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 방황은 큰 사람을 낳는다 - 마 데바 와두다 37. 천국의 문 <그대에게 의식이 있으면 이미 천국을 선택한 것. 눈 뜨고, 깨어 있고, 의식 있으라! 그건 오직 그대한테 달렸다> 한 무사가 고명한 선사를 찾았다. 탁월한 무사인 그가 묻기를, <지옥이 있소이까? 천국이 있소이까? 천국과 지옥이 있다면 문은 어디 있소이까?> 그는 탁월한 무사였지만 단순하였다. 무사들은 단순하다. 마음을 읽을 줄 모른다. 무사들은 딱 두 가지 밖에 모른다. 생과 사 밖에 모른다. 그는 그밖에 어떤 가르침도 받아 본 적이 없었다. 그는 정말로 천국과 지옥이 있다면, 그렇다면, 그 문을 알아서, 지옥을 피해 천국으로 들어가고 싶었다. 정말로 천국과 지옥이 있다면. 선사가 말하기를 <그댄 누군고?> 무사가 답하기를, <무사요. 많은 부하를 거느리고 있는 대장이오. 왕께서도 날 존경하시오> 선사는 껄껄 웃으며, <그대가 무사라구? 거지 새끼 같은 걸!> 무사의 얼굴이 팍 일그러졌다. 그는 선사를 찾은 목적을 까맣게 잊고 순식간에 칼을 빼들어 선사를 치려 하였다. 선사가 다시 껄껄 웃으며, <고놈이 바로 지옥의 문일세. 이 칼과, 이 분노와, 이 자만이 바로 지옥의 문을 열지. 안 그런가?> 무사는 돌연 깨달았다. 살기가 씻은 듯이 걷히면서 칼이 칼집으로 도로 꽃혔다. 선사가 다시 말하기를, <아하, 바로 여기에 천국의 문이 있지. 안 그런가?> 천국도 지옥도 그대 속 안에 있는 것. 그대가 의식 없이 습관적일 때 지옥의 문이 열리고, 깨어 있어 의식 있을 때 천국의 문이 열린다. 마음이 곧 천국이요 지옥이되, 밖에서 찾지를 마라. 천국과 지옥은 인생의 끝자리에서 기다리고 있는 게 아니라 지금 여기에 있으니 매 순간순간 문은 열린다...순간순간마다 그대 천국과 지옥을 넘나들지 않느냐.
Board 추천글 2020.07.15 風文 R 2405
왜 벌써 절망합니까 - 정문술 4. 다르게 끈질기게 파고들어라 - 시추 경영 대기업은 싫습니다 5년 전에 천안공장으로 한 청년이 찾아왔다. 지금도 별다를 게 없지만 그때의 미래산업은 정말 보잘 것 없는 규모의 중소기업이었다. 직원공채 같은 건 부담스러워서 시도해본 적도 없었다. 자매결연을 맺은 공업고등학교에서 보내주는 아이들을 키워서 쓰곤 했다. 이렇다 할 학벌을 갖춘 고급인력이란 아예 욕심도 내지 않았다. 노력해봐야 안 되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런 시절이라 이 청년의 방문은 더욱 의외였다. 가져온 이력서며 성적증명서를 보니 첫눈에도 매우 우수한 인재라는 판단이 들었다. "박우열이라고 합니다. 한양대 기계공학과와 대학원을 졸업했고 올해 군대도 마쳤습니다." "그래 찾아온 용건이 뭔가." "받아주신다면 미래산업에서 일하고 싶습니다." 반가움에 앞서 나는 그 속마음이 궁금했다. 저 정도의 조건이라면 대기업으로 달려가야 정상이었다. 한 번에 실패하면 재수, 삼수를 해서라도 반드시 대기업에 들어가야만 직성이 풀리는 세태가 아닌가. 