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이야기 2 - 정채봉, 류시화 엮음 3. 함께 사는 삶 부끄러움 - 강수희 그해 겨울에는 눈이 많이 내렸다. 몇 권의 책과 낡아빠진 카메라 한 대 그리고 여행에 필요한 간단한 차림들을 배낭에 넣고 나는 무턱대고 집을 나섰다. 미래에 대한 막연함과 불안함이 나로 하여금 집을 떠나게 만든 것이다. 강원도 속초까지 버스를 타고 간 나는 거기서부터 동해안을 따라 걸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물론 넉넉하지 못한 돈을 가지고 떠난 여행길었기에 호화판 여행을 활 수도 없는 일이었지만, 설사 돈이 많았다 해도 그때 나는 일부러라도 고생스런 길을 택하고 싶었다. 눈 쌓인 길을 종일 걸으며 매서운 동해의 바람 속에서 나는 무한대의 자유인이었고 또한 한없는 고독자였다. 그것으 곧 나의 앞으로의 생애였다. 날이 저물면 아누 동네나 들어가 간판도 없는 여인숙의 작은 방에서 낯 모르는 여러 사람들 속에 섞여 새우잠을 잤다. 어떤 때는 행상이나 장꾼들과 동숙하기도 했고, 어떤 때는 고향을 찾아가는 한 무리의 광부들 틈에 끼여서 자야 했다. 어쩌다 만난 그들, 그러나 다시는 만날 수 없을 그들이었지만 하룻밤을 같이 보낸 인연으로 하여 나는 참으로 많은 얘기와 새로운 인생들을 배웠다. 어디든 사람이 있다는 것, 비록 남루한 옷을 입고 공부는 하지 않았더라도 저 나름의 세게를 이룩하고 웃으며 살아가고 있다는 것, 그것은 굉장한 발견이었다. 그러나 나는 아직도 허영에 차고 불안한 한 속물에 지나지 않았다. 왜냐하면 나는 매일 밤 그들의 진지한 얘기들을 다만 하찮은 마음으로 듣고 있었고, 유치하다고 건방진 우월감을 품고 있었으며, 그들을 믿지 못하고 있었다. 나는 밤이면 몇 번씩이나 잠을 깨서 혹시난 내 낡아빠진 카메라를 도둑맞지나 않았는가, 다른 무엇을 잃어버리지나 않을까 불안해 했던 것이다. 돌이켜보면 그것은 정말 얼마나 부끄러운 일이었던가. 삼척을 하룻길 앞두고 어느 이름 모를 촌락에서 밤을 묵을 때 나는 한 노인과 같이 자게 되었다. 얘기는 그 노인이 주로 했고 나는 언제나처럼 듣는 입장이었다. 자잘한 일상사에서부터 시작된 얘기는 이윽고 그 노인이 살아온 과거에까지 이르렀다. 퍽이나 파란만장한 생애였다. 우리 나라의 팔도강산 안 가본 곳이 없고 일본, 만주에까지 가서 살았다는 그 노인의 얘기는 한 편의 대하 드라마였다. 육체로 할 수 있는 일이라면 안해 본 일이 없다는, 얼마쯤은 자랑스러운 표정으로 그러나 훨씬 더 많은 피로함과 함께 노인은 결론처럼 말하는 것이었다. "좋은 시절도 많았었지. 하지만 다 지나간 얘기요. 지금 늙어서 이렇게 행상을 하면서 여행하는 게 고작 내 팔자인 모양이여." 그날 밤 나는 꿈 많은 잠을 잤다. 그리고 예의 불안감으로 몇 번이고 잠이 깨곤 했다. 다음날 아침 일찍 나는 삼척을 향해 떠나려 했다. 막 문을 나서는데 노인이 뒤에서 불렀다. "이 시계, 학생 거 아닌가? 우물가에 있던데." 아차, 그렇다. 아침에 세수를 하며 풀어 놓았던 것이다. "고맙습니다." 시계를 받아 그냥 주머니에 쑤셔 넣으면서 나는 몹시 부끄러웠다. 이런 사람들을 의심하면서 밤새 불안해 했던 나. 나는 얼마나 옹졸하고 지난 16년 동안의 교육은 얼마나 편견에 차 있었던가. 그렇다. 