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무 생각 사람이 살면서 가장 오래 정을 나누는 사람이 누굴까? 아마 살아온 역정에 따라 누구는 배우자, 누구는 형제자매, 또 더 나아가 친구를 꼽을 수도 있겠다. 배우자와 형제자매는 일단 관계가 맺어지면 지울 수 없는 흔적을 남긴다. 반면에 친구는 얼마든지 관계가 끊어질 수가 있다. 그럼에도 오래가는 친구가 있다면 그는 대단히 중요한 존재이다. 친구에 해당하는 말로는 또 ‘벗’, ‘동무’가 있다. 보통 ‘친구’라고 하면 엇비슷한 연배를 가리키는 경우가 많다. 그리고 아주 정 깊은 관계부터 시작하여 대충 이름 석 자 알고 지내는 경우에 이르기까지 그 스펙트럼이 넓어서 가장 두루두루 쓸 수 있는 말이기도 하다. ‘벗’이라 하면 비슷한 연배가 아니어도 함께 즐기는 대상이 있거나, 관심사가 같을 때 사용하기 좋은 말이다. 또 난초나 예술품 등 특정한 사물을 벗삼아 지낼 수도 있다. 그 외에도 ‘말벗, 술벗, 일벗, 마음의 벗’처럼 심리적으로 가깝고 편안한 관계를 나타낸다. ‘동무’라고 하면 또 다른 면을 가리킨다. 어린 시절부터 함께 놀았던 길동무, 글동무, 말동무, 소꿉동무, 어깨동무처럼 오랜 동안의 공동 활동을 통해 형성된 친근한 관계에 사용한다. 그래서 같이 놀아야 동무가 된다. 친구나 벗, 동무의 공통점은 ‘이해관계’를 넘어선 관계라는 것이고, 차이점은 광범위한 의미, 심리적인 가까움, 공동의 활동과의 연계 등의 요인에 따라 말을 달리한다. 친구도, 벗도, 동무도 우리의 삶을 매우 푸근하게 만들어준다. 특히 오래된 관계일수록 하루하루를 마치 묵은지처럼, 시래기처럼 종종 맵짜게, 종종 걸쭉하게 만들어주며 세상의 제도와 법도를 넘어서는 편안함을 가져온다. 그가 나에게 친구이면 당연히 나도 그에게 친구이다. 벗이며 동무가 또한 그러하다. 한겨레말글연구소 연구위원·전 연세대 교수 ……………………………………………………………………………………………………………… 마실 외교 한때 남과 북의 외교는 유엔에서 지지 국가 수를 늘리는 경쟁에 매몰되기도 했다. 또 강대국 치맛자락 뒤에 숨어서 동족끼리 손가락질하는 유치한 입씨름을 벌인 경우도 많았다. 올해 들어 벌어진 남과 북의 외교 활동은 시대의 의미를 바꾸고 있다. 우리가 우리의 문제를 이렇게 적극적으로 손발 맞춰 처리해 나간 적이 언제였던가? 미국 방문 1박4일, 순식간의 판문점 나들이, 이런 식으로 시간과 형식에 구애받지 않는 숨 가쁜 활동을 언론에서는 ‘셔틀외교’라고 했다. 왕복외교라는 뜻을 지닌 이 말은 마치 별생각 없이 왔다 갔다만 하는 심부름꾼이라는 느낌을 준다. 또 청소년 사이에서 사용되는 좋지 않은 통속어 가운데도 ‘셔틀’이란 말이 있어 적절치 못한 표현이라 생각한다. 통속어 ‘셔틀’은 힘이 약한 아이한테 궂은 심부름을 뒤집어씌우는 짓을 말한다. ‘담배 셔틀, 빵 셔틀, 가방 셔틀’ 등 약자를 괴롭히는 못된 짓들을 가리킨다. 이런 ‘셔틀’이란 말보다는 다른 좋은 말을 찾아보는 것이 낫겠다. 오래된 마을에서는 동네방네 돌아다니며 ‘사교 활동’을 하는 것을 ‘마실 다닌다’고 한다. 그러면서 먹을 것을 나누기도 하고 집집이 돌아가는 여러 가지 사연과 곡절을 귀동냥하며 ‘공동체’적인 소통을 한다. 그러다 보면 이웃집 숟가락이 몇개인지도 뻔히 알게 되며, 이런 소통과 정보를 바탕으로 마을의 협업과 보살핌이 이루어진다. 따지고 보면 국가 간의 외교도 이와 같지 않겠는가? 외교를 하면서 아슬아슬한 ‘벼랑 끝 외교’나 불안한 ‘말폭탄 외교’를 일삼는 것도 소모적인 짓이다. 그런가 하면 그저 거들먹거리기만 하는 거창한 국빈 외교도 얼마나 허망했던가? 이제는 더욱 실속 있는 마실 외교를 통해 국가 간의 소통을 유지하며 서로 이익을 나누는 품격 있는 국제 관계가 이루어졌으면 한다. 한겨레말글연구소 연구위원·전 연세대 교수
한승원의 글쓰기 교실 나만의 글쓰기 비법 제2교시 : 문장은 사람의 생각을 담는 그릇이다. 좋은 생각의 덩어리를 문장에 담는 방법 1. 생각의 덩어리란 무엇인가 얼마전에, 어느 법원의 판사 한 사람이 200자 원고지 100매 분량(단편소설 한 편쯤의 분량)의 판결문을 단 한 문장으로 썼다고 하여 말썽이 된 적이 있다. 그렇게 긴 문장은 쓰기도 괴로운 일일 뿐 아니라 읽어 내려가기도 숨가쁘고 이해하기도 힘들다. 그 얼마나 미련스러운 일인가? 우리는 그처럼 미련스럽게 긴 문장의 글을 잘 쓴 것이라고 착각해서는 안 된다. 자, 그러면 그것이 왜 미련스러운 글인지를 함께 살펴보기로 하자. 앞에 붙인 번호에 주의해 가면서, 다음의 이야기를 읽어보도록 하자. (1) 어머니가 시장에서 쌀 한 부대를 사 가지고 오셨다. 