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이야기 1 - 정채봉, 류시화 엮음 2. 평범한 행복 마지막 대화 - 정태현 10년이면 5년은 징역살이를 해야 된다는 직업이니 나도 어느덧 4년째 징역을 살고 있는 교도관이다. 갖은 흉악범들과 나는 친구가 되어야 했고, 때로는 길잡이로 또는 그들을 보살펴 주는 부모의 역할까지도 해야 했다. 사회로부터 이단시도는 범죄자들을 교화하고 갱생시켜 새 사람으로 만드는 것이 내 천직이고 보니 그들과 일생을 같이할 각오는 선 지 이미 오래다. 푸르름이 짙어진 7월 어느 오후, 사무실 문을 열고 들어서는 사람이 있었다. 살인죄로 사형이 확정된 사형수였다. 내연의 여자 때문에 본처와 어린 자식을 살해하고 철창 신세를 지게 된 그는, 아직 철이 덜 들었다 싶을 정도로 어떤 면에선 순수하고 격정적인 성격을 가진 젊은이였다. 가끔 찾아오는 어머니를 볼 때면 자기가 왜 그런 짓을 했는지 모르겠다고 울부짖으며 어머니의 손을 잡고 용서를 빌기도 했다. 사형이 확정되던 날부터 그는 심한 감정의 흔들림 속에서 동료와 다투기 일쑤였고 나와도 곧잘 입씨름을 벌여서 교도소의 소문난 말썽꾼이기도 했다. 그런 그가 지금, 먹을 것을 한 아름 안고 나를 찾아온 것이다. 어머니가 면회를 왔었다면서 그는 먹을 것을 내 앞에 펼쳐 놓았다. "주임님, 죄송합니다. 늘 괴롭혀만 드려서... 이제 우리 함께 있을 동안만이라도 친하게 지냅시다." 나는 그의 진지하고도 솔직한 접근을 전에 없는 반가움으로 대했다. 얼마 동안 가벼운 인사말을 주고받다가 그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전들 어찌 죽음의 두려움 앞에서 태연할 수 있겠습니까. 밤마다 살고 싶다는 생각 때문에 미칠 지경입니다. 그런데 오늘 어머니 말씀을 듣고는 죽더라도 참된 인간의 정신으로 죽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죄가 미운 것이지 사람이 미운 것이 아니라잖니. 죄는 누구나 짓고 사는 법. 너는 다만 그 죄를 과하게 지었을 뿐이야. 얼마 남지 않은 시간 동안 너를 만나는 모든 사람들에게 네가 악한 사람이 아니라는 걸 알려 줘야 한다. 그래서 남들이 너를 용서하게 될 때, 너와 함께 있는 사람들도 죄가 밉지 사람이 미운 것이 아니라는 걸 깨닫고 사회에 나올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난 너를 웃으며 보낼 수가 있다'라고 어머니가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눈물이 고인 그의 두 눈을 응시했다. 맑았다. 맑은 눈을 가진 그의 평화로운 얼굴에서 갑자기 나는 새로운 생명이 탄생하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그 순간이 내가 그를 착한 사람이라고 느낀 처음이자, 그와 대화할 수 있었던 이승에서의 마지막 만남이었다. (인천 소년교도소 보안과)
Board 삶 속 글 2020.07.09 風文 R 1702
