牝鷄司晨(빈계사신) 牝(암컷 빈) 鷄(닭 계) 司(맡을 사) 晨(새벽 신) 상서(尙書) 목서(牧誓)의 이야기. 은(殷)나라 말기 주왕(紂王)의 폭정이 심해지자, 주(周)나라 서백(西伯)의 아들 발(發)은 주왕을 토벌하고자 하였다. 발은 목(牧) 땅에 이르러 군사들을 격려하며 훈시를 시작하였다. 나를 따르는 제후와 용사들이여. 그대들의 창을 들고, 그대들의 방패를 나란히 하며, 그대들의 긴 창을 세우시오. 내 훈시를 하겠소. 옛사람들은 이렇게 말했소. 암탁은 아침을 알리지 않는 것이니, 암탉이 아침을 알리면 집안이 망한다 고 하였소. 지금 은나라의 주왕은 오직 여자의 말만 듣고, 마땅히 제사를 지내야할 분들을 버리고 보답하지 않고 있으며, 살아 있는 임금의 부모형제들도 버렸소. 뿐만 아니라 사방에서 죄를 짓고 도망온 자들을 공경하며 믿고 그들에게 벼슬자리를 주고 있소. 그는 백성들에게 포학한 짓을 일삼으며 나라를 어지럽히고 있소. 지금 나는 오직 하늘의 벌을 주려고 하는 것이오. 용사들이여, 힘을 내시오. 牝鷄司晨 이란 여자가 기승을 부림 비유한 말이다. 얼마 전 한 여인 때문에 곤경에 처했던 미국의 대통령.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순리에 어긋나면 뒷탈(?)이 생기는 법이다. ………………………………………………………………………………………………………………
Board 고사성어 2021.09.13 風文 R 1040
언어적 주도력 북한이 핵실험을 한 이후에는 정치권 한구석에서 “우리도 핵무장을…” 하는 소리가 나온다. 이해를 하자면 핵의 필요를 말했다기보다는 북한의 핵실험에 대한 분노를 터뜨리는 말일 것이다. 그러나 전문가들의 말을 들으면 우리 사정으로는 독자적인 핵개발은 어림도 없는 모양이다. 그런 것을 모르고 한 말도 아닐 것이고 알면서도 했다면 또 딴 의도가 있는 말이 아닌가 한다. 핵무기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 독일의 나치스는 로켓을 개발하여 런던을 쑥밭으로 만들었다. ‘무기의 질’로는 훨씬 우월했으나 진보와 해방을 원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얻지는 못하였다. 일본제국의 무기도 결코 뒤떨어지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들의 정치와 사회 제도가 남들에게 모범이 되지는 못했다. 살상력보다 더 중요한 무기는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새로운 가치나 태도다. 그것을 주도하는 새로운 주장과 요구는 늘 더 큰 역할을 해왔다. 영국은 노예장사로 돈을 실컷 벌고 나서 노예제도 폐지를 주장했다. 눈치 없이 노예무역에 집중했던 포르투갈이나 아랍은 삽시간에 밀려났다. 식민지로 이익을 충분히 본 세력들이 식민지 해방을 지지해서 후발 식민주의 세력을 몰락시켰고, 공화정과 민주주의를 선행학습한 집단이 왕정사회를 미개사회로 규정하고 흔들어댔다. 무기보다 더 중요한 것은 사람들의 마음을 어떠한 가치 지향으로 끌어내느냐 하는 문제다. 그래서 사람의 마음과 경외심을 얻어낸 제도와 공동체가 최고의 무기가 되곤 했다. 우리가 더 고급 기술과 첨단 지식을 갖추는 것도 중요하지만, 또한 역사를 진보시키는 의사결정 과정에 주도적인 역할을 하는 것이 더 큰 가치와 효과가 있다. 핵개발보다 돈도 덜 들고 효과도 높으며 문화 수준도 높이는 고도의 능력이다. 그러한 능력도 없이 핵무기만 가지면 세계가 무서워하는 강대국이 될 줄 알고 덤비다가는 오히려 자멸의 길로 가게 될 것이다. 김하수 한겨레말글연구소 연구위원·전 연세대 교수