어머니는 식구들의 식탁 위에 한 부대의 쌀을 올려놓고 그대로 먹으라고 하시지 않는다. 우선 그 쌀을 모두 쌀통에 부어 놓으신다. (2) 그 다음에 식구 한 사람에 한 홉 정도씩의 쌀을 바가지에 담아 씻은 후 솥에 안치신다. (3) 어머니는 솥에 안친 밥이 끓고 뜸이 들기를 기다리셨다가, 그 것을 보온 밥통에 퍼 놓으신다. (4) 식구들의 수대로 밥그릇을 준비한 다음, 거기에 퍼 담아 식탁 위에 놓아 두신다. (5) 우리는 그 밥그릇을 두 손으로 들어, 입을 크게 벌린 채 한꺼번에 들이붓고 꿀꺽 삼켜 버리지 않는다. (6) 한 숟가락씩 떠서 입에 넣는다. (7) 우리는 또 그 밥 한 숟가락을 그냥 꿀꺽 삼켜버리지 않고, 입안에서 이로 오래오래 씹는다. 1) 씹은 것 가운데서 잘 씹어진 것 일부를 먼저 삼키고, 2) 덜 씹어진 것들은 더 씹은 다음에 또 일부를 삼키고, 3) 마지막에 나머지를 몇 번 더 씹어서 삼킨다. 사람은 누구든지 한 무더기의 큰 생각 덩어리를 가지고 있고, 그것을 누군가에게 말이나 글로써 전달하려고 한다. 글을 처음으로 쓰는 사람들은 매우 성급하여, 그 큰 생각 덩어리를 통째로 그 큰 생각 덩어리를 통째로 전달해 버리려고 하는 경우가 많다. 말하자면, 하나의 문장에다가 자기 생각의 큰 덩어리를 다 담으려고 한다는 것이다. 하나의 문장에는 생각 덩어리의 아주 작은 조각 한 개만 담는 것이 좋다 . 너무 큰 생각의 덩어리를 담으면 조그마한 문장의 봉지가 터져 버리고 담아 놓은 생각이 밖으로 줄줄 새어 나가고 빠져나가 버린다. 전하려 하는 생각들이 다 새어 나가고 빠져 나가버린 문장(봉지)은 온전한 문장일 리가 없다. 우리는 어머니가 시장에서 사 오신 쌀 한 부대(생각의 큰 덩어리)를 조금씩 나누어 먹어야 한다. 다시 말하면 (2)에서 (7)까지의 방법을 아침에 한번 사용하고, 점심에 또 한 번 사용하고 그리고 저녁속에 또다시 한 번 사용하는 것이다. 그렇게 먹어야 그것이 우리 몸 속에 들어가서 피와 살이 된다. 2. 생각의 덩어리를 어떻게 문장에 담을 것인가 우리가 '특이한 버릇'이라는 제목으로 글을 쓰려고 했을 때, 그 생각의 큰 덩어리는 어머니가 시장에서 사 가지고 오신 쌀 한 부대 에 해당하는 것이다. 쌀 한 부대를 한꺼번에 먹어 치우려고 하는 것은 미련 스러운 짓이다. 우리의 몸이 상하게 되는 것은 말 할 것도 없고, 소화를 시킬 수 도 없다. 다음의 글은 독자가 보내 온 글 가운데서 한 대목을 따온 것이다. 초등학교 다닐 때는 곤충을 잡아다가 괴롭혀 죽이거나 집에다가 놓고 며칠씩 놓아 두면 어머니께서 죽은 곤충을 버리시곤 하셨다. 위의 글속에 들어 있는 생각의 덩어리는 너무 크기 때문에 읽는 사람이 쉽게 입 안에 넣고 씹을 수도 없고, 목구멍 너머로 삼킬수도 없다. 그러므로 아래와 같이 그 덩어리를 잘개 쪼개 주는 것이 좋다. (1) 초등학교 4학년인가 5학년 때였다. (2) 그 때 나는 곤충을 많이 잡곤 했다. 나비, 매미, 잠자리, 메뚜기, 거미, 방아깨비, 풍뎅이...... (3) 그러고는 잡은 그것들을 몹시 괴롭혔다. 1) 꼬리에 실을 달아 가지고 놀기도 했고, 2) 고개를 비틀어 놓고 빙글빙글 돌게 하기도 했다. 3) 그냥 날개와 목을 떼어 죽이기도 했고, 4) 곤충망 속에다가 며칠씩 가두어 놓기도 했다. (4) 학교에서 돌아오면 어머니께서 그 곤충들의 시체를 말끔히 치워 놓으셨다. 그리고 그 불쌍한 것들을 다시는 잡아오지 말라며 나를 꾸짓곤 하셨다. 3. 좋은 생각은 좋은 그릇에 자, 이번에는 다른 독자들의 글을 한번 보로록 하자. (1) 사람이라면 누구나 자신도 알게 모르게 갖게 되는 버릇들이 있다. 내 친구들 중에도 불안하거나 긴장이 될 경우에는 손톱을 물어 뜯기도하고 다리를 떨어 마음을 가라앉히곤 한다. 또 공부를 할 땐 항상 자기가 좋아하는 가수의 노래를 들어야만 한다는 친구도 있고, 무언가를 암기하기 위해서는 그 암기 내용을 노래 부르듯이 흥얼거려야 외워진다는 친구도 있다. 참 특이한 버릇이다. (2) 그러나 이 친구들 뿐 아니라 나 또한 남이 보기엔 특이하다 싶은 버릇이 있다. 손틉을 깎았을 때 양 끝 살에 묻히는 부분을 깨끗하게, 아니 너무 깊게 많이 깎아 아플 정도 까지 해야 마음이 놓인다. 특별한 이유는 없지만 약간의 손톱이 남아 있을 땐 왠지 더러워 보이고, 금새 때가 낄 것 같고 또 그손톱이 살을 파고들 것 같은 불안감 때문인 듯싶다. 평소에 여러 가지 점에서 지나치다 할 정도로 불안해 하는 날 보고 히스테리가 있다고 하기도 하지만, 그밖의 생활에서는 느긋하고 여유 있느 성격을 가진 나이기에 히스테리란 말은 곳 재 언급되지 않곤 하지만, 어쩔 수 없이 그런 불안감을 특이한 버릇 탁으로 돌리게 되니 것이다. (3) 그밖에도 여러 가지 버릇을 갖고 있다. 