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승원의 글쓰기 교실 제12교시 줄곧 달려가야 하는 골인지점 - 글 마무리 잘 돼야 잘 쓴 글 된다. 1. 먼저 골인지점을 설정해야 남편은 징용에 끌려가 목숨을 잃고, 아들은 월남전에서 가루가 되어 돌아오고, 기댈 데라곤 손자 하나밖에 없는 늙은 여자가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손자까지 여자 문제로 칼부림을 하다가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손자가 죽은 지 며칠 뒤, 그 늙은 여자는 가슴이 찢기는 듯한 고통을 억누르며 밭에 앉아 김을 매었다. 그 때, 누군가 우리민요 <아리랑>을 부르면서 재를 넘어갔다. 다 알다시피<아리랑>에는 아주 재미있는 가사가 있다. 나를 버리고 가시는 임은 십 리도 못가서 발병 난다. '사랑하는 임아, 나를 버리고 가려는 생각일랑 아예 버려라.' 이것은 임과 이별하기 싫은 우리 선인들의 마음을 매우 잘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이 노래를 들은 그 늙은 여자는 슬프게 중얼거렸다. "발병도 안나고 잘만 가더라" 이것은 내가 쓴 소설 <아리랑 별곡>에 나오는 대목이다. 결말 부분에 나오는 이 말은 이 소설의 주제를 한 마디로 함축하고 있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지 않으려고 몸부림을 쳐도 그들은 내곁을 잘만 떠나가더라는 한스러움, 모든 것을 다 잃고도 살아 배기려는 인간의 생명력...... 나는 이 소설을 쓰기 전에 이미 이 결말을 머릿속에 담고 있었다. 그리고 그 결말을 향해 모든 이야기를 몰고 갔던 것이다. 글을 잘 쓰는 비결은 이렇듯 글을 쓰기 전에 먼저 골인 지점을 확실하게 설정하는 것이다. 아무리 좋은 줄거리가 만들어졌다 하더라도. 또 아무리 좋은 인물이 설정되었다 하더라도 결말 부분이 마련되어 있지 않으면 글을 써 나가지 않는 게 바람직 하다. 만일 첫머리로서 그럴 듯 하다 싶은 문장이나 일화 하나가 머릿속에 떠올랐다고 해서, 무작정 써 나가게 되면 오래지 않아 쓸 말이 막혀 글쓰기를 중단할 수밖에 없다. 써 나가는 도중에 결말을 정하게 되면, 이 때껏 써 온 것들과 방향이 달라져 그것들이 모두 쓸모 없어지기 십상이니까. 나는 소설을 삼십 년째 써 오고 있는데, 어떤 소설을 쓰든지 맨먼저 결말 부분을 미리 머릿속에 마련해 놓은 다음 첫 문장을 쓰기 시작한다. 그렇기 때문에 결말 부분이 떠오르지 않으면 절대로 펜을 들지 않는다. 글쓰기는 여행이나 마라톤과 똑같다. 출발점(출발선)이 있고 도착지점(골인 지점)이 있다. 부산에 가려고 작정했다면 자기가 살고있는 곳의 터미널이나 기차 역에서 출발하여 반드시 부산에 도착해야 한다. 순간순간의 느낌이나 분위기에 휩쓸려 대전이나 대구에서 내려 버리면 안 되는 것이다. 출발 역(출발선)은 종착 역(골인 지점)으로 달려가기 위하여 있는 것이고, 골인지점은 그 경기를 끝맺음 하기 위하여 있는 것이다. 대개의 마라톤 출발선은 곧 골인지점이라는 사실, 그것은 아주 재미있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어떤 글의 첫 문장은 곧 그 글의 결말이 갖고 있는 의미와 닿아 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특히 논술의 경우, 결말은 반드시 서두와 긴밀한 연관을 가져야 한다.) "......자기가 죽거든 자기 입던 옷을 꼭 그대로 입혀서 묻어 달라고......" 이것은 황순원이 슨<소나기>의 결말 부분이다. 이것은 작가 황순원이 그 소설의 끝 부분에 설정해 놓은 골인 지점이다. 작가는 결국 이 한마디의 말을 하기 위하여 그 기나긴 이야기를 한 것이다. 그 결말에는 주제가 함축되어 있다. 다시말해, 소설 속에 등장하는 소년과 소녀의 모습을 통해서 이 세상에서 가장 순수한 사랑을 보여 주려는 작가의 마음이 담겨 있다는 뜻이다. 2. 골인지점에서 뒤집어엎는 콩트의 묘미 결말 부분(골인 지점)이 특히 중요한 것은 콩트에서이다. 대개의 작가들은 콩트를 쓸 때 마지막 부분에서 독자들이 예상치 못했던 방향으로 이야기를 뒤집어 엎어 버린다. 물론 그러기 위해서는, 그렇게 해도 될 만한 복선(독자들에게 주는 암시)을 깔아 두어야 한다. 우리가 잘 아는 모파상의 <목걸이>는 단편 소설이면서도 콩트의 묘미를 아주 잘 살려내고 있는 작품이다. 평범한 하급 공무원의 아내인 르와젤 부인은 아름답고 매력적인 외모를 지니고 있었지만, 집안 형편이 어려워 치장할 만한 옷이나 보석이 마땅찮은게 늘 불만스러웠다. 그러던 어느날, 그녀는 부자 친구에게 다이아몬드 목걸이를 빌려 걸고 파티에 나가 즐겁게 놀다 집으로 돌아왔는데....... 옷을 갈아입다 보니 목걸이가 어디로 사라지고 없었다. 하릴없이 그녀는 그것과 똑같은 목걸이를 사기위해 많은 빚을 지게 되었고, 그 빚을 갚기위해 10년 동안이나 갖은 고생을 다 해야 했다. 그 때문에 예전의 모습을 찾아볼 수 없을 만큼 초라하게 변해버린 그녀는 산책길에 우연히 목걸이의 주인인 옛 친구를 만나게 되었다. 친구에게 그간의 사정을 이야기 하자, 친구는 깜짝 놀라 말했다. "어머 내 목걸이는 가짜였는데......" 모파상은 "어머, 내 목걸이는 가짜였는데......"