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교관과 외국어 외교부에서 외교관들의 영어 능력을 걱정한다는 말이 놀랍기도 하지만 다시 생각해보면 그럴 수 있겠다 싶기도 하다. 또 다른 소식 때문이다. 많은 국외 근무 공무원이 현지인과의 교류에 집중하기보다는 국내에서 오는 고위층의 의전과 접대에 무척 시달린다는 소문 말이다. 외국 경험이 풍부한 사람도 오랜만에 출국하면 적어도 며칠은 혀가 굳어버리는 일을 자주 겪는다. 그만큼 외국어는 ‘일상화’되었을 때 윤이 난다. 하루라도 잡무에 정신을 팔고 나면 그만큼 현지어의 능숙함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 그러니 국내 인사의 관광 안내에나 내몰리고 나면 어느 겨를에 현지 언어 수련을 제대로 해내겠는가. 우리가 길러낸 외교공무원은 그저 그런 시험으로 뽑힌 잔심부름꾼이 아니다. 우리의 눈과 귀가 되어야 할 사람들이다. 또 진짜 고급스러운 외국어 능력은 어휘력이나 멋진 발음만이 아니라 풍부한 ‘교양’의 문제이기도 하다. 유능한 외교관은 교섭 능력 못지않게 현지 여론을 주도하는 교양 계층을 파고들어야 하기 때문이다. 교양은 스스로를 그 사회와 문화 속에 푹 담가서 숙성시켜야 겨우 제 노릇을 할 수 있다. 그제야 우리의 이익을 지켜줄 ‘소통망’에 접선된다. 이제는 산업 부문만이 4차 혁명을 맞는 것이 아니다. 언어적 소통 능력과 방식도 또 한 단계 올라가야 한다. 그저 그런 평범한 외국어 능력은 곧 인공지능이 대리해줄 것이다. 더 풍부한 ‘수사법’, 만민과 교류할 수 있는 ‘공감 능력’, 이방인들과의 깊은 ‘유대감’ 등이 소통의 수준과 차원을 한 단계 더 높여줄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기껏 길러놓은 전문가들의 능력을 헛되이 낭비하는 일 없이 평소부터 잡무에서 벗어나 스스로 자기 연마를 하게 했으면 한다. 우리의 전문가들을 이대로 방치해서는 아니 된다. ………………………………………………………………………………………………… 백두산 전설 남과 북의 지도자들이 부부 동반으로 백두산 정상을 거닐었다. 백두산에 깃든 전설 이야기도 나누었단다. 어느 지역에 가든지 산과 골짜기, 그리고 샘이나 동굴들은 대개 이야기를 가지고 있다. 자연환경은 이렇게 이야기를 통해 인간과 특별한 관계를 맺는다. 백두산처럼 거대한 지리적 대상은 당연히 수많은 이야기를 품고 있을 것이다. 이런 이야기 가운데 권력의 문제를 다루는 것이 신화다. 백두산도 신화를 가지고 있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것이 단군 신화다. 신화이니만큼 믿거나 말거나 한 부분이 적잖다. 모든 신화와 건국 설화는 팩트 체크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백두산은 우리가 아닌 또 다른 민족과도 인연을 맺고 있다. 중국의 구성 민족인 만주족이다. 그들의 옛 기록, <만주실록>에 따르면 하늘의 세 선녀가 내려와 목욕하고 나서 막내가 까마귀가 갖다놓은 열매 씨를 먹고 임신해 아이를 낳았는데 만주인들의 조상이 되었다고 한다. 우리의 나무꾼과 선녀 이야기와 부분적으로 비슷하다. 그러니 백두산을 우리와 중국이 공유하는 것도 일리가 있기는 하다. 백두산을 중국에서는 장백산이라고도 한다. 만주인들이 ‘골민 샹기얀 알린’(길고 하얀 산)이라고 일컫는 것을 한자로 직역한 것이다. 아무래도 높고 눈이 많이 쌓이는 하얀 산을 사람들은 신비하게 느끼게 마련이다. 티베트의 설산이나 일본의 후지산이 주는 느낌과도 비슷하다. 프랑스말로 ‘몽블랑’, 이탈리아말로 ‘몬테비앙코’도 하얀 산이라는 뜻이다. 종종 백두산 정상을 우리가 독차지 못 하고 중국과 공유한 것을 가지고 불만이 있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이렇게 이웃 민족과 다양한 전설을 공유하면서 함께 ‘영산’으로 품고 있다는 것이 역사적으로도 타당하고 안보상으로도 더 이익이다. 역사와 문화는 독점하려 하면 할수록 더 고립되고 위험해진다. 김하수/한겨레말글연구소 연구위원·전 연세대 교수
약속의 유효기간 톨스토이가 여행길에 올랐을 때의 일이다. 한적한 어느 시골길을 지나가는데 7살 정도의 귀여운 소녀가 사진을 뚫어지게 쳐다보더니 엄마의 옷깃을 잡아끌었다. 아이는 엄마에게 무어라 말하며 한참 때를 쓰더니 급기야 울음을 터트렸다. 슬쩍 엿들어보니 소녀는 그가 허리에 둘러맨 백합꽃 수가 놓여진 가방을 갖고 싶다는 거였다. 톨스토이는 가만히 소녀에게 다가갔다. "애야, 힘들겠지만 내일까지 기다리렴. 내일이 되면 나에게 이 가방은 소용없어질 것 같구나. 그땐 틀림없이 네게 이 가방을 선물하마. 자. 그만 울고..." 톨스토이의 상냥함에 소녀는 금방 울음을 그쳤고 약속에 대한 기대감으로 빰이 발갛게 물들었다. 사실 톨스토이에게 그 가방은 매우 소중한 친지의 유품이었다. 또 가방에는 그의 책과 기타 여행에 필요한 것들이 가득 담겨 있었다. 아음날 저녁,톨스토이는 약속을 지키기 위해 다시 시골길로 돌아와 일부러 그 소녀의 집을 찾아 갔다. 그런데 소녀의 집에 도착해 보니 방금 장례식을 마치고 돌아온 듯한 사람들의 모습이 여기저기 보였다. 소녀의 어머니에게 물어보니 어제 톨스토이와 헤어지고 집에 돌아온 후 아이가 갑자기 이름모를 병으로 죽었다고 말했다. 톨스토이는 소녀의 어머니에게 묘지까지 안내를 해달라고 부탁했다. 묘지에 도착한 그는 자신이 가지고 온 소중한 가방을 무덤 앞에 바치고 엄숙히 기도했다. "이젠 그 애가 죽었으니 가방은 필요 없어요. 고맙지만 가지고 가세요." 옆에서 지켜보던 소녀의 어머니가 미안한 표정으로 이렇게 말했다. "아뇨,따님은 죽었지만 나의 약속은 아직 죽지 않았습니다." 톨스토이를 바라보던 어머니의 눈에서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렸다. 참 가슴 찡한 이야기/반도
Board 추천글 2022.06.22 風文 R 3729
현대소설용어사전 ● 경향 문학(傾向文學) 의식적으로 정치적, 도덕적, 종교적, 계급적인 것을 취급하여 대중을 그와 같은 방향으로 계몽하고 유도하자는 목적 아래 쓰이는 작품. 교훈시나 프로 문학이 이에 속한다. ● 계몽 소설 계몽주의 사상을 바탕으로 하거나 그것의 전파를 위해 쓰여진 소설을 가리킨다. 본래 계몽주의는 문예사조적 개념보다 포괄적인 개념으로 루소, 볼테르, 디드로 등에 의해 17세기 서구에서 발전하여 18세기에 그 절정에 이른 문화적 운동을 지칭하는 용어로서, '미성년의 상태에서 성년으로 만들기 위하여 교육하거나 비판하는' 의미를 담고 있다. 그러나 이 용어는 우리 문학사 속에서 발견되는 특수한 이야기의 유형을 한정적으로 지칭하는 개념으로 보편화되었다. 우리 나라의 계몽 소설은 이광수에 의해 개척되었는데, 식민지라는 현재적인 상황에서 출발한 역사 의식적 계몽 의식이 아닌, 봉건적 전근대성에 대한 반발로서의 계몽 의식이 엿보이고 있다. 미신 타파, 자유 결혼, 과학적 학문의 존중 등의 계몽 사상이 많이 드러나고 있다. 초기 계몽주의 소설은 이후 '브나로드 운동'으로 발전, 계승되어 농촌 소설의 형태로 이어지고 있다. ● 고백 소설 화자가 자기 자신의 경험을 회상한다거나, 자전적인 체험의 직접적인 토로라는 서술적 유형을 가지고 있는 소설을 의미한다. 대부분의 1인칭 주인공 시점은 고백 소설에 상응한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소설들은 화자가 자신의 이야기를 독자에게 들려주는 형태를 취하고 있는데, 이광수의 '나/소년편'은 서문을 통해 화자 겸 주인공인 '도경'이 작가 자신임을 밝히고 있고, 정비석의 '고원'에서는 어떤 실재 인물의 노트를 조금 손질하여 소개한다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 ● 골계(滑稽) 보통 '우스꽝스러움'이라고 번역되는 골계는 웃음을 자아내는 문학의 모든 요소에 폭넓게 적용되는 말이며, 이보다 하위 범주로 기지, 풍자, 반어, 해학 등을 포함하고 있다. 