인간의 곁에는 언제나 인간이 있는 것이다. (아주 임업 인도네시아 주재원) 양말에 비친 얼굴 - 김 이사벨라 지난 해 12월, 눈길에 넘어져 오른쪽 손목뼈가 부러지는 바람에 거의 40일 동안을 깁스를하고 있어야만 했다. 마침내 깁스를 풀고 오니, "야아!" 하고 환호성을지르며 꼬마들이 몰려들었다. 내손이 아플까 봐 차마 매달리지는 못하고 가만히 와서 만져 보기도 하고 쓰다듬기도 하는 것이었다. "이제부터 머리도 우리가 빗고 손톱도 우리가 깎을게요." "왜, 내가 머리 빗겨 주는 게 싫으니?" "아뇨, 엄마가 일 많이 하면 또 다치잖아요." 아이들은 수녀님라는 호칭 대신 우리를 엄마라고 부른다. "난 엄마의 차가운 손은 싫어요. 따스한 손이 좋아요." 나의 깁스한 차가운 손이 싫다는 미아의 솔직한 말이다. 그렇다. 그들은 한없이 그리워하고 있다. 가까이에서 그들을 어루만져 주는 따스한 손길을. 벌써 8년 전의 일이다. 그 당시 난 판자 마을 무료 진료소에서의 일이 끝난 후 시간만나면 부랑아들이 수용되어 있는 곳에 가서 그들의 갖가지 상처를 치료해 주곤 했었다. 그들 중엔 손에 큰 상처를 입은 훈이라는 아이가 있었다. 매일 깨끗이 치료한 후 새 붕대로 매어 주었는데 이상하게도 이튿날 가보면 붕대는 온데간데없고 대산 다 떨어진 양말로 상처를 동여매고 있었다. 그러니 상처는 불결해서 더욱 심해만 가는 것이었다. "또 풀었구나. 그러면 상처가 낫지 않아요." 하지만 훈이는 아무 말없이 두 눈만 깜박이고 있었다. 그 눈 속엔 가슴을 찡하게 하는 어떤 슬픔과 갈망 같은 것이 가득 깃들여 있어 난 더 이상 야단을 칠 수가 없었다. 그저 정성껏 훈이의 손을 다시 싸매어 준 후, 손을꼭 쥐어 줄 따름이었다. 그후 바쁜 일 때문에 닷새 만에 그곳에 갔더니 훈이가 울면서 말했다. "수녀님, 제가 말 안 들어서 다신 안 오시는 줄 알았어요. 이젠 안 풀어요. 절대로요." "그래, 그래야지." "밤만 되면 손이 더 아파요. 그러면 엄마가 자꾸 생각나요. 이 양말은 엄마가 짜주신 거예요. 엄마는 돌아가셨거든요. 이 양말을 보면 엄마의 얼굴이 보이는 것만 같았어요." 훈이의 까만 눈에 눈물이 반짝 빛났다. 그제야 난 알 수 있었다. 왜 그 애가 그 양말로 상처를 싸맸는지를. (수녀)
Board 삶 속 글 2022.05.30 風文 R 667
맥수지탄(麥秀之歎) / 고국의 멸망을 한탄함. 出典 : '史記' / '詩經' 중국 고대 3왕조의 하나인 은(殷)나라의 주왕(紂王)이 음락(淫樂)에 빠져 폭정을 일삼자 이를 지성으로 간(諫)한 신하 중 삼인(三人)으로 불리던 세 왕족이 있었다. 미자(微子), 기자(箕子), 비간(比干)이 그들이다. 미자는 주왕의 형으로서 누차 간(諫)했으나 듣지 않자 국외로 망명했다. 기자(箕子)도 망명했다. 그는 신분을 감추기 위해 거짓 미치광이가 되고 또 노예로까지 전락하기도 했다. 그러나 왕자 비간은 끝까지 간하다가 결국 가슴을 찢기는 극형을 당하고 말았다. 이윽고 주왕은 삼공(三公)의 한 사람이었던 서백(西伯)의 아들 발(發)에게 주살 (誅殺) 당하고 천하는 주왕조(周王朝)로 바뀌었다. 주나라의 시조가 된 무왕(武王) 발(發)은 은왕조(殷王朝)의 봉제사(奉祭祀)를 위해 미자를 송왕(宋王)으로 봉(封)했다. 그리고 기자도 무왕을 보좌하다가 조선왕(朝鮮王)으로 책봉되었다. 이에 앞서 기자가 망명지에서 무왕의 부름을 받고 주나라의 도읍으로 가던 도중 은나라의 옛 도읍지를 지나게 되었다. 번화하던 옛 모습은 간데없고 궁궐터엔 보리와 기장만이 무성했다. 금석지감(今昔之感)을 금치 못한 기자는 다음과 같은 시 한 수를 읊었다. 보리 이삭은 무럭무럭 자라나고 벼와 기장도 윤기가 흐르는구나. 교활한 저 철부지[紂王]가 내 말을 듣지 않았음이 슬프구나. 麥秀漸漸兮 禾黍油油兮 彼狡童兮 不與我好兮 【동의어】맥수서유(麥秀黍油), 맥수지시(麥秀之詩)