라는 말 한마디를 준비해 놓고 그 이야기를 써 나간 것이다. 결국 <목걸이>의 주제는 그 한마디 속에 다 들어 있는 셈이다. 가짜 목걸이 하나가 허영심 많은 한 여인의 운명을 바꾸어 놓았다는...... 하지만 가짜 목걸이 때문에 운명이 바뀐 사람이 어디 그 여인 한 사람뿐이겠는가? 어쩌면 세상 사람들은 모두 그 여인처럼 뜻없는 무언가에 얽매여 헛살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모파상은 그 한 마디를 통해 독자들에게 묻고 있다. '우리 삶의 진실은 무엇이며, 그것은 어디에 있는가?' 라고 이와 같이, 콩트 쓰기의 재미는 결말 부분에 가서 독자를 감쪽같이 속이는 데에 있다. 독자가 전혀 예상하지 못한 곳에 골인 지점(결말)을 설정해 놓고 독자를 이끌어 가는 것이다. 수필을 쓰거나 논술을 쓸 때도 골인지점을 미리 정해놓고 써 나가야 하는 것은 똑같다. 나룻배가 건너가야 할 강 저쪽에는 나루터가 있고, 기차가 달려가는 그 끝에는 종착역이 있는 것 처럼...... 3. 결말은 죽어가는 사람의 유언과도 같다. '응아!'하고 힘껏 소리를 지으며 태어난(삶의 출발선에 오른)우리 모두의 종착점은 죽음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죽음을 맞기 전에 무엇을 어떻게 이룩해야 하고, 죽은 다음에는 무엇을 남겨야 하고, 또 마지막에는 무엇을 말해야 할까? 수없이 많은 가르침을 남긴 부처님은 제자들에게 "나는 아무 말도 한 적이 없느니라"고 했고 (이 세상이 텅 비어 있음을 가리킴),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 박히며 "아버지, 왜 날 버리시나이까?"하고 절망(인간의 절대적인 외로움)했다. 또 어떤 사람은 "문을 열어라"고 했고, 어느 한국인 의사는 "내 몸을 제자들의 실험용으로 제공한다"고 했으며, 어느 스님은 "화장을 해서 날려 버리되, 절대로 나를 위하여 비석을 만들지 말라"고 했다. 그들이 남긴 유언들은, 앞에서 이야기 한 것들은 한데 마무르는 글의 결말(골인지점)처럼 아주 깊고 높으며 보석처럼 값진 것(진리 혹은 우리 삶의 진실)이다. 결국 우리가 글을 쓴다는 것은 이처럼 결말 부분에서 독자들에게 우리 삶의 진실을 들려 주려는 것이다. 그러면 이번에는 서두와 결말을 아주 잘 처리하고 있는 독자의 글 한 편을 읽어 보도록 하자. 오늘은 아침부터 운이 없다. 나와 관련된 모든 사람으로부터 꾸중을 들었다. 아침에 늦잠을 자고 나서 허둥지둥 바쁘게 집 안을 돌아다녔다. 이를 딱하게 보신 어머니께서, "무슨 애가 그렇게 게으르니?" 차를 타러 나오는데 차 안의 운전수 아저씨께서 "또 늦었군, 너만 타는건 아니니까 빨리 나와!" 오늘은 이것만...... 하지만 오늘의 꾸중의 여신이 나에게 마음이 있었나 보다. 조회 시간, 이를 어째! 분명히 넣어두었는데, 난 몰라. "성적표 안 가지고 온 사람, 오늘 청소하세요" 선생님의 말씀에 나는 한숨만 푹푹, 아이들은 만세 삼창. 1교시 시작, 안걸리겠지? 날짜를 보니, 오늘은 9번대만 걸리는 날이잖아? 결국 오늘 하루, 나만 걸리고 혼나고 또 걸리고 혼났다. 집에 돌아오는 길. 정말 오늘은 피곤한 하루였어. 열심히 수다를 떠는데, "학생 회수권 제대로 넣은거야?" 이건 또 웬 날벼락이냐. "넣었는데요" 아, 창피해 누명까지 쓰다니. 내일부터는 제발 꾸중의 여신이 운 나쁜 나에게 질려서 멀어져 갔으면 좋겠다. 그런데 이것은 또 무슨 호통소리인가. "수남아! 가방은 챙기고 자는 거니?" 이 글의 지은이는 매우 익살스런 진술을 하고 있다. 머리 글의 결말을 설정해 놓은 다음 글을 써 나갔기 때문에 서두나 결말을 짜임새 있게 구성하고, 또 조리있게 써 나갈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 글쓴이는 문장을 너무 과감하게 생략하는 버릇이 있어 독자를 당황하게 만든다. 가능하면 하나하나의 문장을 완결시켜 놓은 후에, 다음 이야기로 넘어가는 여유로운 습성을 들이는 것이 좋겠다. 물론 어떤 사실을 분명하게 전달하려는(형상화 하려는) 조력 또한 꾸준해야 한다. 특히 논술의 끝마무리에서는 반드시 글 전체의 논지를 요약하여 제시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내용의 핵심을 간결하고 명확하게 서술하는게 좋다. 용 한 마리를 다 그린 다음, 마지막으로 두 눈에 검은 점을 찍어 살아나게 하듯이. 그런 의미에서 다음의 글을 한 번 읽어 보자. 요즘 시중에는 많은 상품권이 유통되고 있다. 추석을 맞아 웬만한 소비업체에서는 선물용 상품권을 발행하는 등 상품권 유통 붐이 일고 있는데, 여기서 파생된 문제점 역시 적지 않다. 상품권을 보면 금액이 80%이상 구입했을 때에는 잔액을 현금으로 거슬러 주게 되어있다. 하지만 많은 업체에서는 이 금액으로 다른 물품으로 구입하도록 종용하거나 현금 영수증이라는 것을 끊어 주고 있다. 그리고 세일 품목에 대해서는 상품권을 가지고 쇼핑을 나가 보면, 현금 사용의 불편을 덜기 위해 만들어진 상품권이 현금을 사용할 때 보다 훨씬 많은 애로 사항이 있음을 알게 된다. 우리는 지난 1월 구두 상품권을 발행한 모회사의 부도로 겪었던 많은 피해 사례를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 19년만에 부활한 상품권 유통의 올바른 정착을 위해서라도 이상의 문제는 시급히 고쳐져야 할 것이다. 