지금도 미래산업은 주변에 보이느니 허허벌판 아니면 공장뿐인 천안 외곽에 자리잡고 있다. 젊은 사람들이 싫어할 만한 조건으로 충분하다. 놀기 힘들고 장가가기도 힘들기 때문이다. 그래서 더욱 이 청년의 태도가 이해되지 않았다. "자네 실력을 보니 대기업을 들어가도 충분할 것 같은데 어째서 미래를 찾아올 생각을 했나?" "대기업은 싫습니다. 저는 비전 있는 중소기업에서 일하고 싶습니다." "어째서 그런가?" "대기업보다는 중소기업에 더 많은 기회가 있을 것 같습니다." "무슨 기회 말인가?" "제가 공부하고 제가 성장할 수 있는 기회 말입니다. 유망한 중소기업에서 일한다면 저한테도 많은 기회가 생길 거라고 생각합니다. 일단 대기업에는 경쟁자가 너무 많지 않습니까?" 당돌했지만 밉지 않은 녀석이었다. 마음속으로는 이미 허락했으면서도 나는 일부로 계속 질문을 던졌다. "이 촌구석에서 일하기 답답하지 않겠나?" "방해받지 않고 일할 수 있느니 금상첨화 아닙니까?" "자네가 바라는 것을 이루기에는 회사가 너무 작지 않은가?" "사실 저는 좀더 작은 회사를 원했습니다. 그런데 막상 와보니 여기도 너무 커서 좀 불만이긴 합니다. 그렇지만 사옥도 멋있고, 사장님도 멋있고, 아무튼 저는 꼭 여기서 일해야 되겠습니다." 얼마 전 그 박우열이 장가를 갔다. 말주변도 없이 직원들 주례에 하도 시달리다 보니 이제는 아예 공식적으로 주례거절을 선언했던 바였다. 그런데도 박우열은 예의 넉살로 나를 구워삶았다. 내가 주례를 서지 않으면 결혼식을 안 하겠다며 협박했던 것이다. 평소의 성정으로 보아 박우열은 충분히 그러고도 남을 위인이었다. 그러니 울며 겨자 먹기로 주례를 허락할 수밖에. 결혼식 당일. 나는 예식장 구석에 앉아 수첩을 꺼내놓고 복잡한 머릿속을 가다듬고 있었다. 그러던 중 갑자기 신랑 친구들이 내게 몰려왔다. 강연이다 인터뷰다 해서 한동안 꽤나 번잡을 떨었기 때문인지, 미래산업과 정문술이라는 이름이 생각보다 많이 알려져 있는 듯했다. 더구나 신랑친구들도 대부분 비슷한 업계에서 일하는 녀석들인지라 대부분은 나를 알고 있던 모양이었다. 마땅한 주례사 내용도 잡히지 않던 차에 그 녀석들과의 대화는 오히려 반가웠다. "우열이놈, 미래에 가서 무지 출세했습니다. 동기들 중에서 아마 제일 팔자 좋은 녀석일 겁니다." "자네들은 훌륭한 기업에서 좋은 대우받으며 일하고 있지 않나." "회사만 크면 뭐합니까. 장래도 불투명하고 매일 그날이 그날입니다." "미래산업이라고 뭐 다를 게 있겠나." "에이, 그래도 우열이는 지금 과장 아닙니까. 저희들은 기껏해야 대립니다, 대리. 게다가 우열이는 팀장이니까 저 하고 싶은 것 마음대로 할 것 아닙니까. 동기들은 우열이를 제일 부러워한다니 까요." 그가 미래산업을 선택했던 것은 그저 단순한 객기가 아니라 나름대로 충분한 분석과 연구의결과일 것이다. 그 많은 중소기업 중에서 굳이 천안까지 내려와 미래산업을 선택한 것도 심상치 않거니와, 소위 말하는 대기업에서 그려질 자신의 인생지도와 미래산업에서 그려질 또 하나의 인생지도를 두고 그가 얼마나 고심했겠는가는 물어보지 않아도 뻔한 일이다. 