골계는 크게 객관적 골계와 주관적 골계로 나누어진다. 객관적 골계는 웃음거리가 되는 대상 그 자체의 성질이나 형상에 의지하는 골계로서 대상을 우습게 하려는 작가의 계산된 배려가 그다지 크게 작용하지 않는 웃음을 의미한다. 말하자면 더욱 자연스러운 골계이다. 찰리 채플린의 모습이 그 대표적 예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주관적 골계는 작가의 치밀한 계산에 의한 웃음의 장치이다. 객관적 골계에 비해 복잡한 미적 범주이므로 작가의 고도의 통제 능력이 없다면 작품의 파탄을 가져오게 할 위험이 크지만, 한편 복잡 다단한 모순 덩어리로서의 인간 존재의 모습을 효과적으로 그려낼 수 있는 문학적 장치이기도 하다. 김유정의 '봄.봄', '동백꽃' 등의 작품이 그 예이다. ● 공간, 공간성 소설 속에서 어떤 사건이 일어나거나 정황이 진술될 때, 구체적이고 물리적인 배경이 필요하게 된다. 이때의 장소적 요건을 만족시키는 것이 소설에서의 공간이다. 그런데 공간의 개념은 항상 물리적인 장소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화자나 등장 인물의 의식 속에서도 공간의 개념은 존재하게 된다. 이때는 공간이라는 개념보다는 공간성이라는 개념이 더 유용하다. 이상의 '날개'에서 '33번지'는 구체적으로 존재하는 공간(space)이라기보다는 가상적이면서 무언가 암시적인 의미를 담고 있는 공간성(spatiality)이 되는 것이다. ● 공상 과학 소설(science fiction) 과학적 사실을 바탕으로 하여 실현 불가능한 허구적 세계를 이야기 형식에 담는 것을 특징으로 하는 소설의 유형을 지칭하며, 최근에는 약칭인 SF라는 말이 더 많이 사용되고 있다. 서구 문학에서 SF의 기원은 조나단 스위프트의 '걸리버 여행기'에서 찾을 수 있다. 그 뒤를 이어 '플랑켄슈타인', 타임 머신', '우주 전쟁' 등의 공상 과학 소설이 등장하였다. 이러한 작품들은 비록 허황된 세계를 기반으로 하여 허구의 극단을 제시한다는 견해도 있지만, 인간의 낙관적인 꿈을 실현하려는 메시지를 담고 있어 긍정적 요소도 지니고 있다. ● 교육 소설 젊은(혹은 어린) 남녀들을 바람직한 시민으로, 그리고 도덕적, 지적으로 성숙한 성인으로 교육시킬 목적으로 18세기 말 유럽에서 발달된 장편 소설의 한 양식이다. 루소의 '에밀'은 가장 대표적인 예이며, 어떤 의미에서는 이것은 성장 소설의 모범적인 모습이기도 하다. 대부분의 이 계통의 소설들은 불우한 소년 소녀가 고난과 역경을 이기고 바람직한 성인으로 성장해 가는 과정을 담고 있다. 마크 트웨인의 '허클베리 핀', '톰 소여의 모험', '왕자와 거지', 요한나 슈피리의 '하이디' 등이 대표적인 유형이며, 우리 나라에서는 조흔파의 '얄개전', 김내성의 '쌍무지개 뜨는 언덕', 최인호의 '우리들의 시대', 오탁번의 '달맞이꽃 피는 언덕' 등이 대표적 작품으로 꼽힌다. ● 구상(構想) 하나의 작품이 탄생하기 전에는 작가의 상상력에 의한 착상이 있어야 한다. 작가의 착상은 작품에 있어서는 시초에 불과한데, 그것이 집필로 적용되기까지는 실로 오랜 세월과 고미을 거쳐야만 한다. 고향에 관한 이야기를 쓰고 싶다고 해서 곧바로 고향에 대한 이야기를 쓸 수는 없는 것이다. 고향에 관한 이야기를 쓰고 싶다는 것이 착상의 시초라면, 그 시초는 모호하거나 아무런 구체적 형태도 가지지 않는다. 선명한 인상을 떠올리고 불필요한 인상을 지워 나가며, 서사적 흐름을 조절하고 사건과 상황에 의미를 부여하는 일련의 정신적 고뇌가 필요하다. 그런 뒤에야 집필에 들어갈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구상이란 착상과 집필의 사이에 가로놓이는 정신의 모든 움직임을 말한다. 따라서, 그것은 작가의 의도 속에다 작품의 전모를 그려 넣는 과정이고, 생각을 얽어 짜는 과정이다. ● 구조(構造) 구조란 하나의 작품을 구성하고 있는 다양한 내부 요소들이 맺고 있는 상호 관계 및 그것들의 유기적인 결합을 지칭하는 말이다. 블럭으로 기차를 만든다면, 기차는 하나의 전체이며 하나의 구조이고, 각각의 블럭들은 기차라는 구조의 구성 요소이다. 소설에서 본다면, 완성된 한 작품만이 전체가 아니라 소설의 한 단락, 한 문단도 전체로 간주될 수 있다. 이것들은 이들 나름대로의 부분을 가지고 있는 전체이자 더 큰 전체의 어느 한 부분으로 참여하는 것이다. 이것들은 각각 독립되어 있으면서도, 서로 관계를 지니고 있는 것이다. 문학이 언어에 의한 구조물이라는 인식하에서 현대에 오면서 구조에 대한 관심은 매우 높아져 가고 있다. ● 구체화 독서 과정을 텍스트의 '구체화' 과정이라고 하는데, 소설 읽기 역시 '구체화'의 작업이다. 그런데 소설 속에는 간혹 결정되거나 알려지지 않은 면들이 나타날 때가 있다. 이러한 면들을 '미결정성' 또는 '미확정성'이라고 하는데, 독서의 과정에서 이러한 미확정성 및 틈을 채우거나 도식화 된 면을 제거하는 일을 구체화라고 한다. 가령, "버스가 산 모퉁이를 돌아갈 때 나는 '무진(Mujin) 10㎞'라는 이정비를 보았다."라는 문장이 있다면, 이 속에는 버스의 생김새나 속도, 이정비의 모습 혹은 무진이라는 지명에 대한 의문 등이 함께 존재하는 것이다. 이러한 면들은 작가가 일일이 지적해 주는 것이 아니라 독자가 책을 읽어 가는 과정에서 상상을 통하여 스스로 채워야 하는 것이다. 이것이 독서에 있어서의 구체화가 되는 것이다. ● 권선 징악(勸善懲惡) 조선조의 소설에서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특성 중의 하나로, 올바르고 선량한 인물이 온갖 시련과 난관에 봉착하지만 결국 행복에 도달한다는 플롯 구조를 이르는 말이다. 이는 물론, 악을 멸하고 선의 궁극적인 승리를 보임으로써 읽거나 듣는 이에게 도덕적으로 열정을 고무시킨다는 작의(作意)를 지닌 것이다. ● 근친 상간 모티프 프로이트에 의해 일반화된 용어인데 프로이트는 인간을 "아비의 목을 비틀고 어미와 동침하고자 하는 존재"로 보고 있다. 즉, 부친 살해 충동과 근친 상간 충동은 인간의 근원적인 심리 충동의 한가지 양상이라는 것이다. 이 모티프가 가지는 방향성은 때때로 텍스트 속에서 엄밀하게 분리되지 않은 채로 드러나는데, 특정 텍스트 속에서 볼 수 있는 어머니와 아들, 오빠와 누이동생 사이의 성 관계는 순수하게 성적인 욕구나 충동의 측면에서 금기를 넘어서고자 하는 심리를 반영하는 데 국한되지 않는다. 대체로 등장 인물들이 서로의 신원을 확인하지 못한 상태에서 사건이 발생하고, 후에 자신들의 관계를 확인함으로써 회한스러운 비극적 운명에 빠지고 마는 일종의 원죄 의식을 드러내고자 하는 의도가 이러한 성적인 심리의 표현과 함께 섞여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모티프가 반영된 작품으로는 장용학의 '원형의 전설', 김성종의 '어느 창녀의 죽음' 등이 있다. ● 기대 지평(expectation horizon) 작품이 창작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독자에 의해 수용되는 과정을 필요로 한다. 즉, 작품은 '작가→텍스트→독자→작품'의 네 단계로 구성되며, 텍스트를 받아들이는 독자들의 반응에 따라 작품은 다양한 모습을 가지게 된다. 기대 지평이라는 말은 이러한 문학 행위의 세 번째 단계, 즉 독자의 단계에서 설정된 개념이다. 이를테면, 독자들의 선험.경험.의식.습관.취향.기호.상식.교육.심미 규범 등은 모두 기대 지평을 구성하는 요소들이다. 텍스트에 대한 독자들의 기대 지평이 충족될 때, '친숙한 지평'이 발생한다. 그러나 시대의 발전과 문학 환경의 변화에 따라 문학 작품은 새로운 모습으로 등장하며, 그때마다 독자들은 텍스트의 '새로운 지평'에 부딪히게 된다. 