상품권이 업계의 얄팍한 상술에만 이용되는 것이 아니라, 진정 어린 정성과 마음을 담은 선물이 될 수 있기를 바란다. -허정희 <상품권의 불편>중에서 4. 끝마무리를 방해하는 것들 글을 써 나가다 보면, 끝마무리를 제대로 하지 못해서 방해하는 것들이 있다. 첫째, 자기가 쓰려고 하는 글의 주제가 무엇인지 확실하게 인식하지 못하면 글의 끝마무리를 망치게 된다. 밀양에 있는 표층사에 가서, 땀을 흘리곤 한다는 비석을 구경하려고 마음 먹었다면 가다가 대전이나 대구에 내리지 말고 곧장 밀양으로 달려가야 한다. 구경할 거리가 많은 경주로 가는 차가 보이더라도 바꾸어 타서는 안된다. 옆자리에 앉은 여학생이 아무리 예쁘더라도 따라가서는 안 되며, 가장 친한친구가 중간에 내리자고 손을 잡아 끌어도 과감히 물리치고 기어이 밀양 역으로 달려가야 한다. 그리하여 표층사의 바로 그 비석앞에 서야 한다. 둘째, 지나치게 잘 쓰려고 하는 욕심이 끝마무리를 망쳐 놓는다. 낙동강의 도도한 물너울과 들판을 살피다가 내려야 할 밀양 역을 놓쳐 버리고 허둥대는 수가 있다. 여행을 떠나는 사람에게는 저마다 자기가 멈추어 서야 할 역이 있게 마련이다. 마라톤 또한 반환점을 분명하게 돌고 나서 정해진 골인 지점으로 달려가야 한다. 글도 마찬가지이다. 욕심이 넘치면 멈추어 서야 할 곳(끝마무리)을 지나쳐 버리는 수도 있고, 그 곳을 찾지 못해 다른데서 헤메는 수도 있다. 셋째, 끝마무리에 대한 생각이 너무 약하면 끝마무리를 망치기 쉽다. 용 한 마리를 그린 다음에는 그것의 눈 한가운데다 검은 눈동자를 분명하게 찍어야 한다. 너무 크지도 않고 너무 희미하지도 않은, 그 그림에 알맞게 검을 점을 찍어야 용이 생명을 얻어 살아나게 된다. 줄곧 맨 앞에서 달리던 마라톤 선수가 골인 지점을 1미터쯤 남겨두고 쓰러져 일어나지 못하게 된다면 어떻게 될까? 생각해 봅시다. 1. 글쓰기는 여행이나 마라톤과 똑같다. 그렇기 때문에 반드시 출발점이 있고 도착점이 있으며, 그것은 서로 길게 맞닿아 있다. 그렇다면 글쓰기에 있어서 글 마무리(결말)는 여행이나 마라톤에서의 도착점이라고도 볼 수 있다. 여행이나 마라톤에서 반드시 다다르지 않으면 안되는 도착점, 즉 글 마무리는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은지 말해 보자. 2. 글 마무리를 아무리 잘 하려 해도 자꾸만 머리 끝을 따라다니며 그것을 방해하는 것들이 있다. 그것이 과연 무엇인지 이야기 해 보자."
물타기 어휘 물을 탄다는 말은 ‘희석’한다는 말이다. 그런데 희석이란 낱말은 ‘물을 타서 농도를 옅게 한다’는 뜻으로 잘 쓰이고 있지만 ‘물타기’라는 말은 정작 물을 섞어 넣는 일에는 잘 안 쓰이고, 어떤 사안의 심각성을 얼버무리거나 중요한 것을 다른 사소한 문제들과 섞어버리는 것을 비판할 때 많이 쓰인다. 각종 부패 사건이 터지면 ‘무슨무슨 비리사건’과 같은 용어를 쓴다. ‘유치원 비리’ ‘채용 비리’ ‘공무원 비리’ 등에서 사용되는 비리는 ‘이치에 맞지 않는다’는 단순한 말이다. 누구든지 살다 보면 이치에 맞지 않게 실수도, 오해도 하며 지낸다. 그러나 우리가 분노하는 사건들은 그저 이치에 맞지 않는 정도가 아니고 참기 어렵고 분을 억누르지 못할 일이 대부분이다. 분명히 표현하자면 ‘부정한 일’ 아니면 ‘부패사건’인데 이런 것을 단순히 이치에 맞지 않는다고 하는 것은 일종의 ‘물타기’가 아닌가? 예전에는 대개 ‘부정부패, 불법’ 등의 용어가 많이 쓰이다가 슬그머니 ‘부조리’라는 말도 꽤 유행했다. 부정부패라는 말이 나오면 수사 당국이 우물쭈물 시간을 보낼 수 없는 분위기가 만들어진다. 그러나 ‘부조리’라고 하면서 최고 관리자가 “책임을 통감한다”고 하며 고개만 숙이면 슬쩍 넘어가는 경우도 생긴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 모두가 근본적으로는 ‘부패’와 ‘불법’에서 비롯한 것이었다. 거칠고 딱딱한 어휘를 부드러운 말로 고쳐서 순화하는 일은 바람직한 일이다. 그러나 옳지 않은 일, 분노를 살 만한 일에는 ‘공분’을 드러내는 표현이 더 중요하다. 유치원 비리가 아니라 ‘유치원 부정 회계’라든지 채용 비리가 아니라 ‘부정 채용’과 같이 사건의 본질을 명료하게 드러내고 사법 당국도 얼른 대응할 수 있는 분명한 표현을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 개념 경쟁 각종 개념은 특정 대상을 체계적으로 인식하는 언어적인 도구이다. 때로는 서로 대립되는 개념들이 끊임없이 다투기도 한다. 혹자는 ‘자유시장경제’가 옳다고 하기도 하고 또 어떤 이들은 사회적으로 통제된 시장이 건강하다고 외친다. 또 누구는 ‘이성애’가 혼인제도의 유일한 규범이어야 한다고 하고 또 다른 사람들은 이제 꼭 그렇게만 볼 수는 없다고도 말한다. 모든 가치와 제도는 개념을 통해 서로 경쟁하고 다툰다. 한때는 ‘화폐’와 ‘현물’이라는 개념이 시장에서 서로 경쟁하다가 결국은 화폐가 승리했다. 화폐가 가진 효율성과 편의성을 현물은 감당할 수 없었다. 일찍이 해양세력의 선두를 달리던 스페인은 신대륙의 은광을 확보하여 떼부자가 되었지만 그저 흥청망청 사치를 부리다가 통화팽창에 주저앉아 버렸다. 조그마한 네덜란드는 ‘신용’이라는 개념을 발전시켜 금융과 무역을 크게 일으켰다. 신용제도는 뒤에 영국이 이어받아 세계를 석권하는 계기를 만든다. ‘현금’과 ‘신용’의 싸움에서 신용이 이긴 것이다. 