언어로 성형수술을 오래전에는 지금의 간호사에 대한 호칭이 간호부였다. 주로 양성소에서 길러냈다. 나중에 간호대학이 생기면서 대우도 달라졌고 이름도 간호원이라는 말을 쓰게 되었다. 그리고 더 발전되어 대학원도 생겨 학위도 받게 되자 스스로 간호사라는 명칭을 썼다. 직업 범주의 발전과 이에 따른 명칭의 변화가 함께 한 것이다. 이름으로만 본다면 의사, 약사와 함께 보건 의료 활동을 주도하는 전문가의 세 가지 주류 직업에 제대로 자리매김을 한 셈이다. 좀 다른 경우는 가사 보조원에 대한 경우이다. 오래전에는 식모라는 이름으로 매우 종속적인 직업이었다. 월급도 없이 먹이고 재워주고 나중에 결혼시켜 주고 끝나는 경우도 꽤 있었다. 그 이후 가정부로, 또 가사도우미로 이름을 바꾸면서 처음의 종속성은 탈피하고 독자적인 직업 범주를 형성해내게 되었다. 또 다른 직업군을 보자. 역시 오래전에는 직업으로 차량 운전을 하는 사람들을 운전수라고 불렀다. 그러다가 언젠가 운전사로 바뀌었고, 또 세월이 지난 후에 다시 기사라는 이름으로 부르게 되었다. 그런데 그들의 직업으로서의 지위나 대우가 좋아졌다는 기색이 보이지 않는다. 이름만 바뀐 것 같다. 어휘의 변화는 형태의 변화에 걸맞은 의미의 변화도 필요하다. 의미는 그저 그대로인데 허울만 그럴듯해진 것은 그만큼 내실이 없다는 증거일 뿐이다. 청소부에서 환경미화원으로 이름이 바뀌면서 그들의 삶은 무슨 변화가 있었는가? 변함없는 불안정한 고용 상태, 저임금, 과잉 노동 등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지 않은가? 직업의 명칭이 더 나은 모습으로 듣기 좋게 바뀌어 가는 것은 매우 바람직하다. 그러나 그 내용, 곧 의미의 발전도 동반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저 그런, 어휘의 겉모습만 바꾸는 성형 수술에 지나지 않는다. 의미의 변화가 없이 말 껍데기만 슬쩍 바꾸는 포장술로는 사회 발전을 기대하기 어렵다. 그것은 사회적 위선, 아니 속임수에 지나지 않는다. ……………………………………………………………………………………………………………… 위계질서와 개인정보 신문 같은 보도 매체에서 어떤 사람을 언급할 때에는 그에 대한 개인 정보를 간략이 덧붙여서 읽는 이들의 이해를 도와주고 있다. 대개 직업이나 직함 또는 알려진 명성 따위를 언급해 주는 것이다. 한때는 그 사람의 나이를 괄호 속에 넣는 일이 흔했는데 요즘은 보기 드물다. 또 여성일 경우에는 역시 괄호 속에 ‘여’라고 써넣기도 했다. 돌이켜보면 참으로 별 의미 없는 정보를 알려줬구나 하고 실소를 하게 된다. 그러나 아직도 그 사람이 나온 대학의 이름을 슬그머니 비치는 경우는 종종 있다. 이제는 그러한 낡은 방식의 사적 정보를 통해 보이지 않는 위계나 사회적 선호를 드러내지 않는 것이 더 바람직하다는 인식이 자리잡아가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권력의 중심부에서는 이러한 개인의 별거 아닌 정보 요소로 건전하지 못한 위계질서를 강화하는 인습이 남아 있어 무척 답답하다. 예를 들어 사법시험 출신자들에 대한 언급에는 거의 예외 없이 몇 회 합격자인지를, 연수원 몇 기인지를 밝히고 있다. 그래서 기수 후배가 상관이 되면 그 선배 기수들이 통째로 물러난다는 식의 비합리적인 인사 정책이 당연시되는 것은 큰 문제다. 더 답답한 것은 선후배 관계와 아무런 관련이 없는 국회의원들조차 재선이니 삼선이니 하며 단식농성할 때 초선인 주제에 선두에 서지 않는다고 하거나, 삼선 이상이면 당연히 무슨 당직을 주어야 한다든지 하는 것을 보면 아직 민주주의가 멀었다는 생각이 들지 않을 수 없다. 그러한 개인 정보는 그의 능력이나 그릇의 크기와는 아무 관계가 없다. 오히려 우리 사회가 잘되려면 잘난 후배가 하루속히 못난 선배를 앞질러야 하지 않겠는가? 되도록 법조인들에 대한 정보는 과거에 어떤 판례를, 혹은 어떤 변호나 사건 기소를 한 경력이 있다는 것을 덧붙이거나, 국회의원들은 과거에 어떤 법안을 마련한 경력이 있다는 등의 개인 정보를 드러내 주는 것이 더 바람직한 사회로 다가서는 일일 것이다. 김하수 한겨레말글연구소 연구위원