Board 고사성어 2022.05.30 風文 R 870
북혐 프레임 바야흐로 혐오사회라고들 한다. 자신의 어려움이 타인, 특히 특정 집단 탓이라고 믿고 지나치게 미워하는 사회적 병리현상을 가리킨다. 최근에는 여혐, 남혐 등 이성에 대한 지나친 혐오 발언도 넘쳐났다. 이 집단적인 혐오 감정은 특히 정치적으로 오용될 때 더욱 위험하다. 독일의 나치 정권이 대표적이다. 우리도 최근까지 지역감정에 바탕을 둔 혐오 발언이 정치적으로 악용되어 진절머리 치던 기억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혐오 발언이 얼마나 많은 국민을 절망에 빠뜨리곤 했는가. 그 외에도 우리에게는 또 다른 건강하지 못한 집단 혐오가 있다. 바로 북한에 대한 거부감이다. 대개는 남북 정세에 대한 분석이나 경험에 기초한 비판이 아니라 정치적으로 선동된 감정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얼마 전만 해도 혹시 전쟁이 나지는 않을까 하고 은근히 걱정하던 사람들이 꽤 있었다. 그러한 긴장 상태를 겨울올림픽을 지렛대 삼아 평화 분위기로 반전시킨 지 며칠 되지도 않았는데 벌써 여러 절차와 부차적인 진행 방식을 문제 삼아 사그라지던 북쪽에 대한 혐오를 정치적으로 살금살금 불붙이려는 움직임이 활발하다. ‘북혐 발언’이라 할 만하다. 차라리 북핵 문제가 더 악화되기를 바라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도 든다. 스포츠의 정치적 이용은 옳지 않다. 그러나 올림픽이 지향하는 정치적 메시지도 분명히 알아야 한다. 그것은 메달을 많이 따거나 꼭 이겨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올림픽이 지향하는 ‘평화’와 ‘화합’에 동참하는 일이다. 남과 북의 협력은 바로 이 가치를 이루는 지름길이 아닌가. 그것을 위해 출전 시간을 조금 줄일 수도 있고 깃발을 중립화시킬 수도 있어야 한다. 그리고 끝난 후에 승패를 떠나 열심히 경기를 치른 선수들에게 감사와 격려를 보내는 것, 그것이 가장 윤리적이고 건강한 올림픽이다. 김하수 / 한겨레말글연구소 연구위원·전 연세대 교수 ……………………………………………………………………………………………………………… 인사시키기 어느 사회관계망서비스에 올라왔다는 한 사진이 가슴을 찌른다. 종착역으로 들어오는 기차를 향해 고개 숙여 인사를 하는 청소노동자들의 모습이다. 한때 백화점 문 앞에서 잘 차려입은 직원들이 도열해서 정중하게 고개 숙이던 광경이 떠오른다. 이게 인사인가, 아니면 굴욕인가? 인사를 할 때는 고개를 숙이거나 목례를 하면서 ‘인사말’을 주고받는다. 가장 기본적인 소통 행위이다. 인사를 엄숙하고 정중하게 해도 이러한 상호 행위가 있으면 굴욕을 느끼지는 않는다. 문제는 비대칭적인 상하 관계를 드러내는 인사이다. 절하기와 같은 전근대적인 인사는 자칫하면 사람을 비루하게 만든다. 보통 혼인식이나 설날에, 또 제사나 성묘 때 전래 행사로 행하는 ‘상징적인 행위’일 뿐이다. 이것을 실제 일상에서 남에게 강요한다면 ‘망발’이다. 