돌이켜보면 우리 조상도 이미 ‘신용’을 이용할 줄 알았다. 그러나 제도화하지는 못했다. 자연스레 형성된 신용거래를 그냥 ‘외상’이라고만 하고 변변한 긍정적인 개념으로 말하지 않은 것이다. 일종의 ‘정식 장부 외의 거래’라는 투박한 느낌의 이두를 썼을 뿐이다. 그 정도 개념으로는 ‘신용’과 경쟁이 되지 않는다. ‘카풀’을 제도화하려는 데 반대가 극심하다. 마치 택시의 경쟁자 혹은 기생 세력처럼 묘사를 하니 당연히 경쟁자가 반대를 한다. 오히려 택시의 보완수단임을 잘 설명했어야 했다. 신용카드의 이름을 ‘외상쪽지’라고 해보자. 아마 사람들이 카드의 사용과 발급을 많이 줄이지 않을까 한다. 언어는 개념을 종종 그럴듯하게 하기도 하지만 종종 없어 보이게 만들기도 한다. 김하수/한겨레말글연구소 연구위원·전 연세대 교수
불구대천(不俱戴天) / '하늘을 같이 이지 못함'이라는 뜻으로, '이 세상에서 같이 살 수 없을 만큼 큰 원한'을 비유하여 이르는 말. 《出典》'禮記' 《禮記》'곡레편(曲禮篇)'에는 '不俱戴天之?'에 대해 다음과 같은 글이 실려 있다. 아버지의 원수와는 함께 하늘을 이고 살 수 없고 형제의 원수를 보고 무기를 가지러 가면 늦으며 친구의 원수와는 나라를 같이해서는 안된다. 父之?不與共戴天 兄弟之?不反兵 交遊之?不同國 즉, 아버지의 원수와는 함께 한 하늘을 이고 살 수 없으므로 반드시 죽여야 한다. 형제의 원수를 만났을 때 집으로 무기를 가지러 갔다가 원수를 놓쳐서는 안 되므로 항상 무기를 휴대하고 다니다가 그 자리에서 죽여야 한다. 친구의 원수와는 한 나라에서 같이 살 수 없으므로 나라 밖으로 쫓아내던가 아니면 역시 죽여야 한다. 또 이 말은《맹자(孟子)》'盡心篇'에 나오는 다음과 같은 孟子의 말과 비교가 되어 다시 생각게 한다. "내 이제야 남의 아비를 죽이는 것이 중한 줄을 알겠노라. 남의 아비를 죽이면 남이 또한 그 아비를 죽이고 남의 형을 죽이면 남이 또한 그 형을 죽일 것이다. 그러면 스스로 제 아비나 형을 죽이지는 않겠지만 결과는 마찬가지이니라." 오늘날 이 말은 아버지의 원수에 한하지 않고 '더불어 살 수 없을 정도로 미운 놈'이란 뜻으로 쓰이기도 한다. 【동의어】대천지수(戴天之?), 불공대천(不共戴天) 【원 말】불구대천지원수(不俱戴天之怨?), 불공대천지수(不共戴天之?)
Board 고사성어 2022.06.24 風文 R 698
한글의 약점 모든 사람들이 동의하는 바이기도 하지만 한글은 보면 볼수록 신기하게 잘 만들어진 문자임에 틀림이 없다. 그러나 우리가 남의 글자를 칭찬한다면 마음이 넉넉해 보이기라도 하겠지만 우리가 우리의 글자를 칭찬만 하자니 좀 쑥스러운 면도 있다. 혹시 사소한 점에서라도 우리가 놓치고 있는 한글의 약점 같은 것은 없을까? 한글의 약점은 그 장점 속에 숨어 있다. 한글의 장점이 약점이 될 수도 있다는 말이다. 그것도 바로 한글이 매우 과학적이라는 장점 말이다. 한글은 매우 과학적인 구조를 가졌기 때문에 발음이 비슷하면 글자 모양도 비슷하다. 그래서 발음을 정확하게 분별하지 못하면 잘못 쓰기가 쉽다. 특히 처음 한국말을 배우는 외국인들이 예민하게 발음을 분별하는 일은 간단치 않다. 과학적인 것과 실용적인 것은 별개의 문제이다. 한글의 또 한 가지 특징은 풀어 쓰는 것이 아니라 네모 칸 속에 넓적한 모양으로 모아써야 하는 글자라는 점이다. 어떤 글자는 그 네모 칸이 무척 비좁다. 그렇다 보니 ‘틀’과 ‘를’, ‘흥’과 ‘홍’, ‘헤’와 ‘혜’ 같은 것이 헛갈리기 쉽다. 운전하면서 도로 표지판에 쓰인 지명이나 거리 이름을 읽을 때, 곁다리로 써놓은 알파벳이나 한자가 더 빨리 인식되기도 한다. 한글의 또 다른 문제점은 나이가 570년 남짓밖에 안 된다는 것이다. 이 정도면 문자의 세계에서는 미성년이라 할 만큼 아주 젊은 편이다. 한글은 앞으로 오랜 시간 숙성되면서 글자의 모양, 즉 ‘글꼴’이 더 다양해져야 한다. 과학성을 유지하면서도 변별력이 높은 글자가 되는 것 말이다. 그런 점에서 한글 서예라든지 한글 펜글씨 등이 공교육에 반영되어 글꼴 발전의 바탕이 되는 손글씨가 다양하게 확산되었으면 한다. 그런 활동을 통해 다양한 글꼴이 자연스레 파생되어 나올 수 있을 것이다. ………………………………………………………………………………………………… 가로쓰기 신문 요즘은 신문이 한글로 가로쓰기 판짜기를 하는 것이 상식이 되어버렸기 때문에 이야깃거리조차 되지 않겠지만 1980년대만 해도 한자를 섞어 쓰는 세로쓰기가 훨씬 일반적이었다. 최초의 신문인 <독립신문>이 한글판이었고 그 후의 <협성회회보>도 역시 한글판이었으니 우리의 초창기 신문은 사실 한글판에서부터 비롯한 것이다. 그러나 모두 세로쓰기의 틀에서는 벗어나지 못했다. 1947년, 광복한 지 채 몇해 지나지도 않아서 전라남도 광주에서는 매우 중요한 실험이 이루어졌다. 광주에서 발행된 <호남신문>이 주로 한글을 사용하면서 처음으로 가로쓰기 판짜기를 시작한 것이다. 한글의 발전사를 중심으로 본다면 이것은 <독립신문> 이후의 첫번째 큰 도전이었다. 그 주역은 조선어학회에서 활동했던 이은상 선생이었다. 당시 <호남신문>의 발행 부수는 2만부에 육박하여 그리 밀리는 편도 아니었다. 처음에는 가로쓰기에 한글 위주의 신문이 불편하다는 여론도 적지 않았다. 1952년에 여론조사를 해보니 찬성과 반대가 거의 엇비슷하게 나왔다. 당연히 찬성하는 측은 대부분이 젊은 층이었다 한다. 그러나 1956년 <호남신문>은 다시 세로쓰기로 돌아갔다. 이렇게 회심의 도전은 막을 내리고 말았다. 다시 돌이켜본다면 <호남신문>의 도전은 대략 40년 후의 변화를 예고한 선구자적 시도였으나 그것을 지탱해낼 만한 사회적 저력이 부족했다. 그 이후 한글을 사용하는 가로쓰기판의 일간신문은 결국 1988년 <한겨레신문>의 창간을 기다려야 했다. 이렇듯이 <한겨레신문>의 판짜기는 1896년 <독립신문>의 탄생과 1947년 <호남신문>의 도전 정신을 이어받아 거둔 90여년 만의 열매이다. 읽기 쉬운 모습으로 대중적 소통을 꾀하는 민주적 신문이 그 기본을 갖추는 데는 거의 백년 동안의 도전과 실험이 필요했던 것이다. 김하수/한겨레말글연구소 연구위원·전 연세대 교수