악담의 악순환 남과 북에서 벌어지는 갈등은 짜증과 감정으로 다룰 문제가 아니다. 자칫 작은 분노가 엄청난 사건으로 번질 수 있기 때문이다. 제1차 세계대전이 그런 식으로 터졌고, 그 결과는 참혹했다. 분노의 폭발보다 상황의 안전한 관리가 더 필요하다. 화날 때마다 화내고, 짜증날 때마다 흥분하는 짓은 사춘기로 끝을 내야 성인이 된다. 언어는 착한 구실만 하는 도구가 아니다. 남들에게 악담이나 험담을 할 때는 거의 흉기나 다름없다. 남한테 모진 말을 하면 거꾸로 자신에게도 안 좋은 말이 돌아오게 마련이다. 그래서 생각 있는 사람들은 못마땅한 일이 있거나 속이 끓는 일이 있어도 험한 말을 삼가고 마음을 조용히 삭인다. 감정의 기복을 드러내기보다는 전체의 판세를 안정시킬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적대적인 갈등을 이용하여 판세를 유리하게 끌고 싶을 때는 상대방을 약 올리고 싶어진다. 약이 오른 사람들은 상황을 냉정하게 판단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현명한 사람들은 약이 올라도 약이 안 오른 척한다. 그래야 약을 올리려는 사람들이 제풀에 주저앉는다. 수가 낮은 사람들은 상대방이 약을 올리면 펄펄 뛰면서 흥분한다. 그래서 상대방을 같이 욕해 주는 사람의 편을 들게 마련이다. 그리고 사태를 그르치고 손해를 뒤집어쓴다. 결국은 같이 상대방을 욕하면서 자신을 흥분시킨, 그래서 자신이 편들었던 사람한테까지 이용당하기 쉽게 된다. 말을 순하게, 착하게 하는 것이 옳다고 하는 것은 고루한 도덕률을 지키기 위한 것이 아니다. 악담의 악순환에 빠지게 되면 결국은 약을 올린 사람만이 이익을 보고 약올라했던 사람들은 이용만 당하기 때문에 그러한 사태를 경계하는 교훈이다. 남과 북의 갈등은 그렇기 때문에 흥분 상태에서 해결하려 할 것이 아니라 냉정하게, 깊은 계산을 하면서 조심조심 다가서야 하는 일이다. 그것이 가장 이익이 많이 남는 전략이다. 김하수 한겨레말글연구소 연구위원·전 연세대 교수 ………………………………………………………………………………………………………………
Board 추천글 2021.09.10 風文 R 969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참 가슴 찡한 이야기 - 황지니 보람을 얻기까지 셀멘, 와크스맨은 항생제 스트렙토마이신을 발명한 의학박사입니다. 그는 의학 발전의 공적이 인정되어 노벨상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로 인해서 그의 명예는 더욱 빛나게 되었고 사람들의 존경과 부러움을 한몸에 받았습니다. 와크스맨 박사는 노벨상을 받기 위해 스톡홀름으로 갔습니다. 그곳에서 와크스맨 박사는 의외의 방문객을 맞게 되었습니다. 와크스맨 박사를 찾아온 방문객은 젊은 아버지와 그의 어린 딸로 아버지는 기계공으로 일하는 사람이었습니다. 허름한 작업복을 입은 아버지의 손을 꼬옥 잡고 있던 어린 소녀의 가슴에는 다섯 송이의 예쁜 카네이션이 안겨 있었습니다. 소녀가 아버지의 얼굴을 바라보자 젊은 기계공은 딸에게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를 지었습니다. 그러자 어린 소녀는 와크스맨 박사의 품에 안기며 다섯 송이의 꽃을 전해 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자 어린 딸을 지켜보며 아버지가 말했습니다. "이 꽃 다섯 송이는 제 딸아이 생명의 각 일 년씩을 뜻합니다. 