공항에서 항공사 직원들이 인사를 하면 고객도 마주 인사를 할 수 있다. 서로 나누는 인사말이 있다는 뜻이다. 그러나 직원 가운데 가장 약자들에게, 업무 연관성도 없는 사람들에게, 그것도 비정규직 노동자에게 인사를 강요했다는 것은 약자에 대한 강자의 횡포에 지나지 않는다. 이것을 이른바 ‘인사’라고 생각했다면 딸처럼 귀엽게 생각해서 성추행했다는 변명과 무슨 차이가 있는가? 서비스업에서는 안 하던 이벤트를 벌여야 할 경우도 있을 것이고 종종 과장된 연출을 하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기본적인 사회적 가치 지향을 담고 있어야 한다. 어느 댓글에 달려 있다시피 진정으로 고객들한테 감사하고 싶었다면 그 회사의 임직원들이 서로 교대해 가면서 인사를 하는 것이 훨씬 적절했을 것이다. 이제는 약자들만 달달 볶으며 하는 혁신이나 발전을 더 이상 용납해서는 안 된다. 자신들이 해야 할 인사를 약자에게 대행시키는 일은 인사라는 말뜻을 왜곡하는 일이다. 김하수 / 한겨레말글연구소 연구위원·전 연세대 교수
왜 벌써 절망합니까 - 정문술 벤처대부는 나의 소망 미래산업의 장기적 목표는 당연히 반도체 제조 장비의 완전 국산화이다. 사실 한국이 최대의 반도체 수출국가라고들 하지만 내용을 살펴보면 그리 대단한 건 아니다. 반도체에 들어가는 부품이나 소재, 반도체 제작에 필요한 온갖 제조장비들은 대부분 외국에서 수입하기 때문이다. 정작 비싼 것은 그쪽이다. 그러니 총매출액의 어마어마한 규모에 비해 실질적인 부가가치는 그리 크지 못하다. 진정한 반도체 대국이 되기 위해서는 제조장비 국산화가 가장 시급하다. 반도체 제조과정은 크게 전공정과 후공정으로 나뉜다. 미래산업의 주력인 '핸들러'는 검사장비 이니 당연히 후공정에 필요한 장비다. 미래산업은 이제 전공정 분야로 뛰어들 채비를 하고 있다. 핸들러보다 훨씬 더 전문적인 기술이 필요해진다. 직원의 삼분의 일이 연구직이지만 아직도 미래산업의 연구인력은 터무니없이 부족하다. 전공정 분야로 뛰어들기 위해서 외국의 다른 업체와 기술제휴를 고려하는 중이다. 미래산업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천안공단 부지에 현재 새 공장을 짓고 있다. 반도체 전공정 분야를 담당할 미래산업의 자매회사 'Prosys 주식회사'는 이제 출발을 눈앞에 두고 있다. 나는 뒤늦게 반도체 분야에 뛰어들어 이제야 대충 자리를 잡은 셈이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참으로 고맙고 부끄러운 일이다. 이제는 반대로 반도체 산업을 위해 내가 해줄 수 있는 일을 찾고 있는 중이다. 한국의 반도체 제조장비기술을 한 단계 더 높여놓고, 쓸만한 기술인재를 몇 명이라도 키워놓는 것이 내가 할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애써 키워놓은 녀석이 미래산업을 떠나 다른 어디로 도망가든 그것은 상관이 없다. 한국의 반도체를 위해 일하고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뿐만 아니라 어디에서 일하고 있건 간에 '내가 키운 놈'이라는 자부심과 성취감만은 언제라도 내 몫이다. 내가 생각하는 또 하나의 답례는 벤처육성이다. 나는 참으로 가당찮은 꿈을 한 가지 가지고 있다. 한국 벤처 계의 대부가 되는 것이다. 나는 가능성 있는 벤처기업을 힘닿는 대로 키워볼 생각이다. 