현대소설용어사전 ● 낙원 소설 현실 세계에 존재하지 않는 낙원의 존재 형태와 그곳에서 살고 싶어하는 인간의 욕망을 다룬 소설이다. 낙원은 동양에서는 무릉도원, 서양에서는 유토피아라 불리며, 우리 소설에서는 주로 천상이나 섬 등으로 나타난다. 대표적 작품으로는, '구운몽', '홍길동전', '허생전' 등의 고대 소설과 이청준의 '이어도' 등의 현대 소설이 이에 속한다. ● 낭만주의 소설 낭만주의는 상상력과 개성 및 독창성을 중시하고, 현실적이고 유한한 세계보다는 이상화된 무한한 세계를 동경하며, 고전적인 형식의 균형과 조화보다는 내면의 갈등과 부조화에 대한 자각으로부터 출발한다. 따라서, 자연과 예술, 지상과 천상, 죽음과 삶 속에 내재된 혼돈을 주목하는 문학과 예술의 경향, 또는 세계관을 지칭한다. 낭만주의는 '질풍 노도'라는 말처럼 반이성적이며, 개인적인 경험을 어떤 거리낌도 없이 표현하는 예술가의 독창적이고 창조적인 재능을 중시하는 것이 그 특징이다. 낭만주의 소설은 이러한 낭만주의의 정신을 바탕으로 쓰여진 소설이며, 대체로 플롯이 빈약하고 인물들의 성격 묘사가 불확실하며, 음악적인 형식과 시적인 서정성을 짙게 보여 준다. 또한, 개인의 주관적이고 내면적인 감정을 중시함으로써 고백체 형식을 띄는 것이 많다. 우리 나라에서는 주로 동인지 '백조'를 중심으로 1920년대 시단에서 많이 나타나며 소설에서는 아직 뚜렷하게 낭만주의를 보여 주고 있는 작품이 없다. ● 낯설게 하기(시치미떼기) 낯설게 하기는 러시아 형식주의자들에 의해 처음으로 사용된 용어로서 일상화되어 있는 우리의 지각이나 인식의 틀을 깨고 사물의 모습을 낯설게 하여 사물에게 본래의 모습을 찾아 주는 데 그 목적이 있다. 낯설게 하기란, 그런 점에서 형식을 난해하게 하고 지각에 소요되는 시간을 연장시킴으로써 표현 대상이 예술적임을 의식적으로 경험하게 하는 양식인 셈이다. 낯설게 하기는 궁극적으로 독자의 기대 지평을 무너뜨려 새로운 양식을 태동시키게 된다. 의미 심장한 내용을 작가가 모르는 체하며 이야기하는 수법이다. 최인호의 '영가', 장정일의 '아담이 눈뜰 때', 하일지의 '경마장 가는 길', 최인훈의 '총독의 소리', '서유기', 이인성의 '낯선 시간 속으로' 등의 작품이 이러한 낯설게 하기를 보여 주는 작품들이다. ● 내용과 형식 문학에 있어서 내용과 형식 가운데 어느 것이 더 우선하는 것이냐는 논쟁은 문학 이론이 생겨난 이래 아직도 종결되지 못한 것이다. 아무리 훌륭한 내용일지라도 훌륭한 형식에 담겨지지 않을 때 훌륭한 문학이 가능할 수 없다는 것이 형식 우선론자들의 일관된 주장이며, 형식이 아무리 훌륭해도 내용이 충실하지 않고는 속이 빈 강정에 불과하다고 맞서는 것이 내용 우선론자들의 주장이다. 특히, 실험성이 많은 작품일수록 내용과 형식에 관한 논쟁을 불러일으키지만, 위대한 작품은 내용과 형식, 어느 것도 소홀히 하지 않는다는 점에 먼저 주목해야 한다. ● 내적 독백(interior monologue) 심리 소설의 한 서술 방식으로, 인물의 심리적 독백을 통하여 간접적으로 외적 사건을 그리는 기교이다. ● 논평 소설 속에서 화자가 자신의 견해를 명백하게 드러내 보이는 서술 행위로, 한 작가가 독자들을 그가 원하는 방향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구사하는 서사적 책략의 중요한 방편으로 사용된다. 사건과 행위의 불투명성을 직접 '해석'하여 선명하게 제시하려 한다든가, 도덕적 기준을 설정하고 어떤 행동과 상황의 가치를 '판단'하기도 한다. 또는, 어떤 발언이나 행동의 의미를 텍스트 바깥의 상황과 연결 지어 '일반화'시키는 것도 이에 포함된다. ● 농민 소설 농민과 농촌의 문제를 소재로 하여 씌어진 소설이다. 그러나 농민 소설은 전원적이고 향토적인 공간으로서의 농촌을 배경으로 하거나 단순히 농민을 주인공으로 설정한 농촌 소설과는 달리, 당대의 농촌이 안고 있는 구조적인 모순이나 농민 의식의 성장 등을 다룬다는 점에서 그 특성이 두드러진다. 따라서 1930년대 농촌 계몽 운동의 일환으로, 또는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일환으로서의 농민 해방을 목적으로 하여 씌어진 소설들, 1970년대 이후의 산업화, 도시화의 과정에서 소외되고 황폐화된 농촌의 현실과 농민의 문제를 다룬 소설들이 농민 소설에 포함된다. 1930년대 이광수의 '흙', 심훈의 '상록수', 이기영의 '고향', 김남천의 '생일 전날'과 1970년대 김정한의 '사하촌', '모래톱 이야기' 등이 대표적 작품들이다. ● 농촌 소설 농민 소설과는 다르게 농촌을 도시와 대비되는 자연적이고 향토적인 삶의 공간이면서 이상적인 삶의 공간으로 묘사한 소설을 일컫는다. 