큰 방황은 큰 사람을 낳는다 - 마 데바 와두다 32. 부분을 넘어서 <그대는 전체의 부분이며, 전체 속에 있다. 부분에 집착하여 전체가 되는 걸 막지말라> 예수가 군중 앞에서 얘길 하고 있는데 누가 말하기를, <예수, 당신 어머니께서 저 밖에서 기다리고 있고. 사람들이 너무 많아서 지금 안으로 들어오지 못하고 기다리고 있소. 당신을 보고 싶다 하시오> 예수 말하기를, <내 어머니는 아니 계시니라> 예수가 어릴 적이었다. 일 년에 한 번 있는 큰 날이어서 예수의 가족은 사원엘 가야했는데 예수가 보이질 않는 것이었다. 예수의 부모는 아들을 찾아 보았다. 온갖 근심걱정 끝에 저녁 무렵에서야 겨우 그들은 아들을 찾을 수 있었다. 어린 예수가 노학자들과 함께 앉아서 애길 하고 있는 것이었다. 예수의 아버지 요셉이 달려가 말했다. <예수야, 여기서 뭘 하고 있느냐? 어머니 아버지가 온종일 네 걱정을 얼마나 했다구> 예수가 말했다. <제 걱정일랑 마십시오. 전 아버지 일을 하고 있었어요> 요셉이 말했다. <내가 네 아버지 아니냐... 여기서 네가 하는 일이 무엇이더냐? 내가 아버지 아니냐!> 예수가 말했다. <제 아버지는 하늘 나라에 계십니다. 당신은 제 아버지가 아니예요> 아이는 어머니의 몸을 떠나야 한다. 아이는 아버지와 어머니의 자궁을 떠나야 한다. 육체적으로, 심리적으로, 정신적으로 떠나야 한다. 아이가 정신적으로 태어날 때, 과거를 완전히 깨고 벗어날 때 비로소 처음 그는 자기 자신이 되어 스스로 있게 된다. 아이는 어머니 아버지 가족의 일부였다가 이제 전체가 된다.
Board 추천글 2020.07.08 風文 R 2087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참 가슴 찡한 이야기 - 황지니 제1권 구령 맞춰 하나 둘 미국의 어느 초등학교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한 선생님이 아이들과 어울려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교장선생님이 오신다는 전갈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선생님은 아이들을 한 줄로 세웠습니다. 그리고 황색, 붉은색, 밤색 피부의 아이들을 차례로 세웠으며 흑인 아이들을 제일 끝에 세웠습니다. 줄을 다 세워 놓고 보니 만족스럽지가 못했습니다. 아무래도 그들을 맨 앞에 세워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선생님은 아이들을 해산시키고 다시 줄을 세우기로 했습니다. 다시 줄을 세우려고 아이들을 뒤섞어 놓았을 때 교장선생님의 발자국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아이들을 한 줄로 세우기도 전에 교장선생님이 오시다니, 큰일이었습니다. 이것저것 따질 틈이 없게 된 선생님은 아이들을 뒤죽박죽 있는 그대로 세웠습니다. 이윽고 교장 선생님이 교실로 들어섰습니다. 