동기들이 모두 대기업으로만 향할 때 엉뚱하게도 박우열은 스스로 지방의 중소기업을 택했다. 대기업보다 중소기업에 기회가 더 낳을 것 같다는 이유였다. 중소기업에서 성장하면 자기분야 이외의 것들도 접할 기회가 더 많을 것 같다는 이유였다. 중소기업에서 성장하면 자기분야 이외의 것들도 접할 기회가 많아진다. 박우열은 기술개발 분야뿐 아니라 조직관리와 리더십 등 경영전반에 대해서도 많은 것을 경험하고 싶어했다. 박우열의 착상은 적중했다. 시셋말로 동기들 중에서 '가장 출세한 녀석'이 된 것이다. 그 녀석은 여러모로 나와 닮았다. 평범하고 편안한 것을 싫어한다는 점 말고는 욕심이 많은 점이나 저돌적이라는 점등이 특히 그렇다. 그를 보면 나의 젊은 날이 생각나서 흐뭇하다. 그 녀석도 나처럼 타고난 '거꾸로 경영인'이다. "대기업은 싫습니다. 저는 비전 있는 중소기업에서 잃고 싶습니다." 그가 미래산업을 선택했던 것은 그저 단순한 객기가 아니라 대기업보다 중소기업에 기회가 더 많을 것 같다는 이유였다. 동기들이 모두 대기업으로만 향할 때 엉뚱하게도 박우열은 스스로 지방의 중소기업을 택했다. 대기업보다 중소기업에 기회가 더 많을 것 같다는 이유였다.
Board 말글 2020.07.15 風文 R 3243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참 가슴 찡한 이야기 - 황지니 원수를 감동시킬 수 있는 힘 미국 뉴올리언즈에서 말가리다라는 여인이 고아원을 경영하고 있었습니다. 뉴올리언즈 지방은 흑인이 많은 탓인지 기부금 같은 것이 여간해서 모이지 않았고 갈수록 고아원 경영은 힘들어져만 갔습니다. 연말이 다가오고 크리스마스가 닥쳐오자 말가리다 부인은 가만히 앉아 있을 수만은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녀는 어떻게든지 선물을 마련해 아이들의 마음을 기쁘게 해주고 싶어서 조바심이 났기 때문입니다. 부인은 거리에 나가 사람들의 동정을 얻기로 단단히 결심하고 검은 옷을 몸에 걸친 뒤 연말의 분위기에 젖어 흥청거리는 술집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녀는 조용히 테이블을 돌면서 부드러운 미소와 겸손한 태도로 사람들에게 동정을 바라고 다녔습니다. 얼굴을 돌리는 사람, 마지못해 돈을 주는 사람, 갖가지의 사람들 중에 갑자기 주정뱅이의 거친 목소리가 들렸습니다. "시끄러워! 남은 좋은 기분으로 술 마시는데 그런 기분 나쁜 얼굴 내밀지마! 이거라도 먹고 꺼져 버렷!" 이렇게 말하면서 자기가 갖고 있던 맥주컵을 느닷없이 부인의 얼굴에 내던지는 것이었습니다. "앗!" 몸을 피할 사이도 없이 컵은 부인의 얼굴에 맞아 박살이 났고 부인의 얼굴은 유리조각으로 찢겨 피가 났습니다. 술집 안의 손님들은 어안이 벙벙해져 부인이 어떻게 나오는가 조용히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부인은 수건을 꺼내서 상처를 지긋이 누르면서 산산이 부서진 컵의 유리조각을 하나하나 주워서는 두 손으로 받쳐들고 미소를 지으며 주정뱅이에게 말했습니다. "고맙습니다. 