우리 문학에서 농촌 소설의 연원은, 일반 지식인들 사이에서 도시의 현실을 비판하고 농촌을 중시하는 기운이 농후해진 1935년 전후부터 발흥한 이른바 전원 문학에서 찾을 수 있다. 이무영의 '농부', '제1과 제1장', 박영준의 '모범 경작생', '어머니', 최인준의 '양돼지', 이근영의 '금송아지' 등이 1930년대의 대표작이며, 방영웅의 '분례기', 오유권의 '농지 상환선' 등은 1970년대 농촌 소설의 대표작들이다. ● 누보 로망(nouveau roman) 이 용어는 1950년대부터 프랑스에서 발표되기 시작한 전위적(前衛的)인 소설들을 가리키는데, 구체적으로는 전통적인 소설의 기법과 관습을 파기하고 새로운 스타일을 창조하고자 했던 일군의 작가들의 소설을 가리킨다. 논자에 따라서는 앙티 로망(反소설)이라고도 한다. 이러한 소설은 첫째, 어떤 고정된 소설의 개념이나 이론을 내세우지 않음으로써 전통적인 리얼리즘 소설에 대한 도전의 의미를 가지고 있으며, 둘째, 창작의 과정을 낡은 체계나 관습을 깨고 새로운 관습과 체계를 세우는 창조적 파괴의 과정으로 인식하는 것이며, 셋째, 하나의 두드러진 특징으로 통합될 수 있는 학파나 그룹이 될 수 없다는 등의 특징을 지니고 있다.
한승원의 글쓰기 교실 제11교시 - 첫머리 쓰기는 서서 숟가락질 하기 - 잘 쓴글과 못쓴글은 '서두'에서 판가름 난다. 1. 첫머리 쓰기는 첫 숟가락질하기와 같다. 어머니께서 식탁 위에 저녁밥을 차리셨다. 이 날의 특별 요리는 갈비찜이었다. 그래서 식탁 한가운데는 갈비찜 냄비가 놓여 있었고, 그것을 중심으로 하얀 밥.된장국.생선구이.김치.구운 김.젓갈.깍두기 들이 둘러 앉아 있다. 자, 우리는 이제 그 식탁 앞에서 무엇부터 먹을 것인가를 결정해야 한다. 그래야만 먼저 젓가락을 들 것인가, 숟가락을 들 것인가 하는 문제를 정할 수 있으니까. 그 때, 어머니께서 말씀하셨다. "얹힐까 싶으니까 국부터 한 숟가락 떠 먹고 다른 것을 먹기 시작 해라, 천천히 꼭꼭 씹어서" 어머니께서 국을 한 숟가락 떠 먹고 나서 다른 음식을 먹으라고 하는 것은, '먼저 입 안을 국물로 적시어 혀가 잘 움직일 수 있게 한 다음, 목구멍과 위에게 음식 받아들일 준비를 하라'고 일러주려는 뜻이다. 만일 어머니의 말씀이 옳다면, 이 날 특별하게 많이 먹어야 할 음식이 갈비찜이라 할지라도, 우리는 젓가락 보다는 숟가락을 먼저 들고 국물부터 떠 먹어야 한다. 양식당에서 식사할 때도 그렇다. 우리는 자리를 잡아 앉은 뒤, 차림표를 보고 음식을 주문한다. 하지만 우리의 식탁위에 가장 먼저 놓여지는 것은 방금 주문한 그 음식이 아니다. 그 음식을 먹기 전에 먼저 수프와 야채 등의 가벼운 음식(전채요리)으로 미각을 돋운 뒤에야 비로소 주문한 음식(주요리)을 먹게 된다. 그 식사를 마치고 나면, 끝으로 후식이 나온다. 다시말해 전식(전채요리)과 본식(주요리), 후식의 순서를 밟는다는 것이다. 이 때, 전식은 대체로 국물(수프)이고, 본식은 주문을 한 음식이며, 후식은 차나 과일인 경우가 많다(이것은 글쓰기의 짜임과 똑같다). 즉, 동양이나 서양이나 첫 숟가락질은 대부분 국물 있는 것으로부터 시작 한다는 것이다. 국물 있는 것은 대개 부드러우므로 그리 오래 씹을 필요가 없으며, 목구멍으로 쉽게 넘길 수 있다. 먼저 입 안의 천장과 혀와 목구멍과 위 속을 적셔 놓아, 그것들이 음식을 받아들일 준비를 하게 해 놓은 다음 본식을 먹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우리가 좋아하는 갈비나 돈가스가 식탁 위에 차려져 있는 것을 보면, 한 점이라도 빨리 먹고 싶은 마음에 "아아, 맛있는 갈비다!", "야아, 돈가스다!"하면서 고기부터 집어먹을때가 있다. 이렇듯 국물로 목을 축이지 않은 채 질긴 갈비나 기름진 돈가스를 먼저 먹게 되면 위가 놀라 체하게 마련이다. 가령 우리가 영양 보충을 하기 위해 그것을 먹어야 한다면, 그것을 어떻게 먹어야만 체하지 않는지, 또 몸 속 곳곳에서 고른 영양을 섭취할 수 있는지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된다. 화가 고흐는 화폭에 그려야 할 '무엇'이 깃들기 전에는 붓을 들지 않았다고 한다. 화폭에 '무엇'인가가 깃들이게 되려면, 먼저 머릿속에 어떤 그림인가 그려져야 한다. 또 머릿속에 어떤 그림이 그려지게 하려면, 그 전에 그려야할 대상을 세심히 관찰해야 한다. 뿐만 아니라 자신이 왜 그 대상을 그리려 하는지에 대해서도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한다. 그래야만 그 그림을 어디에서부터 어떻게 그릴 것인가를 결정할 수 있기 때문이다. 글쓰기도 마찬가지다. 쓰려는 내용이 종이 위에 선명하게 나타나지 않으면 펜을 들지 않아야 한다. 어떻게 써야겠다는 대강의 요령이 떠올랐다고 해서 섣불리 펜을 들면, 가장 중요한 부분 몇 마디, 즉 글의 중간에 나와야 할 말들이 먼저 튀어나와 버리기 쉽다. 그렇게 되면 겨우 그 몇 줄만 써 놓고 난 뒤, 다음을 이어 쓰지 못해 쩔쩔매게 된다. 2. 첫 문단, 첫 문장, 첫 낱말 나는 그믐달을 몹시 사랑한다. 그믐달은 요염하여 감히 손을 샏 수도 없고, 말을 붙일 수도 없이 깜찍하게 예쁜 계집애 같은 달인 동시에 가슴이 저리고 쓰리도록 가련한 달이다...... -나도형의 <그믐달>중에서 이 글은 첫 문장을 '나'로 시작하고 있다. 