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이야기 1 - 정채봉, 류시화 엮음
3 시련을 딛고
희망으로 살이 오르는 삶 - 이영희
'난 할 수 있어, 꼭 할 수 있어.' 김형희 씨는 이를 앙다물고 팔에 온 힘을 주었다. 그러나 휠체어를 미는 팔에는 아무런 감각이 없다. 약한 허리에 힘을 주기 위해 휠체어에 몸을 묶고 팔에 힘을 주지만, 오늘 아침만도 고꾸라지길 벌써 스무 번 남짓. 이 문턱만 넘으면 뭐든 내 힘으로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이렇게 힘이 들까. 넘어져도 아픔을 모르는 그녀지만 어머니, 아버지는 딸이 주저앉는 모습을 볼 때면 가슴이 무너진다.
"혼자 힘으로 밥 먹으면 됐어. 휠체어도 살살 밀고 다닐 수 있잖니. 엄마 아빠는 더 바라는 게 없다. 애쓰지 말아라."
병원에서 퇴원한 지 1년. 목 아래 부분은 전혀 쓸 수 없다는 의사의 선고를 받고도 꾸준한 운동 끝에 보조기를 가지고 혼자 힘으로 밥 먹고 휠체어를 밀고 다니게 된 그녀. 하지만 휠체어를 밀고 방문턱을 넘는 것만은 아버지 힘을 빌려야 한다. 혼자 힘으로 문턱을 넘어 보겠다며 1년 넘게 아침마다 벌이는 그녀의 외로운 사투를 볼 수 없다고 어머니는 일찌감치 부엌 쪽으로 자리를 피하셨다. 눈자위가 붉어진 아버지만 고개를 돌린 채 그녀 곁을 지키고 있다. 그녀는 다시 한 번 힘을 모은다. 난 할 수 있어, 할 수 있어, 얼굴이 빨갛게 달아오른다. 허리가 꺾일 것만 같다. 해보자, 할 수 있어. 휠체어 바퀴가 힘겹게 문턱을 넘는다. 드르륵 쿵. 그녀가 콧김을 훅훅 뿜으며 "아빠!" 하고 부른다. 아버지가 고개를 돌려 쳐다본다.
"해냈어요!"
걸음마를 처음 시작한 딸아이를 바라보는 아버지의 눈빛이 이럴까. 저 환한 눈빛. 어머니가 달려온다. 그녀는 씩 웃는다.
"할 수 있다고 했잖아요."
교통사고가 나기 전까지만 해도 김형희 씨는 겨드랑이에 날개가 돋힌 듯 무대를 훨훨 날아다니던 아름다운 무용학도였다. 성균관대 무용학과 4학년. 현대무용을 전공하면서 지금은 해체된 서희앤 댄서즈의 단원으로 활약하는가 하면, 패션모델 일도 했다. 그러나 부모님과 두 오빠의 사랑을 듬뿍 받던 귀여운 막내인 그녀의 운명은 오랜만에 만난 여고 동창생이 바래다 주는 차를 타고 남태령 고갯길을 넘던 1992년 3월에 완전히 뒤바뀌고 말았다. 면허를 딴 지 한 달밖엔 안된 친구가 운전 미숙으로 중앙 분리대를 들이박고 말았던 것이다. 차는 붕떠 나뭇가지에 걸리고 안전벨트도 하지 않고 뒷좌석에 앉아 있던 그녀는 차 밖으로 팽개쳐졌다. 그녀가 정신을 차린 것은 병원으로 가는 차 안이었다. 그녀는 소리쳤다.
"몸이 움직이지 않아. 움직일 수가 없어."
차는 새벽길을 달려 이 병원, 저 병원을 옮겨 다녔다. 하얀 병원 천장. 부산한 발자욱 소리. 열한 시간에 걸친 대수술. 병원에서 그녀는 경추 5, 6번 손상으로 인한 전신마비 진단을 받았다.
"뼈가 으스러지며 중추신경을 건드렸어요. 환자는 목 아래 부분은 앞으로 전혀 움직일 수 없을 거예요. 물론 고통도 느낄 수 없겠지요."
의사의 설명을 듣고 어머니, 아버지는 스르르 주저앉고 말았다. 하나도 아프지 않은데 중환자실에 있는 게 싫다며, 빨리 퇴원시켜 달라고 조르는 현희한테 뭐라고 얘기를 해야 하나. 창 밖의 개나리꽃은 저리도 화사하게 피었는데 우리 현희는, 현희는... 수술이 끝난 후 그녀는 주사약 부작용으로 치사율이 25퍼센트에 이른다는 스티븐 존슨병까지 걸렸다. 피부가 허물처럼 벗겨지고 따가운 병. 목 수술로 잘 나오지 않는 말을 더듬거리며 그녀는 울먹였다.
"엄마, 나 못 참아. 그만 살 거야."
딸의 사고 뒤에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그때부터 딸의 그림자가 된 어머니는 울며 말했다.
"현희야, 너 엄마 사랑하지. 그럼 엄마랑 끝까지 같이 있자."
