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이야기 2 - 정채봉, 류시화 엮음 3. 함께 사는 삶 바닷가에서 만난 소년 - 임오택 지난 여름 거제도 해안 초소에서 근무하던 때의 작은 충격을 잊을 수 없다. 아니 잊을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짜증이 나고 마음이 나태해지기라도 하면 그때의 그 소년이 나를 바라보는 것 같아 마음을 바로잡곤 한다. 중대 본부에 가서 보급품을 수령해 초소로 돌아오던 중. 바닷가 낚시터에서 같이 낚시를 하던 아들 녀석이 안 보인다며 아들을 찾는 어떤 아저씨를 만났다. 그 아저씨와 다른 방향으로 헤어져 찾아보기로 하고 얼마쯤 찾고 있을 때, 텐트를 쳐놓고 사람들이 놀고 있는 모래사장에 쪼그리고 앉아 무언가를 줍고 있는 소년을 찾을 수 있었다. 나는 대뜸 화가 나서 야단부터 쳤다. "아버지가 걱정하시는데 이런 데서 뭘 하고 있는 거니?" 소년은 유난히 동그랗고 하얀 얼굴을 들고 환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놀러 온 아이들이 깨진 병조각에 발을 다치면 어떡해요? 그래서 유리조각을 줍고 있었어요." 그 대답에 기특한 아이라는 생각을 하며 내가 말했다. "저쪽에서 아버지가 찾으시니 이젠 가봐라. 걱정하시니까." 나는 소년의 걸어가는 뒷모습을 보고 깜짝 놀랐다. 소년은 한쪽다리를 심하게 절며 아버지 쪽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그 소년은 소아마비 환자였던 것이다. (서울 마포경찰서) 삶은 고구마 - 김도덕 "선생님, 승기네 집에 가봐도 헛일이에요. 아무도 없어요." "왜?" "아직 모르세요? 승기 엄마는 미쳐서 날마다 산으로 가고요, 승기는 부끄러워서 도망갔을게 뻔하거든요." "그렇구나. 그래도 혹시 승기가 나를 기다리고 있을지 모르니까 우리 함께 가보도록 하자." 가정방문 시간이었다. 학년 초에 교육상 필요하다고 인정된 학생만을 골라 보호자를 만나서 교육 문제를 의논하라는 교장 선생님의 지시가 아니어도, 나는 한 번쯤은 꼭 승기 집을 찾아보리라 마음먹고 있었다. 꽃샘 추위가 기성을 부리던 3월 초, 처음 학급 담임을 맡았을 때, 또렷한 눈망울과는 달리 유난히 남루한 옷차림에 새까만 맨발의 승기가 좀처럼 머리 속에서 사라지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올망졸망 따라붙는 학생들을 떼어 놓고 반장과 둘이서 사립문도 없는 산비탈의 덩그런 오두막집에 도착하니 생솔 타는 냄새가 코르 찔렀다. 반장의 얘기대로 승기 엄마는 없었는데 다행히도 부엌의 자욱한 연기 속에서 승기 혼자 불을 지피고 있었다. 화들짝 놀라서 뛰어나오는 승기의 얼굴을 보는 순간, 가슴이 뭉클해져서 나는 잠시 고개를 돌렸다. 짙게 발린 슬픔이 검댕이처럼 묻어 나오는 승기의 얼굴을 보며 무슨 말을 해줄 것인가. "나는 승기보다 더욱 어려운 가정에서 자랐단다. 물론 아버지도 일찍 돌아가셨고... 그래도 나는 좌절하지 않고 꿋꿋이 자랐지. 그래서 이처럼 학교 선생이 될 수 있었단다." 독백처럼 말하고 돌아서는 내 발길을 승기의 갸냘픈 목소리가 붙잡았다. "선생님 드리려고 고구마 삶았어요." 삶고 또 삶아서 군고구마가 된 듯한 고구마를 승기와 함께 나눠 먹으며 나는 목이 메어 오는 것을 간신히 참았다. (전남 완도군 금일초등학교 교사) 동전 100원 - 정순덕 직장 생활 두 달 하고 27일. 얼떨떨하고 당황스러움에 제자리를 찾지 못하고 어리둥절해 했던 나에게도 이제 조금은 사회인의 냄새가 밴 것 같다. 이곳 국립 나병원은 병든 할머니 할아버지들을 위해 건립된 양지회관이다. 