잠잘 때 볼이 베개에 닿아야 잠이오고, 다리를조금이라도 굽혀야 편히 잘 수 있는 이상한 버릇들을 가진 재가 어떨땐 부끄럽기도 하다. (4) 그래서 이런 버릇들을 고쳐 보려고 노력도 했지만, 그때마다 따르는 것은 실패 뿐이었다. (5) 그렇지만 평범함 속에 튀는 사람이 되고 싶은 나는 이젠 버릇들을 굳이 고치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 특이하니까 튈수도 있고, 그다지 해로운 버릇도 아니니까 말이다. (6) 항상 자신감을 갖고 살라는 엄마의 말씀대로 나의 특이한 버릇에 내 나름대로의 긍지와 자신감을 갖고 지낼 것이다. 나만의 개성을 추구하면서...... 우리는 어머니 뱃속에서 막 나올 때 크게 소리를 지른다. 그 소리가 우렁차야 어른들은 튼튼한 아이를 낳았다고 좋아한다. 이렇듯 우리가 무엇인가를 말하려 할 때는 그첫소리를 크게, 그리고 분명하게 외쳐야 한다. 글쓰기도 마찬가지다. 어떤 글이든지 그 글의 첫 문장은 주제와 밀접한 관계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 첫문장은 명료해야 한다. (1)의 첫문장 사람이라면 누구나 자신도 알게 모르게 갖게되는 버릇들이 있다. 이것은 다음에 있는 이 글의 마지막 주장과 긴밀한 관계를 가지고 있어서 좋다. ......항상 자신감을 갖고 살라는 엄마의 말씀대로 나의 특이한 버릇에 내 나름대로의 긍지와 자신감을 갖고 지낼 것이다. 나만의 개성을 추구하면서...... 그런데 이 첫문장은 생각이 잘 정리되어 있지 못한 듯 하다. 그것을 이렇게 고쳐보면 어떨까. 사람들은 누구나 자기만의 특이한 버릇을 가지고 있다. 그러면 이러한 방법으로 수정하고 가필한 글과 원래의 글을 비교해 보도록 하자. (1) 사람들은 누구든지 자기만의 특이한 버릇을 가지고 있다. 내가 친구들 가운데 몇 사람은 긴장이 되거나 불안해 지면, 손톱을 물어뜯기도 하고 다리를 떨기도 하면서 마음을 가라앉히곤 한다. 또 어떤 친구는 혼자서 공부를 할 때, 반드시 자기가 좋아하는 가수의 노래를 들어야만 한다고 한다. 뿐만아니라 무언가를 암기하기 위해서는 그 것을 노래부르듯이 흥얼거려야 한다는 친구도 있다. (2) 물론 나한테도 남의 눈에 특이하게 보일 만한 버릇이 있다. 손톱을 깎을 때 손톱의 양쪽 끝 살 속에 묻히는 부분을 깨끗하게 깎아야만 하는 것이다. 아니, 아플 절도로 깊게 깎아야 마음이 놓인다. 그 부분에 손톱이 조금이라도 남아 있으면 더러워 보이고, 금세 그 사이에 때가 낄 듯 싶고, 또 그 손톱이 살을 파고들것만 같아 불안해 진다. 덜 깎은 손톱 때문에 지나치다 싶은 정도로 불안해하는 나를 보고 친구들은 히스테리가 있다고 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 밖의 생활에서는 꽤 느긋하고 여유 있는 편이기 때문에 그 말은 내게 맞지 않는 듯 하다. 나는 그냥 그 불안감을 아주 깨끗한 것을 추구하는 특이한 버릇 쯤으로 돌리고 싶다. (3) 그밖에도 나에게는 여러 가지 버릇이 있다. 잠잘 때 볼이 베개에 닿아야 잠이 오는 것이라든지, 다리를 조금이라도 굽혀야 편히 잘 수 있다든지 하는 이상한 버릇들, 물론 이러한 버릇들은 결코 자랑할 만한 것이 못 된다. (4) 그 때문에 이런 버릇들을 고쳐 보려고 노력을 하기도 했지만, 그때마다 실패하곤 했다. (5) 하지만 이제는 이 버릇들을 굳이 고치려 애쓰지 않기로 했다. 나는 평범한 삶 속에서도 남보다 뀌어난 사람이 되고 싶기 때문이다. 따지고 보면 그다지 해로운 버릇도 아니다. 아니, 특이한 만큼 남보다 뛰어날 가능성도 더 있는 것이 아닐까. (6) 어머니는 나에게 항상 자신감을 가지고 살라고 말씀하신다. 나는 나의 특이한 버릇에 대하여 나 나름대로의 긍지와 자신감을 갖고 살아가기로 했다. 나만의 개성을 추구하면서...... 사람의 버릇은 성격을 형성하고, 그 성격은 인격을 만든다. 그렇다면 이 글에 윤기를 더하기 위하여, 바른 인격의 형성이나 삶에 대해 명상하는 모습을 보태 보는 것은 어떨까? 그러면 좋은 옷에 예쁜 꽃 장식을 달아 놓은 것처럼 글이 더욱 빛나지 않을까? 좋은 생각은 좋은 그릇(문장)에 담아야 한다. 생각해 봅시다. 1. 사람들은 누구나 자신의 마음속에 커다란 생각의 덩어리를 가지고 있다. 그래서 말로써든지 그것을 다른 사람에게 전달하려고 애쓴다. 이 때, 그 큰 생각의 덩어리를 어떠한 방법으로 전달하는 것이 옳은지 각자의 생각을 말해 보도록 하자. 2. 사람과 사람이 만났을 때는 그 첫인상이 매우 중요하듯이, 글을 쓸 때는 첫 문장이 아주 중요한 구실을 한다. 그러면 첫 문장은 어떻게 쓰여야 하는지 설명해 보자.