이 컵은 나에게 주시는 선물로 감사히 받겠습니다. 그러나 가엾은 고아들에게는 어떤 선물을 주시렵니까?" 한동안 어리둥절한 침묵 끝에 "와!" 하는 환성과 더불어 사람들이 앞을 다투어 돈을 내놓았습니다. 그 주정뱅이 테이블 위에도 그의 지갑이 남겨져 있었습니다. 그 곁엔 '이 돈을 불쌍한 고아들에게'라고 쓴 메모가 남겨져 있었습니다. 사랑은 폭력보다도 강하고 원수의 마음까지도 감동시킬 수 있는 위대한 힘입니다. 미련한 자의 마음은 그의 입 속에 있지만, 현명한 자의 입은 그의 마음속에 있다 - (B. 프랭클린)
Board 추천글 2020.07.15 風文 R 2641
작은 이야기 1 - 정채봉, 류시화 엮음 3 시련을 딛고 인간으로 가는 길 - 송신남 당신은 자신이 언제 어떻게 죽을 것인가를 선택할 수 없다. 당신이 선택할 수 있는 것은 어떻게 살 것인가 하는 것이다. - 존 바에즈 1966년 월남, '맹호 5호 작전'에 나는 통신병으로 참전했다. 하늘이 보이지 않는 밀림 속에서 벌어지는 치열한 전투였다. 적탄에 하나둘 쓰러지는 전우들. 중대장은 분노의 울음을 엉엉 울면서 전투 지휘를 하고 있었다. 밀림에서는 전파 방해를 심하게 받기 때문에 나는 무전기의 안테나를 한껏 올리고 중대장의 뒤를 바짝 붙어 기고 있었다. 그때, 갑자기 세상이 빙글 돈다 싶더니 나는 그대로 의식을 잃고 말았다. 잠깐 의식이 들었을 때는 헬리콥터에 실려 후송되고 있는 중이었다. 적탄이 내 목을 관통한 것이다. 1년 동안의 병원 생활은 공포와 절망의 시간이었다. 사람들은 살아난 것만도 기적이라고 했지만 가슴 아래로는 아무 감각을 느끼지 못하는 마비 상태, 평생 '휠체어'를 차고 지내야만 하는 척추 장애자가 된 것이었다. 그런 중에서도 간신히 감각이 돌아와 정상적으로 움직일 수 있게 된 두 팔로 처음에 나는 자살을 기도했다. 평생 남에게 폐나 끼치며 살 바엔 차라리 지금 죽는 게 낫다는 생각에서였다. 그러나 뜨거운 마음으로 나를 보살피는 부모, 누나, 의사, 간호사, 사회단체 여러분들의 감시 아래서 그 생각은 사라지고 점차 두 팔은 하느님께 기도하는 데 쓰여졌다. 광주 후송 병원에서 제대를 하자 나는 원호 병원으로 옮겨졌다. 이곳에서 나는 처음으로 척추 장애의 불구자가 나 하나만이 아님을 알았다. 한숨만 쉬며 가만히 누워 있으면 소화 불량, 근육 이완 등으로 수명이 짧아진다며 의사의 권유에 따라 물리 치료실에서 근육 활동을 열심히 하는 신체 장애자들을 보고 있으려니 가슴이 뭉클해지며 삶의 의욕도 생겼다. 이곳에서 나는 6.25 때 간호사로 참전했다가 부상을 당해 척추 장애인이 된 조금인 여사가 세계 척추 장애인 올림픽의 탁구 부문에서 금메달을 받았다는 소식을 듣고 놀라움을 금할 수 없었다. 또한 전국 척추 장애인 체육 대회를 보러 갔다가 성한 사람들 이상으로 밝은 표정으로 휠체어를 이리 밀고 저리 밀며 경기에 열중하는 선배들의 모습을 보고 인간의 내면 깊이 숨겨져 있는 강인한 생명력을 느끼게 되었다. '나도 할 수 있다.' 