여기 계신 할머니 할아버지들은 몸 어디건 불구가 아닌 사람은 거의 없다. 대부분 손마디가 없거나 불구가 심하고, 고령으로 눈이 어두워 활동하시기에 어려움이 많다. 손이 없어 팔목에 끈을 묶어 숟가락을 끼고 밥 먹는 할머니들의 모습을 볼 때면 눈을 찌푸리는 것도 잠시. 내 마음은 쓸쓸하고 아프기만 하다. 나는 열심히 시간이 나는 대로 할머니들의 손톱 발톱을 깎아 드리고 시집살이 예행 연습삼아 바느질도 도와 드린다. 지금 머리 자르는 내 솜씨는 웬만한 미용사 수준은 될 것 같다. 나의 조그만 정성 하나에 고마워하시는 할머니들을 보면 나는 마치 사회사업가라도 된 것처럼 한 순간 뿌듯한 착각에 빠진다. 어느 날 점심 식사 시간이 돼서 식사 준비를 도와 주고 있는데 한 할머니가 날 가만히 불렀다. 할머니는 곧 내 손을 꼭 잡으며 차가운 촉감의 물건을 쥐어 주셨다. 펴보니 오래 되어서 약간 녹이 슨 100원짜리 동전이었다. 나는 너무 당황하고 놀라워서 얼굴이 빨개졌다. 코끝이 찡하며 눈앞의 물체가 흐려졌다. "할머니 이러지 마세요." 그러자 할머니는 자기를 무시하는 거냐며 화를 내셨다. "맛있는 거 사 먹어. 자네 간호가 고마워서 주는 거야." 난 멍하니 손바닥의 동전을 보며 병실 문을 나왔다. 뭐라고 표현할 수 없을 만큼 기분이 이상했다. 사회 생활 석 달 만에 경험하는 100원의 정성이 눈물겹도록 고마웠다. (소록도 국립 나병원 간호사)
Board 삶 속 글 2022.05.31 風文 R 517
맹모단기(孟母斷機) / 맹자의 어머니가 아들이 학업을 중단하고 돌아왔을 때, 짜던 베를 칼로 잘라서 훈계한 고사로 '어머니의 엄격한 자녀 교육'을 이름. 《出典》列女傳 蒙求 孟子는 孔子의 손자인 子思의 제자가 되어 가르침을 받았다고 하거니와, 이보다 앞서 소년시절에 유학에 나가 있던 孟子가 어느날 갑자기 집으로 돌아왔다. 그때 어머니는 베를 짜고 있다가 孟子에게 물었다. "네 공부는 어느 정도 나아갔느냐?" "아직 변한 것이 없습니다." 그러자 어머니는 짜고 있던 베를 옆에 있던 칼로 끊어버렸다. 孟子가 섬뾵하여 물었다. "어머니, 그 베는 왜 끊어버리시나이까?" 그러자 어머니는 이렇게 대답했다. "네가 학문을 그만둔다는 것은, 내가 짜던 베를 끊어버리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君子란 모름지기 학문을 배워 이름을 날리고, 모르는 것은 물어서 앎을 넓혀야 하느니라. 그러므로 평소에 마음과 몸을 편안히 하고, 세상에 나가서도 위험을 저지르지 않는다. 지금 너는 학문을 그만두었다. 너는 다른 사람의 심부름꾼으로 뛰어다녀야 하고, 재앙을 피할 길이 없을 것이다. 그러니 생계를 위하여 베를 짜다가 중간에 그만두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느냐? 차라리 그 夫子에게 옷은 해 입힐지라도, 오래도록 양식이 부족하지 않겠느냐? 여자가 그 생계의 방편인 베짜기를 그만두고, 남자가 덕을 닦는 것에 멀어지면, 도둑이 되지 않는다면 심부름꾼이 될 뿐이다." 孟子가 두려워하여 아침 저녁으로 쉬지 않고서 배움에 힘써, 子思를 스승으로 섬겨, 드디어 천하의 명유(名儒)가 되었다. 이것을 소위 '斷機之敎'라고 일컫는다. 【동의어】단기지계(斷機之戒), 단기계(斷機戒) 【유사어】맹모삼천지교(孟母三遷之敎)
Board 고사성어 2022.05.31 風文 R 940