미국의 실리콘밸리를 모델로 하는 벤처정책이나 벤처창업은 백전백패다. 미국의 실리콘밸리는, 인력에서부터 각종 정보통신 인프라, 세제, 벤처캐피탈에 이르기까지 벤처기업은 필요로 하는 거의 모든 자원을 원스톱으로 해결할 수 있도록 준비되어 있다. 그러나 한국은 실리콘밸리와 근본적으로 다른 토양을 가지고 있다. 한마디로 척박하기 그지없다. 그렇다며 풍부한 물적, 인적 자원을 가지고 있는 기성 기업들이 벤처육성의 중책을 떠맡아야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기성 업체 안에서 독창적인 아이디어나 기술을 가진 사람을 발굴해서 경영훈련을 기키고, 벤처창업에 필요한 각종 자원을 지원하고 궁극적으로는 이들을 분리, 독립시켜 주는 방법이 가장 한국적인 벤처육성책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작년부터 이러한 작업을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미래산업의 전체사업을 이른바 5개의 독립적 벤처그룹으로 분할하는 다소 실험적인 조직편성이다. 기존의 '핸들러 사업 그룹'을 비롯해서, 차세대 디스플레이 장치를 개발하는 'LCD장비 그룹', 네트워크 보안분야인 '소프트포럼 그룹', 반도체 제조장비 소모품을 담당하는 '매거진 그룹', 반도체 장비의 테스터 분야를 집중적으로 전담하는 '테스텍' 등이다. 각 그룹은 중앙의 결재나 지침 없이 독립적인 연구개발 및 마케팅 활동을 벌이면서 벤처 속의 또 다른 벤처기업을 지향하고 있다. 대기업에서 유행하고 있다는 '사내 벤처' 제도와는 다르다. 향후 얼마 동안은 중앙의 보호와 지원을 받게 되지만, 최소한의 자기 재생산 구조를 갖추게되면 곧바로 독립적인 사업체로 분리해 나간다. 대기업의 '계열사' 개념과도 다르다. 소위 말하는 '문어발식' 계열확장이 아니라 완전한 분리, 독립을 의미한다. 예전에는 거대한 것만이 의미가 있었다. 통합하고 확장하는 것은 곧 발전을 의미했다. 그러나 지금은 다르다. 미국엣 1987년 과 1992년 사이에 중소기업들이 창출한 일자리의수는 580만 개에 육박했다. 그러나 같은 기간 동안 직원 500명 이상의 대기업에서는 230만 개의 일자리를 없애버렸다고 한다. 이것은 중소기업의 현실적응력과 대기업의 동맥경화를 잘 보여주는 의미심장한 수치다. 로저 마틴이란 사람이 '하버드 비즈니스 리뷰'에 이런 글을 쓴 적이 있다. "위기에 처한 대기업들을 보면서 가장 분통 터지는 일은, 한때 자신들을 성장시켰던 일들을 지금까지도 계속 수행하고 있기 때문에 지금과 같은 상태에 이르렀다는 점이다. 그들은 자신들의 불행을 정직하게 고스란히 안고 다녔던 것이다." 특히 과거 우리의 기업들은 몸 풀리기에만 급급했다. 그것이 유일한 살길이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바로 기업 거대화 때문에 해당 기업은 몰론 국가경제까지도 침몰직전이 되어버렸다. 갑자기 구조조정을 하고 합리화를 하려고 해도 뜻대로 되지 않는다. 로저 마틴이 말한 것처럼 이 '기업 거대화'는 이제는 지양하려 해도 쉽사리 수습될 수 없는 고질적인 타성이 되어 버렸다. 그런 고질적인 타성이 되어 버렸다. 그런 고질적인 타성이 생길 여지를 처음부터 없애자는 것이 내 발상이다. 미래산업의 소액주주들은 물론 이러한 사업방식에 대해 부만을 가지고 있다. 지배주주이자 기업의 대표이사로서 그들에게 미안한 마음이 없을 수는 없다. 