독자들의 '친숙한 지평'과 텍스트의 '새로운 지평' 사이의 이러한 충돌로 인하여 이른바 '지평의 전환'이 생겨난다. 이러한 지평의 전환은 곧 독자들에게 수용되어 새로운 '기대 지평'으로 작용한다. 장정일의 '아담이 눈뜰 때' 같은 소설은 지평의 전환을 초래하는 대표적인 작품으로 볼 수 있다. 이는 기존에 지녀 왔던 작품에 대한 독자들의 기대 지평을 과감하게 깨뜨리고 있는 작품이다. 그러나 이러한 지평의 전환은 독자들이 수용하지 않는다면 새로운 기대 지평이 될 수 없다. ● 기록 소설(documentary) 신문 기사나 재판 기록, 또는 공문서 등과 같이 기록되어진 자료들을 바탕으로 해서 씌어진 소설의 한 형태이다. 기록 소설은 흔히 어떤 사건에 대한 정보나 사실을 전달하기 위해 씌어지는데, 현실의 경험으로부터 직접 취한 소재를 가능한 한 정확하게 기록하는 것을 그 특징으로 한다. 기록 소설은 허구적인 소설이 가지기 어려운 '사실성'을 더 가질 수 있고, 그 결과 독자들에게 더욱 강한 인상을 남기게 된다. 그러나 현실에서 실제로 발생한 사건에 의거하는 기록 소설은 그 시대의 관심사나 정열에 대한 전체적인 조망을 놓치기 쉽다는 결점을 지니고 있다. ● 기지(機智)와 유머(humor) 기지와 유머는 우스운 것, 또는 희극의 개념과 관련된다. 기지는 본래 사람의 오감(五感)을 뜻하는 말로서 지능이나 창의력 같은 정신 능력을 의미했으나, 현대에 와서는 우스운 말의 일종으로 간주되기 시작하여 흔히 짧고 교묘하고 희극적인 놀라움을 일으키는 일종의 언어적 표현으로 그 의미가 변질되었다. 유머는 중세 및 르네상스 시대의 생리학 용어로서 개개인의 기질과 관계되는 네 가지의 체액을 뜻하였으나, 오늘날에 와서는 우습고 재미있는 것으로서 정답고도 동정적인 형태의 희극성을 가리키는 말로 되었다. 이러한 희극적인 두 요소는 서로 다른 면을 지니고 있다. 말하자면, 기지는 일치한다고 믿어지는 사실에서 불일치를, 불일치한다고 믿어지는 사실들에서는 일치점을 발견하는 예리한 판단력이면서 그 결과를 간결, 명확하고도 암시적인 문구나 정리된 말로 능숙히 표현하는 능력이다. 이에 반하여 유머는 이웃에 대하여 선의를 가지고 그 약점, 실수, 부족함을 즐거운 마음으로 함께 시인하는 공감적인 태도이다. 그러므로 유머는 기지가 갖는 신선하고 예리한 비판성이 없고, 불일치를 발견하되 비공격적이며, 자신도 그런 불일치가 자행되는 사회의 일원임을 암시하는 겸허와 아량을 보인다.
한승원의 글쓰기 교실 제10교시 - 왜 볼펜 방아잘만 하고 있는가? - 글을 쓰기 전에 제목과, 소재, 주제에 관한 생각을 다듬어라. 1. 누구든지 볼펜 방아질을 한다. 여기저기에서 봄이 왔다고들 야단이다. 그러나 한 아이는 그 봄이 실감나지 않았다. 그 아이는 봄을 절실하게 느껴 보고 싶어서 들로 나가 보았다. 남쪽에서 훈훈한 바람이 불어오고, 사람들이 농사를 준비하고...... 정말로 봄인 것 같은데, 그 아이의 가슴속 깊은 곳엔 봄이 와 닿지 않았다. 산으로 올라가 보았다. 앞산과 지평선 저쪽에서 아지랑이가 수런거리고, 보리밭에서 종달새가 표롱표롱 날아다니고, 새까만 염소가 풀을 뜯고, 마을 쪽에서는 꼬끼오 하는 수탉의 울음소리가 아스라이 들려왔다. 그래도 '아 이것이 봄이로구나!' 하는 생각이 들지는 않았다. '아무래도 내 감성이 둔해서 그런가 보다.' 그 아이는 이렇게 생각하면서 쓸쓸하게 자기 집으로 돌아갔다. 그런데 뜻밖에도 그 아이는 자기 집의 돌담 앞에서 깜짝 놀라 걸음을 멈추었다. 그 아이가 찾아 헤매던 봄의 실체가 바로 거기에 있었던 것이다. 돌담 사이에서 바야흐로 돋아 나오고 있는 명아주 풀의 새순 하나. 이 이야기를 통해 우리는 무엇을 느낄 수 있는가? '봄은 약동하는 계절이다. 그 약동을 느끼게 하는 실체는 어디에 있을까?' 그 아이는 어렴풋이나마 이러한 생각을 한 채 산과 들을 헤메었을 것이다. 그 때문에 그 아이는 봄바람이나 아지랑이나 종달새나 수탉이나 염소에게서는 그 생명의 약동을 절실하게 느끼지 못했다 매우 뜻밖에도 돌담 사이에서 돋아 나오고 있는 어린 새싹 하나를 보고 나서야 비로소 그것을 느꼈다. 이 이야기를 글쓰기에 견주어 보자. 그 아이가 느끼려고 한 '봄'은 좋은 글감(대상)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아무리 좋은 글감이라 할지라도 그 큰 것을 통째로 글 속에 담아 내려고 하면 글쓰기가 힘들어 진다. 그것의 부피와 높이와 길이가 너무나 엄청나기 때문이다. 그것을 다 담아 내려고 욕심을 부리다 보면, 끝내는 그것의 반의 반쪽도 담아 낼 수가 없다. 그것은 마치 작은 보자기 속에 산이나 바다를 담으려는 바보와도 같다고 할 수 있다. 이처럼 처음부터 큰 것을 잡으려고 하다 보면 글쓰기에 실패하기가 쉽다. 옛날에 김황원이라는 선비가 있었다. 그는 시짓기에 통달했다고 은근히 뽐내면서 스스로 오만함에 빠져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친구인 평양 감가를 찾아 유람을 떠났다. 평양감사는 그를 반가이 맞아들인 위 을밀대로 안내하였다. 그 곳에는 대동강의 아름다운 정경을 읊은 시를 새긴 현판들이 여기 저기에 걸려 있었다. 그 시들을 찬찬히 읽어 보던 김황원은 그 시에 담겨 있는 저급한 내용들을 참을 길이 없었다. 그래서 그 현판들을 모조리 뜯어 내어 불살라 버리고 말았다. 그러고는 당황하여 어쩔줄 몰라 하는 평양 감사에게. 자기가 그 모든 것들을 깨끗하게 덮어 버릴 수 있는 명작을 지어 보이겠다고 큰소리 쳤다. 이윽고 그는 을밀대의 난간에 기대어 서서, 푸른 비단을 펼쳐 놓은듯한 강물을 굽어보며 시를 읊기 시작했다. 긴 성 한쪽으로 강물은 출렁거리며 흐르고, 드넓은 들판 동쪽 머리에는 산들이 점점이 늘어서 있구나. 한데 그 두줄을 읊고 나니 글줄이 막혀 버리고 말았다. 아무리 머리를 이리 짜고 저리 짜 보아도 다음 구절이 이어지지 않았다.그는 자신의 글재주가 겨우 이정도 밖엔 되지 않는가 하고 깊은 절망에 빠져 들었다. 결국 그는 자신의 부족함을 마음속 깊이 한탄한 나머지, 울면서 을밀대를 내려와 버렸다. 자신의 글재주에 대해 그토록 자부심이 강했던 그가 왜 시를 두줄밖에 읊지 못했을까? 그 까닭은 세 가지로 나누어 생각해 볼 수 있다. 첫째는, 너무 큰 글감(대동강의 기막힌 장관) 때문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것에 대한 감동이 너무 큰 나머지 그만 시인이 눌려 버린(압도당한) 경우이다. 둘째는, 첫머리에서 너무 큰 내용(장관)을 읊어 버린 까닭이다. 이렇게 되면, 뒤에 이어 쓸 수 있는 더 큰 말을 찾기가 몹시 어려워 진다. 셋째는, 처음 두 줄에서 눈앞에 나타난 경치를 읊었으나, 다음에는 인간사를 끌어내어 읊어 나가는 것이 일반적인 순서이다. 그런데 그에게는 그럴만한 능력이 없었을 거라는 짐작이다. 글을 제법 쓴다는 선비들도 이러한 걸 보면, 이제 글쓰기 공부를 막 시작하는 여러분들이 좋은 글을 쓰기 위해 고심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글의 제목을 받고 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글 쓸 거리가 얼른 잡히지 않기 때문에 볼펜 끝으로 애꿎은 종이 한복판을 꾹꾹 쑤셔댄다. 종이 가장자리에다가 자기도 알 수 없는 지렁이들을 새까맣게 그려댄다. 그러다가 쓸거리가. 언뜻 떠올라서 '아, 이것이다.!' 하고는 몇 글자르 ㄹ써 나가다가, '아니야 이게 아니댜!'하고 절망하면서 썼던 것들을 북북 그어 버린다. 마치 실이 나오지 않아 자기가 들어갈 집을 짓지 못하는 누에처럼 고개를 홰홰 내젓곤 한다. 그리고 또 얼마쯤 뒤에 '그렇지, 바로 이거야!' 하고는 서너 줄쯤 써 나가다가 이번에는 종이를 아예 구겨 던져 버린다. 자기 머리를 쿵쿵 때려 보기도 하고, 쩝쩝 쓴 입맛을 다셔 보기도 하고...... 