올림픽 담론 ‘담론’이라 하는 말은 무언가에 대해 말하고, 설명하고, 주장하는 ‘이야기’의 뼈대와 흐름, 그리고 태도를 망라하는 개념이다. 사용된 말을 통해 그 사람의 가치관과 지향하는 바, 또 판단의 기준 등을 분석해 내기도 한다. 정치 담론, 종교 담론, 성 담론 등으로 그 범위와 주제를 나누기도 한다. 쉬운 예로 올림픽 담론을 들 수 있다. 메달 중심으로 본다든지, 국력을 비교한다든지, 개별 출전 선수들을 중심으로 본다든지 하는 것 말이다. 종종 가슴 찡한 미담, 속물적인 성공담도 있지만 가장 흔한 것이 아마도 메달 타령일 것이다. 그러나 그 뒤에 조용히 소곤거리는 이야기로는 메달보다 군 면제 이야기가 더 큰 관심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1980년 미국과 친미 국가들이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개입을 규탄하며 모스크바 올림픽에 불참했고, 소련과 그 동맹들은 1984년 엘에이(LA) 올림픽을 거부했다. 당시 스포츠 강국들의 신문에서는 계속 파행하는 올림픽의 기록이 과연 ‘인간의 최고의 기록’이 될 수 있는지 논쟁을 벌였다. 반면에 당시 한국 언론에는 절호의 기회에 메달을 더 딸 수 있게 됐다고 환호하는 기사가 실렸다. 수준 차이를 보여주는 무척 대조적인 두 가지 담론이었다. 서울 올림픽의 성공은 우리 노력 때문만이 아니라 이러한 세계적 반성의 결과이기도 하다. 평창 올림픽은 이러한 올림픽 담론의 수준을 한 단계 더 끌어올릴 수 있는 계기이기도 하다. 메달 빛깔이나 개수, 그리고 군 면제 같은 담론이 아닌, 더 많은 참여, 평화 지향, 긴장 완화 등 올림픽이 추구하는 어떠한 가치보다 더 귀한 담론들이 쏟아져 나올 수 있는 기회이다. 이 귀한 이야기 소재들을 정치적으로 오염시키며 판을 깨려는 막말 잔치는 집어치우자. 그것이 올림픽의 수준을 또 한 단계 끌어올리는 길이다. 김하수 / 한겨레말글연구소 연구위원·전 연세대 교수 ……………………………………………………………………………………………………………… 분단의 어휘 말은 사회 변화의 영향을 예민하게 받는다. 임시정부 시절에 김구 선생은 국무위원회 주석이었다. 그러나 분단 이후 이 ‘주석’이라는 직책과 명칭은 점점 낯설어졌고, 어느샌가 홀연히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언어는 어찌 보면 매우 보수적인 것 같기도 하지만 또 어떤 면에서는 무척 눈치가 빠른 편이다. 오래간만에 남과 북이 만나 회의도 하고, 식사도 같이 하고, 운동경기도 같이 하다 보니 익숙하지 않은 단어들이 종종 눈에 띈다. 그동안 ‘한국과 북한’ 하는 식의 표현을 자주 했는데, 양측의 당국자들이 만나 이야기할 때는 갑자기 ‘남측’과 ‘북측’이라는 말을 하고 서로 상대방을 ‘귀측’이라고 한다. 우리가 ‘남조선’이라는 말을 달가워하지 않듯이 북측에서는 ‘북한’이라는 말을 내키지 않아 한다. 남과 북의 순서도 다르다. 남측은 양쪽을 일컬을 때 ‘남북’이라는 말을 쓰지만 북측은 ‘북과 남’ 혹은 ‘북남’이라고도 한다. 사실상 두 국가이면서 서로 국가라고 부르는 일을 저어한다. 중국 대륙과 대만이 서로의 문제를 ‘양안 문제’라고 부르는 심정과 비슷하다. 그러다 보니 이번처럼 남에서 북으로 가는 일을 ‘방북’, 북에서 남으로 오는 것을 ‘방남’이라는 좀 어색한 표현을 쓰게 된다. 뿐만 아니라 도라산에서 육로로 경계선을 넘을 때는 국경이 아닌 그저 그런 ‘경계선’을 넘는다는 듯이 ‘입경’이라는 말을 쓴다. ‘입국’이니 ‘출국’이니 하는 말이 껄끄럽기 때문이다. 사실상 분단되었으면서도 감성적으로는 그것을 ‘사실’로 확인하는 말을 불편해하는 것이다. 더구나 남과 북의 공동 행사라는 것이 늘 하다 말다 하고 있으니 안정적인 어휘와 표현이 형성될 틈이 없다. 작은 행사 하나라도 제도화하고 정규화하면 어떨까? 우리의 언어를 너무 오랫동안 눈치만 보게 하지 말자. 김하수 / 한글연구소 연구위원·전 연세대 교수