딸애는 5 년 전 뇌막염에 걸려서 도저히 살 수 없다는 진단을 받았습니다. 절망에 빠져 있는데 마침 와크스맨 박사께서 스트렙토마이신을 발명하셨습니다. 덕분에 딸애는 이렇게 살아날 수 있었답니다. 이 일은 5 년 전의 일이었지요." 소녀는 와크스맨 박사의 얼굴에 입을 맞췄습니다. 와크스맨 박사는 젊은 아버지의 말을 듣고 다섯 송이의 카네이션을 감회에 젖은 눈으로 바라본 뒤 소녀를 꼭 끌어안았습니다. 그는 노벨상을 수상한 후 기자회견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오늘 스웨덴의 아돌프 황제로부터 받은 노벨상은 제게는 과분한 영광입니다. 그런데 어린 소녀가 안겨 준 다섯 송이의 카네이션이야말로 제에게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벅찬 영광과 명예를 안겨줬습니다." 명예를 황금보다 귀중히 여기는 자는 거의 없다 To few is honor dearer than gold. (실루스티우스) @ff
Board 추천글 2021.09.10 風文 R 1389
작은 이야기 1 - 정채봉, 류시화 엮음 3 시련을 딛고 하늘을 새처럼 날 수만 있다면 - 최미란 나는 스물다섯 살의 반신불수이다. 이 세상에 태어나서 한 번도 땅을 디뎌 본 적이 없다. 늘 누군가에게 업혀지고 안겨져서 움직여야 한다. 처음부터 우리 가정이 불행했던 것은 아니다. 내가 태어난 것은 1960년 5월, 강원도 양구라는 곳에서였다. 아버지는 당시 육군대위였다. 지금도 군복을 입으신 아버지와 예쁜 엄마와 함께 찍은 내 백일 사진을 들여다보면 운명이란 참 알 수 없는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한없이 행복했던 우리들에게 이런 큰 불행이 도사리고 있을 줄 누가 알았겠는가. 돌이 지나면서 나는 열병을 앓았다. 병원에서는 단순한 감기라고 오진을 했지만, 나중에야 소아마비임을 알았을 때 이미 나는 목도 가누지 못하고 온몸이 축축 늘어지는 아주 심한 상태였다. 그후 치료를 계속했으나 끝내 하반신만은 영영 불구자 되어 버렸다. 학교 갈 나이가 되어도 갓난아기의 다리만큼밖에 자라지 않는 내 두 다리를 보고 엄마는 몇 번이나 함께 죽어 버리자고 했다. 곧 초등학교에 입학하였으나 엄마가 아니면 움직일 수가 없었다. 엄마가 업어다 교실에 앉혀 주고 끝나는 시간에 맞춰 다시 데리러 오셨던 것이 내 어릴 적 모습이다. 초등학교 2학년 때 아버지께서는 대위 계급으로 제대를 하셨다. 제대 후 아버지께서 시작한 사업은 다방 경영이었다. 아버지는 사회 경험이 없어 엄마도 함께 뛰셨다. 나와 동생들만이 있는 집안 꼴은 말이 아니었다. 부모님이 안 계실 동안 마냥 울어대는 두 동생을 바라보다 말고 함께 운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래도 그때는 얼마나 행복했던가. 집에 돌아오시기가 바쁘게 나를 끌어안고 뺨을 부비시던 아버지. 수염 끝이 따가워 앙탈을 부리면 아버지는 늘 껄껄 웃으셨다. 그후로 나는 관동 중학교에 입학했다. 1학년이라야 통틀어 두 학급밖에 안되는 남녀공학이었다. 시골이라서 도시 학생들에 견줄 수는 없었지만 나는 전체에서 7, 8 등을 했다. 그런데 3학년이 되면서 갑자기 아버지가 고혈압으로 쓰러지셨다. 회복이 되신 후에도 아버지는 몸이 예전처럼 건강하지 못하셨다. 우리 집은 또다시 어둠에 휩싸이기 시작했다. 업친데 덮친 격으로 다방마저 경영이 어려워졌다. 급기야 엄마는 세 동생을 데리고 서울로 올라가셨고, 나는 아버지와 함께 1년 동안을 그곳에서 살았다. 아버지는 불편한 몸으로 새벽같이 일어나 밥을 지어 놓고 내 옷가지를 빠시고, 나를 자전거에 태우고 20리 길을 달리셨다. 