우리는 이렇듯 글의 제목을 앞에두고 고통스러워하는 경우가 자주 있다. 이렇게 되면 글을 쓰는 일이 재미있는 게 아니라 고문을 당하는 것과 마찬가지가 되어 버리고 만다. 2. 너무 큰 제목과 글감에 깔려 질식하지 말라. 자, '가을' 이란 제목을 받았다고 가정하자. 물론 이렇게 미련스런 제목을 주는 사람들은 애초에 글 쓸 사람들을 고문하려는 의도를 가진 사람이거나, 좋은 글을 받아 낼 의사가 없는 사람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가을'이라는 제목은 아직 인생을 배워가는 입장에 있는 여러분 들이 쓸 수 있는 글의 제목치고는 엄청나게 큰 것이기 때문이다. 글을 쓸 여러분들이 보듬어야 할 대상(제목)이 너무 크면, 그것이 여러분들의 품속으로 들어오지 않을 뿐 아니라 여러분들의 힘으로서는 감당조차 할 수 없게 된다. 그것(제목)을 보듬기는커녕 그 밑에 깔려 죽기 십상이다. 그런데도 대게 이런 경우, 여러분들은 그 제목만큼 커다란 글감과 주제를 처음부터 들고 나선다. 자기가 감당할 수 없을지라도 말이다. 나도 여러분들만할 때는 그랬으니까. 가을 그렇다. 가을은 퇴락하는 계절이고 이별의 계절이다....... 중학생 시절, 작문 시간에 나는 글의 서두를 이렇게 시작했다. 이 얼마나 거창한 말인가? 한껏 고심한 후에 써 낸 첫 문장이 이렇듯 큰 말이면 다음 말을 이어 쓸 수가 없게 된다. 그래서 나는 그 때 연필방아만 내내 찧어대다가, 결국 글다운 글을 쓰지 못하고 말았다. 3. 작은 이야기부터 시작하라 큰 강물을 거슬러 올라가 보면 조그마한 샘물에서 시작되는 것을 알 수 있다. 그 샘물에 다른 샘물이 보태지고 또 다른 샘물이 보태지면서, 물줄기는 점차 커지다가 마침내 강물이 되는 것이다. 글쓰기도 그와 같다. 앞에서 우리는 봄을 찾기 위해 온 산과 들을 헤매어 다니다가 결국 찾지 못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돌담 사이에 돋아난 어린 새싹에게서 그것을 느끼게 되는 한 아이를 보았다. 글쓰기도 마찬가지다. 씨름도 나(글쓴이)보다 힘이 약하고 체구가 작은 사람과 하게 되면 상대가 만만하게 여겨져서 마음대로 꾀를 부려 힘을 쓸 수가 있다. 하지만 나보다 힘이 세거나 체구가 큰 상대(너무 큰 제목이나 글감)를 만나면, 여느때 자기가 잘 쓰곤 하던 꾀나 힘을 제대로 한 번 써 보지도 못한 채 상대(제목이나 글감)에게 지고 만다. 가령'가을'이라는 커다란 글감이 주어졌다면 대개 당황을 할 것이다. 그렇지만 범위를 좁혀서 '귀뚜라미'나 '낙엽', '기러기' 따위로 글감을 삼는다면 한결 덜 부담스러워 진다. 그러면 '낙엽'에 관한 작은 이야기를 써 보낸 독자의 글을 한편 읽어보자. 올 가을도 어김없이 갈색 옷을 입은 낙엽이란 손님이 우리를 방문한다. 자신에게는 죽음이랄 수 있는 그 순간까지 아름다움을 뽐내며 우리에게 여러 가지 감정을 느끼게 하는 그들...... 나는 그들을 보며 한 해도 이제 거의 저물어 가고 있다는 생각과 올해 나는 만족할 만한 생활을 하고 있는가 하는 반성을 하게 된다. 수업시간에 아무 생각없이 그저 하늘을 쳐다 볼 때, 하늘에 닿을 듯 우뚝 솟아 있는 나무는 나약한 나를 나무라는 듯이 미동도 없다. 그러나 전혀 변하지 않을 듯이 보이는 그도 계절이 바뀔 때마다 다른 모습으로 치장하며 나를 마주본다. 이제 그는 벌거벗은 몸으로 내년의 또 다른 영광을 준비하고 있다. 그런데 지금 이렇게 흘러가는 나날처럼 한 장 한 장 떨어지는 나뭇잎을 보는 나는 과연 한 해를 어떻게 보냈는지...... 변하지 않은 것 같으면서도 내실 있는 꾸준한 변화로 미래를 준비하는 나무와는 달리 나는 겉으로는 화려하게 보이지만 한 꺼풀 벗겨보면 아무것도 없는 실속 없는 행동을 너무 많이 행했던 것 같다. 낙엽이 또 한 장 떨어진다. 손을 뻗어 떨어지는 낙엽 한 장을 잡아 책갈피에 곱게 끼워 넣는다. 그리고 생각한다. 이 나뭇잎이 바삭바삭 마르고, 이 나뭇잎이 있던 자리에 새순이 돋아날 때쯤이면 나는 다시 새로운 계획을 세워 내 자신을 좀더 향기 있게 가꿀 수 있을 것이라고...... 이 나뭇잎 한 장을 항상 떠올리며. 이글의 지은이는 감수성이 아주 예민하여 대상을 자기의 정서 속에서 잘 소화하고 있고, 문장 또한 차근차근 밀도 있게 쓰고 있다. 생각을 잘 정리하여 진술하는 힘도 믿음직스럽다. 4. 작은 이야기(글감)속에 큰 이야기(주제)를 담으라 논술을 쓸 떄 유의할 점이 바로 이것이다. 우리는 글을 쓰기 전에 먼저 마음속으로 큰 이야기(강=주제)를 생각하지 않으면 안된다. 머릿속으로 먼저 큰 강을 그려 놓은 뒤, 그것의 연원(작은 샘물 =소재)에서 강으로 더듬어 내려가야 한다. 이번에는 '은행나무는 은행이라는 열매를 성취한 존재이다. 나도 그것처럼 목표를 달성하자'는 큰 생각(주제)을 한 다음, 작은 강줄기를 따라 글을 써 내려간 독자의 글을 한 편 읽어 보도록 하자 요즘들어 우리 학교 운동장 보도 쪽에는 은행잎들이 상당히 많이 떨어져 있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우리 학교의 은행나무들은 얼마 되지 않은 은행잎으로 가지를 가리고 있었지만, 지금 운동장에 나가 보면 앙상하게 가지만 내어 놓고 있다. 전에는 가끔씩 창 밖을 보면 떨어지는 낙엽을 보며 잠시나마 옛 생각을 떠올릴 수 있지만, 이제는 창 밖을 보아도 앙상하게 나와있는 가지밖에 볼 수 없어서 무척 안타깝다. 그렇지만 이 추운 겨울이 지나가고 다시 봄이 오면 앙상했던 은행 나뭇가지엔 새파란 은행잎이 다시 태어날 것이다. 그리고 여름이 오면 열매를 맺고 가을이 오면 잎이 노랗게 물이 들어 겨울이 다가오면 다시 잎이 떨어지는 것을 반복할 것이다. 우리가 열심히 노력해서 자신이 바랐던 것을 이루고 다시 다른 것을 위해 열심히 노력해서 이루는 것이나 은행나무가 그러는 것이나 비슷하다. 나는 이 때까지 무엇을 겨냥하여 열심히 노력하여 그것을 이룬적이 없는 것 같다. 이제부터라도 어떤 것을 목표로 정하여 그것을 위해 열심히 노력하여 그 목표를 달성할 것이다. 이 글은 문장이 좀 서투르고 같은 말을 반복하는 흠이 있기는 하지만, 자기의 주장을 분명하게 나타내는 데에 성공하고 있다. 먼저 큰 생각(주제)를 분명하게 머릿속에 담고 이 글을 써 나갔고, 또한 은행나무의 삶을 세심하게 관찰한 뒤 그것을 우리의 삶에 비유하여 잘 표현했기 때문이다. 자, 이제 앞에서 공부한 내용을 간단히 정리해 보도록 하자. 글의 제목을 받고 나서 볼펜방아만 짷고 있지 안흐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1) 무턱대고 큰 이야기부터 하려고 하면 글줄기가 막혀 버려서 실패하게 된다. (2) 먼저 큰 강(주제)을 머릿속에 그려 놓은 뒤, (3) 그 강을 거슬러 올라가 조그마한 샘물(소재)에서부터 이야기를 풀어나가야 한다. (4) 제목은 절대로 크게 정하지 말고, (5) 자기 힘으로 감당할 수 있는 작은 것으로 정해야 한다. 봄을 느끼기 위하여 산과 들을 헤매어 다녔지만 결국 느끼지 못하고 자기 집으로 돌아오다가, 돌담 사이에서 돋아 나오고 있는 새싹 에게서 비로소 느끼게 되었다는 한 아이의 이야기를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자. 멀리 떨어져 있는 덩치 큰 것을 이야기하려 애쓰지 말고, 가까운 곳에 있는 자기의 작은 이야기부터 시작하라는 뜻이다. 생각해 봅시다. 1. 우리는 글쓰기 과제를 받고 난 뒤, 얼른 글을 써 내려가지 못하고 연필만 원고지 위에 콩콩 찍어 댈 때가 있다. 이런 경우에는 제목을 어떻게 정하느냐가 매우 중요하다. 그렇다면 글의 제목을 어떻게 정해야 글을 무리없이 잘 써 내려갈 수 있는지 설명해 보자. 2. 좋은 글과 그렇지 않은 글은 소재와 주제를 어떻게 잡느냐에 따라서 크게 달라진다. 좋은 글을 쓰기 위해서는 소재와 주제를 어떻게 형상화 해야 하는지 각자의 생각을 말해 보자.