작은 이야기 2 - 정채봉, 류시화 엮음 3. 함께 사는 삶 사십에 사표를 던지고 - 김광수 나는 나이 마흔에서야 철학공부를 하러 나섰다. 친구들도 부러워하던 외국 기관의 좋은 직장에 사표를 던지고, 대책 없이 가족을 서울에 남겨 둔 채미국 유학길에 들어섰던 것이다. 첫걸음부터 어려움에 부딪쳤었다. 나이가 나이인지라 미 대사관 영사는 내가 유학이 아니라 위장 이민을 가려고 한다면서 비자를 줄 수 없다고 잘라 말했다. 앞이 캄캄했다. 그러나 나는 끈질기게 영사에게 호소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당신네 나라 대통령인 레이건은(당시에 레이건이 대통령이었다) 쉰여섯 살에 배우 생활을 청산하고 정치가의 길에 들어섰습니다. 남들 같으면 인생을 마무리 지어 갈 나이에 새로운 인생을 시작했던 것입니다. 그때 당신은 그가 대통령이 될 것이라는 것을 꿈에라도 생각해 봤습니까?" 영사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 말했다. "좋습니다. 당신에게 비자를 주겠습니다." (한신대 철학과 교수) 너무 예쁜 내 새끼들 - 조혜숙 안옥순(65세, 서울 종로구) 할머니는 올해로 5년째 종로구의 한 파출소에서 주방일을 맡고 계신다. 하루 세 번 출근해서 파출소 식구들의 식사를 준비해 주시는 것이다. 주방이라고 해야 두 평 남짓한 공간에 일하는 사람은 할머니 혼자뿐이다. 자식들은 그 연세에 무슨 일을 하느냐고 그냥 편하게 집에서 지내시라고 다들 말리지만 무엇보다 시간을 심심치 않게 보낼 수 있는 것이 가장 맘에 들고 다달이 월급을 타는 재미도 빼놓을 수 없다. 하지만 할머니가 이 파출소를 쉽게 떠날 수 없는 이유는 따로 있다. 바로 지희, 지연이와의 추억 때문이다. 할머니가 이 두 아이들을 만난 것은 1990년 여름이 다 지날 무렵이었다. 건넌방에서 세를 살던 젊은 애엄마가 하루만 애를 좀 봐달라면서 지희와 지연이를 데리고 왔다. "그래, 놓구 가. 언제 올 거야?" 애엄마는 대답 대신 두 홉 정도 되는 쌀 봉지를 내밀었다. "애들 하루 봐주는데 쌀은 무슨..." 할머니는 며칠 전 애아빠가 돈 벌겠다고 집을 나갔다는 얘기를 들었던 터라 어디 일자리라도 구하러 가는구나 했다. 그런데 사흘이 지나도록 소식이 없는 거였다. 우선은 급하고 겁나는 마음에 친구 집에 애들을 맡겨 놓고 애들 엄마를 찾으러 사방으로 수소문을 해보았다. 하지만 아무래도 작정을 하고 없어진 것 같다는 짐작뿐 헛일이었다. 부모가 멀쩡하게 살아 있는 아이들을 차마 고아원에 갖다 맡길 수는 없고 정말 미칠 노릇이었다. 큰애인 지연이가 다섯 살, 작은애 지희는 이제 겨우 말 몇 마디밖에 할 줄 모르는 세 살바기였다.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 것들이 안쓰러워서 먹이고 씻기고 밤이면 양팔에 꼭 끼고 잠을 잤다. 어쩔 수 없는 사정으로 인해 시작된 아이들과의 생활이었지만 할머니는 아이들에게 금세 정이 들었다. 그리고 아이들은 역시 아이들이어서 누구를 만나도 예쁜 짓을 하고 재롱을 떨었다. 함께 사는 두 아들은 항상 든든하지만 사내녀석들이다 보니 지희, 지연이를 데리고 있는 즐거움은 남달랐다. 당신 주머니에서 돈 나가는 것이 하나도 아깝지 않을 만큼 아이들이 예쁘고 살가웠다. 내 자식 기를 때도 이렇게 못해 줬는데 하는 생각이 들어서 자식들 보기에 미안할 정도로. 할머니께서 파출소의 주방일을 시작하신 것은 아이들을 맡은 지 1년 정도가 지나서였다. 아직 일을 할 수 있을 만큼 건강했고 월급을 받게 되면 지희, 지연이에게 이것저것 사술 수도 있겠구나 싶었다. 처음에는 소장님이 어려웠고 다른 직원들도 낯설 때라 애들이 일하는 데 오지 못하게 단단히 이르고 출근을 했다. 하지만 하루 종일 할머니와 붙어 살다가 자기들끼리 남겨진 아이들은 심심하다고 보통 떼를 쓰는 게 아니었다. 애들이 심심해 하는 것도 마음에 걸리고, 일일이 들어와서 새로 밥을 해먹이는 것도 번거롭고 해서 파출소로 데리고 다니기 시작했다. 아이들은 소장님을 대장 아저씨라고 부르면서 잘 따랐고 뚱뚱하다고 호빵 아저씨, 빼빼하다고 멸치 아저씨 하는 식으로 파출소 식구들에게 별명을 붙여 주기도 했다. 탐탁치 않게 여겼던 파츨소 직원들도 모두 너나없이 아이들을 귀여워했고 지희와 지연이도 제 또래 아이들이 함부로 들어와 보지도 못하는 파출소에서 지낸다는 것을 은근히 자랑스러워해 했다. 지연이가 초등학교에 입학하는 날, 할머니는 그날을 잊을 수가 없다. 다들 다들 제 부모의 손을 잡고 서 있는 다른 아이들을 보니까 취학통지서를 받아 들고 한동안 망설였던 자신이 죄스러워서 지연이를 볼 면목이 없었다. 그날은 결국 집 안이 울음바다가 되었다. 속상한 마음이 가시지 않아 집에 들어서기가 무섭게 울었더니 지연이도 따라 울고 영문 모르게 보고 있던 지희마저 울고... 아이들은 가끔씩 제 엄마 소식을 물어 할머니를 가슴 아프게 했지만 특별하게 말썽부리는 일 없이 잘 자라 주었다. 가만히 눈여겨보면 큰애는 속이 깊고 착실했고 둘째 아이는 사근사근한 데가 있고 아주 명랑했다. 