전에는 전혀 쓸모 없어 보이던 내 두 팔을 내려다보며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이때부터 나는 탁구에 내 생명의 모두를 바치기 시작했다. 새벽 다섯 시에 일어나 병원 안의 탁구장으로 가서 탁구 코치인 한 대학생을 상대로 탁구 채를 휘둘렀다. 운동이 심한 날은 열이 몹시 올라 의사가 만류했으나 간호사에게 한 번만 눈감아 달라고 애원하고는 탁구장으로 향하기도 했다. 다음해 체육 대회에서 뜻밖에도 나는 탁구에서 1등을 차지하는 영광을 누렸다. 부상 이후 무엇엔가 자신을 가져 본 것은 이때가 처음이었다. 원호 병원에서 퇴원하던 날 원장 선생님이 선물로 탁구대를 주셨다. 원호처에서 마련해 준 지금의 집 마당에 그 탁구대가 놓이고 나의 하루는 탁구로 시작해 탁구로 끝났다. 가볍게 이리저리 튀는 흰 탁구공은 마치 내 자신의 혼백처럼 여겨졌다. 나는 작년 런던에서 열린 세계 척추 장애인 체육 대회에서 금메달을 받았다. 그리고 금년에는 하이델베르크에서 열린 척추 장애인 올림픽에서도 8개국 선수들을 물리치고 금메달을 받았다. 금메달을 받으면서 나는, 남의 도움만 받다가 이렇게나마 보답을 할 수 있게 된 것에 대해 신에게 감사드렸다. 그러면서 나도 역시 한 사람의 인간이어야 한다고 나 스스로에게 다짐했다. (제21회 세계 척추 장애인 올림픽 탁구 부문 금메달 수상자)
Board 삶 속 글 2020.07.15 風文 R 1964
포퓰리즘 이런 뜻으로도 저런 뜻으로도 쓰이는 말은 편리할 것 같지만 사실 매우 위험하다. 사람을 오락가락하게 하고 상황을 오판하게 만든다. 그렇게 휘뚜루마뚜루 쓸 수 있는 말은 농담을 하거나 남을 조롱할 때, 아니면 아예 반어법으로는 유용하다. 민주사회에서는 당연히 대중이 정치적 주인이다. 민주주의를 가리키는 데모크라시가 그리스어에서 대중이라는 뜻의 ‘데모스’에 어원을 두고 있으며, 또 하나의 단어, 포퓰리즘도 대중을 뜻하는 ‘포풀루스’라는 라틴어에 연원을 두고 있다. 포퓰리즘이라는 말은 대중과 지배 엘리트를 대립적으로 보는 시각을 가리키지만, 통속어에서는 대중의 인기를 노리고 선심을 남발하는 기회주의를 뜻한다. 곧 하나의 낱말이 전혀 다른 두 가지 의미로 해석되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여당은 야당의 대중친화적 주장을 포퓰리즘이라고 비난하려 하고, 야당은 대꾸도 못하고 뒤에 숨어 버리기 바쁘다. 이러니 일반 대중은 도대체 어떤 정치인을 믿고 살 수 있겠는가? 따라서 이 말은 함부로 쓸 말이 아니다. 특히 공적인 책임을 져야 할 언론기관은 이 단어를 조심스럽게 다루어야 한다. 복잡하고 다양한 성격의 대중을 단 하나의 단어에 모두 밀어 넣을 수는 없다. 각자의 이념 지형에 따라 대중을 달리 해석해 주어야 한다. 사회주의자의 대중은 노동자를 중심으로 하고, 시장주의자의 대중은 중산층을 중심으로 하게 마련이며, 극우파는 반공주의자와 배타적 민족주의자를 중시하고, 극좌파는 빈농과 도시빈민에 관심이 많다. 모든 정파는 대중을 벗어나서는 민주정치에 참여할 수 없다. 