아버지는 나를 경희대학교 약학과에 보내고 싶다고 항상 말씀하셨다. 몸이 약하고 불편할수록 의지가 강해야 된다는 것, 이 세상에는 나보다 더 불편하고 가엾은 사람이 많다는 것, 그래도 내 곁에는 아버지가 항상 계실 거라는 말씀이 나를 행복하게 했다. 그러나 아버지는 나와의 약속을 끝내 지키지 못했다. 내가 중학교를 졸업하고 엄마를 따라 서울로 올라온 이듬해 6월, 갑자기 운명을 달리하시고 말았다. 중학교만 졸업하고 집에 있는 불구의 딸인 나와 고등학교 1학년인 장남, 중학교 1학년인 둘째딸과 초등학교에 갓 입학한 막내아들, 그리고 엄마. 엄마가 받으신 충격과 암담함이 어떠했을까. 공교롭게도 세 아이를 모두 학교에 입학만 시켜 놓고 눈을 감으신 아버지 때문에 엄마는 통곡을 하셨다. 하지만 마냥 실의에 빠져 있을 수는 없었다. 엄마는 어린 것들의 생존을 위해 동분서주하기 시작했다. 연탄 공장의 구내 식당에서 밥을 팔고, 길거리에서 튀김 장사도 하였다. 153센티미터가 채 될까말까 한 엄마의 키가 그후론 점점 줄어드는 것만 같았다. 그렇게 밤낮으로 일해 세 아이의 학비를 대고, 나를 포함한 우리 가족의 수발까지 도맡아 하시면서도 엄마는 한 번도 몸져 누우신 적이 없었다. 이 무렵 나는 학교에 다니는 아이들을 보고 부러움을 느끼기 시작했다. 차츰 나도 공부하고픈 생각이 일었다. 그러나 엄마가 얼마나 어렵게 우리 가정을 이끌어 가고 있는지를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으므로 나는 내가 계획한 속마음을 엄마에게 털어놓을 수 없었다. 정말로 공부가 하고 싶었다. 학교를 졸업한 지 7년, 그동안 책이라는 걸 들여다볼 기회가 없었지만 그래도 공부만은 정말 하고 싶었다. 며칠을 끙끙 앓다 간신히 엄마에게 내 뜻을 비쳤다. 뜻밖에도 엄마의 대답은 간단했다. "네 뜻이 정 그렇다면 한번 해보자구나." 마냥 죄송스러웠다. 작년 4월, 엄마는 스물다섯 살 난 큰 아기인 나를 업고 그동안 눈여겨보아 온 신설동에 있는 고시학원을 찾아가 입학 수속을 마쳤다. 내가 대입 검정고시반의 학생이 된 것이다. 엄마는 지금도 그렇지만 그 당시에도 석관동에서 조그만 분식점을 꾸려 가고 계셨기 때문에 나는 새벽반을 들어야 했다. 새벽 다섯 시 사십 분에 시작해서 여덟 시에 끝나는 수업을 듣기 위해 엄마와 나는 새벽 네 시면 별빛을 헤아리며 집을 나섰다. 수업 도중에 반을 옮기거나 화장실에 가고 싶으면 밖에서 서성거리시는 엄마의 손이 필요했다. 그렇게 1년을 보내고 올해부터는 야간반으로 자리를 옮겼다. 야간반은 저녁 여섯 시 삼십 분에 시작이었다. 하지만 그 시간은 학생 손님이 가장 많은 때였기 때문에 엄마와 나는 세 시부터 학원으로 갔다. 미리 나를 학원에 데려다 놓고 엄마는 다시 집으로 가 장사를 하시다가 밤 열 시에 데리러 오셨다. 나는 엄마의 등에 업혀 계단을 오르내릴 때마다 미안한 마음에 늘 새가 되는 꿈을 꾸었다. 아, 내 몸이 새라면 혹은 깃털처럼 가벼워질 수만 있다면! 1984년 8월에 있던 대입 검정고시가 내게는 1차 관문이었다. 그것이 제대로 실현되었으니 이제는 약학 대학에 가고 싶다. 엄마는 내가 한의사가 되었으면 하신다. 그러나 한의사가 약사가 어디 생각처럼 쉬운가. 우선은 실력도 문제지만 또 입학 정관에 불구자를 제한하는 학교도 많으니까. 하지만 나는 해낼 것이다. 비록 장애자지만 나도 뭔가 쓸모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 이제껏 도움만 받고 살아왔으니까. 이제는 남을 위해 도움을 줄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 (검정고시 합격 수기 집에서)