지연이는 학교에 들어가서 친구들도 많이 사귀고 성당에도 열심히 다녔다. 파출소 직원들은 조금씩 돈을 거두어 생활비를 보태 주기도했고, 아이들의 사정을 아는 담임 선생님이나 수녀님들, 심,지어 동네 속셈 학원 선생님까지 많은 분들이 자매를 보살펴 주었다. 할머니의 친구들 사이에서도 둘은 인기를 독차지했다. 명절이면 만두를 넘치게 만들어서 집집마다 나눠 준다고 지희, 지연이가 만두 할머니라고 부른 재동 친구도 늘 얘기하곤 했다. 비록 부모품에서 자라지는 못했지만 이렇게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고 컸으니 이 애들은 곧고 바르게 자랄 거라고. 1994년 8월, 지연이가 3학년이 되었고, 처음 왔을 때는 대소변도 제대로 못 가리던 지희도 초등학생이 된 해였다. 입학하고 처음 맞는 여름 방학이었는데 난데없이 아이들의 아버지로부터 전화가 걸려 왔다. 얼마 전에 귀국을 했으며 아이들을 데려가겠노라는 내용이었다. 참으로 짧고 냉정한 통보였다. 애들 부모뿐 아니라 그 누구로부터도 치하받자고 어린 것들을 거두었던 것은 결코 아니었지만 잠깐 동안 서운하고 쓸쓸했다. 하지만 전화를 끊고 나서 이제 이것들과 헤어지는구나 싶으니 왈칵 눈물부터 쏟아졌다. 이틀 뒤 아이들은 며칠 있다 따라가겠다는 할머니의 거짓말을 믿고 아버지와 함께 떠났다. 5년 동안 아무 연락도, 왕래도 없었고 지연이는 아빠 얼굴도 제대로 기억하지 못할 나이였는데 피라는 게 저렇게 끌리는 것인가 싶을 정도로 아이들은 순순히 제 아버지를 따라갔다. 늘 적적하던 집에 해바라기 씨같이 화사한 생기를 뿌려 주었던 지희와 지연이. 그애들이 없는 집 안이 너무 갑갑해서 가슴을 탁탁 치면서 늦도록 집 밖을 서성이는 날들이 많아졌다. 친구들이 찾아와서 그것 보라고, 남의 자식 키워 봐야 아무 소용없다고 위로를 해주었다. 하지만 매번 친손녀들처럼 예뻐했던 아이들이 보고 싶다고 하면서 같이 울었다. 아빠를 따라가고 나서 아이들은 하루가 멀다하고 전화를 걸어 울먹였다. 그럴 때마다 할머니는 말할 수 없이 속이 타지만 애들 장래를 생각하면 늙은 나보다야 제 아비가, 또 함께 살게 된 새 가족들이 아무래도 낫지 싶어 아이들을 살살 달래곤 했다. 그날도 마침 방학이라 며칠 놀다 가면 좋으련만 겨우 하루만이라는 허락을 받고 온다고 했다. 드디어 두 아이들이 숨넘어갈 듯이 뛰어들어와 할머니에게 안겼다. "어쩌면 이렇게 예쁘게 생겼을까, 세상에 예쁜 내 새끼들..." (자유 기고가)
Board 삶 속 글 2022.06.13 風文 R 927
문전성시(門前成市) // 권세가나 부자가 되어 집 앞이 방문객으로 저자를 이루다시피 함. 《出典》'漢書' 孫寶傳 鄭崇傳 전한(前漢) 말, 11대 황제인 애제(哀帝 : B.C 6-7) 때의 일이다. 애제가 즉위하자 조저의 실권은 대사마(大司馬) 왕망(王莽)을 포함한 왕씨 일족으로부터 역시 외척인 부씨(傅氏), 정씨(丁氏) 두 가문으로 넘어갔다. 그리고 당시 20세인 애제는 동현(董賢)이라는 미동(美童)과 동성연애에 빠져 국정을 돌보지 않았다. 그래서 중신들이 간(諫)했으나, 마이동풍(馬耳東風)이었다. 그 중 상서복야 (尙書僕射) 정숭(鄭崇)은 거듭 간하다가 애제에게 미움만 사고 말았다. 그 무렵, 조창(趙昌)이라는 상서령(尙書令)이 있었는데 그는 전형적인 아첨배로 왕실과 인척간인 정숭을 시기하여 모함할 기회만 노리고 있었다. 어느날 조창은 애제에게 이렇게 고했다. "폐하, 아뢰옵기 황공하오나 정숭(鄭崇)의 집 문 앞이 저자를 이루고 있습니다.[門前成市] 이는 심상치 않은 일이오니 엄중히 문초하시옵소서." 애제는 그 즉시 정숭을 불러 물었다. "듣자니, 그대의 '문전은 저자와 같다[君門如市]'고 하던데 그게 사실이오?" "예, 폐하. '신의 문전은 저자와 같사오나[臣門如市]' 신의 마음은 물같이 깨끗하옵니다. 황공하오나 한 번 더 조사해 주시옵소서." 그러나 애제는 정숭(鄭崇)의 소청을 묵살한 채 옥에 가뒀다. 그러자 사예(司隸)인 손보(孫寶)가 상소하여 조창의 참언(讒言)을 공박하고 서인(庶人)으로 내쳤다. 그리고 정숭(鄭崇)은 그 후 옥에서 죽고 말았다. 尙書令趙昌?諂 素害崇 知其見疏 因奏崇 與宗族通 疑有姦 請治 上責崇曰 君門如市人 何 以欲禁切主上 崇對曰 臣門如市 而臣心如水 願得考覆 上怒下崇獄窮治 死獄中. 【유사어】문전여시(門前如市), 문정여시(門庭如市) 【반의어】문전작라(門前雀羅), 문외가설작라(門外可設雀羅)
Board 고사성어 2022.06.13 風文 R 854