그녀의 얼굴은 홍당무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교장 선생님은 흡족한 표정으로 백인 아이며, 흑인 아이들의 머리를 사랑스럽게 쓰다듬어 주시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교장 선생님이 다녀가신 후 선생님은 고개를 들고 아이들을 바라봤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어찌된 일입니까? 종전과 달리 선생님의 눈에 비친 아이들은 서로 다른 피부를 가진 아이들로 구분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다만 그녀가 사랑하는 여러 어린이들이 천진난만한 웃음을 지어 보이며 함께 어울려 있을 뿐이었습니다. 인간은 신의 걸작품이다. (F. 퀄즈)
Board 추천글 2020.07.08 風文 R 2060
작은 이야기 1 - 정채봉, 류시화 엮음 2. 평범한 행복 이력서와 연애 편지 - 강오전 내가 일본에서 유학하고 있던 시절의 얘기다. 대학을 졸업하던 해, 한 친구가 연애를 하기 시작했다고 고백했다. 그 친구는 약간 덤벙거리는 성격의 소유자였는데, 바닷가에서 우연히 만난 한 여인에게 아주 홀딱 반해 버렸다는 것이었다. 그 친구는 연애 편지를 써야겠는데 어떻게 쓰면 좋을지 모르겠다면서 마치 열병에라도 걸린 것처럼 끙끙 앓고 있었다. 몇 장씩이나 종이를 버려 가면서 친구는 마침내 편지 한 장을 완성했다. 완성된 편지를 무슨 보물이나 만지듯 하며 조심스럽게 보여 주었는데, 그 내용이 감미로운 미사여구의 행진이겠거니 여긴 나의 상상과는 전혀 딴판이었다. <...저는 지금 대학 졸업반입니다. 졸업만 하면 곧 훌륭한 회사에 취직하여 성실한 모범 사원이 되겠습니다. 당신과 결혼해 행복하고 평화로운 가정을 이루는 것만이 저의 꿈입니다. 믿어 주십시오...> 그런데 그 친구 어떻게나 열에 들떠 덤벙댔던지 연애 편지를 봉투에 넣는다는 것이 그만 이력서와 바꿔 넣고 말았다. 다시 말하면 '훌륭한 회사'의 사장에겐 연애 편지를 보낸 셈이 되었고, 연인에게는 이력서를 보낸 셈이 된 것이다. 물론 그 친구는 자기가 한 일을 알 턱이 없었다. 그러나 세상일이란 참 이상한 것이어서 의외로 이 잘못 보내어진 편지들이 그에게 더없는 행복을 불러 왔다. 즉, 이력서를 받아본 연인 그녀의 아버지는 이만한 신원이면 신랑감으로 충분하다는 평가를 내렸고, 한편 연애 편지의 굳센 모범 사원에의 결심과 정열을 읽은 회사 사장은 이만하면 사원감으로 충분하다는 결론을 내렸기 때문이다. 그로부터 2년 후 그들은 결국 결혼하게 되었고, 술까지 끊은 그는 얼마 지나지 않아 그 회사에 없어서는 안될 모범 사원이 되었다. 그리고 지금에 와서는 일본에서도 손꼽히는 기업가로 성장해 최근에는 그들이 처음 만났던 바닷가에 별장을 지었다는 소식이 오기도 했다. (성균관대 통계학과 교수)
Board 삶 속 글 2020.07.08 風文 R 1744
눈으로 말하기 우리는 말을 할 때는 주로 말소리를 이용한다. 그리고 억양과 음색을 이용하여 그 의미를 정교하게 만든다. 또 하나 중요한 것이 있는데 우리들 스스로 잘 인식을 못하고 있다. 바로 표정이다. 표정 가운데서 매우 유의미한 것이 ‘눈길’이다. 눈길이 어디로 향하고 있느냐 하는 것은 서로 대화를 나누면서 집중도, 상대방의 반응 파악, 공감 표현 등을 잘 보여주는 중요한 요소이다. 대화를 하면서 눈길이 상대방을 향하지 않고 어딘지 모르게 새 나가고 있는 것 같으면 사실 딴 데 신경을 쓰고 있거나 얼른 자리를 피하고 싶은 마음을 드러낸다. 반면에 너무 뚫어져라 쳐다보며 이야기를 하면 무언가 강렬한 의도가 있다고 보아도 크게 틀리지 않을 것이다. 