그러나 경직되고 비대하기만 한 '대기업'이 되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다. 콧대만 높은 권위주의를 키우기는 싫다. 끊임없는 세포분열을 통해 항상 변화, 발전하고 살아 움직이는 '젊은 기업'이 되고 싶은 것이다. 기업의 비만이나 동맥경화를 원천봉쇄할 뿐 아니라, 그렇게 함으로써 한국 벤처업계에 새 활력을 불어넣고 싶은 것이다. 결국은 우리의 소액주주들도 우리의 이러한 노력이 가지는 의미를 이해하고 공감해줄 것이라 나는 믿는다. 미래산업에도 60여 개의 협력업체들이 있다. 하도 내가 싫어하다 보니 이제는 신년이 되어도 선물은커녕 연하장조차 한 장 날아오지 않는다. 인사치레도 중독이 된다. 인사치레를 자꾸 겪다 보면 내게 상처를 주었던 사람들과 나도 비슷해질 것이라는 위기 의식이 있다. 방법은 있다. 권위의식이 싹틀 만한 여지를 주지 않고 지레 이런 식으로 원천봉쇄 하는 것이다. 나의 이런 구상을 듣더니 어느 기자는 내게 이런 말을 하기도 한다. "그럼 미래산업은 뭐가 남습니까?" "핸들러야 모기업이니까 그건 계속 남겨둬야죠." "아니 그게 아니구요. 미래산업 쪽에는 무슨 이득이 되는 겁니까?" "그야 자부심이죠." 그 기자는 아무래도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돌아갔다. 나는 마흔셋이 되어서야 경영에 입문했다. 세상은 내게 비협조적이었고, 심지어는 등을 치고 목을 졸랐다. 상처투성이가 되어서야 나는 비로소 '세상이 무섭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재창업을 준비하는 동안 나는 세상에 대한 복수를 기획했다. '이 땅에서 장사를 하려면 사기꾼이 도어야 한다', '어차피 시장은 약육강식의 원리가 지배한다', '배신과 공격만이 살길이다'등등 이 사회에 횡행하는 온갖 종류의 악한 깨달음들을 쳐부수는 것이 내가 생각한 내 식의 복수였다. 기술개발에 목숨을 걸어보겠다는 일념으로 미래산업을 시작했고, 내가 받아왔던 상처들도 이제는 어지간히 치료가 된 셈이다. 하지만 나의 복수는 아직도 진행중이다. 오로지 '돈' 때문에 서로가 서로에게 상처를 주고 배신하는 세상은 여전하다. 난 기업과 기업가가 그놈의 '돈'을 극복하는 모습을 반드시 보여주고 싶다. 이것이 내가 생각하는 복수의 진정한 끝이다. 나는 참으로 가당찮은 꿈은 한 가지 가지고 있다. 한국 벤처계의 대부가 되는 것이다. 나는 가능성 있는 벤처기업을 힘닿는 대로 키워볼 생각이다. 애써 키워놓은 녀석이 미래산업을 떠나 다른 어디로 도망가든 그것은 상관이 없다. 한국의 반도체를 위해 일하고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미국에서 1987년과 1992년 사이에 중소기업들이 창출한 일자리의 수는 580만 개에 육박했다. 그러나 같은 기간 동안 직원 500명 이상의 대기업에서는 230만 개의 일자리를 없애버렸다고 한다. '이 땅에서 장사를 하려면 사기꾼이 되어야 한다', '어차피 시장은 약육강식의 원리가 지배한다', '배신과 공격만이 살길이다'등등 이 사회에 횡행하는 온갖 종류의 악한 깨달음 들을 쳐부수는 것이 내가 생각한 내 식의 복수였다.
Board 말글 2022.05.26 風文 R 227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