개념의 차이 약 30년 전, 1990년에 있었던 일이다. 남북고위급회담이 열렸었다. 늘 그랬듯이 정치적으로는 이런저런 입씨름이 있었다. 분위기는 요즘 못지않게 부드러워져서 북측 기자들이 ‘비교적’ 자유로이 여기저기 취재도 하고 다녔었다. 그러나 미처 서울 사정에 익숙지 않아 답답해했었던 것 같다. 서울의 길거리를 지나던 어느 초등학교 학생한테 북측 기자가 다가가 말을 걸었다. “월사금을 얼마나 내느냐”는 질문이었다. 문제는 그 초등학생이 월사금이라는 단어를 몰랐던 것 같다. 얼떨떨해서 대답을 못 하니까 “수업료, 학비 말이야” 하고 힌트를 주었건만 그 학생은 “그냥 학교에 가기만 하면 되는데요”라는 대답밖에 하지 못했다. 매우 예리한 질문에 매우 정확한 답변을 했는데도 문답이 성립하지 않은 것이다. 꽤 일찍 공교육의 무상화를 이룩했던 북측은 취재 과정에서 북측의 체제 우월성을 드러낼 수 있는 중요한 테마로 ‘무상 교육’을 노렸던 것 같다. 그러나 사용한 어휘가 지나치게 구식 개념인 ‘월사금’이어서 남측 어린이와의 소통에는 실패하고 말았다. 사실 50년대만 하더라도 월사금 때문에 학교에 못 가는 아이들, 집으로 쫓겨온 아이들, 부모가 불려간 아이들 등의 일화가 꽤 많았다. 수업료니 학비니 하는 것은 초등학교 학생들이 익숙한 개념이 아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남쪽 사회는 ‘교육 비용’의 문제가 녹록하지 않다. 차라리 ‘사교육비’가 얼마나 드냐고 물었다면 기대했던 대답을 들을 수 있었을 것이다. 남과 북의 사회 체제와 제도의 차이까지 염두에 두고 이러한 ‘개념의 소통’까지 나누려면 아마도 많은 시간이 더 필요할 것이다. 일상어의 차이는 별로 심하지 않지만 사회적, 제도적 개념의 격차는 사실 엄청나게 심각하다. 하나하나 꾸준히 풀어가야 할 문제들이다. 한겨레말글연구소 연구위원·전 연세대 교수 ……………………………………………………………………………………………………………… 문화어 한국어의 한글맞춤법은 1933년에, 그리고 표준어는 1936년에 정해졌다. 그 후 약간의 변화를 겪으며 정착되어오다가, 분단 이후 북쪽에서는 서울말 중심의 표준어가 심하게 오염됐다고 비판하면서 1966년에 평양말을 기준으로 하는 이른바 ‘문화어’를 제정했다. 이렇게 해서 한국어의 서울말 중심의 변이는 표준어, 평양말 중심의 변이는 문화어라는 이름으로 정착되었다. 평양말을 기준으로 한다고 하는 바람에 오해도 생겨났다. 전통적인 평안도 방언처럼 ‘정거장’을 [덩거당]이라고 하는 식의 언어를 문화어라고 잘못 알고 있는 경우가 그것이다. 문화어는 과거 반공영화에 나오던 억센 억양의 ‘평안도 사투리’와는 크게 다르다. 북의 문화어는 20세기 중반 즈음에 중부방언하고 매우 비슷해진 상태의 평양말을 기준으로 한다. 따라서 남쪽의 표준어하고 큰 차이가 없고 어휘 및 억양의 차이가 약간 드러나는 정도이다. 또 정책적으로 어려운 한자어를 많이 줄이고 순화했기 때문에 비록 남쪽의 우리에게는 다소 생소하게 들릴 수도 있지만 의미 파악에는 별문제가 없다. 큰 차이라고 한다면 ‘두음법칙’이라는 것 때문에 남쪽에서 ‘노인, 여성’이라고 하는 말을 ‘로인, 녀성’이라고 하는 정도이다. 그것 역시 알아듣는 데는 큰 문제가 없다. 사실 남쪽에서도 외래어에는 말머리에 ‘로켓, 뉴스’처럼 ‘ㄹ’이나 ‘ㄴ’이 얼마든지 나타난다. 사전을 찾아보면 북의 문화어를 ‘북한어’라는 용어로 설명하고 있다. 자칫 북한에서 사용하는 별개의 언어라는 식으로 해석되기 쉽다. 북한의 문화어는 한국어에서 벗어난 딴 언어가 아니라 북쪽 변이형을 참조해서 정리한 ‘규범 체계’일 뿐 별개의 언어가 아니다. 정확하게 사용한다면 북쪽에서 사용하는 말은 ‘북한어’라고 부르는 것보다 ‘문화어’라고 부르는 것이 더 옳다. 한겨레말글연구소 연구위원·전 연세대 교수
한승원의 글쓰기 교실 나만의 글쓰기 비법 3. 살아 있는 글 우리들은 각기 얼굴이 다르고, 혈액형도 다르고, 목소리도 다르다. 눈과 귀의 모양새와 코의 생김새와 손바닥에 있는 손금도 다르다. 생각하는 것도 다르고, 입맛도 다르고, 버릇도 다르다. 그것은 성질이 각기 다르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글 또한 다르게 쓰지 않으면 안된다. 그렇다면 어떤 글이 생명이 있는 글이고, 읽는 이에게 감동을 줄 수 있는 글일까? (5) 사실 나는 우리 나라에 대해 늘 부정적인 시각만 가지고 있었다. 세계 지도에서 겨울 찾을 수 있을만큼 작은 영토, 30여 년 간의 식민지였던 역사, 선진국 대열에도 끼지 못하고, 미국의 놀잇감 같은 줏대없는 나라...... 한국이라는 나라에 대한 나의 시각은 이렇게 부정적이었다. 그러던 중에 신선한 충격을 준 글을 어느 신문에서 읽게 되었다. (6) 저는 우리 나라의 제일 큰 문제가 통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우리 외할아버지 때문입니다. 가끔씩 명절 때 찾아뵈면 낮에는 안그러시다가 밤이 되면, "아버지, 어머니"하며 우십니다. 제가 어렸을 때부터 그것을 보아 왔으니, 이젠 참 불쌍하게 보입니다.할아버지 께서는 당신의 아버지, 어머니가 얼마나 보고 싶으시겠어요, 할아버지께서는 6.25전쟁, 그 난리통에 북에서 혼자 남으로 내려 오셔서 이 곳에서 지금의 외할머니와 결혼을 하셨다고 합니다. 위에 보기로 든 (5)와 (6)의 글은, 위의 (3)과 (4)처럼 '우리 나라'라는 제목으로 독자들이 써 보낸 글의 첫 대목들이다. 하지만 앞의 글과는 달리, (5)와 (6)은 그 글을 쓴 사람만이 쓸 수 있는 글이다. 글을 쓴 사람의 숨결이 들어있고, 글 속에 나오는 사람들의 아픔이 배어 있다.. 죽어가는 글이 아니고 살아있는 글이다. 그래서 읽는 이에세 진한 감동돠 여운을 남겨 준다. (5)와 (6)의 글을 쓴 사람은 자신이 왜 그 글을 쓰고 있는지에 대해 깊이 생각한 사람이다. 