백중지세(伯仲之勢) / 서로 어금버금한 형세. 《出典》魏 文帝의 典論 같은 부모의 형과 누님을 백부와 백모라 하고, 동생과 누이동생을 숙부와 숙모라고 부 르는 것은, 옛날부터의 중국의 관습에 따른 것이다. 중국에서는 형제의 순서를 다시 세분하여, '伯 仲 叔 季'로 부르고 있다. 《禮記》'壇弓' 上篇에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어려서 이름을 짓고, 관례(冠禮)를 하고서 자(字)를 붙이고, 50에 백중(伯仲)으로써 하고, 죽으면 시호(諡號)를 내리는 것은 주(周)나라의 도리이다.』즉, 어린이가 태어나면 3개월만에 이름을 짓고, 20세가 되면 손님들을 초대하여 관(冠)을 씌우고, 자(字)를 짓는다. 50세가 되면 자(字) 위에 伯 仲 등 형제의 순서를 나타내고, 죽으면 諡號를 내린다. 이것이 周나라의 관습이었던 것이다. <伯仲>이란 형제의 순서를 나타내는 말에서 나온 것으로, 형제는 비슷하게 닮았기 때문에, 비교 평가하여도 서로 우열(優劣)을 가릴 수 없을 때, <그들은 伯仲之間이다>라고 한다.그러나 <伯仲之間>이란 말을 처음에 쓴 것은, 魏나라의 文帝 조비(曹丕)였다. 文人들이 서로 가볍게 여기는 것은 옛날부터 그러했다. 부의(傅儀)와 반고 (班固)에 있어서는 백중지간일 뿐이다. 文人相輕 自古而然 傅儀之於班固 伯仲之間耳. 《魏 文帝의 典論》
Board 고사성어 2022.06.22 風文 R 796
깨알 글씨 시장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둥, 시장이 세상을 지배한다는 둥 하는 이야기들이 넘쳐난다. 시장이 이렇게 막강하게 영향력을 자랑하게 된 까닭은 무엇일까? 무엇보다도 그에 내재한 ‘합리성’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아무리 시장의 비정함을 소리 높여 외쳐보아도 시장은 보편적인 ‘이익’의 문제에 대해서는 매우 정직한 태도를 가진 것이 틀림없기 때문이다. 시장의 합리성은 판매자에게나 고객에게나 동일한 기회를 주고 있다는 ‘전제’에서 출발한다. 이 전제가 흔들리면 그 시장은 곧 시장 바깥의 정치적 권력에 의해 역공을 당하기 쉽다. 그렇게 되면 시장의 합리성은 크나큰 상처를 입게 된다. 그러므로 시장은 ‘공정한 거래’에 의해 지배되어야 그 합리적 지배의 정당성을 보장받게 된다. 종종 공정성을 확보하기 위하여 역설적으로 부자유스러운 규제를 만들기도 한다. 공정한 시장을 위하여 생산자는 상품에 대한 정직한 정보를 투명하게 공개해야 한다. 이 과정에서 당연히 ‘공정한 어휘’와 ‘올바른 맞춤법’이 사용되는 것을 전제한다. 그러나 시장의 공정성을 의심하게 만드는 요즘의 몇가지 문제는 문법이나 맞춤법의 문제가 아니라 글씨의 크기에서도 나오고 있다. 돋보기를 써도 알아볼까 말까 한 작은 글자로 상품의 사용법이나 성분, 주의 사항, 생산 날짜, 유효 기간 등을 적어놓았으니 어느 한가한 소비자가 ‘합리적 시장’을 위하여 돋보기를 꺼내 들겠는가? 고객들에게 당연히 제시해야 하는 중요 정보 사항을 이렇게 깨알 같은 크기로 적어놓는 것은 사실상 상품 정보를 차단하는 행위이다. 일종의 불공정 상행위인 것이다. 진정 시장의 합리성을 완성시키고자 한다면 이대로는 곤란하다. 앞으로 ‘중요 정보’로 판단되는 내용들은 반드시 어느 정도의 크기 이상으로 표기하도록 하는 법률적인 강제도 있어야 할 듯하다. 김하수/한겨레말글연구소 연구위원·전 연세대 교수 ………………………………………………………………………………………………… 할 말과 못할 말 우리는 보통 누구든지 하고픈 말을 할 수 있는 자유가 있다고 생각한다. 틀린 말은 아니다. 적어도 법률적으로는 그렇다. 명예 훼손이나 거짓말할 자유는 빼고 말이다. 더군다나 특정 분야의 전문가라면 그 분야에서 양심적으로 할 말은 다 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이 일단은 옳다. 그러나 한번 곰곰이 생각해보자. 아무리 전문적으로 옳다는 신념이 있더라도, 그 말이 남에게 큰 상처가 된다면, 또 약자들에게 더 큰 상처가 된다면 어쩔 것인가? 또 갈등을 극복하려 한 말이지만 갈등을 증폭할 요인이 섞여 있다면 어쩔 것인가? 세상이 특정 의견을 받아들이는 것은 그리 단선적이지만은 않다. 매우 복합적이고 포괄적이다. 1980년대부터 통일 이후까지 독일의 연방대통령직을 맡았던 바이츠제커는 매우 품위 있는 연설로 유명했다. 당시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과 주변 아랍인들에게 지나친 공격적 행위를 일삼자 독일의 지식인들 가운데서 이스라엘에 대한 심각한 비판의 목소리가 나오기 시작했다. 그때 그는 “아무리 옳은 말이라 해도 그 말을 삼가야 할 사람들이 있는 법”이라는 유명한 연설로 분위기를 잠재웠다. 적어도 독일인들은 역사적으로 이스라엘에 대해 절대로 함부로 비판할 자유는 없다는 것, 그만큼 자신들의 역사적 과오가 무겁기 한량없다는 것을 강조한 말이다. 그 이후 독일은 조용해졌고 독일 정치는 국제적 갈등에 함부로 끼어들지 않는 ‘현명함’을 보여주었다. 맥락이 조금 다르긴 하지만 우리의 경제정책 책임자의 상식적인 발언이 안타깝게 논쟁에 휘말렸다. “모두가 강남에서 살려고 하는 것은 아니다”라는 말은 만고불변의 진리임에 틀림이 없다. 그러나 누가 그 말을 하느냐 하는 것은 또 다른 갈등 상황을 만들어낸다. 아무리 공공을 위한 정책이라 해도 소모적인 갈등은 피하도록 했으면 한다. 김하수/한겨레말글연구소 연구위원·전 연세대 교수
현대소설용어사전 ● 가족사 소설 한 가족의 흥망 성쇠 내력을 다룬 소설을 말하며, 단순히 가족 구성원 간의 문제를 다룬 소설들과는 다르게 취급된다. 즉, 가족사 소설은 가족 내의 개인보다는 가족이라는 사회 집단의 움직임과 변화 양상을 중시하며, 여러 대(代)에 걸친 가족의 역사를 추적하기 때문에 연대기 소설의 형태를 띠게 된다. 서양에서 골즈워디의 '포사이트 가(家)의 기록', 토마스 만의 '부덴부르크 일가', 마르탱 뒤 가르의 '티보 가(家) 사람들' 등이 가족사 소설에 해당하며, 우리 나라의 경우에는 1930년대에 비로소 정착되었는데, 염상섭의 '삼대', 채만식의 '태평 천하', 김남천의 '대하' 등이 대표적 작품이다. 최근에는 박경리의 '토지'가 이 계열의 가장 우수한 작품으로 손꼽히고 있다. 가족사 소설의 장점은 가족의 역사를 통하여 시대적 변천과 역사의 변모 양상을 밝혀낸다는 점이며, 특히 대가족 제도를 유지해 왔던 시대에 알맞은 소설 양식이라 할 수 있다. 때문에 가족의 개념이 점차 와해되고 있는 최근의 상황에서는 쉽게 찾아볼 수 없는 형식이기도 하다. ● 간접 제시(dramatic characterization) 소설 작품의 내용이 전달되는 방식은 크게 두 가지인데, 그 하나는 작가의 시각과 판단을 통하여 제시하는 직접적인 방식이고, 다른 하나는 작가의 개입을 없애고 '객관적으로', '극적으로' 제시하는 방식이다. 