자신들이 지지 기반으로 삼는 대중을 위한 정책을 자신있게, 정직하게 말하라. 그리고 언론기관은 이들의 대중이 누구를 가리키는지를 정확하게 보여주도록 해야 한다. 이 이상 포퓰리즘이라는 말을 악마의 단어로 만들지 말라. 이 땅의 대중은 지금 숨넘어가게 힘들다. ……………………………………………………………………………………………………………… 특칭화의 문제 하나의 집단으로 자주 거론되고 있다면 그들은 무언가의 가치 매김을 당하고 있는 사람들이다. 대학생, 노인, 주부, 외국인 등은 이렇게 특칭화되면서 동시에 그들에 대한 가치 판단이 함축된다. 예를 들어 “주부 도박단 검거”라는 기사 제목은 단순히 ‘주부’들을 가리키는 기능만을 하지는 않는다. 주부들이 웬 도박이냐 하는 비난이 깔려 있다. 굳이 주부만이 도박을 삼가야 할 이유는 없다. 모두 다 삼가야 할 것이 도박이다. 더 나아가 ‘대학생 절도범’이라든지 ‘60대 노인 내연녀 폭행’, ‘여대생 포함한 해외 원정 성매매’ 등의 문구는 대학생, 노인, 여대생들을 특칭화하는 태도를 반영한다. 다른 집단에 비해 좀 ‘불공정하게’ 깐깐한 잣대로 평가를 받는 것이다. 대개는 사회적으로 따돌림이나 질시를 당하는 사람들이다. 시각을 돌려 또 다른 집단을 살펴보자. 한국을 찾는 관광객 가운데 유독 중국인 관광객에게는 ‘요우커(유커)’라는 단어를 자주 쓴다. 반면에 일본이나 미국에서 온 관광객들한테 ‘간코캬쿠’라든지 ‘투어리스트’라는 별칭을 붙였던 일은 없었다. 우리 언론 보도는 중국인 관광객들을 주로 ‘큰손’으로 보도하는 악습이 있다. 결국 ‘유커’라는 단어는 사실 ‘우리의 벌거벗은 욕망’을 드러낸 말이다. 관광을 오로지 손님 호주머니에 눈독 들이는 얄팍한 업종으로 보고 있는 것이다. 메르스 이후에 어려움이 많던 관광사업에 다시 외국인 손님들이 온다는데 이런 계기에 더 교양 있는 지칭을 사용했으면 한다. 모든 관광객을 평등하게 일컫고 그들이 와서 쇼핑이나 자연환경만이 아니라 정중한 문화적 대접도 누리게 하자. 좋은 상품과 경치는 이 세계에 얼마든지 널려 있다. 그러나 마음으로 느끼는 문화적 감흥은 아무 데서나 받는 선물이 아니다. 이번 기회에 한 걸음 더 발전한 보도 용어를 사용했으면 한다. 김하수 한겨레말글연구소 연구위원
왜 벌써 절망합니까 - 정문술 4. 다르게 끈질기게 파고들어라 - 시추 경영 아이들은 잡초처럼 키워라 공장을 천안으로 옮길 때 단 한 사람을 제외한 전 직원이 천안으로 따라 이주했다는 말을 한 적이 있다. 어느 신문에 이른바 '천안 대이동'이라고 명명했던 바로 그 사건이다. 이 무렵 직원들이 가장 근심했던 것이 바로 자녀교육 문제였다. 그들도 이 나라의 평범한 학부모들인 바에야, 수도권을 이탈하면서 가장 먼저 교육문제를 염두에 두었다는 건 매우 당연한 일이었다. 그때 내가 직원들에게 해주었던 이야기가 바로 '잡초론'이다. 아이들이라면 벌에도 쏘여보고 지렁이도 죽여보면서 커야 제대로 크는 것이라고 말이다. 거칠게 풀어놓고 함부로 길러야 독립심 강하고, 건강하며, 생명력도 강한, 진짜 인재로 성장할 수 있다고 말이다. "세상을 한번 둘러봐. 