그런 사람은 어떻게 쓸 것인가 하는 문제도 자연히 생각하게 된다. 우리는 누구든지 지금 자기가 살고있는 삶보다 훨씬 나은 삶을 건설하기 위해 살아가고 있다. 그렇다면 글도 지금보다 나은 삶을 위하여 긍정적으로 쓰지 않으면 안된다. 글을 긍정적으로 쓴다는 것은,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을 낙관적으로 본다는 걸 의미한다. 이처럼 글을 쓸 때는 이 세상을 살가갈 만한 가치가 있는 곳으로 보고, 더욱 살기 좋은 세상이 되도록 발전시켜야 한다는 쪽으로 논리를 전개시켜 나가는 것이 바람직 하다. (7) 곧 21세기 이다. 우리의 할아버지, 아버지 세대들이 이루어 놓은 것을 더욱 발전시켜야 하는 것은 우리 젊은이, 소위 신세대 들이다. 젊은이 들이여, 21세기를 위하여 더욱 노력하자. 이것은 (5)의 글의 결론이다. 이 글을 보면 앞에서 한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쉬이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위에 보기로 든 (5)와 (6)의 글은 독자들이 보내 온 것들 가운데서 개성이 가장 뚜렷한 글들이다. 그렇지만 문장이 아주 잘 쓰여진 글은 아니다. 그 문장 쓰기에 대한 것은 다음 장에서 이야기 하기로 하겠다. 어떤 것이 좋은 문장인지, 그러한 문장을 쓰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인지...... 자, 그러면 끝으로 자신만이 쓸 수 있는 , 즉 그 나름의 독특함을 잘 살려내고 있는 글 한편을 감상해 보고 다음으로 넘어가도록 하자. 우리 동네는 장터 바로 윗동네였다. 논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는 정도였지만, 나는 우리집 앞에 장이 서지 않는 것이 늘 불만이었다. 그래서 나는 장터에 사는 아이들을 가장 부러워했고, 그 아이들과 사귀려고 애를 썼다. 장터는 이웃 마을에 비해 크지는 않았지만 포목전, 잡화전, 고무신 가게, 주막, 석유집, 양조장, 푸줏간이 고루 있었고, 무싯날에도 밤늦도록 전짓불이 휘황했다. 산골이지만 바로 우리 마을 뒷산에 일찍 광산이 개발되어 있어, 이미 오래전에 전기도 들어와 있었던 것이다. 나는 아버지가 밤중에 담배 심부름을 시켜도 싫다 하지 않았다. 담뱃집 옆집이 술집이었는데, 이곳에서는 광부들의 구성진 유행가 소리가 밤늦도록 끊이지 않았다. 때로는 싸움판이 벌어지기도 했는데, 그럴 때면 잠들었던 내 동무애들까지 깨어 일어나 눈을 비비며 구셩하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나는 학교도 논길로 가는 지름길로 다니지 않고, 장터로 빙 돌아가는 논길로 다녔다. 장터의 가겟집이며 술집들은 언제보아도 새롭고 신기했기 때문이다. 또 그 집들은 종종 주인이 바뀌기도 했는데, 새 주인에 대한 여러 소문은 내 호기심을 자극하기에 언제나 충분한 것들이었다. 장날이면 나는 전날 저녁부터 들떳다. 길에 나가 용당재를 넘어서 오는 장 트럭들과 장꾼들의 자전거를 세었는데, 전장(지난번장)에 비해 늘었으면 신이 났지만, 줄었으면 크게 실망릉 했다. 어쩌다 구경 가 본 이웃 장에 비해 우리 고장 장의 규모가 작은 것이 도무지 속이상해 견딜 수가 없었다. 장날에는 다른 날보다 일찍 집을 나섰다. 그러나 장은 언제나 아직 서기 전이었고, 장바닥은 말끔히 쓸렸는데도 장꾼들은 공연히 해장군집에서 늑장을 부리곤 했다. 학교에 가기 전에 장이 서는 것을 보려는 꿈은 허사로 끝나기 일쑤였다. 그러니 교실에 들어가 앉아도 좀이 쑤셔 제대로 공부가 될 리 없었다. 장을 좋아하는 아이들은 나 하나가 아니었던 것 같다. 점심시간만 되면 우리는 떼를 지어 교문 밖으로 쏟아져 나왔다. 바햐흐로 장이 어우러져 있는 참이었다. 싸구려를 외치는 소리가 높고 여기저기서 술 취한 장꾼들의 싸움질도 곧잘 벌어졌다. 우리에게 가장 인기 있는 장수는 책장수였다. 그는 파수거리(장날 임시로 물건을 벌여놓고 파는 거리)로 와서 학교앞 종대 옆에 책전을 벌였는데, 이야기책과유행가책 사이에 몇권씩 아이들 책이 끼여 있고는 했다. 대개 아이들은 사지도 않으면서 뒤적거리기만 했다. 그래도 마음씨 착한 책장수는 탓 한번 하지 않았다. 책을 사는 아이라도 있으면 그 아이는 그 날의 영웅이 되는 편이었는데, 내가 그 영웅이 되는 날이 가장 많았다. 나는 어려서만 장을 좋아했던 것은 아니다. 커서도 장을 좋아했으며, 장날이면 들떠서 아무일도 하지 못했다. 장날은 꽤 오랫동안 내게는 유일한 즐거움이요 위안이었던 셈이다. - 신경림의 (길, 장터, 강) 중에서 생각해 봅시다. 1. "엿장수 이야기'에서 장사 비결을 배우려고 찾아온 청년이 끝끝내 엿을 팔지 못 한 이유는 무엇일까? 이것을 글쓰기에 빗대어 설명해 보자. 2. 생명이 없는 글은 아무리 온갖 수식어를 갖다가 치장해도 읽는 이에게 감동을 안겨 줄 수가 없다. 그렇다면 생명이 없는 글을 쓰지 않기 위해 우리는 어떤 노력을 기울여야 할까?