상대방이 말할 때는 그 사람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자기가 이야기할 때는 눈을 가볍게 내리까는 것이 상대방에게 부담을 주지 않는다. 가볍게 웃음기를 띠고 이야기를 하면 훨씬 더 부드러워진다. 반대로 상대방을 지나치게 응시하면 매우 부담스럽기 마련이고, 일종의 ‘공격적인 행위’처럼 받아들여진다. 단순한 호기심으로 남의 행색이나 소지품을 신기하다는 듯이 지나치게 응시하는 행동은 그렇기 때문에 오해의 소지가 많다. 옆사람이 보는 신문이나 태블릿에 눈길이 잠시 갈 수는 있지만 좀 심하면 본의든 아니든 큰 실례다. 관심이 생긴다고 해서, 궁금하다고 해서 눈길을 아무 데나 함부로 던질 수는 없다. 눈길은 말보다도 더욱 강렬하고 대단히 부담스럽다. 눈빛이 강렬한 사람의 모습을 쉽게 잊을 수 없는 것도 같은 이치다. 상대방을 똑바로 응시하는 태도는 문화권마다 서로 다른 반응을 일으키기도 한다. 그러나 말을 정확하게 사용하는 것이 중요하듯이 말보다도 더욱 감성 전달력이 높은 눈길은 그만큼 더욱 신중히 사용해야 하는 소통 도구이다. 적절히 응시하고 적절히 내외할 줄도 알아야 한다. ……………………………………………………………………………………………………………… 언어와 민주주의 언어로 사회를 민주화할 수 있을까? 많은 사람들의 꿈이었다. 그래서 더 의로운 표현을 하기도 하고 기존의 어휘를 새롭게 혁신하기도 했다. 영어에서도 양성 평등 운동에서 여러 가지의 언어적 실험과 혁신이 일어났다. 우리 한국어에서도 그리 활발한 것은 아니었지만 몇 가지 시도를 한 일이 있다. 1987년 이 땅에 본격적인 민주 헌법을 마련하고 새로운 제도의 정착을 위해 노력하던 시절, 그해 여름에 큰 수해가 났다. 수해 복구를 위해 나선 주민들과 군인 및 공무원들의 노력을 보도하면서 우리 귀에 익숙하던 ‘군관민’이라는 표현을 처음으로 ‘민관군’이라고 고쳐 표현했다. 순서가 완전히 거꾸로 되는 것이니 무언가 어색했다. 그러나 이런 경험은 우리의 언어적 민주화 과정을 반영하는 증거물이기도 했다. 돌이켜보면 표현의 순서만 그럴듯하게 바꿔놓았을 뿐이지 그 이상의 노력이나 지속적인 자기 갱신 노력은 별로 없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오히려 민주주의의 퇴행 현상만이 여기저기서 목격될 뿐이다. 깊은 고민 없이 이 말을 대충대충 써온 것이다. 최근에 정치권에서 몇 가지 갈등이 생기면서 ‘당정청’이라는 용어가 많이 사용되고 있다. 이 순서도 어찌 보면 대단히 민주적인 서열을 보여준다. 정당이 우선이고 그다음이 정부, 그리고 맨 나중이 청와대란 뜻이니 얼마나 반권위주의적이며 얼마나 바람직한 정당정치의 구현인가! 그러나 말의 순서만 그럴 뿐이지 실제로 되어 가는 모양은 완전히 거꾸로가 아닌가? 말을 뜯어고쳐 사회 혁신에 기여한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다. 그러나 행동이 따라야 한다. 언어는 뜻을 드러내는 기능만이 아니라 무언가를 실천하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말 순서만 그럴듯하게 바꾸어 놓고 구체적인 실천이 따르지 않는다면 언어는 위선과 궤변의 도구밖에 되지 못할 것이다. 그래서 민주적인 언어는 민주적인 실천을 필요로 한다. 김하수 한겨레말글연구소 연구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