아니면 애들 주변의 친구들을 한번 보라구. 어쩌면 그렇게 똑같은 취향, 똑같은 말투, 똑같은 생각들을 가지고 있을 수 있는지 말야. 선생들이나 부모들이나 하나같이 애들이 엉뚱한 짓 못하도록 들볶기만 하니까 그리 되는 거라구. 그게 바보로 만드는 거지 뭔가. 반대로 생각하면 시골로 도망 오는 것이 애들한테도 다행인 일이야. 순박한 시골 애들과 함께 마음껏 뒤섞여 놀게 하라구. 사랑하고 믿어주기만 한다면 애들은 잘못되지 않는다니까." 그러면서 나는 내가 살아왔던 이야기며, 우리 아이들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석연찮은 그들의 얼굴에 대고 내가 가진 증거물을 들이대는 것이다. 우리 집 큰애가 1964년 생이고, 막내가 1970년 생이다. 그러니까 6년 동안 무려 다섯 명의 아이를 낳은 셈이다. 일찌감치 홀로 되신 어머니는 손자에 대한 집착이 매우 강했는데 내리 딸 셋을 낳다보니 그렇게 되었다. 아내한테는 미안한 노릇이지만 어머니를 실망시켜드릴 수는 없었다. 다섯 명의 아이들 중에 재수생이 한 명도 없었다는 점 때문에 잡지사에서 몇 번인가 취재요청을 한 적이 있다. 말하자면 성공적인 자녀교육법의 '비결'을 말해 달라는 것이다. 사실 나는 그런 인터뷰가 곤혹스럽다. 아이들을 키운 특별한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답변을 위해 자녀교육법이라도 연구해야 될 판이었다. 그래서 억지고 생각해낸 말이 하나 있다. 다름 아닌 '방목'이다. 80년에 해직 당하고 뒤늦게 사업을 한답시고 뛰어다니느라 나는 집안문제에 벼로 신경을 못 썼다. 그냥 바쁘기만 했던 것이 아니라 항상 죽느냐 사느냐의 긴박감 속에 있었다. 당연히 가계는 물론이려니와 아이들 교육문제도 뒷전이었다. 남들처럼 일류대에 보내겠다고 과외를 시키는 것은 생각조차 못했다. 학비마저 제때 줘서 보내지 못하는 판국에 과외는 너무나 먼 얘기였다. 아이들이 한창 학교에 다닐 무렵, 우리 집 주변은 온통 논밭이었다. 봄이면 모내기하느라 동네가 온통 떠들썩했고 여름, 가을이면 개구리며 풀벌레 소리에 귀청이 떨어져나갈 지경이었다. 말로야 서울이 싫다고들 하지만 자녀교육이며 직장 등을 핑계로 모두들 변두리 생활을 기피하던 시절이었다. 나는 이 촌동네에서 아이들이 마음껏 뛰어 놀도록 했다. 다른 부모들처럼 극성스럽게 아이들을 볶아댈 만한 마음의 여유도 없었고 돈도 없었다. 원래 원지동은 참외와 수박이 유명했는데 우리 집도 밭에다 직접 심어 먹었다. 여고 2학년부터 중학생, 초등학생까지 골고루였던 아이들이 모두 삽이며 괭이를 들고 밭일을 도왔다. 그러고도 틈이 생기면 밖으로 나가 손발이 새까매지도록 뛰어 놀았다. 사업의 어려움으로 항상 침울해 있던 내게 그런 집안 분위기는 많은 위안이 되어주었다. 절망 속에서 허덕이는 아버지와 묵묵히 집안일을 지키는 어머니를 지켜보며 아이들은 철도 일찍 났던 모양이다. 집안 공기는 항상 침울했지만 아이들은 일부러라도 웃고 떠들 줄을 알았다. 다른 아이들 같았으면 집안 여건을 비관하고 비뚤어지기도 했으리라. 