작은 이야기 2 - 정채봉, 류시화 엮음 3. 함께 사는 삶 선행이 - 진성희 공사장에서 막노동을 해서 마련한 비행기 삯으로 우리 부부는 무작정 유학을 왔다. 빈손으로 시작했던 신혼 생활도 벌써 2년. 누구 하나 아는 이 없는 곳에서 아내는 열여섯 시간의 진통 끝에 첫아기를 낳았고, 아이 키울 걱정은 뒤로한 채 우리는 새 생명의 신비로움에 흠뻑 젖어 있었다. 그런데 병원에서 아기를 데려온 바로 그날 저녁 멀리서부터 사이렌 소리가 올려 오더니 경찰차 한 대가 우리 집 앞에 멈춰 섰다. 깜짝 놀라 문을 여니 키가 큰 흑인 경찰과 아기를 낳을 때 곁에서 도와 주었던 간호사가 급히 뛰어들어왔다. 간호사는 가쁘게 숨을 몰아 쉬며 이렇게 말했다. "방금 아기의 황달 측정 결과가 나왔는데, 수치가 너무 높아 위험하니 호놀루루 시내에 있는 큰 병원으로 가야 합니다." 아무리 아껴 가며 생활해도 모자라는 가난한 형편이었기에, 우리 집엔 전화기 한 대 없었다. 이로 인해 병원에서는 달리 연락처를 구하지 못하고, 주소만 가지고 경찰의 도움으로 간호사와 함께 우리를 찾아 나선 것이었다. 2차건인 해변 도로를 따라 호놀루루 시내까지는 거의 한 시간이 걸리는 거리였다. 차 안에서 조급해 하고 불안해 하는 아내에게 옆자리에 있던 간호사가 위로의 말을 했다. "교통이 막히면 해병대 헬기를 불러 아기를 옮기기로 연락해 두었으니 안심하세요." 그러나 경찰차의 사이렌 소리에 차들이 서둘러 길가로 비켜서 준 덕분에 우리는 훨씬 빨리 병원에 도착할 수 있었다. 병원에 도착하자마자 아기는 치료를 받기 시작했다. 아내를 겨우 달래어 집으로 돌려보내고 불빛 찬란한 시내를 내려다보았다. 그때 나는 이역 만리 낯선 타국에서 가진 것 하나 없는 우리에게 병원비는 어떻게 갚을 것인지 물어 보지도 않은 채, 작은 생명 하나를 위해 정성을 다해 준 수많은 사람들의 인정에 얼마나 울었는지 모른다. 이들의 정성에 보답이라도 하듯 아이의 노랗게 물든 호아달기는 이틀 후에 감쪽같이 사라졌다. 건강한 아기를 안고 집으로 돌아온 우리는 아기의 이름을 '선행'이라 지었다. 우리도 이웃에게 선을 행하자는 의미에서. (미국 하와이 거주) 이 땅의 가족들 - 작자 미상 지난 7월 11일자 동아일보 17면에는 재미있는 독자 사진이 한 장 시려 있었지요. 경남 산청군 신안면 하정리 유병택 씨가 찍은 것인데 새끼 돼지가 주인을 졸졸 따라서 시장길을 가는 모습입니다. 사진 설명은 이렇습니다. 어미 돼지가 출산을 하다 죽어 버리자 새끼 돼지를 우유와 개 젖으로 키웠는데 이 녀석은 저희 안주인이 시장을 갈 때나 외출을 할 때나 귀찮을 정도로 따라다녀 주위 사람들의 화제가 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언젠가 (인간시대)라는 텔레비전 프로그램에는 아내를 잃은 한 농부가공교롭게도 어미 소가 송아지를 낳다가 죽자 송아지한테 우유를 먹이며 사는 이야기가 나온 적이 있지요. 그런데 그 송아지는 이 농부의 죽은 아내가 환생하지 않았나 싶은 생각이 들 정도로 농부를 끔찍이 따릅니다. 노을 지는 둑길에서 농부의 어깨에 두 발을 턱 걸친 채 람께 서녘을 바라보고 있던 송아지와 농부의 화면을 감동 깊게 보신 분들은 기억할 것입니다. 축생들도 사람과 정이 들면 이렇게 따뜻한 교감이 흐르는데 우리 사람들은 너무 잔인하다 싶게 대하는 게 오늘의 현실이 아닌지요? 이제 산과 바다와 강으로 떠나는 휴가 시즌이 시작되었습니다. 날아다니는 새와 뛰어다니는 짐승과 헤엄쳐 다니는 물고기들을 대할 때 그들도 이 땅의 한 가족이라는 점을 생각해 보았으면 합니다. 특히 새끼를 배었거나 어릴 경우에는 더더군다나.
Board 삶 속 글 2022.06.10 風文 R 68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