Board 삶 속 글 2021.09.10 風文 R 687
捉襟見肘 (착금견주) 捉(잡을 착) 襟(옷깃 금) 見(볼 견) 肘(팔꿈치 주) 장자 양왕(讓王)편의 이야기. 증자(曾子)가 위(衛)나라에 살고 있을 때, 그의 솜옷은 다 낡아서 껍데기가 없었으며, 그의 얼굴은 퉁퉁 부어 종기가 곪아 터졌으며, 손발은 트고 갈라져 있었다. 그의 집은 사흘 동안이나 불을 때지 못했으며, 십 년이 넘도록 옷 한 벌을 변변히 지어 입지 못했다. 갓을 쓰려고 하면 갓끈이 끊어지고, 옷깃을 여미려 하면 팔꿈치가, 신을 신으려 하면 뒤꿈치가 터져 버리는 형편이었다. 하지만 그가 신발을 끌면서 시경을 읊으면, 그 소리는 사방에 가득차며 마치 금석(金石)의 악기에서 나는 소리 같았다. 증자는 높은 벼슬도 하지 못했으며, 귀족들과 벗하지도 못했다. 형편이 예전과 같지 않다보니, 70년대식 생활 모습이 차츰 나타나고 있다. 연탄이 인기를 끌고, 장작을 때는 아궁이도 다시 등장했다. 유행이 지난 옷을 입어도 쳐다 보는 사람들이 별로 없다. 이제 조그만 더 있으면 팔꿈치 뚫린 저고리와 구멍난 양말이 새로운 유행(?)을 이끌게 될지도 모를 일이다. 옷깃을 여미면 팔꿈치가 나와 버린다는 뜻으로, 재정적으로 형편이 어려움 을 비유한 말이다. ………………………………………………………………………………………………………………
Board 고사성어 2021.09.10 風文 R 818
법률과 애국 쉽게 믿어지지는 않겠지만 정치, 법률, 종교 등의 사회제도는 언어가 그 중심적인 기능을 하고 있다. 언어가 돈이나 권력보다 더 중요하다는 말이다. 특히 법률은 온통 언어로 이루어져 있다시피 한 제도이다. 그래서 언어를 잘 관리해야 하고 언어의 기능에 적절히 적응해야 한다. 그렇지만 법률이 모든 언어를 마구잡이로 사용하는 것은 아니다. 법률적으로 사용 가능한 ‘구체적인 개념’을 가진 언어를 사용해야 한다. 요즘 국가공무원법 개정안에서 ‘애국심’이라는 용어가 공무원으로서 필요한 핵심 가치의 하나로 지정된 모양이다. 애국심은 마치 기쁨이나 슬픔, 그리움처럼 매우 감성적인 현상을 나타내는 단어의 하나이다. 이러한 심리적 현상을 구체적으로 표현하기는 무척 어렵다. 나라 생각을 하면 그저 그냥 가슴이 두근거리기도 하고, 속이 상하기도 하는 것이지 애국가를 4절까지 다 부른다고 해서 애국심이 강한 것은 아니지 않은가? 대통령이 애국을 강조한다고 하는데, 정치인들이 애국을 강조하는 것은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법률 전문가들이 법안에 그 단어를 쓰는 것은 여간 심각한 문제가 아니다. 마치 교육법에 제자 사랑 조항이, 혹은 군법에 군인은 용감해야 한다는 조항이 들어간다고 생각해 보자. 그것은 법이 아니라 문학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법률적인 합목적성을 이렇게 감성적이고도 직관적인 개념에 의존한다면 공무원 제도의 투명성은 보나 마나 상처를 받게 된다. 우리의 근대 이전 사회에서 충성과 효도, 그리고 열녀의 길을 법률에서도 강조하고 철학에서도 기본으로 삼았지만 자유롭고 평등한 사회를 지향하는 시민 정신을 따라잡을 수가 없었다. 어느 모로 보더라도 이것은 시대착오적이다. 이런 복고적인 법 정신은 어서 극복되어야 한다. 애국이라는 단어는 반란이나 폭동을 일으키는 자들도 무척 애용했던 말이다. 김하수 한겨레말글연구소 연구위원·전 연세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