기뻐하는 부모님이 있고, 화실 비용을 대주는 큰오빠, 그녀 때문에 결혼도 포기하겠다는 작은오빠가 있다. 오늘은 안양시 만안구에서 주최한 생활 수기 당선자가 모이는 날. 김형희 씨는 은상을 받아, 모처럼 장거리 외출에 나선다. 아파트 정문의 문턱은 다른 곳보다 높다. 휠체어를 미느라 애쓰는 그녀 뒤에서 어머니가 슬쩍 힘을 보태 준다. 그녀가 웃으며 말한다. "엄마, 내가 할게요." 김형희 씨는 언젠가는 걸어서 집 밖을 나서는 자신을 상상한다. 그 희망만으로도 그녀의 삶은 기쁨으로 충만해 있다. (샘터 차장)
Board 삶 속 글 2021.10.28 風文 R 745
난민과 탈북자 얼핏 보기엔 거의 같은 말 같아도 이것저것 따져 보면 사물을 보는 관점을 개선해야 할 경우가 있다. 6월20일은 ‘세계 난민의 날’이다. 넓은 의미에서 재난이나 고통스러운 일을 당해 피신하는 경우는 보통 ‘피난민’이라고 하지만 국경을 넘는 경우에는 ‘난민’이라고 부른다. 또 다른 특수한 경우가 탈북자의 경우이다. 어려운 상황을 피해서 왔으니 ‘피난민’이라고 할 만도 하고, 사실상의 국경을 넘어왔으니 ‘난민’이라고 할 만도 하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이도 저도 아닌 ‘탈북자’라는 특수한 이름이 주어졌다. 또 법적으로도 ‘특수한 대우’를 해 준다. 그래서 불가피하게 ‘정치적’인 판단과 ‘안보’에 연동된 조치를 받는다. 그러나 그렇다 하더라도 그 조치는 엄연히 법적인 틀과 윤리적인 공감대 안에서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탈북자들에게 보편적인 난민이 아닌 특수한 지위를 부여하는 것은 오로지 정치와 안보 문제만 생각한 것은 아닐 것이다. 일반적인 난민보다 더 특수한 차원에서 그들을 우대하고 더욱 인권친화적인 조치를 취하자고 하는 암묵적인 동의가 있었던 것이 아닌가? 그런 점에서 그들의 처지에 도움이 될 만한 언론인들과 변호사들, 그리고 사회봉사자들과는 ‘개방적인 연결’이 필요하다. 그것마저 막는다면 ‘탈북’의 긍정적인 가치를 훼손하고 만다. 그들이 고향을 떠나 난민의 길을 선택한 것이 특별한 이해관계 때문이 아니었다면, 그리고 진정 인간적인 대우를 갈구한 결과였다면, 당연히 그들에게 민주적이고 인도적인 대우를 보장해 주어야 한다. 어려움에 처한 사람들을 정치적으로만 이용하고 인도적으로 외면하는 듯한 인상을 준다면 차라리 그들을 국제적인 표준에 의한 보편적 ‘난민’으로 대우하도록 하는 것이 더욱 인도적인 방법이 될 것이다. 김하수 한겨레말글연구소 연구위원·전 연세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