간접 제시는 후자의 방법으로, 다른 말로는 '보여주기(showing) 기법', 또는 '장면적 수법(scenic method)', '극적 방법(dramatic method)'이라고도 한다. 이러한 방식을 채택하는 소설은 세부적인 행위들이 묘사되고 대화에 의한 진행이 두드러지게 된다. ● 갈등(conflict) 의지적인 두 성격의 대립 현상. 인물과 인물, 인물과 환경사이의 갈등을 '외적 갈등(external conflict)'이라 하고, 한 인물의 심리적 갈등을 '내적 갈등(internal conflict)'이라고 한다. [갈등의 양상] ① 인간과 인간 사이의 갈등 : '학', '무녀도', '동백꽃' ② 인간과 사회 사이의 갈등 : '상록수', '레디 메이드 인생' ③ 인간과 자연 사이의 갈등 : '한귀'(박화성) ④ 인간과 운명 사이의 갈등 : '바위', '갯마을' ⑤ 외적 자아와 내적 자아 사이의 갈등(한 인간 내면의 갈등) : '금당 벽화', '등신불' ● 감상 소설 서술상에 감정을 드러내 보이거나, 연민과 동정의 감정에 빠져드는 태도를 지니고 있는 소설을 지칭한다. 감수성이 예민한 소설인데, 주로 작중 인물이 슬픔이나 아름다움이나 숭고함에 접하여 나타내는 강한 반응에 역점을 두며, 주로 지식인 계층의 주인공이나 여주인공들이 많이 채택된다. 이광수의 '유정', 심훈의 '상록수', 또는 1920년대의 순수 유미주의적인 소설들에서 잘 나타나며, 현대로 올수록 이러한 감상성은 소설의 완성도에 악영향을 끼친다는 이유로 거의 잘 나타나지 않는다. 그러나, 슬픔의 정서나 풍부한 감정이 작품의 내적 필연성에 의해 적절히 구사되었다면 부정적으로 평가될 수만은 없을 것이다. ● 감수성 이성에 대립하는 용어로 사용되며, 감각.사고 및 감정에 있어서 경험에 반응하는 작가의 특징적 능력을 가리키는 데 주로 사용된다. 우리 소설사에 있어서는 김승옥, 윤후명, 조세희 등의 작가들이 감수성이 뛰어난 작가의 예로 지칭될 수 있는데, 감수성은 주로 문체나 묘사에 있어서 참신한 맛을 제공하며, 일상적인 감각의 틀을 깨고 사물의 이미지를 새롭게 건질 수 있게 한다. ● 개화기 소설 일반적으로 서구 열강의 침투와 그에 따라 개항이 시작되는 1870년대부터 이광수의 '무정'이 발표되는 1917년 사이에 산출된 소설들을 통칭하는 말로 '신소설'까지도 포함하는 소설 유형이다. 이러한 소설들은 고대 소설과 근대 소설의 과도기적 형태로서, '개화기'라는 특수한 시대적 상황에서의 소설 형식이라는 점에서 엄격한 의미의 장르 개념은 아니다. 개화기 소설의 유형에는 첫째, 토론 문답체 소설로 '소경과 앉은뱅이 문답', '거부 오해', '향로방문의생이라' 등의 작품이 있고, 둘째, 몽유록계 소설로 고대 소설의 몽유록 형식을 빌려 온 것으로서 신채호의 '몽견제갈량', 안국선의 '금수회의록' 등이 있다. 셋째, 역사 전기 소설로 '을지문덕전', '비스마르크 청화', '의티리국 아마치전' 등의 작품들이 있으며, 넷째, 풍자 우화 소설로 '금수회의록', '만국대회록' 등의 작품이 있고, 다섯째, 신소설로 이인직의 '혈의 누'를 비롯한 '자유종', '은세계', '치악산', '귀의 성' 등 다양한 작품이 있다. 여섯째, 번안 소설로 '장한몽', '설중매', '해왕성' 등의 작품이 있으며, 마지막으로 신단 공안(神斷公案) 소설로 일종의 작자 미상의 재판 소설이 있는데, 주로 '황성 신문'에 연재되었다. 개화기 소설은 대개 미신이나 구습에 대한 배격과 사회 개혁적인 시각, 강한 정치성을 바탕으로 하는 풍자 의식과 비판적 관점을 지니고 있으나, 구성상으로는 고대 소설적인 면이 많이 나타나고 있다. ● 거리(distance) 소설을 구성하는 각 주체들 사이에 밀착된 정도를 가리키는 용어로, 물리적인 것이 아니라 얼마나 잘 이해하고 공감하고 있느냐 하는(또는 그 반대로 얼마나 냉정한 태도를 견지하고 있느냐 하는) 다분히 추상적이고 관념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 '작가 - 화자 - 독자'를 중심으로 고찰되며, 여기에서 소설의 서사 구조의 주체인 '등장 인물'이 거리 발생의 중요한 축이 된다. '작가 - 등장 인물 - 독자' 간의 거리가 1인칭에서는 가장 짧아지고 관찰자 시점에서는 멀어지며, 전지적 시점에서는 작가가 어떤 태도를 취하느냐에 따라 다양하게 달라진다. 또, 일반적으로 각 주체간의 거리가 좁으면 좁을수록 감상적인 소설이 될 우려가 있으며, 멀어지면 멀어질수록 공감을 주는 요소를 잃어버린다고 할 수 있다. [시점과 거리] 1인칭 주인공 시점, 전지적 작가 시점 : telling 가깝다 멀다 서술자------------------대상-------------------독자 멀다 가깝다 1인칭 관찰자 시점, 작가 관찰자 시점 : showing * 1인칭 주인공 시점에서 서술자와 대상의 거리가 가깝다. 독자가 등장 인물인 '나'의 세계에 접근하기 어렵다. * 전지적 작가 시점에서 서술자와 대상의 거리는 좁혀진다. * 작가 관찰자 시점에서 서술자와 대상의 거리가 먼 반면, 독자와 대상의 거리는 가깝게 된다. * 극적 화자인 '나'가 나오는 1인칭 시점에서 서술자와 독자 사이의 거리는 가깝다. ● 건달 소설(=악한 소설) 건달, 좀더 정확하게는 '재미있는 무뢰한'을 뜻하는 스페인어 '피카로(picaro)'에서 유래한 소설 양식의 개념으로 이 양식은 주로 건달의 이야기를 다루며, 기사들의 환상적인 로멘스나 상류층의 이상주의적 문학에 맞서는 하류층 문학, 또는 기존의 관습에 대한 반동의 형태를 지니는 문학으로서의 특징을 가진다. 주로 하층 계급에 속하는 인물이 주인공이 되어, 비정하고 부도덕한 현실 사회에 맞서 재치 있는 임기응변과 심각하지 않은 탈선을 범하는, 일종의 사회적 모험담의 성격이 짙다. 세르반테스의 '돈 키호테'는 이 부류의 가장 대표적 작품이며, 마크 트웨인의 '톰 소여의 모험'에도 이러한 성격이 나타나 있다. '피카레스크(picaresque) 소설'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 결말 전통적인 플롯의 개념으로 한 편의 서사물(소설)을 설명할 때 그 마지막 단계에 해당하는 것으로 끝, 종결, 대단원 등의 용어가 사용되기도 한다. 일반적으로 결말은 팽팽한 플롯 구조를 지니고 있는 단편 소설에서 분명하게 드러나며 작품이 지닌 중심 의미를 효과적으로 부각시키는 기능을 수행한다. 장편 소설에서는 이런 기능들이 다소 느슨해지거나 그 앞의 단계와 크게 차이가 나지 않는 경우가 많다. 작품의 성공적 결말은 그 작품이 지닌 의미를 효과적으로 드러나게 함으로써 독자에게 선명한 '인상'을 남겨 주어 작품의 가치를 알게 해 준다.