이처럼 '나'로부터 시작하는 글쓰기는 매우 평범하고 쉬운 서두법(첫머리 쓰는 법)이라 할 수 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글쓰기를 즐겨 하는데, 이방법은 글이 매우 순탄하게 풀린다는 장점을 지니고 있다. 그렇다고 '나'라는 말을 반드시 앞에 써야 할 필요는 없다. 그렇게 하지 않다도 '나'로부터 시작되고 있음을 쉽게 알아차릴 수 있는 글도 있으니까. 오늘아침 자습시간에 같은 반 친구 은영이로부터 빨간색 색지에 쓴 고운 편지를 받았다. 편지 속 이야기를 대하던 중, 가장 반가웠던 사연은 '믿음아, 오늘 눈이 온다더라'였다. 또 글의 제목이 명사일 경우에는, 바로 그 명사를 첫머리의 낱말로 삼을 수도 있다. 겨울, 내가 '겨울이구나' 하고 생각이 든 때나, 누군가가 그렇게 말하면, 내 마음은 고삐 풀린 망아지 혹은 갈 속 없는 떠돌이 처럼 괜히 들뜨고 설레인다. 글쓰기에 자신이 없는 사람일수록 첫 문장은 길게 쓰지 않는 편이 좋다. 첫 문장이 길어지면, 그것을 매끄럽게 마무리하기가 힘들어 지기 때문이다. 첫 문장은 가능한 짧게 끊어 쓰는 것이 좋다. 다시 말해, 첫 문장에서부터 멋을 잔뜩 부려 장황하게 쓰려고 하면, 내용이 얽히고 설켜서 써 나갈 방향을 놓쳐 버리기 쉽다는 것이다. 3. 주제와 밀접한 관계가 있는 첫머리 사람은 누구든지 어머니 뱃속에서 막 태어날 때, "응아!"하고 소리를 지른다. 그것은 절대로 아파서 내는 소리가 아니다.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났음'을 알리는 외침인 것이다. 다시 말하면, 이 세상에 자기가 분명하게 있다는 사실(존재)의 확인인 셈이다. 사람들은 그 '응아' 소리를 질러 대는 순간부터 자기 갊의 폭과 깊이를 조금씩 넓혀 나가기 시작한다. 자기로부터 가족으로, 가족에서 나라로, 나라에서 세계 인류사회로......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가는 의미나 가치'는 태어나면서 외친 그 첫소리, 즉 '응아' 소리가 가지고 있는 의미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우리가 학교에서 공부를 하는 것, 장차 직장인이 되어 나와 내 가족, 내 나라, 세계 인류를 위하여 끊임없이 분투하는 것도 따지고 보면, '자기의 존재 확인'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기 때문이다. 결국 글의 첫머리도 태어남의 첫소리인 그 '응아' 소리와 마찬가지다. 새로 태어난 아기가 그 우렁찬 소리로 주위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듯이, 글의 첫머리에도 읽는 이의 관심을 끌어낼 수 있어야 한다. '응아' 소리의 우렁찬 정도를 두고 사람들이 아기의 건강과 미래를 점치게 되는 것 처럼, 글의 첫머리에서도 말하려는 대상이나 내용, 그 글을 쓰는 목적 등을 내 비춰 주어야 한다. 그래야만 읽는 이가 글의 방향을 쉽사리 잡아낼 수 있으니까. 다시말해, 글의 첫머리는 주제로 나아가는 길목의 안내자 정도로 생각하면 되겠다. 다음 글은 첫 문장과 주제가 아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 이 글의 지은이가 첫 문장을 왜 그렇게 시작했는지 글 전체의 흐름을 파악하면서 꼼꼼히 살펴보길 바란다. 나는 우리 나라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나라가 되길 원한다. 가장 부강한 나라가 되기를 원하는 것은 아니다. 내가 남의 침략에 가슴이 아팠으니 내 나라가 남을 침략하는 것을 원치 아니한다. 우리의 부력은 우리의 생활을 풍족히 할 만하고, 우리의 강력은 남의 침략을 막을 만하면 족하다. 오직 한없이 가지고 싶은 것은 높은 문화의 힘이다. 문화의 힘은 우리 자신을 행복되게 하고 나아가서 남에게 행복을 주겠기 때문이다. 지금 인류에게 부족한 것은 무력도 아니요, 경제력도 아니다. 자연 과학의 힘은 아무리 많아도 좋으나, 인류 전체로 보면 현재의 자연 과학만 가지고도 편안히 살아가기에 넉넉하다. 인류가 현재에 불행한 근본 이유는 인의가 부족하고 자비가 부족하고 사랑이 부족한 때문이다. 이 마음만 발달이 되면 현재는 물질력으로 30억이 다 편안히 살아갈 수 있을 것이고 인류의 이 정신을 배양하는 것은 오직 문화이다. 나는 우리 나라가 남의 것을 모방하는 나라가 되지 말고, 이러한 높고 새로운 문화의 근원이 되고 목표가 되고 모범이 되기를 원한다. 그래서 진정한 세계의 평화가 우리 나라에서, 우리나라로 말미암아서 세계에 실현되기를 원한다. 홍익인간이라는 우리 국조 단군의 이상이 이석이라고 믿는다. -김구의 <내가 원하는 나라> 중에서 4. 모든 글은 '나'와의 간계로부터 찬바람이 불면 코와 귓불이 유난히 빨개져 겨울을 그리 달갑게 여기지 않는 나이지만, 눈만 오면 끈 풀린 강아지처럼 유난을 떨며 무조건 밖으로 나가고 본다. 아파트 옆 터미널의 시끄러움 가지 덮어버린 새하얀 눈 위에서 마음껏 뒹굴고 뛰어다닌다. 그러다 보면, 이 세상에 나 혼자 남겨진 듯한 기분에 휩싸여 코 아래로 흘러내리는 콧물까지 잊어버리기 일쑤이다. 깊은밤에 아무도 모르게 내려 발목까지 수북히 쌓인 눈 그것도 모르고 깊이 잠든 사람들을 제쳐두고 아무도 밟지 않은 그것을 밟고 호흡할때의 기분은 게으름뱅이들은 알지 못하는 아주 특별한 것이다. 