그녀는 다시 한 번 펑펑 울었다. 살갗이 찢어지는 아픔보다 더한 어머니의 사랑 때문이었다. 그녀는 이를 악물고 치료를 받았다. 1주일 뒤 그녀는 기적적으로 소생했다. 그리고 3개월 뒤, 일반 병실로 옮겼다. 여섯 명이 함께 쓰던 일반 병실에는 그녀와 비슷한 중환자가 많았다. 병에는 선배 격인 그들은 한결같이 그녀를 동정하고 '가망 없음'을 안타까워했다. 좋은 약 다 써봐도 전신마비는 절대 고칠 수 없다는 그들의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그녀는 자신의 처지가 처연해 울음을 터뜨렸다. 평생 동안 흘릴 눈물을 단번에 다 쏟아 버리듯 울어도 눈물은 멎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그녀는 침대 위로 쏟아져 들어오는 환한 빛살에 번쩍 눈을 떴다. 봄빛이, 찬란한 6월의 햇살이, 창문 틈으로 걷잡을 수 없이 밀려 들어오고 있었다. 그녀는 어머니를 졸라 휠체어를 타고 병원 마당으로 나갔다. 그녀가 병실에 누워 있는 사이에도 봄은 어김없이 찾아와 있었다. '살아 있는 모든 것은 모두 저렇게 자기 싹을 부지런히 틔워내는데 나는 뭘 하고 있는 거지. 나도 뭔가를 할 수 있을까. 나한테도 희망이 있을까... 이렇게 주저앉을 수는 없어. 그래, 시간은 걸리겠지만 나는 꼭 나을 수 있어.' 그녀는 희망의 싹을 다시 일구었다. 언젠가는 일어설 수 있을 것이라는, 목발을 짚더라도 제 힘으로 일어나고 말 것이라는 믿음의 싹이었다. 9개월 간의 병원 생활을 끝내고 집으로 돌아온 그녀는 먼저 손의 감각을 살릴 수 있는 운동을 시작했다. 바둑알이랑 콩을 집어 다른 통에 놓는 간단한 일이었지만, 콩 하나를 집어 옮기는 데도 아침 시간이 훌쩍 지나갔다. 아버지가 만들어 준 나무토막을 손으로 들어올리고, 휠체어도 살살 밀고, 보조기를 끼고 밥도 제 손으로 먹을 수 있게 되기까지 걸린 시간은 1년. 중학교 때부터 무용을 했던 데다 쉬지 않고 운동을 한 덕분에 전신마비라고 그녀의 병을 진단한 의사도 깜짝 놀랄 정도로, 더디지만 조금씩 감각이 살아났다. 손을 움직일 수 있게 되자 그녀가 도전한 것은 그림의 세계다. 국내에 두 곳뿐인 장애인 화실 <소울음>을 운영하는 최진섭 씨가 그녀를 그림의 세계로 이끌었다. 처음엔 같은 처지의 사람들을 만나면 새로운 운동 방법이라도 배울 수 있지 않을까 시작한 화실 걸음이었는데, 붓을 놀릴수록 색다른 맛을 느낄 수 있었다. 몸은 움직일 수 없었지만 캔버스에서만큼은 뭐든 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꽃이 되었다가 하늘을 훨훨 날 수도 있고, 그리고 무엇보다 무용을 할 수 있었다. 그녀가 주로 그리는 소재는 무용하는 여자이다. 발레복을 입은 우아한 자세의 여자, 한복을 곱게 차려 입고 살풀이 춤을 추는 여자... 그녀는 그림을 그리며 생각한다. '그래, 저 여인이 살아서 움직이는 때가 올 거야. 언제인지 모르지만 그래도 그날은 올 거야.' 김형희 씨의 그림은 전문가들로부터 '표현력이 뛰어나다'는 평가를 받으며 기량이 쑥쑥 자라났다. 장애인 초청 전시회 등 여섯 차례의 전시회를 거쳐 곰두리 미술 대공모전에서 입상하는 영예를 안았다.
언젠가는 부모님이 자신을 돌봐 주지 못하겠지만 그녀는 불안하거나 두렵지 않다. 사고를 당한 이후 마음이 한결 강해졌기 때문이자. 어제보다 손가락 하나를 더 움직였다고 뛸 듯이 기뻐하는 부모님이 있고, 화실 비용을 대주는 큰오빠, 그녀 때문에 결혼도 포기하겠다는 작은오빠가 있다. 오늘은 안양시 만안구에서 주최한 생활 수기 당선자가 모이는 날. 김형희 씨는 은상을 받아, 모처럼 장거리 외출에 나선다. 아파트 정문의 문턱은 다른 곳보다 높다. 휠체어를 미느라 애쓰는 그녀 뒤에서 어머니가 슬쩍 힘을 보태 준다. 그녀가 웃으며 말한다.
"엄마, 내가 할게요."
김형희 씨는 언젠가는 걸어서 집 밖을 나서는 자신을 상상한다. 그 희망만으로도 그녀의 삶은 기쁨으로 충만해 있다. (샘터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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