한승원의 글쓰기 교실 제9교시 글의 따뜻한 체온과 향기와 멋을 알아라 - 글속에는 글쓴이의 진실이 드러나야 한다. 1. 그림자 없는 사람 요즘 시중에는 귀신 이야기 묶음이 유행하고 있다. 그것들은 모두 허무 맹랑하고 우스꽝스러운 것들이다. 그렇지만 나는 절대로 허랑하지 않는 귀신 이야기 하나를 여러분들에게만 살짝 귀띔해 주려 한다. 옛날 옛적에 한 귀신이 있었다. 그 귀신은 살았을 적에 공부를 너무 게으르게 한 것이 한스러워서, 죽은 뒤에도 사람 노릇을 하면서 친구들과 어울려 공부를 하기로 하였다. 바햐흐로 약관의 나이(스무살)에 접어든 친구들은 그 귀신한테 감쪽같이 속아 넘어갔다. 왜냐하면, 그 귀신은 그 곳에 살다가 서울로 이사를 간 다음에 죽었기 때문이다. 어린 시절의 그 친구들은 그가 죽었다는 사실을 아직 모르고 있었다. 그 귀신은 예전에 그 곳에서 살 때, 기생집을 들락거리는가 하면 투전판에서 노름을 하고, 또 술에 취하여 싸움질을 하는 등 아주 방탕한 생활을 하였다. 그런데 어떻게 된 일인지 그 귀신은 다른 친구들이 모두 잠자리에 든 뒤에도 혼자 남아 낮은 목소리로 글을 읽곤 했다. 그 귀신의 어린 시절의 이름은 김창호였다. "야, 그런데 저 김공이 새 사람으로 다시 태어났나보다. 왜 저렇게 공부를 열심히 하는거야?" 하고 과거 시험을 앞둔 친구들은 모두 혀를 내둘럿다. 이제 늦게나마 정신을 차리고 공부에 몰두하는 귀신 김창호를 두고, 백발 백중 합격을 하게 될 것이라고들 수근거렸다. 그를 시기 질투하는 친구들도 하나 둘 생겨났다. 어릴적에 함께 어울려 다니며 쌀을 퍼다가 엿이나 떡을 사먹기도 하고, 훈장 선생 몰래 기생집에 드나들며 술을 마시기도 했던 친구들은 귀신 김창호를 밖으로 끌어내려고 유혹하기도 했다. 그렇지만 귀신 김창호는 모든 유혹을 의젓하게 뿌리치고 오직 글읽기에만 전념하였다. 그러한 귀신 김창호를 의심하는 친구들은 하나도 없었다. 오직 훈장선생과 여덟 살 난 아이 하나만이 그를 의심하고 있었다. 여덟 살 난 영특한 그 아이는 귀신 김창호에게서 이상한점 하나를 발견했기 때문이다. 햇빛 아래 서 있는데도 그에게는 그림자가 생기지 않았던 것이다. 어느 날 밤, 귀신 김창호는 자기 집으로 가서 옷을 갈아입고 오겠다고 하며 서원을 나섰다. 영특한 그 아이는 귀신 김창호의 뒤를 몰래 따라가 보았다. 귀신 김창호는 들을 건너고 산을 넘고 소나무 숲이 칙칙한 산 속으로 한없이 들어가더니, 이윽고 자기의 무덤속으로 홀연히 사라졌다. 이튿날 한낮쯤에 그 영특한 아이는 훈장선생에게 뵙기를 청했다. "선생님, 이 세상에 살고 있는 것들은 모두 그림자가 있게 마련인데, 요즘 저는 그림자가 없는 사람 하나를 발견했습니다." 훈장 선생은 재빨리 그 영특한 아이의 옆으로 다가앉았다. 그리고 그 아이의 옆구리를 꼬집으며 말을 중단하게 하였다. 그 때 귀신 김창호는 출입문 밖의 뒷마루에서 낮은 소리로 글을 읽고 있었던 것이다. 훈장선생과 영특한 아이가 주고받는 말을 엿들은 귀신 김창호는, 그날 황혼 무렵이 되자 배가 살살 아프아면서 밖으로 나갔다. 이튿날부터 귀신 김창호는 서원에 나타나지 않았다. 자기의 정체가 들통났음을 알고 무덤으로 돌아가 버린 것이었다. 이것은 내가 어린 시절에 어른들러부터 들은 이야기이다. 글 속에는 그 사람의 진실이 들어있게 마련이다. 진실하지 못한 사람은 아무리 글을 그럴듯하게 거짓으로 꾸며 쓰더라도 진실하지 못함이 드러나게 되어있다. 햇빛 아래 서면 반드시 그림자가 생기는 것처럼 체구가 작으면 작은 그림자가 생기고 크면 큰 그림자가 생긴다. 제아무리 맞춤법 하나 틀린 것 없이 문장을 매끄럽게 잘 쓰고, 또 현란한 수사법을 동원하여 이런저런 기교를 부렸을지라도, 글쓴이의 진실한 마음이 담겨 있지 않은 글은 읽는이를 감동시킬 수가 없다. 사람의 진실함은 솔직 담백함으로부터 끌어낼 수 있다. 그 진실은 남들에게 보이기위한 솔직함이 아니고, 글쓴이 스스로에 대한 솔직함이다. 글쓴이의 마음이 온전히 솔직해 지려면, 먼저 기막히게 좋은 글을 써야 겠다는 욕심부터 떨쳐 버려야 한다. 좋은 글을 쓰겠다는 욕심을 부리면 필요 이상으로 과장하게 되기 때문이다. 또 좋은 글을 써야 한다는 욕심은 자기 자신을 억누르게 되고, 그것은 중압감이 되어 글이 나오는 생각의 구멍을 막아 버린다. 글은 살아 있는 것이다. 글에도 핏줄이 있어서 피가 돈다. 숨을 쉰다. 그것들은 글쓴이의 솔직함과 진실을 먹고 산다고 할 수 있다. 아까의 귀신 이야기에서, 김창호라는 귀신에게 그림자가 없다는 것은 진실이 없다는 것이고, 생명이 없다는 것이며, 숨이나피가 통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2.사람의 냄새와 글의 향기 사람에게 체온과 냄새와 분위기가 있듯이 글에도 그러한 것들이 있다. 인정머리가 없는 사람의 글에서는 인정머리 없음이 나타나고, 잘디잔 정이 깊은 사람의 글에서는 그 잔정이 함빡 담겨 있게 되는 것이다. 다음의 글을 읽어보고, 어떤 정이 느껴지는 지 살펴보자. 어머니는 팥죽가게로 나를 데리고 들어갔다. 팥죽 솥뚜껑 위로 김이 모락모락 피어났다. 솜옷을 두툼하게 있은 팥죽장수 아주머니가 팥죽을 퍼 줄 채비를 하면서 어머니와 나를 번갈아 살폈다. "팥죽 드릴까요?" "한그릇만 주세요" 팥죽 장수는 한 그릇만 달라고 하는 어머니의 말에 실망을 한 채 팥죽 한 사발을 탁자에 놓아 주었다. 그것은 나 혼자 먹기에도 양이 적은 것이었다. 팥죽 장수는 숟가락 한 개와 입가심을 할 수 있는 싱건지국(김장할 때 좀 싱겁게 담근 무김치로 만든 국) 한 종지를 내 주었다. "배고프겠다. 얼른 먹어라, 따끈한 이놈 먹으면 얼었던 속이 풀릴게다." 나는 어머니의 뱃속이 비어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아침 일찍이 바쁘게 시장에 나오느라고 아침밥을 제대로 먹지 못했던 것이다. 그런데도 어머니는, "나는 밥 생각이 없다. 엊저녁에 먹은 것이 체했는지 어쨌는지 ...... 싱건지 국이나 한 모금 마실란다" 하면서 역시 트림을 해 보였다. 팥죽장수 아주머니에게 숟가락 한 개를 더 달라고 했고, 그것으로 싱건지 국물을 한 번 떠 마시며,"아따, 시원하다"하고 말했다. 어머니에게는 김 판 돈이 있었지만, 그것은 내게 줄 등록금이 빠듯 할 뿐이었다. 어머니는 그 돈을 축내지 않으려 하고 있었다. 나는 가슴이 아파 팥죽을 먹을 수가 없었다. 어머니가 싱건지 국물을 마시는 것만 물끄러미 보고 있었다. 순간 어머니가 나를 꾸짖었다. "너는 먹을 것을 보면 서둘러 달게 좀 먹어봐라." 어머니는 어느 사이엔지 싱건지국 한 종지를 다 마셔 버렸다. 