시키지 않아도 모두들 힘을 합쳐 집안일 에 한몫씩을 해왔다. 그 민감할 나이에 학비를 제때 주지 못해도 울거나 짜증내는 녀석 하나 없었다. 그러다 보니 자연히 '재수를 하면 안 된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맏딸은 이화여대 건강교육학과를 졸업했고, 둘째 딸은 세종대학 성악과, 셋째 딸은 덕성여대 가정관리학과를 졸업했다. 넷째이자 장남은 중앙대 기계공학과와 동대학원을 마쳤고, 막내는 중앙대 무역학과를 졸업했다. 내 친구들 사이에서는 대단한 실적으로 꼽힌다. 모두 재수 한 번 안하고 소위'서울에 있는 4년제 대학'을 졸업했기 때문이다. 우리 아이들이 밝고 성실하게 자라주었던 것도 경쟁 없는 시골 분위기에서 따뜻하게 성장했기 때문이라고 나는 믿는다. 모두 스스로 깨닫고 스스로 결정한 방향대로 자라주었다. 내가 한 일이 있다면 무엇이든 억지로 시키지 않았다는 것뿐이다. 그러니 누가 자꾸 물으면 무엇이든 억지로 시키지 않았다는 것뿐이다. 그러니 누가 자꾸 물으면 '방목'이라고 대답할 밖에. 딸들은 모두 성실하고 평범한 남편들을 만나 행복하게 살고 있다. 두 아들은 각각 현대자동차와 삼성신용카드에 근무하고 있다. 큰아들은 수도권 근무를 마다하고 일부러 생산 부서를 지원해서 지금 울산에서 일하고 있다. 현대자동차를 평생직장으로 삼아 밑바닥에서부터 경험을 쌓겠다는 그 마음이 기특하다. 막내아들은 대학원을 가겠다. 유학을 가겠다고 하는 것을 '학문을 하지 않을 바에야 곧바로 사회에 뛰어드는 게 더 낫다'라고 설득했더니 삼성그룹에 공채로 입사했다. 일류대학 출신자들 속에서도 당당하게 인정받으며 일하는 모습이 또한 대견하다. 나는 아이들을 잡초처럼 키웠다. 내 스스로 잡초처럼 살아왔고, 그래서 잡초의 생명력과 가능성에 대한 믿음이 있었다. 자녀를 자기 뜻대로 재단하고 다그치는 부모들은 자녀들에 대한 믿음이 부족한 것이다. 아이들을 못 믿기 때문에 항상 자신의 시야 안에 잡아두려고 한다. 그건 아이들뿐만 아니라 부모들도 피곤하게 만든다. 자녀들에 대한 사랑과 믿음만 있다면, 눈 딱 감고 풀어 기르자는 말이다. 아이들에게도 자신의 인생을 선택할 권리가 있다. 부모의 역할은 아이들에게 계획표를 짜주고 시간표를 짜주는 것이 아니다. 아이들이 스스로의 판단과 취향에 따라 세상을 마음껏 모험할 수 있도록 분위기와 환경을 조성해주는 것이다. 자녀경영에도 벤처 정신이 필요하다. 아이들은 거칠게 풀어놓고 함부로 길러야 독립심 강하고, 건강하며, 생명력도 강한, 진짜 인재로 성장할 수 있다고 말이다. 나는 이 촌동네에서 아이들이 마음껏 뛰어 놀도록 했다. 다른 부모들처럼 극성스럽게 아이들을 볶아댈 만한 마음의 여유도 없었고 돈도 없었다. 집안 공기는 항상 침울했지만 아이들은 일부러라도 웃고 떠들 줄을 알았다. 나는 아이들을 잡초처럼 키웠다. 내 스스로 잡초처럼 살아왔고, 그래서 잡초의 생명력과 가능성에대한 믿음이 있었다.
Board 말글 2020.07.14 風文 R 33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