눈부시도록 하얀 눈을 바라보면서 그것은 어쩌면 산타 할아버지가 만인에게 주는 유년의 꿈과 추억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한다. 어른들에게는 어린 시절의 기억과 낭만을 선물하고...... 코트에 묻은 눈을 털고 흐르는 콧물을 힘껏 들이킨 뒤 다음번의 더 희고 깨끗한 눈을 기약하며 아쉬운 발걸음을 집 쪽으로 이끈다. 안에서 내다본 눈이 유독 새하얀 거울이다. 글쓴이가 이 글에서 나와 '눈', 혹은 나와 '겨울의 추위'와의 관계를 이야기 하려 한 듯하다. 글은 이렇게 자기와 관계 깊은 사람, 즉 절친한 친구나 부모님, 형제 등 누구한테 이야기를 하듯이 편한 마음으로 써 나가는 것이 가장 좋다. 글은 자기가 쓰려고 하는 대상(글감)이 이러이러할 때에, '나'는 그것에 대하여 어떤 반응을 나타내는가를 잘 관찰하여 말(진술)하는 것이다. 좋은 글을 쓰려면 그 진술 속에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들어 있어야 한다. 그 대상은 나에게 어떤 의미와 가치를 지니고 있는가. 나는 왜 하필 그 대상에 대하여 이렇게 생각하고 있는가. 그 대상에 비추어 볼 때 결국 '나'라는 인간은 무엇이며 어떤 의미와 가치를 지니고 있는가. 글의 첫머리는 바로 그러한 이야기들의 첫 실마리를 풀어내는 곳이다. 앞서 인용한 글은 첫머리와 중간부분을 아주 매끄럽게 진술하고 있다. 하지만 끝으로 가면서 조금씩 힘이 없어지더니 나중엔 다소 엉뚱하게 끝을 맺어 버려 읽는 이로 하여금 아쉬움을 자아내게 한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그 대상(글감)은 나에게 무엇이며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는지, 나는 그 대상에 대하여 왜 이런 진술을 하고 있는지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보지 않은 채 펜을 들었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이 써 놓은 한 편의 글은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실력을 한데 합쳐서 만들어 낸 조형물(모양을 가진 물체)이라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자기의 생각을 제대로 표현해 낼 만한 실력을 기르는 것은 참으로 중요한 일이다. 생각해 봅시다. 1. 한편의 글에 있어서 첫 문장은 처음 마주치는 사람의 첫인상 과도 같다. 그렇기 때문에 첫 문장은 그 글에 있어 매우 중요한 구실을 한다. 그렇다면 좋은 글을 쓰기 위헤서는 첫 문장을 어떻게 쓰는 것이 좋을지 서로 이야기해 보자. 2. 글의 첫머리는 주제로 나아가는 길목의 아내자라고도 할 수 있다. 이러한 글의 첫머리에는 어떠한 내용을 담는 것이 좋을까?
분서갱유(焚書坑儒) 중국 진시황이 민간의 서적을 불사르고 유생을 구덩이에 묻어 죽인 일. 《出典》'史記' 秦始皇紀 / '十八史略' 秦篇 기원전 221년, 제(齊)나라를 끝으로 6국을 평정하고 전국시대를 마감한 진(秦)나라 시황 제(始皇帝) 때의 일이다. 시황제(始皇帝)는 천하를 통일하자 주(周)왕조 때의 봉건 제도를 폐지하고 사상 처음으로 중앙 집권(中央執權)의 군현제도(郡縣制度)를 채택했다. 군현제를 실시한 지 8년이 되는 그 해(BC 213) 어느날, 시황제가 베푼 함양궁(咸陽宮)의 잔치에서 박사(博士)인 순우월(淳于越)이 '현행 군현제도 하에서는 황실의 무궁한 안녕을 기하기가 어렵다'며 봉건제도 개체(改體)할 것을 진언했다. 시황제가 신하들에게 순우월의 의견에 대해 가부(可否)를 묻자, 군현제의 입안자(立案者)인 승상 이사(李斯)는 이렇게 대답했다. "봉건시대에는 제후들 간에 침략전이 끊이지 않아 천하가 어지러웠으나 이제는 통일되어 안정을 찾았사오며, 법령도 모두 한 곳에서 발령(發令)되고 있나이다. 하오나 옛 책을 배운 사람들 중에는 그것만을 옳게 여겨 새로운 법령이나 정책에 대해서는 비난하는 선비들이 있사옵니다. 하오니 차제에 그러한 선비들을 엄단하심과 아울러 백성들에게 꼭 필요한 의약(醫藥) 복서(卜筮) 종수(種樹)에 관한 책과 진(秦)나라 역사책 외에는 모두 수거하여 불태워 없애 버리소서." 시황제가 이사(李斯)의 의견을 받아들임으로써 관청에 제출된 희귀한 책들이 속속 불태워졌는데, 이 일을 가리켜 '분서(焚書)'라고 한다. 이듬해(BC 212) 아방궁(阿房宮)이 완성되자 시황제는 불로장수의 신선술법(神仙術法)을 닦는 방사(方士)들을 불러들여 후대했다. 그들 중에서도 특히 노생(盧生)과 후생(侯生)을 신임했으나 두 방사(方士)는 많은 재물을 사취(詐取)한 뒤, 시황제의 부덕(不德)을 비난하며 종적을 감춰 버렸다. 시황제는 분노했다. 그런데 그 진노가 채 가시기도 전에 이번에는 시중(市中)의 염탐꾼을 감독하는 관리로부터 "페하를 비방하는 선비들을 잡아 가두어 놓았다."는 보고가 들어왔다. 시황제의 노여움은 극에 달했다. 엄중히 심문한 결과 연루자는 460명이나 되었다. 시황제는 자기를 비방한 460명의 유생(幼生)들을 모두 산 채로 각각 구덩이에 파묻어 죽였는데, 이 일을 가리켜 '갱유(坑儒)'라고 한다.
Board 고사성어 2022.06.23 風文 R 69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