내가 입가심 할 것이 없어진 것이었다. 어머니는 팥죽 장수에게서 싱건지국 한 종지를 더 얻어내기 위하여 비굴한 목소리로 한 사발을 더 달라고 아쉬운 말을 했다. 팥죽 장수의 눈꼬리가 매섭게 찢어졌다. "날씨까지 추운데 웬걸 그렇게 마시는고?" 하고 강파르게 말을 하더니, 놋대접으로 싱건지국을 퍼다가 어머니 앞에 놓아 주었고, 어머니는 어색하게 웃었다. 나는 그 날 팥죽 맛을 알 수 없었다. 뽀얀 눈보라 속에서 어머니와 나는 헤어졌다. 뜨거운 팥죽 한 사발을 먹은 나는 버스에 올랐고, 팥죽 장수의 눈치 어린 차가운 싱건지 국물만 마신 어머니는 눈보라 속을 뚫고 신작로를 걸어갔다. 45년이 지난 지금도 어머니는 내 의식 한 자락 속에서 그렇게 그 눈보라 속을 뚫고 걸어가고 있었다. -한승원의 <키작은 인간의 마을>중에서 이 글 속에 나오는 어머니의 사랑은 매우 짙다. 그러나 그것보다 더 값진 것은 글쓴이의 솔직성이다. 글쓴이는 자기가 가난하게 살았던 지난날과, 자기 어머니가 배고픔을 싱건지국으로 달래다가 수모를 당한 것을 숨김없이 진술하고 있다. 솔직성을 발휘하려면 용감하지 않으면 안된다. 솔직성은 읽는 이에게 가슴아픔을 안겨 주어 진한 여운을 남기게 된다. 자기가 경험한 어떤 일을 수치스럽게 여긴 나머지, 그것을 그대로 진술하지 않는 것이 가식이고 가면이다. 가식이 어떻게 읽는 이를 감동시키겠는가? 그러면 가슴 찡한 감동을 자아내는 글을 한편 더 감상해 보자. 예전 상하이에서 본 일이다. 늙은 거지 하나가 전장(돈바꾸는집)에 가서 떨리는 손으로 1원짜리 은전 한 닢을 내놓으면서, "황송하지만 이 돈이 못쓰는 것이나 아닌지 좀 보아 주십시오"하고 그는 마치 선고를 기다리는 죄인과 같이 전장 사람의 입을 쳐다본다. 전장 주인은 거지를 물끄러미 내려다 보다가, 돈을 두들겨 보고는 "하오(좋소)"하고 내어 준다. 그는 '하오'라는 말에 기쁜 얼굴로 돈을 받아서 가슴 깊이 집어 넣고 절을 몇번이나 하며 간다. 그는 뒤를 자꾸 돌아보며 얼마를 가더니 또 다른 전장을 찾아 들어갔다. 품속에 손을 널고 한참을 꾸물거리다가 그 은전을 내어 놓으며,"이것이 정말 은으로 만든 돈이오니까?"하고 묻는다. 전장 주인도 호기심 있는 눈으로 바라보더니, "이 돈을 어디서 훔쳤어?" 거지는 떨리는 목소리로,"아닙니다 아니에요" "그러면 길바닥에서 주웠단 말이냐?" "누가 그렇게 큰 돈을 빠뜨립니까? 떨어지면 소리는 안나나요? 어서 도로 주십시오." 거지는 손을 내밀었다. 전장 사람은 웃으면서 "하오"하고 던져 주었다. 그는 얼른 집어서 가슴에 품고 황망히 달아난다, 뒤를 흘끔흘끔 돌아다보며 얼마를 허덕이며 달아나더니 별안간 우뚝 선다. 서서 그 은전이 빠지지나 않았나 만져 보는 것이다. 거친 손가락이 누더기 위로 그 돈을 쥘 때 그는 다시 웃는다. 그리고 또 얼마를 걸어가다가 어떤 골목 으슥한 곳으로 찾아 들어가더니 벽돌 담 밑에 쪼그리고 앉아서 돈을 손바닥에 놓고 들여다 보고 있었다. 그가 그렇게 열중해 있었는지 내가 가까이 선 줄도 모르는 모양이었다. "누가 그렇게 많이 도와 줍디까?" 하고 나는 물었다. 그는 내 말소리에 움찔하면서 손을 가슴에 숨겼다. 그러고는 떨리는 다리로 일어서서 달아나려고 했다. "염려 마시오, 뺏어 가지 않소" 하고 나는 그를 안심시키려 하였다. 한참 머뭇거리다가 그는 나를 쳐다보고 이야기를 하였다. "이것은 훔친 것이 아닙니다. 길에서 얻은 것도 아닙니다. 누가 저 같은 놈에게 1원짜리를 줍니까? 각전(예전에 쓰던, 1전이나 10전짜리의 잔돈) 한닢을 받아 본 적이 없습니다. 동전 한 닢 주시는 분도 백에 한 분이 쉽지 않습니다. 나는 한 푼 한 푼 얻은 돈에서 몇닢씩 모았습니다. 이렇게 모은 돈 마흔여덟 닢을 각전 닢과 바꾸었습니다. 이러기를 여섯 번을 겨우하자 겨우 이 귀한 은돈 한 닢을 갖게 되었습니다. 이 돈을 얻느라고 여섯 달이 더 걸렸습니다." 그의 뺨에는 눈물이 흘렀다. 나는, "왜 그렇게까지 애를 써서 그 돈을 만들었단 말이오? 그 돈으로 무얼 하려고?" 하고 물었다. 그는 다시 머뭇거리다가 대답했다. "이 돈 한 개가 갖고 싶었습니다" -피천득의 <은전한닢> 3. 좋은 글을 쓰려면 자신의 경험부터 이야기 하라. 모든 글이 다 그렇지만 수필류의 글을 쓸 때에는 먼저 자기가 경험한 일화 하나를 이야기 하고, 그것과 관련된 진리를 말하면 쉽게 감동적인 글을 써 낼 수 있다. 일화는 자기가 직접 경험한 이야기, 할머니나 할아버지의 이야기, 어머니나 아버지 혹은 형제들의 이야기를 끌어오는 것이 가장 좋다. 자기와 가장 가까운 것일수록 이야기는 진솔해 지게 마련이다. 글은 남의 목소리나 창법을 흉내내는 것이 아니고, 자기의 목소리와 자기의 방식으로 부른 자기의 노래여야 한다. 그러면 다음에 인용한 글을 읽고, 글쓴이의 진실에 대하여 다시 한 번 생각해 보도록 하자. 그 다음에는 그 진실을 여러분들의 글쓰기에 적용하여 좋은글을 써 보기 바란다. 군 복무 중에 휴가 나온 나는 부대로 돌아가기 위하여 어머니에게 잘 다녀오겠다는 인사를 하고 집을 나섰다. 후배 인이가 나를 회진 포구까지 배웅해 주려고 왔다. 그가 가방을 들고 앞장섰다. 어머니는 우리들을 뒤따라 나왔다. 집 모퉁이 수숫대 울타리 앞에서 헤어졌다. 우리들은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며 한재 고개를 올라갔다. 숨가쁘게 삼십분쯤은 걸어야 다 오를 수 있는 가파른 고개였다. 한재 꼭대기에 이르렀을 때 후배 인이가 문득 발을 멈추더니, "아이고, 형님, 뒤좀 돌아보아 드리시오"하고 꾸짖듯이 말했다. 한재 아래쪽 소나무 숲 사이로 우리 집 모퉁이가 보였다. 수숫대 울타리 앞에 개미만하게 어머니의 모습이 박혀 있었다. 우리가 이야기에 취하여 올라오는 동안 단 한 순간도 딴 데 눈길을 보내지 않고 아들의 뒷모습만 바라보고 있었을 어머니 서른 다섯 해가 지난 지금도 내 가슴속에는 그 어머니가 그렇게 고향 마을 집 모퉁이의 그 자리에 서 계신다. 아, 어머니, 우리 어머니.- 한승원의 <키작은 인간의 마을> 중에서 생각해 봅시다. 1. 누구든지 햇볕아래 서면 체구가 작으면 작은 대로 크면 큰대로 그림자가 생긴다. 이말은 곧 진실은 진실대로, 거짓은 거짓대로 그 본모습을 드러내게 마련이라는 뜻이다. 이것을 글쓰기에서는 어떻게 이해할 수 있는지 각자의 생각을 정리해 보자. 2. 모든 글이 읽는 이에게 감동을 안겨주지는 않는다. 그렇다면 읽는이에게 가슴찡한 감동을 주기 위해서는, 글쓴이가 어떤 자세를 갖추고 있어야 하는지 설명해 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